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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남대문로에서 거행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구 행렬.
고(故)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2009년 5월 29일 엄수됐다.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은30일 오전1시20분
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정토원에 도착, 반혼제에 이어 정토원 수광전에 안치됐다.
수많은 주민과 추모객이 노 전 대통령의 ‘영원한 귀향(歸鄕)’을 지켜보며 애도했다.
이에 앞서 경복궁 앞뜰에서 영결식이 엄수
됐으며, 이어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노제(路祭)가 열렸다. 시민 수십만명이 노제에 참석해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명복을 빌었다.
이날 오전 11시2분 시작된 영결식에는 이
명박 대통령 부부,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
령 등 정·관계 주요 인사와 주한 외교사절 등 2500명이 참석해 고인의 넋을 기리고 권양숙 여사와 건호(36)씨·정연(34)씨 등 유족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한승수 국무
총리국민장과 한명숙 전 총리가 국민장 공동장의위원장을 맡았다.
앞서 이날 오전 5시쯤 경남 김해 봉하마
을에서 발인제가 열렸다. 발인제는 노 전 대통령의 유해가 빈소 밖으로 운구된 뒤 상주인 아들 건호씨가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약 10분간 진행됐다.
경복궁에서 영결식을 마친 노 전 대통령 운구 행렬은 오후 1시20분쯤 서울광장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부터 서울광장에 모여
들기 시작한 추모 인파가 이 시간에는 수십
만명으로 늘어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노란색 모자와 풍선이 서울광장 일대에 물결을 이뤘다.
노제는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고
인의 영혼을 부르는 초혼(招魂) 의식으
로 시작됐다. 국립창극단의 ‘혼맞이 소리’, 국립무용단의 ‘진혼무’, 안도현·김진경 시인의 조시(弔詩) 낭독, 안숙선 명창의 조창(弔唱), 묵념, 고인의 유언 낭독 등이 이어졌다. 시민들은 진행자 선창에 맞춰 “노무현 대통령 사랑합니다”하고 함께 외쳤다. 노제는 오후 2시쯤 노 전 대통령 육성으로 녹음된 그룹 ‘해바라기’의 노래 ‘사랑으로’를 추모객들이 합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운구 행렬은 이어 서울역을 거쳐 화장장
인 경기도 수원 연화장으로 이동했다.운구 행렬은 당초 노제를 마친 후 서울역까지 약 30분간 걸어서 이동할 계획이었지만, 추모 인파가 몰려 서울광장에서 서울역까지 가
는 데 약 1시간20분이 걸렸다.
이후 서울광장을 메웠던 수십만명의 인파 대부분은 귀가했지만, 일부 추모객(경찰 추산 3만5000여명)은 “노 대통령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운구차량 행렬을 따라 걸
었다.
운구 행렬은 예정보다 3시간 늦은 오후 6시5분쯤 수원 연화장에 도착했다.화장
을 마친 노 전 대통령 유골은 유족들이 마
련한 향나무 유골함에 담겨 오후 8시55분
쯤 봉하마을을 향해 떠났다.
➡️2012년'컨트리 음악의 전설' 덕 왓슨 별세
➡️2010년영원한 자유 찾아간 '이지 라이더', 데니스 호퍼 별세
반항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기치였던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인 '이지 라이더'의 감독이자 배우인 데니스 호퍼(Hopper·사진)가 2010년 5월 29일(현지시각) LA 인근 도시 베니스 자택에서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2009년 10월 전립선암을 진단받고 투병해왔다.
'이지 라이더(1969)'는 두 히피 청년의 여행을 기록한 로드 무비로 호퍼는 주연(빌리)·감독을 맡았고, 공동주연인 피터 폰다(웨트 역)와 시나리오까지 함께 썼다. "자유는 창녀가 됐고, 우리는 그 창녀의 이지 라이더(기둥서방)가 되었다"는 피터 폰다(웨트)의 대사는 이 영화의 지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후일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이 60년대의 타임캡슐로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40만 달러가 채 안 되는 자비로 영화를 찍어 그 100배인 40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호퍼는 그 후 7편의 영화를 더 연출했지만 이전만 못했다.
제임스 딘과 '이유 없는 반항'(1955), '자이언트'(1956)에 출연했던 그는 이후 '지옥의 묵시록'(19 79), '블루 벨벳'(1986) 등 작가주의 영화와 '스피드'(1994) 등 상업 영화에 고르게 출연하며 성격파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실제로도 괴팍한 성격으로 이름났으며, 연초에는 "나를 괴롭혀온 빅토리아(5번째 아내)의 남편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며 이혼 소송을 냈다. 하지만 결국 호퍼는 법적으로 '빅토리아의 남편'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원치 않던 결말이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국민장(國民葬)으로 이명박 대통령과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한승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관계 주요 인사, 주한 외교사절, 권양숙 여사와 노건호ㆍ정연씨를 포함한 유족 등 2천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북궁에서 거행되었다.
➡️2009년 살인 혐의의 누명을 쓰고 20
년 형을 선고 받은 후 9년 째 복역하던 Gospel For Asia(GFA) 소속 선교사 네팔인 만자 타망 특사로 석방.
➡️2009년독일 여성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시신 90년 만에 발견
로자 룩셈부르크(Luxemburg· 1871~1919)는 20세기 초반 공산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폴란드 출신의 여성 사회사상가였다. 독일 공산당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설립한 핵심 인물인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 ‘피에 굶주린 로자’ 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룩셈부르크는 1919년 독일 우파 민병대에 의해 총살됐고, 그의 시신은 베를린 운하 아래로 내던져졌다. 피살 5개월 뒤에 발견된 시신이 독일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진짜 시신은 따로 있다는 주장이 줄곧 제기됐다.
로자 룩셈부르크
그런 그의 시신이 90년 만에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발견됐다고,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2009년 5월 29일 보도했다. 이번에 그녀의 ‘진짜’ 시신을 발견했다는 주장은 독일 베를린의 샤리테병원 법의학과장인 미하엘 초코스(Tsokos)가 제기했다. 초코스는 최근 병원 부속 의학사박물관 지하에서 머리와 손발 없이 몸뚱이만 남은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그는 1919년부터 이 병원에 보관돼 온 이 시신의 육안적인 특징과 시신에 대한 부검 보고서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심을 품었다.
