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녀봉에 오르다

[주오돈]

옥녀봉에 오르다

유월 셋째 월요일 퇴근 후다. 하지가 가까워진 때라 낮이 많이 길어졌다. 곧 장마가 시작되지 싶다. 장맛비가 내리기 전 그간 마음에 둔 산을 오르려고 산행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지난 주중 연사에서 가까운 앵산을 올랐던 적 있다. 이제 시내버스로 얼마간 이동해 오를 산이다. 옥포를 내려다보는 옥녀봉에 오를 셈이다. 연사에서 22번 시내버스로 옥포를 거쳐 장승포를 돌아갔다.

지세포는 몇 차례 지나도 옥녀봉은 바라보기만 했다. 활처럼 원호를 그린 지세포만 언덕엔 높은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조선 경기가 활황일 때 고현과 옥포에서 부족했던 택지가 그쪽까지 개발된 듯했다. 장승포에서 마전고개를 넘으니 지세포가 드러났다. 옥상마을을 지난 관음암 정류소에서 내렸다. 해가 길어진 때이긴 해도 퇴근 후 자투리 시간이라 발걸음을 서둘렀다.

우리나라에서 같은 이름 산으로 봉화산이 제일 많다. 어디 뾰족한 봉우리에 사방이 탁 트였으면 영락없이 봉화산이다. 그 산봉우리엔 허물어진 봉수대 터가 남아 있거나 그럴듯하게 봉수대를 복원해 놓았다. 노 대통령 사저 봉하마을도 봉화산 아래다. 봉화산 다음으로 흔한 산 이름이 국사봉과 옥녀봉이다. 국사는 왕의 책사 스님을 일컫기도 하지만 굿을 하는 무당을 이르기도 한다.

옥녀봉은 창원에도 마금산과 나란한 산이다. 마고할미의 손녀 격으로 천상에서 내려온 옥녀다. 근친상간을 경계하는 슬픈 전설로는 사량도 옥녀봉이 유명하다. 옥포의 옥녀봉도 그와 같은 전설을 갖고 있다. 옥녀봉 곁에는 국사봉도 솟아 있다. 거제에 딸린 칠천도에도 옥녀봉이 있다. 그 옥녀봉은 마을 수호신 역을 하고 있다. 가조도에도 옥녀봉이 있다. 거기도 봉긋한 산봉우리다.

대명리조트 못 미친 관음암 정류소에서 비탈을 따라 오르니 여기가 불황기 대형 조선소 배후임을 실감했다. 하청업체가 문을 닿아 종업원 숙소로 쓰던 조립식 건물은 폐가처럼 방치 되어 있었다. 곁에는 고물이 널브러져 쌓여 있었다. 그나마 암자로 오르는 길섶의 풀은 예초기로 잘라져 있어 마음이 놓였다. 종단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콘크리트 구조 관음암은 납골 전문 암자였다.

관음암에서 숲이 우거지고 물이 제법 흐르는 계곡을 따라 오르니 비탈이 몹시 가팔랐다. 이진암(離塵菴) 가는 길이었다. 속세의 먼지와 해어진다는 암자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운문산의 벼랑 끝 사리암(斯離庵)이 떠올랐다. 비탈이 몹시 가파른 산길은 누군가 오래 전 넓적한 돌을 깔아 보시를 해 놓았다. 암자 가는 길 치고는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적어 묵혀져 있음이 의아했다.

중산리서 오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를 연상하는 터에 암자가 나타났다. 아까부터 산길 묵혀져 있음이 궁금했는데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대리석 주추가 놓인 암자였지만 스님은 떠나고 함석으로 덮은 지붕은 낡아 비가 샐 지경 이었다. 뜰은 잡초가 무성해 폐교가 된 초등학교 같았다. 속진을 떠나온다는 암자 이름과 달리 승방에 머물던 스님은 다시 속진으로 내려간 아이러니였다.

돌탑 아래 샘물을 한 바가지 떠 마시고 이진암 뒤로 향하니 소등마을과 대명리조트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합류했다. 정상 못 미친 전망 좋은 바위에 서니 지세포 앞의 바다가 훤히 드러났다. 포구 바깥은 지심도와 내도가 떠 있었다. 사야가 트일 겨울이라면 망망대해 대한해협이 끝없이 펼쳐질 듯했다. 울타리 안에 노루오줌 꽃이 핀 한국방송공사 장승포 송신소를 거쳐 정상에 섰다.

남녘 연안을 굽어보니 해금강과 한려해상 겹겹의 섬들이 연이어졌다. 고개들 돌리니 옥포와 고현의 조선소 도크와 크레인과 함께 아파트단지가 드러났다. 지난주 올랐던 앵산 너머는 내해 진동만이었다. 가조도 뒤로 해가 설핏 기우는 즈음이었다. 낮이 길어진 여름이지만 날이 어두워지기 전 하산을 서둘렀다. 가파른 북사면 비탈을 한참 내려서 대우조선 남문에서 시내버스를 탔다. 19.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