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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사상의 거처
서학(천주교)에서 동학, 영학당, 보천교까지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 땅, 민중의 살림살이를 살피다.
19세기 서세동점의 격변기에서 피어난 민중의 염원을 본다.
서학과 동학의 이상향이 뿌리내린 고창,
고창의 서학(천주교), 동학, 영학계(영국 성공회), 보천교에서
19세기 사상의 거처를 찾는다.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민초에게 ‘유토피아’는 어떻게 오는가?
19세기로 특징 지워지는 우리의 근대 시기 가장 폭발력이 큰 개념은, ‘유토피아’였다. 19세기를 관통해 20세기 초 보천교까지 관통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렇듯 동서양의 사상이 각축을 벌인 그 중요한 개념이 고창 땅에서 폭발하듯 발화했다. ‘서학과 동학의 이상향이 뿌리내린 고창’, 1801년 개갑장터에서 순교한 최여겸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 끝은 1899년 영학당 사건(무술ㆍ기해 농민봉기)이다. 그 사이 100년을 동학이라는 열쇳말을 고이 묻어둔 고창의 마을이야기(마을사)가 채우고 있다. 더불어 이야기는 20세기 초 보천교까지 이어진다.
동학을 둘러싸고 이 땅에 번졌던 ‘평등사상’의 근원을 찾아
동학의 평등사상은 어디에서 근원하는가. 고창이라는 지리, 문화, 역사적, 계급적 특수성에서 그 근원을 찾아간다. 1801년 신유박해에 순교한 최여겸이라는 인물로부터다. 그 공간이 바로 고창의 무장, 개갑, 구수 등이다. 상업과 어업이 발달한 포구와 장터는 정보와 물산이 교차하는 근대의 길목이었다. 이렇게 서학, 천주교의 평등개념이 스며있었던 그 동일한 공간적 바탕 위에서, 100년 뒤 1894년 동학의 기치가 오른 것이다. 동학 전쟁의 실패와 수성군의 활동, 이어 한 세기를 마감하는 1899년, 영학계 사건이 일어난다. 유토피아를 향한 민중의 염원이 한 세기 마지막에서 다시 좌절 한 것이다. 20세기 초 실낱같던 그 염원은, 보천교에서 또다시 들불처럼 피어오른다.
동학농민전쟁과 영학계(무술 기해 농민봉기) 실패 이후 새로운 시작, 그것은 새로운 민중운동인 종교였다. 그 중심에 차월곡과 보천교가 있었다. 그러나 또 다시 일제와 조선 지식인에 의해 이마저도 꺾이고 만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 많은 양민이 학살당한 땅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1980년대 이르러 ‘삼양사의 소작답싸움’까지다. 한국 20세기 격동, 특히 고창의 격동은 이미 19세기 사상의 거처에서 비롯된 것일 터다. 잠깐 숨고를 틈도 없이 이어온 ‘사상의 역동’, 그 역동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이 땅을 살아낸 ‘남루하고 가진 것 없는’ 그냥 사람들이었다.
동학농민군의 진격로 상에 남아있는 당시의 흔적, 이야기
『19세기 사상의 거처』는 고창의 동학농민군 관련 마을사가 포함되어 있다. 마을사로 찾아본 고창의 동학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잊었던 ‘민중의 유토피아를 향한 집념’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근원으로 회귀’ 격변기를 살아내면서 민중이 꿈꾸었던 ‘이상세계’에 대한 고찰, 19세기 그 100년의 선상에는 서학(천주교)과 동학, 영학계(영국 성공회)와 보천교가 늘어서 있다. 이 통사론적 시도를 통해 그 동안 고창의 동학, 대한민국의 동학 연구가 거둔 성과에 지역사적인 접근을 보태는 것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동학과 보천교의 사승관계 뿐만 아니라 동학군에 대항해 조직된 사족들의 자위조직, 고창(흥덕)의 수성군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제시되어 있다. 그동안 접근이 쉽지 않았던 민보군, 수성군에 대한 일체의 자료를 토대로 동학혁명과의 관계, 역할, 참여자들에 대해 자세히 제시했다. 이 자료는 앞으로 동학을 연구해온 학계 의 다양한 의견과 길항하며 고창 동학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다.
근대 민중종교운동에서 마을사까지, 19세기 사상의 거처를 살피다
제1장 ‘19세기 민중의 변혁운동과 서학’이다.
