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또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바라”라고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증거케 하신 아래의 본문 말씀은 어떤 면에서는 심히 난해하고 납득이 힘들며 섬뜩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고 혼란이 되기도 하며 극단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통찰하고 따지고 보면 생각 이상으로 단순하고 명료할 수 있는 증거가 아닐 수 없는 것으로 그 형제를 주님의 이름으로 제대로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체가 구원에 참예케 되고 영생에 참예케 됨에 있어서 증거, 증명이 아닐 수 없다는 것으로..
곧 그러한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말씀의 있어서의 핵심이자 실상이며 전부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으로 거듭난 자가 아니라면 불가한 것이고, 그렇기에 만일 누군가가 진심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구원에 참예케 된 증거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말해 모든 인생들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졌고 단절케 되었으며, 말씀을 잃어 버렸고 말씀의 동산인 에덴을 박탈당하게 되었으며, 영적으로는 진노와 저주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노예 상태에 빠진 것으로 사실 말씀을 가까이하거나 누리거나 실천하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아예 불가능이 아닐 수 없게 된 것이고, 더군다나 그 말씀의 핵심인 것일 뿐 아니라 실제로 실천함에 있어서는 결코 쉬울 수 없는 주님의 이름으로의 사랑을 정말 실행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일 수밖에 없는 존재와 실상과 상태인 것인데..
그러나 오직 한 가지 방법과 통로로 인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든 믿음으로 인해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는 것이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며,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으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인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정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고, 본질적으로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뀔 수 있게 됨으로 인해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누리고 실천하며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정말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며 실천하는 자가 있다면, 특히 그러한 말씀 중에서 가장 핵심이자 심히 어려울 수 있는 사랑을 주님의 이름으로 실천하는 자가 있다면 이미 구원에 참예케 된 자임을 증거하는 것임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바로 그와 같은 이치와 원리를 반대로 적용하면 만일 누군가가 그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금도 믿어지지 않고 겨자씨만큼이라도 은혜가 되지 않으며 결코 최우선이 되기 힘들고 특히 주님의 이름으로 전혀 실천할 수 없는 실제인 것이라면 그 자신이 어떠한 모습이나 어떠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과 관계없는 자일 가능성이 작지 않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 안에서 함께 형제된 자를 미워하고 있다면 아래 본문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듯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그 중심을 아시며, 전후좌우의 모든 상황들을 분별하시고, 시간과 공간들, 제한과 한계들을 초월하시며, 선악 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관점과 섭리 안에서는 살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 무엇보다 그 중에 핵심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전부라 할 수 있는 사랑과 정반대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만일 최대한 빨리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그러한 미움이 극복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되며 조금이라도 주님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게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참 다행인 것이고, 오히려 실상은 이미 구원에 참예케 된 자가 확실한 방증일 수가 있는 것이겠으나 만일 끝까지 그러한 미움이 계속되고 변함이 없으며 오히려 심해지게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만이 정확히 아신다는 전제 하에 참으로 그 자신이 어떠한 모습이나 주장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구원과 관계없는 자일 수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말씀 앞에서 실제로 그 자신에게 적잖은 미움의 원인들을 제공했을 상대를 미워하지 않게 되거나 용서할 수 있게 되거나 더 나아가 주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고 심지어는 사랑하게 되는 것은 결코 쉬울 수 없는 것이고, 인간적, 세상적으로는 불가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따지고 보면 원론적으로는 그 자신의 힘이나 의, 세상적 능력이나 방법들로 되는 것은 아닌 것이고, 그렇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에 있어서도 만일 이미 구원에 참예케 된 자가 맞는 것이라면 사실상 그렇기에, 진정 그로 인해 가능할 수 있게 됨이 아닐 수 없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정말 구원에 참예케 된 것이 맞고 진정 제대로 된 하나님의 백성이 확실하다면 그가 누구든, 어떤 모습과 위치에 있든, 어떤 사안과 상황들이든지 간에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서 미워함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긍휼과 용서가 가능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며, 특히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아시며 가장 정확히 판결하시고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능히 온전히 맡길 수 있게도 되는 것이고, 심지어는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까지도 결코 불가능일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한일서3:14~15)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4월 23일(화)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