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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의 종이 시작될 때435
(하동 이병주 문학관을 찾아)
이 명 란
문추작가회 제10회 문학세미나는 지리산이 낳고 섬진강이 기른 땅 하동 이병주문학관 탐방과 청학동 삼성궁과 하동송림 숲을 찾았다.지적이고 이해타산 없는 열한번째 절기의 작은 더위(소서)를 피해 하동포구를 찾는다. 이병주문학관은 언론인이자 소설가로 80여 편의 방대한 작품을 남긴 나림 이병주(1921∼1992)의 생애와 작품 세계, 정신을 두루 엿볼 수 있는 산속의 쉼터를 찾는 공간이다. 이병주문학관 기행은 열 번째 문학세미나로 토지문학관과 이병주문학관 관장님 강의로 하동 출신 이병주선생의 문학세계를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매년 10월이면 토지문학제 최영욱관장님을 만나지만 뵐 때마다 피죽도 못 먹는 얼굴이다.
이번에는 치아치료로 더욱 핼쑥하다. 소설가 이병주의 시구들을 아름다운 선율로 만나는 ‘시, 노래 음악회’도 마련되어 함께했던 기억도 있지만 소설가 이병주작가에게 문학적인 영감을 준 장소인 다솔사가 있다. 하동의 흘러간 시간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수분재는 섬진강과 지리산 중간으로 데미샘과 뜬붕샘 중 오른쪽에 떨어지는 물은 섬진강이 되고 왼쪽 한줄기는 금강에 흐른다.
물줄기는 산이 시원이요, 산줄기를 보아야 그 물줄기를 따라가면 간단하게 그 산줄기를 찾을 수 있듯, 자식의 모태인 어머니(여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인간이 멸종될 것이다.
한강의 발원지는 검룡소,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 금강의 발원지 뜬붕샘,
영산강의 발원지 가마골 용소가 있다면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이 있다.
섬진강은 단군시대에는 모래내요, 백제시대에는 다사강, 고려 초에는 두치강이라 했다. 고려 우왕 11년(1385)에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과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자를 붙여 섬진강이 되었다 한다.
금남호남정맥 오계치 따라 진안 장수 삿갓봉 정상(1114m)과 팔공산의 기운 또한 땅끝 기맥이 흐르고 있다.
데미샘은 진안군 원신암 마을 상추막이골에 위치해 있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이 있는 봉우리를 천상데미라고 부르는데, 데미라는 말은 전라도 사투리인 '더미(봉우리)'에서 유래 되었다. 천상데미는 '섬진강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란 뜻이다.
황금 같은 소금강은 웅진강이라 했는데, 상류로부터 적등강 호강 차탄강 화인진강 말흘탄강 형각진강으로 되어 있으며, 공주에서는 동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그리고 하류에서는 공성진강이라는 금강은 곰 검 짐 가무 금등의 전음이요, 강 또는 나루는 곰나루로 소금을 운반하던 나루터이다.
