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화가, 박수근을 만나다. 박수근 미술관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131-1 / 033-480-2655
골 깊은 땅, 양구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공간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화가, 거칠게 표현 하였으나, 소박한 서민을 담아낸 작품, 그리고 화가만의 예술혼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가장 서민적인 예술가를 만나는 곳, 양구 박수근 미술관입니다.
'아기업은 소녀' 박수근 화백의 작품속에 자주 등장하는 아기를 업고 있는 단발머리소녀, 그녀는 현재 박수근미술관의 명예관장이자, 화백의 장녀 박인숙 관장님입니다.
46번 국도를 타고 양구로 넘어가는 길, 제일 먼저 찾는 양구 여행지, 바로 '선한 이웃을 그리고 간 한국의 밀레'라고 불리는 '박수근미술관'입니다. 강원도 양구 정림리에서 태어난 박수근 화백의 생가터에 마련 된 미술관이지요. 미술관의 첫 인상은 '생각보다 사치스럽다.' 입니다. 대한민국의 밀레라는 수식이 붙어 다니는 화백의 분위기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내, 화백의 생애, 화백의 열정을 알게 된다면 그러한 화백의 마음을 담아 조영한 아름다운 공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비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바로 박수근 화백만의 그림에 대한 철학과 생각을 담은 그림을 그리는 화백만의 작품이 되는 것이지요. 이로서 화백의 그림은 소박한 우리네 일상을 담아내었습니다. 일하는 여인, 장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누이 그리고 아이들, 화백만의 시선으로 접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 만들어지게 된것입니다.
박수근 미술관은 그래서 더욱 돋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화백만의 마티에르 기법의 기본이 되었던 화강암이 길게 이어져 분명 정면일거라 생각했었던 미술관의 입구는 그렇게 끝이 없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바퀴를 다 돌아야 나올려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화강암 덩어리들이 쌓여지고 다시 그 보다 더 큰 화강암이 쌓입니다. 그리고 그 즈음, 미술관의 입구에 닿습니다. 뻥 뚫린 하늘과 야산, 그리고 실개천이 흘러 미술관의 아래로 흘러 내려갑니다. 그 앞에 화백이 익숙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미술관의 겉 모습은 화백의 작품세계를 완연히 보여줍니다. '마티에르', 'Matiere'....
박수근 미술관은 2002년 10월 25일에 개관 하였습니다. 제1전시실은 기념전시실과 기획전시실, 뮤지엄?으로 이루어집니다. 화백의 잠품세계와 예술혼을 기리고, 양구 지역의 대표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미술관은 화백의 소박한 삶과 작품세계를 연구하여 전시하고 교육하며 출판사업을 통하여 재조명하고 있지요. 화백의 손실이 담긴 작품들을 선별, 전시하고 있습니다. '기념전시실'에서는 박수근 화백의 삶을 담은 공간입니다. 화백의 안경, 연적등의 소품부터 유품, 사진, 편지와 메모등과 자녀들을 위해 직접 그린 동화책등이 전시되고 이를 영상과 함께 연표로 전시되어 인간적인 예술가 박수근화백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약 60여평의 규모에 다채로운 전시가 마련되는 공간으로 지난 2012년 7월 25일부터 10월 7일가지는 '일제강점기 그림엽서 보는 박수근 그림일기'라는 주제로 전시가 되고 있습니다. '뮤지엄?'에서는 작가의 작품을 토대로 제작된 다양한 문화상품들을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제2전시실은 역량있는 작가들의 창작활동 공간으로 내어 줌으로서 21세기의 새로운 예술인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들의 작품들은 기획전시하고 있지요. 매년 공모를 통하여 창작공간과 작품활동을 지원하고 있는데, 입주 선정 작가는 숙식이 완비되어 있는 창작공간을 제공 받아 약 1년간 창작활동을 하게 되며, 역량이 인정 되면 개인전의 혜택도 주어지게 됩니다.
