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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영광, 거룩한 예배자
(정원 목사)
이번 주는 예배에 대해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나는 평소에 예배를 인도하면서 오프닝멘트로 거의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예배는 우리 인생의 정점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예배는 우리 존재의 의미이고 목적입니다]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의 임재를 누리는 것입니다]
[바깥뜰의 예배에서 만족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성소의 예배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깥뜰에서 당신은 권능을 받을 것입니다. 성소에서 당신은 기뻐 뛰며 웃고 울 것입니다. 지성소에서 당신은 숨도 쉴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 거룩하신 영광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행위가 수평적인 것이지만 예배는 수직적인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영혼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며, 하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내려오고 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예배당까지 걸어서 왔겠지만, 집에 갈 때는 날아서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헤븐의 성도라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책 100권으로도 모자랍니다. 예배에 대해서 수 없이 언급했지만, 그래도 성도들은 예배에 대한 메시지나 멘트를 기뻐합니다. 나는 이날 [예배의 성공과 실패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다]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예배에 대해서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예배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메시지를 나누면 그 임재가 충만해집니다. 거룩함과 임재가 가까워져서 말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집니다. 중간에 울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면서 메시지를 전하게 됩니다. 어느덧 힘이 다 빠지고 예배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마지막 찬양에 대한 멘트와 함께 마지막 마치는 찬양을 부르며 예배를 마칩니다.
[마지막으로 찬송을 한곡 하고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를 찬송은 찬송가 511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입니다. 이 곡은 제가 모든 찬송가, 경배곡, 복음송을 통 털어서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2절 이전에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이 가사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3절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가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나중에 제가 나이 들어서 죽어갈 때,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이 찬송을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이 찬송가 3절을 들으면서 제가 마지막 숨을 멈출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 나중에 저의 장례식에 놀러 오실 분들이 계시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꼭 이 찬송을 불러주세요. 제 평생의 삶이, 소원, 갈망이 이 찬송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저에게 마지막 선물로 불러주시면 너무나 감사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도, 닦아도 멈추어지지 않아서 그냥 그대로 불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항상 하는 것처럼 교제의 인사를 권유했습니다.
[예배를 마쳤습니다. 모두 다 일어나셔서, 주위 분들 10명 이상 포옹하시면서 <예수님을 간절히 사랑합시다> 하고 인사들을 나누세요.] 그런데, 이 날은 좀 이상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면 모든 이들이 서로 일어나 인사를 나누며 포옹하고 울고 웃고 행복한 소란스러움이 일어나는데, 이 날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 이야기를 못 들었나? 예배가 끝났는데, 왜 아무도 안 움직이지? 예배 끝난 것을 모르는 걸까?>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미 온 몸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기 때문에 강단에서 내려와 마이크를 음향 실에 내려놓고는 강단 옆의 내 사무실로 들어가서 뻗어버렸습니다.
탈진해서 누워있는데, 한참 후에 아내가 사무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들어오면서부터 울었습니다. [거룩함.. 말할 수 없는 장엄함.. 정말 견딜 수가 없었어요.. 주님이 너무 가까이 계신 것 같아서.. 예배 내내 울었어요.. 당신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부르는데..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요..] 나는 놀랐습니다.
[그래요? 나도 우느라고 찬양을 거의 잘 못했는데.. 감사하네요. 근데 왜 사람들이 인사를 안 하고 안 움직이죠? 인사하라는 내 이야기가 안 들렸나요?] [아니에요. 다 들렸어요. 그런데 아마 움직일 수 없을 거예요. 뒤에서는 좀 움직이고 인사도 하고.. 그랬어요. 앞자리에서는 거의 움직이기 힘들 거예요.
나도 맨 뒷자리에 있었는데, 거룩하고 강렬한 힘이 너무 강하게 임해서.. 한 동안 거의 일어나지 못했어요.. 속으로는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서 의자를 치우고 식사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힘쓰다가 나중에 간신히 일어나서 의자를 치우라고 했지요..] 그녀는 말하면서도 계속 울었습니다.
나는 몸에 임하는 느낌이나 신비 체험과 같은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경계하고 경고하는 면이 많을 것입니다. 체험의 첫 번째 차원은 몸에 임하는 느낌입니다. 그것은 달콤하고 짜릿하고 신비한 것 같지만 초보적인 현상이며 깊지 않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것입니다.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았다고 좋아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게 뭐가 대단하다는 것일까요? 육체의 차원에서 주를 보고, 만지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것이며 내면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정말 실재 하시다는 인식이 부족한 초신 자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체에 임하는 현상은 외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멋지고 강력하게 보이지만 사실 가장 낮은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는 안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많은 영적 공격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역자들이 성적으로 탈선하거나 물질을 밝히거나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이 경험이 육체에 속한, 가장 외곽적인 면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기름부음 좋아하고 이러한 체험을 중시하고 긍지를 느끼는 이들에게 엄하게 주의를 주는 편입니다. 불장난을 좋아하면 다칠 수 있듯이,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하고 좋지 않다고 말입니다.
