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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한 자에게 주는 경고
약 5:1-6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약 5:1-6 / [부자에 대한 경고] 부자들이여, 잘 들으십시오. 지금은 여러분 앞에 닥쳐 올 무서운 재앙을 생각하며 슬피 통곡할 때입니다. 2) 여러분의 재물은 썩어 가고 그 화려한 옷가지들도 좀먹어 누더기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의 그 값진 금과 은도 녹이 슬었고 그 녹은 장차 여러분에게 불리한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여러분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훗날을 위해서 저장해 둔 것이 닥쳐올 심판날에 증서가 되는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여러분의 농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노임을 착취하였습니다. 그들의 아우성 소리를 들으십시오. 그 아우성 소리가 ㄱ) 만군의 주님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ㄱ. 70인역 사5:9) 5)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갖은 변덕을 다 부리고 쾌락과 만족을 누리며 마음을 욕심으로 살찌웠지만, 그것은 결국 도살장으로 가는 길을 마련할 뿐입니다. 6) 여러분은 자기 방어조차도 할 힘이 없는 선량한 사람들에게마저 피를 뒤집어 씌워 죽였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이 물질에 대해서 어떤 관념으로 살아야하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1)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즉, 속임수를 사용하여 졸부가 된 자들과 또 착취해서 부자가 된 자들이 반드시 들어야하고 꼭 기억해야 될 말씀입니다. 그래서 “들으라”라고 강조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불의하게 부자가 된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물질을 불의하게 벌었거나 잘못 사용하고 살았다면 회개해야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부자들에게 고통이 임하는 이유(2-6) 불의하게 사는 부자들에게 고통이 임하는 네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는 부를 축적했기 때문입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고, 금과 은은 녹슬었다는 말은 부자들이 재물과 옷과 금을 축적해 두었다는 뜻입니다. 부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대신 썩어 없어질 재물과 좀먹을 옷과 녹슬 보화를 의지하고 섬긴 것이 죄가 됩니다. 둘째는 그들이 일꾼들의 임금을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사람들에게 임금은 마땅히 받아야 할 품삯이고 부자들에게 빼앗긴 임금입니다. 부자가 부를 축적한 방법인데, 추수꾼들은 부자들의 강탈과 착취로 인해 억울한 부르짖음을 여호와께 분명하게 알려졌고, 반드시 이 일에 보응하실 것입니다. 셋째는 부자들이 사치하고 방종했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의 사치는 재물을 축적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땅 위의 삶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에 재물을 착취하여 축적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과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넷째는 부자들이 점점 더 깊은 타락에 빠져든 일의 마지막 단계로 그들이 의인을 정죄하고 살인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의인은 도덕적으로도 올곧은 이를 가리킵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이러한 억압에 대한 의인의 반응은 저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금을 착취당한 추수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신들을 착취하는 부자들에게 대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적용: 부요함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주신 것에 감사로 바르게 베풀고 나누며 물질의 청지기로 사는 성도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지금의 시대는 감사를 모르는 사회인 것 같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회 같습니다. 하나님은 물론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압니까. 스승의 은혜를 압니까. 요즈음 배은망덕이란 말이 실감납니다. 정말 단단히 병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병든 사회입니다. 불구사회입니다. 장애사회입니다. 몸의 장애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신적 감사를 모르는 장애는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많이 실망하실 것입니다. 우리 부자가 됩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늘 감사합시다. 감사는 우리의 정성입니다. 은혜에 대한 우리의 표시입니다.
< 설 교 >
가진 자에게 임할 재난
약 5:1-6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즈음 야고보서를 연속적으로 다시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알면서도 행치 못한 선행은 죄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서 선을 실천한 한 주간이었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선을 행할 여력을 갖추고도 선을 행치 않은 가진 자에게 임할 재난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가지 재난들을 만납니다. 천재지변이든 인재지변이든,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듯싶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도 모두가 피해갈 수 없지만 그 처벌은 반드시 선별적일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선을 행한 사람은 선을 행한 대로, 악을 행한 사람은 악을 행한 대로 그 경중을 따져서 심판할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선악 간에 그 행한 대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가진 자에게 임할 재난”을 상세히 살펴봅시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개역)
무엇보다 먼저 본문이 일으킬 오해의 소지를 제거합시다. 성경은 부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 자체를 결코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부자라고 무조건 일렬로 세워 수건으로 눈을 가린 후에 무차별 난사를 하지 않습니다. 공산당이 브르조아 유산계급을 처리하듯이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 모두를 향한 경고입니다. 가졌던 갖지 못했던 성도들도 귀담아 들을 경고입니다. 세상 것들에 유혹을 받는 성도 모두를 향한 경고입니다. 더 많은 돈을 모으려고 기를 쓰는 성도를 향한 경고입니다. 사는 목적을 부의 축척에 두는 가진 모든 성도를 향한 경고입니다.