이후 엑스선 단층촬영을 실시한 결과, 이 시신이 소문으로만 떠돌던 룩셈부르크의 시신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생전의 룩셈부르크는 뚜렷한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150cm 단신이었고, 엉덩이뼈 이상으로 인해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달라 평생 절뚝거렸다. 초코스가 발견한 시신은 룩셈부르크의 신체적 특징을 모두 보여주는 데다, 물에 잠겼던 흔적이 있었다. 또 키엘의 한 연구소가 시신에 대해 실시한 탄소연대측정도 룩셈부르크의 사망 시기와 일치했다. 초코스 박사는 “시신에서 DNA를 수집했으며, 유전자 확인을 위해 바르샤바에 사는 것으로 알려진 조카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다” 고 말했다.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0250&cid=59014&categoryId=59014
➡️2007년러시아, 미국 MD(미사일방어
시스템)뚫는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성공
러시아가 29일, 핵탄두 6~10개를 실을 수 있는 사거리 1만㎞의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RS-24의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Ivanov) 제1부총리는 이날 “모스크바 북서쪽 플레세츠크 공군기지에서 RS-24 미사일을 발사, 탑재된 탄두들이 모두 동쪽으로 5500㎞ 떨어진 캄차카 반도의 목표물에 명중했다” 며 “이로써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어떠한 미사일 방어 체제도 극복할 수 있게 됐다” 고 말했다.
이바노프 부총리의 언급은 폴란드·체코에 미사일방어시스템(MD)을 구축하려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이 동유럽 국가들에 MD를 구축하려는 것이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고 유럽의 안보 균형을 해치는 행위’ 라고 비난하며, 유럽 재래식무기감축협정(CFE)의 이행 중단 의사를 밝혀왔다.
러시아는 또 이날 “사거리를 늘린 전술 크루즈(순항) 미사일의 시험발사도 성공했다” 고 밝혔다. 러시아 언론들은 이 크루즈 미사일이 종전의 사거리 300㎞를 500㎞ 이상으로 늘려 고정 혹은 이동목표를 파괴할 수 있는 초음속 이스칸데르(Iskander) 공대지(空對地) 미사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러시아의 이번 미사일 시험발사 성공으로 미국과 러시아의 새로운 군비경쟁 시대가 도래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2007년‘에버랜드 CB(전환사채)’ 항소심도 유죄
➡️2007년소설가 김국태씨 별세
➡️2006년 구본무 LG회장 장녀 연경 결혼
➡️2006년 홍석현 중앙일보 전 회장 장남 정도 결혼
➡️2005년한국인 첫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고(故) 고상돈씨 동상 제막
1977년 9월15일 12시50분 에베레스트 한국원정대(대장 김영도) 고상돈 대원이 셰르파 펨바 노르부와 함께 에베레스트 8848m 정상에서 태극기를 들어 정상 정복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2005년산악인 엄홍길씨가 이끄는 ‘초모랑마 휴먼원정대’, 고(故) 박무택씨 시신 수습 후 안치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 휴먼원정대(대장 엄홍길)가 29일 낮 12시20분(한국시간 오후 1시20분)쯤 고 박무택씨의 시신 수습에 성공했다. 원정대는 그러나 하산 도중 눈보라와 강풍을 만나 시신을 베이스캠프까지 운구하지 못하고 등반로 옆에 돌무덤(케른)을 쌓아 안장했다. 한편 박씨를 구하려다 실종됐던 백준호.장민씨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이날 오전 3시30분쯤 셰르파 9명으로 구성된 선발대는 캠프3(8300m)를 출발해 오전 9시쯤 박씨의 시신이 있는 8750m 현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암벽에 하켄을 박고 등반 루트에서 3m 아래 시신을 향해 내려갔다. 그러나 시신이 팔과 다리가 구부러진 상태에서 절벽에 꽁꽁 얼어붙어 수습에 어려움을 겪었다.
3시간여 만인 정오쯤 시신을 수습해 로프로 묶고 하산했으나 운구 속도가 두 시간에 100m밖에 내려오지 못할 정도로 느린 데다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를 만나 더 이상의 운구를 포기했다. 원정대는 서드 스텝(8700m) 아래에서 엄 대장이 이끄는 후발대와 합류, 세컨드 스텝 바로 위에 돌무덤을 쌓고 박씨의 장례를 치른 뒤 캠프3로 귀환했다.
원정대는 박씨의 시신 수습에 앞서 8450m 부근에서 실종된 백.장씨의 시신을 수색했으나 눈이 두껍게 쌓여 있는 바람에 찾지 못했다. 휴먼원정대는 다음달 3일께 베이스캠프에 도착, 카트만두를 거쳐 6월 중순 귀국할 예정이다.
초모랑마 베이스 캠프=김세준 중앙m&b 기획위원
▶ 엄홍길과 박무택
지난해 5월 에베레스트 등반도중 엄홍길 대장(左)과 이야기하고있던 생전의 박무택 대원. 엄 대장은 이 등반길에 숨졌던 박무택(朴武宅·당시 35세) 장민(당시 26세) 백준호(당시 37세) 씨 등 3명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휴먼 등반'에 나서 29일 박씨의 시신을 찾아냈다.
➡️2005년중견 사진작가 김영갑씨 루게릭병 악화로 별세
“당신이나 나나 지금 이 순간 내일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신의 내일이 올 가능성이 99%라면 내 가능성은 1%뿐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나는 더 치열하게 살아야지.”
‘1%의 사내’ 였던 사진가 김영갑(48). 이제 그의 내일은 0%가 됐다. 제주에 미쳐, 사진에 미쳐 꼬박 20년 동안 렌즈 안에 제주를 담아냈던 그가 29일 오전 9시30분 제주의 바람 속에 잠들었다.
고교 졸업 후, 독학으로 사진을 배운 김씨는 제주 사진에 미쳐있다가 6년 전 온몸이 장작처럼 굳어져버리는 루게릭병(근위축성측삭경화증)에 걸렸다. 돈 없던 시절 주린 배 움켜쥐고 필름값이 없어 ‘눈으로 찍고 마음에 인화했던’ 그는 병을 앓고는 셔터 누를 힘이 없어 마음에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병세는 악화됐지만, 그는 3년 전에도 제주 삼달리 폐교를 빌려 두모악갤러리를 열고 자신이 찍은 제주 사진을 사람들과 나누었다.
혀까지 굳어 1년 전부터는 제자가 떠먹여 주는 미음으로 연명해온 김씨는 1주일 전 병세가 악화돼 거동을 아예 하지 못하다가 이날 아침 의식을 잃고 구급차에 실려가던 중 목숨을 놓았다.
김씨의 타계 소식이 알려지자 갤러리 홈페이지(www.dumoak.co.kr)에는 애도의 물결이 넘쳤다. “가장 제주인다운 사나이, 가장 제주를 사랑한 사나이, 벌써 가버리셨군요. 거기서는 아프지 않고 편히 찍을 수 있겠죠.”(nambee88) “제주도. 너무 아름다운 제 고향. 아마 그곳은 제 고향이 아닌 선생님의 소중한 고향이었나 봅니다.”(김정은)
제주를 떴어도 그는 여전히 그곳 하늘 위에서 제주를 굽어보고 있을 것이다. 빈소는 고인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두모악갤러리에 마련됐다.
