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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방
약 4:11-17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1-17 / [서로 비난하지 말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헐뜯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남을 비판하거나 헐뜯는다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율법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셈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판정을 내리는 결과가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그 율법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판가름이 아니라, 그 율법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12) 그 율법을 만드신 분인 하나님만이 우리들을 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구원하기도 하고 멸망시키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무슨 권리로 남을 심판하거나 비판할 수 있습니까? 13) [자랑에 대한 경고] `오늘이나 내일 이러이러한 도시로 가서 일년쯤 자리잡고 앉아 한밑천 잡아 보자'고 계획하는 이들이여, 잘 들으십시오. 14) 내일 일을 어떻게 기약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아침 안개와 같이 덧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여기 있으나 얼마 안 가서 사라져 버릴 존재입니다.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만일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사는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해야겠다.' 16) 그런데도 여러분은 마음대로 계획을 벌이고 자랑을 늘어 놓습니다. 이러한 자기 확신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합니다. 17)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 자기의 미래를 계획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서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비방과 판단(11-12) 야고보는 서로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당시 교회 안에 싸움과 다툼이 많이 있었습니다(1). 그 분쟁 속에 서로를 향한 비방과 판단의 말들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형제를 향한 비방과 판단이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1). 성도가 다른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율법의 핵심, 사랑의 본분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2:8; 마 12:28-33). 성도는 율법을 지키는 준행자이지 재판자의 자리에 서지 않아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12). 야고보는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질문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고 하는 자들을 책망합니다. 자기의 위치,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되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계획대로 사는 사람(13-14) 야고보는 장사를 계획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예로 듭니다(13). 장사를 계획하고 장사로 돈을 버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뜻에 따라 삶을 계획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 왜 갈 것인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자기의 욕망에 따라 자기의 방법으로 세상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를 통해서 지산이 성공할 것이라고 맹신하는 교만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들은 자기의 미래에 대한 모든 통제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사람의 생명이라고 지적합니다(14).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속에 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는 사람(15-17) 야고보는 자기의 뜻과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권면합니다. 야고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태도라고 말합니다(15).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고 원하시지 않으시면 하지 않겠다는 믿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마땅히 행해야 할 선한 행실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17).
적용: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계획하여 실행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유명한 영어 속담에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할 때에 '문(文)은 무(武)보다 강하다.'라고 번역하기도 하는 말입니다. 칼로 사람 죽이는 것보다 글로 사람 죽이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라면, 말로 사람을 죽이는 것 역시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서로 헐뜯지 말라
약 4:11-12 / 정근두 목사
오늘 본문은 누구나 특별한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할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누구나 빈번히 저지르는 죄이기에 때로는 전혀 심각하게 생각지도 않는 죄이기도 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이 죄에는 익숙해져 있다 보니 얼마나 큰 잘못인지 의식조차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성경은 이 죄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는 우리를 향해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1. 형제를 비방하는 죄에 대해서 성경은 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신구약을 통 털어서 이 죄보다 자주 지적되고 있는 죄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되고, 거룩한 성도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은 머리를 감고, 새 옷을 갈아입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간에 평상복을 입고 살아갈 때에 어떻게 서로를 향해 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막말을 사용하는 사람, 더러운 말을 내뱉는 사람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혹 민족을 말하고, 정의를 말해도, 저주의 말을 내뱉는 사람은 멀리해야 할 사람이요, 그가 속한 집단은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은 누구를 악한 자라고 합니까? “입으로는 나쁜 말하기 바쁘고, 혀로는 남 해치는 일 꾸미기에 정신없고, 앉으면 하는 짓이 피붙이나 헐뜯고, 한 핏줄 욕하는 일에 정신 없는 자”(시50:19-20, 현대어성경)를 악한 자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시편에는 “몰래 자기 이웃을 헐뜯는 자를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거만하고 교만한 자를 그냥 두지 않으리라.”(시101:5, 현대인의 성경)고 경고합니다.
이런 논조는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악인을 “수군수군 하는 자, 비방하는 자”(롬 1:29,30)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툼, 시기, 분냄, 당 짓는 것”뿐만 아니라 “비방과 수군거림”(고후 12:20)을 고린도 교회의 죄악으로 규정합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벧전 2:1,2)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른 어떤 죄에 못지않게 빈번히 이 죄악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여기 비방하지 말라는 말은 남에게 대해서 나쁘게 말을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은근히 남을 비난하는 말을 하고 듣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달리 없는 사람들을 향해 성경은 단호하게 이 죄악을 지적하고 금지합니다. 남을 헐뜯는 말을 들어주고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짭짤한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을 향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비난하는 대상이 자기보다 어떤 면이든 나아보일수록, 더욱 신나게 씹어대는 우리를 향해 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들어 봅시다. 그리고 이런 비방은 대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대해서 하게 됩니다. 없다보니 비방 당하는 사람은 자신을 옹호하거나 자기 입장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리에 없는 것을 기회로 잘근잘근 씹어대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에 있다보면 한마디 거들지 않으면 주식배당 못 받아 손해 보는 것처럼 너나 할 것 없이 거들어 댑니다. 셋 모이면 없는 사람 하나쯤 난도질해 버리기는 순식간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부디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즐겨 비방하는 것은 이천년 전 세상의 모습인 동시에 오늘 우리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의 모습이자 오늘 우리의 미숙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내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내 형제들아 서로 헐뜯지 말라! 제발 습관적으로 씹어대는 일을 멈추라!”는 본문을 곰곰이 살펴보십시오.
2.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누가 누구를 비방하고 있습니까? 서로 비방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씹는 사람과 씹히는 사람이 서로 어떤 관계입니까? 이 어리석은 짓거리를 멈추도록 하기 위해 야고보는 어떻게 합니까? ‘형제들아’라고 의도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라고 한 절 속에 세 번씩 ‘형제’라는 단어를 골라 사용합니다.
비방하고 비방당하는 너희는 서로 어떤 관계인지 의식하라고 ‘형제’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거듭 사용하고 있습니다. 잘 살펴보면 우리는 자주 가까운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아껴주고 격려하고 칭찬해야 할 형제들을 헐뜯고 있습니다.
서로 비방하는 것은 자기 살을 씹어대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혈육지친을 비방하는 것은 자기 살을 씹어대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앙의 형제들을 비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맺어진 형제자매를 짓뭉개는 일입니다. 우리에겐 신앙의 형제자매처럼 가까운 관계도 땅위에는 없습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하고 이어서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은 그들에게 있도다.”라고 신앙의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주”라고 하는 앞에서 했던 신앙고백이 확실하다는 것은 뒤에 나오는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라는 형제에 대한 고백으로 입증됩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우리의 자매를 비방합니다. 저 멀리 러시아 대통령이나, 중국 수상을 비방하는 일은 우리의 일상적인 죄는 아닙니다. 이집트나 터키의 데모진압 사태를 듣고 한 번쯤 분노할 찌 모르지만 거기에 그칩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대로 습관적인 비난의 대상은 결코 그들이 아닙니다. 자신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항상 가까이 있는 혈육지친이나 신앙의 형제, 자매들을 우리 입으로 씹어대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이 죄악에 관한한 일방적인 질책을 하지 않습니다. ‘비방하는 자는 비방을 멈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자신을 더 잘 압니다.
우리는 그 어떤 다른 사람이 늘 수군대고 비방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난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서로서로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피차에 비방해서는 안 된다고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서로 비방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십 보, 백 보 차이지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편끼리 모이면 상대 편을 비방하고 상대 편끼리 모이면 다른 편을 비방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해서 비방하면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내가 비방할 때는 비방으로 안 느껴지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방할 때는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서로 헐뜯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누가 탁월하게 나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우리 모두는 본질상 이런 일에 익숙해 있습니다. 남을 은근히 깔아뭉개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일에 무의식적으로 단련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모두들 전문가들입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 타고난 질병과도 같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비난 받은 것을 - 그것도 자기가 없는 것을 계기로 비난받은 것을 알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우리입니다. 남을 헐뜯기 잘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비난당했다고 느끼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서 성경은 명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비방 당했다 싶으면 그렇게 분한데 왜 내가 할 때는 시원하게 느껴지는지--이런 이율배반성이 우리가 죄인임을 여실히 폭로해 줍니다. 보십시오. 어떤 짓은 남이 할 때는 참 추해 보입니다. 길 가는 사람이 가래침을 뱉는 것 보면 참으로 더러워 보입니다. 어떻게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되나 싶은데 자기가 뱉어보면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그게 죄인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여럿이 모여서 한 형제, 자매를 비방할수록 재미가 더 짭짤한 지 ‘하하 호호’ 쉴 새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나한테 누가 비방하는 말을 했다 싶으면 부들부들 떠는 게 우리 모습입니다. 내가 하면 그렇게 재미있는 일도 내가 당했다고 생각하면 분해서 잠못 이루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근거 없이 헐뜯는 말은 어떤 법정 전염병보다 빨리 퍼집니다. 얼마나 많은 좋은 관계가 악의에 찬 비난으로 파괴되고 있습니까? 가장 사랑해야 할 형제사이가, 가장 잘 이해 할 수 있는 자매사이가 서로 서먹한 관계가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비난하는, 험담하는 것을 이제는 중단하십시오. 그것은 죄악의 낙입니다.
죄인의 입맛에는 맞을지 모르지만 거룩한 하나님이 보실 때는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여기 모여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말씀에 순종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별로 잘못이라고 의식하지 않고 상호비방을 하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자리에 정신을 차려보면 얼마나 끔찍한 칼을 형제, 자매의 가슴에 찔렀는지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 볼 때에 내가 정말 못할 말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성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랑과 면류관, 기쁨과 위로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헐뜯는 자 외에는 달리 여러분을 기쁘게 할 자가 없습니다. 반대로 그 형제, 자매야 말로 여러분의 인정, 격려, 칭찬이 필요한 사람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3.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율법과 하나님께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더 나아가서 형제끼리 서로 헐뜯는 이 죄악의 심각성은 어리석음 뿐 아니라 율법과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형제를 비방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 됩니까? 어째서 자매를 판단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을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까?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형제자매를 헐뜯는 죄악의 극악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 자매의 행동과 삶을 지배해야 하는 것은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에 따라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만 판단되어야 합니다. 형제를 내 생각에 따라서, 자매를 내 기분에 따라서 비난하는 것은 내가 바로 율법의 기능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그 형제가 지켜야 할 법입니까? 여러분의 눈에 들지 않는다고 모든 것을 정죄할 수 있습니까? 그 형제를, 그 자매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시고 그의 말씀입니다. 내 생각으로 그를 정죄하는 것은 율법의 고유권한 침해입니다. 내 기분에 따라 그녀를 씹어대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권한을 빼앗는 일입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와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시비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생각이나 내 기분이 아닙니다. 시시비비의 규범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내 생각이나 내 판단이 아닙니다. 내 느낌이나 내 기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생각과 행위에 대해, 그 모든 삶에 대해 모든 인생은 오직 하나님 한 분께 대답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걷는 길은 그 분의 율법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아무리 유력한 인생도, 똑똑한 인간도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기분에 따라서 형제자매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만이 너와 나의 삶을 판단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꼭 같은 율법의 지배아래 있다는 것을 의식하십시오. 하나님의 법이 여러분을 향해서도 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형제자매 사이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지고한 법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데, 마치 하나님의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부모가 그래서 안 된다고 야단을 치는데 싱글싱글 웃기만하면 부모를 모욕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형제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까? 율법은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 법입니다. 여러분을 다스리고 있는 율법을 의식한다고 하면 어느 겨를에 남을 비방하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남을 향해서는 대단한 수준을 요구하고 있지만, 거룩하신 율법 아래서 자신을 비춰보면 자신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법에 채 미치지 못하면서도 어떻게 형제를 향해 성자처럼, 자매를 향해서 천사처럼 처신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그 수준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비방할 수 있습니까?
내가 잘난 것을 인정받기 위해 형제의 목을 조르고, 내가 똑똑한 것을 내세우기 위해 자매를 비열하게 짓밟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요구에 채 미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남 비판보다 자신의 처지로 고민해야만 그게 복된 성도입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으로 탄식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오직 하나의 계명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이웃을 비난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요, 율법의 요구자체를 묵살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라는 요구 앞에 사랑하기보다 미워하는, 칭찬하기보다는 시기하는, 격려하기보다는 질투하고 있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으로 인해 괴로워해야 성도의 모습입니다.
신자 된 지 십년, 이십년, 삼십년 되었는데, 아직도 형제자매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있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나하고 좀 다르다고 해서, 내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대로 해주는 것은 희망사항이지 그게 절대적인 법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아무리 좋고 옳아도 형제를 자매를 구속해야 할 절대적인 법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뜻대로 해주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지만 그렇게 않더라도 그가 서든지 넘어지든지, 제 주인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네가 누구인데 남의 종을 향해서 비난하느냐? 남의 하인을 향해서 비난하느냐?’ 바울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깨든지 자든지 남에 대해서 시비 걸지 말라 그가 서고 그가 넘어지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은 그를 능히 세울 수 있는 분이시다.’는 것이 성경의 권면입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어릴 때부터 남을 헐뜯는 버릇을 피하십시오. 버릇이 들고 나면 어른 되어 익숙해지면, 하면서도 부끄러운지 모르는 자리까지 이르고 맙니다. 어릴 때부터 남을 비난하는 것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남의 말을 나쁘게 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한 번 물들면 담배를 끊는 것보다 더 끊기 힘든 죄악입니다. 골초가 되고 나면 담배 끊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남을 비난하는 습관을 익혀 두면 아주 힘든 겁니다. 어릴 때부터 예수 믿는 자녀들로써 자라나는 사람은 아예 남을 비방하는 사람은 말을 꺼내다가 스스로 무안을 느끼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분위기에 못 끼어들면 아파트 분양에서 탈락한 사람처럼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함께 거들지 마십시오. 아무 대꾸를 하지 말란 말입니다. 오히려 그런 말 듣게 된 것을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형제자매가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모였다고 하면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통하지를 않는구나! 나도 그래서는 안 되겠다! 는 것을 느끼게 하십시오. 그렇다고 말로 그들의 행동을 정죄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말하지 않아도 진실로 슬퍼하고 괴로워하면 여러분의 마음은 전달됩니다.
제발 헐뜯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 신나서 같이 덩달아 날뛰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것은 끝없는 악순환입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에 “오늘 내가 간절히 기도하고 하루를 출발하지 아니했더니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나 보다”하고 괴로워하십시오. 고통하고 있다는 것이 전달되면 그 형제가, 그 자매가 비난하는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보다 나은 위치의 형제, 자기보다 열심인 자매를 비방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성도라면 비참한 처지에 있는 성도입니다. 남의 이야기로 ‘하하 호호’하는 대신 그 수준 밖에 안 되는 나와 너의 모습으로 탄식해야 합니다.
슬퍼하라. 애통하라.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남을 깎아 내린다고 자신이 높아집니까? 남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자신이 나타납니까?
그런 것을 즐거움을 삼는 비참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런 초라한 자신으로 인해서 괴로워해야 복된 성도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입법자와 재퍈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야고보가 극단적으로 말합니다. “네가 뭐냐?”
우리도 싸우면 화나서 “네가 뭐냐”하면 할말 다하는 겁니다. ‘네가 하나님이냐? 네 생각이 율법이냐?’고 질책합니다. 형제의 삶이 우리 영역에 있는 듯한 오만한 처신을 신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질책입니다. “너는 도대체 널 어떻게 여기고 형제를 판단하느냐?” ‘하나님 한 분이 결정하신다. 살릴 것인지 죽일 것인지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너는 무슨 권한으로 다른 이를 판단하고 비난하느냐?’ ‘네가 뭐냐?’고 닦아 세웁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 모두를 동일 선상에 둡니다. 우리는 법을 만드는 자도, 법을 따라 재판하는 자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법을 따라 준행해야 하는 자입니다. 모든 사람은 율법의 준행자이지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하고 법을 만드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른 이를 판단하는 것은 잘 살펴보면 자기가 똑똑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깔보고 입법자요 재판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는 처사라는 말입니다.
자기 행동에 대해서 곰곰이 분석을 해 보면 그런 의식이 깔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살펴보란 말입니다. ‘네가 뭔데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바로 율법을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겸손하십시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른 이를 비난하는 습성은 형제 사이를 이간합니다.
싸움과 다툼, 불화와 파괴의 원천이 수군거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비방하는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여러분을 겸손하게 할 수 있습니다. 피차 비방대신 서로 긍휼히 여기도록 하십니다.
정말 어떤 때는 형제자매를 쳐다보기만 해도 속상할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처신하나 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제발 그렇게 안 해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마음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도 몰라서 그러나보다 그 자매도 그게 본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이해하면 됩니다. 나와 똑같은 죄인이기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지 생각해 보면 남이 좀 못한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비난의 돌을 던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이 극악한 죄에서 벗어납시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이후로는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그것은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자식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친인척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신앙공동체 사이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입니다. 더 이상 신앙의 형제자매를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오히려 서로 격려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긍휼히 여기는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 울산교회를 만들어갑시다. 아멘
좋은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 who art thou that judgest another? >
야고보서 4:11-17 / 전원준 목사
오스트리아의 어느 따뜻한 봄에 카를이라는 남자가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벌집 주위에서 춤을 추듯이 빙빙 도는 꿀벌을 보고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벌들의 저런 행동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다음날부터 카를은 밖에 나가 꿀벌들을 좇아다녔습니다.
카를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꿀벌 습성을 관찰했고,
마침내 꿀벌의 모든 신호를 알아냈습니다.
예를 들어 꿀벌이 8자 모양으로 움직인다는 건
동료들에게 꽃이 피어있는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이고,
좌우로 흔들면 꿀이 많은 꽃을 발견했다는 신호였습니다.
평소 카를의 연구를 지켜본 주변 사람들은 쓸데없는 일에
40년이나 허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카를의 이 연구는 꿀벌의 언어체계를 최초로 밝혀낸 성과였고 1973년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우연히 벌어진 일들이나,
내 인생에 일어나는 작은 일들도 무심코 지나가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은 야고보서 4장 후반절 말씀으로
“좋은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책입니다.
우리가 좋은 믿음으로 살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성도들이 특별히 삼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1. 좋은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형제를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
(약 4:12) 『... 남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비방”이란 원어로는 "카탈랄레오"라는 말입니다.
'카타'는 영어로 'against' 즉 '반대 '또는 '적대'란 뜻입니다.
그리고 '랄레오'는 '영어로(speak)' 즉 ‘말한다'라는 뜻입니다.
합해서 '카타랄레오' 라는 단어는 '반대하는 말, 적대적 언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영어에서 남을 험담하는 뜻을 가진 단어는 "backbite"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뒤에서'(back)' 물어 뜯는'(bite)것이 비방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아주 나쁜 모습이 있습니다.
남을 비난하고 비방하는 일입니다.
박사학위가 가짜다. 돈. 여자...등등 빌미를 가지고, 바난합니다.
유명 여배우가 인터넷에 악성 댓글을 달아 비방하는 것을 못 견디어 자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조금 과장하면 비방 공화국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람들은 서로 칭찬하기보다는 비방하기를 좋아합니다.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하고,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속담에 -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약점 중의 하나가 남을 깎아내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상대를 결코 칭찬하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는 신앙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느 교회 목사의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목사가 다 범죄자인 것처럼 비방을 합니다.
한국 교회가 다 병든 것처럼 비방을 해댑니다.
어떤 한 교사가 잘못을 하면 모든 학교가 병들었고,
모든 교사가 나쁜 사람들입니까?
한 공무원이 뇌물을 받았으면 모든 공무원이 나쁜 것입니까>
좋은 음악을 들으면 소도 젓을 많이 낸다고 합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나무도 좋은 과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하물며 사람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비방의 소리가 세상을 지배하면 우리의 정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대인의 교훈집 탈무드에 험담은 살인보다 더 위험하다고 가르칩니다. “살인은 한 사람씩 죽이지만, 험담은 세 사람을 동시에 죽인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서로 비방하거나 비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딛 3: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좋은 신앙으로 살려면, 비방하는 것을 버리고, 서로 칭찬하고 격려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좋은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내 삶을 하나님의 은혜속에 있어야 합니다.