물론 많은 재산을 가진 이들을 시샘하는 갖지 못한 성도들도 들어야 하는 경고이지만 근본적으로 오늘 본문은 선물로 주신 부를 오용하는 이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지금 가진 그들의 재물이 영원할 줄로 착각하는 이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다른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들어 주는데 사용하기는커녕 그들로부터 격리되어 사는데 사용하는, 가진 자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오늘 본문에서 울고 통곡하는 것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고난으로 인한 통곡입니다. 심판의 재난들이 그들 위에 이미 밀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임할 재난들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마지막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재난의 날, 재앙의 시간이 덮쳐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저기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난을 불러들이는 가진 자들의 첫 번째 1. 죄는 가진 것을 바르게 사용하는 대신에 쌓아두려고 하는 죄입니다. 허용한 도를 훨씬 초월해서 재산을 쌓으려는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끝없는 욕심으로 재물을 모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모아둔 재산은 쓰지 않으면 반드시 썩고 좀먹고 녹슬어 버린다는 분명한 진리마저 보지 못합니다.
2천 년 전 야고보 시대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무엇보다 먼저 식량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먹고 사는데 꼭 필요한 분량을 훨씬 넘어 무조건 구매해서 쌓아둡니다. 쌀이고, 보리고, 밀이라도 좋습니다. 감람유나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용보다 지나도록 매점매석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는 것도 투자의 대상입니다. 비싼 옷은 아직도 호사가들의 구매욕을 부추깁니다. 옛날에는 옷 그자체가 화폐처럼 통용된 듯합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어 다른 형제에게는 한 벌 씩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다섯 벌을 선물로 줍니다.
바울 역시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은과 금과 함께 의복도 또한 축척의 대상이었습니다. 은과 금은 당시의 유가증권의 통칭으로 삼았습니다. 요즈음은 화폐만 아니라 수표, 증권, Plastic Money로 통하는 현금카드, 그림이나 도자기를 비롯한 예술작품 등 퍽 다양한 것이 축척의 대상이 됩니다. 요즈음 어떤 대통령의 집에서 실어내는 것들을 보면 압니다.
야고보의 재난 선포를 들어 보십시오. 우선 너희 모든 식물은 썩었다고 선포합니다. 쌓아 놓은 식료품이 변질되고 말았다고 선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갖춰 놓은 의복 역시 입지 못한 채로 좀 먹어 버렸다는 이야기 입니다. 장마철이 지나서 꺼내 보니 여기저기 좀먹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의 상징이요 자랑으로 여기던 귀한 의복이 걸레짝으로 밖에 쓸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은과 금마저 폭삭 녹슬어 삭아버렸다는 선언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정부가 바뀌니까 가졌던 현금이나 통장들도 종잇조각처럼 변하고, 수표며 증권 역시 헌종이 무게 이상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폭삭 망했다는 선고입니다.
더 많이 모으려고만 했지 모은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모으기 바빠서, 모우는 재미에 빠져서, 움켜지면 손가락 하나도 펴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이 살아온 결과가 다 썩고 좀먹고 녹슬었다는 것입니다. 온통 세상 것을 축척하는데 정신이 빠져 살았는데 그 모든 것이 무가치해져 버렸습니다.
단순히 무가치 한 것만 아니라 은과 금에 쓴 녹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부를 오용한 산 증거가 되어 소리치며 우리 살을 먹는 불같이 되리라는 선고입니다. 식량은 쌓아두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용하도록 주신 것이지 쌓아두도록 주신 것은 아닙니다. 먹는 것이든, 입는 것이든, 은이든 금이든 쌓아두는 것은 마지막 심판 날 받을 재앙을 쌓는 것과 같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도록 인생의 삶에 적절히 사용되도록 통용시켜야 할 돈을 녹슬도록 축척하는 것은 불과 같이 제 살을 태우게 될 재료를 쌓는 일에 불과 합니다. 삶 전부를 걸고 축척해온 그 재산이 여러분을 고문하는 땔감 역할을 하리라는 선고입니다.
