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어라
<대림 제1주일 강론>(2023. 12. 3.)
(마르 13,33-37)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마르 13,33-37).”
‘대림 시기’ 라는 말은,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시기라는
뜻인데, 주님을 기다린다는 생각이 고정관념처럼 굳어져 버려서
신앙생활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기다리는가?>
신앙생활의 관점에서는, ‘대림 시기’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에게로 우리가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그리고 늘 깨어서
우리를 기다리시는데, 우리가 자꾸만 주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잠들지 마라.”가 아니라,
“취해 있지 마라.”입니다.
36절의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취해서 자고 있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4,48-51; 루카 12,45-46).”
여기서 ‘술에 취하다.’는 “세속의 즐거움에 취하다.”,
또는 “세속 일에 집착하다.” 라는 뜻입니다.
(‘세속 일’만 생각하면서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깨어 있다.’ 라는 말은, 구원받기 위해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잠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1테살 5,7-8).”
이 말에서, ‘밤’은 믿는 것도 거부하고
회개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상징하고,
‘낮’은 충실하게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상징합니다.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날이 빨리 올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모르니까’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이루어지니까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는 ‘재림과 심판의 때’를 뜻하는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각 개인이 인생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설 때”도 포함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라는
말씀에서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온 세상의 주님이신 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깨어 있어라.” 라는 말씀과 관련해서,
‘겟세마니’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분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마르 14,34-40).”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세속 일에 취해서’ 자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마음으로는’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행동으로 실행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향’은 올바른데, 실천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루카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이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루카 22,45).
슬픔에 지쳐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에 대한 압박감과
두려움에 짓눌려 있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아직 ‘부활’을 모르고 있을 때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은,
‘깨어 있음’은 곧 ‘기도하고 있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한 시간’만이라도
당신과 함께 깨어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신 ‘한 시간’은 ‘최소한의 시간’입니다.
신앙생활은 무슨 거창한 수련이나 수행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성덕을 쌓는 일도 아니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또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각자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최선을 다해서 하면 되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곧 ‘깨어 있음’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기도하지 않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