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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이 없는 제단
욜 1:13-20
13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14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15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16 먹을 것이 우리 눈 앞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17 씨가 흙덩이 아래에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18 가축이 울부짖고 소 떼가 소란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 떼도 피곤하도다
19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20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욜 3:13-21 / [주께서 ㄱ) 용사들에게 명령하시다] `이제 낫으로 베어라! 곡식이 익어서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와서 밟아라! 술틀에 포도가 가득 담겨 있다. 그릇들마다 흘러 넘친다. 그들의 죄악이 많기 때문이다.' (ㄱ. 예루살렘의 용사들이나 하늘의 천사들일 수 있다) 14) [여호와의 날] 심판의 골짜기로 사람들이 바글바글 밀려들었다.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15)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을 때에, 16) 여호와께서 시온산 위에서 우렁차게 외치시고 예루살렘에서 목청을 높이시자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에게는 피난처가 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요새가 되신다. 17) `그때에 가서야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요, 나의 거룩한 산 시온산 위에 내가 산다는 것을 너희가 마침내 알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영원히 나의 도성이 될 것이다. 이방 군대들이 그 도시를 더 이상 통행하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18) [이스라엘의 낙원시대] 그날이 오면 산마다 달콤한 포도즙을 뚝뚝 떨어뜨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를 것이다. 유다의 메마른 시내마다 물이 넘쳐 흐르고 여호와의 집에서 샘이 터져 나와 메마른 아카시아 골짜기에 물을 대어 줄 것이다.' 9) `유다 땅에 들어와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폭행 때문에 애굽은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량한 들판으로 변할 것이다. 20 그러나 유다는 언제까지나 번창하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번영할 것이다. 21) 내가 내 백성을 죽인 원수들에게 피값을 갚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백성을 억압한 자들의 죄악을 내가 결코 씻어 주지 않겠다. 내 집이 내 백성과 함께 시온에 있기 때문이다.'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회개 외에는 없음을 탄식하며 부르짖습니다.
너희는 울지어다(13-14) ‘여호와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제사장들과 제단에서 수종드는 자들이 먼저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금식일을 정하며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여호와의 성전에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말씀합니다. 나라 안과 밖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난리와 소문으로 혼란하고 고통하며 신음하는 소리가 들릴 때 교회 지도자들과 먼저 부름받은 성도들이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고 말합니다(시 50:15).
슬프다 그 날이여(15-18) ‘여호와의 날’이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극적으로 개입하시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 날’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승리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를 섬기는 남은 자들에 대한 보상과 축복입니다. ‘피곤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샴’은 죄의 값으로 벌을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여호와의 날이 심판이 아닌 구원의 날이 될 수 있도록 대속해 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19-20) 요엘 선지자는 불같이 풀과 들의 모든 나무가 초토화 되고 시냇물도 다 말라 들짐승들조차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어 헐떡이는 참혹함 속에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 앞에 피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각 나라마다 개인마다 일어나는 재앙과 시련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며 구원의 주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부르짖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려왔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신 이도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날’을 소망합시다.
적용: 부르짖어 기도한 적이 얼마나 있나요? 세상에 취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예배는 형식만 남아있고 회개에 합당한 삶의 태도는 퇴색되지 않았나요? 주님 오실 날은 가까이 왔는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이 땅은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문화 문명이 발전하고 과학이 발달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빈곤한 곳은 광야입니다. 예수는 이 광야에서 말씀으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광야는 황망한 곳이 아니라 말씀과 소망과 승리의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둔 마음을 하늘에 소망을 두게 하며 죄로 두터운 마음을 털어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영적으로 깨어나게 하는 곳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성숙되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곳입니다.
< 설 교 >
여호와께 부르짖으라
요엘 1:13 / 이상호 목사
우리 민족이 지나온 세월은 수많은 전쟁과 경제적 빈곤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악순환으로 잠시도 평안할 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대에는 희망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온 국민이 어떤 불의나 부정도 없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이 땅에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오직 이 땅에 화평을 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역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서로 맞대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온 백성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십니다. 우리의 설움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평강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희생으로 바꿔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바꿔 주실 것입니다.