이 장에서는 동학과 보천교의 역사를 천착하면서 왜 노령 이북인 정읍과 고창 등지에서 동학과 보천교의 운동이 거세게 일었는지, 그리고 보천교의 탄갈자(彈竭者) 중에는 왜 영남 사람이 많으며, 이들은 왜 유교적 규범과 고전에 능통했는데도 불구하고 보천교를 추종했는지에 대한 답을 내리고 있다. 그것은 곡창지 호남에서만큼은 수령의 탐학이 남달라 수령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도 컸기 때문이다. 호남은 영남과는 달리 서민문화인 가무나 숭신 행위, 음양 잡술 등 영남에서는 금기시 하는 음사(陰邪)가 허용되었다. 동학은 영남에서 발생하였으나 안착해 혁명운동으로까지 발전한 곳은 호남이었다. 노령 이남과는 달리 이북은 판소리 가락이 유행하고 미륵 신앙이 성행하였으며, 진묵의 설화가 넘쳐났다. 이러한 분위기는 손화중이나 김개남 같은 낭만적 혁명가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일부나 강증산 같은 종교적 천재를 잉태하였다. 보천교는 동학과 같이 인의예지신 중심의 대동지치를 실현하려는 복고주의 사상에 그 뿌리를 두었다. 보천교를 추종하는 이들 대부분은 개벽이나 후천선경 사상에 더 심취해 있었다. 보천교운동이 왕성하던 1920년대에 정읍 대흥리로 모여든 탄갈자 대부분은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을 추구하다가 좌절을 맛 본 평민층이었다. 탄갈자들은 유교적 소양에 밝았고, 심지어 유교 경전에 달통한 이들도 많았다.
동학농민혁명이 왜 무장(공음 구수)에서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는 신유박해의 평등사상에서 시작하고 있다. 1801년 무장 개갑에서의 천주교인 마티아의 순교(신유박해)가 가지는 하나님 아래 평등이라는 사상을 지리적 고찰을 통해 인내천의 동학까지 연결하고 있다. 제도화된 종교가 전교사업을 수행하는 목적은 활동공간을 확대하는 일이다. 이는 새로운 종교영토의 확보와 그 안에 거주하는 주민의 의식구조를 개조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그 종교가 가지는 사상과 철학도 공간적으로 함께 확산되기 때문이다. 개갑시의 번창은 당시 최고의 정보를 가진 상선들과 상인들이 수시로 드나들게 된다. 이곳은 일찍이 다양한 국내외의 정세들을 듣거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개갑장터의 성시로 인해 무장의 민중들은 호남의 어떠한 지역보다도 이른 시기에 천주교의 평등사상을 받아들여 고창지역과 서남해안 최초의 순교지가 되기도 한다. 이들은 양반과 상민이 차별이 없는 평등세상을 천주교를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다. 힘없고 서러운 무장 사람들은 다시금 찾아올 미륵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이미 무장현은 어느 지역보다도 빠르게 동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사상적 토대가 천주교의 평등사상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전봉준 장군의 선조는 어떻게 고창 당촌에 입향하게 되었는지 족보를 통해 밝히고 있다. 전봉준가의 선조들의 묘소는 남원·순창·임실 등에 분포되어 있다. 전봉준의 조부인 석풍 때 묘소가 고창에 있다. 그런데 임술보(1862년) 이후에 발간된 족보에는 모두 석풍의 묘소가 고부(남부면)로 기록되어 있다. 전봉준가가 족보상에서 고창파 또는 고부파로 기재되면서, 전봉준의 태생지도 그에 따라서 고창과 고부 태생설이 제기되어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전봉준의 부친 전기영이 임실 쪽에서 고창으로 이주해왔다. 천안전씨 족보 임술보(1862년)에서는 전봉준의 이름은 철로이며 을묘생(1855년)이다. 1931년에 발행된 천안전씨 족보 신미보에는 아명인 ‘철로’에서 ‘봉준’으로 또는 ‘병호’로 개명하였고, 자는 ‘명숙’이라고 하였다. 천안전씨 족보에서는 전봉준 장군의 거사를 대단히 의롭게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렇기에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신미보(1931년)에서도 이미 장군에 대한 인적사항과 그 행적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제2장은 ‘동학농민혁명의 좌절과 수성군’,
‘동학의 후예인 영학계와 보천교’를 다루고 있다.