화백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불미스럽게도 작품 <빨래터>에 대한 위작 논란이었지요. 2006년 12월, 시장의 풍경은 담은 <노상>이 경매에서 10억4천만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으로 대한민국 최고가 기록을 세웠으며, 2007년 3월에는 <시장의 사람들>이 25억에 낙찰되어 기록을 경신하였고, 같은 해 5월, <빨래터>가 45억2천만원이라는 국내 경매 사상 최고가로 상상을 넘어서는 금액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정결과가 없는 이유를 들어 미술잡지사에서 옥션에 위작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고, 옥션측은 미술잡지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9년 1심에서 "위작이 아니다."라 하였습니다. 소박한 서민을 담은 화백의 그림, 회백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단조로운 일상을 나른하게 묘사한 화백의 작품,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고집한 화백의 작품들입니다. 그러나, 화백의 그림을 수중에 넣은 임자들은 그림에 값을 매기고 그 값의 몇백퍼센트의 돈으로 자랑을 하고 있지요. 뭐, 어차피 박수근 선생의 작품은 최고가를 형성하는 데에는 이의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투기의 대상이 되어버린 느낌은 몹시도 안타까운 것이지요.
박수근 미술관 들어가는 마을의 입구에서..
'미석 박수근(美石 朴壽根, 1914~1965)', 정확히 하자면 화백은 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미석(美石)'은 화백의 아호입니다만, 화백에게 그만큼 잘 어울리는 '호(號)'도 없다 싶어, 길손 임의로 '미석'을 감히 화백의 이름앞에 좋아 보았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석탑, 석불에서 말 할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것을 조형화하여 살려내고자 애?다." 화강암, 대한민국의 땅이라면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돌이지요. 또한 그 돌은 역사속에서 암각화 되어 지금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는 가장 민족적인 요소가 강한 돌입니다. 화백은 그러한 흔한 화강암의 질감을 찾았고, 작품속에 녹아들어 등장인물들은 모두 소박하고 익숙한 우리만의 정서를 담아낸것입니다. 서양화기법이지만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담은 화백만의 기법, '마티에르 기법'입니다. 즉, 이끼가 낀듯한 화강암의 질감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지요. 실제 작품활동을 할때에는 화강암을 옆에 두고 그 질감을 느껴가며 작품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천부적 재능의 화가, 양구에서 자라다. 화백은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군 정림리(現, 양구읍)에서 아버지 박형지, 어머니 윤복주의 사이에서 태어 났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위로는 누나가 셋이 있었으며, 후일 동생 동근, 원근이 태어나게 되어 3남 3녀의 장남이 됩니다. 집은 농사와 상업을 하는 관계로 부유하였고, 위로 누나가 셋이 있었지요. 그러나 화백이 7살 되던 해 광산산업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보았고, 같은 해 여름에는 홍수로 인하여 농사마저도 실패하면서 가난속에 살게 됩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양잠지도원으로 취직하여 말단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이 역시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필이면 그 시기가 화백이 보통학교에 입학하려던 시기였습니다. 양구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한 화백은 미술시간에 탁월한 그림실력을 보임으로서 타고난 재능을 보였고, 당시 일본인 교장선생의 눈에 띄어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2세가 되던 1962년, 프링스의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의 작품, '만종(晩鐘)'을 접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스스로 기도하기를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듬해 1963년 13살이 되면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집안의 형편으로 중학교의 진학을 포기하게 됩니다. 결국 화가로의 꿈을 포기하게 되었지요. 그 때, 순수하게 독학으로만으로 이루어진 그의 그림실력을 지켜 보아 오던 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은 화백의 재능을 안타깝게 여기고 화백의 집을 찾아와 연필과 도화지를 사주는등의 관심을 보였고, 다른 건 몰라도 그림만큼은 계속 그리라는 당부를 하면서 전람회에 출품해 볼것을 권유하기도 합니다. 이로서 꿈을 다시 펼치게 되었고, 그 날 이후 화백은 고향의 산과 들을 배경으로 스케치를 하기 시작하였고, 농촌의 풍경을 담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1932년, 18살이 되던 해, 제11회 '조선미술전람(=선전鮮展)' 서양화부에 <봄이오다>를 출품, 입선의 영광을 안게 됩니다. 이에 용기를 얻었으나, 이 후 3년동안은 계속 낙선을 하게 됩니다. 또한, 오랜시간 유방암으로 투병중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 지자 아버지는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하여 금강산으로 향했고, 형제들도 흩어지게 됩니다. 화백은 당시 춘천에서 머물며 가난속에서도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조선미술전람회의 출품지가 경기도로 바뀌자 이듬해 경기도 포천으로 이사를 하면서, 1936년 제15회 선전에 수채화 <일하는 여인>을 출품하여 입선을 하였고, 이듬해에는 출품지가 서울로 바뀌자 서울로 이사를 하여, 1937년 제16회 선전에 수채화 <봄>, 1938년 제17회 선전에는 유화 <농가의 여인>이 입선하였고, 이듬해인 1939년 제18회 선전에는 수채화로 처음 입선했던 <봄이오다>를 유화로 다시 그린 작품 <여일(麗日)>이 입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금강산으로 떠나 길거리에서 시계수리를 하시던 화백의 아버지가 재혼을 하시게 됩니다. 한 여름을 내금강에서 지내시고, 1963년 10월 금성으로 이사를 하였지요. 그 즈음 화백도 서울에서 춘천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도청사회과장 '미요시(三吉)'라는 일본인이 화백의 그림을 일본 고관들에게 팔아주기도 하였고, 춘천에서 개인전을 열게도 해줍니다.
