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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4 : 21 무엇을 원하느냐?
고전 4 : 21 무엇을 원하느냐? -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
이것들은 모두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바울은 14절에서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과 훈계하는 것이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 바 있다.
본 절에서도 매와 사랑을 대치시키지 않는다.
만약 바울이 매를 가지고 나아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바울은 아픈 채찍으로 훈계하든지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격려하든지 간에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사설(邪說)과 교만으로부터 해방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문제는 바울이 매를 택하느냐, 사랑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매'를 가리키는 '라브도스'(*)는 공관복음서에서 전도자들이 지니는 지팡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 마 10: 10 -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 막 6: 8 -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때로는 지배자의 상징으로서 홀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 히 11: 21 -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그 외에 '목자의 지팡이' 또는 '스승의 매'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본 절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훈계하는(14절)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Lenski).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 신앙을 가지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그들에게 나아갈 것이며 교만한 자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말한다.
사람은 말로는 가장 고상한 이상을 논할 수 있고 가장 고결한 윤리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말뿐이라면 공허하다.
말과 실제는 다르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전력의 힘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듯이, 말은 이론이요 힘은 실제이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말씀은 곧 능력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능력의 나라이다.
거기에는 생명의 능력이 약동한다. 거기에는 이론만 있지 않고 또한 삶이 있다. 거기에는 의로운 인격과 삶, 거룩한 헌신과 봉사가 있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버지와 같이 그들에게 감히 “나를 본받으라.”라고 권면한다.
참된 구원은 아름다운 말에 있지 않고 변화된 인격과 삶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심으로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도 바울을 본받고 또 남에게 본이 되기를 기도하고 힘쓰자.
2]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교회 안에는 육에 속한 사람이 있고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 이 시대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와 같이 사도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신약 성경의 대부분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일을 의미한다.
교회 안에는 육에 속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고 심지어는 육체의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교회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항상 먼저 복음이 전해지고 있어야 한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곳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
복음이 무엇인가? 이 시대는 자기 나름대로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누구입니까? 구약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구약 성경에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 복음이라는 말씀이다. 구약 성경은 그림자로서 기록이 되어 있다. 문자는 실체가 아니고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고린도 교회에 전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 육에 속한 사람들이 생겨나 그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따라가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일을 했다. 그런데 듣는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보았고 그 사람의 전하는 복음을 사람의 지혜로 이해를 하려고 했다. 이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직 예수다. 그 외에 어떤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복음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음으로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어야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이성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일들이 교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났고 그것을 사도 바울이 4장에서 말하고 있다. 내가 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를 한시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는 이유는 영의 생명을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함으로 우리가 주님이 오시는 날에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복음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부요하게 되어 그것으로 교회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 사람이 복음을 듣고도 그 복음에 참예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이성을 다 버리기 바란다. 복음을 보고 들을 때는 여러분의 이성이 개입하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은 단단한 식물이라고 말한다. 마치 단단한 식물을 먹는 것과 같이 아무 맛도 없고 먹기도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어 보아서 알겠지만 부드럽고 달콤하면 먹기가 좋다. 그러나 단단하여 씹히지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을 보면 알겠지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때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성경을 상고를 하면서 확인을 했던 경우도 있고 때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어서 그만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먹어야 한다.
우리는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한다. 복음을 듣고 믿고 산다는 것이 어쩌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주 작은 것 하나가 나를 부요하게 만들어서 교회 안에서 왕 노릇하는 자로 만들고 있고 그것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는 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게 이 시대도 역사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육에 속한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다. 복음을 다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따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육체를 보고 ‘나는 사도 바울이다. 아볼로다. 베드로다.’하고 그가 전하는 복음이 더 듣기에 좋고, 그가 복음을 전함으로 해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한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무엇이고 아볼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시대 복음을 전하는 저 역시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 성도님들은 잘 알아야 한다. 오직 복음을 전하는 자를 통해서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보지마시기 바란다. 설령 그가 복음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가 여러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
저 역시 완전하지 않습니다. 늘 제 한계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인간의 욕심이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아무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사람들이 지식적으로 알고 있으면 교만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상에서 더 나아가지 맙시다. 그 자체가 교만해 지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물론 저보다 복음을 잘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에게서 다시 복음을 듣고 모든 성도님들과 함께하고 싶다. 약속합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다시 말씀을 드려도 역시 생명이다. 그 생명만 얻을 수 있다면 아니 이미 얻었다면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맙시다. 물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실 수 있다. 제가 그것을 막지는 않겠지만 성도는 생명에 관해서만 생각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가 변하고 이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나면 이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고 실제 이 시대 일만이 아니라 십만 이상이 되는 목사가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비는 많지 않다고 말한다.
