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공산주의”의 개념과 성격은 그 사상전파, 운동, 집권의 단계에 따라 이 주제의 개념의 내포와 외연이 조금씩 달라진다. 본고는 대중 “의식화” 선동 등 권력장악투쟁 단계의 전략·전술면 보다는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공산당 집권후의 새 사회의 통치형태, 사회개조의 실험이 크게 실패한데 대해 중점을 두려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표준 개념은 1848년의 “공산당 선언”의 맑스주의를 기준으로 하고 특히 아시아 공산주의는 중국에서와 같이 반제·반식민지 민족운동 속에서 레닌주의의 농촌공산화형을 수용한 마오져뚱주의의 중국공산당, 홍군, 그리고 1948년의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그 “이념형”으로 잡는다.
일본의 초기 자유주의와 무정부주의 운동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 공산주의당인 “무산자당”의 운동은 특히 아시아에 그 사상적 영향이 적지 않으나 그 주된 노선은 주로 코민테른 테제의 직수입이었다. “脫亞入歐”후의 개국일본이 영국과 손잡고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제국주의 팽창과 군사적 침략이 아시아 반제민족운동의 공적이었으므로 2차대전 전에는 아시아 민족과의 연대를 가진 일본형 공산주의의 개념이 성립되기 힘들었다. 일본내의 좌파적 진보운동은 그밖의 반제, 반식민지 민족운동을 대행하는 성격의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과는 일단 구별되어야 한다. 일본의 무산자정당이나 大正데모크라시까지의 진보주의는 초기 인본 자본주의의 원시적 치부와 노동문제 위에 서있었고 반제민족운동의 대행이라는 레닌주의의 아시아민족테제형과는 구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 공산주의”의 생성은 그 운동이나 집권통치에서 공산당 선언의 공산주의와는 그 성격이 다른 일종의 “범주 오류”를 가지고 생성되었다고 본다. 원래 공산주의는 재산의 공유,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무계급 평등주의를 내걸었다. 19세기 후반의 아시아의 전통적 왕조사회를 벗어나 근대적 시민사회로 전환해야 하는 “근대화”의 역사적 과제에 대해서는 맑스의 “공산주의”가 그 해답이 되지 못했다.
“공산당 선언”은 19세기 중엽의 서유럽 자본주의의 가혹한 자본축적과 계급갈등, 거기서 생긴 산업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 이념으로 제시된 공산주의였다. 그러나 맑스·엥겔스도 “공산당 선언”에서는 부르주아지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만이 놀라운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류역사상 처음보는 경제번영의 기적을 낳았다고 경탄감을 가지고 시인했다.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백년도 안되는 계급 지배 속에서 지난 인류역사의 모든 세대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엄청난 생산력(more massive and more colossal productive forces than have all preceding generations together)을 창조해냈다.”
오늘의 자본주의 경제의 경탄스러운 발전에 비하면 1848년 당시의 생산력은 너무 작은 것이었다. 1883년 마르크스 사후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사회주의의 좋은 부분을 흡수하는 수정을 거듭하면서 이룩한 공전의 대약진을 보았다면 그의 “공산주의” 이념을 포기했을까. 총명한 마르크스가 그 엄청난 생산력 창조의 원동력이 시장 시스템이며 경쟁의 활력임을 인식하지 못한 불찰을 저지른 것은 그가 헤겔의 변증법신앙의 색안경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맑스주의의 “공산주의” 이념은 이처럼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여 대공업사회에 이르러 생산된 재화가 흘러넘칠 만큼 풍요해지고 따라서 능력이나 노력에 따르는 차등응분의 배분이 아니라 “필요”(need)에 의해 분배될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 단계를 대망했다. 맑스의 “정의”의 원리는 능력이나 성과와 관계없이 만인에게 “필요”에 대한 분배의 평등주의의 실현을 꿈꾸었다. 맑스의 “공산주의” 이념은 자본주의 제도하의 노동자들의 노동력 착취와 빈부격차에 대한 도덕적 어필을 담고 있었다. 맑스의 “정의”의 원리는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기 필요에 따라 공급받는(from each according to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need)” 평등주의 재분배 원리의 실현이었다.
이런 평등주의는 빈부격차가 크고 구조적 빈곤이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악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아주 설득력있고 매력있는 대안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사회주의의 원리는 그 “필요”의 원리로 새사회를 건설한 구소련과 중국 등의 역사적 검증과정에서 능력있고 근면한 자에게는 불공정한 “악평등”이 되어 경제파탄을 자초한 거대한 역사적 실험을 20세기 말에 러시아, 중국 등에서 보았다. 고르바초프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비판에서는 탁월했으나 정작 사회주의 제도의 운영방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 준 것이 없다고 그의 「페레스트로이카」에서 개탄했다. 운전교습서만 있고 현장실습의 실천지가 결여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들의 공저 「도이치 이데올로기」에서 낭만적인 사회·공산주의의 이상향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한 구절은 너무 유명하다. 이런 이상사회는 비참한 생활고에 허덕이는 저소득층과 노동계급에게는 대단히 매력있는 구세의 복음이 되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특정한 고정된 활동범위 같은 것은 가지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을 하고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낮에는 고기잡이를 하고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먹은 후에는 비판을 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더욱이 결코 사냥꾼, 어부, 비판가가 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인간소외 없는 전인적 인간상을 꿈꾼 마르크스는 인간불평등의 기원을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등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생산관계에서 생긴 전문화로 인한 “분업”, 다시 말해서 사냥꾼, 어부, 학자 등의 직업 전문화와 그 인간 소외(疏外)에 따르는 부의 차등배분에서 찾았다. 한마디로 “노동의 분업”에서 생긴 소유의 격차와 사유재산제에 기초한 근대 부르주아 경제제도가 바로 “자본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유산자계층 이외에는 월급으로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한 가지 작업에 평생 얽매이는 직업사회의 따분함을 예견했던 “자유인의 원시복난원”을 그리는 꿈길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선언”의 공산주의는 계급지배의 종식으로 무계급, 국가소멸의 자유사회상의 유토피아 실현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든 아시아사회는 한마디로 “공산당 선언”의 공산주의작 이상실현의 마땅한 단계가 아니라 이 “선언”이 예찬한 부르주아지의 시민계층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공전의 부가 창조된다고 하는 “근대사회”의 새제도, 전통적 빈곤에서 해방되어 “사냥꾼, 어부, 비판가”의 노동의 분업뿐만 아니라 보다 세분되고 전문화된 분업사회로 전환되어야 하는 근대화의 단계였다. “공산당 선언”은 뜻밖에도 자본주의 이전단계의 아시아전통사회가 시민혁명과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단계의 경과가 불가피함을 가르친 부르주아 민주혁명의 선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주의, 스탈린 독재와 “제3당”인 코민테른은 맑스의 “자연성장성”을 부정하고 브르죠아 민족운동, 시민사회 형성과제를 공산당이 代行한다는 레닌테제로 마침내 인위적 강권적인 설계주의에 기초한 “예종의 길”을 만들었다.
