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 눈엔 한없이 힘들어 보이고 안쓰러워 보이는 삶이지만, 자연을 훼손하는 방법을 모르는 그들은 자연 속에서 나름의 희망을 품는다.
EBS '세계테마기행' 함정민 PD의 세계 속 다른 세상
자연에 기대어 행복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가이아나1탄 - 모라와나 마을
1996년부터 방송 일을 시작해 만 14년 동안 33개국을 돌아다녔다. 대한민국의 모든 프로덕션이 그렇겠지만, '사전답사'라는 게 없다. 그러다보니 방문하는 나라마다 갑자기 벌어지는 돌발상황에서 그 나라만의 색다른 경험을 하곤 한다. 가이아나촬영을 끝낸 후, 한국에 무사귀환한 나에게 작가는 물었다. "가이아나 어땠어요?"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Unforgettable"이었다.
2009년 11월에 다녀온 가이아나. 애당초 가이아나라는 나라를 갈 계획은 아니었다. 4개월 전부터 파키스탄의 겨울을 한 번 찡하게 보여주자 맘먹고, 파키스탄 정부에 촬영비자를 신청하고 아이템까지 확정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떠나기 10일 전에 터진 파키스탄 폭탄 테러. 솔직히 파키스탄에 폭탄 터지는 게 어제 오늘 일일까 싶어 그냥 강행하려고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여행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같이 가는 스태프들의 안전은 피디인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파키스탄 현지에서 20년 넘게 사업을 하신 사장님의 결정적인 한마디, "함 피디, 이번엔 아닌 것 같아. 경찰서, 대사관에 이어 언론 팀을 노린다는데..."
출발 10일을 앞두고 나라를 바꾸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밤새 비상회의를 하며 인터넷을 뒤지던 중 내 눈에 띈 글 하나가 있었다. '전 국토의 80% 이상이 열대우림인 가이아나. 가이아나 정부에서 개발의 과욕을 부리지 않고 지금의 상태만 유지한다면 앞으로 세계 최고의 생태관광지로 각광받을 것이다.' 뭘 찍어도 찍겠구나 싶어 출발하기로 했다.
생소하다 못해 비행기표를 끊기 위해 전화를 걸었던 여행사에서 '아프리카 어디에 있나요?' 라고 되물었던 남미에 위치한 나라, 가이아나. 여행사의 비행기표가 너무 비싸 인터넷으로 인천공항을 거쳐 미국 누욕의 JFK공항-트리니다드 토바고의 포트오브스페인공항을 경유하는 티켓을 구입했다. 그리고 드디어 출발한 지 36시간 만에 가이아나에 도착했다.
급한 나, 느긋한 가이아나
모 CF에서 그랬던가? '집 나가면 개고생' 이라고.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떠난 가이아나의 하루하루는 정말 말 그대로 '개고생'이었다. 그나마 영국의 식민지여서 '영어'가 공용어라는 것은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커다란 복이었다.
사전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아이템을 찾아야 했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무심코 나온 말. "북쪽으로 가면 갯벌에서 게를 잡으며 사는 수상마을이 있다는데" "거기가 어디죠?" "마바루마인가 거기 근처라는데..."
수도 조지타운(Georgetown)에서 경비행기를 이용해 가이아나 북쪽으로 날아가 도착한 마바루마(Mabaruma). 승객 정원 12명이 전부인 경비행기는 반드시 탑승 전 승객들의 몸무게를 잰다. 워낙 규모가 작기 때문에 무게가 초과되면 워험해서 철저히 확인하는 것이다. 마바루마에 도착해서 보니 작은 경비행기에서 별의별 짐이 내려진다. 타이어부터 유리가 부착되어 있는 창틀까지 모든 생활용품들이 공수되는 것이다. 다시 마바루마에서 수상마을에 대한 정보를 얻고 보트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 눈엔 한없이 힘들어 보이고 안쓰러워 보이는 삶이지만, 자연을 훼손하는 방법을 모르는 그들은 자연 속에서 나름의 희망을 품는다.
가이아나는 영어가 공용어라는 점은 편리하지만 아직까지 관광 인프라가 잘 되어 있지 않아 대중교통인 버스가 없다. 미니봉고가 버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버스비를 부른다. 가이아나 달러(Guyanese dollar, GYD)로 1000달러. GYD가 우리 돈 6.6원이니까 6600원이라 그 정도는 줄 수도 있겠다고 처음엔 생각했다. 그러나 내 눈에 딱 걸린 현장. 현지인들에게는 100GYD만 받는 것이 아닌가. '왜 우리는 1000GYD냐' '싫으면 관둬라' 실랑이가 벌어졌다. 보지 못했으면 몰라도 본 상황에서 죽어도 1000GYD는 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옆의 다른 현지인이 하는 말이 선착장까지는 5분도 안 걸린단다.