소금/경당
작은 금가루가
짠 내나는 소금을 만들고
송홧가루가 염전에 흩날리면
최고의 반찬이 된다
박범신의 <소금>소설에 나오는 송화염이 가장 맛있는 소금으로 송홧가루가 염전에 뿌려지니 맛 또한 일품이라 했다.역사는 시간에 묻혀 흐르지만 되새김할 수 있는 작가의 붓끝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제를 안고 살아간다.금강과 한국문학사 아리랑 녹두장군의 뿌리, 계룡산에 물줄기가 김제 만경평야를 만들고, 전군가도의 신작로가 신설 될 때까지는 동학의병들이 잡혀온 분들이 만든 배고픈 설움과 죽음으로 이룬 도로라니 역사는 길에서 죽고 길을 걸어가는 오늘이 있다.한국문단에 맥을 이어온 김동리<역마> 민족의 대서사시 박경리<토지> 하동출신 이병주<지리산> 조정래<태백산맥> 권운상<녹슬은 해방구> 이태의<남부군> 문순태<철쭉제> 황순원<잃어버린 시간들> 오찬식<마뜰> 김원일<겨울 골짜기>등의 소설과 김지하 송수권 이성부 고정희 고은 신경림 이동순 문인수 곽재구 정규화 김기택 등은 지리산을 노래한 시인들이다.토지에서 지리산까지 동학과 일제 수탈 농민운동과 이병주선생은 국제신문 주필을 하던 때 박경리선생이 추천했고, 부산일보 주필이었던 곽경주와 절친 이었지만 친북이라는 투서로 이병주작가는 감옥에서 소설<알렉산드리아>을 쓰게 되어 소설로 등단하게 된다.안타까운 사건은 전두환이 죄를 짓고 아내 이순자가 이병주선생에게 오빠라고 매달리며 문인100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뒤 백만원씩 주고 보니 부정했던 문인들이 줄을 섰더란다백담사에 있을 때 골목에서 성명서를 하게 도와준 이병주는 금과옥조일까?이병주는 친구였던 김수형시인의 도움이 많았고, 이작가는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 이작가는 죽는 날까지 술을 마시며 싸운 절친이 있었다는 후담. 역사는 변하고 현실로 보는 문단에 친일 문인들의 문학상을 그대로 둘 것인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문학과 작가를 분리 할 것인가?
작가 이병주가 즐겨 했던 말은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였다. 이병주문학관에서도 그의 이 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장석주 시인은 '나는 문학이다'에 이 말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작가란 햇빛에 바래진 역사를 새로 쓰는 복원자, 준엄한 사관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든 역사는 승자들을 위한 기록이다. 따라서 당연히 역사는 승리자 중심으로 기술되고 결과만 따지게 된다. 그러나 문학은 역사가 빠뜨리고 간 것을 챙기고 메워준다. 무명의 패배자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결과만이 아니라 동기도 중요하게 조명을 한다." '무명의 패배자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결과만이 아니라 동기도 중요하게 조명'했던 그의 작품은 격변의 7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손철주 학고재 주간은 한 글에서 "문학을 사랑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제 이병주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나누자"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했다. 소설가 공지영도 '산하가 된 그 이름 이병주'라는 기고를 통해 "유신이라는 독재정권의 코미디 같은 억압과 그 현실의 틈새에서 어떻게든 역사의 잃어버린 한 결을 재현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행간으로 느끼며 나는 책에서 밤새 눈을 떼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병주의 행적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부분도 있다.
고 리영희 교수는 임헌영과의 대화를 묶은 책 '대화'에 이병주와의 인연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남겼다. 조선일보를 그만둔 뒤 리영희는 생계를 위해 절친했던 이병주의 소설을 팔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 리영희는 "(이병주가) 중편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와 '마술사' 등 몇 권을 쓴 뒤라 그걸 출판하려고 스스로 아폴로라는 출판사를 냈어요. 결국 내가 그 책 외판을 한거야. 새끼로 묶어서 들고 다녔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리영희는 이병주에게 독재자의 전기를 쓰겠다는 얘기를 듣고 멀리하게 됐고 그 후 완전히 결별했다고 이 책에 썼다. 이병주는 1988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을 검토할 정도로 인연이 있었고 이듬해 백담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병주소설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지는 ‘국제복수극’ 클라리넷 연주자가 사상범으로 몰려 서대문 형무소에서 10년 형을 언도 받은 언론인의 소설처럼 <한길사 2006> 지식인과 지혜는 동물적인 본능이 있을 것이다.
역사는 강자의 붓 끝에 흐르는 기록이요,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자들이 어찌 그의 속뜻을 알리요. 꽃이 피면 벌 나비가 찾아오고 문학관이 있는 곳에 문인들은 발길을 건넨다.