화백, 동반자를 만나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들이 함께 살고 있는 금성으로 갔다가 그 곳에서 평소 앞뒤집으로 알고 지내던 이웃이 있었는데, 춘천에서 여학교를 나온 17살 처녀에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 때 화백의 나이 25살이었습니다. 구구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면서 구애를 펼치다가 우여곡절을 거쳐 1940년에 아내로 맞이하게 되니 그녀가 평생의 반려자 '김복순(金福順, 1922~1979)'여사입니다. 그의 유일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후 화백의 작품속에는 아내의 모습이 담깁니다. 더불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화백만의 모델이 된 셈입니다. 그리하여 살림을 차리게 되었고, 당시 화백의 그림을 흠모하며 평소에도 도움을 주었던 도청사회과장이 평남도청 사회과장으로 전근이 되자, 화백의 일자리를 마련해 주게 되니 화백의 첫 직장이었던 도청 사회과 서기로 일하게 됩니다. 가족과는 평양과 금성으로 갈라져 살게 되었고 그 기간동안의 부부간의 사랑은 편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듬해가 되서야 아내와 함께 평양에서 살게 됩니다. 낯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을 하고나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1941년 제20회 선전에 <맷돌질하는 여인>으로 다시한번 입선을 하게 됩니다. 화백의 아내를 모델로 삼은 그림이었지요. 이듬해에는 큰아들 '성소(成沼, 1942~1948)'를 낳았고, 그 해 제21회 선전에 <모자(母子)>를 출품하여 입선을 하였는데, 이 역시 사랑하는 아내가 첫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린것입니다. 이듬해, 역시 아내를 모델로 하여 그린 <실을 뽑는 여인>으로 제22회 선전에서 입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장녀 '인숙(仁淑, 1944~ 現, 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을 낳았는데, 태평양 전쟁으로 인하여 미군의 폭격이 평양까지 미치자 아내와 남매를 금성으로 보내게 되었고, 이듬해인 1945년 해방을 맞게되었고, 화백은 금성으로 돌아와 화백의 두번째 직장인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교직생활을 하게 되지요. 순수미술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나름 미술과 관련된 직업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화백이엇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기독교 신자인데다가 자유사상의 화가였던 이유로 공산체제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화백, 먹고살기 위한 그림, 1947년, 1949년 연이어 아들 '성남(城男, 1947~ 現, 화가 )'과 '성인(成仁, 1949~1950)'이 태어 났으나, 장남 성소를 뇌염으로 잃고 맙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외진 산골로 피신하였다가 금성으로 나왔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산골로 피하는 도중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고, 와중에 막내 성인을 전쟁의 혼란속에 잃게 됩니다. 홀로 군산까지 피난을 내려 온 화백은 부두노동으로 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가족들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1952년, 미처 내려오지 못한 아내가 남매를 데리고 남하에 성공하여 화백의 친척집에서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전쟁으로 피난을 내려오면서 화백의 수많은 작품들을 항아리에 넣어 땅속에 보관하였는데, 휴전선으로 막혀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전쟁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난과 궁핍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자연히 화백백의 생활은 어려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있을리 만무했지요. 결국 화방 주인의 소개로 미군 범죄수사대(CID)에 들어가 환경미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후에는 그 보다 수입이 좋은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화백의 자존심이 상할만한 일이었으나, 화백은 묵묵히 가장으로서 초상화를 그려 나갔습니다. 1953년, 마침내 작은 판자집을 마련하였고, 막내아들 '성민(成民, 1953~ )'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화백은 작은 마루를 작업공간으로 삼고 다시 창작에 열중하게 됩니다. 박수근 미술관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처음 만나게 되는 사진, 바로 그곳입니다. 