"저스트 나우! 파이브 미닛" "그럼 걷자!" 걸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중학교 때 저스트 나우(Just Now)는 '금방, 바로'의 뜻으로 배웠다. 하지만 가이아나의 '저스트 나우'는 딱 곱하기 10배다. 그늘 하나 없이 내리쬐는 남미의 뜨거운 햇살 아래 40여 분을 걷다 보니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고, 같이 간 스태프들한테 정말 미안해졌다.
그렇게 드디어 도착한 선착장. 수상마을 이름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마을 이름을 추적했고, 현지인 할아버지를 통해 그곳이 '모리나와 마을'이라는 것을 알았다. 선착장에서 마을까지는 보트를 타고 1시간 1반을 가야 한단다. 가이아나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물가였다. 특히 기름값은 언빌리버블. 보트 한 번 타고 1시간 거리라고 하면 최소 3만GYD에서 시작한다. 거의 우리 돈 20만 원이다. 한국 시장에서 콩나물 값은 못 깎아도 해외 촬영하면서 흥정에는 도가 텄다. 보트 가진 사람들을 찾아 발품을 팔면서 1시간만 투자하면 일단 2만GYD까지 내려간다.
운좋게 젊은 보트 주인을 만났는데 다리를 절뚝거린다. 무릎을 부딪쳤다는데 멍이 들고 꽤나 아파 보인다. 같이 간 사진작가의 짐속에 있는 파스를 붙여주었다. 그리고 남은 파스를 몇 장 더 주고는 보트비를 1만GYD까지 깎는 데 성공했다(항상 느끼는 건데, 선진국이 아닌 나라를 갈 때는 의약품을 정말 많이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가벼운 파스나 밴드 종류로).
게를 잡아 살아가는 수상마을 모라와나
그렇게 도착한 모라와나 마을. 이곳 사람들의 게잡이에 동행하기 위해 일단 마을 대장님인 아쉬칼라 아저씨와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초면에 웃통 벗고 테이블에 앉으셨다. 게잡이를 나가는 사람들과 동행하면 될듯한데, 그 배의 기름값을 우리보고 지불하란다. 생각지 않던 협상 내용이었다. 배 크기도 만만치 않다. 20만GYD, 우리 돈 132만 원이다. 수상마을 앞에 있는 강가에서 잡아도 될 것 같은데, 굳이 멀리 나가야 한단다. 한참을 들어보니 한동안 마을 사람들이 멀리 나가지를 못했단다. 이유는 기름값이 없어서라고. 기름값이 없어서 유일한 생계수단인 게잡이를 그동안 바다가 있는 갯벌까지 나가지를 못한 사람들인 것이다. 순간 심란해졌다. 잠깐의 스태프 회의 끝에 배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배 섭외도 끝나고, 내일의 일정도 모두 확정시켰다. 이제 간만에 다리 뻗고 자나 싶었다. 근데 잘 곳이 없다. 낮에 아쉬칼라 아저씨가 촬영 스태프들 잘 곳은 자신이 마련해준다고 하길래 방 한 칸이라도 내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준비한 '숙소'는 달랑 선착장 끝에 걸린 해먹 3개가 전부였다. 귀국 후 해먹에서 잤다고 했더니 다들 낭만적이라고 야단이다. 하지만 해먹에서 자본 사람은 알 것이다. 허리가 끊어질 듯한 기분을. 살짝살짝 낮잠을 자는 것이면 몰라도 정말 힘들다.
예전에 브라질 판타날이라는 곳을 한 달 정도 촬영하면서 정글에서 해먹을 치고 잔 적이 있다. 사실 그때는 지금보다 젊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힘들어 다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먹에선 안 자리라 결심했는데... 더 힘든 건 이 나라 사람들 어찌나 소음을 좋아하는지 한 집은 음악을, 한 집은 TV를 크게 틀어놓는데 그 소리가 서라운드 돌비시스템으로 '지직'거리면서 온 동네가 떠나갈 듯하다. 절로 '살려주세요'라는 비명이 나온다. 모기와 싸우며 해먹에서 뒹굴다 보니 어느새 새벽 4시가 되어간다. 대충 페트병에 감춰놓은 물로 이를 닦고, 고양이 세수도 하고 촬영 준비를 마쳤다.