그렇다고 본문은 부자를 향해 무차별 나사를 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부를 오용한 부자들을 향해서 그들이 받을 재앙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축척의 대상으로, 투기의 대상으로만 여긴 부자들이 받을 재난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냉장고에 하루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십시오. 썩어 곰팡이가 피도록 먹는 것을 쌓아 두는 것은 죄악입니다. 나누어 먹는 대신에 썩어 내버리는 음식물들, 채소와 과일은 여러분을 한 날 고발할 것입니다. 심지어 냉장 보관한 식료품이 썩을 정도로 욕심을 내지 마십시오. 뭐든지 넣어두겠다고 냉장고 용량을 늘이려고만 마시고, 누구와 나누어 먹을 것인지 보살필 이웃을 찾아보십시오.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누어 입는 대신에 유행이 지나도록 걸어두고, 좀 먹도록 방치하는 것도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는 죄입니다. 옷장에 철 따라 갈아입을 옷 있으면 만족하십시오. 유행 지나도록 입지 않고 옷장에 넣어두는 것은 재앙을 쌓고 있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지난겨울에, 이번 봄에 입지 않은 옷은 여러분에게 불필요한 것입니다. 여름 들어 아직도 입지 않은 옷이라면 선교지에 보내십시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십시오. 여분으로 있는 것이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말세에 쌓아둔 재물은 심판 날 받을 재앙을 쌓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든지 여분의 것은 선을 행할 기회입니다. 선을 행할 기회를 주셨는데 행치 않는 것은 죄악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폭력으로 빼앗는 강도질만 나쁜 죄가 아닙니다.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베풀지 않는 것도 똑같은 죄입니다. 쌓아두어 썩게 하고 좀먹게 하고 녹슬게 하는 것은 심판 날 받을 형벌을 축척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바르게 사용되지 않는 재물은 재앙의 원천입니다.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모든 부자가 다 정죄되지는 않습니다만 재난을 불러오는 가진 자들의 또 다른 죄는 둘째로 2.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죄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4절에서 가진 자의 죄악을 또 지적합니다. 사용을 잘못하는 죄악뿐 아니라 불의하게 축적한 죄를 지적합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정당하게 지불되지 않는 품삯은 그날 침묵하지 않습니다. 욕심으로 가득한 부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수 있지만 그 고발은 만유의 심판자 귀에는 반드시 들립니다.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착취당한 노동자의 억울해서 우는 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기독교는 결코 하늘 저편의 기름진 식탁의 환상으로 인민을 마취시키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세만 부각시키므로 현세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인민의 아편”이 아닙니다. 성경만큼 현세의 고통, 빈부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다루는 책도 없습니다.
신약성경 중에는 야고보서만큼 열정을 가지고 이 문제에 집착하는 책도 드뭅니다. 구약 아모스 역시, 신약의 야고보만큼 가난한 자의 눈물과 한숨을 아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하고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상아 침대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켜며
양떼에서 어린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로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아모스 6:3~6)
성경은 결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임금 지불을 하지 않고, 정당한 세금지불을 기피하는 것이 부를 축척하는, 사업체를 키우는 지름길이라고 지껄이는 이들의 죄악에 침묵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무력한 자라고 부당한 착취를 해도 아무도 변호해 줄 이가 없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돌보시는 분은,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4절은 하나님을 “만군의 주”라고 부릅니다. “만군의 주”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칭호 중에서 가장 위엄 있는 칭호 중 하나입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억울한 이의 한을 읽으시며 눈물을 씻길 수 있는 능력자입니다.
비록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의 편이 없을지 몰라도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그들의 보수자로서, 도움자로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돈 버는 것도 좋고, 사업 확장도 좋지만 남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스스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죄악입니다.
재난을 불러오는 가진 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또 다른 세 번째 죄악은 3. 불의하게 재물을 사용하는 죄입니다. 축척해 두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나 쌓아두는 것만큼이나 사치와 방종에 소비하는 것도 죄악입니다. 가난에 찌든 노동자에게 지불할 돈을 지불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사치와 방종을 위해서 탕진하는 죄를 지적합니다.
좀 더 자세하게 살피면 3.1 사치와 방종에 사용하는 죄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부를 축척한 다음 사치와 죄악 된 쾌락을 위해 탕진하는 죄악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돈이 있기 때문에 신체적 안락을 위한 모든 것을 다 갖출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소모적인 것에 그들이 가진 것을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 부는 심판을 불러옵니다. 좀 더 평안하기 위해, 좀 더 즐기기 위해 동료인생의 고민을 모두 망각한 죄는 심판을 스스로 불러들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는 한 부자의 죄는 그가 행한 무슨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가 행하지 못한 선행 때문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고 이웃을 돌보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죄입니다.