➡️사망2004년재미동포 2세 강진씨 미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재미동포 2세 강진(22·미국명 대니얼 강)씨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각) 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졸업했다.
미 육사 개교 이래 한인 동포가 수석 졸업의 영예를 안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어바인 출신의 강씨는 전체 졸업생 950명 가운데 정훈교육과 군사학, 체력 등의 종합 평가에서 최고 점수를 받아 이날 졸업식에서 럼즈펠드 국방장관으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1972년 이민한 강진복(59)·최경주(57)씨 사이에 2남인 강씨는 유니버시티고교에서 레슬링 선수와 배구 선수로 활약했고,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모친 최씨는 4일 “아들은 경희대 모국연수에 참가했고, 한글학교에 다니는 등 한국문화와 전통에도 관심이 많았다”며 “미 육사에서는 한국문화를 알리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고 전했다.
➡️2004년울진 앞바다서 리히터 규모 5.2 지진 발생
➡️2003년힐러리 경 에베레스트 정복 50주년 기념, 네팔서 축제
➡️2003년줄기세포로 심장·간·피부 만드는 ‘마스터 유전자’ 발견
심장·간·피부 등 인체 모든 조직과 장기로 성장 가능한 줄기세포가 특정 장기로 분화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마스터 유전자’를 영국과 일본 과학자들이 발견했다고 워싱턴 포스트 인터넷판이 30일 보도했다. 이에 따라 줄기세포 등을 이용한 심장·간 등 장기의 생산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됐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영국 에든버러 대학 오스틴 스미스 교수팀과 일본 나라 과학기술연구소의 야마나카 신야 연구원은 29일 유전과학 전문지 ‘셀(Cell)’에 생쥐 실험을 통해 마스터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마스터 유전자란 일반 세포가 특정 장기나 조직으로 성장 발전하는 것을 조정·통제하는 일종의 사령탑에 해당하는 것으로, 스미스 교수에 의해 ‘나녹’으로 명명됐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유전자만 통제할 수 있다면 극단적인 경우 줄기세포가 아닌 일반세포로도 장기와 조직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유전학자들이 오랜 시간 동안 찾아 헤매던 ‘생물학의 성배(聖杯)’를 발견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논평했다.
서울아산병원 산부인과 김정훈 교수는 “예를 들어 마스터 유전자의 존재를 모르더라도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우연히 무릎 연골을 얻을 수 있지만 마스터 유전자를 조작하면 무릎 연골이나 심장, 또는 간처럼 의도한 장기만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며 “세계 과학자들이 그토록 기대해 왔던 ‘전율할 만한 과학적 성과’”라고 말했다.
차병원 유전의학연구소 정형민 소장은 “사람에게도 이와 같은 마스터 유전자가 있는지, 있다면 실제로 생쥐에게서와 같은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지 등에 관한 연구가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03년 `보브 호프의 날` 선포
미국의 코미디언 보브 호프가 29일 98세 생일을 맞아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조촐한 생일파티를 했다. LA카운티는 이날을 ‘호프의 날’ 로 공식 지정했다. 그는 가족이 마련한 생일 축하 케이크를 받고 부인 돌로레스와 함께 출연한 영화를 보는 시간을 가졌다.
호프는 지난 1903년 영국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1907년 미국 클리블랜드로 이주한 뒤 80년 인생을 희극계에 바쳤다. 그는 지난해 6월 복통으로 입원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건강한 상태라고 홍보담당자 워드 그랜트는 전했다.
호프는 과거 “생일 케이크보다 케이크에 꽂는 양초 값이 더 비싸면 늙었다는 증거” 라는 농담을 한 적이 있었으나, 이번 생일 케이크와 양초 가격은 알려지지 않았다.
➡️2002년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세계신문협회(WAN) 회장 선임
➡️2002년제프 블라터, FIFA 회장에 재선
➡️2001년‘보브 호프의 날’ 선포
➡️2000년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중국 방문(~31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29일)
➡️2000년이승만 전대통령의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타계
➡️2000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의 통치권이 복원되었다.
➡️2000년 평양교예단 방한
➡️1998년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사임
서울 대교구장 취임 30돌을 맞은 김수환 추기경이 1998년 5월 29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기념미사를 끝으로 서울 대교구장을 사임하게 됐다. 김 추기경은 주교정년 75세였던 1997년부터 교황청에 사의를 표명했으며 로마 교황청은 이번에 이를 받아들였다.
1968년 5월 29일 46살의 젊은 나이로 제12대 서울대교구장이 된 뒤 숱한 현대사의 풍파를 직접 겪으면서 김 추기경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이웃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명동성당을 핍박받는 사람들의 피신처이자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잡게 했다.
그는 특히 10월 유신, 광주 민주화운동 등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국면마다 권력을 비판하는 소신있는 발언으로 어둠 속의 한줄기 빛과 같은 구실을 해 왔다. 김 추기경이 서울 대교구장직을 떠났지만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위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추기경직도 계속 유지하고 있다.
➡️1994년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 사망
➡️1990년옐친, 소련내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
소련 내 급진개혁파의 기수인 보리스 옐친이 1990년 5월 29일 소련 내 최대의 공화국인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옐친은 이날 모스크바에서 실시된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의장(대통령) 선거 3차 투표에서 재적의원 1천60명의 과반수인 5백35표를 획득, 4백67표를 얻은 고르바초프계의 블라소프를 누르고 당선됐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1931년 우랄산맥의 스베르들로프스크 지방의 부트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1985년 직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개혁추진 인물로 발탁돼 모스크바시 당중앙위원회 건설담당자로 기용되었다. 이때부터 모스크바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어 대중 정치가로 부상하면서 1987년 개혁이 미온적이라며 고르바초프를 비판해 당직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그러나1989년 3월 실시된 인민대회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당선돼 고르바초프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했다.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937755&cid=43667&categoryId=43667
➡️1989년나이지리아에 첫 `원화 차관` 제공
➡️1988년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결성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약칭 민변)이 1988년 5월 29일 결성됐다. 시국사건 변론을 도맡아 해온 한승헌 변호사 등 중진변호사 30명과 소장 변호사 16명은 인권상황의 개선과 실질적 민주화 조치에 기여할 수 있는 변론 조사 연구활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민변을 결성했다.
민변의 모체는 정법회로, 정법회는 1985년 인권변호사 30여명이 모여 결성한 비공개단체로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의 변론을 맡아왔다.