(약 4:14) 『내일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그것은 곧 잠시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라는 책에는 바다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하는 노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바다에서 많은 날들을 기다리다가 천신만고 끝에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그 물고기를 배에 매달고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건져보니 오직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와 스페인 내란을 배경으로 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이 있다. 1952년에는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여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오늘 13절에 나오는 사람은 어떤 유형의 사람입니까?
자신이 철저히 계획하면 그대로 되어질 것이라는 방자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사업계획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세웠습니다.
인생의 마스터 플렌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오늘이나 내일” 분명합니다. 장소도 막연하지 않습니다.
“어느 도시”라고 지정해 놓았습니다.
기간도 “일년 동안 머물면서”라고 확실합니다.
내용도 분명합니다. 사업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4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그의 인생 계획에 하나님이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빠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철저하고 잘 짜인 계획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욥은 고백하기를,“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잠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안개와 같은 내 인생,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도록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3. 좋은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선한 일에 헌신하며 살아갑시다.
(약 4:17)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곧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느니라.』
록펠러는 암에 걸려 1년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았습니다.
록펠러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곧 세상을 떠날 텐데 니 마음껏 자선 사업이나 하고 가렴.』
록펠러는 그때부터 자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아낌없이 주니 가슴이 확 트이면서
마냥 행복해졌습니다.
결국 록펠러는 그 후로 무려 40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엡 2: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결 론 =
우리 성도들은 모두 큰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서 칭찬받는 좋은 믿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 형제를 비방하지 맙시다 - 격려하고 칭찬합시다.
2)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은혜안에 맡기며 십시다.
3) 선한 일을 알고 헌신합시다. 주님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교만의 위험
약 4:11-17 / 안병호 목사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위험은 도처에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위험을 미리 경고 받을 때 우리는 그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우리가 미리 위험을 경고 받지 않을 때 위험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하기 쉽다. 제가 한 번은 시카고에서 잭슨 미시시피까지 가족과 함께 자동차로 운전을 해서 가는 데 지도를 보니 아주 가까운 지름길이 있었다. 그래서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그 지름길로 가다가 큰 위험을 당할 뻔했다. 고속도로가 아니고 좁은 도로이기 때문에 도무지 표지판이 없었다. 급커브에 대한 위험 표시나 앞에 있는 장애물에 대한 표시가 전혀 없고 심지어는 가로등도 없는 길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장애물을 받아 차가 망가지고 만 것이다. 깜깜한 밤에 아는 사람도 없고 시골에서 차는 망가지고 모텔을 들어가고자 해도 현금이 없어 들어갈 수도 없고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위험신호를 미리 보냄으로 경고를 받아 미리 대처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교만에 우리가 빠지지 않도록 교만의 위험을 미리 경고해 준 말씀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잠언은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만에 빠져 인생을 망치고 있는지 모른다. 교만에 빠져 있으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는 참으로 겸손하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 것처럼 무서운 일이 없다. 어떤 사람은 자기야말로 겸손을 빼면 시체라고 말하면서 나는 겸손을 빼고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도무지 내가 왜 교만한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씀으로 경계를 받고 사는 것이 큰 상급이라고 하였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교만으로부터 피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 교만에 대한 경고등은 남을 판단함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마음이 들면 즉각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아 나는 지금 교만에 대한 위험 신호등이 켜지고 있구나 생각하고 금방 교만을 버려야할 것이다. 왜 비판하는 것은 교만인가?
첫째,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금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4:11)
분명히 본문에서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는 다 형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피흘려 구원해 주신 형제를 내가 비난한다면 결국 예수님을 비난한 것이 되고만다. 예수님도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 비난을 자기도 받게 된다고 하였다. 마땅히 정죄하고 비난하셔야 할 예수님도 비난하시지 않고 그 형제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셨는데 감히 네가 누구기에 형제를 판단하느냐고 하였다(12). 비판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만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형제를 비방해서는 안된 것은 우리가 그 형제의 형편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상적인 면만을 보고 비난하기 쉬운데 우리가 형제의 형편을 다 안다면 우리가 형제를 비방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가를 알게 된다.
어떤 젊은이가 비행기를 타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는데 그 어린이가 자꾸 울어대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젊은이를 향하여 비난의 화살을 던진다. “아이는 엄마가 데리고 다니도록 하지 왜 남자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가? 여보, 젊은이! 아이를 엄마에게 맡겨요.” 그러나 그 아이는 엄마가 방금 죽었다. 그는 엄마가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자기의 율법으로 엄마가 없어서 아기를 보느라고 쩔쩔매는 불쌍한 사람을 비방한 것이다.
엘리는 마음이 상해서 견디지 못하며 기도하고 있는 한나에게 술 취했다고 비난했다. 우리는 비판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의 외모만 볼 뿐 그 내면을 모르기 때문이다. 비난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치에 자기를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난하는 것은 최고의 교만이다. 비난하는 마음이 들면 우리는 이것이 나의 교만의 경고등으로 받아들이고 빨리 회개해야 한다.
둘째, 비방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4:11)
율법은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준 목적이요 율법의 가르침의 요약이다. 그런데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비방한다면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마이어는 율법을 파괴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율법을 비방하는 자라고 하였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율법을 비방하는 자가 되고 만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그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는데 사용한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자신에는 적용시키지 않는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 말씀을 누가 듣고 은혜를 받아야 하는가? 아내들이 듣고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남편들이 듣고 은혜를 받는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라' 이 말씀을 누가 듣고 은혜를 받는가? 남편들이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아내들이 듣고 은혜를 받는다. 이것이 곧 율법을 비난하는 것이요,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율법을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율법의 판단자가 되지 말고 율법의 준행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 제가 전한 말씀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말고 자기에게 적용해야 한다. 말씀을 항상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고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는 사람은 형제를 비방하는 자요, 율법을 판단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이다.
셋째, 비판은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4:12)
우리는 설령 비난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비난하는 대신에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고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난함으로 사람을 바꿀 수 없다. 자기도 그 것을 알고 있지만 안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구리와 전갈의 이야기가 있다. 전갈이 넓은 강을 건너야 했다. 그래서 개구리에게 이런 요청을 했다. ?내가 너의 등에 업혀서 강을 건너게 해다오.? ?내가 너를 업고 건널 때 네가 나의 등을 쏘면 나는 즉사할 텐데 어떻게 너를 업겠니?? ?내가 바보인 줄 아느냐. 만약에 내가 너를 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데 왜 내가 너를 쏘겠니?? 그래서 업고 건너갔다. 그러나 도중에 전갈을 개구리를 쏘아 둘이 다 죽고 말았다. 그 때 개구리가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니 네가 쏘아 죽일 것이라고.? ?나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어리석게도 본능적으로 너를 쏘게 되었구나.? 전갈은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도 그 본성 때문에 개구리에게 독을 쏘아 같이 죽고 말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눈이 밝아 비난을 참 잘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며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고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만한 것이다. 기도 많이 한 사람은 결코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에 나에게 비난의 마음이 자꾸 들어오면 나의 기도 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2. 교만에 대한 경고등은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고 욕심에 찬 계획을 세우는데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돈만 벌고자한다면 그것은 교만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4:13)
'이를 보리라'는 말은 헬라어로 '엠포레우스싸이'라는 말인데 신약에 오직 여기 한 번 나온 말이다. 그 뜻은 속이다 이다. 여기서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말은 부정한 방법으로 이를 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 욕심만을 채우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벌기에만 빠져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주제넘은 일인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는 계획을 가지고 욕심을 추구하고 살지만 그 욕심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욕심대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결국은 허사가 되고 만다. 내가 내 꿈과 내 계획을 가지고 열심히 했던 일들은 다 헛수고가 되고 만 것을 경험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고자 한다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몸부림 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 뜻을 이루어주신 것을 많이 체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무시하고 자기 욕심으로 열심히 산다. 그것이 헛된 줄을 알면서도 그런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교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만의 경고등을 보라.
우리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도 교만의 경고등이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4:14)
우리 인생은 참으로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처럼 연약한 자가 무슨 큰 일을 해보겠다고 자기를 의지하고 계획을 세운다면 이 것은 교만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철저하게 주님을 의지하고 살며 주님을 의지하고 계획을 세워야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 것 저 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4:15)
우리가 이런 자세로 인생을 산다면 결코 실패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금년 새해 첫 출발을 하고 있다. 나름대로 많은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 철저하게 주의 뜻에 따른 계획이 되기를 바란다. 자기 의지가 앞서거나 자기 욕심이 앞선다면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루어져도 안 된다.
육신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도 무서운 경고등이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4:16 -17)
우리는 자기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자랑하는 것은 교만의 극치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이 회사에서 내가 아니면 절대로 안될 것이다. 이 교회에 있어서도 내가 아니면 이 교회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은근히 자기 존재가치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 것이 얼마나 교만한 생각인지 모른다. 이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에 게으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나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일에는 게으르다.
자기의 상식으로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고 자기의 직관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것으로 생각한다.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직관이 뛰어나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도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유능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기의 자랑을 버리자. 이것은 참으로 허탄한 자랑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하고 부지런히 기도해야 한다. 이 것이 없는 자는 참으로 영적인 게으른 자이다. 게으른 자와 교만한 자는 서로 상통한다. 우리가 게으르다는 그 자체가 교만하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게으르면서도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자는 절대로 게을러서는 안된다. 게으른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다. 게으른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게으른 자는 자기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뜻 인양 생각하는 교만한 죄를 범하게 된다. 참으로 우리가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하며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자 하는 그런 자세를 가진 사람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지혜로운 사람이다. 아무리 세상 경험이 많고 세상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영적인 일에 게으른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면 안된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쉽게 마치 성경으로 점을 치듯이 성경을 읽은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무조건 성경을 펴 보니 대하 35:21에 속히 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면 무엇을 속히 하라는 말인가? 다시 성경을 보니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5) 그래서 속히 목매어 죽으라는 말이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자야말로 참으로 게으른 자이다. 요즈음은 쉬운 방법으로 신앙 생활을 하려는 사람이 많이 있다. 신자는 무엇보다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히 주의 뜻을 찾기 위하여 성경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주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이 두 가지 경고등이 켜지면 내가 참으로 교만하구나 생각하고 교만을 물리쳐야한다. 남을 비판하는 마음이 들거나, 하나님 없이 자기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꿈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 말이다.
너의 생명이 무엇이뇨?
약 4:12-17 / 한경직 목사
어느덧 一九五四년도 거의 다 저물고 마지막 주일을 당했습니다. 벼남 없이 혼란한 세상에서 어지러운 땅에서 지난 一년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평안히 지내오고 개인으로나 가정으로나 교회로나 국가적으로 받은 모든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연말을 당하게 될 때에는 특히 두 가지 생각이 마음 가운데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는 어떻게 세월이 빨리 갔는지 옛 말에도 광음은 유수(流水)와 같고 살과 같이 빠르다고 하는 말이 있지마는, 아마 오늘말로 바꾸어 말하면 광음은 전파와 같이 빠르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렇게 연말을 당할 때에 우리 교회 안에, 가정에 이미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나라로 가신 이가 여러 분 계십니다. 혹은 우리 아버지, 혹은 어머니, 남편, 아내, 혹은 아들 딸… 우리가 정월 첫 주일 이 자리에서 같이 예배 드린 교우들 가운데 이미 딴 나라로 가신 교우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가만히 생각할 때에 자연히 참 그야말로 인생은 무상하고 우리가 언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이런 생각이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인생의 이런 방면에 대해서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十二 지파(支派)로 흩어진 자들에게 편지하기를『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여 우리의 생명을 안개에 비유해서 말했습니다. 이사야 四十장 六-七절을 읽으면 이런 말이 기록되었습니다.『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화는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은 여호와의 기운이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과 같도다.』여기 인생의 육신 면을 가리켜서 풀에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시편 一0二편 三절에 보면 이런 말로 기록되었습니다.『대개 나의 사는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도다.』연기에 비유해서 가르칩니다. 또한 시편 一四四편 三절에는『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사람은 헛된 것 같으며 그 날은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 같은 것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그림자에 비유해서 가르쳤습니다. 여기에 가르친 모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육신만에 인생을 안개 혹은 연기, 모든 것을 간단하게 말하여 한 가지고 가르칩니다. 인생은 잠깐이어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안개가 잠깐 아침에 보이지마는 조금 있으면 사라집니다. 혹은 푸른 풀은 오늘 아침에 아름답게 자라지마는, 그 꽃들이 찬란하게 피지마는, 오래지 않아서 바람이 불 때 풀은 마르고 꽃은 집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집니다. 연기가 굴뚝에서 나올 때 그 존재를 잠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는 이어 사라지고 맙니다. 그림자가 잠깐 생기지마는 조금 있다가 보면 그림자의 형태도 볼 수 없습니다.
인생의 이 육신 면을 생각하면 안개와 같고 불과 같고 연기와 같고 그림자와 같은 것은 사실인데,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이 사실을 직면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 인생을 잠깐이라고 하는 것, 우리의 육신 면은 곧 사라진다는 것, 이것을 분명히 깨닫고 이 사실을 직면하는 사람은 소극적으로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적극적으로는 참된 축복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소극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이런 면을 분명히 깨달으면 누가복음 十五장에 있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시지요? 어떤 곳이 부자가 있었는데 곡식이 잘 되어서 곡식이 많은데 그 곡식을 다 간직할 창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창고를 헐어버리고 굉장한 새 창고를 짓고 여기에 가득히 두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서는 기뻐서『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네 곳간에 먹을 것이 넉넉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무엇이라 말했습니까?『어리석은 자여, 오늘 저녁에 네 영혼을 부르면 뉘 것이 되겠느냐?』우리가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잠깐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이 부자와 같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줄 아는 그런 생각은 버리겠고 물질이나 금전에 대한 분에 넘치는 생각은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 여러 사람 가운데 이런 사람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란 사람은 젊은 사람이올시다. 아브라함이 아무래도 가산이 많아서 나누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겸손한 아브라함은 산에 올라가서 그들 앞의 넓은 들을 바라보면서 목자가 서로 싸우니 서로 갈라져 있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롯이 우편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롯이 그 산에서 저 소돔과 고모라 벌을 바라보니 토지가 비옥하고 푸른 풀이 무성하고 양치기에 좋아 보였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로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물질을 택했습니다. 의리를 버리고 물질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소돔과 고모라의 땅은 비옥하지마는 그 사람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창피한 꼴을 많이 보고, 마지막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에 겨우 아브라함의 기도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지마는 그의 아내는 소금 기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아간 이란 사람의 이름을 알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에 거기 있는 모든 보물은 바치고 한 사람이라도 개인으로 취하지 말라고 이렇게 명령했지만, 아간이 그 명령을 어기고 항상 살 것 같아서 보물을 몰래 실어다가 자기 천막 밑을 파고 묻어 두었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아이 성 싸움에 승리하지 못하고 실패하여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 제비를 뽑아서 이것은 아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렇게 된 것을 깨닫고 아간의 일족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있다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말을 기억했던들 이렇게 과대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에 내려와 보더라도 유다 는 재주 있는 사람, 예수를 三년간이나 따라다니던 사람,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뽑힌 사람입니다. 마지막에 무엇 때문에 자기의 주를 팔고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습니까?『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우리가 이것을 기억하면 물질에 대한 과분한 욕심, 그것 때문에 어리석은 생활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지위나 권세에 대해서도 어리석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위나 권세도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주시는 것인데 지위나 권세를 받았으면 충성스럽게 그 직분을 감당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거두시면 또한 감사히 그것을 면할 것뿐입니다.
다윗 왕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인물이 잘나서 또한 머리털이 많고 아름다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난 사람입니다. 다윗 왕의 셋째 아들이면 지위도 높고 권세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부러울 것 없을 만한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거기에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 아버지의 지위를 탐냅니다. 그리해서 불량배를 모아 가지고 군대를 조직하여 마지막 기회를 엿보다가 예루살렘 성을 습격했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도망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궁(宮)에 들어가서는 말할 수 없는 추악한 행동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최후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압니다. 마지막에는 관군에게 패해서 노새를 타고 도망하다가 그 많은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서 노새는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상수리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말았습니다. 군사가 쫓아가다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매달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모압 대장에게 와서 보고하기를 그 반역자 압살놈이 그 상수리나무에 매달렸다고 했습니다. 요압은 가서 창으로 압살롬의 신장을 찔렀습니다.
인생의 일생이 지위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 면으로 생각하여 볼 때에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모든 풀은 마르고 꽃은 진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이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이조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에도 우리가 수양대군에 대해서 잘 알 것입니다 자기 형님 문종 대왕의 충신인 사육신을 무죄한데도 참혹히 학살하고 마지막에는 죄 없는 단종까지 학살하고 그리고 자기가 찬탄을 해서 왕위에 올라앉기는 했습니다. 정작 왕위에 올라앉고 보니 꿈자리가 사납고 언제나 마음의 불안한 상태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번민(煩悶)은 심한데 이것을 이길 방법이 없으니까, 그 때 불교로 돌아간다고 파고다 공원자리에 절을 지었습니다. 절을 지었다고 해서 평화가 올 리가 없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꿈에 문종의 황후가 입에 피를 물고 나타나서『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내가 네 아들을 죽일 것이다』하였답니다. 그 후 며칠 후에 자기 맏아들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겨우 十여 년 왕위에 있다가 五十대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네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우리가 지위나 권세나 이런 데 대하여 과분한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됩니다. 양심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음모와 모략으로써 이런 지위를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을 얻으려고 애써서는 안 됩니다.『너희 생명이 무엇이냐?』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때가 있는 것을 기억하여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됩시다. 뿐만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정욕과 향락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이렇게 무상한 면을 바로 깨닫고 이 세상의 정욕이나 향락이라는 것은 일시 있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을 때에는 그런 자리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서 五장에 나타난 벨사살 왕의 연회를 기억하시지요? 벨사살 왕은 젊은 사람이올시다. 호화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일 천 귀인과 후궁을 다 모아놓고 대 연을 배설했다고 그랬습니다.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고 주흥(酒興)이 그야말로 고조하게 된 때에는 심지어는 서언에서 쓰던 기명을 가져오라고 해서 성전에서 쓰던 그 기명에 술을 부어 마시면서 질탕하게 놀았습니다.
한창 놀 때에 갑자기 담에 이상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 날 저녁에 메대 파사군대가 들어와서 연회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이 다 학살당하고 바벨론은 멸망하고 온 세계는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어떤 향락이든지 어떤 연회든지 하나님을 떠난 연회나 향락은 다 벨사살의 연회와 같이 이미 담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써서 판단했습니다.『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달고 달아보니 가벼워 그런 까닭으로 갈라내겠다.』
하나님이 없는 향락,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모든 취미라는 것은 하나님의 저울에 벌써 달아서 가벼워졌어요. 그것을 취하는 사람에게 멸망의 심판이 불시에 올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런고로 성경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너희들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사람이 만일 세상의 것을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대개 세상에 있는 것은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에게로 온 것이 아니 요 이 세상에서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가고 그 정욕도 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 세세 에 있을 지어다.』바로 오늘 아침 신물을 보니까,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 여러 예배당에서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신성한 노래가 들려 나오지만, 서울 어느 모퉁이 어떤 댄스 홀에서는 남녀가 모여서 밤새도록 떠들어서 고요한 밤이 아니고 소란한 밤이 되었습니다.
『너의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하나님을 떠난 모든 향락은 잠깐 있다가 없어집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이 면을 분명히 깨달으면 적극적 면으로 생각할 때 축복을 받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중고 시대에 온 교회가 문자 그대로 의식주의에 흘러가게 될 때 홀로 순 복음의 진리를 굳게 잡고 그 등불을 굳게 잡고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내려온 교파가 있는데 이 교파를 월데시안 교파라 말합니다.