디모데후서 1: 10절을 보면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누가 아비인가를 밝히고 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복음을 가르치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마음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고 말한다. 아비는 많지 않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 그것을 듣고 믿음으로 이런 역사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은 영의 생명이 거하시게 되었는데 그 배운 것에서 더 나가서 교만한 자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한다.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는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맡은 자는 충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한다. 또 그는 로마서에서 내가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나 내 육신으로는 원치 아니하는 악만 행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율법의 의를 배설물과 같이 다 버렸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를 죽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해서 이방에 성도들이 듣고 믿음으로 해서 생명을 얻게 했다.
이 시대 기독교인은 당시 헬라인보다 더 지식으로 부요하다. 솔직히 이 시대 대학을 안 나온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그들이 교회 안에서 복음을 조금 들으면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이 전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대는 그것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교회 안에는 헬라인보다 더 세상 지식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고 그런 그들이 성경을 보고 사도 바울이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서는 이 세상 초등학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사람이 되어서 자기를 나타내는데 열심을 내고 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 영생의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영생의 일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다. 그저 교회에 나와 있으면 생명을 얻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면서도 성경의 문자를 보고 생명을 얻었다고 말한다.
성경은 영의 일이다. 육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 여러분에게 이 썩지 않는 생명이 거하시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내가 복음을 조금 알고 있습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멸망의 선봉이라고 잠언은 말한다. 제가 잘 나서가 아니다. 복음의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해질 수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교만해지게 됩니다. 그 교만한 마음이 결국에는 멸망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설령 지식으로 조금 교만해졌다 해도 사도들이 있어서 그들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하면서 그가 복음을 전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그러니까 그들의 지식을 가지고 자랑하는 말을 듣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을 받았는가를 알아보겠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시편 27: 1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 능력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는 것이고 복음에 대해서 서로 대적을 하면 그들 안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아예 복음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그저 교회에 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하나님을 믿는 곳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 종교는 이미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같이 짐승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곳에서는 복음이 전파가 되지 않고 있고 복음이 전해지지가 않으면 생명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아비의 심정으로 고린도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다.
누가 교만한 자인가 하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 있는 사람들이 교만한 자다. 성도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성도가 되어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3] 겸손하여야 한다 : 박 조준 목사 4: 6-21
본문 말씀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요긴한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뿐만 아니라 아볼로, 고린도 교인 모두가 겸손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항상 놀라울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고 혹은 그들을 비난할 때 언제나 자기를 포함시키며 말했습니다. 참된 전도자는 거룩한 자리에서 죄인들을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죄인에게, 같은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람들을 도와주고 구원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들을 책망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호소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비판의 태도가 아니라 동정적인 입장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서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 바울이 주의하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바울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자기의 교훈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교만을 정죄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충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질문합니다. 7절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 짧은 말씀 속에서 은총의 교리 전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한 때 어거스틴은 인간의 선행을 중심으로 생각했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 의지의 자유를 기치로 하고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드디어 하나님의 은총이 승리하였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고, 또 한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도저히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의 근본적인 잘못은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흔히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은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죄라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교만은 다른 모든 정신적인 것이나 도덕적인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결국 죄란 자기 본위에서 생기게 되는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자기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곧 교만의 죄입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5절에 보면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29장 23절에는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시편 101편 5절에 보면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교만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가령, 영적 교만이 있습니다. 모든 죄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영적인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보다도 자기 자신의 덕을 더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옛날 바리새인들이 그처럼 영적으로 교만했었습니다. 