야고보의 경고를 모두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잔칫날 살찐 짐승을 골라잡듯이 사치와 방탕으로 그 마음이 살찐 이들은 최후의 심판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짐승들이 그들의 종국을 모르고 열심히 먹으려드는 것처럼 사치와 방탕에 빠져 사는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쾌락의 최후는 슬픔이요, 사치의 종국은 죽음인 것을 모르고 사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파멸은 확실하고 그들의 멸망은 신속합니다.
더 나아가 3.2 부를 이용해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만드는 죄입니다. 가진 것을 사치와 방종에 사용할 뿐만 아니라 가진 자의 힘으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지적합니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부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부자들은 다른 이의 생명조차 개의치 않습니다. 탐욕은 탈취를 하게하고 방종에 빠진 삶은 결국 살인까지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2장에서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법정으로 끌고 가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지금 5장에서는 그들을 죽이는 죄까지 범한 것으로 고발되고 있습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스스로 옹호할 능력이 없는 이의 생명을 빼앗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매일 벌어야 하루하루를 일용직 노동자에게 그날그날 품삯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심각하지 않지만 가난한 자에게 제날 품삯을 주지 않는 것은 생명줄을 끊는 죄악입니다.
여기 본문에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라는 말이 단숨에 나온 것으로 보아 이 말은 부를 사용한 법적인 행패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법이 그들의 편에 있으니 가난한 자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방어능력도 없고 부자를 대항하지도 않는 가난한 자를 없애버리기로 결정합니다.
물론 야고보 선생은 구체적인 정황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요즈음 히트를 친 “7번방의 선물”이란 영화를 보아도 확인할 수 있고 언론에 자주 나오는 회장님 사모님의 청부살인도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야고보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었는지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야고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다만 부자가 무죄한 자의 생명을 끊는다는 사실입니다. “악한 자를 대항하지 않는” 가난한 자의 무고한 생명을 끊는 것으로 부자의 죄를 극대화시키고, 그것과는 대조적인 가난한 자의 모습을 서술하고 본문은 끝납니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느니라.” 하지만 그의 소리 없는 부르짖음은 하늘 보좌에 울려 퍼집니다. 이 모든 죄악은 최후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 6:10)
꼭 기억하십시오! 최후의 심판이 없는 것처럼 강포를 행하며 살던 모든 이들은 그날 심판아래 빠져들 것입니다. 비록 이 땅의 모든 부자들이 여기 나와서 듣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울산광역시의 부자들이 다 나와서 듣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부자 그리스도인들은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힘주어 경고합니다. 가진 자에게 임할 재난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가난하게 살면서 가진 자들에게 압박받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여분의 것들을 주셨을까요? 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풍족하게 주셨을까요? 성경의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쩨쩨하고 고리타분하게 살기를 원치를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읽어보면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즐기고 누리기를 바랍니다. 과도하게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흩어 구제하여도 부하게 되는 일이 있다고 가난한 이에게 베푸는 일을 잠언서는 장려합니다.
물질만능주의,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약 5:1-6
얼마 전 100억대의 재산을 가졌다고 알려진 한 자산가가 폭행사건을 일으켜 논란이 된 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식투자에 성공해서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벌었습니다. 이 때문에 방송에도 출연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군산의 한 가요주점에서 종업원을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하고, 이를 경찰에 신고한 시민까지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경찰서에 연행돼서도 과격한 행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경찰관을 발로 걷어차고, “10억이면 너희들 모두 옷 벗길 수 있다”, “1억도 없는 것들이 나이만 먹어서” 등의 폭언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폭행 그리고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검찰에 출석할 때, 수억대의 고급스포츠카를 타고 출두하여 논란이 됐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들을 짚어 보겠습니다. 우선 10억이면 자기를 연행한 경찰관 모두를 다 파면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경찰관에게 “1억도 없는 것들이 나이만 먹어서”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돈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검찰에 나올 때 수억대의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출두했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자기과시를 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의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돈을 최고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세태풍조를 물질만능주의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사회가 점점 이런 물질만능주의가 대세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많은 사람들이 돈이 곧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을 성공의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돈이 자부심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이 있는 사람들은 당당하고 교만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은 위축되고 비굴하기까지 합니다.
