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몸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몸인가? 마음인가? 이 둘 다 인가? 둘 다가 아닌가?
[2] 몸은 악의 근원인가?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이며, 선이란 무엇인가?
[3] 왜 우리는 몸에 대한 이중적 잣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인가? 오늘날의 구체적인 몸담론들과 관련하여(연예인 누드, 웰빙 기타) 말해보자.
3문제의 통합한 답입니다.
인류가 사지로 기어 다니며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직립보행으로 진화를 펼친 후 선사시대의 인간 '몸'은 본능의 최고 가치관이자 삶의 의미였다.
그러나 역사시대로 접어들어 인간이 문화를 만든 이래 지금까지 수 백년 동안 인간의 철학은 오직 '정신'만을 위해 존재하여 왔다. '몸'은 그저 욕망의 대상일 뿐이며 철학의 주제에도 끼지 못하는 천박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최고의 위치에 있던 '몸'은 철저하게 '정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절대강자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서양철학의 근원이라 불리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건너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절대적 코기토에 심취해 철학의 역사는 오직 정신만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그러나 정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토록 고귀하게만 여겨지고 마치 정신이 죽으면 육체는 아무 쓸 데도 없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변하는 철학자들에게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역사상 가장 철저하게 억압받은 것은 다름아닌 우리 몸이다. 아마도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 백년동안 이미 정신은 지상 최고의 위치로 떠받들어 모셔졌기에 그렇게 쉬운 말로 이야기하기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저 높은 곳에 고이 모셔진 '정신'을 잠시 지상세계로 끌어내려 보자. 지상세계로 내려온 정신은 이제야 비로소 몸이라는 것을 통해 발현되고 이해되는 우리에게 조금은 가까운 존재로 받아들여 질 수 있을 것이다.
수 백년 동안 저 높은 하늘에서 둥둥 떠다니던 '정신'이라는 고귀한 분을 이해하려면 '정신'을 담는 그릇인 '몸'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맨 먼저 동양의 관점에서 바라본 몸의 의미에서 출발해 서양을 넘어, 좀더 미시적인 관점으로 영화, 의료기술, 미디어, 미술사 등으로 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좀더 깊이 있게 이 책의 내용을 통해 그동안 '정신'에 빼앗긴 '몸'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
먼저 인도 사상사 중 탄트라적 발상은 욕망과 몸을 긍정하여 남녀 간 성적결합도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라고 보았다. 인도사상사에서 몸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는데 세계와 몸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흐름과 이 정반대의 흐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두 가지 흐름은 서로 부정하며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서로 적극 인정하고 때로는 서로 벼랑으로 몰아가는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한다. 좀더 쉽게 말하면 몸 부정의 철학과 몸 긍정의 철학이 공존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측의 흐름은 정치, 종교 등의 내생환경과 맞물려 여성의 지위문제나 불교의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만들게 된다. 결론적으로 인도사상사에서 나타난 몸에 대한 인식은 정신과 조화롭고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하고 이를 통해 인도사상사의 핵심인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유가 미학에서 바라본 몸이라는 장으로 중국에서 만들어 조선 최고의 가치관으로 반도를 뒤흔든 유학의 시각에서 몸의 의미를 풀어 보았다. 물론 동양적 사유 구조방식은 몸과 마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일원론이 적용된다. 그러나 유가에서는 시대와 사상가에 따라 몸에 대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자학적 세계관이 흔들리던 조선 후기 지행합일을 주장한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화원들은 인간의 욕망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신윤복의 월하정인도에 나오는 여인네의 발모양을 유심히 살피면 그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본다면 먼저 자신의 욕망과 관련된 몸을 끊임없이 수행하여 욕망을 부정하고 수신(修身)이라는 절대 위상으로까지 확대시킨 욕망 절제의 미학과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궁극에 이르러 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욕망긍정의 안신(安身)미학이다.
욕망 부정의 수신 미학 관점의 대표적인 인물은 공자로 그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몸은 사사로운 욕망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수신 미학적 관점은 주자학이라 불리며 조선시대의 강고한 유교 흐름을 만들었다.