두 번째 영역은 지적이고 정서적인 영역의 경험입니다. 첫 번째 경험보다는 낫지만 이것도 역시 실제는 아니며 허상에 가까우므로 많은 혼돈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이들은 말씀을 접할 때 이해의 차원에서 머물거나 감정적으로 흡수하게 됩니다. 이 상태도 쉽게 교만이나 정죄나 판단이나 자기 긍지를 일으킬 수 있으며 건강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임재의 본질적인 영역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인격적인 헌신이며 교류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경외하며 순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임재입니다. 감각적인 임재나 정서적인 임재와 다릅니다.
이것은 내면적인 것이며 신비적인 것과 다릅니다. 이 영역을 경험할 때 비로소 죄에서의 해방과 삶과 인격의 변화, 실제적인 주님과의 친밀함을 누리게 됩니다. 의식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하고 인간적이고 육적인 욕심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주하심의 영역입니다.
세 번째 영역을 경험할수록 점점 더 영광의 자리나 높은 자리를 견디지 못하게 되며 주를 갈망함으로 병이 들고, 주의 기뻐하심과 영광을 위하는 것이 삶의 존재 목적이 되어 갑니다. 그것이 곧 자유함의 삶입니다. 물질주의의 영역, 자아, 이기심의 영역에서 벗어남이 가장 놀라운 해방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흉악하고 끔찍한 감옥은 자기 영광의 감옥이며 여기에서 모든 죄와 악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래 전, 10여 년 전쯤에.. 소규모의 집회를 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쓰러지고 구르고 울고 웃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나는 객관적인 관찰자의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체험 자체보다는, 그 체험의 결과는 무엇인가? 열매는 어떠한가? 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대체로 오랫동안 묶여있었던 악한 세력들에게서 벗어나는 과정인 것 같았습니다. 격렬한 발작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 후에 사람들은 기쁨과 자유함을 느끼게 되고, 주를 갈망하게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격렬한 발작이나 소란스러움, 울고 웃고 난리치는 것들이 불편해서 그럴 때는 잠시 찬양을 멈추거나 일부러 가벼운 농담을 하기도 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절제시키곤 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집회 중에 외적으로 강렬한 경험을 하는 이들은 줄어들고 잔잔하고 평화로운 경험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집회를 하면 몸이 굳어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찬양을 하다보면 앉은 채로, 선 채로 굳어져버리는 사람들이 있곤 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어서 곁에 있는 사람들이 주물러주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평안함과 기쁨을 주고 영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하며 기도의 행복을 알게 해주고 주를 더 깊이 사랑하게 하는 갈망을 일으키는 등.. 긍정적인 열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배 시간에 툭하면 다 뻗어버리는 것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들을 수가 없지 않은가요.. 그리고 자칫하면 예수님 자체보다 체험 자체에 더 무게를 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예배에서 주님과 주의 말씀보다, 어떤 영적 체험이 더 주목거리가 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러한 결론을 내린 후에, 가급적 예배 시간에 어떤 영적 현상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러자 차츰 몸이 굳어지는 현상도 멈추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요? 괜찮은 것일까요? 몸에 임하는 신비한 체험이나 느낌을 목표로 삼는 신앙은 결코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는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으스대며, 한편.. 그런 경험을 갈망하지만 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을 부러워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합니다. 그 어느 쪽도 성숙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평소의 삶에서 예수님을 왕따 시키고 가볍게 여기고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예배 시간에는 특별한 신비한 체험을 원한다면, 예수님의 영은 그에게 임하실 수 없는데, 과연 어떤 영들이 오게 될까요? 그것은 참 어처구니없고 위험한 일입니다.