스스로 자만으로 가득했었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긴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적인 교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 하나님을 바로 섬긴다고 교만하게 여기다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성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2절에 보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좀 배워서 다른 사람보다 그 방면에 아는 것이 많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식을 얻는 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게 이처럼 지식을 주셨는데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까 하고 생각하며 그 방면으로 힘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재물을 누가 주셨습니까? 신명기 8장 18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재물 얻을 능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재물이 많다고 해서 교만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자기 스스로 얻은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역대하에 보면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물 때문에 교만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교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옛날 파사 나라 재상 하만이 교만해서 유대 사람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인사를 잘 안 한다고 그 사람과 그의 가족, 나아가서 온 유대인을 학살하려는 음모를 세웠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해 놓은 기둥에 자기가 매달려 죽었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교만해서 자기 궁전 높은 꼭대기에 올라 자기 궁중을 내려다보며 “내 능력과 지혜로 이 모든 성을 건설한 것이 아니냐?”하고 호언 장담했습니다. 그 말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느부갓네살 왕이 미쳤습니다. 들로 나가서 소처럼 풀을 먹고 그 머리털이 독수리 머리털처럼 되어 지내다 갔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벨사살 왕이 교만해서 천여 명의 고관 대작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쓰던 기명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메데와 파사의 연합군이 쳐들어와 벨사살 왕은 죽고 온 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교만하던 헤롯이 충에게 먹혀 죽은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독교 사상은 노예 사상이라고 비웃던 니체라는 철학자는 미쳐서 죽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히틀러가 이 니체의 초인간의 사상을 정치에 인용해서 독일 민족은 초인간적 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왜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사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본입니다. 교만하므로 많은 다른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반드시 망합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사람들도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교만한 사람도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겸손해야만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성경에는 겸손에 대한 권면이 많습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에 보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고, 잠언 16장 19절에 보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미가서 6장 8절에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산상보훈에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는 것이었고, 마태복음 11장 28~29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1절에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로마서 12장에서 제일 먼저 주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겸손한 생각을 품으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도 첫 부분은 교리편이고 다음 부분이 윤리편인데, 거기서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제일 먼저 겸손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칩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삼덕을 말합니다. 지, 인, 용(지혜, 어진 것, 용기)입니다. 겸손이란 말은 없습니다. 서양에서 특히 헬라의 윤리 사상을 보게 되면 이 세 가지에 다 하나를 더 가합니다. 그것이 절개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사덕을 말합니다. 그러나 겸손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제일 먼저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가르친 것만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친히 겸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친히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겸손의 도, 종의 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성육신의 지상 생활 전체가 겸손에 대한 산 교훈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겸손을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 물이 고입니다. 겸손한 곳에 겸손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모입니다. 낮은 데 이슬이 많이 내립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산꼭대기에 이슬이 내리지 못합니다. 겸손한 마음에 은혜의 이슬이 내립니다. 병은 비어 있어야 기름을 넣을 수가 있습니다. 겸손하게 빈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 넣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7장 15절에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겸손한 자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같이 해서 그 마음을 소성케 하십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위대한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도 제일 위대한 인물이 누굴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 모세일 것입니다. 모세는 아주 겸손하다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자기는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모든 성도 가운데 지극히 작은 사도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반면에 교만한 자의 기도는 물리치십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성전에 들어가서 드리는 교만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세리가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한 겸손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한 과학자가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이작 뉴우톤의 유명한 이야기를 잘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우주에 대한 진리는 저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가지고 놀고 있는 어린 애들이 바다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더 적을 것입니다.” 위대한 과학자는 사실 겸손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요, 어머니요, 기초다.” 옳은 말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 생활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어떤 나이 많은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지식이 너무 적어서 성경을 그저 그대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을 다니고 신학교에 가서 철학을 배우고, 비교 종교학을 배우고, 성경 비판학을 배우게 될 때 지식이 너무 많아져서 성경을 그대로 못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와서는 내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아서 이제는 그저 성경을 그대로 믿습니다.”
많이 알수록 겸손해집니다. 어떤 여자는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청소도 하기 싫어하고 그릇 닦는 것도 싫어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취직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학 출신으로 막일을 할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해서 그럽니다.