이후 명대 중기 이후 안신의 철학이라 불리며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와 맞물려 발생한 양명학(陽明學)에서는 기존의 주자학과는 사뭇 다른 '수신'이 아닌 '안신'과 '보신(保身)' 더 나아가 '애신(愛身)'의 미학을 강조하였다.
이는 곧 조선으로 흡수되어 형신론과 풍속화에서 몸에 대한 긍정적 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수신의 미학과 안신의 미학은 몸과 마음의 서양적 이분법 사고가 아닌 동양적 심신일원론의 관점에서 출발하였기에 그 둘의 차이는 서양에서의 몸에 대한 완전한 죽음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몸을 생각하게 하였다.
셋째로 비코와 몸의 정치의 비평적 계보라 하여 서양에서 몸이라는 존재를 비로소 철학의 공간으로 인식하게 한 비코의 몸의 해석학에 대하여 풀어 놓았다. 비코는 먼저 데카르트식의 '나는 생각한다?'라는 절대명제와 결별하며 몸의 정치, 즉 육체의 해석학을 이야기하였다. 이는 실천의 무한한 광장으로써 몸을 인식하고 몸과 함께, 몸을 통해 그리고 몸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서양철학의 몸 인식 변화의 출발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하여 몸의 현상학을 말하며 "나는 나의 몸이다(육체적)"라 이야기하며 철학의 출발인 '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접근하였고 '너'라 불리는 타자에 대한 인식도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즉, 몸의 정치라 말하며 '정신'이 아닌 인간의 '몸'을 통한 소통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코스모폴리스를 몸을 통하여 찾게 되었다.
넷째로 타자론적인 몸철학의 길이라 하여 비코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메를로퐁티의 몸철학에 대해 짚어 보았다. 메를로 퐁티는 한 마디로 "나는 전적으로 몸이며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 말하며 기존 철학의 절대적 지존인 '정신'을 저 멀리 낭떠러지로 밀어 버렸다.
이는 타자론적인 몸철학을 가능케 하는 생각의 전환으로 진정한 몸 철학은 정신 철학처럼 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신체성 혹은 연계성을 기초한 타인에게서 출발한다는 철학의 탈주를 말하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타자론적인 몸 철학은 철저하게 타인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이는 '나'라는 존재는 내 스스로 인식하는 '나'가 아닌 타인이 손으로 만지고, 타인이 눈으로 확인하는 상호 인지성을 바탕으로 정립된다.
이러한 타자론적 몸 철학은 나와 타인 간 상호신체성 즉 '접촉'과 '상호인식'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공동체적인 발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파편화 되어 버린 현실 세계의 나와 사이버 세계의 아바타적 나의 괴리감은 곧 현실 세계의 또 다른 누군가와의 접촉을 통해서 만이 진정한 '나'로 회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다섯째는 영화를 통해 본 신체와 인간 정체성의 문제를 짚어 보았는데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블레이드 러너>가 그 주제로 등장한다. 먼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현실의 '나'라는 존재를 상호 인지하는 핵심 코드로 '이름'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고 그 이름을 통해 '몸'과 '나'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의 몸에 대한 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음으로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의 '몸'에 대한 현실적 접근을 가능하게 하였다. 즉, 복제인간에서 만약 정신까지도 복제해 생산한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져준다. 절대정신을 복제하고 몸까지도 인간이 생산한다면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규정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해답은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복제 전투인간의 마지막 발언에 나온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광경들을 보았다. 오리온 셔틀의 불길 위로 공격해 들어가는 비행선들을 보았고, 타호이저 바다의 어두움을 밝힌 명멸하는 빛들도 보았지. 이제 그 모든 순간들이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 발언의 요지는 곧 내 몸을 통해 본 것들이 그리고 느낀 것들이 나의 사유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곧 인간의 몸에 대한 반성을 통해 '나'라는 존재는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도구에서 사이버네틱스까지를 말하며 몸과 기술의 관계와 현대 의료기술, 몸, 심신의 문제에 대하여 짚어 보았다. 인간의 몸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결과로 인간의 몸을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로 혹은 생물조직체로 치환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몸과 과학 및 의료기술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장이다.