과연 이런 풍조가 옳은 것일까요?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풍조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준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오늘 본문 1-3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여기서 부한 자들은 누구를 말할까요? 돈 많은 부자들 모두를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욥처럼 부자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한 자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물질만능주의에 깊이 물들어있는 부자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비록 돈은 많지 않아도 이런 물질만능주의 풍조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까지를 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한 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경고입니다. 자기가 손에 쥐고 있는 그 돈 때문에 울고 통곡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자랑하는 그 돈이 아무짝에 쓸모없게 될 때가 올 것이고, 그 돈이 자기 인생을 망칠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이런 물질만능주의를 따르지 말아야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런 풍조에 휩쓸려 살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풍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한 TV 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습니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자기가 태어났던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아냈습니다. 거센 강물이 바다로 흘러내려오는데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몸짓이 힘차보였습니다. 강을 거슬러 오르다 폭포를 만났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튀어 오릅니다. 어떤 녀석은 중간쯤에서 물살에 밀려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튀어오릅니다. 그러는 중에 많은 연어들은 몸 여기저기가 찢기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소중한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연어처럼 물질만능주의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폭포 같은 거대한 장벽을 만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튀어 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 거대한 물질만능주의 물결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물질만능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안내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욕심을 버리라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문제의 부자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말세에”라는 상황입니다. 말세란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말세란 종말을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는 때를 말하거나, 역사적으로 한 나라나 공동체가 망하기 직전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상황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 부자는 계속 돈을 모으려고만 했다는 것입니다. 곧 죽을 상황 속에서도 계속 돈을 모으려고만 한 것입니다. 전쟁이 터져 곧 나라가 망할 상황 속에서도 계속 돈을 모으려고만 한 것입니다. 이제 곧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 나갈 상황 속에서도 계속 돈을 모으려고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사람은 말세에도 돈을 모으려고 했을까요? 분명합니다.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이 사람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려야 할 때도 움켜쥐게 되었고, 포기해야 할 때도 붙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 19장을 보면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계명을 잘 지켜왔는데 이제 무엇을 더하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마 19:21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재물이 많아서 근심하며 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청년의 중심에 감춰져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바로 욕심입니다. 이 부자청년은 돈도 많으면서 계명도 잘 지켜서 사람들에게 칭찬까지 듣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도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영생까지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말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돈을 포기하라 하자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욕심 때문에 무엇 하나 포기해 본 일이 없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국 욕심을 떨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사람은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돈도 많고 계명도 철저하게 지켜온 이런 사람이 예수님께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 욕심이 문제였습니다.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 19:27을 보면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베드로는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것 다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부자청년과 비교해 볼 때 능력면에서나 자질면에서 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적어도 욕심만큼은 떨쳐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욕심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과 하나님이 선택지에 올라있을 때 서슴없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버는 일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 중 우선순위를 정할 때 사명을 우선순위에 손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욕심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물질만능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 돈을 바르게 벌라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부자는 돈을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벌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돈 버는 다양한 방법들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상상할 수도 없던 방법들을 찾아내서 손쉽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들이 과연 올바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국정치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부정축재’(不正蓄財)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르지 않게 재물을 쌓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정권 인사들 가운데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있어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죄목이 바로 이 부정축재입니다.
지난 정권에도 어김없이 부정축재가 있었습니다.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권력의 비호를 받아 국정농단을 저지르고, 부정축재를 했습니다. 1심 재판에서 재판부는 징역 20년과 벌금 180억원, 추징금 72억9000여만 원을 선고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20년이나 형을 받았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부정축재를 했기에 이렇게 벌금과 추징금이 많을까요? 역시 이 사람도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인간상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까요? 돈을 바르게 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어도 다음 세 가지만큼은 지켜야 하겠습니다.
첫째, 법을 지켜야겠습니다. 돈을 벌 때 법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밀수를 한다든지, 짝퉁을 만든다든지, 생산지를 속인다든지 등등 법에서 금하는 일을 하면서 돈 버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신앙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피해야겠습니다. 돈을 벌 때 비록 법은 어기지 않았더라도 신앙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있다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향락이나 도박과 관련된 일로 돈을 번다든지, 투기와 같이 건강한 사회 질서를 해치는 일로 돈을 버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내가 돈을 버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억울하고 눈물 흘리고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삼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종업원이나 직원들을 착취하거나, 협력업체나 하청업체에 갑질이 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물질만능주의를 극복하려면 돈 벌 때도 잘 벌어야 합니다. 바르게 벌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잘 가려서 벌어야 합니다.