그 해 가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국전國展)'에서 서양화부에 출품한 <우물가>, <집>이 특선으로 선정되었고, <노상에서>가 입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박수근 화백만의 독특한 화법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단순화시킨 소박한 주제, 굵고 명확한 검은 선의 윤곽, 횐색, 회갈색, 황갈색의 평면적 색채, 그리고 원근감이나 명암이 배제된 독특한 표현 양식입니다. 제3회 국전에서 <풍경>과 <절구질하는 여인>이 입선을 하였고, 그리고는 그나마 벌이가 괜찮았던 PX에서의 초상화그리는 직업을 버리게 됩니다. 겉으로 들어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그런 일을 화백은 용납하기 싫었던 것이지요. 전업화가가 된 것입니다. 그림 1점은 쌀 한말이 되었고, 화백은 끼니때 마다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스 많은 그림들을 그려냅니다. 그러나, 작품의 상당수는 미국으로 건너 가게 됩니다.
박수근 미술관 제1전시실
가난한 화백, 집념의 예술가가 되다. 1954년, 한국전쟁 발발4주년 기념 '대한미협전'에 <산>, <길가에서>를 출품하였고, 1955년 제4회 국전에서 <오후>가 입선을 하였고, 제7회 대한미협전에는 국회문공위원장상을 수상한 <두 여인>을 비롯, <노상>, <풍경>을 출품하였고, 1956년 제5회 국전에서는 <나무>가 입선을 합니다. 같은 해 대한미협전에 <노상>, <풍경>을 출품하였는데 당시 반도화랑(現 반도호텔)을 중심으로 외국인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 하여 많은 작품들이 팔리게 됩니다. 또한 막내딸 '인애(仁愛, 1956~1967)'가 태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즈음, 대한민국의 예술가는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국전을 둘러싼 미술계의 파벌싸움이 극에 달하고 있었지요. 또한 제5회 국전 당시에는 국전 거부운동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백은 그러한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빠져 있었고, 그리하여 1957년, 온갖 정성을 다한 100호 크기의 작품 <세 여인>을 제6회 국전에 출품하게 됩니다. 그러나 탈락이었습니다. 화백의 충격은 대단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음주가 심해졌고 건강도 극도로 해치게 됩니다. 이 후 화백은 더 이상 국전 출품을 하지 않게 됩니다. 반도화랑의 창설자인 미국여류 화상 '실리아 짐머맨(Cilia Zimmerman)'에 의해 <노변의 행상>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동서미술전'에 출품되어 외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모자(母子)>, <노상>, <풍경>등을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 출품하기도 합니다. 이 후, 각 분야의 추천작가로 활동 하면서 <한일(閑日)>, <좌녀(坐女)>, <봄>, <휴녀(休女)>, <노인과 유동(遊童)>, <노상의 소녀들>, <노인>, <나무>, <목련>, <아기업은 소녀>, <골목안>, <나무와 두여인> 등의 작품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62년, 제11회 국전의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위촉 되었고, 추천작가로 <소와 유동(遊童)>을 출품합니다. 사실상 4.19와 5.18의 격동을 거치면서도 그의 작품성은 주한미군, 일본, 필리핀등에서 유명해 졌으나, 그의 생활을 궁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술적인 지위와 평가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으며, 실제 화백의 내?적인 예술성도 절정에 달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화백의 생활은 작품속의 주인공들처럼 궁핍했습니다. 1963년 제12회 국전의 추천작가로 <악(樂)>을 출품을 하였으나, 계속된 과음으로 건강은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백내장이 발병하였고, 수술비용이 없어 미루다가 더욱 악화 된 후에야 안과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결과는 좋지 않아 결국 왼쪽눈을 실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경을 쓰고 오른쪽 눈 만으로도 작업은 계속 이어 갔습니다. 