마을 사람들을 만나기로 한 5시가 됐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나오질 않는다. 약속시간 5분이 지나서야 겨우 대장 아저씨가 나왔다. "왜 사람들이 안 나오나요?" 급한 나의 질문에 대장은 느긋하게 금방 나올 거란다 "저스트 나우." 결국 새벽 6시 반에(생각보다는 준수하다고 생각했다) 배가 출발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해변에 도착했다. 바다에서 게를 잡는다고 해서 그냥 모래사장에 구멍난 게집을 찾아 잡는다고 생각했다. 해변에 구멍 뽕뽕 뚫려 있고, 그 옆으로 귀엽게 도망가는 녀석들을 상상했다. 그런녀석들을 잡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환경이 있을 수 있을까. 물이 빠진 뻘 여기저기에는 뾰족한 나무들이 솟아 있고, 한 발짝 움직이기에도 힘들 만큼 발이 쑥쑥 빠졌다. 잡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시커먼 뻘 속으로 어깨까지 손을 뻗어 게를 잡는다. 게다가 수천 마리의 모기들이 사방에서 공격한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 눈엔 한없이 힘들어 보이고 안쓰러워 보이는 삶이지만, 자연을 훼손하는 방법을 모르는 그들은 자연 속에서 나름의 희망을 품는다.
자식을 위해 나를 버리는 마음
한국으로 돌아와 편집하면서 녹음된 모기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시커먼 뻘밭에 어깨까지 집어넣고 수천만 마리의 모기와 싸우며 잡는 진흙게 한 마리의 가격은 우리 돈으로 단돈 500원. 그들은 그나마 이렇게 멀리 바닷가 뻘까지 나왔기 때문에 500원짜리 게를 잡을 수 있었다며 연신 고맙다고 말한다. 그 모습을 보니 기름값이 비싸다며 깎아달라고 했던 어제의 나의 모습이 민망해졌다.
우리와 동행한 엘렌은 6남매를 두고 있는 올해 34세의 엄마다. 그녀의 유일한 소원은 아홉살짜리 딸 아덴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라고. 단순히 돈 때문이라면 어떻게든 후원자를 연결해주고 싶었지만, 문제는 모라와나 마을에 학교가 없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학교가 있는 마을까지 이사를 해야 하고, 그곳에서 먹고 살 방법을 또다시 찾아야 하기 때문에 이사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이다.
너무 힘들어 구멍에 어깨를 넣은 채로 숨을 헐떡거리며 게를 잡는 엘렌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내가 이때만큼은 너무 싫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내가 너무 미안했다. 이들이라고 모기가 물면 안 간지러울까. 하지만 잠시라도 멈칫하면 게가 도망가기 때문에 이들은 그대로 모기에게 피를 빨리면서도 게를 잡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괴로움보다는 한 마리라도 더 잡아야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행복한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어느 나라나 모두 똑같은가 보다.
온몸이 진흙 범벅이 되고 상처투성이가 된 채 게를 가득 채운 망을 건네며 웃던 그 모습은 아마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현장에 나가면 '짠돌이'피디로 유명한 나지만 이날 나는 지갑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이 잡은 게를 모두 사서 그들과 해변에서 파티를 열었다. 모닥불에 게를 통째로 구워 한국에서 가져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그 맛은 기대 이상이었다.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별의별 삶을 다 봤고,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봤지만, 이번 가이아나에서 만난 모라와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진흙 속에 온몸을 굴리면서 단돈 500원을 벌기 위해(물론 그들에게는 큰 돈이지만) 모기와 싸우고 게와 싸우는 그들의 모습은 극한의 운명에 맞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존경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실 가슴은 먹먹하고 답답했지만 그들로 인해 다시 한 번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절대 일반 여행에서는 만나지 못했을 모라와나 사람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 미칠 것 같아도 다큐멘터리 피디라는 직업을 걷어차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모라와나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다큐멘터리 피디라는 직업에 다시한번 감사하게 생각하는 순간이다.
Travel Info '가이아나(guyana)' 어떤 나라인가?
서쪽으로 베네수엘라, 동쪽으로 수리남, 남쪽으로 브라질, 북쪽으로는 대서양과 면하고 있는 남미 대륙의 최북단에 위치한 국가다. 다른 남미 지역과 달리 영국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유일하게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인종, 문화, 종교도 훨씬 다양하다. 국내에서는 1978년 천여명의 신도가 집단 자살을 해 전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존스타운 사건'과 여성그룹 '핑클'의 우표가 발행된 곳으로 유명하다.
☞'비밀의 성전' 좁고 긴 계곡을 지나 '거대 조각'과 마주하다
☞당신이 꿈꾸는 지상 최고의 트레킹, 특유의 원시림과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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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함정민(EBS<세계테마기행>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