미 연방 상·하원 의원 28명은 지난 17일(현지시간)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 16인 중 하나로 선정된 고(故) 김영옥(1919∼2005) 미 육군 대령에게 미국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서훈을 건의했다.
이들 의원은 김영옥 대령이 미국의 건국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지키고 확산하는 데 일생을 바친 공로를 기려야 한다고 주장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옥은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나 미 육군 장교로 2차대전에 참전, 전설적 전쟁영웅이 됐다. 그는 미국 무공훈장 10회 수상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도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훈장을 받았다. 2003년 태극무공훈장도 받았다.
▲ 군입대 전 김영옥.ⓒ美 브로큰 국립교육센터
◇김영옥, 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 해방의 '수훈갑'‥이탈리아 최고 훈장 받아
2차 대전에 참전하고 영웅적 활약을 하고 예편했으나 한국전쟁이 터지자 재 입대했고, 한국전쟁 당시 한국어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해 통역장교가 되는 대신 보병부대로 자원해 능력을 입증한 후 미국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전투대대장이 된다.
미군은 이탈리아에서 총공격 작전 펼쳐지기전 김영옥이 잡아온 포로를 심문해 독일 탱크 사단 위치를 확인한 연합군은 '버팔로 작전'으로 명명된 총 공격을 개시해 포위망을 뚫고 6월 4일 로마를 해방시킨다.
결국, 김영옥의 작전 성공으로 이탈리아 전선의 판도로 바꿔 놓았다. 전쟁이 끝나고 이탈리아 정부는 최고 무공훈장인 십자무공훈장을 김영옥 대령에게 수여하게 된다.
▲ 은성무공훈장 수여받는 당시 중위 김영옥.ⓒ美 남캘리포니아주립대
◇6.25 소식에 재입대한 김영옥, 구국위한 최전선 선택
김영옥은 6.25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해 중부전선 60km 북상의 주역이 됐으며, 약 500명의 전쟁고아를 돌봤다. 1960년대 한국군 군사고문 시절에는 한국방어계획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한국군 최초의 미사일부대를 창설했다.
김영옥은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6․25전쟁에서도 영웅의 면모를 이어갔다. 오늘날 휴전선이 중부전선에서 북쪽에 위치한 것도 김영옥의 승리를 거둔 전투 때문이다. 수안산 전투로 불리는 전장에서 김영옥은 우회 전술통해 중부 전선을 북으로 60km나 밀고 올라 가는 승리를 거둔다.
잠시 한국을 떠났었던 김영옥 대령은 1963년 군사고문으로 우리나라를 다시 찾았다. 한국에서 다시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한국군 최초의 미사일 부대를 창설하며 한국군 방어 계획의 현대화를 가져왔다.
▲ 1961년 촬영된 대령 김영옥.ⓒ美 브로큰 국립교육센터
◇영웅이란 질문에 해답을 던져준 김영옥‥한미 양국 그의 리더십 기려
김영옥 대령은 6·25전쟁에서 입은 중상의 후유증으로 큰 수술만 약 40차례 받았고, 1972년 대령으로 예편한 뒤 미국 정‧재계의 영입 유혹을 물리치고 가정폭력피해여성·장애인 ·노인·청소년·입양아·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평생을 바치다 2005년 세상을 떠났다.
이같은 전쟁영웅을기리기 위해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그의 리더십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2011년부터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에 그의 이야기가 수록돼 모든 학생들이 배우기 시작했으며, 육‧해·공군 모든 신임장교들에게 그의 리더십을 가르치고 있다.
▲ 생전의 김영옥 대령 모습.ⓒ방송화면 캡쳐
미국에서는 ‘msn.com'이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명 가운데 한 명으로 김영옥 대령을 선정했으며(2011년),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리버사이드)이 한국정부 및 재미동포사회와 협력해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를 설립했고(2010년), 로스앤젤레스에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한인의 이름을 딴 중학교인 ‘김영옥중학교’가 설립됐다(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