셋째, 돈을 잘 쓰라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이 말씀에서 사치하고 방종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사치하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사치스럽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소비를 지나치게 과하게 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방종하다는 말은 방탕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돈을 향락과 쾌락을 즐기는 일에 물 쓰는 쓰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이 말은 돈을 자신을 위해만 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살육의 날이란 종말론적으로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마음을 살찌게 하였다는 말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가축을 도살하기 위해 살찌우듯이 부자들이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도 죄에 대해 무감각해져 죄악과 쾌락에 빠져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부자들이 돈을 잘못 써서 심판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부자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돈을 잘못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나누지 못하고 베풀지 못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물 쓰듯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는 무척이나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워렌 버핏은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는 이분이 남다른 안목으로 투자해서 큰돈을 벌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남다른 기부로 사람들에게 나눔의 본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재산이 763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89조 원가량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돈이 많은 거부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분의 삶은 소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사는 집은 60년 전에 약 3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3억 5천만 원에 산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는 곳은 대도시 번화가나 부자들이 사는 특별한 지역이 아닙니다. 시골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중북부 네브라스카의 오마하라는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식생활도 참 소박합니다. 아침식사로 출근하며 2-3불짜리 햄버거를 주로 먹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기부하는 일에는 단연 최고입니다. 2006년 자신의 전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매년 1조 이상의 돈을 기부하고 있습니다. 작년 한해에만 기부한 돈이 3조 6천만원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누적 기부액이 30조가 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워렌 버펫은 돈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멋진 부자인 셈입니다.
최근 신조어 가운데 ‘욘족’(YAWNS)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난 2007년, 영국의 한 언론이 2000년대의 엘리트 트렌드로 처음 소개하면서 한 때 이슈가 됐던 말입니다. 이 '욘족(yawns)'은 ‘Young And Wealthy but Normal’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비싼 명품 구입에 돈을 쓰기 보다는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는 대신, 자신들의 부를 자선사업 등에 사용하는 점이 특징입니다.
이런 욘족들의 등장은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이런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오아시스와 같은 상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돈을 자신을 위해서는 필요한 소비만을 위해 쓰고, 나머지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돈이 많든 적든 돈을 자기만을 위해 쓰는 것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물질만능주의를 극복하는 또 하나의 비결입니다.
우리 시대가 점점 물질만능주의에 깊이 물들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점점 돈의 가치가 중요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돈의 위력이 점점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풍조 속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물질만능주의를 잘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욕심 특히 돈 욕심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돈을 바르게 벌고, 또 돈을 멋있게 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풍성하게 주신 것으로 우리 자신이 누리게 하시는 동시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딤전 6:18)가 되기를 권면합니다. 이런 선행은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자신만 오로지 생각하고 오늘 있다가도 내일 사라질 세상의 부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좋은 것을 넘치게 쌓아주시는 하나님을 닮아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펑펑 퍼주는 부요한 삶을 사십시오. 그렇게 하면 영원히 지속되는 보물을 쌓은 것이며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후 6:17~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부는 소중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입니다. 아직은 부자가 아니라고요? 예, 여러분의 기준을 따라 평가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부한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여러분은 넉넉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분만큼만 되면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누구를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처지는 달리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하면 우리에게도 여분의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헌옷을 모우기도 합니다. 지난겨울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모두 여분의 옷이고, 아깝다고 옷장에 넣어두어도 다시 입게 되기는 쉽질 않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분명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여분의 것들을 주셨습니다. 주신 모든 좋은 것을 여러분 스스로도 누리시고 여분의 것으로는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도 나누어 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어버리게 되면 온갖 문제를 일으킵니다. 시기, 불의, 압제, 착취, 살인 등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대신 돈을 사랑하므로 온갖 악의 근원이 됩니다. 결국 세상의 벗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합니다.
받은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바로 사용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아멘.
부자가 받을 심판
야고보는 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여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시험을 오히려 기쁘게 여기라고 말했었습니다(1:2). 시험 당한 것을 기쁘게 여긴다는 것은 그런 고통과 슬픔이 유익한 것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배후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곳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영원의 세계에서 일어나게 될 일은 마치 정반대로 되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입니다.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하나님나라의 법칙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고, 세상에서 괴롭고 어려운 일들이 하나님나라에서 귀한 것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법칙은 이처럼 세상의 법칙과 다른 것인데, 이 하나님나라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 법칙에 따라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사도는 교회가 세상의 법칙을 따르는 것을 책망했습니다. 교회에 금가락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고 들어오는 사람들, 즉 부자들을 존중하고 대우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천대했습니다(2:3). 교회는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되는 현장이 되어야 하는데, 교회 안에 세상의 법칙이 시행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었습니다.