구소련방과 아시아의 중국, 베트남, 북한 등에서 이 “선언”의 이상에 맞는 공산주의를 실현시킨 국가는 지금까지 없으며 따라서 “아시아 공산주의”도 그 실체가 없는 가공의 이념형이다. 더욱이 “무계급사회의 유토피아”와 국가의 소멸을 비젼으로 반강권의 지상낙원을 선전선동한 공산주의는 아시아의 근대 민족국가형성의 공화정부형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 내셔널리즘과는 상충되는 비현실적인 꿈이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 단결호소의 국제공산주의는 민족주의적인 과제를 외면한 1민족·1국가의 민족국가 부정의 세계혁명이념을 기본강령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아시아의 계급주의적 진보파와 민족주의자간의 사상 논쟁에서는 “민족해방이 먼저냐” “계급해방이 먼저냐”의 이념대결이 그치지 않았다. 한국의 좌우합작 민족 단일당 운동인 신간회가 해소될 때도 이 논쟁은 결말을 얻지 못했다. 신일철, “韓國獨立運動의 思想史的 性格”, 「申采浩의 역사사상 연구」(고대출판부), p.296.
1920, 30년대 식민지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과 부르주아 “민족 개량주의”간의 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성립과 해소의 전과정에 코민테른의 테제가 지도지침이 되었다. 신간회 운동을 전후한 코민테른의 역할에 대해서는 스카라피노, 李庭植외저, “新幹會 硏究”(동녁) 참조.
1930년의 “9월테제”인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의 임무에 관한 결의”에서는 소련공산당 지지를 잣대로 해서 신간회의 해소까지 지령한 것이 된다. 코민테른의 1930년 “9월 테제”에서는 민족개량주의적 부르주아와 그 단체-“조선일보”, “동아일보” 및 천도교의 일부와 신간회가 반소·반혁명적이라는 규정까지 하고 있다. 스카라피노, 이정식, 앞의 책, p.53.
따라서 아시아 공산주의의 실체는 주로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사상과 레닌의 권력탈취, 테러행위, 특히 “의식화”(cousciouness)가 복합된 레닌주의와 그 농촌공동체주의의 아시아적 아류였다. 레닌은 러시아의 전통적 농촌공동체(Mir 또는 Obshchina)를 기반으로 해서 자본주의를 회피하고 사회주의로 비약할 수 있다는 농민공산화의 테제를 제창했다. 그러나 레닌주의적 “의식화”는 대중을 사로잡는 “대용종교”적인 강렬한 마력을 만들어내는 “가난한 피압박 대중의 복음”이 되었다. 그러나 레닌주의의 가장 핵심적 요소는 “당파성” 테제이며 이 기준이 출신성분, 인민분류의 공산화 통치기법이 되었다. 아시아 공산화의 모형이 된 마오주의는 그 당의 체질이 농민당이었으므로 근대적 노동의 분화, 시장경제, 경제적 합리성, 특히 복식부기적인 시장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로인해 마오주의는 시민사회의 자유주의적인 제도들을 모두 부정하고, 인류역사에서 자생적 질서로 이룩된 자유민권의 “전통과의 단절”을 감행하여 레닌주의적 의식화와 중앙권력의 강화에 의한 당권력 위주의 계급투쟁 전략, 전술에 집착하여 공산주의적 평등의 이상은 과평등, 악평등이 되고 집권후의 실패가 드러나자 마침내 홍위병, 문화대혁명 등의 대중선동의 광신적 포퓰리즘 동원의 권력쟁취 테크닉 단계에서 전혀 발상전환을 하지 못하고 “反近代化”의 사상독재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시아 공산주의는 전체론적 유토피아주의 세속화된 “대용종교”의 열광성으로 빈곤, 소외, 피압박 민족과 계층의 “복음”였다는 역사적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아시아 공산주의의 毛澤東 모델의 실패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에서 毛澤東 主義가 내전와중의 군사노선과 집권에서는 성공한 대표적 코스이지만 주로 산업화가 되지 아니한 후진 중국에서 산업노동자주체의 혁명운동방식에서 실패하고 “농촌이 도시를 포위한다”는 농촌 “소비에트구” 설치와 농민게릴라 투쟁전술에 의한 농촌공산화 노선을 선택했다. 이는 맑스·레닌주의를 아시아의 특수환경에 이른바 “창조적 적용”을 한 것이라 해서 농촌혁명형의 모택동주의의 성공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에서 맑스의 자연성장성 테제에 따르는 “부르주아 민주혁명”론이 끝내 채택되지 못하고 또한 레닌의 “네프”(NEP) 신경제정책의 시장사회주의도 1936년까지 스탈린에 의해 말살되었다. 그 스탈린 노선을 추종한 아시아 공산화에서는 “네프”가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1980년대말에 와서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서 그 개혁개방정책의 준거를 네프의 부활로 합리화했다.
