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평 일원 역사탐방기(4)
4.용문산 전투
양평군의 主山은 용문산이다.
해발1157M의 위용을 자랑하는 용문산은 광주산맥계에 속하며 독립된 山塊이다. 북면은 그 경사가 완만하며 남면은 수백미터의 기암절벽으로 협곡이 발달하였고, 정상은 평정하므로 금강산과 방불하다. 용문산 용문사에는 수령 천 수백년의 은행나무가 있으며 그 차지하는 대지의 면적만해도 260M2에 달한다. 용문사 경내에는 보물 제 531호인 正智國師 浮屠가 있다.
용문산은 거대한 산괴이므로,
용문산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해발800M대의 유명산,중미산이 있고 우측으로는 해발800M대의 어비산,소구니산이 위치한다. 이 산에는 두가지의 설화가 전하는데 하나는 有明山의 유래이다. 유명산은 1973년까지 알려지지 않은 산이었다. 1973년에 엠프로 산악회가 국토탐사 자오선 종주중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 산을 발견하였고 이 산악회 여성대원 진유명의 이름을 따 이 산 이름을 유명산으로 지었다는 기록이다. 또 하나의 설화는 鮮魚峙 고개와 魚飛山의 유래이다. 神仙이 남한강에서 고기를 잡아 올려 소구니산의 능선을 넘어가는데 죽은줄 알았던 물고기가 살아나서 하늘로 날아올라 소구니산을 넘어 어비산에 떨어지므로 그 산 이름을 어비산으로 지었다는 설화이다.
용문산 중앙식당에서 산채정식으로 점심을 때우고 국악인 채세희님의 걸쭉하며 투박한 강원도 아리랑을 들었다. 대기중이던 박춘근 해설사의 안내와 해설로 전국에서 가장 크다는 龍門寺 詩碑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 시비는 충남에서 옮겨 온 오석으로 그 기단아래에 40명이 도열하고도 남았으니 그 크기를 짐작할만 했다.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용문사 일주문을 지나니 흐르는 계곡물을 이용하여 길 경계석 밖으로 "도랑물이 흐르는 숲속 봄랫길"을 만들었다. 이런곳에서는 무조건 양말을 벗고 물속에 텀벙 들어가는 것이 제일이다. 흐름이 세찬 석간수의 냉기는 순식간에 종아리를 타고 등골로 올라왔다. 푹 젖은 속옷이 등짝에 찰삭 달라 붙었다. 일주문에서 용문산 은행나무까지의 길가에는 이 지방 특산인 구절초 길도 만들었고, 무명 가수인 "이동해의 사랑 나르기 콘서트"도 열리고 있었고, "전통 떡메치기"의 공간도 만들었다. 길 옆 자갈이 많이 섞인 산 비탈에는 서울 근방에서 보기 힘든 고로쇠나무,물푸레나무도 지천이었다.
龍門寺 은행나무
용문산 은행나무는 답사객을 압도한다.
노령에 걸맞지 않게 樹勢는 10대 후반의 처녀같이 왕성하다. 수형도 아릿따운 아가씨를 닮았다.이 은행나무는 암수이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용문사 사찰의 출입구 앞쪽 계곡가에 위치한다. 나이는 약 1100여년으로 추정되며 수고는 60여미터에 달하고 가슴높이의 둘레는 12.3M로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로 일컬어진다. 老巨樹답게 그 위용은 답사객들의 상상을 초월하며 樹勢는 왕성하다. 은행나무의 유래와 관련하여서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스승이었던 대경대사를 찿아와 심었다는 설과 망국의 설움으로 실의한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중 심었다는 설과 義湘대사가 들고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수 많은 전란을 견디고 살아남았으며, 특히 정미의병시는 日軍이 사찰을 불태웠으나 이 은행나무만은 살아 남았으므로 天王木으로 일컬어진다. 조선 세종시에는 정3품 벼슬인 당상직첩을 하사 받기도 했다. 옛날에 어느 누군가가 이 나무를 베었더니 톱자리에 피가 쏟아지므로 황급히 도망쳤고, 고종 승하시에는 큰 가지가 한 개 부러졌고, 8.15해방과 6.25전란시에는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는 名木이다.
龍門寺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 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 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어실각,노전,칠성각,기념각,요사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 부도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39호인 은행나무가 있다.