그 교파의 원조는 피이터 와일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전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가 젊었을 때 여러 다른 청년들과 같이 술도 마시고 질탕하게 한창 놉니다. 그렇게 놀던 가운데 어떤 한 청년이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가슴에 손을 얹고 넘어졌어요. 넘어지더니 죽고 말았습니다. 아마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심장마비 같은 병인가 봅니다. 갑자기 죽었어요. 아마 뇌일혈인지도 몰라요. 와일더가 그 청년이 갑자기 급살 하는 것을 보고 머리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왔습니다. 과연 인생이 무엇이냐, 이렇게 인생이 무상하냐고 생각했습니다. 깊이 인생을 생각하게 되고 성경을 읽게 되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참된 신앙에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려니와 루터의 전기를 보아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루터가 어떤 흐린 날, 아마 비가 오고 번개가 치는 날 친구와 같이 길을 갈 때에 갑자기 벼락이 쳤단 말입니다. 옆에 가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루터가 수도사가 되기를 결심하였습니다.
불란서의 유명한 과학자 파스칼은 많은 아름다운 책을 저술한 저술가 요 종교가였습니다. 파스칼의 생활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넉넉한 가정에 태어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인데 한 번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그만 높은 다리 위를 지나가다가 말이 높은 다리에서 그만 실수해서 강에 떨어져서 말도 빠지고 자기도 빠졌습니다. 다리가 불어지면서 죽을 뻔했습니다. 파스칼이 오래 다리를 고치면서 그 때 경건 파에 속하는 좋은 신자를 만나서 참된 신앙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잠깐이라는 것,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바로 깨닫는다고 하면, 우리가 참된 신앙에 자연히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을 쓴 요한 전연에 대해서도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젊어서 군대에 들어갔을 때 보초병을 섰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 잠깐 자기 친구를 채우고 갔다 왔는데 그 사이에 적병이 와서 보초 선 사람을 총으로 쏘아서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꼭 자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 일을 깊이 생각하던 중 번영은 깊은 신앙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잠깐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것이면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서 내 마음이 심히 안타깝고 내 마음이 비장합니까? 그 슬픔도 잠깐입니다. 어느덧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 나라에 가서 만날 때가 옵니다. 부부는 한 몸이라고 했는데 한 몸이 갈라져서 내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내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서 나 홀로 외로이 세상에 남아 외로운 방에서 눈물을 흘립니까? 그 눈물도 잠깐입니다. 어느덧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다 지나고 우리도 하늘 나라에 가서 만날 날이 오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무슨 고통을 당합니까? 우리가 무슨 환난을 당합니까? 이 고통과 환난도 잠깐 뿐입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하늘 나라에서 장차 받을 영화의 중한 것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면을 분명히 깨달으면 자연히 이 세상은 잠깐이니 내가 일할 날이 많지 아니하니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에 주의, 일을 부지런히 하고 국가에 봉사하고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할 것입니다.
전에 제가 신의주에서 일할 때에 저는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그 때 이번에 장로가 되신 강학주 장로님의 할머니이신 최반석 권사 님이 계셨는데 그 때 아마 六十대가 지났어요. 환갑 때가 지났어요, 그렇지마는 건강하셔서 명예 권사인데 교회 일을 어떻게 열심히 보는지 이 권사 님의 심방 하는 법은 한 집에 가서 심방하고는 그저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는 다시 돌아보지 않고 다른 집으로 갑니다. 왜 그런고 하니 돌아보면 편안히 가세요, 편안히 가세요 하여 이야기가 길어져서 심방이 길어지니까 빨리 하려고 한 번 인사하고 다른 집으로 가고 맙니다. 신의주에서 제二 예배당을 지을 때 어떤 가난한 노인이 예배당을 처음 지을 때부터 끝마칠 때까지 늘 나오셔서 펌프의 물을 길어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그저 펌프 물긷는 것을 매일 나와서 끝까지 자기가 담당했습니다.『할아버지가 힘드시는데 어떻게 매일 하십니까?』 이렇게 말하며『나야 나이 많아서 다른 일 할 수 없고 돈도 없어 연보도 많이 못하고 내가 정성을 다하기는 하여야겠는데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으니 죽는 날까지 이 예배당 다 지을 때까지 물을 그냥 푸겠습니다.』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잠깐이란 것을 알면 한 초 한 분을 아껴서 주의 일을 할 것입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옵니다. 낮이 될 때에 너희는 일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옵니다.
내 발로 걸어다닐 수 있을 때에 한 집이라도 심방하고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파하세요. 내 다리로 걸어다닐 수 없는 때가 속히 옵니다. 여러 청년들, 성가대나 유년 부나 책임 맡기면 할 수 있을 때에 열심히 잘하셔요.
왜냐하면 五十대가 지나면 유년 부 맡고 싶어도 누가 안 맡깁니다.『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우리 육신 생명은 이렇단 말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믿는 사람은 인생의 육신 면은 이런 것을 깨닫고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이런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얻어서 이 세상에서는 바로 살고 육신 면을 초월해서 영원히 사는 영생을 우리가 얻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 세월이 여류 하는데 이 나그네 된 나는 괴로운 세월 가는 것 금할 것 아부 없습니다. 우리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세월이 가는 것을 섭섭히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옛 해도 감사로써 보내고 새해도 또한 감사로써 맞이합시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사는가?
야고보서 4:13-17 / 정필도 목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가지고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사는 사람은 바람따라 왔다 갔다 하는 뜬구름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획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날마다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날마다 힘을 집중해 자기의 목표를 성취해나가는 즐거움이 있고 보람도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의 일생동안 엄청난 일을 해낸 인물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만약 예수님이 10시간 후에 오셔서 종말이 된다면 그동안은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하자, 웨슬레는 “나는 평소에 하던 대로 살 것입니다.”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이 짧은 대답을 통해 그의 삶이 얼마나 철저하게 기도와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웨슬레는 그의 생애 50년 동안 42,000번의 설교를 하였고, 200권 이상의 책을 썼으며, 약 40만km의 전도 여행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은 50년 동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하는 동안 그의 하루하루를 철저하고 빈틈없이 계획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계획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계획 없이 사는 사람보다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처럼 오직 자신의 뜻과 욕심을 위해서 계획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7장 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내일 무슨 일을 한다고 큰소리쳐도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는 자랑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기 때문입니다. 시편 102편 11절에는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풀의 꽃과 같고, 그림자 같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건강하던 사람도 자다가 죽고, 날마다 등산하던 사람도 등산을 하다가 죽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건강해 보여도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 이하에 보면 어떤 부자가 소출이 많아 쌓아둘 곳이 없자 곳간을 짓기로 합니다. 곳간을 짓고 많은 것을 쌓아놓으니, 이제는 평안히 즐기며 살아야겠다고 합니다. 그때 주님은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자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농사도 잘 지어 소출이 많고, 곳간을 지어 평생 살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다고 하셨습니다. 왜 어리석다고 하셨습니까? 첫째는 재물만 많으면 평안하게 살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재물만 많이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까? 둘째는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돈이 많으면 안 죽습니까? 사람의 목숨은 재산과 상관없고,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셋째는 재물을 자기를 위해서 쌓아 놓기만 했지, 하나님을 위해서는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쌓아놓은 재물은 하룻밤에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쌓아놓기만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십일조나 감사헌금도 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자기의 뜻과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자랑할 것이 못 되는 이유 세 번째는 절대주권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죽고 사는 것, 흥하고 망하는 것은 모두 주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과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계획을 세워놓고 자랑하는 것은 허탄한 자랑이며 악하다고 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처럼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오직 자기의 몸과 욕심을 이루기 위해 세운 계획은 더욱더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 없이, 주님과는 상관없이 세운 계획은 모두 다 허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계획이 성공을 하고 모두 다 이루어진다고 해도 허무할 뿐입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솔로몬은 자기 계획과 생각대로 다 이룬 사람입니다. 그는 권세와 명예와 인기가 대단했고, 그가 쓰는 그릇은 모두 금 그릇이었고, 그를 호위하는 군사들의 방패는 금 방패였고, 그가 앉았던 왕좌는 상아로 만들고, 정금으로 씌웠다고 했습니다. 그는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렸고, 사치와 향락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왕비가 있지만, 후궁이 700명, 첩이 300명이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던 사람이지만, 그는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주님 없이, 주님과 상관없이, 오직 자기의 뜻과 욕심을 따라 세운 계획은 모두 이루어져도 모두 헛되고, 헛된 것이 될 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 학문을 통달했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며,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아서 저주 가운데서 살다가 영원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저주에서 속량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축복을 받는 것도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계획을 가지고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전도서 3장 12절에는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가장 보람 있고, 좋은 일은 기뻐하며 선한 일을 행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뻐하며 선한 일을 행하면서 살면 자기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그 일을 행하므로 받을 복이 많고, 천국에 가면 면류관을 받으니 좋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는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라고 했습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만이 죄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 숭배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했으니 우상 숭배하고, 살인하는 것만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는데,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서도 죄인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는 것만이 죄가 아닙니다.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선한 일을 하라고 하셨는데 하지 않는 것도 죄인 것입니다.
민수기 15장 32절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면서, 안식일에 나무하러 간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공경하지 않으면, 그것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에는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돌에 맞아 죽을 죄입니다. 그런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오늘날 그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는데, 영광을 위하여 하지 않는 것은 죄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39절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사랑하지 않으면 죄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면서 살라고 했는데 도무지 줄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죄가 되는 것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대로 전도하는 데에 힘써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면서도 죄인 줄 모르고 삽니다.
특히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복음 전하는 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서는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 예수님은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산은 물론이고, 한국을 넘어 땅끝까지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셨는데, 하지 않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둘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전할 수도 있고, 전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돌에 맞아서 기절했는데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버리고 갔지만, 하나님이 살려 주셔서 정신이 돌아오니 그 만신창이의 몸을 가지고 또 전도하러 나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 전하는 것이 사명이고, 부득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복음 전하는 것은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서 한 영혼을 구원한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면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계획을 세우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살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전부 준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살아간다면,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백배의 축복을 계획하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어 바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소원을 가지고 계획을 세운 것뿐인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해서 엄청난 축복을 계획하십니다. 다윗이 전쟁을 할 때마다 이기고, 금은보화도 자기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성전 설계도 그림까지 보여주셨고,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계획을 한 것뿐인데,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시고, 물질도 주시고, 아들도 주시고, 하나님이 전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책을 쓴 케이 아더는 남편이 죽은 후에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자꾸 생겨서 신학교에 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며 휴식을 취한 후 어린이 전도 캠프에서 간호사로 잠시 섬기고 있을 때, 채터누가에 있는 템플 신학교에 가기로 되어 있는 한 부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서 그녀는 하나님께서 템플신학교에 가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케이 아더는 주머니 속에 있는 약간의 현금과 350불의 은행 잔고, 두 아들과 개 한 마리를 차에 싣고 그분의 약속에 의지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어둡고 긴 밤길을 달려 채터누가에 도착지만 가진 돈도 별로 없고, 묵을 곳도 없어서 고민하다 친구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건너편에 있는 작은 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집 앞에는 ‘매물’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건물 주인은 원래 계약금이 600불이지만, 에어컨 설치가 되어 있지 않으니 350불로 깎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값을 융자받을 때까지 짐을 차고에 보관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월요일 아침 일찍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을 찾아가서, 거기서 간호사로 일을 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 직장을 통해 융자를 얻어 그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부동산 중개인은 깜짝 놀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사기 위해 융자를 얻고 싶어 했는지 아느냐며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잘 되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 집은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따로 예비하셨던 것이니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 계획을 세우니까 주님은 이 여인을 위해서 다 계획을 세워놓으시고 벌써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면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계획을 세우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계획을 세워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큰 복을 계획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 삶 가운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왜 기적이 없습니까? 왜 밤낮 먹고 사는데 시달리고 어렵게 삽니까? 주님을 위한 계획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순간 깨닫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서 선한 계획을 세워보십시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서 계획을 세우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허탄한 자랑을 말라!
약 4:13-17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예배의 자리를 찾은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본격적인 장마 예고 가운데 한 주간 잘 보내셨습니까? 순식간에 치고 빠지는 새로운 유형의 비를 자주 경험한 한 주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비가 내릴 때는 해가 나질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시고, 해가 나오면 날이 덥다고 푸념하지 마십시오.
신앙인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비 내리는 속에서도 그 아름다운 빗방울 소리로 인해서 감사하십시오. 다시 해가 나면 그 빛나는 햇살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햇살로 인해서 영글어가고 익어가는 채소와 과일들이 있습니다. 토마토가 붉게 물들어가고 자두와 복숭아도 익어가는 데에 뜨거운 여름 햇살이 필요합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 본문은 성경이 기록된 시대상을 물씬하게 풍깁니다. 13절을 읽어보면 당시 유대인의 모습을, 그들의 생활상을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처음 읽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그들의 생활 속에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처음 독자들은 본문 속에서 그들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유대인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막론하고 인정받는 분야가 몇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그들의 뛰어난 장사 술입니다. 지금도 세계 경제가 그들의 수중에 있습니다만 그때도 뛰어난 사업 수완이 익히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는 소위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구가하는 시대였습니다. 지중해를 중심한 온 세상을 로마가 통일하고,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던, 당대의 고속도로가 뚤리고 있었습니다. 마차가 그 길을 달릴 수 있던 엄청난 인프라가 구축되던 시대입니다.
그리하여 여기저기 새로운 도시가 생겨나던 시기였기에 유대인이 상술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를 누렸습니다. 새 도시가 건설되면 로마제국은 그 도시에 와서 살 사람들을 영입했는데,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시민권을 제공해 가면서 환영했습니다. 유대인이 몰려오면 상업이 활발해지고 온갖 재화가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번영은 유대인의 이주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마 이런 부류의 상인들로 보입니다. 한 장의 지도를 펴놓고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 도시에 가서 한탕 해야겠어, 한 일 년 머물면 괜찮은 저택 한 채쯤 떨어질 거야!”
이천년 전 유대인을 지배하던 상업심리와 오늘 한국인의 마음속에 굼틀거리는 투기욕망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부동산 매매가로 곤혹을 치르기도 하지만 수도권 신도시의 아파트가 상한가를 모르고 투기욕망을 자극하곤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한 때는 소형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로 인해서 당첨만 되면 가만히 앉아서 일, 이억의 시세차액을 얻기도 했습니다. 주택공급을 늘려서 집값을 안정시키고 서민들을 위해 소형 아파트 분양가를 낮춘다는 것이 한 때는 로또 아파트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려 들었지만 요즈음은 땅이나 집에 투기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양자 다 지도를 펴놓고 설치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도사라고 있는 대단한 자만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부분에는 준행해야 할 율법마저 우습게 여기고 마치 율법의 심판자나 재판 자가 되는 듯이 설치는 대단한 사람들을 보여 주고 나서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섭리조차 인정치 않는 스스로 인생의 주인인 양 설치는 부류의 인생들을 등장시킵니다.
지도를 펴놓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곧 부자가 될 듯이 떠들며 그들의 계획 속에 하나님이란 전혀 자리하고 있지 않는 것이 여실히 들어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사를 해서, 사업을 해서 이익을 남기려 드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다만 그 생각 속에 하나님을 전혀 고려치 않는 오만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연간 사업 계획 속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자기 생각대로 될 것처럼 떠드는 인간의 오만함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당시 열국에 흩어진 유대인의 심성이나 오늘 우리 마음속이나 동일합니다. 마치 미래가 우리 수중에 놓여 있는 것처럼 장기계획, 단기계획을 세우고 있는 무한한 자기 신뢰를 성경은 꾸짖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보다 먼저 상황을 분석하고 명석한 판단에 기초한 투자는 반드시 성공으로 연결된다는 확신을 갖고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러한 확신에 가득 찬 인간의 마음속의 오만을 지적합니다.
14절을 보면 그들의 잘못이 여실히 폭로되고 있습니다. 이런 인생들의 치명적인 실수가 무엇인지를 14절은 보여줍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조차 알지 못하는 인생에 불과하면서, 일 년 동안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얻겠다고요?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자신들이 다만 인생에 불과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오 분 후에 일어날 사건조차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는 한낱 인생인 것을 깡그리 망각하는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확실하고 공통적인 사실은 사람들의 미래란 불확실하며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업 계획을 수립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장기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미래는 여러분의 손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확실하며 예측할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13절에 등장하는 인물의 호언장담 속에는 또 하나의 엄청난 진리가 망각되고 있습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 뿐 아니라 인생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잊고 있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쉬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며, 덧없는 것이 인생인지를 인식하기에 실패하는 죄악을 범하고 있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깊이 명심하십시오. 이른 아침에 산책을 나가보십시오. 여러분의 앞길에 안개가 시야를 가릴 때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모습임을 명심하십시오. 곧 아침 해가 떠오르면 사라질 것입니다. 동남풍이 불어도 서북풍이 몰아쳐도 홀로 푸를 것처럼 자기를 과신하지 마십시오. 메뚜기도 오뉴월이 한 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이 40-50이면 자기 인생의 정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대개는 그때 인생의 절정을 이룹니다만 석양이 비췰 때를 미리 기억하고 살아가십시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안개니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질 뿐이니라.”
사람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조만간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대해서 가장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진리는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필연성을 직면하기 거절하는 것은 인생의 교만한 모습입니다. 예기치 않는 시간에, 미리 내어다 보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종말이 닥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은 교만한 자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사는 시간이 불확실한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중병에 걸렸든지 지금 건강하든지 차이가 없습니다. 일 년을 장담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불확실한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될 대로 되라고 살아야 합니까? 내일 죽을지 모르니 먹고 마시자고 해야 합니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고 절규해야 합니까?
소위 쾌락주의자들처럼 살아야 합니까? 그들은 생존보다는 생활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입니다. 먹고 마시고 춤추는 따위의 쾌락에 사는 목적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삶은 쾌락을 얻기 위한 기회로 생각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왜 인생의 유한함과 미약함을 상기시켜 줍니까? 생명은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5절의 권면에 귀를 기울입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주의 뜻이라야- 우리가 살기도 하며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 . .” 예,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또한 살면서 하는 일을 성취하는 것도 주님께 달렸습니다.
일이 이뤄지는 것도 주께 달렸고, 이루어지도록 산다는 보장도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인생은 전적으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 속에, 여러분의 계획 속에, 대화 속에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벗어나서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불확실한 미래, 예측할 수 없는 인생길로 인해 불안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여러분의 계획은 승산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불확실한 미래, 예측할 수 없는 인생길에서 영광스런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위탁된 미래만큼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전능자의 손 안에 위탁된 계획만큼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전능하신 아버지의 손 안에 위탁할 일들은 없습니까? 자신의 생명과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입니까? 이처럼 혼란한 세대 속에 자라나는 어린 것들의 미래입니까? 여러분이 꿈꾸고 있는 내일의 찬란한 계획입니까? ‘예, 주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합니다. 예, 그분 뜻이면 이것이나 저것을 할 것입니다.’
주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긴 확신에 찬 성도들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내 시대가 주의 장중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시31:15) 구약 시인의 고백입니다.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고난 가운데서 신약 사도의 확신입니다.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성도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 누리는 놀라운 위로의 원천입니다. 그 사실은 아는 성도는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확신을 갖고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러기에 모든 계획마다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갑니다.
대표적인 모범을 바울의 언행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 . .” (고전 4:19)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고전 16:7)
바울만큼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맡긴 사람은 드뭅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작별하며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행 8:21) 디모데를 속히 빌립보로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라며 자신도 속히 방문하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면(D.V.)”하는 표현이 서구 기독교 사회는 관습이 되고 말았지만 아직도 우리 성도들에게 크게 부족한 것은 절대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기는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 생각 속에 절대 의존심을 가꾸어 갑시다. 우리 언어 속에 절대 의존감을 나타냅시다.