아시아 공산화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공산주의와 후진국문제”가 지닌 난점이었다. 선진자본주의의 최후단계에서 큰 힘을 가지게 된 산업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성취된다는 공산혁명이 후진 아시아 각국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혁명과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발전 단계의 자생적 순로(順路)를 뛰어넘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레닌주의 테제는 이론적 기만성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발전 단계의 학습과정에서 과연 월반론이 가능한다.
사실상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배제했던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그 직후의 전시공산주의에서 초기산업화도 파탄되고 생산력의 발전과 사회주의는 병행될 수 없다는 사실이 나타나 그 이념의 현실적 좌절에서 수정으로 후퇴한 것이 레닌의 네프였다. 제2 인터내셔널의 고전적 맑스주의는 역사발전의 과정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생략하거나 뛰어넘을 수 있다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맑스의 자연성장성 테제에 따라서 자본주의가 봉건사회의 생산력 발전의 기반에서 자생적으로 배양된 바와같이 사회주의도 자본주의의 난숙한 성숙에 의해서만이 그 사회혁명의 기반이 조성된다고 맑스도 믿었다. 러시아의 멘세비끼파도 역시 자연성장성 테제를 지지했다. 해방후, 남북한의 좌익진영에서도 1945년의 시점이 “資本階級性 民主革命”의 단계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의 “유물사관의 공식”에서 그의 자연성장성 테제는 분명히 드러났다.
“어떤 사회질서든지 그 속에 아직 발전의 여지가 있는 모든 생산력이 다 발전할 때까지는 결코 소멸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그 存在의 물질적 의식이 낡은 사회의 내부로부터 더욱 높은 성숙 단계에 이르기전까지는 보다 높은 새로운 생산관계는 출현되지 않는다.” Marx,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Preface.
라고 했다. 아시아 사회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초기 후진단계였던 당시에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시장제의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이상을 구현한 새로운 생산관계가 레닌주의적 권력쟁취 전술에 의해서도 소련이나 중국에서도 출현하지도 성공하지도 못했다. 그점에서 레닌주의나 모택동주의는 맑스의 역사관에 대한 잘못된 독해요 배반이었다.
맑스의 자연성장성 테제에 의하면 응당 후진아시아보다 유럽에서부터 먼저 공산주의가 실현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20년이래 레닌과 코민테른(1919~1947)의 “제3국제당”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약한고리”인 후진국 특히 식민지, 피착취 지역인 중국과 인도에서 서구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아시아민족들의 반제국주의적 반항에 착안하여 자본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우회적 후방기습적 전략으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것이 레닌의 “제국주의론”이었다.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레닌은 이를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 규정했는데 그 체제의 중심인 서유럽이 아니라 그 주변인 아시아의 반제, 반식민지 민족운동을 고무하는 전술로 전환하게 된데서 “아시아 공산주의”의 소련당의 국제정치 전략의 대리전(代理戰)적 수단화가 강요되었다. 이로 인해 “아시아 공산주의”는 자기전통과 자기 사회내부의 자생적 형성기반을 무시당한 외래 공산주의 직수입의 역사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중국, 인도, 한국 등은 공산화의 기반을 전혀 가지지 못했고 성숙된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이기는커녕, 산업화 이전의 후진단계였다.
20세기에 들어서 중국대륙은 서구열강의 침략과 분활, 군별이 할거하는 내전상태였다. 孫文의 3민주의와 중국국민당은 1912년의 신해혁명으로 근대시민사회와 근대민족국가의 새출발의 길을 열었다. 손문도 그의 民權主義에서 개인의 자유권을 인정한 것이 아니었고 중국 국민당의 결성에는 레닌정부와 코민테른의 도움이 있었다. 손문의 결정으로 참모장 장개석도 모스크바에서 소련군사정치정세의 교육(1923년)받게 되었던 전력을 가지고 있다. 손문은 혁명파 군사조직을 위해 장개석을 약 5개월간 소련에 파견, 황포군관 학교를 설립케 했다. 장개석의 비밀군사 조직인 “藍 衣社”도 소련 K.G.B. 조직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1920년에 들어와서 빈농의 농민조직화로 반제·반식민지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1921년 중국공산당을 결성하고 소련형의 사회주의를 농업사회인 후진 중국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레닌주의적 나로드니끼 농민운동형의 모형에 따라 마오주의가 나와 패권을 잡게 되었다. 모택동 노선은 농민게릴라전 중심의 “紅軍”의 군사노선이었고 외세침략과 군별이 할거하는 내전상태의 중국 판국에서 시민적 근대화 혁명을 외면한 중국 공산화 주동세력으로 등장했다.
아시아 근대화의 격동기에 당면한 반식민지, 반제운동에 대해 영·미 등 서구열강의 제국주의는 아시아 여러 민족의 적이었고 오히려 레닌정부와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보로딘, 보이친스키, 미프 등)의 후원과 지도가 큰 힘을 발휘했다. 上海 임시정부의 呂運亨은 코민테른의 파견원 보이친스키의 권고로 “공산당 선언”의 최초의 우리말 번역을 냈고 그밖의 공산주의 서적도 출판했다고 한다. 「呂運亨調書」 참조.
1922년 레닌이 주동한 극동인민대표자 대회에서 반제, 반식민지 노선의 어필이 있었다. 그 제2차 대회에서 채택된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레닌테제”가 유명하다. 이 레닌테제는 “부르주아 데모크라시”의 허위를 폭로하고 자본주의하에서 민족들의 평화적 공존과 평등이 가능하다고 믿는 소부르주아의 민족적 환상의 붕괴를 촉진시키라고 지령했다. 이로부터 아시아의 경국은 계급주의 혁명파와 민족주의파로 양극화되었다.