선지자 요엘은 주저 820년대에 활동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유다 왕 요나스는 처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나, 대제사장이며 스승인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우상 숭배의 길에 빠져 버렸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대하 24:17-19)
요아스 통치 기간 중 유다는 항상 주변 나라들에게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아스의 말년에는 북방의 수리아로부터 침략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요아스 왕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사회악은 점점 더 크게 번져 갔습니다.
요엘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하여 우리의 현실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온 국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곳에 우리 믿는 자만 모일 것이 아니라 5000만 동포가 함께 모이도록 하여야 합니다. 5000만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성취하게 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에 성회를 선포하고 각 도성에서 사람을 모이게 하여 제사장이 모이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모여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하면 내 중심이 뜨거워져 너희를 어려운 가운데서 구하고 축복하리라”
우리는 지금 정치외교적, 군사적,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완전한 성장과 안정을 위한 과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의 현실을 바라봐야 합니다.
1. 인간의 희락이 메말라가는 때입니다.
요엘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성회를 선포해야 합니다. 외적으로 외세의 침략에 대한 위협이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경제적인 빈곤이 있습니다. 요엘이 활동하기 전에 메뚜기떼의 극심한 피해와 가뭄이 유다 땅 전역을 휩쓸어 버렸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우상 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새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역사를 이루어 주실는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강대국의 총부리 앞에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절망해 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요엘 1:6에 보니“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이처럼 엄청난 현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입니다. 사자와 암사자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짓밟고 간 흔적은 요엘 1:7에서 말한 것처럼 소생할 수조차 없는 비극입니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그러나 우리는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6·25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잿더미 속에서 이처럼 회복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벗겨진 가지는 절로 소생할 수 없습니다. 껍질이 벗겨져 말라 버린 가지처럼 비참한 전쟁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영광의 옷으로 갈아입혀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는 아직도 여전한 거짓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교회 속에서의 분열과 혼란을 야기시키는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입니다. 그들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이는 암사자의 성난 이빨처럼 모든 것을 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의 회복은 물질주의의 만능에 유혹돼 버린 거짓 선지자들을 추방시키는 일입니다. 진리와 정의를 내세우면서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기만과 권모술수를 일삼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방지하는 일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최후의 양심이 될 수 없을 만큼 변질되어버린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2. 인간의 심령을 상하게 하는 때입니다.
한 해가 시작되는 지금 우리는 모두 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해를 마칠 때쯤이면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일들은 우리를 불안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1) 사상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의 이념 대립이 문제가 아니라, 변질된 사상의 오류에 빠져 버린 몇몇 사람들의 과격한 행동으로 세계가 테러의 공포 속에 떨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보다도 변질된 사상에 자기 몸을 던져 버리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테러 사건보다도 어떤 주의에 세뇌된 사상의 오류 앞에서 얼마나 가슴 쓰라림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도 사상의 오류가 범람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어려운 시점에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와 간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2) 신앙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빛으로 오셔서 모든 어두움을 벗겨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쳤지만 어두움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진리의 빛이 바래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특히 복음의 변질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수많은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거짓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인한 구속의 복음을 외면해 버리고 허울 좋은 명목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휘말려들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실천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친히 십자가까지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언행이 일치되는 삶을 말합니다. 복음이 삶 속에서 실천되는 삶입니다. 가슴을 찢고 눈물을 흘리는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변질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3.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회개하면 살 길을 얻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비록 불만스럽다 하더라도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감사제를 먼저 드리고 살아갑시다. 하나님께 감사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의 조건을 주십니다. 지금의 우리의 상황은 희망적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이 증가된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희망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서로 가슴을 부딪치는 사랑이 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시다.
이 말이 신학적으로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마음과 마음을 열고 내 속에 있는 부정과 모순과 죄의 요소들을 들어내는 고통으로 가슴을 찢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그 지극하신 긍휼하심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회를 선포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회를 선포합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회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계획을 중단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향한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일에 동참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향한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일에 동참해야 할 때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금식하며 회개하기를 촉구합니다. 성회를 선포하여 온 민족이 함께 더불어 회개하기를 촉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외면하시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성회를 선포하고 모일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믿고 기도하심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도 이 일이 기도한다고 될지 안 될지 의심한다면 그 기도도 응답될 까닭이 없습니다. 기도는 오직 믿음으로 드립니다.