영화 <터미네이터> 포스터. 사이보그는 과연 인간인가? 기계인가? 만약 인공심장으로 대체한 사람이라면 그는 사람인가? 기계인가? 좀더 심하게 비약해서 교통사고로 신체의 90%가 기계로 혹은 생물학적 대체물로 치환된다면 그는 사람인가? 기계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인간이 만들어낸 또 다른 몸이라 불리는 몸(복제인간+사이보그+신체 국부 대체물)도 몸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접근해야 만 본질적 인간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곱째로 구성주의 미디어 이론에서 본 몸과 기호의 관계에 대하여 짚어 보았다.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흔히 접하는 메스미디어에서 '몸'을 이해하고 각 감각기관의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하여 기호학이라고 하는 또 다른 상징의 관점에서 몸과 기호 사이의 역사를 설명하였다.
몸 밖으로 표현되는 기호는 곧 텍스트나 여타 매체를 통하여 기억이라는 또 다른 공간으로 저장되고 그것의 표현은 여전히 다른 기호로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이를 통해 현실과의 괴리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이버 세계의 '몸'과 '나'의 문제를 언어적 인지과정과 상호의사소통의 헤게모니 과정 속에서 풀어 낼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서양미술사를 통해 육체, 권력, 이미지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서양 미술사를 시기별로 구분하면서 각각의 시기에 나타난 육체의 표현방식과 그러한 작품이 갖는 당시대의 현실을 이해하고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보티체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지극히 남성주의 시각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탐스러운 여체를 표현함에 있어 남성의 눈을 자극하는 '가리워짐'의 남성중심적 시각이 묻어난다.
구체적으로 미술작품에서 나타나는 몸에 대한 표현은 곧 시각적 형상화 과정 속에서 은밀히 묻어나는 이데올로기적 혹은 이념적 기호의 내포를 가지므로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이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결론적으로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단순한 미술의 시기적 변화가 아니라, 몸의 역사를 부정하는 지배 권력의 표현물로서의 미술과 이러한 권력에 끊임없이 반기를 드는 개인적 욕구의 표현물로서의 미술의 대립이라고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나와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는 아니 바로 '나'인 몸에 대하여 다시 한번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수없이 예법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몸은 그저 욕망 덩어리에 불과하였다.
과거 남성지배주의적 관점과 자연지배적 발상 또한 현재의 '몸'을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정신'에 사로잡혀 현실의 문제를 머리 속으로만 해결하려 했기에 발생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몸'을 천시하지 말자! 저 높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정신'의 위치와 동일한 곳으로 우리의 '몸'을 승격시키자. 그러한 몸철학적인 발상만이 현실과 사이버세계를 혼동하는 세대들에게 '접속'이 아닌 '접촉'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3] 많은 배경자료들을 사용하여 글을 전개하셔서 글의 완성도는 매우 높으신것 같네요ㅡ 하지만, 다소 한 쪽 소주제만 치중하신 경향이 있으신게 아쉽습니다ㅡ 잘 읽었습니다ㅡ 수고하셨어요^^
[3] 많은 배경자료들을 사용하여 글을 전개하셔서 글의 완성도는 매우 높으신것 같네요ㅡ 하지만, 다소 한 쪽 소주제만 치중하신 경향이 있으신게 아쉽습니다ㅡ 잘 읽었습니다ㅡ 수고하셨어요^^
[3]굉장히 조사를 많이 하셨네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3] 많은 자료를 조사하신것 같네요...성의가 보이는 글이었습니다
[3] 동양철학부터 서양철학의 내용을 잘 인용하여서 표현하셨네요.. 수고하셨습니다~~
[2] 진화는 믿을 수밖에 없는 진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