1925년의 “조선 공산당” 조직도 코민테른의 꼬르뷰로(高麗部)가 金在鳳을 파견하여 만들었으므로 일명 “김재봉당”이라 한다. 제2의 3.1운동을 기획한 6.10만세사건도 조선공산당에 대해 “천도교, 그밖의 큰 종교적·민족적 단체의 근로대중”에 침투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거사하려 했던 공산당의 계획이 사전에 표출되어 검거된 사건이었다. 레닌과 코민테른은 식민지 조선에서 부르주아 민족혁명의 헤게모니를 공산주의자가 장악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1928년의 만주의 조선공산당 해체도 코민테른 “12월 테레”에 의한 것이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도 재중국 좌익운동자는 모두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야 했던 고민과 고초를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서구화·개화의 표본이었던 명치일본과 그 자본주의 발전상은 한국, 중국 등이 당면한 근대화의 국가모델이 되지 못하고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자가 되었다. 개화기 이후 1920년대에 와서는 일본의 근대국가가 아시아 근대화의 모델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1930년대 “소화유신” 후의 일본국부 패시즘은 아시아군사침략의 악의 축이 되었다. 그러나 아시아권의 최초의 공화정부였고, 근대화의 모델이었던 장개석의 남경정부도 주로 좌우익대결의 내정에 말려들었다. 그 결과 반공세력의 중심이 된 장개석의 국민정부도 민족,국가 지상(至上)의 일부 파시스트적 색갈이 가미되어 극우화된 “국가주의”체제가 되어 갔다. 그 결과 아시아에서 자유민권의 자유주의 시민혁명과 공화정부형 근대국가성장과 시장경제 지향의 우파, 중도파의 리베랄리즘이 설 자리를 위축시키고 말았다. 공화정부형의 상해임정의 표본이오, 후견자가 장개석공화정부였다는 것은 “민국”이라는 두 국호가 상징한다.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1945. 7. 26)에서는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제2차대전의 전승국으로 중국을 대표했다고 한국의 독립을 적극 지지했다.
20세기 아시아에서는 서구열강의 첨병이 된 일본 부국강병국가화 과정에서 명치·대정간의 자유민권의 자유주의, 서구적 데모크라시가 일시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밖의 모든 아시아 피압박 민족들에게는 은연중에 소련 공산체제와 그 사회·공산주의적 평등주의가 주로 진보적 지식인과 농민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1930년대 스탈린의 소련방은 이미 인류의 이상사회의 아름다운 목표가 아니라 공포정치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아 진보파들은 전혀 몰랐다. 그로인해 아시아 사회의 자생적 역사발전과 그 근대화의 길에서 극우와 극좌 사이의 양극화 구도에서 민주공화국 형성의 기초인 자유민권의 “자유주의의 빈곤과 공백”이 결과되었다. 20세기의 아시아 역사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되면 “국가 사회주의의 파시즘”이 되는 길은 좌우익의 구별이 없었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것이 진보주의적 패시즘 패권의 표본이다. 그것은 시민적 민족주의의 위축이기도 했다.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에 청말 變法自强派의 사회진화론과 같은 부국강병형 근대국가관이 수용된 바 있다. 그러나 그런 자강파의 “자본주의”는 양육강식의 강자의 권리옹호로만 비치게 되고 “약자보호와 공생”의 복음이 되지 못했다. 아시아 피압박 민족과 빈곤의 후진성에 처해있는 민중에게는 자유시장의 경쟁체제가 지닌 활력을 공정적 가치관으로 인식시킬 수 없었다. 아시아 제국의 전통적 가치관에서는 그 시민사회의 자유주의적 원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미 1920년대에는 제국주의적 중국분할과 군별할거의 내전의 와중에서 장개석의 중앙군의 우세를 피해 중국 홍군의 농민게릴라 전쟁이 각성의 변방에서 농촌지역을 소비에트구로 만들었다. 1919년 가을 장개석의 제1차 토벌로 홍군은 모두 3성의 틈새인 경계지로 숨어들었다가 1931년봄 제2차 토벌에서는 일본군의 만주사변으로 중지되고 홍군은 다시 재기의 호기를 맞이했다. 홍군은 호남, 호북, 강서, 안휘 5성의 광대한 소비에트 구역을 통치하게 되고 그 병력도 30만에 달했다.
홍군의 전술은 농민들을 규합하여 유격대, 적위군, 소년선봉대 등을 조직하고 한 지역을 점령하면 먼저 자산가의 재산을 몰수하고 관료, 신사, 토호 등을 총살하는 농민 게릴라전의 계급투쟁 방식이었다. 그러나 빈농 등 무산농민에 대해서는 침해하지 않고, 지주, 부호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나누어주고 농공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들어갔다. 홍군의 대민전술은 농촌사회 속의 “적과 동지” 즉 열성분자와 반동분자의 계급주의적 2분법을 도입하여 무산계급의 계급투쟁 모델을 중국 농촌에서 실현시켰다. 모택동이 유독 관심을 가진 것은 중국 각지에서 빈발하는 농민폭동이었고 그 봉기지역 등을 조사하여 “농민반란의 조직화”에 의해 중국에서는 “농민의 유격대화”의 농민전쟁으로 공업노동 계급이 아닌 농민을 혁명적 게릴라로 전환시킬 수 있겠다는 착상을 한 것이다. 도시중심의 봉기형인 “李立三 코스”나 코민테른의 “제3 국제당코스”와는 다른 모텍동 코스가 득세하게 된다.
홍군 점령구역은 “소비에트” 해방구가 되는데 먼저 토지혁명을 제1차로 실행한다. 토지의 개인소유권은 일체 부정되고 모든 농민, 빈민의 대차차무문서는 소각해서 빈농을 빚더미에서 벗어나게 한다. 우선 농촌에서 부농, 중농, 빈농의 3등급 구분으로 토지의 평등분배를 하고 토호, 열신(劣紳)의 토지는 전부 몰수하고 부농 중에서도 공산당 반대의 혐의가 없으면 균등분배에서 제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식량은 소비에트구의 배급소에서 배급받는다. 신언준, “소비에트 구역과 홍군의 현세”, 민두기, 「신언준 현대중국관계논설선」(문학과 예술, 2000), pp.481~483.
공산주의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스탈린의 “1국사회주의”에서 한걸음 더나가 중국내의 한 작은 지역에서 적색정권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모택동 특유의 “농촌 소비에트구” 구상을 실현시킨 것이다. 모택동은 “한 나라안에 작은 또는 몇 개의 작은 적색정권의 구역이 백색정권에 의해 포위된 장기간에 걸쳐 존재하는 현상은 세계의 다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자부했다. 마오저뚱, “중국의 적색정권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1928년 10월).