부자는 세상의 법칙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부자가 존중받고, 누구나 부자를 우러러봅니다. 부자가 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야고보는 부자가 되겠다고 장사하러 가려는 계획을 세우던 사람들을 책망했는데, 그들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4:13).
이제 5장에 들어와서 그 부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경고와 심판이 선포됩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편지의 서두에서 시험 당한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한 것과 아주 대조적이지요? 세상의 법칙에 의하면, 시험 당한 사람들은 울고, 부자들은 기뻐해야 할 터인데, 하나님나라의 법칙에 따르면, 슬픔과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은 기뻐하고, 쾌락을 탐닉하던 부자들은 울고 통곡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법칙을 시행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악인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비난과 책망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가난하다고 해서 늘 두둔해주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 19:15). 재물 자체는 가치중립적입니다. 그것을 악하다 또는 선하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음도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재물의 많고 적음이 인간에게 영향을 끼쳐서 정의와 진리에 합당하지 않게 행동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는 것은 재물에 대한 욕망 때문입니다. 재물이 악한 것은 아니지만, 재물 때문에 인간이 악하게 됩니다. 서로 재물을 차지하려다 보니 싸움이 발생하고, 남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사람을 해치는 일도 일어납니다. 재물이 많아지면서 힘을 갖게 되고, 그 힘을 사용해서 재물을 모읍니다. 그래서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사회적인 문제도 생겨납니다.
야고보가 부자들을 책망하고 경고하는 이유를 봅시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슬었으니...’ 재물이 썩고 옷이 좀먹는다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쌓아두었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이 악한 거예요. 이 세상에는 재물이 남아서 넘쳐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재물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고 삽니다. 거지 나사로가 병들고 굶주린 모습으로 부자의 집 앞에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밤낮 잔치를 열고 삽니다. 나사로는 먹지 못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부자의 창고에는 너무 많은 재물이 썩어가고 있어요. 이보다 악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부자들에게 재앙이 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금과 은에 녹이 슬었습니다. 이것 역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금과 은은 녹이 슬지 않습니다. 그런데 금과 은에 녹이 슬었다는 것은 그것들이 마치 사용되지 않고 깊이 묻혀 있거나 창고에 쌓여 있는 상태라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영화에서 보물 찾는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영화에서처럼 수백 년 동안 동굴 속에 엄청난 보물이 주인도 없이 쌓여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수백 년 동안 그 보물들의 가치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냥 거기에 쌓여 있었을 뿐입니다. 금과 은은 가치 있게 사용될 때 빛이 납니다. 그런데 아무런 의미도 없이 쌓여 있기만 한다면, 그것은 녹이 슬어 빛이 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보물창고에 금과 은을 잔뜩 쌓아둔 부자들의 잘못이 그것입니다. 재물을 합당하고 가치 있게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썩혀두었다는 잘못입니다. 그것으로 많은 사람을 살리고 가치 있는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필요 이상으로 모아서 쓰지도 않고 오직 자기만족만을 위하여 쌓아둔 금과 은은 낭비이고 범죄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금과 은에 슨 녹이 그들에게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를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는 것이 큰 잘못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하는데 금과 은을 쌓아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금과 은을 쌓아두는 것은 종말을 대비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아하, 그러면 우리에게는 종말이 아직 멀었으니까 재물을 모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고 말합니다. 야고보가 살았던 당시가 말세라면 지금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말세를 살았다면 오늘 우리도 당연히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종말이 오지 않는 것입니까? 왜 종말이 오지도 않는데 말세라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야 아직 내일 일을 알 수 없으니까 언제 종말이 온다 안 온다 말할 수 없지만, 2쳔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말세라고 했으니, 그들은 속은 것입니까?
말세라는 말은 마지막 때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에서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으로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땅에서 더 이상의 다른 단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다른 무슨 일을 행하실 것이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는 마지막 때가 되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남은 것은 오직 최후의 심판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세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재물을 모았다는 것은 영원한 세계에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부자들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그것입니다. 누리고 사용해야 할 재물이 많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나 기대가 약한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그들은 천국에 가는 것보다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쌓아두면 그것이 든든한 보호자처럼 생각이 됩니다. 어떠한 곤경에서도 자신을 구해줄 것처럼 생각되고, 심지어는 자신의 영혼까지도 보호해 줄 것처럼 생각됩니다. 재물이 전부가 되고 하나님과 천국의 소망이 없어집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그랬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9). 예수님은 이 사람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1).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에 관심이 없다는 것만큼 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말세를 살면서 종말을 대비해야 우리가 보물을 쌓을 곳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19-21)
부자들이 책망 받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부당하게 재물을 모은 것입니다. 물론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재물을 모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습니다만, 재물을 많이 모은 사람 중에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공직자 청문회만 하면 과거에 그 사람이 얼마나 부당하게 재물을 모았는가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일부러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공직자 임명을 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직자로 임명 받을 만큼 유력한 사람들 중에서 부당하게 재물 모은 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지요.