➡️1986년유엔(UN) 아프리카 전체에서 1790만인이 기아에 직면하고 있다고 발표
➡️1984년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
➡️1982년산악인 허영호 마카루봉 정상 정복
➡️1982년서독의 축구영웅 베켄바우어 은퇴
➡️1979년산악인 고상돈, 알래스카 매킨리봉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길에 사망
#1. 77년 에베레스트
“내가 차고가는 금시계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이니 내가 죽으면 산악회에 연락, 꼭 시신에서 시계를 찾아다 어머니에게 전해달라. 생명보험에 1천만원이 들어 있으니 사고를 당하면 어머니 생활비로 쓰도록 해달라.” 77년 6월 12일 고상돈(1948-1979, 당시 29세)은 유서를 써서 고종사촌에게 건네고 떠난다.
“뭐? 박상렬이 쓰러졌다고?” 9월 9일 에베레스트 한국등반대 베이스캠프. 김영도대장은 눈앞이 하얘졌다. 1차 공격조로 보냈던 박상렬이 폭설을 만나 정상 100m 앞에서 포기했다는 것이다. 폐활량이 보통 대원의 1.5배인 6000으로, ‘걸어다니는 산소통’이라 불렸던 그였는데...
“2차 공격조엔 고상돈이 나가.” 9월 15일 새벽4시. 김대장이 명령했다. 고상돈. 제주 출신. 청주에서 올라온 과묵한 막내. 당수가 3단.
“대장님,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습니다. 8848m 여기는 정상!” 피가 마르는 듯한 8시간 50분이 지난, 오후 12시 50분. 무전기 속의 고상돈의 목소리.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사진은 귀국후 축하 퍼레이드)
#2. 79년 매킨리
“돌아오시면 좋은 선물이 있을 거예요.” 79년 5월 4일 북미의 최고봉을 등정하기 위해 집을 나선 고상돈은, 아내 이희수(78년 4월15일 결혼)가 건네준 쪽지를 받았다. 그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아내는 임신 3개월이었다. (현재 그의 딸은 이화여대 석사를 마쳤고 이 여사는 대전서 패션사업)
“세 사람이 로프를 연결해서 내려오다가 하나가 실족하는 바람에 다 추락했습니다.” 6월 1일자 신문엔 매킨리봉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박훈규의 말이 실렸다. 6194m 정상을 정복한 뒤 내려오던 고상돈대장과 이일교, 박훈규는 5월 29일 해발 6000m 지점에서 경사 65도의 빙벽에서 750여m 아래로 굴렀다. 고상돈과 이일교는 숨졌다. (현재 박훈규는 고상돈 기념사업회 이사장)
“남편은 오지 않고 깨진 007 가방 하나가 돌아왔습니다. 사진기도 일기장도 없는 빈 가방...” 이희수 여사는 영정사진을 안고 오열했다. 80년 10월17일 제주 한라산 1100도로변에 유해가 안장됐다.
➡️1979년아프간 반군, 정부군과 전투 3개주 점령
➡️1979년카터 미국 대통령 주한미군 철수 동결 결정
➡️1977년카터 미국 대통령 한국피침때 핵무기사용 언명
➡️1974년북한, 만국우편연합(UPU) 가입
➡️1974년남북적십자 7차 실무대표자 회담 판문점서 개최
➡️1972년파리서 고려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경 발견
➡️1968년김수환 주교,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
사랑을 남긴 '바보천사' 김수환 추기경 - 당신이 그립습니다
"작곡·작사자가 좋은 작품을 만들어 예쁜 가수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랑과 기쁨을 심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든다." 독일 노래 번안곡인 ‘저 별은 나의 별’ 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는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의 가요를 배우고 싶어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쉽게 배워지지 않는다."고 크게 웃는다. 기사원문: 1983. 2. 18 [경향신문]
김수환 추기경은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는 한편 신자들과 국민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을 이끈 지도자였다. 기사원문: 2009. 2. 17 [연합뉴스]
김수환 추기경 ‘신의 심부름꾼’으로 87년
신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기까지
8남매의 막내로 1941년 서울동성상고 (현 동성고) 를 나온 김 추기경은 동경상지 대학을 거쳐 51년에 서울성신대, 64년에 독일 뮌스터 대학을 각각 졸업했다. 신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건 언제였을까? "동성상고 때 일반 상업을 배우는 학생과 신부 코스를 밟는 학생으로 나뉘었는데, 나는 후자였습니다. 상지대학에서는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부터 신념이 굳었던 건 아니고, 어머님이 권하고 그걸 내 것으로 만든 건 훨씬 뒤였는데 그동안 갈등도 있었습니다."
기사원문: 1979. 12. 24 [동아일보]
1969년] 김수환 대주교 추기경 임명
교황 바오로 6세는 28일 한국의 스테파노 김수환 대주교(47)를 포함 35명의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 천주교 최고기관인 추기경회의 인원을 총 135명으로 늘렸다. 스테파노 김 대주교의 추기경 임명은 한국 천주교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새로 임명된 추기경에는 아시아의 4명을 비롯, 아프리카 2명, 중남미 5명 등이 포함돼 있는데 이는 교황이 최근의 과감한 천주교 개혁조치와 함께 발전도상의 국가들에 교세를 확장하는 등 새로운 정책을 쓰는 것으로 보인다.
기사원문: 1969. 3. 29 [동아일보]
➡️1968년향토예비군법 법률 제2017호로 전문개정
➡️1966년KAL기, 서울-오사카간 운항시작
➡️1963년동파키스탄 태풍으로 1만여명 사망
➡️1962년파주에서 미군의 한국인 린치사건
➡️1960년이승만 하와이로 망명
➡️1957년이효정 여사 한국 최초로 `나이팅게일` 기장 받음
➡️1956년한국전 참전 16개국 휴전감시위 해체 결의
➡️1953년힐러리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
1953년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 정복에 성공한 힐러리경(왼쪽)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1953년 5월29일 오전11시반, 전인미답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인간이 첫 발을 내디뎠다.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그 주인공.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서로를 연결한 로프를 풀지도 않은 채 감격의 악수를 나누고 힘차게 껴안았다. 산소통을 확인해보니 정상에 머물수 있는 시간은 15분 뿐. 둘은 영국ㆍ네팔ㆍ인도ㆍ유엔의 국기를 피켈에 매달고 사진을 찍은 뒤 힐러리는 십자가를, 텐징은 초코렛과 비스켓 등을 눈에 묻고 하산을 서둘렀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대관식을 사흘 앞두고 전해진 낭보에 영국 전역은 열광과 환호의 물결로 넘쳐났다. 그도 그럴것이 영국은 그동안 대영제국을 자부하면서도 북극은 미국의 피어리에게, 남극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에게 `최초` 자리를 빼앗겨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있었다. 1921년이래 16회나 정복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래서 영국인에게는 더더욱 값진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50년간 1200여명의 사람들이 힐러리의 뒤를 이었다. 에베레스트는 1865년에 높이가 8848m임을 처음 측정한 측량기사 조지 에베레스트에서 딴 이름이지만 2개의 이름을 더 갖고 있다. `세계의 여신`이라는 뜻의 티베트 이름 `초모랑마`와 `하늘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네팔 이름 `사가르마타`가 그것이다.