그래서 정신일도 하사불성입니다. 이 말뜻을 누군가 ‘정신이 일도만 틀어져도 무슨 일이 되겠는가’라고 해석했다는데 오역이 흥미롭습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볼록렌즈로 검은 점을 태우던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초점이 흐려지면 아무리 렌즈 비추어도 헛수고입니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쌍방향입니다. 송신과 수신은 주파수가 맞아야 하고, 기도와 응답은 믿음의 대상과 방향이 맞아야 일어나는 합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실 때 무엇이든지 구하라’ 하십니다. ‘내 말이 네 안에 있을 때 구하면 다 이루리라’ 하십니다.
문제는 비상시국입니다. 총체적 난국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상시에는 비장함이 필요합니다. 다급할 때는 당연히 부르짖습니다.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날을 정해 금식하라. 모두 성전에 모여 하나님께 부르짖어라.” 전심을 다해야 하고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에스더가 기도하며 목숨을 걸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을 살렸고, 기도하는 선지자 엘리사 한 사람 때문에 아람 군대가 침략을 주저했습니다.
하나님 약속하십니다. “내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내 얼굴을 찾으면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쳐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새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을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기도를 원하십니다. 진실한 기도입니다. 눈물의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 어떤 기도보다 회개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당한 분단의 슬픔 속에서 가슴을 찢는 통곡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와 이 민족 위에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 설교자료 *
기도하는 사람은
1.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과 대화하는 사람입니다.
2.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3.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4. 기도하는 사람은 근심이나 걱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5. 기도하는 사람은 사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6.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을 후원자로 둔 사람입니다.
7.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아는 사람입니다.
8.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에 참 평안을 얻는 사람입니다.
9. 기도하는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10.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해집니다.
11.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12.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일에서도 자기 뜻대로 하지 않습니다.
13.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주님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14.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탄식하는 피조 세계
욜 1:13-20, 계 8:6-13, 마 24:3-14 / 인명진 목사
지난 주일은 전 세계교회와 함께 성령강림 주일로 지켰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이므로 성령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하고, 성령은 교회를 늘 새롭게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대부분의 세계교회가 삼위일체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하나님 하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당연한 것으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세 분이면 세 분이고, 한 분이면 한 분이지 어떻게 세 분이 어떻게 한 하나님이 되느냐는 논쟁이 격렬했습니다.
사실 삼위일체는 교리이기에 앞서 삼위일체의 눈으로 보아야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많은 논쟁과 갈등 속에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304년에는 성령강림절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 주일로 정하고 8백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 온 교회절기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는 6월 첫째 주를 환경주일로 지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주일을 교회 절기로 지키는 세계교회는 오늘을 환경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전하고 운행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도 새롭게 하고, 만물을 새롭게 창조해 나간다는 것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은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언제나 성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합니다. 그 ‘뜻’을 헤아리면서 성자 예수님의 ‘길’을 걸으려고 결심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way of life)인 십자가와 부활의 방식, 곧 사랑과 연민과 긍휼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을 걷고 예수님의 ‘방식’을 따라서 산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자신의 의지와 열정으로는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쉬운 길이 아니라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편한 길이 아니라 고통스런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그 ‘길’을 계속 걸을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지요. 자신을 포기하는 길은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너무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자 예수의 길을 구하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영적 현존’인 성령께서 임하셔서 ‘힘’주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는 이 삼위일체 주일에 환경주일을 하나 더 붙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성령을 연결시켜서 환경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삶도 새롭게 하고, 만물을 새롭게 창조해 나간다는 것을 고백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전에는 인간만 아파하고 탄식하는 줄 알았습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줄 알았습니다. 인간만이 성령의 돌보심이 필요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인간도 자연도 함께 아파하고 탄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만물이 성령의 돌보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주일에 환경주일의 의미를 더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하면 인간이 어떻게 구원 받을 것인가? 인간 구원에 초점을 맞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탄식하고 있는 피조세계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님이 지으신 동물, 식물, 사람,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다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인간만이 아파하는 줄 알았습니다. 전에는 인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파괴 되어가는 피조세계를 바라보고 성서의 새로운 증언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모든 만물이 구원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환경주일을 맞이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의 죄악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던 이 땅을 오물로 덮어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야 할 저 높고 푸른 하늘을 잿빛의 구름으로 가득 채워 놓은 우리의 잘못을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노아시대에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음을 마음에 한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시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직전에, 당신이 지으신 세상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의 세계를 보시면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물로는 다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을 다시 심판하신다면 무엇으로 심판하실까요?