물론 말만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러나 말조차 하지 않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삶입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하며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니라.”
앞날이 자신에게 달린 듯이 건방진 자랑을 하는 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사람이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서 내일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살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성취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 계획 속에 하나님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고도, 성공과 실패가 그의 손에 있음을 수긍하면서도 실제 삶에서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것은 죄입니다. 이론으로 수긍하면서 실제로 무시하고 사는 것은 바로 죄악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라는 구절은 일반적인 모든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진리이지만 본문의 문맥상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치 않고 스스로 잘난 듯이 건방진 말을 하고 사는 것을 가리키는 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심코 내뱉는 여러분의 말 속에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구주대망 2013년 하반기 첫 주일을 맞이해서 또 한 번 내일을 위해 복된 계획을 수립하십시오. 또한 그것을 즐거워하며 바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항상 “주의 뜻이면” 이란 단서 속에 계획하십시오. “주의 뜻 안에서” 성사되기를 소원하십시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가의 호소를 끝으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정의를 구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주의 뜻을 여러분의 생각에, 올 하반기 계획에 넣는 겸손한 신앙인이 되기 바랍니다. 남은 반년 동안 일마다, 때마다 “그 분의 뜻”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아멘.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
약 4:13-17 / 송기성 목사(정동교회)
어떤 사람들이 오늘이나 내일 다른 도시에 가서 그곳에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노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계획에 대해 성경은 허탄한 자랑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야고보는 ‘들으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들으라’(아게뉜)라는 말은 ‘지금 들으라’(Now listen to me)라는 뜻입니다. 왜 ‘지금 들으라’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들어야 할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따르는 사람은 그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루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루하루의 삶의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에 지금 들어야 할 말씀을 들은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허탄한 자랑을 하지 않고 십자가를 자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지금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일 일을 알지도 못하면서 불확실한 내일이 확실한 것인양 생각하며 살다가 후회를 면치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들이 지금 들어야 할 말씀을 함께 듣고자 합니다.
1. 인생의 무상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잠깐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모른다는 것은 우리 생명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생명이 오늘 하루 동안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의 생명이 오늘 하루 동안에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이 반드시 지금 들어야 할 말씀은 자기 인생의 무상을 깨닫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을 바람직하게 살려면 먼저 인생의 무상함과 유한함, 불안정함과 불확실함을 깨닫고 생명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느끼며 하루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내일을 염려하고나 장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과신하거나 자만하지도 않을 것이며, 아직 주어져 있는 생명과 순간순간의 삶에 가치를 부어하고 의미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부호 존 록펠러(1839-1937)의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나를 위하여 그리고 돈을 위하여”라는 목표를 가지고 인정사정 볼 것없이 돈을 벌어 모았습니다. 그는 30대에 오하이오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설립한 후 한 때 미국 석유없의 95%를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53세에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억만장장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해에 그는 어떤 질병에 걸려 머리카랅과 눈썹이 모두 빠지고 몸은 오그라들어 미이라처럼 되어 갓습니다. 게다가 그는 식욕도 잃고 불면증까지 겹쳐 밤마다 악몽으로 고통을 당하곤 했습니다. 언론에선 그가 1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고 대서 특필했습니다. 그는 고통 가운데서 인생의 무상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무덤 속에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음도 깨달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주님께로 돌아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자신을 위하고 돈을 위하는 것이 곧 파멸의 길임을 깨닫고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카고대학과 뉴욕의 리버사이드교회를 비롯해서 많은 학교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자선 사업에도 천문학적인 기금을 내놓았습니다. 54에 죽을 줄 알았던 그는 98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 전반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 44년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인생의 무상을 개달은 데서부터 비롯된 행복이라 하겠습니다.
시편 90:12에 모세는 하나님께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짧고 무상한 자를 가르쳐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무상을 깨달아야 지혜로운 마음을 얻고 지혜롭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인생의 무상을 깨달았기에 자만이나 욕망에 빠지지 않았으며 겸손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영원을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 자기를 자랑하겠습니까,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자랑하겠습니까. 그러한 자랑은 허탄한 자랑일 뿐입니다. 인생의 모상을 깨달은 사람은 허탄한 자랑을 하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천국지향적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4:15)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이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산다는 것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계획을 세웁니다.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 사람은 결코 게으른 사람이 아니며 무책임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인생의 묵상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존과 순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뜻을 분명히 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전혀 구하지 않고 따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주의 뜻이면’(If the Lord wills), 즉 ‘하나님이 허락하시면’(Deo volente)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고 말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며(약4:16)경고 하였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매사에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면 그 인생의 계획이 헛되지 않고 허탄한 자랑을 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미국 워싱턴 주의 하원의원인 클라이드 발라드 의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젊은 시절 반항하며 지냈습니다. 누구하고나 싸우기를 좋아하던 그는 음주운전으로 감옥에 가기고 했고, 죽을 뻔한 교통사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에게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라고 유언했습니다.
한때 앰뷸런스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던 그는 매사에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큰 화재로 피땀 흘려 이룩한 모든 것이 불에 다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는 그의 건물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의 유언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과 그 자신과의 교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후 사업을 아들에게 맡기고 정치가로 변신한 그는 주지사 조찬기도회를 설립했고, 30명의 상원의원들과 정부 각료들을 모아서 성경공부도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공은 내가 누군가가 되고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있음을 발견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잠언16:9에 솔로몬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물론 자기의 길을 계획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따라서 그는 실족하지 않고 그 계획한 바를 이루게 됩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 염려와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과 하나님의 의를 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3.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4:17)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만이 죄가 아닙니다.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이 악을 행하거나 선을 행하지 않는 죄를 짓는다는 것을 후회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사람도 자기 인생을 그렇게 허무하고 허탄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너희는 내게 지금 들으라’고 한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무상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악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새임을 의식하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살신성인의 본을 보이고 덕을 끼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비록 내일 일을 모르지만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도움을 주는 삶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온 국민이 애도하는 세월호 침몰 참사를 당한 희생자들 중에 단원고 2학년인 양온유(17)양의 이야기입니다. 경기도 안산시 명성감리교회(김홍선목사) 관리집사 양봉진(48)씨의 따님인 온유양은 아버지, 어머니, 세 동생과 함께 교회 사택에서 지냈습니다. 재주가 많고 믿음도 좋은 온유양은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우더니 중학교에 들어가선 새벽기도 반주를 했습니다. 지난 4월 16일 사고 당일 오전 7시쯤 온유는 엄마에게 “배에서 자고 일어났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딸은 결국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구조된 친구들은 비통해하는 온유의 아버지에게 찾아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온유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 주었습니다. “온유는 갑판까지 나왔다가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어요. 방에 남아 있는 친구들을 구한다고...”
온유는 사고 직후 갑판까지 올라왔습니다. 계속 갑판에 남아 있었다면 헬기로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래쪽 선실에서 터져 나오는 친구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다시 선실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온유 양의 아버지는 “걔는 그럴 줄 알았어. 친구들이 배 안에 있는데 그냥 나올 애가 아니어서...” 라며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학교에서나 항상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고 했던 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습니다.
빌레몬서 1:10-12에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힌 중에서 낳은 영적인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간구하기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모, 그의 이름이 ‘유익한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그가 그의 이름답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아들이 된 후에 그는 사도 바울의 심복 곧 심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주인 빌레몬에게로, 더 나아가 교회와 하나님께 유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익한 종을 책망하시고 유익한 종을 칭찬하십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 자기 이익을 위해 사는 것은 허무하고, 허탈할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은 보배롭고 존귀한 인생이 되는 줄 믿습니다.
랍비 토케이어는 그의 책 제목을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야 하비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이기에 우린 인생의 무상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인생일진대 영원히 살 것처럼 신앙 생활을 하며 내일 죽을 것처럼 하루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함으로 하시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아멘! 할렐루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맙시다
약 4:13-17 / 이삼규 목사
우리는 지난 한 주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인생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대 아산을 이끌던 정몽헌 회장의 투신 자살 사건은 모든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세기의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친의 가업을 이어 받아 대북 사업에 정열을 쏟아왔던 젊은 기업인이 대북 송금 문제와 현대 비자금 조성문제로 특검과 검찰의 조사를 받아 오다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명을 끊음으로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 관광사업, 개성공단 사업, 남북철도 연결 등 굵직한 사업권을 현대가 거머쥐었지만 그 과정이 투명하지 않아 그 꿈이 채 실현되기도 전에 이런 비극을 불러 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돈을 많이 벌어 보리라" 얼마나 멎진 인생의 설계입니까? 그런데 야고보 선생님은 이러한 계획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맙시다!"입니다.
1. 허탄한 자랑을 하는 삶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선생님이 말하는 "허탄한 자랑"이라는 말을 정의하기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2장에서 세상의 부를 자랑하며 말로만 경건하며 추상적인 믿음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3장에서는 실족한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모욕하고 지혜로운 체하여 자랑을 일삼는 사람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4장에서는 사람들의 생명과 행위가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에 지배받지 않는 것처럼 ,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하리라고 예상하며, 세속적인 소망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님이 말하는 "허탄한 자랑"이란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탄한 자랑"이란 단어는 '알라조네이아'라고 하는 데 이 뜻은 "허풍 떪, 자랑함"입니다. 허탄한 자랑은 자기 자신의 지식이나 총명에 지나친 자신감을 언급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오만'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고대세계에서 대 무역상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월가를 주름잡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조그마한 나라이지만 돈줄을 쥐고 있기 때문에 미국도 함부로 못하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상업적 재능을 발휘할 많은 기회가 부여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많은 신도시들이 건설되는 초창기였습니다. 때때로 도시를 건설하면서 거주민을 모집하였는데 유대인들은 무조건 시민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와서 사는 곳에는 돈과 무역이 같이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주인공은 커다란 지도를 펼쳐 놓고 어느 한 도시를 가리키며 "여기는 대 무역을 잘 할 수 있는 새로운 도시 같다. 그 곳으로 가자. 그곳에 1년을 머물면서 장사를 하여 돈을 좀 벌어보자. 그래서 부자가 되어서 돌아오자"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계획은 훌륭하였습니다.
그들은 출발 시간도 정해져 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입니다. 장소도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 도시라고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데 원문에는 '이 도시'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계획이 세워졌는데 왜 허탄한 자랑이라고 말합니까? 이 계획은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런 하자가 없지만 신앙적인 안목으로 볼 때 하나님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빠져 있는 설계는 무용지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다고 떠드는 것은 허풍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허탄한 자랑은 다 악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없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그것이 바로 악입니다.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그렇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은 헛된 삶, 죄악 된 삶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하나님 없이 무엇인가를 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해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
하나님 없이 세운 계획은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가정 계획 제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녀의 인생은 제대로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이익을 남기려고 해도 터진 웅덩이라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계획 속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4절을 보십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탈무드에서는 '인생은 어두운 밤과 같다'고 했습니다.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
그렇습니다. 내일 일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열차가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열차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8일 아침 대구 고모∼경산 구간에서 발생한 무궁화호 열차의 화물열차 추돌 사고로 두 명의 아까운 생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구 사람들은 지하철 참사가 잊혀지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이런 열차 충돌 사고가 발생하여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느 누가 열차에서 목숨을 잃을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우리는 이와 같이 내일 일을 모릅니다. 내일은 내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이들은 일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년 계획을 세우면서도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렇게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계획성 있는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비전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미래는 보장받지 못합니다.
눅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보면 됩니다. 부자는 풍년이 들어서 곡식을 쌓아 둘 곳이 부족했습니다. 부자는 말합니다. "내 곡간을 헐어서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재물을 거기에 쌓아두자.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나님은 그 부자를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눅12:20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 고 물으셨습니다.
정몽헌 회장이 왕자의 난을 통해서 형들을 제치고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이제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물론 후세에 대북 사업을 주도했던 선구자라는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꿈도, 재산도 그와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인생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정몽헌 회장이 재벌그룹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더욱 행복한 삶을 영위했을지 모릅니다. 이 사람은 미래지향적인 계획은 세웠지만 불확실한 삶에 대한 계획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불확실한 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미래를 보장해 주시는 주님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2.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우리의 여정을 정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은 주인의 자부 감을 구하러 갔을 때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적히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창 24:12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 결과 이 종이 기도한대 그대로 이루어져 리브가라는 처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 여러 가지 난관과 장애물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여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난 현실에서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이면 살기도하고 이것도 저것도 하리라하는 생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현실에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결과를 다 맡기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직장생활, 가정생활을 하는 것은 내 계획대로 내 뜻대로, 내 지혜와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도시에 가라는 것도 주님의 뜻이면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일년을 유하라 하시면 하는 것입니다. 장사하라 하시고 이것저것을 하라면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유익을 볼지 크게 손해를 볼지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단지 순종하는 삶만을 살아야합니다.
무엇이든지 내 생각대로 다 되리라 마음먹으면 안됩니다. 과거에 대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자랑을 할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 내 자랑이 못됩니다. 그래서 자랑하는 자는 주로 자랑하라 하셨습니다. 또한 현재라는 것은 잠깐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또한 미래는 아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미지수로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에 따른 삶의 결과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른다면 인생이 어떻게 될까요? 세 가지 유익이 나타납니다.
첫째로, 최선의 길을 찾게 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어떤 길이 내 인생의 최선의 길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내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제멋대로 살기 위해 아버지 집을 떠났던 탕자가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15:22) 하나님 아버지 뜻을 따를 때에 제일 좋은 삶이 내 앞에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세요. 그러면 제일 좋은 길이 열릴 것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둘째로, 다른 사람에게 가장 큰 유익이 돌아갑니다.
우리는 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은 대개 이기적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됐든지 우선 나부터 잘 되려는 생각이 대부분입니다. 원숭이를 놓고 재미있는 실험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원숭이 한 마리에게 콩을 뿌려 주었더니 한가하게 콩을 집어먹었습니다. 그 곁에 원숭이 한 마리를 더 넣었더니 보다 빠른 속도로 콩을 집어먹었습니다. 몇 마리를 더 넣었더니 두 손으로 정신없이 입에 집어넣어서 양 볼이 불룩해졌습니다. 사람들의 욕망도 마찬가집니다. 만일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부자 되고, 높아지고, 유명해지고,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게 된다면 상대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빈곤해지고 말 것입니다.
인간의 눈은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두루 살피십니다. 내 뜻을 따르는 것은 내게 유익한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내 뜻을 이루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에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입니다.
셋째로, 영혼의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십자가 죽음까지도 아버지 뜻대로 하시기를 구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시는 데서 큰 만족과 행복을 느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계실 때에 제자들이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불쑥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4:32) 제자들은 누가 먹을 것을 갖다 드렸는 줄 알았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요4:33)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 영혼이 배부르고 만족합니다.
사람들이 끝없이 불만을 느끼고 불행을 느끼는 것은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그 영혼은 배부르고 만족하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갈망하는 사람은 영혼의 만족으로 배가 부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됩니다. 사람들이 망하는 것은 지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혜가 없어서입니다. 자기가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그의 삶 가운데 적용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을 행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최고의 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분을 끝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허무합니다. 이렇게 허무한 인생이 헛되지 않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주의 뜻을 따라 이것저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허탄한 자랑을 버리십시오. 이런 것들은 악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해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주의 뜻이면
약 4:13-17 / 김홍도 목사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네거리를 만나서 어느 방향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동쪽으로 갈 것을 마음에 정하고, 그래도 “이 지팡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지” 하고 던졌더니 서쪽을 가리켰습니다. 다시 던지니까 북쪽을 향했습니다. 계속 지팡이를 던지니까 드디어 동쪽을 가리켰습니다. 그랬더니 “이것 봐라. 이 지팡이가 동쪽을 가리키지 않느냐” 하고 좋아하며 가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도 이런 식으로 믿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자기 고집과 욕심대로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 됩니다. 기독교신앙이 기초가 된 서구사회에서 유행하는 용어가 “하나님 뜻이면”(Deo Volente, 데오 볼렌테)라는 용어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무슨 일을 하거나 계획할 때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뜻이면”(If it's God's will) 한다는 생각이 항상 앞서야 합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성공하게 해달라고 하고 복 받게 해달라고 하면 큰 잘못입니다.
본문, 야고보서 4장 13~16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
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안개와 같아서 내일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면서, 또 생사화복이 다 하나님께 달려 있는데도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으스대고 교만하고 자랑하는 것은 헛된 일이요,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범사에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는 신앙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이냐 축복이냐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인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순간순간 잊지 말아야 할 말씀입니다. 헬라어 원어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체험으로 증명하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5장 17절에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라고 했습니다. 거듭나서 구원받은 성도가 주의 뜻을 알려고 하면 성령께서 알게 해주십니다(요15:15,시103:7).
1. 주의 뜻을 아는 것이 우선순위
크리스천들은 무엇보다 “주님의 뜻인지 아아닌지”를 아는 것이 가장 먼저여야 합니다. 사업해서 돈을 버는 것도, 인생의 어떤 설계를 하는 것도, 모든 “주의 뜻이면” 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앞서야 합니다. 성공하는 것이나 부자 되는 것이나 벼슬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주의 뜻을 벗어나면 성공 같아도 실패요, 부자가 되도 불행이요, 주의 뜻 안에서 가난한 것만 못합니다.
주의 뜻을 거스를 때 가정에도 문제가 생기고 국가적으로도 문제가 생기고 교회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롯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욕심에 찬 눈으로 요단들을 차지하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까지 들어가 살았지만 먼 훗날 큰 불행을 당했습니다. 집과 재산이 다 불에 타 없어졌고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되었고 두 딸과 관계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내의 말만 듣고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결과 가정에 불화뿐 아니라 두고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이 생겼고 세계를 위협하는 이슬람교 테러조직도 생겨난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결과 그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의 손실을 보게 되었고 요나 자신도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나서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그 백성을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육신의 정욕에 끌려 간음하고 살인한 죄 값으로 평생 가정에 불화와 칼이 떠나지 않았고 나라가 환난을 당했습니다.
주의 뜻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인데 이 법칙을 거역할 때 문제가 생기고 고통과 불행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수지맞는 일 같아도, 아무리 기분 좋고 행복해 보여도 “주의 뜻”인가를 먼저 알아보고 주의 뜻이 아니면 용감히 포기하고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주의 뜻인 줄 알고도 불순종하면 더 큰 불행을 가져오고, 더 큰 고통의 매를 맞습니다.“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라고 본문, 17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면서 일시적으로 성공했다고 뽐내고 자랑하는 것은 악한 것이며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주의 뜻을 벗어나서 성공한 것도, 부자 되는 것도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며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공보다, 행복보다, 축복보다, 제일 먼저 주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의 좋은 계획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 뜻을 따라만 가면 진정한 행복과 진정한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주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2. 인생은 짧고 주의 뜻은 영원합니다
성경이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강조하는 것은 인생은 짧고 빨리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했습니다. 안개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빽빽한 것 같아도 햇빛이 비치거나 바람이 불면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뭐 그런 걸 가지고 자랑하고 으스대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편 90편 10절에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한 말씀대로 인생은 안개와 같이, 바람과 같이 신속히 날아가고 마는 짧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동안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이 짧은 인생에 성공하고 부자가 되어도 뭐 자랑할 것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오늘 성공하고 행복한 것 같아도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자랑할 것도 없고 행복해 할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27장 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부터 보면 한 부자가 농사를 많이 지어놓고 곳간이 모자라자 곳간을 더 크게 짓고 거기다 곡식을 쌓아놓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려고 했습니다. 19절에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라고 했습니다. 재물만 많이 쌓아두었다고 오래오래 평안히 쉬고 마시고 즐거워할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착각하고 있는 부자에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20절)라고 하시면서 그날 밤에 그 부자의 생명을 불러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21절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다 착각하고 있는 것은 재물을 많이 쌓아두면 그만큼 오래오래 행복할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그렇게 길지도 않고 또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63빌딩이 하루아침에 남의 손에 넘어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이 하루아침에 폭삭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돈 많고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급성질환에 걸려 죽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주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만이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본문 15~16절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라고 하시고, 17절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만이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재물도 하나님의 뜻대로 써둔 것만이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한 부자가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절)라고 하자 그의 영혼을 그날 밤에 불러 가셨다는 말씀을 하시고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21절)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란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을 쓴 사람이요, 영원한 곳에 보물을 쌓아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 쓴 재물이나 나를 위해 쌓아둔 것은 다 내 것이 아니고 “주의 뜻”을 따라 써둔 것과 하늘에 쌓아둔 것만이 영원한 내 것이요,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청지기가 청지기직을 빼앗긴 후를 대비해서 써둔 것을 보고 지혜로운 청지기라고 칭찬한 것도 주인의 뜻대로 써둔 것만 영원히 내 것이 된다는 교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부터 있는 말씀도 땅에 쌓아둔 보물은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적이 구멍을 뚫고 가져가면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써둬서 하늘에 쌓아둔 것만이 영원히 남는 것이요, 내 것을 만드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것은 심판의 물이 임할 때 타 없어지지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타지 않고 영원히 남는다고 하신 말씀도 “주의 뜻”대로 행한 것은 영원히 남고, 자기 영광이나 자기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상을 받지 못하고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 것만 영원히 남는다는 교훈입니다. 인생은 짧고 주의 뜻은 영원한 것입니다.