➡️1952년국제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일본의 가입을 승인
➡️1952년김성수 부통령 국회에 사임서 제출
➡️1946년신문, 정기간행물의 허가제 실시
➡️1942년미국 연극배우 존 배리모어 사망
➡️1917년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출생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1961.1.20 제 35대 미 대통령 취임 연설을 했다
“국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세계의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 것인지 묻지 말고, 우리 모두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케네디 암살의 진상을 둘러 싼 음모론과 갖가지 추측과 논란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로부터 약 한 달 전인 10월 27일 케네디는 애머스트 칼리지에서 로버트 프로스트를 추모하는 연설을 했다. (프로스트는 1963년 1월 29일 사망) 연설에서 케네디는 자신이 꿈꾸는 미국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미국의 위대한 미래를 바라봅니다. 군사력이 도덕적 억제력에 부합하고, 부(富)가 지혜에 부합하고, 권력이 목적에 부합하는 미래입니다. 나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국, 환경의 아름다움을 보호하는 미국,…… 예술적 성취 수준을 꾸준히 높여가고, 국민 모두를 위하여 문화적 기회를 꾸준히 확대하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비단 힘 때문만이 아니라 그 문명 때문에 세계로부터 존경 받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번역가 정영목 번역)
미국 역사상 최연소이자, 20세기에 태어난 최초의 미국 대통령
오늘날에도 널리 회자되곤 하는 존 F. 케네디의 제35대 미 대통령 취임 연설의 유명한 대목이다. 1960년 11월 9일 치러진 선거에서 케네디의 상대 후보는 현직 부통령이던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선거전은 치열했다. 각 당 전당대회를 마친 뒤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도 47% 동률일 정도였다. 투표 다음 날 11월 10일 아침에 승부가 판명됐고, 닉슨이 패배를 인정한 것은 그날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케네디는 총 6천8백83만8천979표 중 11만2천803표의 우세를 보여 전국 지지율에서 0.2%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선거인단에서 303명을 확보하여 닉슨 후보(219명)를 따돌렸다.
(부통령 자격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제외하면) 미국 역사상 최연소(43세)의 대통령이 나온 것이다. 또한 20세기에 태어난 사람으로선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이 됐다. 더불어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선거 과정을 놓고 뒷말이 무성했다. 예컨대 하와이 주는 재개표를 통해 당초의 닉슨 승리에서 케네디 승리로 번복됐고, 닉슨은 억울함을 참으며 2차 재개표를 요구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이를 두고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 앨버트 고어(엘 고어) 후보와 공화당 조지 W. 부시가 맞붙었던 상황과 각 당 처지만 바꾼 모양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왼쪽부터)딸 캐롤라인과 아들 케네디 주니어, 퍼스트레이디 재클린과 함께한 케네디 대통령 일가(1963년)
취임식에서는 로버트 프로스트가 자신의 시 ‘아낌없는 선물’(The Gift Outright)을 낭송했다. ‘우리가 이 땅의 사람이기 전부터 이 땅은 우리에 속했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식민지 상태를 투쟁으로 극복하고 개척의 역사를 일구어 온 미국에 대한 자부이며 결의다. 케네디를 위해 새로 쓴 헌시(獻詩)를 낭송하려 했지만 의사당을 덮은 눈이 햇빛을 반사시켜 읽기 어렵게 되자, 오래 전(1942년)에 썼던 시를 암송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우연찮게 선택한 이 시는 케네디의 연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9남매 가운데 장남은 전사, 둘을 피살, 딸 하나는 사고사, 다른 딸은 정신지체
존 F. 케네디를 이야기하면서 케네디 가문을 빼놓을 수는 없다. 케네디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와 보스턴 시장과 의원을 지낸 존 F. 피츠제럴드의 딸 로즈 피츠제럴드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는 금융, 부동산, 영화산업, 주류업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영국 주재 대사로도 활동했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케네디 대통령을 포함한 아홉 남매는 다음과 같다.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2세(1915-1944. 2차 대전 중 전사),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제35대 미국 대통령), 로즈마리 케네디(1918-2005. 정신지체와 뇌수술 실패로 수용시설에서 지냄), 캐슬린 아그네스 케네디(1920-1948. 프랑스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 유니스 메리 케네디 슈라이버(1921-. 딸 마리아 O. 슈라이버가 영화배우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결혼), 퍼트리셔 케네디(1924-2006), 로버트 프랜시스 케네디(1925-1968. 법무장관, 상원의원.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살당함), 진 앤 케네디(1928-. 클린턴 정부 시절 아일랜드 주재 대사 역임),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1932-. 상원의원).
케네디 아버지가 영국 주재 대사로 일할 때 가족 사진
(왼쪽부터)에드워드,진,로버트,패트릭,유니스,캐슬린,로즈마리,케네디대통령,어머니,아버지
아홉 남매 가운데 둘이 암살당했고 장래가 촉망되던 장남은 스물아홉 살 때 전사했으며, 딸들 가운데 하나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 하나는 수용시설에서 생애를 보냈다. 막내 에드워드도 1969년 여비서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 사고로 여비서가 사망하는 스캔들과 약물중독 등으로 더 큰 정치적 꿈을 펼칠 수 없었다. 존 F. 케네디의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도 1999년 마흔 살에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정치인으로 대성한 존 F. 케네디, 로버트 F. 케네디 그리고 에드워드 M. 케네디가 모두 하버드대를 졸업했다는 점도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이들의 아버지 조지프 P. 케네디도 하버드 출신이며 외조부(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의 장인) 존 F. 피츠제럴드도 하버드 의대에 재학한 적이 있다. 대기근의 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민한 아일랜드 인들 가운데 자수성가하여 막대한 부와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한 집안이, 자녀들을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해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게 하여 마침내 미국 주류 사회의 최고 리더로 만든 셈이다.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지만,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그 동생 로버트 F. 케네디와 에드워드 M. 케네디까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이들마저 없지 않다. 반면 이들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부를 쌓은 과정이 떳떳하지 못했던 것을 꼬집는 시각도 있다. 조지프 케네디는 미국에 금주법(1920-1933)이 시행되고 있을 때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주류를 밀반입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정확한 증거는 없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된 뒤 그의 수입회사는 주류 수입권을 독점하게 되었고, 나중에 회사 주식을 매각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이 수익을 바탕으로 그는 미국 내 주요 사무용 건물을 사들여 역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어머니 로즈, 식사 시간에 뉴욕타임스 기사를 놓고 토론 시키다
하버드대학교 재학시절의 존F.케네디(1938년)
케네디가 형제들이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갖게 된 것은 집안 식탁에서부터 길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로즈는 자식들에게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신문, 잡지에서 토론 주제가 될 만한 중요한 기사를 읽게 하고 식사 시간을 토론의 장으로 이끌었다.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에 토론의 기술은 물론이거니와, 상대 의견을 경청하고 자기 의견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민주 정치의 기본을 몸에 익힌 셈이라 할까. 아버지가 만난 유명 인사들이나 사업에 관한 이야기도 식탁의 단골 메뉴였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자녀들은 넓은 세상에 관한, 아니 미국을 이끌어 가는 주류 사회와 리더십에 관한 식견을 키울 수 있었다.