성숙의 기준은 외형적인 체험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주님께 헌신되었으며, 그 결과 그의 삶과 인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체험은 있던, 없던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알아갈수록 그의 삶은 아름다워집니다. 고통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향취와 거룩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특이한 경험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쾌감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모든 영적 현상에 대해서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를 드리고,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릴 때, 그분이 불로 임하셔서 우리를 태우시고 거룩하게 하신다면, 그것을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영이 오셔서 우리의 더러움과 욕망과 헛됨을 태우실 때 우리는 그의 순결하심과 거룩하심 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영광과 자아의 영광을 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과 자아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 하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과 땅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과 주님을 도구로 쓰기를 원하는 사람.. 우리가 바른 쪽을 선택할 때 우리는 그 영광에 잡혀지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자기의 영광을 구합니다. 자기의 행복을 구하고 자기의 기쁨을 구합니다. 자기만족을 구하고 자기변호에 빠지며 자기 합리화를 위하여 하나님도, 성경도.. 모든 것을 이용합니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자기를 예배하고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그분의 영광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자기변호, 자기 합리화, 자기만족을 구하는 것은 곧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자기를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복을 구하며 사람의 위로를 구하고 자기를 채워줄 사람을 찾는 것도.. 결국 자기를 예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천국이 시작되고 자기를 예배할 때 지옥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포기하든지 자기를 포기하든지 한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행복이란, 우리가 추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 목숨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고 그분의 원하심을 구하며 드릴 때 오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순복의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지 우리가 원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예배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예배가 왜 필요한지.. 예배의 목적이 무엇인지, 방향이 무엇인지, 타락이 무엇인지.. 회복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제물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바른 예배의 방법인지.. 자기가 왜 예배에 실패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배가 실패하면서 그의 인생도 다 실패했습니다. 이성과 정서가 파괴되었습니다. 극도의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죄의 소원이 올라왔습니다. 죄를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임재의 소멸이며 예배 실패의 결과입니다.
생각과 정서가 파괴되자 실제로 몸으로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책망을 받아도 회개의 영이 오지 않았고 거짓과 원망이 올라왔습니다. 그는 유리방황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자기만의 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하나님 없는 모든 문화들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음악, 공업, 농업.. 모든 일이 외적으로는 풍성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는 땅에서 권세를 받았기에 아무도 그를 해할 수 없었습니다. 헌신되지 않은 상태인데도 세상에서 번영과 권세와 부와 영광을 받은 많은 이들은 그것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결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많은 풍성함이 저주의 결과인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돼지는 잡아먹기 위해서 살찌웁니다. 많은 번영과 풍성 함들은 축복이 아니고 지옥에서 영원히 타기 위한 이 세상에서의 준비입니다. 이 세상은 그들의 것이지만, 영원한 세상은 그들의 것이 아닙니다.
아벨의 예배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는 제물과 함께 자신도 드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제물과 함께 그 자신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제물을 불로 태우셨으며 아벨의 피도 받으셨습니다. 그의 제물은 양의 피만이 아닙니다. 그의 피, 목숨도 더해졌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십자가에서 그도 같이 죽었습니다. 참된 예배는 주님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에 매달려 나도 같이 죽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어린양의 보혈과 십자가가 있고 광야에서는 그 십자가에 나의 달림이 있습니다.
예배란.. 주님의 죽으심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기 목숨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쏟아 붓고 진액을 쏟아 붓고 자기 목숨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통곡과 탈진이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돈이나 지위 영광이 아니고 적신입니다. 주님은 껍데기보다는 속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외적인 성취나 지위보다 그 사람 자신을 원하십니다. 벌거벗은 몸, 적신, 그 생명 자체를 받으십니다. 주님은 하늘의 지위와 영광을 버리고 적신으로 오셨고 적신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도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은 욥에게서 진정한 예배를 받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게 하셨습니다. 선물이나 외적인 축복으로 인한 경배가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의 예배를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욥은 시험을 통과하고 적신으로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 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삶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훈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적신의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주님은 받으신다. 우리는 고백합니다.
[주님.. 돈도 잃고, 건강도 잃고.. 사람들도 다 떠나고.. 저는 이제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돈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원한다. 아무 것도 없는.. 벼랑 끝에 있는.. 벗고 있는 너 자신을 얻기를 원한다.]
출세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십시오. 돈을 많이 벌어서 주님께 드리겠다는 환상을 버리십시오. 그런 것은 세상의 가르침이며 자아의 허탄한 욕망을 부채질하는 속임입니다. 그러한 꿈은 자기 욕망의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주의 손에 붙잡힌 자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지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나가는 것으로 영광 받지 않으십니다. 썩은 자아에게서 주님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시며 원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사람들이 그 분량만큼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시체에게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기대할 것이 있습니다. 성공한 시체보다 살아있는 거지를 통하여 주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 이지 세상에서 잘 나가느냐가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붙잡혀야지 말씀을 이용하면 안 됩니다. 말씀가지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은 정말 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조용히 욕먹고 비난받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초라하고 가난하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목숨을 원하실 뿐입니다. 거드름피우며 수백억을 헌금하고 뿌듯해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적선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주의 왕이십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주님이 기뻐하신 것은 그것이 그녀의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직 생명을 찾으십니다. 그분이 생명을 바치신 만큼, 우리의 생명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옛 생명, 사망으로 가득한 자아의 생명을 주님께 바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으로 가득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에게서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을 잃게 합니다.
