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己 寂滅爲樂
anicca vata samkhara uppada vaya-dhammino uppajjtva nirujjhanti, tesam vupasamo sukho
흔히 해석하길,
모든 것은 무상해서 이것은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다. 이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諸行無常 是生滅法을 검색하다 이런 설명을 보았다.
팔리어를 공부한 어느 학인의 해석에 따르면..
앞 문장의 생멸은 자연의 생멸을, 뒤 문장의 멸은 5온의 멸을 뜻한다고 해서
"자연은 무상한 것으로 생멸법이다.
5온을 멸하고 나면 즐거움이 생긴다."
로 새겨야 한다고..
만일 그의 팔리어 문자 해석이 맞다면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한다.
제행의 행은 조작이란 의미로 유위라 하는데.. 무위가 아닌 유위를 말하는 이유는 일체 사건은 관찰하는 자의 의도가 반영되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생멸법(生滅法)'이란 오히려 자연의 법에 관계없이 인간이 바라보니 생멸법으로 보인다는 게 된다.
그런 [제행무상] 설법의 근본을 무시하고 제행에서 행을 자연의 무상이라 하면서 "자연은 무상한 것으로 생멸법이다" 하는 것은
근본불교의 근간을 흔드는 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제행무상에서 무상은 anicca라하여 한순간도 존재함없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것으로 관찰되는 것이라 했는데..
그런 무상을 생멸법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앞에서 흐르던 강물은 멸하고 뒤에서 흐르던 강물이 생겼다?..^^
생멸법이라 하려면 존재가 생멸하는 것으로 아는 게 되니.. anicca 가 아닌 asassata인 무상이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열반경이 수집정리 되었을 때 anicca 의미는 asassata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색(수상행식)을 생멸하는 asassata인 무상으로 관찰하 것은 모든 바라문이나 사문이 그렇게 닦고 있었다. 색(수상행식)을 생멸의 연속이 아닌 흐름인 무상 anicca로 관찰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불교의 특징이 된다.
5온을 흐름인 아니짜로 관찰할 때[제행무상], 그 전까지 알고 있던 생멸 무상 asassata에서 오던 고를 멸할 수 있어..
生滅滅己를 깨치고 寂滅인 樂에 이를 수 있다.
그러니까 제행무상의 뜻은 생멸법이 아니라, 생멸법이 멸한 적멸이라는 것이다.
첫댓글 그러니까 제행무상의 뜻은 생멸법이 아니라, 생멸법이 멸한 적멸이라는 것이다.//
자기 말이야 어쩌든지 어떻겠습니까만... 생각을 다시 해보시는 것이 어떻겠나 싶습니다.
위에서 말 한데로 본다면, 제행무상이 적멸의 열반이라는 뜻이 되나요...?
열반(涅槃)은 무상(無常)이 아닙니다...
나찾님은 anicca와 asassata 뜻 차이를 아십니까?..^^
@효진 저는 그쪽나라 말은 안배웠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괴로움은 무상하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이 열반이라면, 열반이 괴로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열반을 이루어도 괴로움이 있다면 열반을 닦을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요...
@나를 찾아서 그쪽나라 말을 저도 잘 모르지만.. 아니짜와 아싸사타에 대해서 많은 말을 저는 하고 있어요. 왜 무상을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만일 님이 저와 토론을 하려면 상대가 어떤 말을 하면 왜 그 말을 하는지.. 알아보는 에의를 취하는데.. 님은 전혀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 있어요. 그것은 토론하는 기본이 아니죠.
아무튼 무상과 고, (무아)에 대한 관계도 나와 다르게 보고 있으니 그것을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제행무상, 일체고, 제법무아라 하여 3법인이라 하는데.. 경을 보면
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고라 하십니다.
그리고 무상anicca한 것을 구름을 일으키듯 집기시켜 asassata 애착을 보이니 괴로움이 있는 것이지 무상anicca하기에 괴로운 게 아닙니다.