사실 존 F. 케네디보다는 형 조지프와 동생 로버트가 집안의 기대를 모았다. 이에 비해 존은 말썽도 제법 피웠고 공부에 전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존이 청소년 시절 말썽을 피웠을 때 아버지는 이런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전했다. ‘잔소리꾼이 되기 싫다. 너의 재능은 탁월해. 판단이 정확하고 이해력 깊은 사람이 되어주기를!’ 존이 하버드대를 졸업할 때 아버지는 축전을 보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네가 누구보다 지혜롭다는 것, 그리고 나의 멋진 아들이라는 것. 졸업 축하한다.’ 아낌없는 물적 뒷받침과 함께 절대적인 신뢰와 격려를 보내고 자부심과 자신감을 키워주었던 것이다.
케네디가 발의한 법들, 후계자였던 린든 존슨이 통과시켜
케네디 대통령은 재임 시절 많은 업적을 쌓았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 아닐지. 2년 10개월의 짧은 재임 기간도 한계였겠지만, 국내 정치에서는 의회와의 관계가 그다지 원활하지 못했다. 예컨대 인종, 종교, 국적 등에 따른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포괄적인 민권법안은 케네디가 제안했지만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 린든 존슨의 노력으로 1964년 7월 2일에 통과됐다. 이는 미국 역사상 시민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연방법으로 평가 받는다. 린든 존슨은 이 법안을 통과시켜 케네디를 추모하자고 상하원에 호소했다.
또한 케네디 행정부는 여성지위자문위원회를 통해 여성들의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지위를 진단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했다. 이러한 노력은 1963년 동등 임금법 통과로 이어졌고 민권법에도 많이 반영됐다. 복지 분야에서도 노인의료보험제도 도입과 실시를 의회에 강력히 권고하면서 정부에 사회보장자문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역시 케네디 정부 시절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고, 린든 존슨 정부에 들어와 노인의료보험제도(메디케어)와 저소득층 의료보호제도(메디케이드)를 포함한 사회보장법 개정안이 1965년 통과됐다.
1962년 10월 22일부터 11월 2일에까지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를 해결한 것은 케네디의 위기 극복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 사태는 소련이 핵 탄도 미사일을 미국 코 앞의 쿠바에 배치하려 하자, 미국이 운반선을 막기 위해 군함을 보내면서 벌어진 것이다. 결국 협상으로 막을 내린 이 사건은 소련과 미국 간 핫라인 개설과 부분적인 핵실험금지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돕기 위해 봉사자들을 훈련시키고 파견하는 단체인 '평화봉사단'을 창설한 것도 케네디의 업적이다. 또한 중남미 20여 개 국가들과 ‘진보를 위한 동맹’도 추진했다. 미국이 경제원조와 민간투자를 시행하고 중남미 각국이 경제 및 사회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이 계획은 쿠바혁명의 영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백악관 집무실에서 아들 케네디 주니어와 함께 한 즐거운 시간(1963년)
그러나 케네디는 1961년 4월 17일 약 1천500 명의 반(反)카스트로 쿠바 망명자들이 쿠바를 침공했다가 실패한 피그스 만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이 침공은 미 중앙정보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이루어졌다. 비록 전 정부 하에서 계획되었고 중앙정보부가 잘못된 정보를 보고했다고는 하지만, 이 사건으로 쿠바와의 적대관계가 깊어지고 동서 냉전의 긴장도 높아졌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또한 케네디는 1963년 말까지 남베트남에 1만6천명의 군대를 최초로 파견했다. 그는 베트남전의 부정적 전망을 간파했지만 빠져나올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하고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재임 중 배우 마릴린 먼로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것도 입방아의 대상이 되곤 한다.
댈러스에서 지붕 없는 차를 타고 카 퍼레이드를 하던 중 암살되다
1963년 11월 22일 오후 12시 30분(미국 중부 표준시) 텍사스 주 댈러스. 퍼레이드에 참석해 영부인과 함께 무개차를 타고 가던 케네디가 저격 당했다. 오후 1시 공식 사망 선고. 1시 50분경 용의자로 체포된 인물은 리 하비 오스월드. 그러나 오스월드는 범행을 부인했다. 이틀 뒤 오스월드는 댈러스 경찰서 지하실에서 나오는 순간 나이트클럽 운영자 잭 루비에 의해 사살됐다.
댈러스에서 저격 당하기 직전 카 퍼레이드를 하던 존F.케네디(뒷좌석 왼쪽)
그가 미국에 관해 꾸었던 이러한 꿈은 실현됐는가? 적어도 조지 W. 부시 정부 시절 미국의 현실을 보면 꿈은 멀기만 하다. 부(富)가 지혜에 부합하지 못하여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불황의 원인을 제공했다. 도덕적 억제력이나 국제간 협력보다는 군사력에 바탕을 둔 일방적 대외정책으로 일관했다.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은 할 말이 별로 없다. 그 문명 때문에 존경 받기보다는 그 힘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바로 그렇기에,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케네디를 이야기하고 그의 죽음을 깊이 아쉬워한다. 요컨대 케네디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루지 못한 하나의 위대한 꿈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1914년미국-멕시코 강화조약 체결
1913년 스트라빈스키 발레음악 `봄의제전` 공연
1913년 5월 29일 파리 상젤리제극장은 쇼크에 빠졌다. 목관 파곳 선율로 발레공연이 시작되자, 객석은 술렁댔다. 술렁임은 야유, 발장구, 고함으로 번져갔다. 야수적이며 충동적인 리듬, 긴장과 짜증을 강요하는 불협화음…. 우아한 음악에 익숙했던 대부분 청중은 낯선 음악과 도발적 퍼포먼스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1958년 영국 BBC교향악단을 연습 지휘하는 모습.
디 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이 피에르 몽퇴 지휘, 니진스키 안무로 이날 초연 무대에 올린 작품은 러시아 태생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 스트라빈스키는 이날 광경을 `자서전`에 적었다.