그리고 이 농촌 적색지구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근거지론과 지구전론은 앞으로 “많은 식민지 나라들의 인민의 모범”이 될 것이라고 모택동 자신이 전망했다. 비적화지대는 “백색지구”라 했다.
이 모택동 노선은 공산당에 의한 권력장악의 전술로서는 새로운 모델이었으나 공산주의의 “낙원”을 건설한다는 유토피아 실현에서는 실패했다. 그런 소비에트구가 인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진정한 자유민권의 해방구가 되지 못하고 강철의 규율과 계급투쟁적 당파성에 기초한 “인간분류”와 철저한 인민감시의 공산당 독재의 공포테러 정치의 모델에 불과했다.
1930년대의 동아일보 상하이 특파원 신언준은 중국현장 속에서 홍군에 의한 무장게릴라전에 의한 농공 “소비에트 공화국”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소비에트 구의 일체 인민을 조직화한 것은 이상에도 술한 바지만 규율과 조직하에 동작하는 만큼 그 생활은 자유를 잃게 된다. 홍군, 적위군, 선봉대 등은 가장 정탐대(假裝偵探隊), 청화대(聽話隊) 등의 정탐으로 일상 인민의 생활, 언동을 감시하고 있으며 청화대는 야간 민가로 암행하면서 민간의 이야기를 엿듣고 조금이라도 공산당 반대의 형적(形跡)이 있는 자면 바로 엄형에 처한다. 소비에트구의 일상 생활은 강연이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한다. 정치 부원은 목사가 강도하는 이상으로 매일 밤마다 민중들을 모아놓고 공산주의 선전을 한다. 만일 민중 중에 연설회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강제로 참가하게 한다.” 신언준, “소비에트 구역과 홍군의 현세”(동아일보, 1932. 7. 8), 민두기 편, 「신언준 중국관계 논설선」 참조.
중국 공산당의 홍군이 군사력으로 만든 “소비에트구”는 레닌주의적 대중선동의 “의식화”와 전천후적 인민감시의 공포정치적 지배였고 시민적 자유가 전혀 허용되지 않는 병영국가적인 “형무소 국가”형이었다. 여기에는 권력분립·법의지배·자유언론 등의 자유주의적 가치관과 시장경제의 유산을 완전히 배제한 당의 사상통제, 특히 인위적 조작의 “설계주의”적인 혁명의 강행이 자행한 이성의 오만이었다.
이 농민천국의 이상을 내건 1930년대 홍군의 “소비에트구역”은 바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모델이 되어 모택동 중공당의 역사적 과오의 원죄가 되었고 또한 아시아 공산주의에서도 그 모방인 중국 공산화형 실험이 대실패로 끝남으로서 그 반교사적 모형이기도 하다.
공산주의적 평등의 실현을 위해 식량·생필품의 국가배급제가 되면 시사뉴스 등 정보도 사상도 중앙당이 배급하게 되고 마침내 시민적 자유가 말살된다는 것이 “소비에트구”의 실험으로 그 반인간적 제도악(制度惡)이 분명히 드러났던 것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혁명의 인위적 조작의 설계주의적 교만은 그 유토피아적 이념을 폭력혁명이나 포퓰리즘적 폭동으로 강행하여 시민사회형의 “사회”가 아닌 당의 중앙지령적 “조직”을 강요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복귀하는 동유럽의 시민혁명은 평화적인 “비로드” 혁명이었다. 아시아 공산주의도 그 근대화 혁명과정은 무혈혁명이오 상대적으로 평화적 이행이었다는 점에서 두가지 혁명의 대조에서 공산혁명의 과격주의적 강권의 비인간성이 잘 드러났다.
3. “아시아 공산주의의 종언”의 두가지 유형
제2차 대전과 그 종전으로 소련 스탈린독재의 나치스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등 파시즘에 대항해서 승리한 연합국 진영에 속함으로서 전승국이 되고 독일, 일본 등 “추축” 열강에 대항하던 반제·반식민지 레지스탕스운동도 크게 고무되어, 친소파가 되었다.
이 대전에서 스탈린의 전쟁은 공산주의적 이념의 힘보다는 전쟁수행에서 러시아 내셔널리즘적 애국심을 동원한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로 큰 덕을 보았다. 특히 동유럽과 아시아의 북한에서 소련군 점령에 의한 소련형 스탈린주의 독재가 “인민 민주주의”의 명목으로 강요되었다. 스탈린주의적인 독재국가형의 아시아지역에 대한 “혁명수출”이 일시 가능해지고 그로 인해 “철의 장막”이 쳐짐으로서 공산권과 서방진영간의 “냉전체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냉전의 미소 양극화체제는 스탈린형 공산화의 10여년간의 후견역에 불과했다. 1956년 스탈린 격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각국의 공산당의 집권은 서구열강의 뒷받침을 받는 “부르주아” 시민혁명과 민족운동을 억압한 결과였다. 1919년을 돌이켜보면 제1차 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전후 평화체제에 대한 비젼으로 내세웠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주로 동유럽에 극한되고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민족운동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919년의 한국의 3.1독립운동이나 중국의 5.4운동, 간디의 인도독립운동에 약소민족독립에 희망을 주었으나 역시 영·미형의 자유민주주의와 시민적 민족운동을 외교정책적 행동으로 지원하지 못했다. 특히 세계대전의 전후에 중국의 장개석 국민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시아민족주의의 주도권을 좌익진영에 넘겨주는 결과가 되었다.
1948년 모스크바 지도부와 협력한 공산주의 세력의 지도에 의한 민중폭동이 미얀마-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에서 일어났다. 인도네시아에서도 호치민 지도하의 민족공산주의자가 권력을 장악하고 프랑스 식민지하의 반식민지 민족운동의 주도권이 공산세력의 손으로 넘어갔다. 역시 아시아 공산주의의 중심이 된 중국내전에서도 승리한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아시아에서는 소련군정하의 북한의 김일성정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택동의 신중국이 아시아 공산주의에 대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공산주의”, Encyclopedia Britanica 참조.