龍門山 戰鬪
이 지역을 답사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용문산 전투에 관한 내용이다.
6.25전쟁중 최대의 전승을 기록한 전투이며, 휴전회담의 단초가 된 전투이다. 용문산 전투는 6.25전쟁시 중공군의 2차 대공세 당시 용문산 지역에 주둔한 한국군 제6사단이 1951.5.18~1951.5.20일까지 3일간의 사투 끝에 중공군 63군단 예하 187, 188, 189 3개 사단을 궤멸시킨 전투이다.
1. 중공군은 중동부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통해 철의 삼각지대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이 전투를 기획했다.
2. 이 작전에서 중공군은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한국군을 격멸하고 38도 선상에 고착된 전선의 균형을 무너뜨린후,
3. 미군을 전,측,후방에서 공격하여 소멸시킨다는 전술 개념이었다.
4. 미군 9군단 예하 용문산 지역에 배치된 한국군 6사단이 주공격 목표였다.
5. 한국군 6사단은 한달전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후, 용문산 지역으로 후퇴하여 사단을 재편성하고, 설욕을 위하여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6. 용문산 1157고지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예하 2연대를 북한강과 홍천강 남쪽에 배치하고 용문산 서쪽에 19연대, 동쪽에 7연대, 사단 수색중대까지 홍천강 북쪽에 배치했다.
7. 송대후 대령의 지휘하 2연대는 사창리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결사의 머리띠를 매고, 지휘관까지 자신들의 식량을 휴대, 불퇴전의 결의로 진지 사수를 다짐했다.
중공군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징후가 포착되자,
8. 사단 좌측의 한국군 2사단과 우측의 미군 7사단이 주 저항선까지 철수함에 따라 한국군 6사단의 2연대만이 청평호 남쪽의 울업산 381고지에 돌출된 상태로 노출되었다.
9. 중공군 63군 예하 187, 188, 189 3개 사단 병력 20,000여명은 2연대 병력을 한국군 6사단의 주력군으로 판단하고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으나, 한국군 6사단 2연대는 군단에서 지원된 5개 포병대대의 조명및 화력지원을 받아 백병전까지 하면서 이를 격퇴하였다.
10.중공군의 포위공격으로 고립된 2연대는 10여차례의 항공지원과 포병지원을 받아가면서 2일동안 고지를 사수했다.
11.반격준비를 끝낸 6사단 7, 19연대가 5.20일 05:00시를 기해 역습을 개시하자 이틀간의 혈투로 기진맥진한 중공군 3개사단의 전선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12.포위당할것을 두려워한 중공군 63군은 21일 새벽,북한강 이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13.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한 한국군 6사단은 패주하는 중공군을 쫒아 가평-춘천-화천발전소까지 60KM를 진격하며, 한달전의 패배를 깨끗이 설욕했다.
14.3일간의 전투결과, 한국군의 피해는 전사107명, 부상494명, 실종33명으로 극히 경미하였고, 중공군의 피해는 전사 17,177명, 포로 2,183명으로 중공군 63군 전체 병력의 절반에 달하는 극심한 피해였다.
용문산 전투이후 후퇴하는 중공군을 쫓아 24~30일까지 전개된 국군과 UN군의 반격작전으로 중공군은 100,000병력과 주요장비를 거의 상실하고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용문산 은행나무, 용문사의 전각들을 둘러보고 다시 내려와 친환경농산물박물관 길 건너편의 金時習 詩碑 앞에서 용문산 전투에 관한 회상에 잠겼을때, 주변에 만개하기 시작한 능소화의 꽃잎은 유난히 붉었다. 핏빛이었다! 보광동5거리에서 담배가게를 하며 평생을 살아 온, 한쪽 발을 용문산 전투에서 잃은 상이용사의 늙은 눈빛이 능소화의 꽃잎에 겹치어 어른거렸다.
龍門山色碧稜稜
寺在寒煙第畿層
老鶴獨棲松嶺月
淸泉閒橈虎溪藤
鐘聲老杜會深省
波影神魚已上騰
我欲駕風凌絶頂
白雲堆裏費靑騰
(김시습 용문산)
(계속)
첫댓글 그렇군요. 잘 알고 재미나게감 합니다.
감사해요.
덕분에 저도 역사탐방 잘하고 가네요.
워요.
저도유적지를 좋아하는데 좋은데 다녀왔습니다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