`첫소절이 흐르고 이내 조소가 터졌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연주장은 야유로 술렁댔다. 야유하는 청중을 비난하는 고함소리도 높아가면서 혼란상태에 빠졌다`. 20세기 현대음악 서곡은 이렇게 소란, 혼돈으로 시작한다.
`봄의 제전`은 개벽이었다. 특히 리듬은 혁명이었다. 스트라빈스키에 한 세대 앞섰던 드뷔시같은 인상파 계열도 화성이나 선율의 창의성에 비해 리듬쪽은 둔감했다. 음이 안맞는 악기를 겹친듯한 다조성 불협화음, 목-금관을 키운 관현악의 색채감각과 파괴적 에너지. 제1부 `대지 예찬`, 제2부 `희생물`로 짠 35분짜리 `봄의 제전`은 음악적 구질서를 뒤짚는 반란이었다. `이교 러시아의 풍경`이란 부제 그대로 `봄의 제전`은 이교적 주술, 낯선 자극이었다.
`봄의 제전`은 전통적 조성과 주조를 흔들었다. 다른 조성들을 동시에 사용했다. 르네상스 이래 원근법에 기대던 공간인식을 깨고, 공간을 보는 여러 시점을 하나의 캔버스에 담아낸 피카소 방식과도 닮았다.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은 인상주의까지 포함한 낭만주의적 잔영을 음악사에서 쓸어냈다. 이후 전통 조성마저 해체한 무조음악, 전자음악, 미니멀리즘 등 온갖 전위적 사조가 만개하면서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도 `고전`이 됐다.
➡️1912년손기정 마라톤 선수 출생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운집한 12만 명의 관중들은 곧이어 스타디움으로 들어올 마라톤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림픽의 마지막 공식 경기이며, 그야말로 올림픽의 꽃이라고 할 마라톤 우승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특히 이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더 그랬다. 독일 국민들을 선동하여 광적인 나치즘으로 몰고 가던 히틀러는 아리아 인종이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독일 국민들이 목격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인종주의적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결승점인 올림픽 스타디움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아리아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인도 아니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작고 깡마르고 머리를 바싹 자른, 감정의 거의 드러나지 않는 표정의 마라토너,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한국 대학생(koreanischer Student)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한국인(der Koreaner)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 독일역사박물관(DHM) 독일방송기록보관실(DRA) 자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손기정.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이 1등으로 스타디움으로 들어왔을 때 이를 중계했던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이다. 당시 독일의 중계 아나운서는 그가 일본국적에 손기테이란 묘한 이름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긴 했으나, 그가 Koreaner(한국인)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스타디움 안으로 달려온 손기정은 장내 트랙을 한 바퀴 마저 돌며 마라톤 42.195km의 마지막을 채웠다. 운집한 관객들을 그의 마지막 질주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결승선에 도착하기 전 그의 마지막 100m 기록은 11초였다. 전력을 다해 뛰어가는 동양에서 온 작고 다부진 마라토너. 그의 얼굴엔 표정이 거의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담담하고 묵묵하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2시간 29분 19초 2. 신기록이었다. 당시로써는 인간이 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마의 2시간 30분대를 넘어선 것이다.
세계무대에 알려진 바 없는 동양에서 온 이 작고 과묵한 청년 마라토너는 세계인들뿐만 아니라 아라아인종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했던 나치들마저도 감동하게 했다. 히틀러는 기꺼이 그와 악수하려 하였고 히틀러를 도와 인종주의적인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를 제작하던 독일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3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중에 10분 이상을 손기정의 뛰는 모습으로 채웠다. 그녀는 손기정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으며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다.
가난해서 달리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던 소년
손기정은 1912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소학교 다닐 무렵 해일로 인해 집안이 몰락한 손기정은 어린 시절부터 장사에 나서야 했으며 소학교를 졸업한 뒤 16세 무렵에는 중국 단둥[丹東]의 회사에 취직했다. 이 무렵 손기정은 차비가 없어서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 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난이 그의 체력단련에 도움이 된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달리기뿐만 아니라 운동에 소질을 보였다. 품팔이와 배달일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손기정은 겨울에 얼어붙은 압록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학생들을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스케이트를 살 돈만 있었다면 스케이트 선수를 했지 마라톤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동 소질을 발휘할 길은 경비가 들지 않는 달리기뿐이었다.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 때 안의전(중국 안동과 신의주 간 대항경기)에 출전하여 어른들을 제치고 5,000m에서 우승하였고 1931년 10월에는 전국체육대회(조선 신궁 대회)에 평안북도 대표로 출전하여 5,000m에서 2위를 하였다. 이듬해 1932년 동아일보 주최 하프 마라톤에서 2위를 하면서 이 인연으로 양정고보에 입학하게 된 손기정은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얻고 본격적으로 마라톤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그저 혼자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선수로서 훈련을 받은 손기정의 실력은 나날이 성장하였다. 손기정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13번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고 그 중 10번 우승했다. 그리고 이러한 발군의 실력으로 인해 일본의 올림픽 국가대표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우울한 우승자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시작된 마라톤. 이 경기는 왕복코스를 도는 경기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56명의 선수들이 함께 출발했다. 손기정은 양정고보 선배이던 남승룡과 함께였다. 출발신호와 함께 선수들이 빠져나갔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출발이 다소 늦었다. 손기정은 22번째, 남승룡은 49번째였다. 당시 세계의 주목을 받던 선수는 1932년 LA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였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자바라였다. 자바라의 성급한 독주를 뒤에서 바라보면서 손기정은 자신의 기록과 페이스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사전에 코스를 철저히 답사해 둔 것도 도움이 되었다. 결국, 30km지점 비스마르크 언덕오르막에서 자바라는 뒤로 쳐지고 손기정과 영국의 하퍼가 1,2위를 다투며 앞섰다, 그 뒤를 남승룡이 따랐다. 그리고 31km 지점에서 손기정은 마침내 하퍼를 따돌리고 1위로 나섰다. 작은 러닝슈즈로 인해 발에 통증을 느끼면서 손기정은 남은 레이스를 1등으로 묵묵히 달려 영광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남승룡은 하퍼에 뒤이어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결승선 통과 후 손기정은 만세도 하지 않았고 환호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레이스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운동화를 벗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탈의실로 퇴장했다.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의 금메달리스트가 보일 수 있는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시상대의 손기정과 남승룡도 마찬가지였다. 은메달을 딴 하퍼의 해맑음과 대조적으로 손기정과 남승룡은 우울해 보였다. 스타디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국가 ‘기마가요’가 흘러나올 때 월계관을 쓴 손기정과 남승룡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손기정은 월계수 나무로 입고 있던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다. 손기정은 의기소침했고 슬퍼 보였다. 자신이 고통스럽게 발로 뛰어 얻은 이 영광이 조국의 것이 아니라 조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본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장기 말소사건
손기정이 입은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서 올린 신문 사진. 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하였고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비록 일본국적으로 나가서 딴 올림픽 금메달이었지만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소식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한없는 기쁨과 희망이 되었다. 선수를 국제대회에 내보내 놓고 언론 기자도 현지에 파견하지 못하는 식민지 언론사는 일본 신문에서 받은 사진으로 금메달 획득의 낭보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손기정이 8월 9일 금메달을 딴 뒤 나흘 후 8월 13일에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에 손기정의 시상식 장면을 찍은 사진이 한 장 게재되었다. 옆에서 비스듬히 찍은 원래 이 사진은 손기정이 월계수나무로 일장기를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일장기가 확연히 보이는 사진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인쇄 품질이 나쁜 점을 이용해 일장기가 흐려져 잘 보이지 않게 만든 다음, 이 사진을 신문에 올렸다. 총독부는 인쇄의 문제로 생각하고 검열을 통과시켰다.