그러나 레닌주의, 스탈린독재, 모택동주의는 공산주의 운동에서 대중선동과 권력장악의 전략·전술에 극한되고 집권후의 나라만들기(nation-building)의 내정 통치 프로그램면에서는 “1당독재 국가”의 강령에 그치고 대단히 그 정책이 빈곤했다. 모택동주의도 정권장악운동의 전략전술 면에서는 중국과 아시아의 특수성, 농민의 조직화 등의 혁명노선으로 유효했으나 집권후의 국가통치와 사회개조에서 “공산주의” 이념의 실현면에서는 소련공산당의 스탈린주의 “중앙계획·중앙지령”과 일당독재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독재국가 모델을 직수입한 결과, 시민사회 성장이 억제되고 모든 공산화된 나라들이 전인민의 무자유예종화로 실정을 거듭하게 했다.
공산주의의 비극은 맑스·레닌주의가 계급투쟁 등 사회변혁의 권력투쟁 전술을 마련해 주었으나, 사회주의 국가운영의 정책방안은 다만, “사유재산제” 폐지에 기초한 “재산의 공유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등 국유화, 국영화 테제 이외에는 가르쳐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구소련체제의 대실패가 명백해졌을 때 맑스·레닌주의의 국가 운영상의 정책적 빈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고르바초프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는 이론적 무기를 마련해 주긴 했으나 사회주의 국가운영의 구체안에 대해서는 가르쳐준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불평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고전은 사회주의의 본질적 특성의 정의를 우리에게 남기고 있으나 사회주의의 구체적 상세한 내용은 가르쳐 준 것이 없다…고전은 어프로치의 방법은 가르쳤으나 테크닉은 가르쳐 준 것이 없다. 이 새로운 국면에서는 사회주의의 이론상의 문제나 기성적인 방식을 레닌의 유훈과 바법에 따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레닌의 사상은 그의 사후 반드시 충실히 지지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재검토 작업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당시의 상황에 합치된 사회주의 건설의 형식과 방법을 우리 국민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형식이 신성시되고 이상화되어 도그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얼빠진 사회주의의 이미지가 생겼다. 즉 극단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관리제도, 인간적 관심의 다양성의 무시, 사회에서의 대중의 활발한 역할의 과소평가, 과다 평등주의 경향(the pronounced equalitarian tendencies) 등이다.” Khorbachov, Perestraica, pp.42~43.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서 제시된 고민과 속수무책은 중국과 아시아 공산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모택동이나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은 끝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의 발상전환을 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성과급 이윤, 인센티브 등의 경쟁적 시장의 “인간적 요인”을 무시한 좌파적 오류이다. 모택동만큼 평등주의에 열렬한 지도자가 없었으나 그것은 지나친 평등의 “악평등”이 되고 말았다.
모택동의 정책은 모두가 집단주의적 대중동원방식의 “구호”와 “운동” 위주였고 농업집단화의 “인민공사”와 1959년의 “대약진” 운동은 3년간에 무려 3000만 농민의 아사자를 내는 농촌공산화의 대실책이 만든 비극을 자초했다.
소련형 중앙집권적 집단화와 시장경제 폐지는 더 이상 중국근대화의 건설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통찰한 덩샤오핑 등 실권파들은 실용주의 노선을 내걸게 되었다.
1962년은 공산권의 수정주의 대두의 획기적 해이다. 이해에 소련에서는 리베르만(Liberman)의 이윤도입론등 수정주의가 나왔다. 역시 이해에 덩샤오핑을 “黑描白描”론을 내세우고 “3自1包”의 농업 근대화정책의 실용주의적 수정안을 제안했다. 이 수정주의의 바람을 탄 북한내의 甲山派가 리베르만 방식의 도입, 개방화의 경제적 수정주의로 일시 득세했으나 김정일에 의해 1967년 숙청된 것이 “갑사파 숙청, 반당 수정주의” 사건이다. 「조선문학」(평양, 2000년 2월호)의 “종자혁명과 100년 사상사총화”에서 1960년대 갑산파의 수정주의가 “리윤봉위의 리베르만 경영방식과 <가화폐>(신용증권)이 도입된 바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甲山派 숙청을 시점으로 김정일 실권이 반수정주의 30년이 시작된 것이다.
1949년으로부터 1960년까지 약 10년간의 전후 아시아 공산주의의 실험은 실패가 분명해졌다. 덩샤오핑의 1982년 개혁개방 헌법으로 중국은 관광개방을 비롯해서 인민공사해체 등으로 시장사회주의로 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 번영의 길로 접어들었다. 뒤이어 75년 사이공 함락후 베트남 공산당(越盟)이 본격적인 소련형 지령경제를 강행했으나 전후폐허위의 저개발 경제가 더욱 피폐화되고 민생고가 심화되어 “가난의 나누어 먹기”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포트피플”의 참사까지 겪었다. 이에 남부 개혁파가 주동이 되어 “도이모이”(doi-moi)의 개혁개방을 단행하여 농업 합작사를 해체하고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이로서 아시아에는 “공산당 자본주의”의 새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시아 공산주의”의 최후의, 최악의 비극을 연출한 것은 캄보디아의 “폴포투 학살 공산주의”였다. 폴포트(Pol pot)는 1949~53년간 프랑스 유학중에 교조적 공산주의에 심취하였고 귀국하여 “붉은 크메르” 지도자로 군림하여 “농민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급진적 사회개조, 인민개조에 착수했다. 1975년 친미 론롤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폴포트는 79년까지 친미 친베트남 성향의 지식인과 중산층과 그들의 자녀까지 무차별 살육했다. 외국어를 알거나 안경을 낀 사람, 초등학교 교사도 지식인이라 해서 계급투쟁의 대상으로 살해했다. 폴포트는 대단히 야만적인 계급주의적 인민분류로 근 170만 내지 200만의 “킬링 필드”의 대학살을 자행했다. 폴포트는 도시를 파괴하고 지식인을 살해하고 남은 빈민들을 농촌의 농업합작사에 강제 이주시키고 사유재산의 몰수, 화폐의 폐지, 지식인 학살 등의 강권으로 천민 공산주의적 “농민천국”을 폭력혁명의 테러방법으로 건설한다는 광기에 차있었다.