예배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거룩한 정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예배가 끝나도 일어나지 않고 한동안 그 자리에서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메시지의 충격으로 한동안 정신이 멍.. 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진정한 예배 자가 되고 싶다고 다들 나누는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행복한 꿈입니다. 우리는 진정 예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예배는 교회의 예배에서 끝나지 않고, 일상의 사소한 삶에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거창한 헌신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크고 위대한 일이 심판의 근거가 아니라, 사소한 일에, 작은 형제에게.. 보잘 것 없는.. 무시하기 쉬운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그것이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작은 일을 보면, 작은 자에게 대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중심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자에게, 높은 자, 지위와 권세가 있는 자 에게는 누구나 조심합니다. 그것은 그의 중심을 알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대하는 것을 보면 그가 주님을 어떻게 대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강한 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아부하며, 약한 자를 잔인하게 대하고 압제하는 것은 지옥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들은 약자와 어린 자를 존중하며 사랑합니다.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 하는 일이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일을, 왼편에 있는 자들은 무시했습니다. 시시하고 약한 사람들을 왼편의 사람들은 무시했습니다. 이들은 생색이 나는 일.. 신문에 나오는 일.. 사진이 찍히는 일..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만약 작은 자들에게 하는 것이 주님에게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을 알았으면, 그들은 온갖 난리를 꾸미며 그 작은이들을 섬겼을 것입니다. 아, 그들은 슬프게도 천국 시험의 출제 경향을 몰랐습니다! 일상의 작은 일이.. 우리의 실제, 우리의 중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전의 거창한 헌신을 두고 두고 간증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간증, 사소한 일상의 예배를 주님은 주목하십니다. 우리의 생각, 언어, 대화, 직업, 재능.. 이 모든 것들은 예배의 도구들입니다. 거룩함은 유지될까요? 거룩한 정적.. 영광스러운 압도되는 느낌.. 감동들.. 천국과 같은 순간들.. 그것들은 유지될까요? 모두가 다 그런 느낌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햇볕이 비추어도 햇살을 받는 위치에 따라 흡수되는 분량은 다 다릅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 아무 방해물이 없는 사람.. 산 중턱의 사람.. 깊은 골짜기에 있는 사람.. 어두운 골짜기에는 방해물이 많아서 빛이 거기까지 내려가지 않습니다.
자아의 감각이 민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 감각에 대하여 아주 둔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로 즐거움을 느끼는 이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가득해도 그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은 외적 현상이나 은사들을 경험할 수는 있으나 그 임재가 그의 인격 안으로 스며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만큼만.. 헌신된 만큼만.. 주의 영광은 잠시 그를 붙잡을 것입니다.
아마.. 대다수는 그 임재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아마 다시 터덜거리며 예배당으로 오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예배의 소중한 순간들을 기억하고 감사합니다. 신앙은 한순간이 아닙니다. 신앙의 여정은 천로역정입니다. 마라톤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에 거룩한 예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 승리를 누릴 것이며 어떤 순간에는 실패와 낙담을 경험할 것입니다. 어떤 순간에는 은총을 경험하며 어떤 순간에는 막막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영광의 순간들은 기억 속에 희미해져도 우리의 순례에 하나의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나의 소원과 꿈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하여 나아가는 것.. 나를 드려 헌신하는 것.. 그것처럼 아름다운 삶은 없습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세상에서 알아주거나 편하게 살거나 부하게 살거나.. 그러한 것은 우리의 관심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썩어질 세상에 대하여 그다지 투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찾고 그것을 따라 걸어갈 뿐입니다.
예배는 인생의 정점입니다. 예배는 거룩함입니다. 예배는 아름다움입니다. 예배는 영광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물이 될수록 우리는 태워질 것입니다. 태워질수록 거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임할 것입니다.
예배 중에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온전히 제물이 되었다면, 태워졌다면.. 오늘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이어도.. 지금 이 순간이 우리 삶의 마지막이어도.. 기쁘고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덜 드려졌다면, 덜 태워졌다면.. 여러분은 당황하고 걱정스러울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말에 당황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은 나도 그랬습니다. 나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나 역시 많은 부분들이 덜 드려졌고 덜 태워졌습니다. 하지만 헤븐 성도들처럼.. 나도 낙심하지 않고 이 여행길을 재촉한다. 지난 일들을 붙들지 않고 앞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영광의 구름을 향하여.. 거룩한 구름을 향하여.. 온전히 불살라지고 드려질 수 있도록.. 온전한 제물이 되기를.. 갈망하면서 걸어갑니다.
예배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제물을 태우시는 불이 있습니다. 거룩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그 예배의 삶을 사모합시다. 영광의 구름 속에서, 우리는 한없는 찬송과 경배를 그분께 드려야 합니다. 자기 영광.. 세상 영광을 버리고 주의 영광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거룩한 구름으로 임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헤븐교회 정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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