어떤 사람은 인간이 만든 핵무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몇 개를 동시에 공중 분해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가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과학자는 행성의 충돌이 모든 생명의 멸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공해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사막화가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지구가 병들어 가고 있고, 생태계가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한 생태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특별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세상은 그냥 놔두면 저절로 망할 것이다.”이것은 생태신학자 한 사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1998년 KBS와 일본 NHK가 공동으로 제작한 “생명, 그 영원한 신비” 아마 제가 본 자연 다큐멘터리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1부 생명의 탄생에서 제 9부 신에게 도전하는 피조물까지 구성되어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를 능가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재미있는 시간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역사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태초에서 현재까지의 시간을 1년으로 환산했을 때, 지구 위에 사람이 처음 등장한 것은 12월 31일 오후 8시 30분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의 역사는 고작 13분에 불과하다.” 이 말은 인류가 태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고작 3시간 30분전의 일이고, 13분 동안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망쳐 놓았다는 것입니다.
수렵과 채취로 먹거리를 찾았던 원시시대는 어쩌면 자연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구석기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오면서 인류는 농경문화가 정착되어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거쳐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는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이 시간을 일 년으로 환산하자면 겨우 13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불과 13분 만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짧은 13분의 시간 동안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인간의 경제적인 이익과 편리함 때문에 파괴와 착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탐욕스런 인간에 의해 짓밟히고 유린당하던 자연이 이제는 더 이상 아파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이 되어 오히려 인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탄식하는 피조세계를 바라보면서 인간도 아파하고, 피조 세계도 탄식하는 신음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인간만이 살기 위한 환경 운동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살려내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것을 “창조질서의 보전, Integrity of Crea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 자연을 가꾸고 보전하여 후손들에게 존속 가능한 사회를 물려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환경오염과 대기오염으로 온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몽골 사막에서 황사가 우리 집 안방까지 쳐들어오고, 우리의 허파까지 공격해오고 있습니다. 먹거리를 생산하는 물과 땅과 공기가 다 오염되어 모든 동식물들이 다 오염되어 있습니다. 비단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미 지구상의 많은 종류의 동식물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 이 미래의 세계가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요엘 선지자는 말세에 성령이 임할 것을 예언했던 신령한 선지자입니다. 이 요엘 선지자가 2천5백 년 전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먹을 것이 우리 눈앞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씨가 흙덩이 아래에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가축이 울부짖고 소 떼가 소란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 떼도 피곤하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가 파괴된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여러 피조물 가운데 유독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복을 주셨습니다. 땅을 다스리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지면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우리 인생들에게 주셨습니다. 그것들이 사람의 식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동물과 식물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주셨는데, 우리가 이것을 잘 이용하고 또 우리 후대 이용할 수 있도록 잘 보전해야 하는데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착취당하고 함부로 대함을 받은 것들이 오히려 인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자 하나님을 향해서 인간들 때문에 인간과는 함께 살 수 없다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 정도만이 아닙니다. 세상 종말에 나타나는 현상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마저 살기가 힘든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매화고 진달래고 철쭉이고 벚꽃이고 한꺼번에 꽃이 핍니다. 어제는 서울의 온도가 33도까지 올라갔습니다. 5월의 날씨 이렇게 되었으니 생태계가 미쳐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오늘 서신서의 말씀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계시하는 것을 기록해 놓은 종말에 대한 예고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총 22장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6장부터 19장까지의 중심내용이 환란입니다. 