그러던 1964년, 지병인 간경화의 고통속에 <할아버지와 손자>를 완성하고 제13회 국전에 추천작가로서 출품을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간경화의 악화로 서울 위생병원에 입원하였으나 병세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이기에 5월 5일 퇴원하여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됩니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5월 6일 새벽1시, 화백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찌보면 긴장감 없는 예술가의 삶, 대한민국의 국민화가로서 어떠한 전설도 있지 않은 지극히 서민적인 삶을 살았던 예술가였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화백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며, 마치 어디선가 마주친듯한 모습을 합니다. 낮설지 않은 표정과 모습이지요. 그리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입니다. 따로 배움의 길을 갖지 않았던 화가로서의 길, 예술가로서의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진득함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장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져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며, 박수근 미술관에서 만났던 화백의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 봅니다. 화백만의 독특한 '마티에르', 거친 돌의 느낌, 그러나 무엇보다도 순수한 우리네의 느낌, 그래서 더욱 익숙한 그만의 거친 작품의 느김은 우리에게만큼은 너무도 소박하고 부드럽게 다가오는 이유였습니다.
화백의 예술적 가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화백에게서 전해진 유전자적 기질을 그대로 받은 딸과 아들, 그리고 손자입니다. 화백의 그림속에 자주 등장하는 소녀, 아기를 없고 있는 소녀, 바로 그 단발머리 소녀가 화백의 장녀 '박인숙(朴仁淑) 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님'입니다. 화가는 아니었으나 교직 생활을 하면서 늘상 대하듯 한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국전 15, 16, 18회에 입상하면서 화단에 들어섰고, 10여차례 넘는 개인전도 갖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업화가로서 아버지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녀의 화법은 아버지 박수근의 마티에르 화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조심스러운 부분이지요. 자칫 아버지의 작품활동에 누를 끼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늘 조심스러워 하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예술가가 있습니다. 사실상의 장남 '박성남(朴城男)화백'입니다. 아버지 박수근의 삶을 바라보며 살아 온 아들이지요. 가난속에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작품이었던 것이지요. 1986년, 호주로 이주하여 보다 나은 환경을 꿈꿨으나, 영유권 문제로 인하여 가족은 한국과 호주, 인도로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꿈은 접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늘 기도한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그러나 아버지의 화풍이 아닌, '아버지의 작가정신과 성실한 삶'을 말이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1년 뒤, 화가는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당시 어머니는 3호짜리 굴비가 그려진 그림을 선물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아버님의 작품이 호당 3만원정도였으니 3만원에 내놓았는데, 임자가 나타나서는 2만5천원에 사겠다고 하여 팔아버린 후 두고두고 이를 후회했다고 하지요. 그로부터 30년, 그 그림을 다시 찾으니 2억5천만이 되어 있었습니다. 무려 1만배가 오른 것이지요. 그리고 그 작품은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에 전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화백의 손자 '박진흥 화백'입니다. 3대로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분으로 그나마 경제적인 부담이 적었던 인도 델리미술대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하였고, 졸업때에는 인도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한 역량있는 작가입니다. 새벽에는 청소일을 하여 번 돈으로 호주 웨스턴 시드니 미술대학원을 졸업하였고, 2001년, '블랙타운미술대전'에서 9.11테러를 소재로 한 '<회색도시 뉴욕(Grey City N.Y)>'으로 대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손주로서 3대로 이어지는 확로서 할아버지, 아버지와는 다른 그림을 그리려 노력하였습니다. 선대작품을 모방한다는 손가락질이 싫었다는 이유이지요. 그러고 보면 화가의 아버지 박성남화백의 아버지와는 다른 그림에 대한 노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입니다.