폴포트의 극좌적인 공산주의의 광기는 그 나름의 계급타파와 자본주의적 도시의 부패척결, 가난의 하향 평등주의의 “폭력혁명”을 그 나름의 평등주의적 정의감의 실현이라고 착각했다. “폴포트 학살공산주의”는 레닌주의나 모택동주의의 농민 공산주의가 얼마나 반문명적 야만에 이를 수 있으며 “혁명”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계급주의적 “인간분류”가 얼마나 반인륜적인 호로코스트의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극좌적 모험주의의 표본이었다.
1998년 4월 15일 폴포트는 동료들에 의해 체포되어 심장 발작으로 73세에 사망했다. 폴포트는 75년이래 3년반의 농촌 공산주의 광폭의 강행에서 근 200만의 동포를 학살한 반인륜적 죄목으로 국제법정에서 심판받게 되어 있었다.
아시아 공산주의의 극좌적 과오는 폴포트의 학살 공산주의와 더불어 북한의 김부자 독재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북한의 김정일 “先軍” 군사독재는 식량난, 에너지난, 경제총파탄으로 “기아의 공화국”이 되었고 오직 군사주의 모험의 “선군”노선으로 연명하고 있다. “아시아 공산주의”가 그 좌파적 과오를 인식하지 못하고 개혁개방의 결단을 늦출수록 “人民寺院”형의 총자폭의 최후를 맞게될 것이라는 제2의 표본으로 북한의 군사주의 독재가 남아있다.
아시아 공산주의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형이든 “인민 민주주의” 독재든, 그 최후의 모습은 학살 공산주의이거나 전 인민의 “총폭탄, 총자폭”을 강요하는 수령주의 독재임이 드러났다.
4. 近代化혁명으로 되돌아가 다시 하는 “再修革命”
1990년을 전후한 구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동유럽 자유시민혁명을 보고 네오맑스주의자 하버마스(Habermas)는 이 세계사적사건을 “되돌아 다시 시작하는 혁명”(Nachholende Rovelution)이라 명명했다. 공산주의 혁명의 사회변혁론은 시민사회의 토대에 기초한 시민민주혁명이오 “부르주아 민주혁명”인데 볼세비키 혁명이나 모택동의 혁명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뛰어넘는다는 기만적 도그마로 인해 그 공산주의가 실패하고 “再修革命”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도 시장형 근대화에의 복귀를 “중국특유의 사회주의 초급단계설”로 표현했다. 베트남도 “쇄신”의 뜻을 가진 “도이모이” 개혁이라 했다.
그러면 사회주의가 대실패한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근대시민 민주혁명과 “자본주의 단계”의 회피와 생략으로 공산주의 사회를 폭력혁명으로 실현할 수 있다는 레닌주의적 기만테제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아시아와 중국, 한국에서는 산업화와 시장경제, 자유민권 지향의 시민사회의 형성기를 회피, 생략하고 농촌사회의 후진성과 절대빈곤의 극복을 공산주의적 계급투쟁으로 대행할 수 있다는 사회발전단계설의 “범주오류”에서 역사적 과오를 저질렀다.
근대화론은 외자도입, 수출입국, 시장경제 등에 의한 후진국 개발 방식이다. 근대화 즉 근대민족국가 형성의 민족운동은 그 성격이 부르주아 민주혁명·민족운동이다. 산업화를 통해 상공업과 시장제도로 경제개발을 해야할 근대시민사회형성의 역사적 단계에 처해 아시아 공산주의는 자기폐쇄 쇄국의 반서구적, 자력갱생형의 외자도입, 기술도입을 거부하는 후진국 개발 방식의 판단착오로 “反近代化” 노선을 고집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아시아의 4룡”이 이룩한 신흥공업국가(Nies)의 경제개발의 대성공은 그것이 “개발독재” 형이라 할지라도 아시아 공산주의와의 체제경쟁에서 “근대화”형 개발체제가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징표이다. 전후 이란의 호메니혁명과 모택동 주의로 대표되는 “反近代化” 노선은 쇄국적 이데올로기의 대중선동에만 집착한 나머지 크게 실패했다.
과격주의적인 극좌파의 맑스·레닌주의적 사회변혁론의 치명적 과오는 인류사회가 과거 200여년간 성취한 고귀한 유산인 자유주의의 제도적 틀-즉 의회민주주의, 복수정당제, 권력분립, “법의 지배”, 언론자유·인권과 자유시장제도를 부정하고 그 자유주의적 유산의 기반위에 서서 보다 진보된 사회의 실현을 시도하기를 거부한 허위의식의 업보였다. 이는 바로 자유없는 공포정치, 1당독재 고수에 의한 多元主義 거부, 중앙권력의 지령만능에서 “법의 지배”의 실종, 중앙권력의 권력악을 비판할 수 있는 야당과 자유언론의 억압, 따라서 시민사회의 압살에 의한 “예종에의 길” Hayek, The Road to Serfdom.
을 결과한 것이 아시아 공산주의의 극좌파적 오류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자유민권과 민주주의 없는 공산화” 혁명의 암흑상은 죠지 오웰의 “1948년”이나 “동물농장”에 묘사된 역유토피아로 고발되었고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의 테러폭정에 불과했음이 폭로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20세기말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도마저 역전되고 말았다.
21세기에 들어선 글러벌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에도 전체론적 유토피아형 공산주의의 잔영이 맑스·레닌주의의 “보수반동”으로 도처에 남아있다. 아시아의 과거 공산국가들에서도 아직 정치면의 “1당지배”를 유지하면서 부실국영기업의 민영화, 자유시장경제, 국제적 개방, 외자유치의 경제적 자유를 기본으로 한 근대화론이 진보요 지난날의 마오주의적 계급독재, 당독재가 강행한 과평등의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 “보수파”이다.