3. 주의 뜻이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주의 뜻”을 선택하면 고난과 위험이 올까봐 두렵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주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것이라고 답해주었다고 합니다(The safest place in the world is right where God wants). 즉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곳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위험할 것 같고 많은 고통이 올 것 같지만 정말로 가장 안전한 것이요, 진정한 축복인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풀무불에 들어갈 것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안전하게 구출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 6~8절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복된 길이며 진정한 성공의 길입니다.
또 우리 인간은 미래를 알 수도 없고 행· 불행을 결정할 권리도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 좇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33절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인생을 사는 것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켄터키 주에 깊고 험한 동굴이 있다고 합니다. 가이드가 “안내자를 가까이 따라가십시오”(stay close to your guide)라는 말을 반복해서 관광객들에게 하더랍니다. “주의 뜻”을 알아내고 주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길입니다.
“주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위험과 고통의 길이 아니라 진정으로 성공하는 길이며 행복한 길입니다. “주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은 쇠고랑(shackle)을 차는 것이 아니라 열쇠(key)를 가지는 길입니다. 잠긴 문을 열고 참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주의 뜻”을 알려면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들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모르면 주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특히 무슨 일을 결정할 때 기도해 보지 않고 결정하는 것은 실패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감정대로 하면 안 됩니다. 수지타산을 앞세워서도 안 됩니다.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가리이까, 말리이까?” 하고 기도해 본 후에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 결과 백전백승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교만과 고집이 깨어져야 합니다. 안 깨지면 순종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실패와 손실과 사고로 두드려 맞게 됩니다. 얻어맞지 않으면 인간의 고집과 교만이 깨어지지 않고, 순종을 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14년 동안 머슴살이하며 깨어졌고 얍복강 여울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위골이 되면서 깨어졌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머슴살이하면서 교만도, 혈기도 깨어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구속의 은총에 감격하여 주님을 사랑하면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의 뜻을 알아볼 것도 없이 날마다의 생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일주일의 하루, 거룩한 주일을 엄격히 지키는 것과 모든 수입의 10분의 1, 십일조를 정확히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나 음란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나 명확한 하나님의 뜻이므로 주의 뜻을 알아보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주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고 인생은 짧고 “주의 뜻”은 영원한 것이며 “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위험한 것 같고 손해나는 것 같지만 가장 안전한 것이요, 진정한 성공의 길이며 영원히 복 받는 길입니다.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는 것
약 4:13-17, 눅 12:16-21 / 김명혁 목사
어제 아침 송명희 시인이 저에게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매년마다 하는 말이지만 어느덧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게 되는군요. 지난 해의 아쉬움에 ‘돌이킬 수 있다면...’ 하는 마음도 들지만 그 시간으로 돌아 간들 달라질 상황도 아니고 그 때로 돌아 갈 수도 없습니다. 날로 세상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워도 흔들리지 않음은 하나님이 저를 붙잡으시고 많은 분의 사랑과 기도에 힘 입어 살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내년에 아무 목표도 계획도 없지만 주님 앞에 가기까지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아프면 아픈 만큼 성숙함을 주시고 잃은 것이 많을수록 얻는 것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2003년도 역사 속으로 지나가고 모든 상황이 물 흐르듯 변해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요동치 않음을 확신하며 2003년을 보냅니다. 앞으로도 서로 위로하고 기도를 나누며 아쉬움 없는 사랑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소원하며 제가 갚지 못하는 큰 사랑에 감사 드리는 마음을 전합니다.” 저는 요사이 송명희 시인과 마음과 영혼을 주고 받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즐거운지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 25일 성탄절 날 오후에도 저의 집 사람과 송명희 시인을 방문하고 사랑과 위로를 주고 받았습니다.
오늘 2003년도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자세를 한번 점검해 보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자세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너무 긍정적이고 자신만만한 자세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문제이고, 너무 긍정적이고 자신만만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며 너무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어리석고 악한 삶의 자세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계획을 세워놓고 자랑하고, 내일을 기대하며 자랑하고, 자기의 뜻을 내 세우며 자랑하는 것을 어리석고 악한 삶의 자세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20,21).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니라”(약4:16). 박윤선 목사님은 이와 같은 자신만만한 삶의 자세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힘을 믿고 덤비는 교만한 삶의 자세라고 지적했습니다. 오늘 세 가지 허탄한 자랑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사업에 대한 계획을 세워 놓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허탄한 자랑입니다.
계획을 세우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리석은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사업과 자기 인생에 대한 계획을 멋지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할 수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고 그리고 귀국해서 사업가나 교수나 정치가나 예술가가 되려고 하는 인생 계획을 멋지게 세울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사업가는 아무 도시에 가서 어느 기간 동안 그곳에 유하며 장사를 해서 이를 보려는 멋진 계획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농업가는 밭을 늘리고 곡간을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을 그곳에 쌓아 두려는 멋진 계획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쌓아둔 곡식과 재물을 가지고 말년을 편하게 살면서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려는 흐믓한 계획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사실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닌데,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리석고 악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여”라고 했고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아무리 우리의 인생 계획이 지혜롭고 선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고백한 대로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또는 일의 성취는] 여호와께로서 나”기 때문입니다(잠16:1). 또 솔로몬이 고백한 대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이기 때문입니다(시127:1,2). 둘째는 아무리 우리의 사업 계획과 인생 계획이 멋지게 세워지고 멋지게 이루어질지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의 성공과 행복에 관계된 것이라면 그것은 어리석고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기의 사업 계획과 인생 계획이 멋지게 세워지고 멋지게 이루어져서 제2의 이병철 회장이 되고 제2의 정주영 회장이 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모두 어리석고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힘을 믿고 덤비면서 자기 사업과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워 놓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허탄한 자랑입니다.
둘째 내일 일을 장담하며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허탄한 자랑입니다.
내일 일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모두 어리석고 악한 것은 아니지만 내일 일을 장담하고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고 악한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내일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시대가 우리의 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시간과 자기의 시대와 자기의 내일이 마치 자기의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내일 일을 장담하고 자랑할 수가 있는 데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고 악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라고 야고보가 선언했습니다.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습니다”(시31:15) 라고 고백했습니다. 안의숙씨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고 고백했습니다.
내일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의 내일이 잠간이고 우리의 인생이 무상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야고보가 말했습니다. 모세는 우리의 인생이 “밤의 한 경점”과 같다고 했고 “잠간 자는 것”과 같다고 했고 “아침에 돋는 풀”과 같다고 했고 “신속히 날아가는 살”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내일이 영구할 것처럼 장담하고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악한 일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한 부자는 내일 일을 이렇게 장담했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12:19).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장담과 자랑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이것이 우리가 할 고백입니다. 김헌씨는 금년 초에 아주 어려운 병에 걸렸습니다. 백혈병과 혈액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힘쓰고 교회 봉사를 힘쓰면서 하루하루를 하나님께 맡기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몸에 병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전과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백혈병과 혈액 암이라는 진단이 혈소판 감소라는 진단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김헌씨는 죽고 사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내일 일에 대한 장담을 버리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소박하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김헌씨는 이전보다 더 밝은 희망과 기대와 기쁨을 누리며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장담하며 자랑하는 것이 허탄한 자랑이고 하루하루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고 선한 일입니다.
셋째 자기 뜻을 내 세우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허탄한 자랑입니다.
자기 뜻을 나타내는 것이 다 어리석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 뜻을 너무 강하게 내 세우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허탄한 자랑입니다. 여기 ‘뜻’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will’ 이라는 말입니다. 의지라는 말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자기의 주장과 자기의 고집이 너무 강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 의지가 너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눅12:18,19). 자기 의지가 너무 강해서 ‘절대로’(never) 라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절대로]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I will never fall away.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요13:8). You shall never wash my feet.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Never Lord, This shall never happen to you.” Never 즉 절대로 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뜻과 의지와 주장이 너무 강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내 세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착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는 주님의 뜻을 내 세웠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세 번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야고보는 자기 뜻이 강한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다가 지혜로운 사람은 “주의 뜻이면”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주의 뜻을 먼저 내 세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원리는 “주의 뜻이면” 이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면”이 사도 바울의 삶의 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행18:21).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리라”(고전4:19).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고전16:7). 우리가 항상 고백하여야 할 말은 “주의 뜻이면” 입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우리 가족이 미국 동부에서 공부를 다 마치고 서부 캘리포니아로 가서 8개월 동안 풀러 신학교에 머물면서 연구도 하고 쉬기도 하려는 멋진 계획을 세웠습니다. 서부에 가서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캠퍼 트레일러를 하나 사 가지고 자동차 뒤에 매 달고 서부로 가고 있었습니다. 신나고 즐거운 멋진 기분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펜실베니아 산맥을 지날 때 눈이 오기 시작하더니 자동차와 캠퍼가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길 옆은 깊은 낭떠러지였습니다. 우리는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동차와 트레일러가 낭떠러지 난간에 부딪혀 섰습니다. 180도 선회한 것이었습니다. 오던 길로 언덕 위로 다시 올라가서 다른 길로 또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리조나까지 갔을 때 저희 아들 철원이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매 달고 오던 캠퍼를 어느 개스 스테이션에 맡기고 시속 200 킬로로 30여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서 로스 안젤스 어린이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 우리가 깨달은 것은 우리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새해에는 겸손한 삶의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계획보다는 주님의 계획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내일에 대한 거창한 기대도 하지 마시고 하루하루를 소박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주님이 하신 말씀인데 박윤선 목사님의 묘에 쓰여져 있는 말씀입니다. 내 뜻과 주장을 너무 강하게 내 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의 뜻이면”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소박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을 하늘과 땅과 우주를 손에 쥐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종말론적 선행
약 4:13-17 / 이중표 목사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나 새 천년을 산다는 것은 너무도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특별히 새 천년 한 해를 보내면서 송년주일로 맞이했습니다. 첫 주일이 우리의 출발이라고 말한다면 끝주일은 종말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직선적입니다. 불교는 윤회적이기 때문에 돌고 돈다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시작이 있고 코스가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기독교의 시간관입니다. 우리의 생에 다시 없는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청년시절 또는 장년시절, 노년시절 어떤 세월을 살든지 우리의 생애는 한 번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연습할 시간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연습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어린시절이나 어른이나 한 번 살다 가기 때문에 되풀이 할 수 있는,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대로 한 번이고 그대로 종말일 뿐입니다. 이 역사의 방향을 따라 인생은 한 번 살다 갈 뿐입니다. 아무도 우연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에 한 번이 지나가는 하루 하루가 우리에게는 마지막이고, 최후요, 전부입니다. 이런 엄숙한 한 해를 우리는 마감하면서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입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나의 나 됨의 본질을 아는 것이 인간됨의 최고의 지혜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자기의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 역사속에 이 시대에 태어나 존재하는가 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가장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을 바로 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기 할 일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하는 일로서 보람을 느끼며 인생을 창조하며 삽니다. 그것은 그 일에 대해 자기 자신이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가치감을 느낄 때 자기 삶의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인생의 과정에서 사춘기가 있고 사추기가 있습니다. 사춘기는 소년시절 봄을 생각하는 때요, 사추기는 가을을 생각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춘기 때는 화사한 봄철에 꽃이 피듯이 우리 외모의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옷도 자주 갈아입고, 인물도 생기가 있고, 모든 삶이 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40이 넘으면 자기 외모에서 어떤 모양을 내는 것으로는 만족이 없습니다. 사추기는 가을을 생각하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으로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산에 가보면 가을꽃은 초라합니다. 가을은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나무에도 열매요, 곡식에도 열매가 있어야 아름다운 것이지 꽃이 피는 것으로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나이가 40이 넘으면 자기 삶에 의미가 있어야 됩니다. 가치가 있어야 됩니다. 보람이 있어야 됩니다. 나이가 40이 넘었는데도 아무런 보람이 없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인생이 공허해지기 시작합니다. 50이 넘고 나이가 든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립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나' 하면서 공허를 느낄 때 그 인생이 우울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적의 상실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그의 인생의 무의미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한 해가 기울어가는 이 시간 자기 자신에게서 삶의 목적에 맞는 일을 하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셋째는 인생의 종말을 아는 것입니다. 종말은 인생이 끝나는 날입니다. 죽는 날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입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죽는 날이 있습니다. 자기 종말을 알고 산다는 것은 놀라운 지혜입니다.
종말은 어떤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도 잘될 때 끝나는 날이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는 날도 있습니다. 직장에 들어갔으면 나올 날이 있습니다. 올라갔으면 떨어질 날이 있습니다. 종말을 아는 사람은 인생의 나이를 알고 인생의 허무를 압니다. 사는 날이 짧은 것을 압니다. 자기 사는 날을 헤아리는 것이죠.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
야고보 사도는 인생의 짧음과, 허무성과, 연약함에 대하여 간략하고 명료하게 우리에게 표현해 주었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지금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요. '한 해가 사라졌구나! 내 인생에 다시는 안올 세월이 흘러가고 있구나!' 그런 허무감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날을 계수함을 가르치사 우리가 몇 날이나 사는지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옛날에 다윗은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화려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종말을 생각했고, 세월을 생각했고, 인간이 연약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시 39:5)
사업이 든든하다, 건강이 든든하다 말하지만 이것이 언제 안개처럼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잘 묘사했던 솔로몬 왕은 인생의 헛됨을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바람은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바람을 잡으러 쫓아가는 것처럼 인생을 어리석고 헛되게 산다는 것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앞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말이 앞서 있습니다. 내일이 뭡니까? 내일은 네 날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주시면 있고 안주시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모든 날들이 다 주께서 주신 날이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 날이고 거두시면 내 날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전세 기한동안 이 지구라는 전세 집에 살다가 끝나라 하시면 끝나는 것을 안다는 것이죠.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전세 기한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지금 전세 기한 중에서 1년이 갔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그래서 계산해야 됩니다. 그래서 실로 인생의 사는 날에 대하여 덧없음이 지나갔던 허무한 인생에 대하여 지나간 우리 조상들은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내 청춘 누구 주고 뉘 백발 가져온고
백발이 오가는 길 알았더면 막을 것을
알고도 못막는 길이니 그를 서러워 하노라
어떤 분이 그랬습니다. "60이 넘으니까 1년이 새롭고, 70이 넘으니까 한달이 새롭고, 80이 넘으니까 하루가 새롭다."
우리의 세월이라는 것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허무를 느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짧은 인생동안 속지 말아야 됩니다. 젊어서 모은 재산, 퇴직해서 가진 돈 사기 당할 때 그 억울함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그 억울함이 늘 있습니다. 세월 속에서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청춘을 고스란히 사기당한 것처럼 살아가는 것, 헛된 일에 분요할 때, 짧은 인생을 속아서 헛되이 살고 나중에 사기 당한 것처럼 억울해 탄식하고 괴로워할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속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에 속고 있습니까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13절)
이것이 무슨 말인 줄 아십니까? 사는 목적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사기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사기 당하고 있느냐? 어떤 이익을 추구하면서 사기 당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그의 년간 계획입니다. 치밀한 계획입니다. '이를 보리라' 분명한 그의 목표가 있습니다. 당시에 새로운 도시가 서면 많은 장사꾼들이 거기에 가서 사업을 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현재나 그때나 시장을 개척해서 나가려는 사업의 계획은 똑같습니다. 이 사람이 돈 벌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한가지가 문제입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가 여기 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돈을 번 이후에 계획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계획이 없습니다. '이를 보리라' 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목적이 없으며, 하나님을 위한 계획이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돈을 벌면 돈버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사업을 하면 사업의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목적이 없습니다. 빌딩을 짓는 것이 사업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이후의 목적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있어야 합니다.
얼마전에 평화시장에서 지게꾼이 장사를 해서 오천 만원짜리 적금을 들어서 은행으로부터 상패와 저축상을 받았습니다. 사회자가 수상자에게 물었습니다. "그 돈으로 무엇하겠습니까?" 수상자는 주저없이 대답했습니다. "저금해야지요. 그리고 금년에도 5천만원 벌어 적금하렵니다. 그래서 일억을 만들랍니다." 사회자가 또 묻습니다. "그 일억으로 뭘 하시렵니까" "계속 저축해서 일억 오천을 만들랍니다."
이 사람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풀빵 장사해서 오천만원 적금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돈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이 돈 버는 재미도 있고, 돈 갖고 있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재미가 없습니다. 돈 쓰는 재미가 없습니다. 돈 쓰고, 칭찬듣고, 보람을 얻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슨 목적으로 살고 있습니까 한 해를 결산할 때 무슨 목적으로 사셨습니까 '오늘이나 내일이나 돈 벌고 이를 보리라' 하는 마음뿐입니까? 빌딩이나 짓고 사업이나 늘리다가 죽으시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 벌면 성공했다 말합니다. 그런데 돈 벌고 부도난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 벌고 양심을 부도내고, 돈 벌고 인간의 의리를 부도 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실패했어도 그가 진실하게 산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남들이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섰다면,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고 있다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기 생에 대하여 속지말고 살아야 합니다.
미국 시카고에 가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 목사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가 젊은시절 아버지의 도움으로 남미 브라질로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리오데자네이로 한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혼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세계에서 돈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호텔에서 60대로 보이는 한 노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보, 우리가 그동안 고생한 가치가 있지 이제까지 60년이 넘게 먹지 않고, 쓰지도 않고, 고생만 하다가 이런 멋진 휴가를 보내며 오늘밤에는 이렇게 호화로운데서 호강을 하니 고생한 가치가 있지"
빌 하이벨스 목사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노부부가 그렇게 어리석어 보이고 측은하게 보이더랍니다. '일생 안먹고, 안쓰고, 고생하다가 고급 식당에서 저녁 한끼 먹는 것이 뭐 그리 행복하단 말인가?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란 말인가 그는 그날 숙소에 돌아와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제가 적어도 이보다는 더 가치있는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 이것보다는 더 영광스런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 그는 그때 일을 통해 인생의 목적과 행로에 대해 귀중한 깨우침을 얻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목적없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자의 종말을 교훈으로 남겼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 12:16-19)
이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밭에 소출이 많아 큰 곳간을 짓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그리고 내 영혼으로 하여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리라"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라고 말씀하셨고 부자는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죽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 오늘 우리 사회에 산다면 그는 크게 성공한 사람일 것이요, 사회적 명성과 존경을 독차지 할 것이요, 그는 아마 경제계에서 극소수의 특권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예수님은 왜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사는 목적을 먹고 마시는 동물적 가치관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목적과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의 목적이 자기 안일과 행복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 견딜 수 없으리 만큼 모든 것이 무의미하여 질 것이다. 그러나 반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목적이라고 생각하여 보라 그 순간 영구한 희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사업에 성공했다고 떵떵거리면서 인생을 탕진하는 사람을 보면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시 17:14)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신을 평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설문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생명이 일년만 남았다면 어떻게 쓰겠습니까?" 이 설문에 대하여 대답은 다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을 도우면서 살겠다, 주면서 살겠다, 전적으로 사랑하면서 살겠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오직 사랑하며 살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높이 평가되어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착해진다고 합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 가지 일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좀 더 참을 것을, 좀 더 베풀 것을, 좀 더 재미있게 살 것을 그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좀 더 참지 못해서 마음 상하고, 천천히 판단해야 되는데 조급하게 판단해버리고, 평가해버리고 절망합니다. 지난 일년을 회개해 보세요. 참지 못한 언행으로 잃어버린 우정, 평안, 진실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참을 것을 후회하는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좀 더 베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운 것이지요. 내가 좀 더 넉넉할 때 핑계를 대면서 베풀지 못했고, 줄 수 있었을 때 안주었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우리는 선을 행하여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으로 선한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기적인 마음을 포기해야 됩니다. '이를 보리라 하는 자'는 남에게 선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선을 알지만 못합니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양심이 고발합니다. 다른 사람도 기만합니다.