그리고, 화백의 꿈을 그대로 이어가는 3대의 용기와 예술성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제1전시실 기념전시관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내오니 용서하시고 끝까지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일곱살 되던 해 아버지의 광산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5세때 서당에 다녔고 7세때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나는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암으로 오래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셔서 동생들과 아버지를 어머니 대신 돌봐야 했기에 고학이라도 해서 미술학교를 다니려 하던 꿈은 그만 깨어져 버렸습니다.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다섯번 선전에 입선을 했습니다. 선전에 처음 처녀 입선한 것은 내가 18세 때였습니다. 지금까지 춘천에서 그림공부를 하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오니 부모님께서 윗집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번 거절했습니다. 내가 더 성공해서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부모님께서 하도 권하셔서 나는 당신에 대해 내 동생 원근이와 동네 사람들에게 알아보았습니다.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하러 같이 갔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마음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으론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아내로 맞이 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나는 나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 보기도 합니다. 나의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글은, 박수근 화백이 자신의 아내가 된 김복순 여사에게 보낸 '연애편지'입니다. 사실, 화백의 생각과 갈등, 예술혼등은 대부분 김복순 여사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열화당'이라는 화백의 자서전 형식을 빌린 서적도 있으나, 그 보다는 옆에서 늘상 보아온, 남편으로서의 모습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아내로서, 예술가로서의 모습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던 아내의 시선이 더욱 정확할 것이라는 이유이겠지요. 전쟁으로 인한 헤어짐, 그리고 가난의 연속에도 굴하지 않고 둘만의 사랑을 키워온 부부, 김복순 여사는 지금의 국민 화가 박수근을 만들어 낸 가장 큰 조력자 입니다.
화백이 보낸 연애편지는 여사의 아버지에게 먼저 발련되었지요. 그 바람에 집에서는 춘천에 있는 어느 의사집 아들과의 혼례를 급히 추진하기에 이릅니다. 이를 알게 된 상사병에 걸린 화백은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누웠지요. 그러니 화백의 집에서도 장남이 저러고 있으니 놀랄만도 합니다. 결국, 아래 윗집의 집안 어른끼리 담판을 지었고, 결혼을 승낙하였는데, 여사의 집에서는 혼례를 허락하면서 통곡을 하였다 하지요. 그림을 그려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 당시에는 참으로 어려운 생활이 될것이라는 것이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일것입니다. 고이 키운 딸을 가난속에 보내고 싶은 부모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실제 부부의 금실은 너무도 좋았습니다. 따로 포스팅을 하고 싶을 정도로 부부애가 깊었습니다. 신혼초부터 직장으로 인하여 별거 생활을 하면서 부부는 많은 사연을 편지로 주고 받았습니다. 하도 많은 편지에 우체부가 다 투덜거렸다고 합니다. 당시 평양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화백은 '이곳의 날씨가 너무도 춥다.'라고 하자, 아내는 자신의 털 목도리를 풀어 화백의 스웨터를 짜려고 하였으나, 털실이 모자라 털조끼를 짜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감동한 화백은 또 다시 감사의 편지를 보냈겠지요. 극심한 생활고를 함께 한 아내, 화백의 유일한 모델이 되었던 아내, 그리고 전쟁, 남편이 떠나고 공산치하가 되어 버린 금성에서 어린 남매를 데리고 남하에 성공한 아내, 그리고 재회, 그러나 또 다시 가난의 연속이었던 집안 살림이었으나, 아내는 늘 화백의 곁을 묵묵히 지켜 주고 있었습니다. 여사는 화백을 회상하면서 '그는 이웃의 아픔을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이를 자신의 아픔으로 생각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때면 노상의 손수레, 광주리에서 구입하였고, 광주리를 이고 나온 여인들을 불쌍하게 생각했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화백의 그림속에는 유독 노상에서 장사를 하는 여인들이 많은 이유이겠지요. 그렇게 화백의 뒤에서 묵묵히 살아오던 김복순 여사는 서울 중곡동 장로교회에서 전도사로 지내다가 1979년 9월 30일, 뇌졸증으로 쓰러져 화백의 곁으로 갔습니다. 17살의 꽃다운 나이에 25살의 화백과 혼례를 올렸고, 51세로 세상을 떠난 화백의 뒤를 57세가 되어 찾은 것입니다. 화백과 여사가 처음으로 만났던 빨래터, 그래서 유독 빨래터의 모습을 즐겨 그렸던 화백, 아마도 또 다른 빨래터에서 남은 사랑을 나누지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름다운 부부, 박수근 화백과 김복순 여사의 잔잔하면서도 아득한 부부애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같은 무지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부러운 부부가 아닐수 없습니다.