그러나 강택민, 주룽지 등 중국 지도부는 당의 주체로 “노동자, 농민과 사적기업가”의 3대표를 당강령에 명시했고 헌법에도 “사유재산제도”와 개인 소유권 조항을 넣게 되었다. 맑스의 유물사관의 공식인 토대와 상부구조의 도식에서 경제사회의 생산관계의 “토대”가 시장제 민영화 지향으로 개혁되었으므로 이에따라 그 상부구도에도 중국 인민, 특히 주류지식인의 담론에서도 뒤늦게나마 사상면에서도 개인의 자유, 사상의 자유, 개인소유권 등의 개인주의적 개인의 자아발견의 자각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수반하여 정치도 일당지배의 고수가 미구에 도전받게 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민주국가로 발전할 수밖에 다른 선택이 없게될 것이다.
그동안의 개혁개방 이후 산업화, 시장경제는 다시 개발지역과 미개발지역의 빈부의 격차를 만들고 부정부패등 경제범죄도 만연되고 대형화하고 있다.
“도이 모이” 후의 베트남에서도 빈부의 차가 생겨났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성장하여 베트남 공산당의 보수파들은 구사회주의 유지에 대한 심각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베트남 등에서는 “법의 지배”와 자유언론이 정착되면서 당의 지령이나 권력남용이 국민여론과 법치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지난날 “아시아 공산주의”는 맑스의 “공산주의”도 아니었고 「공산당 선언」속의 “반동적 사회주의”의 유형으로 비판의 대상이었던 “봉건적 사회주의”의 일종에 불과했다. 북한의 김부자 “수령독재”는 봉건적 절대왕정과 나치스적 군사패시즘의 결합같은 “선군” 군사독재가 되어 그 종식에 가까워가고 있다.
맑스는 고대사회의 전단계로서 “아시아적 사회”(Asiatic society)의 특수단계설을 내놓았고 뒤이어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맑스의 “아시아적” 사회의 모형은 오리엔트, 동양에는 “1인의 자유”밖에 없었다는 헤겔의 세계사관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레이몽 아롱은 노예, 농노, 임금 노동자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각 지배계급(고대의 노예소유자, 중세의 장원주, 근대의 자본계급)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 인민이 국가에 종속되는 專制社會 단계가 “아시아적 사회”라고 풀이했다. 그런 사회구조의 특징은 서구적인 계급대립이 아니라 국가나 관료계급이 전체사회 성원을 착취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고 해서 구소련과 같은 공산국가가 바로 “아시아적 전제”의 현대판이라 규정했다. Aron, “Marx”, Main Currents in Sociological Thought, 1, p.121.
아시아 공산주의의 실험은 “1인의 자유”밖에 없는 아시아적 전제를 결과했다.
특히 레닌주의의 계급투쟁설, “당파성”(Partinoschi) 테제, 당파주의적 “인간분류”는 근대자유주의 자생적 신민사회와 민주주의 성장의 토대를 무너뜨린 부정적요소로서 가장 큰 해독을 끼친 도그마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아시아 공산화 해체 후의 잔재인 북한의 “선군” 독재가 바로 전인민을 노예화한 “아시아적 전제(專制)”의 잔영이다.
자유시장 경제와 글러벌 세계화와 정보화의 신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빈부의 격차, 남북문제, 환경문제, 사회적 약자 등에 대한 “사회 안전망”의 문제는 시장실패의 영역으로 공동체주의적 “더불어 살기”의 共生의 철학을 요청하게 되고 진보, 중도, 보수가 공존하는 다원적 가치관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 공산주의”의 근저에 있던 중앙권력 만능의 설계주의적 “당파성” 패권의 독선적 교만은 그것을 진보주의의 이름으로 되살려서는 안될 것이다. “공산주의”의 유토피아의 꿈을 내걸고 구소련이나 모택동의 중국, 북한에서 구소련공산당의 교본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스탈린 철학이 마치 불변의 진리요 진보주의의 복음서처럼 경전화되었던 것은 하나의 미스테리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적대 계급에 대한 비판과 무자비한 투쟁으로 일관된 진보주의가 그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비판에는 대단히 게을렀다는 것은 그 정체가 대용 종교적 도그마의 권력보수주의였음을 반증해준다. 우리는 “아시아 공산주의”의 전개과정에서 맑스·레닌주의나 모택동주의, 그밖의 각국의 공산주의에서 근본적 발상전환의 이론이나 철학이 나왔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공산주의 등 진보주의에는 대담한 패라다임 전환이 없었다는 것이 사상사적 비극이 아니었나 싶다. 오늘의 사회사상에서는 “多元的 유토피아의 길”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산주의”의 성공사례를 찾아본다면, 이스라엘의 농촌공동체 하나인 “킵츠”(Kibbutz)에서 공동노동, 공동분배의 공동체가 살아있다. 그러나 이런 킵츠도 가입과 탈퇴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점에서 구소련형과 전혀 다르다. 남북한의 분단도 민족간의 자유왕래, 서신교환, 거주자유선택권 보장으로 해결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다음 사회발전 단계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맑스주의역사관의 도식의 “대용종교”적 도그마도 재검토해야 하게 되었다.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보다 진보된 사회제도가 사회·공산주의라고 믿는 광신적 이데올로기적 통념의 우상파괴가 시작되었다. 시민적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중앙권력이 비대화되는 “큰정부”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공공권”(public sphere)이 확대되는 가운데 컴뮤니케이션면에서 “강제없는 합의”의 열려진 사회, 개방사회를 지향하는 “작은정부”의 길이 아시아 공산주의의 대안(代案)이 되고 있다.
첫댓글 신일철은 우리나라는 하나도 모르고 딴나라만 아나? 참 안타깝네영
문상호님이 지금 이 똘배의 답글보고 뭐가 뭔지 모르고 있는거 같아 질문을 하다 욕 비슷한 말을 듣고 그냥 나갔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