갑오년(1894) 5월 8일 동학군은 전주화약 이후 전주성에서 철수한 뒤, 일부 는 무기를 반납하고 고향에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일부는 무기를 소지한 채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 떼를 지어 다니며 관이나 민가를 침범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갑오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수성군에 대한 기록이 더 많이 발견된다. 이때에는 ‘수성군’ 외에 ‘민보군’, ‘민병’, ‘민포군’ 등 다양하게 불렸다. 수성군은 취의통문(聚議通文)을 작성하여 비밀리에 흥덕·고창의 선비들에게 회람을 시켰다. 이들은 동학도의 기병을 난으로 규정하고, 동학농민군을 반역의 무리로 인식하였기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는 명분과 사명감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흥덕의 사인 강영중(姜泳重)이 주도하였다.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후 수성청 조직은 일단 해산되었으나, 광무3년(1899)에 일어난 고부영학계 농민군의 고창성 공격 때에 복원되어 활동을 재기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일어난 무술·기해 농민봉기는 세칭 ‘영학당 사건’ 또는 ‘영학당의 난’이라고도 한다. 무술농민봉기는 1898년 12월에 흥덕에서 일어난 일명 흥덕농민봉기를 말하며, 기해농민봉기는 1899년 5월에 정읍에서 일어난 일명 정읍농민봉기를 말한다. 19세기 후반 흥덕의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흥덕현감 윤석진은 동학의 접주 고영숙을 흥성동헌 옆 형청에 가두어버렸다. 이에 차치구(車致九, 보천교 교주 차월곡의 생부)는 수백 명의 농민군 정예부대를 이끌고 흥덕을 공격해 윤석진을 사로잡고 고영숙을 구출하였다. 뒤에 윤석진은 차치구를 잡아 죽인다. 차월곡이 흥덕형청에 있는 부친을 엎어다가 장사를 지낸다. 흥덕은 차월곡과 그의 부친 차치구의 악연이 서린 곳이다. 영학은 영국의 성공회 조직을 이용한 동학의 새로운 운동 조직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직의 실체는 계(契)의 형태였다. 영학당 가운데 가장 먼저 봉기한 조직은 흥덕의 영학당이다. 봉기가 끝난 후에 영학당 잔당들은 경상도와 충청도로 흩어져 부분적인 활동을 지속하였지만, 대부분은 활빈당 투쟁이나 그 이후의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차월곡은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동학의 접주 차치구의 장남으로, 일제 강점기에 보천교운동을 이끈 당대 주목받은 인물이다. 월곡은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490번지 일명 연기동에서 출생하였다. 차치구는 정읍 대흥리에서 태어난 것이다. 차치구는 배움이 없고 가난했지만 기골은 장대했다. 양반들의 횡포에 맞서 완력을 사용하기도 한 당대 영웅이었다. 장성에서 완력을 행사를 한 차치구는 신변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외부와 차단된 연기동에 1879년 9월경 들어갔다. 이때 이미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인 차월곡을 낳았다. 부친인 차치구가 동학농민전쟁 당시 정읍의 장령이었으며, 월곡도 말미에 농민전쟁에 참가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을 잇는 무술·기해 농민봉기(일명 영학당의 난)에도 월곡은 참여하였으며, 이어 진보회와 일진회의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월곡은 1908년 강증산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동학운동에 진력을 다하였다. 차월곡은 1908년에 만난 증산을 정읍 대흥리의 자택으로 모셨다. 증산에게 월곡은 이종누이 고판례를 소개하였다. 증산의 천지공사와 예언, 그리고 기행이적 등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민중은 대흥리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제3장은 고창군 곳곳에 남아 있는 ‘동학농민군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동학의 씨앗을 품다, 전봉준 생가 당촌마을’/ ‘동학농민군 사전모의 장소, 용수마을’/ ‘손화중의 꿈이 피다, 성송면 괴치리’/ ‘마애불의 비결서로 민심을 선점하라, 삼인마’을/ ‘동학농민군의 아픔이 서린, 용산 등룡골’/ ‘대밭을 헐어 농민군의 창과 깃대를, 성남리 영취정’/ ‘하늘을 깨운 기개로 입성하다, 무장읍성과 무장’/ ‘동학농민군 사신원을 지나 인천강을 넘다’/ ‘동학농민군 수만명 굴치를 넘어’/ ‘고부를 향한 마지막 교두보 흥덕읍성’/ ‘동학농민군 숙영지 사포와 후포’/ ‘고창읍성과 동학농민군, 무술기해 농민봉기’/ ‘신월 경방의 고창오씨와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군의 최후를 기억하는, 하거리당산 숲쟁이’의 마을사와 이야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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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릴적 할머니께 알음알음 들어 온 천도교, 동학,빠지산이야기 등등
중구난방 들어 온 지난 추억같은 아득~한 이야기들이
이 책을 통해 역사의현실로 잘 정리 될수 있길 바랍니다
고창에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새롭게 기록이 되었네요^^*
우리의 소중한 가까운 역사를 쉽게 볼 수 있도록 쓴 이런 자료를 구 할 수 있는 방법도 알려 주세요.
19세기 사상의거처 도서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역시 문화의 자존심 고창입니다.
개갑장터...는
공음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 들었던 기억들이 어렴풋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