손기정이 입은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서 올린 신문 사진. 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하였고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일장기 말소 문제가 불거진 것은 8월 25일 <동아일보>에 다시 한번 이 사진이 게재되면서였다.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이던 이길용은 사회부장이던 현진건 등과 의논하여 손기정이 입은 옷에서 일장기를 완전히 지웠다. 이는 비록 일본의 국기를 달고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땄지만, 손기정은 어디까지나 조선인임을 자부하고 싶은 언론인들의 소심한 항거였다.
<동아일보> 기사는 총독부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고 소급하여 <조선중앙일보>의 기사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 여운형은 책임을 지고 사장 자리에서 사퇴하였으며 신문은 폐간되었다. <동아일보>는 간부 사직과 함께 이길용, 신낙균, 현진건 등 관련자들이 구속되었으며 무기 정간조치를 받았다. 이후 <동아일보>는 당시 기자들의 행동이 사측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정간을 풀고 9개월 만에 신문을 재발간 했다.
이 사건에 더하여 손기정은 월계수나무로 일장기를 가리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이후 경기 출전이 금지되었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은퇴 후 행보
영광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지만 식민지의 금메달리스트는 일제로부터 합당한 대우조차 받지 못했다. 양정고보를 졸업한 손기정은 일본의 메이지 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학업을 마쳤다. 1944년 손기정은 조선저축은행 은행원으로 일했으며 일장기 말소사건 때 관계를 맺은 여운형을 도와 독립운동의 연락담당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손기정은 1947년과 1950년에 마라톤 코치로 활동하여 서윤복과 함기용이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후 손기정은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서울특별시 육상경기연맹 이사장,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성화 봉송자로 뛰었다.
한편, 당시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경기에는 그리스 아테네 브라드니 신문사가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가 부상으로 있었다. 이 투구는 손기정에게 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50년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에 가서야 손기정의 손에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를 1994년 국가에 기증하였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현재까지도 일본이 딴 금메달로 되어 있고 올림픽 공식 기록에는 손기정의 국적 또한 일본, 이름도 손기테이로 되어 있다. 살아생전 손기정은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지만 일본 올림픽위원회가 손기정에 대한 국적 변경 신청을 해주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 다만, 손기정의 일대기를 쓴 자료에는 국적을 한국으로 밝히고 있으며 그의 이름 손기정을 표기하였고, 당시 그가 일본국적을 달고 경기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힘들게 딴 금메달을 조국의 영광으로 돌리지 못한 한 때문이었을까? 1992년 8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손기정은 누구보다도 황영조의 우승을 기뻐하며 마치 자신의 우승처럼 여기며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은 내 국적을 찾은 날이야. 내가 노래에 소질있다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불러보고 싶다.
➡️1911년포르투칼 헌법제정 국회의원선거서 공화당 승리
➡️1910년시인 피천득 출생
➡️1905년형법대전 공포
➡️ 1898년 `언덕 위의 뾰족집` 명동성당 6년 만에 준공
1898년 5월 29일, 한국 천주교의 상징 명동성당이 착공 6년 만에 준공됐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붉은 벽돌을 사용한 고딕양식의 건물, 더구나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어 사람들은 ‘언덕 위의 뾰족집’이라 불렀다. 건축을 처음 계획한 사람은 1882년 천주교 조선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블랑 주교였다. 블랑은 이승훈·정약전 등이 종교집회를 가졌던 조선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생가터를 매입, 조정에 공사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조정은 근처에 역대 조선왕조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이 있어 풍수를 침해할 수 있고 또 대궐이 보여 안 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허가하지 않았다.
차일피일 늦어지다 착공에 들어간 것은 10년이 지난 1892년이었다. 이번에는 기술자가 말썽이었다.
양옥 건축가가 전무한 탓에 벽돌공과 미장공·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와 공사를 시작했지만 청일전쟁이 일어나 기술자들이 귀국하는 바람에 또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자금은 프랑스 신자들이 보내온 성금 5만프랑으로 충당했다. 준공 당시에는 이곳의 지명인 종현(鐘峴)을 따 종현본당으로 부르다가 광복 후부터 명동성당으로 불러오고 있다.
➡️ 1895년 소설가 이기영 출생
➡️ 1894년 미국의 영화감독 슈테른베르크 츨생
➡️ 1880년 독일의 철학자 슈펭글러 출생
➡️ 1877년 중국 신강지역 무슬림 정권 통치자 야쿱 벡 사망
➡️ 1875년 대한제국 첫 주일(駐日)사절 횡빈 도착
➡️ 1592년 임진왜란중 옥포대첩 거북선 완성, 첫 참전
➡️ 1453년 비잔티움 제국 멸망
1천여년동안 영화를 누리던 비잔티움 제국이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의 모하메드 2세의 침입을 받고 멸망했다. 모하메드 2세는 거대한 대포를 이용, 제국을 함락했다.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인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의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도망치라는 신하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신민들과 함께 도시 안에 남아 소피아 대사원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저항하다 살해되됐다.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고 그와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도 종말을 고했다. 이로써 330년 5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건설해 1123년동안 유지되었던 제국은 여든 여덟 명의 황제를 배출하고 사라졌다. 제국을 건설한 황제의 이름도, 멸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마지막 황제의 이름도 모두 콘스탄티누스였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1472년에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의 유족인 팔레올로기나가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결혼함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은 일부나마 러시아로 이어졌다. 그녀는 러시아 궁정에 비잔티움 궁정의식을 도입해 콘스탄티노플을 모방한 크렘린 궁을 건축했다. 러시아는 비잔티움의 관료제, 호칭과 관제 등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모스크바가 세 번째 마지막 로마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https://youtu.be/NO5oVcKZFNM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