오래전에 미국 보스턴시에 스토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을 가졌으나 그 꿈을 이루는데 필요한 돈이 없어서 거부인 바턴씨를 찾아가서 이천불을 꾸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에게는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바턴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는 그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턴씨는 웬지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2천불을 주었습니다. 과연 스트로사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공황이 일어나 바턴씨는 파산 위기에 있었습니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씨를 찾아가 "당신이 빚진 돈 7만 오천불을 내가 대신 갚아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턴씨는 깜짝 놀라 "자네가 가져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 하고 의아해했습니다. "분명히 빚진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 준 은덕은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못갚습니다. 그때 이천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스트로사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마워했습니다.
여러분, 은덕과 사랑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돈으로 갚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갚아야 할 은덕이 생각 날 것입니다. 카드 한 장을 써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십시오. 그래야 선이 됩니다.
작자 미상의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밝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만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때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에 너무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미래, 어떻게 계획하십니까
약 4:13-17 / 김필곤 목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서로 교제를 하여 결혼하기로 약속한 형제를 부모님께 소개하기 위해 집으로 초대를 하였습니다. 식사를 끝낸 후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그래, 자네의 장례 계획은 무엇인가?" "성경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라고? 훌륭하구먼. 하지만 내 질문의 요지는 내 딸을 좋은 집에서 멋진 인생을 살게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것이냐는 걸쎄." 그러자 "저는 공부할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걸 주실 겁니다." "... 그럼 어떻게 결혼반지며 내 딸이 원하는 것들을 살 작정인가?" "전 공부에 전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걸 주실 거니까요." "그럼 애들은? 애들을 어떻게 키울건가?" "걱정하지 마세요, 어르신.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주실 겁니다." 만약 우리가 아버지라고 한다면 이런 청년 사위로 삼겠습니까?
사람이 미래에 대하여 계획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할까요? 노후 대책을 위해 연금에 가입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동일까요? 아무런 계획없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 좋은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등불을 들고 신랑 맞을 준비한 10 처녀 중 다섯 처녀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기름 준비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이 사는 사람에 대하여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살후 3:1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하여 계획을 세우는 것을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부흥 계획을 세우고, 수련회를 하기 위해서는 수련회 계획을 세우고, 운동회를 하기 위해서는 운동회 계획을 세우고, 결혼하기 위해서는 결혼 계획을 세우고,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시험 계획을 세웁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살리 위해 인생 계획을 세웁니다. 계획 없는 인생은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우리의 인생 계획 어떻게 세워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우리의 인생 계획에 하나님을 모시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13-14)
사람이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데 두가지 극단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필요없이 그저 하나님이 인도하는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미래를 철저히 계획하면 그대로 되어질 것이라는 방자한 사고 방식입니다. 오늘 13절에 나오는 사람은 어떤 유형의 사람입니까? 자신이 철저히 계획하면 그대로 되어질 것이라는 방자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계획 속에는 인생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얼마나 철저합니까? 때, 장소, 일의 결과, 사업계획 철저합니다. 오늘이나 내일 도시에 가서 사업할 것을 계획합니다. 일년이라는 사업계획을 세웁니다. 사업 종목도 장사할 것을 정확히 계획합니다. 미래에 대한 예측도 이를 보리라고 계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생명 거두어 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가 복음에서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0)"라고 말씀합니다.
몇 년 전 친구 큰 형님이 갑자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50대 초반입니다. 사업하시는 분이십니다. 신앙 생활하라고 하면 사업 잘 해 놓고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시는 분입니다. 사업에 대한 큰 꿈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돈을 벌어 이런 저런 일을 하겠다고 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11시쯤되어 머리가 아프다고 동네 약국에 가서 약을 사가지고 오다 길에 쓸어져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가족들이 나가 보니 길가에서 그대로 쓸어져 돌아가셨습니다. 인생들이 자신이 모든 것을 할 것으로 계획하지만 순간입니다. 요즈음 폭우로 잠긴 농작물과 한 순간 무너지는 집들을 보면서 교훈받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사람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장해 주어야 미래는 계획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 계획에 하나님을 포함시키시기 바랍니다. 결혼 계획도, 사업계획도, 자녀 교육 계획도 노후 계획도 하나님을 포함시키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사고에는 최종적 사고(terminal thinking)와 관련적 사고 (relational thinking)가 있습니다. 관련적인 사고라는 것은 모든 것을 목적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사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 사람과 관련시켜 생각합니다. 결혼하는 신랑 신부가 결혼식 계획을 세우는데 신부는 신랑을 배제하고 계획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통해 이루어질 모든 일을 서로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홀로의 삶이 아닙니다. 부부가 되어 아이들을 낳게 되면 여름 피서 계획을 세울 때도 홀로가 아닙니다. 가족이 자신의 계획 속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관련시켜 계획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인생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신랑 되신 예수님, 영적으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내 인생 계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시켜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인생의 계획을 아무리 잘 꾸민다고 해고 인생의 주관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배제한 계획은 불완전합니다. 미래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임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계획합니다만 미래의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공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리고 계획하지만 공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의 결과가 계획한 대로 나타날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기 전에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무엇인가를 하기를 원합니다. 모세가 젊은 날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유아를 살해 하는 현장에서 살려 놓고 애굽의 궁중에서 교육을 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계획을 시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방법, 자기 때, 자기 기분으로 자기 계획을 세우고 일을 저질러 버립니다. 살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40년 더 훈련시켜 하나님의 계획에 맡는 일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택한 그릇으로 불렀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5)" 예레미야를 복중에 짓기 전에 불렀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김동환 전도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다니엘 학습법' 저자입니다. 그는 2000년도에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입니다. 대학 4년 동안의 평균 점수가 99.26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국비 유학 조건에다가 서울대에서 최연소 교수직까지 보장받다시피 대학원 진학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하버드 대학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도 거절하고 국대 최고의 대기업 비서실 입사도 거절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들어 갔다고 합니다. 그의 계획은 어머니가 기도했던 영혼 구원이 있었습니다. 달동네 문제 학생들을 불러모아 소위 SKY school 이라는 공부방을 만들어 자원봉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멋지게 살 계획을 꿈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주님의 뜻에 따라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15).
하나님과 함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신앙인의 미래 계획의 출발이라면 좀더 성숙한 두 번째 단계는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보면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계획의 일부에 포함시키지만 더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 위주로 모든 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성숙하게 되면 이제 내 위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15절을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개역성경은 15절 번역이 문맥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데 다른 성경 번역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동 번역은 "약 4:15 그러므로 당신들은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일 저런 일을 해 보겠다" 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번역했고
현대어 번역은 "약 4: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만일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사는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해야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표준 새번역은 "약 4:15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주의 뜻, 주님의 허락,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주께 있고 우리의 일도 주님의 손에 있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주님의 뜻을 따라 세우게 됩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 계획은 우리가 세운다고 그대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세울 때 그것이 확실하게 보장받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찾아 보십시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 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잠 19:21)"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고 조카 롯을 떠나지 못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데라는 죽게 되고 조카 롯과는 재산 싸움으로 헤어지게 됩니다. 그는 가뭄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마 그의 계획은 잘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곳에 가서 그가 당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아내를 이방 왕에게 내어주는 치명적인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자 종을 아들로 삼고 살고자 합니다. 그 계획대로 됩니까? 인류의 비극을 가져오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계획이 가장 형통한 길이고 미래를 가장 확실하게 보장받는 길입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니느웨로 가라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편협한 애국자인 요나는 자신의 계획을 세웁니다. 다시스로 향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다시스로 가게되었습니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결국 물고기를 통하여 니느웨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머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품으라는 계획은 "예루살렘과 온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인데 그들은 예루살렘에 집착합니다. 결국 스데반 사건으로 흩어집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의 계획에는 고넬료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는 고넬료가 있습니다. 결국 고넬료를 만나게 합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행 16장을 보면 바울은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을 마게도냐 사람 환상을 통하여 유럽으로 보내었습니다.(행16:9)
가정의 미래에 대하여, 직장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신앙 생활에 대하여, 자식에 대하여, 노후에 대하여, 사업에 대하여 심지어는 오락이나 피서에 대하여까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된 계획을 세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지 않는 계획은 그날이 되면 아무리 크고 위대한 일을 한 것 같지만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성경 마태복음 7장 22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3. 우리는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 놓고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에 기준하여 현실에 충실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16-17).
어떤 사람들을 보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마치 이루어진 것처럼 미래를 계획하며 허영에 들떠 장담하며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16). 이것은 교만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자랑하는 것 그것은 오늘 성경에 보면 허탄한 자랑에 불과합니다. 허탄이란 허망한 것을 말합니다. 허망이라는 것은 거짓되고 망녕되다는 것이고 어이 없이 허무함을 말합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 놓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치 그것이 다 이루어진 양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약 4:16 그런데도 당신들은 지금 허영에 들떠서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담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라고 번역하였고
현대어 번역은 [약 4:16 그런데도 여러분은 마음대로 계획을 벌이고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이러한 자기 확신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표준새번역은 [약 4:16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래의 시간이란 우리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러 가지 계획을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질지 이루어지지 않을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계획한 대로 세상이 다 되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십시오. 계획을 가집니다. 형과 부모가 자신에게 인사하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에게 다가온 것은 무엇입니까? 형들이 인신 매매를 합니다. 요셉이 그것을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갑니다. 계속 좋지 않은 일이 버러집니다. 미래라는 것은 계획대로 다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일이 앞에서 일어난다해도 우리가 해야할 것은 분명한 말씀에 기준하여서 선을 해하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어떤 것이 다가와도 지금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래의 계획을 세워놓고 미래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내가 어떤 일을 하면 그 때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하며 오늘 현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지금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해야 할 줄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래에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지금 선을 행하지 않으면 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제 기독신문을 보니까 국경 허문 헌신적 사랑이라는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대구 사월 교회에서 안수 집사님으로 봉사하시는 박형근 집사님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분은 경산 시청 공무원입니다. 교회에서 우즈베키스탄에 선교사를 돕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지금 당장 선교사로 갈 수 없지만 정년 퇴임후 평신도 선교사로 봉사할 것을 계획하시면서 사는 부부입니다. 그래서 우즈벡 스탄에 있는 부부를 초청하여 한국 회사에 취업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남편이 선천성 심장 판막증에 걸린 것입니다.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결국 박집사님은 그들을 자신의 아들 딸로 삼았습니다. 한국명으로 김지마 김라자로 이름을 바꾸고 병원에 수술을 시켰습니다. 8000만원의 수술비가 들어가는 큰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일로 알고 아들을 수술시켰습니다. 그는 삼차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두 번째 까지는 의사가 했지만 세 번째 수술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수술을 통해 확실한 신앙 체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신학을 공부하여 자기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하겠다고 다짐했고 박집사님은 앞으로 자신과 함께할 목회자 아들을 얻게 되어 너무나 감사하다는 고백을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지만 내일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면 그 안에서 사는 것이지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워 놓았을 지라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과장이 되면 부장이 되면 사장이 되면 잘 하리라 그런 사람 인간적으로 볼 때도 인정받기 힘듭니다.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은 게으르고 악을 행하면서 미래의 삶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미래라는 것은 어느날 갑자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현재의 연장입니다. 유능한 운동 선수들을 보십시오. 하루아침에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도 하루 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이 어느날 갑자기 쓰임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가지고 나간 것이 무엇입니다. 물매와 돌 다섯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다윗이 양을 치며 익힌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어느날 갑자기 쓰임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심히 주를 위한 열심히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현재는 아무렇게나 해도 미래는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악을 행하지만 미래에는 선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게으르지만 미래에는 부지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무엇을 심느냐가 중요합니다. 악을 심으면 악의 열매를 거둘 것이고 선을 심으면 선의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지금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것을 통하여 결국 미래는 보장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섬기는 것도, 노력하는 것도, 인격을 수련하는 것도, 기업을 이루는 것도 가족을 구원하는 것도, 미워하는 사람과 화해하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결국 우리는 미래의 어느날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 25:21)"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때에 가서 아무리 자신의 형제를 위해 사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목요일날 어느 성도님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났는데 아내만 울고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좀 잘 해 줄었을 것"하면서 우시는 것입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 때 잘할 걸 해도 시간이 지나면 필요 없습니다. 그 때 전도 많이 할걸, 그 때 선을 많이 행할 걸, 그 때 봉사할 걸, 그 때 이렇게 할 걸, 그 때 시어머니 잘 모실 걸, 그 때 며느리에게 잘 해줄 걸, 그 때 충성할 걸, 그 때 헌금 많이 할 걸, 그 때 열심히 살 걸, 그 때 남편에게 좀 잘해 줄 걸, 그 때 아내를 더 사랑해 줄 것..., 미래는 우리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감사로 받는 시간입니다. 지금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의 삶(1)
약 4:13-17 / 안효관 목사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단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벌을 받고 땅에 내려온 미하일이라는 천사가 한 구두수선공의 집에서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건장한 군인 장교가 최고급 가죽을 가져다주면서 구두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처음 신어도 십년을 신은 것같이 편안하고, 십년을 신어도 새 것 같은 구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구두수선공은 그런 신발을 만들 자신이 없어 망설이고 있는데, 그 집 종업원으로 와 있는 미하일이 자기가 만들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주인은 미하일의 솜씨를 알기에 최고급 가족을 받아 미하일에게 신발을 만들도록 맡겼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지켜보던 주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미하일이 그 좋은 가죽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구두가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 신기는 슬리퍼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인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리퍼를 다 만들었을 때에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조금 전에 건장한 군인 장교와 함께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 양반, 이제는 구두가 필요 없게 되었소. 우리 장군께서 신발을 맡기고 가던 도중에 갑작기 말이 날뛰는 바람에 말에서 죽고 말았소. 그러니 이제 죽은 그분에게 신길 슬리퍼나 만들어 주시오.” 미하일은 이미 만들어 놓은 슬리퍼를 내 주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천사 미하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세 가지 수수께끼 가운데 두 번째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그 해답은 ‘사람에게는 내일을 알 수 있는 능력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일을 알 수 없다고 내일을 준비하지 않고 오늘을 되는 대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내일을 알아보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때로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쳐보기도 하고, 사주팔자나 운세를 보면서 다가오지 않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을 벗어보려고 합니다. 더욱이 요즘과 같이 하루하루가 불안한 불확실성의 시대에서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기에 더욱 불안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런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 나가 미래는 좋은 세상이요 축족의 때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미래를 위해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미래는 언제나 우리에게 향기로운 꽃다발을 가득 안은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좋은 내일을 기대하면서, 희망에 부푼 꿈을 안고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하는데, 왜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기대한 것만큼 희망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야고보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쉽게 범하기 쉬운 세 가지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먼저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그 첫 번째 잘못은 하나님 없이 계획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준비하고 설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별로 필요 없는 분처럼 취급당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야고보 사도는 지금 내일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그 계획에 하나님을 참여시키지 않고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내일의 계획을 세우는데,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그렇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비록 짧은 말이지만, 이 말 속에는 내일을 준비하는 모든 계획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주 잘 짜여 진 계획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계획을 세울 때에 생각하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얼마 동안이나, 무엇을, 그리고 왜?’ 이것이 일반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소개된 내용은 그 원칙에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13절의 말씀을 그런 계획의 원칙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언제입니까? 오늘이나 내일이나 이제 이곳 떠나려고 합니다. 어디로 갑니까? 아무 도시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무 도시로 간다’는 것은 아무데나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서울이나 부산과 같은 어떤 특정한 도시를 구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있을 계획입니까? 일 년 정도입니다.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까? 장사를 해 보겠다고 합니다. 왜 장사를 합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이 계획은 아주 치밀하고 정확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그 계획에 한 가지가 빠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빠져 있습니까? 그 계획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 속에서 하나님께 내어드릴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에 대해서 매일 같이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내일을 대비해서 준비하기도 합니다. 내일을 준비하고 계획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4:28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서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을 짓는데 계획 없이 시작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계획은 누구 나가 다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사도의 지적이나 예수님의 말씀은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꿈을 꾸고 목표를 세우는 일은 위대한 것입니다. 꿈도 있고 목표도 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계획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꿈이나 목표에,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세운 계획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도우심을 청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목표를 설정하고, 내 마음대로 계획을 세운다면 그 계획은 곧 허물어질 망대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아무리 견고하게 잘 세워진 성읍이라도 곧 별 볼일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잠언 16: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하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꿈과 계획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계획에 중요한 결정권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15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정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서 언제나 “주님의 뜻이라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제가 저렇게도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언제나 “주님의 뜻이라면”이라는 전제를 붙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말은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식상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아름다운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계획에 ‘주님의 뜻이라면’이라고 물어본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합니다.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하겠습니다.’ 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할 때, 우리 신앙인들이 반응할 수 있는 태도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태도는 ‘하나님 제가 이렇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이 계획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기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모자란 기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좋은 믿음의 태도는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고 계획을 추진하는 것보다야 낳겠지만, 성숙한 믿음의 모습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한다고 하면서 늘 이런 식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나름대로 계획을 다 세워놓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린 사람은 하나님을 돈 많고 힘 많은 빽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좋게 말하면 하나님은 내가 세운 계획을 후원하는 후원자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태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면 그 뜻을 참고하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내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적당하게 타협하려고 합니다. 내 계획대로만 하자니 뭔가 찜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니 왠지 손해 볼 것만 같고, 그래서 나도 손해 보지 않고, 하나님도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적당하게 타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에 동업자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태도는 내가 계획을 세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뜻을 묻는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계획의 단계에서부터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것을 따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내 인생에 주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세 번째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부터는 “하나님 제게 이런 계획이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제가 열심히 노력하겠는데, 하나님, 저를 도와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신에 “하나님,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위해서 힘 쓸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상황 속에 있습니다. 저는 경제나 주식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한 때는 주가가 올라가면 경제가 좋아지는 줄 알고 ‘주가가 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연일 주가는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실물 경제는 바닥을 헤매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경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보고에 따르면 25-29세의 젊은이들 가운데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인구가 40만 명을 달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직장을 구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쉽게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젊은이들이 그 귀중한 젊은 열정의 시기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장사하는 분들은 장사가 안 되어서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직장에서도 이제 승진하려고 하기보다는 승진하지 않고 오래 직장에 남아 있는 것을 더 원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승진을 빨리하면 그만큼 빨리 직장에서 퇴출당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직장을 구하고 있는 젊은이들이나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는 학생들, 그리고 장사를 하는 분들이나 직장에 다니는 분들, 그리고 불안한 내일 때문에 마음 졸이고 있는 분들이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내일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할지 걱정하고 고민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꼭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나 혼자 세운 계획은 아무리 완벽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인생을 살아가시고, 내 앞날의 계획 속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인생을 계획해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의 앞길을 선하고 아름답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는 우리의 삶에서 잘못된 두 번째 태도는 내일을 내 마음대로 예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추측하고 기대한대로 내일이 우리에게 가다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14절과 16절에서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내일을 내 마음대로 예측하거나 내 마음대로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내일을 모릅니다. 오늘밤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내년의 일을 내 마음대로 추측하거나 계획대로 되어진다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그 말입니다. 지난 1997년 우리나라에 IMF라는 참으로 참혹한 현실이 다가왔습니다. IMF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가 얼마나 사치하고 풍족했습니까? 외국에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비판해도 거기에 별로 관심가지지 않았습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결과가 1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삶을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을 그 때는 어느 누가 생각인들 했겠습니까? 그 때에는 아무도 IMF가 터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이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미리 준비하지 않았겠습니까?