6장 1절에서 8장 5절까지 일곱 인의 재앙에 대해서 말하고, 8장 6절에서 14장 20절까지는 일곱 나팔의 재앙을 말하고, 그리고 15장에서 19장 5절까지는 일곱 대접의 재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은 결국 일곱 인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도 요한이 예언한 일곱 인의 재앙과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마지막 날에 재앙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말의 사건을 현실과는 무관한 어떤 신령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종말의 사건은 환경 문제입니다. 일곱 인은 환경문제를 말합니다. 여기서 일곱 인은 일곱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도장으로 인봉해 놓은 것을 땔 때마다 재앙이 임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내용은 주님 오시기 전에 나타날 환란 즉 재앙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기저기서 난리가 난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전쟁과 내란입니다. 일종의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는 흉년과 배고픔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대지진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기근과 굶주림의 고통을 말합니다. 다섯 번째는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성도의 고난이 심할 것을 말합니다. 여섯 번째는 하늘의 여러 가지 징조가 발생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피 같이 변하고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 떨어지듯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복음서와 같은 맥락으로 나팔의 재앙을 말씀합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버렸더라 고 했습니다. 사막화 현상으로 목초지가 없어지고 자신들의 터전을 잃어버린 짐승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농경지가 줄어들자 인간도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은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고 했습니다. 이 재앙은 화산폭발과 쓰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바다가 피가 되었다는 표현은 적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 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정확합니다. 쑥 녹조 현상 아닙니까? 녹조 현상으로 마실 물마저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이 생명의 근원인데 이 근원이 말라감으로 인간마저 죽어간다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가 불어야 할 나팔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흑암의 재앙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를 향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는데 그 아홉 번째 재앙이 흑암의 재앙이었습니다. 요즘 서울 하늘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황사가 뒤덮고 있습니다. 대기가 오염되어 한낮인데도 태양을 보기가 힘이 듭니다. 숨 쉬기도 힘이 듭니다.
오늘 서신서의 본문은 일곱 나팔의 재앙 가운데 네 번째까지만 불었습니다. 다섯 번째 나팔을 불 때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여섯 번째 나팔을 불자 환경재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재앙의 내용은 한 가지 메시지입니다. 모든 재앙은 1차적으로 자연에서 문제가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2차적으로 인간에게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간적으로 보면 오늘의 문제가 내일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오늘의 자연의 문제는 결국 내일의 인간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문제는 내일에 가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이 자연을 오용하고 남획하여 인간이 자연을 공격하지만 결국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자연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피조 세계가 아파하고 신음하고 있다는 것이 성서의 한결같은 증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이때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만물이 인간과 함께 탄식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때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 갈릴리교회는 일찍부터 환경의 문제를 신앙의 문제로 고백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Co2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헌금을 하는 것은 창조질서의 보전은 우리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고 우리는 이 창조세계의 청지기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에너지 소비가 많은 도시를 살아가면서 많은 지구의 환경을 빌려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자동차를 이용하고, 전기를 사용하고, 난방을 사용합니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종말은 물론이고, 인간에게 치명적인 재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의 아들 딸과 손녀들은 심각한 질병에 노출될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 몽골사막에서 날아오는 황사로 인해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살수 없는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성도들이 드린 Co2헌금으로 다음 주중에 2천 그루의 나무를 몽골 사막에 심으러 갑니다. 단순히 나무만 심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을 몽골 땅에, 사막 한가운데 심는 것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누릴 건강한 환경을 심고, 미래의 맑은 공기를 심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몇 년 전에 읽은 시 한 편이 생각나서 이틀 동안 서재를 다 뒤졌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책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고, 몇 가지 기억을 더듬어 인터넷 검색을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저녁 늦게 겨우 찾았습니다. 함께 살아야 할 자연에 대한 깨달을 주는 시입니다.