미국에 이민 가서 사시는 분들을 보면, 여기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나오고 박사 공부하던 사람도 구멍가게하고, 세탁소하고, 공장에 다니고, 생선가게하고 구두수선하고 다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이런 정신으로 산다면 미국까지 이민 가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대만의 경우를 보면 우리 나라 경상도만큼의 조그만 섬입니다. 인구는 우리 나라의 절반이나 되는 2천여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어디서든 부지런히 일합니다. 직장은 두 개씩 가지고 식구마다 일합니다. 우리 나라같이 중공업, 대기업은 없지만 중소기업이 발전해서 누구나 일할 수 있고 기회가 있어 부지런히 일합니다. 국민 소득이 우리의 3배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기업인들이 대만에 가서 배워 오고 있습니다.
전에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한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병원을 처음으로 지을 때 손수 일을 하면서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는 철학 박사요, 문학 박사요, 의학 박사요, 바하 음악의 연주자로 세계적인 권위자였습니다. 이런 분이 손수 일을 했습니다. 그의 옆에는 흑인 청년 하나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처 박사가, “청년, 그저 그렇게 서 있을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나와 같이 일을 하는 것이 어때요?”하고 말했더니 그 흑인 청년 하는 말이 “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인데 그런 일은 안 합니다. 그런 일은 공부 안한 사람이나 하는 거죠”라고 했습니다.
그때 슈바이처 박사가 “나도 학생 시절에는 청년처럼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공부를 많이 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 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공부는 할 수 있을 때까지 하십시오. 공부를 많이 할수록 겸손해집니다. 어떤 젊은 학생은 보자기에 떡을 싸서 심부름을 좀 하라고 하면 창피하게 어떻게 들고 다니냐고 심부름을 거절한답니다. 보자기 들고 심부름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심부름을 안 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겸손해집니다. 열매가 없는 가라지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많은 벼 이삭은 고개를 숙입니다. 고개가 숙여질만큼 공부를 더해야 합니다.
저 유명한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면, 한번은 단테가 연옥엘 가서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구석에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가 등에다 무거운 돌을 지고 허리를 꾸부리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허리를 꾸부리고 서 있습니까?” 그때 안내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저들은 너무 교만해서 한 번도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낙원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 되기 때문에 지금 그 연습을 하느라고 저렇게 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머리와 허리 굽히는 것을 배웠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사실 너무 교만해서 예수 못 믿는 분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아, 교회에 가보니까 여자들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 어린 애들이 나오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곳에 가서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박사나 장관이나 회장이나 사장이나 나온다면 모르지만요”라고 말합니다. 성지에 가면 예수님이 나셨다는 곳을 기념한 예배당이 있습니다. 큰 예배당인데 문은 아주 좁고 낮습니다.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것도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한 사람의 특색이 몇 가지 있어요. 소극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순복을 잘 합니다. 어디를 가나 봉사를 잘 합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마음이 늘 평안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내 교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 교만합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합니다. “사람이 제 잘난 맛에 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교만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면해서 나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전에 욥이 의인이었지만 큰 환난을 당하게 되고, 그 어려움이 오래될 때 불평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뵙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의 교만을 회개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내 눈으로 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예배하다가 높고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환상을 직면하게 될 때 제일 먼저 뭐라고 말했어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죄인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음이라”고 죄를 회개했습니다.
바울이 회개하기 이전에 다메섹으로 내려갈 때 어땠어요? 아주 교만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앞에 가서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 보게 될 때 주님께 꿇어 엎드렸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그 다음부터는 겸손해졌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교만은 만죄의 근본이요, 죄의 어머니입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근본이요, 어머니입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지난 날 우리의 교만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받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4 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교회는 복음 사역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과 기독교 복음의 청지기들로 인식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복음 사역자들과 교회 직분자들의
드러나지 않는 점들에 대해 주의 재림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서로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만과 자랑은 우리에게 합당하지 않다.
넷째, 우리는 고난 중에 복음 사역을 하며 충성했던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주님 자신께서 가신 길이었고 또 그가 친히 교훈하신 바이다.
주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마 1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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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