요셉이 애굽에 살던 시대에 그 땅에 7년 풍년 후에 7년 흉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7년간의 계속된 흉년 속에서도 애굽의 모든 백성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에게까지 양식을 나눠줄 수가 있었습니다. 7년 흉년이라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을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꿈을 통해 계시해 주셨고, 요셉이 그 꿈을 해석하면서 흉년을 철저하게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7년의 풍년이 들었을 때 흥청망청 하지 않았습니다. 아끼고 아끼면서 흉년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흉년을 이겨냈습니다.
만일 우리나라도 이렇게 IMF이후 7년 흉년과 같은 힘든 때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모든 사람이 준비했겠지요. 좀 더 풍요롭고 여유가 있을 때에 어려운 때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내일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 때문에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은, 그리고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모른다는 불안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들어 줍니다.
내일을 우리 마음대로 예측하거나 내 생각대로 될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 인생을 ‘안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안개는 새벽에 잠깐 피었다가 아침 햇살이 쬐이기 시작하면 금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여기에도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이 계십니다만, 여러분! 인생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습니까? 우리 어르신들! 왜 이리 세월이 안 가나 그러면서 사셨습니까? 아니면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나 그러면서 사셨습니까? 아직 젊은 사람이 이런 이야기해서는 뭐하지만, 세상 멋모르고 유모차 타고 다닐 때부터 허리 구부러져 지팡이 짚고 다녀야 할 때까지 그 인생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닙니다. 저는 인생을 많이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고, 우리보다 인생을 먼저 사신 어르신들이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은 짧습니다. 짧은 인생 내일의 일까지 걱정하고 염려하지 말고, 오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사야 56: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쾌락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들은 ‘부어라 마셔라!’ 그러면서 영원히 살 것처럼 즐기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을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잠언 27: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은, ‘어디 가서 일 년만 열심히 장사하면 돈 많이 벌어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년에는 부자가 되어서 세계를 여행하면서 마음껏 놀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계획을 세우고 나서 그것이 마치 다 이루어진 것처럼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정부에서도 어떤 계획을 발표하면 그것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난리를 피웁니다. 그러나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 하는 것은 그 때 가봐야 압니다. 서울에 있을 때에 교회 바로 옆으로 지하철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처음 계획으로는 그 공사가 92년도에 다 끝나서 92년도 말에는 지하철이 다닌다고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심방 다닐 때에 지하철을 이용하면 차 막힌 것 때문에 짜증내지 않고 심방 다닐 수 있겠구나’ 그렇게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공사가 한 달 두 달 미루어지더니 4년 후인 96년 여름에야 지하철이 개통되었습니다. 국가에서 하는 것도 믿을 수 없더라구요!
그런데 우리는 계획을 세우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계획을 세우면 그대로 다 될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내일을 예측하지 말로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4)
우리는 모두 내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에 대한 계획은 있지만 여전히 현재를 살아갈 뿐입니다. 오늘을 사는 것이지 내일을 살 수는 없습니다. 내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보다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획을 세운 내일이 우리에게 희망적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현재가 가장 중요합니다.
스펜서 존슨(Spencer Johnson)이라는 분이 쓴 베스트셀러 가운데 「선물」(The Present)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소년이 어렸을 때에 지혜로운 노인으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으면 행복해 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소년은 청년이 되었을 때 지혜로운 노인이 가르쳐준 가장 소중한 선물은 다름 아닌 ‘현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면서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면 그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왜 책 제목을 선물이라고 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물’이라는 영어 단어는 Present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는 동시에 ‘현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현재-오늘이라는 것이 곧 그 책에서 말하는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에 Present라는 단어로 책 제목을 삼은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현재’라는 시간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입니다. 과거는 이미 우리의 품에서 떠나버렸습니다. 미래는 아직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은 현재라는 시간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현재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다음달, 내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이라는 현재의 시간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 최고의 선물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설혹 내일 직장에서 명예퇴직 당한다 하더라도, 가게가 부도나서 내일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주어진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저녁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불러 가신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의 일을 힘쓰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이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리고 내일을 내 마음대로 예측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의 계획에 늘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그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의 삶(2)
약 4:13-17 / 안효관 목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연로한 선비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뱃사공과 둘이서 말없이 강을 건너다가 무료해진 선비가 뱃사공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이보게 사공, 자네는 논어를 읽어보았는가?” 어렸을 때부터 배사공만 해온 그가 논어를 읽어본 적이 있겠습니까? “아니오.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선비가 비아냥거리며 말합니다. “에이, 그것도 안 읽어보고 어떻게 사람구실을 할 수 있는가? 그럼 맹자는 읽어보았는가?” 논어도 안 읽어본 사람이 맹자를 읽었겠습니까? 뱃사공이 또 대답합니다. “아니오. 그것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선비가 거만하게 말합니다. “정말 자네는 아무 것도 모르는구먼, 인생을 헛살았네.”
그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습니다. 그러더니 배가 뒤집힐 것만 같습니다. 갑작스레 당한 일에 놀란 선비가 얼굴이 붉어지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공이 선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선비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 평생 논어 맹자만 읽어온 선비가 수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난 헤엄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네.” 그러자 뱃사공은 “그러면 선비님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혼자서 배에서 뛰어내려 헤엄을 치고 뭍으로 나가버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누군가가 만든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분명한 것 하나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 범해서는 안 될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의 계획에 하나님을 배제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워진 계획은 그 계획이 아무리 잘 짜여 진 것이라 하더라도 모래 위에 세워진 집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계획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방향으로 계획을 세워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아직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미래를 설계하면서 내 마음대로 예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언제나 ‘현재’뿐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내일을 준비한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지 않으면 내일은 결코 우리에게 희망적이지도 않고 아름다운 것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오늘 해야 할 일을 결코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선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내일로 미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우리는 때로 인생을 멋지게 설계할 수 있습니다. 계획은 참으로 잘 세울 수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나름대로 멋진 새해 프로젝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악한 일이 됩니다. 왜 멋진 계획을 자랑하는데 그게 악한 것이 되고 맙니까? 미래의 계획에 밀려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잘못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해야 하는데 미래에 대한 계획 때문에 선을 행하지 못하고 미뤄놓는다면 그것은 악한 것이고 더 나아가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다 미룰 수 있어도 미룰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 내 형편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오늘 해야 할 선행을 내일로 미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지 않으면서 내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할 수 없다면 내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오늘 할 수 있는데 내일로 미루는 사람은 내일이 되어도 할 수 없습니다. ‘몸이 건강해지면 봉사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분은 몸이 건강해져도 봉사하지 못합니다. 몸이 약하면 약한 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몸이 건강해지면 더 큰 일에도 봉사할 수 있습니다.
‘돈을 좀 더 많이 벌면 십일조도 하고 남을 돕는 일도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좀 더 많이 벌어도 헌금하거나 구제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적게 벌면 적게 버는 데서 십일조를 하고, 내가 조금 덜 쓰더라도 작은 부분을 떼어서 남을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많이 벌어서도 십일조 할 수 있고, 구제도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Charles H. Spurgeon, 1834-1892)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달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달력은 하루가 있고, 하루가 7번 모여서 일주일이 되고, 30일이 모이면 한 달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되고, 이번 주가 지나면 다음 주가 되고, 올해의 시간이 흐르면 내년이 됩니다. 그게 우리의 달력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달력은 다릅니다. 마귀의 달력은 항상 내일만 있습니다. 하루를 살고 지나도 내일밖에 없습니다. 일주일을 살고 나도 내일뿐이고, 일 년을 산 후에도 내일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할 일도 내일로 미룹니다. 그러기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자꾸만 미루는 것은 마귀의 달력(마귀의 시간표)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인데 예배드리러 가야지’ 그렇게 마음먹었다가도 ‘다음 주도 있는데 뭐’ 그러면서 내일로 미룹니다. ‘봉사 합시다’ 그럴 때에도 ‘뭐 오늘만 날인가 내일도 있는데 오늘은 쉬고 내일 하지 뭐.’ 그러고 봉사하는 것도 내일로 미룹니다. 그것은 마귀의 달력을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달력에는 언제나 오늘만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오늘을 살고, 한 주간을 살아도 오늘을 삽니다. 한 달이나 일 년을 살아도 언제나 오늘처럼 삽니다.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영원한 오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시간표(하나님의 달력)로 사는 사람은 지나온 과거에 집착하지도 않을뿐더러 내일로 미루지도 않습니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생명 주어진 기간 동안에 더욱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내일이 되면 오늘보다 더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고, 더 시간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형편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좀 더 건강해지면, 좀 더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좀 더 형편이 나아지면 해야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 주어진 여건 속에서 충성하며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은 ‘오늘 선을 행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 있음에도 내일로 미루고 하지 않으면 죄’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오늘 할 수 있는 대로 가능하면 많이 선을 베풀며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흔히 ‘법을 지키지 않는 것만 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다른 사람을 속여서 사기를 치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법을 어기는 것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프랑스 영화 가운데 “로베로 장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 가운데 나치에게 저항했던 저항가들이 처형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 명의 저항가들이 처형을 당하는 그 자리에 저항운동과는 상관없이 얼떨결에 붙잡혀온 장사꾼 한 명이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장사꾼은 ‘자신은 저항운동을 하지 않았노라’고 항변을 합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소, 평범하게 돈이나 벌며 살아왔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러자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한 저항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요? 전쟁이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수많은 프랑스인이 피를 흘리고 도시들이 파괴되었소. 그리고 지금 우리 조국은 멸망 직전까지 와 있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단 말이오. 그렇다면 그게 바로 당신이 죽어야 할 이유요.”
혹 우리들 가운데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항변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살인을 하지도 않았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을 속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에 비추어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나쁜 짓을 하지 않은 것만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있었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배드려야 할 때 예배드리지 않고,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고, 봉사해야 할 때 봉사하지 않고, 선을 행해야 할 때 선을 행하지 않는 것, 그것도 죄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오늘 본문을 잘 설명해주는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가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에 나가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겨주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 받은 것을 가지고 가서 열심히 장사를 해서 곱절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은 땅에 감추어두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열심히 일해서 곱절로 남긴 종들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주어졌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러분, 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렇게 책망을 받아야 했습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다른 사람 것보다 작다고 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가 이 종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처럼 건강하지 못하니까 봉사하지 않아도 되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벌지 못하니까 헌금 하지 않아도 되고, 나는 다른 사람처럼 형편이 여유롭지 못하니까 남을 돕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만일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해야 할 일을 미루어놓거나 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이어서 나온 비유가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 칭찬받는 오른 편으로 분류된 양들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작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왼편으로 분유된 염소는 그걸 하지 못해서 주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주님께서 굶주리셨다면 우리가 당연히 먹을 것을 드렸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헐벗으셨다면 입을 것을 주었을 것이고, 주님께서 병이 들어 몸져 누우셨다면 왜 우리가 병문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여러분, 오늘 내 주위에 가난하여 굶주린 이웃이 보이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를 볼 수게 하신 것은 나의 작은 것을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병들어 신음하고 외로워서 누군가의 발길을 기다리는 이웃이 있음을 아십니까? 손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아도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그들을 찾아가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염소와 같이 책망 받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들께 대접하고 싶은 마음도 아름다운 마음이지만, 그 마음과 그 정성으로 내 주위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고 섬기고 도와주는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그것이 곧 죄니라.” 여러분,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되는데 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단순히 악을 피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3:27-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손이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라.” 선을 베풀기를 지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악을 피하면서 사는 사람은 인생을 소비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인생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소비하든지, 낭비하든지 아니면 투자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소비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시간을 아무런 의미 없이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낭비하는 것은 헛된 일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투자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정성을 쏟는 것입니다. 물론 투자에는 때로 손해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투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우리 인생을 투자하면 우리는 인생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짐 엘리옷’이라는 분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위하여 결코 붙들어 둘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인생을 살 수 없다.” 어려운 말 같지만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값진 것을 얻기 위해서 투자하고, 세상의 헛된 것들을 포기하며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보람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 값진 것, 영원한 것, 그것을 야고보 사도는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것이고,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사람은 반드시 값진 열매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그 어떤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도 더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는 다름 아닌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미래를 위해 멋진 계획을 세운다는 명목 아래 오늘 해야 할 선을 포기하는 것은 멋진 미래의 계획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허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1:1절에서 지혜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선을 행한다는 것이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허비되는 것 같아 보여도 언젠가 더 큰 축복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유태인의 지혜서라고 하는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왕이 한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어 즉시 대령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자 그는 자기가 어떤 나쁜 짓이라도 하여 벌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여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세 친구에게 함께 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장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는 친구였는데,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의 부탁을 거절해버렸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첫 번째 친구처럼 소중하게 여기진 않았으나 사랑하는 친구였데, 그 두 번째 친구는 ‘왕궁 문 앞에까지는 함께 가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친구는 평소 별로 관심이 많지 않았던 친구인데, 그는 기꺼이 함께 가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네는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으니 두려워하지 말게. 내가 임금님께 잘 말씀드려 주겠네.” 그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탈무드는 그 세 친구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재산’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돈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그대로 남겨두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는 ‘친척’입니다. 친척은 무덤까지는 따라가 주지만 그를 그곳에 혼자 남겨두고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면 세 번째 친구는 누구이겠습니까?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선행은 평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죽은 뒤에도 영원히 그와 함께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지금은 당장 나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에게 보응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까지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으로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기고 돌보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대가는 주님이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반드시 갚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2002년 7월에 발간된 미국의 의학전문지인 ‘뉴런’(Neuron)에 재미있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미국 에모리(Emory)대학교 정신의학 행동과학 연구팀이 20-60세 여성 26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연구 결과인데, 사람이 선한 일을 할 때 우리의 뇌에서 즐거움을 유발시키는 신경조직이 최고로 활성화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 베풀고 나누면 인생을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뇌에서 즐거움을 유발시키는 신경조직이 최고조로 활성화되어 우리의 삶을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줍니다. 내 것만을 움켜쥐고 사는 사람은 인생을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과학적 연구결과가 아니더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수전노들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난하더라도 나누고 베풀며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행복은 무언가를 움켜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베푸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일의 계획이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오늘 행하는 작은 선행 하나만 못하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혹 없어질 것, 썩어질 세상의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우리의 값진 인생을 허비하지 마시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고귀하고 값진 것에 인생을 투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확실한 투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는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값진 인생을 살았던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주안에서 헛되지 않는 주님의 일을 위해서, 그리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우리의 시간과 정성과 재물과 더 나아가 우리의 온 인생을 투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오늘의 축복과 내일의 약속으로 우리의 삶에 넘치도록 갚아 주실 것입니다.
성도들의 궁극적인 목표
약 4:13-17 / 김양인 목사
요즘은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일기예보가 상당히 정확합니다. 그리고 10년 후, 또는 20년 후에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합니다. 서울 서초동에 있었던 삼풍백화점은 업계에서 매출액 1위를 자랑하던 초호화 대형 백화점이었습니다. 매일 같이 쇼핑객들로 붐볐습니다.
그 날도 사람들은 더운 날씨에 시원한 백화점 안에서 쾌적한 분위기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후 5시 57분경에, 백화점이 일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건물을 과도하게 확장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무려 14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그 누가 개장한 지 6년도 채 되지 않는 대형 백화점 건물이 무너질 것을 꿈엔들 예측했겠습니까? 만약에 무너질 줄을 알았더라면 미연에 출입을 막아서 사상자가 생기지 않게 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사람은 내일 일은 고사하고 한 시간 후, 아니 일 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도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또 한 가지, 2년 10개월 전에 일어났던 세월호 사건을 보십시오. 전체 승객 476명 중에 304명이 죽거나 실종되었습니다. 더구나 승객 중에 단원고 학생 325명과 교사 14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들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길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인천항에서 제주행 정기여객선을 탄 학생들은 얼마나 마음이 들떴을까요? 출항한 지 2시간 후에 배가 침몰할 것을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요? 이런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는 우리와 달리 특별한 사람들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부주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주의할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럴 때마다 사고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도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죄 때문에 멸망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모두 멸하신다면 이 지구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부주의하고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나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 무사한 것이 아니므로 누구든지 사고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한번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어린자녀를 잃었던 경험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때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럴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마음 아픈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그러한 죽음이 희귀한 것이 아닙니다. 몇 살까지 살 수 있다고 보장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언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출하시면 언제라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언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만큼, 언제 세상을 떠나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사람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삶을 영원한 내세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봅니다. 영원한 내세란 천국을 말합니다. 지상의 삶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적인 성공을 추구합니다. 높은 지위를 얻고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되려고 힘씁니다. 그러나 영원한 내세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세상의 성공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보면, 부자는 날마다 자색 옷을 입고 호화로이 잔치를 즐기면서 살았으나 죽고 나자 그 영혼이 음부 불꽃 가운데 떨어져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내세에서는 그의 높은 지위와 막대한 재산이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 곁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살았으며, 온 몸에 헌데를 앓았는데 개들이 와서 헌대를 핥았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처지입니까? 그러나 그가 죽자 그 영혼이 천사들의 손에 받들려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잘 살은 사람입니까? 누가 성공한 사람이고, 누가 행복자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당연히 부자가 나사로보다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긴 관점에서 보니 부자는 실패자였습니다. 반면에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는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한 몸을 쉴 수 있는 집은 고사하고,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으며, 온 몸은 병이 들었고, 가족도 없었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세에서는 나사로야말로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를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지만, 만약에 구원을 받지 못하여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운명이라면 부귀영화를 누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겪을지라도 구원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실은 가장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이요 가장 행복한 사람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뿐 아니라,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그 사실 하나 만으로 이미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룬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처형당했습니다.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년이 헤롯 왕의 불의함을 책망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태어났고 그 일을 훌륭하게 해 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귀한 일을 감당했으므로 가장 값진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구원 받지 못했다면 무의미합니다. 반면에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세례 요한처럼 일찍 세상을 떠날지라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말하면 “지금은 바빠서 예수 믿을 시간이 없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듣습니다. “지금 바쁘다”는 그들의 말은 사실일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치고 바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러나 “예수 믿을 시간을 낼 수 없으리만치 바쁘다”는 말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 바빠서 구원 받을 시간이 없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구원 받는 것인데, 다른 일들을 하느라고 구원 받을 시간이 없다고 하니까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을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 3:1)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교회가 없는 동네가 없고 기독교인들도 수백만이 넘습니다. 가족이나 친지 중에도 기독교인이 없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또한 그들이 열심히 전도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를 한 것입니다.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생명이 언제 마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 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그것도 지금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친구에게 자주 전도를 했습니다. 하루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이번 주일에 나와 같이 교회 나가세”하고 권했더니, 친구가 대답하기를 “내일부터 한 달 동안 외국 출장을 가니 다녀와서 생각해 보세”라고 했습니다. 그 얼마 후에 이 집사님은 그 친구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받았습니다. 외국 출장 중에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일들은 얼마든지 다음으로 미루어도 괜찮습니다. 경제적인 손실을 얼마쯤 감수하거나 승진 기회를 늦추거나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됩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 이르기를 “1)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때가 있습니다. 전도를 받을 때가 있고 복음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때가 그 사람에게 주어진 구원의 날입니다.
