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코끼리 외 2편
강보원
그는 걸었다. 그는 방금 국민은행을 지나쳤고, 국민은행을 지나 이바돔감자탕을 지나 지하로 통하는 술집을 지나 족발보쌈집을 지나 걸었다. 그는 걸었는데, 건물 2층 코인노래방을 지났고 스시정을 지나 베스킨라벤스를 지나 던킨도너츠를 지나 하나은행을 지났고 기업은행을 지나 걸었다. 그러니까 그는 꽤 번화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계속 걸었다. 소울치킨을 지나 커피빈을 지나 카페B를 지나 그 긴 코로 눈을 비비고 있는 파란 코끼리를 지나 주민 센터를 지나 무아국수……가 보이는 곳에서 그는 멈췄다.
긴 코로 눈을 비비고 있는 파란 코끼리라고?
그는 무아국수에서 등을 돌려 주민 센터를 지나 다시 코로 눈을 비비고 있는 파란 코끼리에게로 돌아왔다. 그 파란 코끼리는 분명 카페B와 주민 센터 사이에서 코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는 파란 코끼리가 코로 눈을 비비는 것을 지켜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 긴 코로 눈을 비비는 파란 코끼리가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걸었다. 긴 코로 눈을 비비고 있는 파란 코끼리를 지나 주민 센터를 지나 무아국수를 지나 무등산갈비를 지나 천가게를 지나……
바다로 가는 밤 보트
골동품이 갯벌 밑에 많이 묻혀 있다고 했다 아르바이트 지원자들이 내륙에서 출발해 바다로 가는 밤 보트를 타고 그릇이나 수저 따위가 묻혀 있는 바다로 가고 있었다
나는 가끔 잠에서 깨어 반딧불이가 웅성이는 물가의 나뭇가지를 보거나 배가 급류에 휩쓸려 밑으로 쑥 빠지는 것을 느끼며 오랜만에 신게 될 노랗고 미끌거리는 긴 장화를 생각했다 다리를 빨아들이는 갯벌과 검은 진흙이 묻은 맨살과 맛조개처럼 갯벌에 남겨진 노랗고 미끌거리는 긴 장화
그러나 도착한 곳은 여전히 내륙이었고 우리는 높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 새벽 청국장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노랗고 미끌거리는 긴 장화를 생각하며 이게 끝이에요? 물었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 우리 갈 때는 각자 가는데 얘기를 안 해 줬구나 나는 크게 상관없었지만 누군가 그건 조금 감동적이지 않네요 했고 나는 그렇죠 근데 그분들이 누구 감동시키려고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답하고 일어서는데
나는 어떻게 돌아가지 언덕 저편에서 막 뜨는 해가 언덕쪽으로 강하게 때리는 빛살에 잠겨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밤새 보트를 탄 일당도 못 받았는데 왠지 아직 끝나지 않았거나 이미 시작된 일이 있는 것 같아
나는 이게 끝이에요? 묻는데 문득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완벽한 개업 축하 시
그의 친구가 말했다
"나 이번에 개업을
하게 됐는데 축하 시 좀 써 줘."
그들은 벤치에 앉아
테니스공을 허공으로
던졌다가
다시 받으며
놀고 있었다
"응, 알았어."
그는 대답했다
그는 아마추어
시인이고
문예지에 발표한 시는
아직 없지만
시에 대해
많은 걸 알았고 또
많은 걸
모르기도 했다
그들은 테니스 공을
조금 더 던지고
받고
하며 놀다가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그는 생각했다 이 시를 쓰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추상적일 것 그래야
다음 사업 때도
이 시를 벽에 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것들
또 무엇보다 이 시에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는 모니터 앞에
앉아
개업 축하 시를
열심히 떠올렸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주일
열흘
다섯 달
예닐곱
해 정도가
지났다
그는 반으로 쪼개진
양파 같은
희고
매콤하고
사각사각거리는
개업 축하 시를 쓰고 싶었지만
개업 축하 시는
잘
써지지 않고
있었다
몇 번쯤 완벽한
개업 축하 시를 떠올린 것 같기도
했지만
옮겨 적기 전에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동안
친구의 사업은 성공해서 전국에
체인점이 생겼고
비싸 보이는 검은 차를
타고 다녔다
또 친구는
결혼도 했는데
그녀는 학창 시절에 만난 예쁜 아이였고
친구가 사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사업을 같이 도와주기도
했었다
그는 결혼식 때
친구를 만나기도 했는데
그들은 두 손을
꽉
잡고 악수를 나눴지만
개업 축하 시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친구는 점점 바빠졌고
그와 친구는
예전처럼 벤치에 앉아
테니스공을 던지고
받고
하며 노는 것을 여전히
좋아했지만
점점 그럴 시간이
없었다
대신 친구와
그는
가끔 멀리서 각자
테니스공을 던지고
받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제 사람 좋은
아저씨가 되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그는 아직 아마추어
시인이고
문예지에 발표한 시는
여전히 없지만
시에 대해
많은 걸 생각했고 또
많은 걸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그가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것들
때문에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릴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
바람이 부는 저녁
벤치에서
그는 허공에 던진
테니스공을 다시 받으며
생각한다 그는
지금
완벽한 개업 축하 시를
떠올렸다고
추상적인
기쁜
반쪽으로 쪼개진
흰
양파
같은
―강보원 시집, 『완벽한 개업 축하 시』 (민음사 / 2021)
강보원
201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완벽한 개업 축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