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의 비극과 불문율의 부재 — 구한말의 망령을 경계하며
역사는 연대기의 기록이 아니라, 거대한 힘의 흐름이자 반복되는 비극의 경고라도 한다. 지정학적으로 해양 세력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대륙으로의 진출이다. 섬이라는 공간적 한계를 지닌 해양 세력이 팽창을 도모할 때, 대륙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한반도는 필연적으로 힘과 힘이 충돌하는 결전의 장소가 된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내세운 ‘가도입명(假道入明)’의 구호는 단순한 명분이 아닌 해양 세력의 태생적 숙명이었다. 이 본능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 제국주의로 변질되며 더욱 치밀해졌고, 정한론을 거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대전란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를 지배했던 왕과 세도 정치인들은 이 냉혹한 국제정치의 역학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2차례나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은 영국 외교관 헨리 워튼의 말처럼 ‘국익을 위해 냉철하게 정보를 수집하는 정직한 간첩’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그들은 성리학적 명분론과 관념에 갇혀 문명국이라는 자만에 빠진 채, 일본 내부에서 들끓던 상업적 발달과 무력의 팽창이라는 물적 토대를 보지 못했다. 한자나 줄줄 외우며 문장 자랑에 골몰했던 ‘헛똑똑이’들의 눈먼 외교는 결국 열강(미·영·러)과의 카르텔을 통해 한반도를 독점하려 했던 일본의 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비극의 끝이 바로 1905년 국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었다.
슬프게도 오늘날의 정치 현실을 바라보면 구한말의 망령이 다시금 짙게 어른거린다. 국가의 안위와 국방의 근간을 지탱하는 것은 성문법 몇 줄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제도적 자제’와 ‘안보의 불문율’이다. 육·해·공 3군의 독자적 기능과 입체적 작전 체계는 국가 생존을 위한 수십 년의 피와 땀이 축적된 결정체다. 이를 정치적 사정이나 근시안적인 셈법으로 손쉽게 통폐합하겠다는 식의 경솔함은, 국가 안보의 불문율을 알지 못하는 오늘날 위정자들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미국의 정치지리학자 니콜라스 스파이크만(Nicholas Spykman)이 제창한 ‘림랜드(Rimland) 이론’은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 깊숙한 거대 지대인 ‘하트랜드(Heartland)’를 부채꼴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서유럽, 중동, 남아시아, 그리고 동아시아 연안(한반도·중국 연안·일본)에 이르는 거대한 해안 띠 지대에 주목한다. 스파이크만은 “림랜드를 지배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운명을 통제한다”고 단언했는데, 이는 림랜드야말로 인구, 산업, 물적 자원이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륙으로의 진출과 바다로의 팽창이 동시에 가능한 양방향의 전략적 가치를 지닌 공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림랜드의 동아시아 축 한가운데 위치한 한반도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단층선(Fault Line)이자 최전선이다. 대륙 세력(중국·러시아)에게 한반도는 태평양이라는 해양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절대적 '출입구'이자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는 '방파제'이다. 반대로 해양 세력(미국·일본)에게 한반도는 대륙 세력의 거대한 팽창을 저지하는 '초소'이자, 필요시 대륙 심장부로 진입할 수 있는 강력한 '교두보'가 된다. 이처럼 한반도는 림랜드 지대 중에서도 해양과 대륙의 생존적 이익과 패권 야욕이 가장 첨예하게 교차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이기에, 더욱이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이기에, 스스로를 지킬 힘과 냉철한 안목을 갖추지 못할 때 언제든 강대국들의 격전장으로 전락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연 설명하였음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눈으로 오늘을 성찰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겉으로만 개혁을 외치며 국방과 외교의 근간을 흔드는 오류를 경계하고, 냉혹한 국제정치적 현실을 읽어내는 실용적 안목을 회복하는 것 —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구한말의 쓰라린 역사 앞에서 반드시 되새겨야 할 시대적 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