5음성고 또는 5취온이 고라는 것은 바로
아니짜인 무상이 아닌
5취온으로 집기시켜 존재화가 된 것이 생주이멸을 하니(= 아사싸타) 괴로움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색(수상행식)이 아사싸타가 아닌 아니짜임을 관찰하라(=제행무상)는 것은 색을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 겁니까?..
색은 집기해 존재하면서 생주이멸(생노병사)하는 게 아닌
강물처럼 흐르면서 변하는 것임을 관찰하라는 거지요.
세간에서도 색수상행식 5온이 생주이멸하는 무상으로 자알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때 무상은 아니짜가 아닌 아사싸타인 무상이라는 겁니다.
세간에서 알고 있는 아사싸타 무상은 바른 관찰이 아닙니다. 바른 관찰은 아사싸타 무상이 아닌 아니짜 무상으로 관찰하는 겁니다.
"색(色)은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正觀]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 하느니라.. <잡. 1-1. 무상경>
@효진 <1. 무상경>에 나오는 무상은 아사싸타가 아닌 아니짜이며,
아니짜로 관찰할 때 바른 관찰이라고 하십니다.
세간에서 아는 생주이멸은 아사싸타인 무상으로 그것은 바른 관찰이 아니라는 게 됩니다..()..
@효진 본래 있지 않는 것에 있다는 생각을 내어 집착하고 애착하는 것이 괴로움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만약 그 집착과 애착에 내 뜻대로 된다면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재미있겠지요.
무상이 괴로움이란 것은, 그 변함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괴롭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상(無常)이 고(苦)라는 것입니다.
무상이 苦라면, 열반또한 내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있는 苦가 되지 않겠습니까...
무상을 열반이 된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나찾님은 효진이 하는 말 뜻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한 개도 없어 보여 모른 척하려다.. 몇 자 적습니다..()..
무상이 괴로움이란 것은, 그 변함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괴롭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나찾님
저 문장은 맞지만. .나찾님은 저 뜻을 곡해하고 있어요.
[그 변함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1) 나찾님처럼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내가 있기 때문이고,
2) 나찾님처럼 무상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를 헤아리지 않고 글자만 따라 무상하니 괴롭다고 외치고 있는 격이 됩니다.
무상이 왜 고롭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님이 있는데 그 님이 떠나려 하니 고롭습니다.
즉 고가 되려면 [내가 사랑하는 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로와 하는 나도 있어야만 하구요.
이렇게 잠시든 오래이든 실제하는 게 변하는 것을 아사싸타인 무상이라 하는 것으로..
나찾님은 아사싸타 무상으로 제행무상을 이해하고 있어요.
만일 아사싸타 무상이 아닌 아니짜인 무상 곧 제행무상을 아니짜로 이해하면..
자아나 내가 사랑하는 님이란 실체가 없는 가운데 변하는 것으로 알아채는 것이 되기에..
내가 사랑하는 님이란 집착이 일어날 수 없으므로 고가 생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곧 제행무상(아니짜)을 바르게 이해하면. .고가 생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니짜(제행무상)를 모르고 아사싸타(무상)로 알고 있으니 고롭다는 겁니다.
보리수님 역시 아사싸타와 아니짜를 섞어서 불교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혼란의 불이 꺼지지 않고 있는 거죠.
저 본문을 올린 이유는 바로 나찾님처럼 諸行無常 是生滅法 를 알고 있을 것 같아.. 나 역시 저 문장은 아사싸타 무상으로 해석이 되므로.. 함께 생각해 보자는 거였는데..
님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ㅎㅎㅎ^^
그러나 무상관은 단순히 비관적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에 대하여 비관하거나 기뻐하는 것 자체가 상이며,
그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 위키백과
위키백과에서 설명하는 [그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생멸멸이]로 이해하면..
너무 오버한 게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