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5.06
03 - 14 (No. 219)
금년 1월 2일 브라질 대통령에 취임한 룰라의 최근 경제개혁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좌파 대통령으로서 빈부격차 해소와 고용창출에 최대 역점을 두고 출범한 룰라 정권은 처음 ‘룰라 쇼크’로 불릴 정도로 그 전도가 불투명한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취임 이후 룰라의 행보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룰라는 자신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장친화적인 개혁 정책을 차분하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공무원 연금개혁, 세제개혁, 선심성 예산편성을 자제하고 긴축 재정을 유지하는 등, 인기영합주의 정책을 버리고 시장경제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경제개혁의 틀을 잡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불과 7개월 전까지만 해도 채무불이행 위기에 몰렸던 브라질 경제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고 있으며 수출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정권 출범 초기 우려의 눈길을 보냈던 월가의 투자자들도 브라질 채권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바이 브라질(buy Brazil)’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룰라 쇼크’가 ‘룰라 효과’로 바뀌고 있습니다.
룰라가 후보 시절의 공약을 대부분 접고 시장경제적 정책을 펴는 데 따른 비난과 반발도 많다는 보도를 보면, 정책의 전환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비단 룰라뿐만 아니라 유권자들의 표를 근간으로 존립하는 모든 정치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항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넘어 진정으로 브라질 국민들의 삶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과감하게 정책을 전환할 수 있는 룰라의 지적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룰라보다 약 2달 반 정도 늦게 한국의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후보 시절의 경제 공약은 룰라의 그것과 유사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분배정책을 앞세운 빈부격차 해소,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을 위한 재벌개혁,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장개혁 등으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 취임 후의 경제 관련 발언 내용도 대체로 그러한 정책 기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그 목적과 수단이 불분명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만큼 시장을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게 하는 진원지가 되고 있습니다. 굳이 어떤 정책이 좌파적이므로 틀렸다거나 우파적이므로 옳다고 예단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 기본 개념을 잘 들여다보면 스스로 명백해지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만 짚어보고자 합니다. 우선, 현 정부 출범 당시와는 달리 요즈음은 강력한 분배우선 정책을 실시하겠다는 말은 자제되고 있는 듯 합니다만, 성장과 분배는 동전의 앞뒷면이라는 측면에서 처음부터 잘못된 개념입니다. 공정한 경쟁질서가 강조되고 있지만 어떠한 민간 권력도 장기적으로 시장에서의 경쟁 질서를 왜곡할 수는 없습니다. 정부에 의한 독점권 부여 등 정부 간섭이 없을 때, 모든 기존 기업은 상호, 그리고 잠재적 진입자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쟁 질서를 해치고 왜곡시키는 것은 오히려 정부의 개입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공익이나 약자를 위한다는 명분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시행되는 정부 규제입니다. 시장에서 정부 권력이 없어지거나 최소한으로 축소되고 나면 남는 것은 경쟁뿐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 또는 몇 개의 기업이 높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면, 이는 낮은 비용으로 양질의 상품을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이른바 효율성의 결과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시장 점유율이 몇 퍼센트이기 때문에 독과점적 지위를 남용할 수 있다는 논리는 이미 그 설득력을 잃은 진부한 것입니다.
더구나 시장 개혁이라는 말은 그 개념적인 측면에서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정부 권력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시장은 그 자체의 결함을 꾸준히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마찰과 거래비용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시장을 ‘시장의 실패’라는 이름 하에 인위적으로 교정하려는 정부의 직접 개입은 시장의 자생적 진화를 방해함은 물론, 필히 이해 당사자 중 어느 한 편의 이익을 보호해 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는 두산중공업 파업 건이나 철도청 파업 건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어렵게 달성했던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나 노사 문제의 ‘자율 해결’ 원칙은 다시 원점으로 회귀했습니다.
현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3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지만, 이제 현 정부의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룰라의 정책 전환을 본받아야 할 만큼 우리의 지식 체계가 일천하거나 미숙한 단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브라질에 한국을 비추어 보아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은 현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는 강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말 사회주의 국가들의 퇴장과 최근의 일부 남미 국가들의 쇠퇴를 되새긴다면 굳이 새로운 교훈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한국 경제는 큰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자칫 장기 불황에 빠질 우려의 목소리도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한 나라의 국내총생산을 구성하는 수요 측면의 요소는 민간의 소비, 기업의 투자, 정부지출, 그리고 수출에서 수입을 제외한 순 수출입니다. 경기 침체 시에 흔히 거론되는 정책은 수요를 증대시키는 방안입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민간 소비를 증대시킬 수 있는 별다른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이미 지난 정부 때에 소비 진작을 통한 경기 부양으로 그 여력을 상당한 정도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신용 카드 남발(?)에 따른 신용 불량자 양산이 그 하나의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만, 그 주요 요인이 무엇이든 가계 부채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소비 여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재정 역시 지난 정부에서 부실 금융기관 구제를 위한 공적 자금의 대거 투입으로 그 여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에 있습니다. 고작해야 소규모의 추경예산 편성과 재정의 조기집행 정도가 논의되고 있을 뿐입니다. 수출입에서는 상대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품목의 수입을 억제하여 수입은 좀 줄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수출은 우리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세계 경기에 의존하기 때문에 수출 증대책 또한 뾰족한 대책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남은 것은 기업의 투자 활동인데 현 정부 출범 이후 투자 활동 역시 크게 위축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경제의 근간을 형성해 온 이른바 재벌에 대한 강도 높은 개혁 프로그램이 연일 발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벌개혁의 논리적 타당성에 대해서는 논의해야 할 사항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현재로서는 경기를 활성화할 수 있는 단기 대책은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재 한국경제는 북한의 핵 문제로 인한 국가위험(country risk)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북한 핵 문제 역시 우리가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외적인 여건은 그렇다 하더라도 내적으로는 각 경제주체가 유인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특히 기업 활동은 기업가 정신이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야 왕성해질 수 있습니다. 불확실성을 떠맡는 행위로 정의되는 기업가 정신은 위기의 파고를 넘는 자발적이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업 환경은 정부가 굳이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이것저것 간섭하지 않고 그냥 내 버려 둘 때 가장 잘 조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기업 활동을 촉진하기는커녕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키고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업가 정신입니다. 그래서 기업가 정신의 후퇴나 붕괴는 나라 경제 전체의 몰락을 가져옵니다. 국제화 시대에 한국 기업도 더 이상 한국 땅에 버티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기업 환경이 악화되면 한국 기업도 기업하기가 더 나은 외국으로 떠날 것이고 외국 투자자들 역시 한국을 외면하고 떠나갈 것입니다. 최근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청년 실업도 산업 공동화와 노동시장의 경직성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도 마찬가지 원인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기업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자국 기업의 운신의 폭은 좁혀놓고 외국 투자자들은 붙잡겠다는 정책 역시 기형적인 것입니다.
이제 각 경제주체가 자신의 뜻에 따라 선택하고 그에 대해 책임지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만이 한국경제를 다시 성장의 반석 위에 올려놓는 길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유념해야 합니다. 즉,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현 정부의 경제 운용 기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찰(細察)도 중요하지만 21세기에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지를 대관(大觀)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한 때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남는 것은 ‘셀 코리아(sell Korea)’밖에 없습니다. ‘노무현 쇼크’가 아니라 ‘노무현 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첫댓글 같은 좌파라 할지라도(좌파인지 무식인지 돌깡패인지도 잘 구분을 못 하겠지만), 지도자의 자질에 따라 일국의 운명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생긴 것도 룰라 대통령은 무지 잘 생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