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이공행교청덕선정비(牧師李公行敎淸德善政碑)
위치 ; 애월읍 애월리 1587번지 애월리사무소 마당
유형 ; 碣(선정비)
시대 ; 조선
규격 ; 높이 74cm, 너비 36cm, 두께 17cm로 위로 갈수록 너비가 조금 넓어진다. 윗부분은 반원 모양이다.
비문 ; 전면 牧使李公行敎淸德善政碑 自濟州城內五里
후면, 측면에는 글씨가 없다. 自濟州城內五里라는 글씨는 필적과 새긴 깊이, 글씨 크기 등을 고려해 볼 때 선정비와는 관계없는 내용이다. 제주성 서문에서 출발한다고 하면 지금의 오라오거리 정도가 5리에 해당한다. 애월리사무소까지는 50리 거리이다. 이 글씨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미상이다. 이와 비슷한 예가 하나 있다. 판포리 정기원목사선정비에 距濟州城內十里 大正五年七月日頭毛里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다. 판포리까지의 거리는 100리 정도이다. 일제강점기에 4km를 1里로 하여 거리를 표시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해 보는 정도이다.
이행교(李行敎)는 조선 후기 제주목사겸방어사를 역임(1827~1830 재임)한 무신이다. 순조27년(1827) 4월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순조27년(1827) 8월 현명원(玄明圓)의 반역 사건으로 파직된 심영석(沈英錫)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동왕30년(1830) 3월에 떠났다.
1827년 광양에 있는 제주향교가 사면이 바람을 받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불편하였으므로 전임자인 심영석이 옮겨 세우는 것을 추진하였다. 관노 고상신(高相信)이 부지를 기증해 서문 밖 비룡지(飛龍池) 옆 현 위치인 용담1동으로 이전할 준비를 하던 중 파직되어 흐지부지될 뻔하였다. 이행교가 제주목사겸방어사로 부임한 그 해 겨울, 일을 서둘러서 무사히 현 위치로 이전할 수 있었다.
순조28년(1828) 대일관(大一觀)을 중수하였는데, 대일관은 심낙수(沈樂洙) 목사 때에 지은 것으로, 어제윤음(御製綸音)이 봉안된 곳이었다. 1829년에는 홍화각(弘化閣)을 중수하였다.
삼성사(三姓祠)의 모흥단(毛興壇)과 전사청(典祀廳), 귤림서원(橘林書院), 박심당(博審堂), 삼초서당(三草書堂)의 개입재(皆入齋)를 개건하였다. 또한 군기고(軍器庫), 수복문(受福門), 소민문(蘇民門), 철장방(鐵匠房), 역학당(譯學堂)의 외문(外門)을 개건하였고 남취과원(南鷲果園)을 구우면에 신설하였다.
1830년 제주판관 이의겸(李義謙)이 여색을 지나치게 탐하며 어리석다고 조정에 보고하여 파직하도록 하였으며, 도련촌 효자 신치득(愼致得)의 가문에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또한 재사(齋舍)를 중창하고 제복을 새롭게 마련하였다. 제주목사를 떠난 후 1831년 10월 전라도병마절도사에 부임하였으며, 순조32년 12월 1일에는 함경북도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작성 13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