천재일우(千載一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인즉 “천 년 동안 단 한 번 만난다는 뜻으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이르는 말”입니다. 천재일우의 기회인줄 안다면 누구라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은 천재일우보다 더 귀한 기회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므로 더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보다 더 귀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육신의 일을 위해 바쁘게 살아가는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까!
두 번째로, 구원 받은 성도들은 주의 일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누구를 책망한 것일까요? 그들은 물질을 우선시하는 신자들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소중함을 망각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긴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다른 도시에 가서 사업을 하여 수익을 얻는 것이 잘못이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얼마든지 사업을 할 수 있고 여러 도시와 여러 나라에 지사를 둘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영혼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세상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또는 주의 일을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사업에만 열중하고 직장에만 몰두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들은 영혼의 문제나 주의 일보다 세상일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경제활동보다 더 우선시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신자들에게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 앞에서도 말씀한 대로, 우리의 지상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언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 년 동안은 장사에 힘쓰고 그 후에 주의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 년 후까지 우리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 년 동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길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 때 사업에 성공해서 많은 재산을 모았던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가지고 헌신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니 하나님께 드리는데 힘쓰지 못하지만 앞으로 목표를 달성하면 그 때가서 헌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IMF 위기를 만나 사업이 도산한 것입니다.
우리 생명도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지만,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23장 5절에 이르기를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재물이 지금 내 손에 있을 때 그것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선한 사업을 위해 써야지, 내일로 미루면 결국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우리 교회에 젊은이들이 예배생활과 봉사에 힘쓰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 즐거움을 누리느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일에 교회 나와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게 생각이 되어서 친구 만나 놀러 다니느라, 또는 스펙 쌓느라 자주 빠집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나이가 좀 들면 그때 가서 신앙생활을 착실하게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 역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보면,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짐승은 일 년 된 것으로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일생 동안 가장 젊고 아름답고 생기발랄한 시기를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 않을까요?
로마서 13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세상 재미에 빠지면 점점 더 깊이 탐닉하게 되어 헤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이 시대는 젊은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오락과 즐길거리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기독 청년들을 경건한 생활과 거리가 먼 세속적인 생활로 이끌어 갑니다. 성경에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고 하였습니다. 젊어서 주의 일에 열심 내어야 나이가 들어서도 주의 일을 힘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일은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더라도 세월이 지나면 다 잊혀지고 맙니다. 철과 돌에 공적을 새길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 땅에서 지낼 때 주의 일을 한 것밖에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 고린도전서 3장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지만, 상급과 면류관은 이 땅에 살 동안 주의 일을 위해 힘쓴 성도라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서 인정받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영원이라는 긴 안목으로 유한한 인생을 경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영원한 상급을 바라고 주의 일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주의 뜻을 따라서 살고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신자들이 주의 뜻보다 자기들의 뜻을 더 앞세우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것’은 주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입니다. 다른 도시에 가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주의 뜻을 도외시하고 그들의 뜻을 따라서 행한 것이 잘못입니다.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뜻대로 할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지불하고 사신 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 이르기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7장 23절에 보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이 주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주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란 달리 말하면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구원 받은 성도의 본분을 망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니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기 주관을 갖고 살아가겠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므로 당연히 나의 뜻을 내세우지 말고 주의 뜻을 물어보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주의 뜻을 알고 나서 시작해야 합니다.
주의 뜻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주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주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십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이르기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를 본 받는 것은 인간적인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이 사람의 뜻을 따르면 실족하고 시험에 들고 맙니다. 반면에 주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의 뜻은 선하십니다.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선하신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불행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의 뜻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의 뜻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온전하신 뜻이므로 그 뜻을 순종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 선생은 주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뜻을 내세우는 것은 곧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요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찌니라”(고후 10:17)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 9장에 이르기를 “23)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잘한 것이 있거든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므로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지혜와 재능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우리 자신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아 천국의 시민이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므온 노인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 아기가 메시아이신 줄을 알아보고서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 아기 예수님을 본 것만으로도 시므온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고대하던 구세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가장 큰 보람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바 구원을 소중히 알 뿐 아니라, 주어진 모든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가지고 주의 일을 위해 살고, 주의 뜻을 순종하고 주님을 자랑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온전히 달성한 축복받은 성도들이라는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일을 모르고 산다
약 4:13-17 / 최건호 목사
오늘날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진단하고 현재의 문제를 개선해 나가려는 시도로서 미래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내일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역사의 미래가 우리 인간의 어떤 과학이나 학문의 손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가? 미래학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의 학문적인 시도들 중에 하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해 계속 계획을 세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알 수 없는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첫째, 주님 뜻대로 사십시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일을 포기하라. 이것은 내일을 향한 허망한 꿈을 가지고 인생을 낭비하거나 잘못 선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계획으로 모든 것들이 해결된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꿈을 완전하고 절대적인 주님의 뜻과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하루하루 잘 살고 알지 못하는 미래까지도 복되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를 후회하지 않을 인생으로 이끌어 가실 수 있는 주님의 뜻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아서 하루가 복되고 내일도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예수님의 뜻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매우 불완전합니다. 내일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취할는지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내일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신다. 하나님이 나에게 맞춤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게 유익한 것을 알고 준비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내일의 염려, 불안, 그리고 걱정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염려는 내 생명을 보장해 주지도 않고, 내 현재를 아름답게 만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 현실에 어두움을 만들고 내 삶에 불평과 불만을 더 크게 만들어 놓습니다. 염려는 내 믿음에 손해를 가져옵니다. 내일 염려를 오늘 가지고 좌절하거나 불행하지 마시고 주님께 맡김으로 평안을 가지고 오늘을 행복하게 꽉 잡고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막연하게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세요. 지금 하라는 겁니다. 내일에 대한 모든 것을 기대하면서 내일을 자랑하면서 내일로 미루는 사람은 오늘의 행복을 텅 비워놓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내일 내일하다가 오늘 꽉 잡고 만끽할 수 있는 행복들을 다 놓친다는 겁니다. 기회가 지나갑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를 주님의 뜻대로 살 뿐 아니라 주님의 선한 일에 부지런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 정하는 대로 눈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주님의 뜻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나가보세요. 미운 것이 고아지고 싫은 것이 좋아지고 모든 것이 합동해서 선을 이루게 됩니다.
감사하며 기도하며 주님 뜻대로 사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내일을 모르고 사는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요, 최선의 선택입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사는 것은 허망하지도 않고 후회할 것도 없는 가장 지혜로운, 내일을 모르는 인생들의 지혜요, 결단입니다.
실천하지 않은 선행
약 4:13-17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는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법을 어기는 그것이 곧 죄가 됩니다”(요일3:4, 현대인의 성경)라고 사도 요한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순종하지 않는 것이 모두 죄이지만 모든 죄가 성격상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 자체가 그 성격상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예로 들어 설명해 봅시다.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살펴보십시오. 주류를 이루는 명령은 “하지 말라”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등 “하지 말라”는 명령이 주조를 이룹니다.
다만 제 4, 5계명은 예외입니다. ‘하라’는 명령으로 두 계명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겨도 죄입니다. ‘하라’는 명령을 어겨도 죄입니다. ‘하지 말라’는 일은 하게 되면 죄를 범합니다. ‘하라’는 일은 하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이렇든지 저렇든지 하나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더 큰 죄악으로 생각합니까?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과 ‘하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 중 어느 것을 큰 죄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살인하는 것이 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를 순종하라”고 했는데 순종하지 않는 것이 큰 죄라고 생각합니까?
실제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 앞에 어떤 집사님이 불순종해서 집에 우상을 차려 놓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형제가 홧김에 누구를 죽였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지금 당신 옆에 앉아 있다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도적질 하지 말라” 는 계명은 익히 아는데 습관적으로 도적질하는 이가 여러분 구역에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신자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지 말라”는 명을 어기면 굉장한 죄로 여깁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듣고도 여차하면 주일예배에 빠지고 자기 급한 일에 몰두하는 분들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라”는 제 4계명을 어긴 것을 보고 여러분은 그 사람을 “하지 말라”는 제 7계명 범한 것처럼 취급합니까? 아닙니다. ‘바빠서 지난 주일에 못 왔나?’하고 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제 7계명을 직분 자가 어겼다하면 그 다음 당회 때에 의논이라도 할 겁니다. 그리고 당회가 자정능력이 있다면 ‘치리하자’고 나올 겁니다.
그러나 4계명을 어긴 사람은 넘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 중요한 계명입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을 매주일 듣고도 부모 순종하지 않은 것은 살인한 죄를 지은 것처럼 통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하나님의 명령이든지 순종하지 않으면 모두 죄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지 말라”고 금한 어떤 행동을 하므로 범하는 죄나 “하라”고 명한 어떤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범하는 죄나 동일한 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명을 여겼기 때문에 동일한 죄입니다. 영어로는 금한 행동을 한 죄를 Sins of commission, 하라고 명한 것을 하지 못한 죄를 Sins of ommission 으로 구분합니다.
활터로 제가 여러분을 모시고 가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활을 쏘는 곳에 가면 사수가 서는 장소가 번호가 정해 있습니다. 첫 번째 사수도 두 번째 사수도 모두 과역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꼭 같이 실점을 했습니다. 첫 번째 사수가 쏜 화살은 과녁에 채 미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사수가 쏜 화살은 과녁을 넘어 지나쳐 가버렸습니다.
두 분 다 명중시키지 못했습니다. 어느 사람이 더 낫습니까? 꼭 같은 거예요. 화살이 못 미쳐가든지, 지나쳐 가버리든지 점수를 얻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과녁이라고 하면 과녁을 지나쳐도 못 미쳐도 둘 다 실점을 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꼭 같은 죄인데 불구하고 “하지 말라” 는 명령을 어긴 것보다 “하라”는 명령에 못 미치면 서로서로 관대하게 여기고 죄책감도 덜합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의 기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관습에 따라서 결정되지도 않습니다.
어떤 죄라도 자주 되풀이 하면 그 죄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집니다. 여러분이 무감각하게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무디어져서 다만 죄를 죄로 느낄 수 없을 뿐이지, 처음 지었을 때 죄라고 생각했던 만큼이나, 열 번째 짓고 느끼지 못할 때나 죄는 똑같은 죄입니다.
우리 기분에 따라서 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이렇게 어기나 저렇게 어기나 모두 죄가 됩니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 왼쪽으로 넘어져도 넘어지는 것이고 오른쪽으로 넘어져도 넘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잘못해도 잘못하는 것은 죄라는 말씀입니다. 악행을 범하는 것만큼이나 선행을 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후자의 경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야고보 선생의 이 가르침은 주님의 가르침과 그 강조점이 매우 일치합니다. 주님도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누누이 이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주님께서도 노력하셨습니다.
적극적인 잘못을 범하는 죄보다 오히려 바른 행동을 하진 않는 죄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악한 행동을 했다고 정죄하는 것보다 선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준엄한 선고를 자주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신앙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기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대하는 신앙공동체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자부합니다. ‘나는 70평생 살면서 크게 착한 일 한 것은 없어도 누구에게든지 큰 잘못은 행치 않았다.’ 고 이야기 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대과(大過)’없이, 큰 잘못 저지르지 않고 지내온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수준은 다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고보 선생은 흩어진 신앙 공동체를 향해 그들이 도달해야 할 삶의 수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사실 악한 행동을 일삼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습관적으로 도적질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나오겠습니까? 이천 년 전에 주님이 말씀하시던 청중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잘못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와서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안 나오면 편한 걸, 무엇 때문에 나와서 들으면서 고민할 것 있습니까? 주님 앞에 나오는 자들은 최소한 악행을 일삼는 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가 범하는 대부분의 죄는 악행을 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선행을 하지 못한 죄가 주종을 이룰 것 입니다. ‘내가 무슨 큰 죄를 저질렀나?’하고 생각하면 여러분은 항상 그럴듯합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여기나와 있으면서 도적질하고 간음하지 않았다고 만족해서는 착각입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공동체의 수준은 악행을 그만 둔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 피로 사신 신앙 공동체가 세상에서 선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눈앞에 보이는 그 선한 일을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기 원합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마 5:16)고 역설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산위에 있는 동네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넘어가는데 우리 보고는 조금만 잘못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느냐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주님도 우리를 향해서 기대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조차도 우리를 향해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가 봅니다.
자기들 수준으로 놀면 예수 믿으나 마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여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수준은 ‘악행을 멈추라’는 수준이 아니라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한 행위를 그친 사실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선한 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돕고 싶은 마음을 먹은 사실이 여러분을 선한 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도우려고 했었다”는 사실은 잘 생각해보면 ‘돕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돕고 싶었는데’라는 말은 실상 돕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상황을 듣게 하셨을 때, 어떤 사정을 보게 하셨을 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여가지고 ‘도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셨는데 불구하고 여러분의 욕심으로 그 마음을 짓눌려 버렸다는 말 외에는 되지 않습니다.
‘내가 도우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 결코 심판 날 여러분에게 도움 되는 판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을 보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아! 자기도 그때 돕고 싶었다는 겁니다.
아! 자기도 그때 지체 부자유한 사람을 돕는 일에 함께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은 그때 돕지 않았다는 것 밖에는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형편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압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사는 도시 울산에 살면서 아무리 어려워도 어린양 저금통에 동전조차 넣을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난주일 비가 와서 열심히 나누어주지 못한 저금통을 오늘은 꼭 지고 가셔서 어린양 예수님의 생일인 성탄 때까지 여러분의 사랑과 정성을 담아보십시오.
주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당신의 백성에게 선을 행하라고 분부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기억하시지요.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지 못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무슨 악행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강도만난 자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도움의 손을 내밀지 않았고, 그를 위한 시간을 내지 않은 것뿐입니다.
강도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짓밟고 가진 않았습니다. 다만 멀리 피해 갔을 따름입니다. 조용히 자기 길을 계속 갔던 것입니다. 피 흘리고 쓰려져 있는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기 보다는 빨리 가서 그를 기다리는 ‘성전의 일을 해야지’ 하고 레위인도 생각했고 제사장도 ‘난 빨리 가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해야지’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 일에 너무 바빠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을 뿐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강도질한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악행을 이제는 그만 두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지금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의 이웃이 되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 보면 나 같은 처지에서는 남을 도울 수 없을 줄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보다 잘 사는 사람만 생각하고 살면 나는 언제 저렇게 잘 살아서 남 도울까 싶지만, 세평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라고 분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우리는 삶의 여정을 다 걷고 난후 주님을 만날 때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마지막 심판하실 때 악한 일을 했는지 여부로 판단하질 않습니다. 그날 마지막 심판 때에는 어떤 선한 일을 했는지 물어 오실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살펴보십시오. 무덤 저편의 세계에서 고통 중에 부자가 처한 것은 그가 부자로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부자로서 흔히 받는 유혹에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역시 그도 부를 바로 사용하기를 실패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부로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지 않고,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과 자신 사이에 부를 가지고 칸막이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부를 이용해서 높은 담을 쌓고 견고한 대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개들로 하여금 지키게 한 것입니다.
이 가난하고 병든 나사로가 잔치 상에 가까이 나오지 못하도록 격리시켰습니다. 죽고 나서 보니까 그것이 자기와 나사로를 격리시켜 놓은 구덩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생 뿐 아니라 내세에까지 자기가 만든 구덩이로 자신이 구원받을 기회마저 거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님이 마지막 심판하실 때에 사용하실 세 가지 시금석을 말합니다. 그중에 어느 것 하나 특별하게 악한 죄를 지어가지고 저주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닫힌 문밖 어두운 가운데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마 25:11)라고 소리친 다섯 처녀는 무슨 특별한 악행을 하나님께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밤중에 도착하는 신랑을 맞이하는데 꼭 필요한 기름을 준비하기에 실패했을 뿐입니다. 슬기 있게 예비하지 못한 미련한 행동의 대가로써 영원한 파멸을 맞이한 것입니다.
첫 비유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불이 켜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두운 밤에 시간이 오래되어도 그 불을 밝힐 수 있는 기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깥 어두운데 내 던져진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경우를 살펴보십시오. 그 종이 특정한 악한 일을 했습니까? 한 달란트 받아 가지고 무슨 놀음을 했습니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달란트 받아서 밤새 노름을 해서 잃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그것 고스란히 간직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 달란트 가지고 아파트 청약해서 근근이 열심히 한 달에 3만, 5만 모으는 사람들의 생의 의욕을 꺾어 버리도록 죄를 범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한 달란트 받았던 것을 파묻어 두었을 뿐입니다.
남의 이름을 빌려서 아파트 청약하면 그건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겁니다. 얼굴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해가 돌아가는 일 아닙니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러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파묻어 두었을 뿐입니다. 악용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생산적으로 사용할 일에 쓰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한 달란트 가지고 무언가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장시켜둔 것이 그의 잘못의 전부였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살펴보시면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 집니다. 영광의 심판 보좌 앞에 모든 민족이 서 있습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두 그룹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무슨 특정한 악행을 한 사람들과 하지 않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동료 인간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과 베풀기를 실패한 사람으로 나눕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상을 섬기는 것은 바로 내 기분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간음하면 큰일 날, 직분을 박탈한 죄라고 생각하면서도 부모를 공경하라든지 예배일은 거룩히 지키라 하는 것은 적당하게 넘어가도 괜찮을 것처럼 자기 기분대로 믿는 겁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주님이 바깥 어두운 곳에 던지라고 선언하셨던 것은 무슨 악행을 저지른 죄목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다만 선행을 행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봤을 때도 ‘열심히 일 안해서 그렇지’, 헐벗은 사람 봤을 때도 ‘요즈음 같이 옷 많은 시절에 그것도 하나 못 입나’ 하고 이야기 한다면 답답하지요.
남의 처지에서 남의 신발 한번 신어 보십시오. 누가 그렇게 좁은 방에서 다섯 식구가 함께 살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 자기 자식들은 잘해주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사람다운 여건에 살도록 해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생각대로 안 될 뿐입니다.
승승장구하는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됩니다. 머리가 나빠서, 게을러서 그럴 거라 생각해요. 꼭 그렇지 만은 않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코너로 몰아질 때는 도리 없는 것입니다.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해서 예비된 영영한 불에 던져진 사람들은 기록된 죄목이 길어서가 아니라 선행을 기록한 목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날 주께서 우리 각 사람의 행위를 엄숙히 물어 보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 말과 행위를 드러낼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너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실천 했느냐?’ ‘타인의 처지를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준적이 있느냐?’
자기 야망으로 겹겹이 싸여서 다른 사람의 형편에 대해서는 눈먼 삶을 살아 왔는지 ‘언제 주님이 그랬습니까?’ 언제 주님의 배고픈 적이 있었습니까? 주님이 언제 헐벗은 적이 있었습니까? 주님이 언제 옥에 갇혔던 적이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그냥 지나쳤을 리 만무한데요. 저는 주의 일이라고 하면 이등도 서러워했는데, 뒷전에 가 있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인생여정 곳곳에 주어진 선행의 기회를 붙잡았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은 선행은 죄임이 들어날 것입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 끝맺습니다. 실천하지 않은 선행은 무가치 합니다. 그날 여러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실천하지 않는 선행은 죄악입니다. 그날 주님이 그렇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스스로를 신자로 여긴다면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악행을 그친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성도로 간주한다면 선행을 베푼 일이 지난 한 주간 동안에 있는지 살피십시오. 하나님이 내 인생 노정에 보내신 헐벗은 사람을 어떤 모습으로 돌려보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동료 인생의 고달픈 처지를 보살핌으로 주님의 제자 됨을 나타내십시오. 대개 신자들은 하지 않아야 할 악행을 저지르기보다 베풀어야 할 선행을 실천하기에 자주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17절)
모르고 악을 행한 것도 분명히 죄입니다. 동시에 알고 선을 행치 않은 것도 마찬가지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은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