제1전시관 기획전시실
제1전시실 '사진엽서속의 박수근 그림읽기' (2012.7.25~10.7)
일제치하, 한국전쟁속의 화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사진기의 보급이 대중화되어 있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기에 화백은 일제 당시 엽서를 수집하였고 이를 작품활동에 참고를 하였습니다. 대중적이지 못한 카메라에 더하여 일제는 칼라카메라는 들여와 사진 촬영을 하였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백의민족'이라는 우리네 순수의 '색(色)'을 칼라로 촬영함으로서 우리만의 색을 없애려는 의도와 민족성을 평가절하 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지요. 그러함 속에서 화백은 소박한 한국만의 서민들을 담고,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정서를 담아내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그러고보니 전시가 이번주로 끝이 나네요. 화백만의 작품, 다음 전시도 기대가 됩니다.
박수근 화백상
박수근 미술관 전경
박수근 미술관 제2전시관
제2전시관 앞에 자리한 생태연못분수대
정림리 창작스튜디오 박수근 미술관을 빠져 나오면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미술관입니다. 2012년 10월 현재 인근의 초등학생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림리 갤러리는 박수근미술관의 또하나의 전시관으로서 개인전이 열리는 공간이기도 하며, 공개 전시, 영화상영등을 하고 있는 공간입니다. 특히 월 1회 마을 어르신들을 초청하여 부침개와 막걸리로 잔치를 열어 전시관의 오프닝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박수근 화백, 김복순 여사 그리고 장녀 박인숙 명예관장님 아마도 벌이가 좋았던 PX 초상화를 그리면서 번 돈으로 마련한 창신동에 마련한 집인듯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집의 마루를 화백의 작업공간으로 삼았다고 하지요. 가득 자리한 화백의 작품은 한 점 팔아 쌀을 사다 끼니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출처 : 박수근미술관 홈페이지>
INFO... 박수근미술관 http://www.parksookeun.or.kr/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 (舊, 정림리 131-1) / 033-480-2655 관람시간 09:00~18:00 관람요금 대인 1,000원, 청소년.군인 700원, 초등생 500원 주차요금 무료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 대중교통 양구시외버스터미날 > 박수근미술관(정림리차고지) 10분소요
by 박수동 |
출처: 길손의 旅行自由 원문보기 글쓴이: 길손旅客
첫댓글 대단하시네요..박수근님의 일대기??? 이런자료들을 어디서 구하시는지도 놀랍구요..눈팅만하다가 고마운마음에 처음 댓글을 드렸어요..열심히 님의 글을 보겟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스스로 공부하면서 쓰다 보니 글이 길어지기만 합니다.^^
길손旅客님..가람이도 윗분의 댓글에 공감!! 박수근화백에대해 쉽게 공부? 잘 했읍니다.항상 당신사랑에들어오면 길손旅客님의 글을 찾아보곤했는데..오늘 너무 너무 대단하신분이다 생각이 들어서.. 왕릉여행을 보면서도 매번 감탄했는데..궁굼해요..다른분글들은 이렇게 자세하게 공부?는 안사켜주잖아요??? 그레서 더욱 고맙다는거겠죠?? 열심히 길손旅客님글..찾아읽어볼께요^^*
좋게 보아주시니 더욱 감사드리구요.^^
양구에서 출생하신분 박수근화백의 미술관을 다녀오셨군요
양구읍내서 좀 떨어진 서쪽 산쪽에 자리잡고있지요 이곳은 미술관 아래로 도랑이 흐르도록 설계되여있구요 이도량에 빨래터도 마련되있지요
작품중 빨래터도 유명한 작품이지요 좋은내용과 전경을 두루 살펴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네, 오성이님 말씀대로 입니다.
양구 여행에서 꼭 들러보는 곳 중 한곳이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