이사 -정호승-
낡은 재건축 아파트 철거작업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나무들이 철거되기 시작한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는데
뿌리를 꼭 껴안고 있던 흙을 새끼줄로 동여매고
하늘을 우러러보던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질질 끌고
이삿짐 트럭에 실려 가는 힘없는 나무 뒤를
까치들이 따라 간다
울지도 않고
아슬아슬 아직 까치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나무 뒤를
울지도 않고
우리는 너무도 인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집 주인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남의 집을 이사하고 있습니다. 까치가 자기 집 가져간다고 울면서 따라오는데도 왜 따라오는 지도 모르고 자기 길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사는 피조세계의 동물과 식물들이 인간 때문에 못살겠다고 아우성 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과 함께 살아갈 때 인간은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주인 아니라 하나님 동산의 관리자입니다.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환경이 사람들에게 보복하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삶을 정비하고 생각을 정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풀 한 포기, 나무 하나, 이름 없는 미물, 자연에 이르기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
요엘 1:13-14절 / 이한규 목사
1. 겸손한 기도
하나님은 마음이 높은 자의 기도는 받지 않으신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음이 높으면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마음이 높은 작은 흔적조차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더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다.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철저히 마음을 낮추라. 몸까지 낮춰서 마음이 낮아지도록 견인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받으신다. 태생이 교만한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진실로 겸손해질 수 있는가? 그래서 회개가 필요하다. 사람이 가장 겸손해질 때는 진실하게 회개할 때다.
특히 겸손해지기 힘든 사람은 영적인 리더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영적인 리더는 더욱 회개 기도를 앞세워야 한다(13절).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으면 예수님의 겸손한 삶이 나타나야 한다. 겸손할 때 불화의 기운이 평화의 기운으로 바뀐다. 겸손으로 내면의 불화와 불통을 제거할 때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뤄지고 형통의 은혜도 얻는다. 세상의 어둠은 나의 높은 마음이 물리적으로 나타난 흔적들이다. 겸손한 기도를 통해 자기와의 소통을 이룰 때 하나님과의 소통도 원활해진다.
2. 정결한 기도
율법에 의하면 금식일은 일년 중에 대속죄일 하루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구할 때는 국가적인 금식일을 선포하기도 했다(14절). 눈물은 감정적으로 표출된 회개 표시지만 금식은 의지적으로 표출된 회개 표시다. 왜 금식하는가? 어떤 사람은 “금식기도 하면 기도 응답을 잘 받는다.”고 생각해서 금식한다. 진실한 금식기도가 응답을 잘 받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기도 응답을 목적으로 금식기도를 하면 오히려 응답을 더 받지 못한다. 금식은 기본적으로 나를 정결하게 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다.
돈이나 복을 목적으로 금식하면 안 되고 치유나 회복도 금식의 1차 목적이 되게 하면 안 된다. 금식의 1차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정결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욕심이 가득 찬 마음에는 성령님이 임하실 수 없다. 금식의 1차 목적을 자기를 버리는 것에 있게 하라. 금식을 통해 물리적인 힘이 다 빠지게 해서 자기를 버리는 훈련이 금식이다. 금식을 통해 훈련한 자기를 버리는 삶을 금식 후에도 잘 이어가는 모습이 복된 모습이다. 자기를 버릴 때 하나님의 채워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은혜를 체험한다.
3. 간절한 기도
하나님은 성회를 소집해서 장로들과 모든 주민들까지 성전에 모이게 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 했다(14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전에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고 사모하라.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그때 하나님을 찾으면 복이 된다. 고난과 상처를 통해 나의 약점과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하는 것만도 큰 은혜다. 그때 기도도 간절해진다. 사람들은 눈물로 간구하면서 겸손해지고 빳빳한 고개가 숙여지는 체험을 한다. 자기 죄의 치명성을 깨닫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누구에게든지 변화의 희망은 있다.
므낫세 왕이 열왕기하 21장에는 못된 악인으로만 묘사되지만 역대하 33장에는 악인이었다가 변화된 모습을 묘사한다. 못된 악인조차 하나님을 간절히 붙들면 새로운 희망이 생긴다는 뜻이다. 나 자신도 하나님을 간절히 붙들면 얼마든지 새롭게 될 수 있다. 내 안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열정이 희미해지지 않게 하라. 모든 사건과 만남을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이르기 위한 것들로 받아들이라. 어떤 사건과 과정을 겪든지 그것들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으로 귀결되면 그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이 되고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응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