본문에서는 농경사회의 지주가 일꾼들에게 부당하게 대하고 착취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하늘의 하나님께 올라가는 소리가 둘입니다. 품꾼에게 주어야 하는데 주지 않고 착취한 돈이 소리를 지릅니다. 불의한 재물은 그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께 고발하는 주체와 증거가 됩니다. 특별히 이 돈이 하늘을 향하여 소리 지르는 것은 그 돈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품꾼이기 때문입니다. 품꾼이란 그날 일한 품삯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사람입니다. 그 돈은 그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품꾼에게 가지 않고 주인의 금고에 갇혀 있으니, 만일 돈에게 생명이 있다면 얼마나 절규하겠습니까? 물론 우리에게는 돈이 소리 지르는 것이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돈에게는 생명도 없고 목소리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께는 그 소리가 무엇보다도 또렷하게 들릴 것입니다.
또 하나의 소리는 돈을 받지 못한 품꾼의 우는 소리입니다. 일은 했는데 삯을 받지 못해서 억울해서 울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받지 못해서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우는 소리입니다. 유대 문헌에도 품삯을 주지 않는 고용주를 ‘피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피를 흘리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살인자라는 말이지요. 율법에서는 품삯을 주지 않는 것을 엄중하게 말합니다.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신 24:15). 품삯을 받지 못해 호소하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시겠다고 했습니다.
만일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재물이 아니라 죄를 모은 것이고, 재앙과 심판을 쌓아올린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의 말이 매우 신랄합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부당하게 모은 재물로 땅에서는 사치하고 방종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 도살하기 위해 짐승을 살찌운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돼지에게 사료를 주는 것은 돼지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돼지는 자기가 중요한 존재라서 그런 맛있는 사료를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노릇입니까? 부당하게 모은 재물로 이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게 사는 것은 도살 직전에 돼지가 사료를 많이 먹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일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것을 행복으로 알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지요.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일단 문맥상 그렇게 착취를 당한 품꾼일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품꾼이라는 이유로 의인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착취자를 악인으로 제시한다면 그에 대응하는 존재로서 착취당하는 사람이 의인으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착취당하는 품꾼이 왜 대항하지 않았을까요? 이것도 문자적으로 의미를 파악하기보다 상황적으로 파악해야 할 내용입니다. 품꾼이 지주에게 대항하는 것이 가능이나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항을 하려고 해도 대항이 성립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가슴에 한을 품고 집에 가서 하늘을 향하여 소리 지르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대항도 하지 않았으니까 품삯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불만이 없었다고 말하면 악한 일입니다.
최근에 음대 교수가 학생들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티켓을 강매한다거나 행사에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사건이 있었지요? 이럴 때 나오는 반론이 그런 식입니다. 강제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학생들이 아이들도 아니고 자기들이 싫으면 안 하는 것이지, 다들 찬성해서 참여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수가 하라는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학생이 어디 있겠어요? 아주 폐쇄적이고 도제 방식으로 교육하는 음대에서,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 교수 눈 밖에 나면 그대로 끝장인데, 누가 싫다고 안 할 수 있습니까?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강제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대항할 힘도 없고 대항할 수단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해서 재물을 모은 부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있습니까? 야고보가 이 말을 교회 밖의 악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즉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디아스포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이 크게 성공하고 재물도 많이 모으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부당하게 재물을 모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 선포하는 것을 주저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돈에게 사로잡히면, 돈을 주인으로 삼게 되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부하면서까지 돈을 움켜쥐려고 하게 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자가 된다는 것은 돈을 주인으로 삼고 돈의 노예가 되기 쉬운 위험이 있습니다.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은 세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모은 사람인데, 더 이상 돈 버는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서양에서는 그런 정신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돈은 가진 만큼 자기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쓰는 만큼 자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죄와 심판을 모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재물을 많이 모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얼마나 선하고 가치 있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과제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재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