굴레의 종이 시작될 때 436
(지리산 청학선원을 찾아)
시인 이 명 란
“옛부터 두류산(지리산)은 영악(靈岳)으로 동(東)은 천황봉이요, 서(西)는 반야봉으로 중앙에는 영신대가 있어 병풍 같은 장막을 치고 있다.
영신대에서 남쪽으로 한 갈래 맥이 이어져 삼선봉을 만들고 다시 동서로 맥을 이어 삼신봉 청학동을 작국하였다. 청학동은 신라의 석학 최치원선생과 도선 국사를 비롯한 역대의 선사들께서 기거하신 동방 제일의 명지이다.
청학선원 삼성궁이라는 배달민족성전의 국조이신 삼성(三聖) 환인, 환웅, 단군을 봉안하고 일찍이 낙천선사 문하에 출가하여 선도(仙道)의 가르침을 받고 천도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비롯한 삼륜, 오계(五戒), 팔조(八條) 구서(九誓)를 공부하였으며, 삼법수행을 정진하며 우리의 춤과 노래 선가무예인 선무(先武)와 본국검(本國劍)을 사사받았다. 선사께서는 배달민족혼을 일으키고 민족적 구심점을 형상하기 위한 배달민족성전을 건립하고자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칡넝쿨을 걷으며 몇몇 제자들의 도움으로 손수 만든 돌탑과 솟대를 쌓았다. 이는 고조선 소도를 복원하여 고대 조선 문하에의 희귀를 꾀함과 동시에 오늘날의 잃어버린 배달선도문화를 재조명하고 민족문화 활동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청학동 삼성궁은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배달겨레의 성전이라 수도장으로 선국(현관) 선가에는 '청학동'이란 천하제일의 명승지로 두류산(지리산)을 두루 돌아보니 윤택한 기운이 가득하다.
우리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보자. 천손민족의 1차 대이동 '오미의 변'. 마고성은 티베트 고원의 '수미산'으로 추정된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반만년 또는 온 만년이라고 하면서도 대부분이 뚜렷한 근거를 대지 못한다. 약 9천 년 전,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 한텡그리 마운틴) 기슭에서 한 무리의 밝은 부족들이 겨레를 이루고 살았었다. ‘탱그리’는 몽골, 터키, 여진족, 예벤키 족 등에게는 하늘을 뜻한다. 우리말도 하늘처럼 둥글고도 참되다는 뜻으로 ‘탱글탱글’하다는 표현이 있다. 그들을 천손, 하늘의 자손이라 불렀으며, 지도자인 ‘중심이 되는 환한 큰 어른’ 곧 환인(桓因, 7세)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하늘을 믿고 의지하며 하늘마음(天心)으로 살아왔다.
글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역사로 이미 그 무리의 어른들로부터 중심 철학으로 천부경이 구전됐다. ‘하늘 산기슭’에서 3301년을 존속하다가, 인구가 늘어나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환인의 말씀을 좇았다.
“가히 홍익할 만한 땅”을 찾아 ‘해 뜨는 곳, 동쪽’으로 떠나 드디어 신령스러운 백두산기슭에 둥지를 틀고 ‘겨레를 이룬다.
서기전 3897년의 일이다. ‘환웅(桓雄)’이 신시(神市)를 도읍으로 밝은 나라 ‘배달국(倍達國)’을 세워 18세 1565년을 이어간다. 이때부터 한민족의 역사에 ‘배달겨레’가 등장한다.
신시개천도(神市開天圖) 개천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 안에 천지가 녹아들어 있음을 아는 진정한 인간존중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천부경의 핵심 사상인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을 뜻한다.
치우천왕(蚩尤天王, BC 2707년)은 제14세 환웅으로 ‘자오지 천왕(慈烏支天王)’이라고도 불린다. 치우천왕은 2002년, 2006년 월드컵 경기 에서 ‘붉은 악마‘로 부활한다. 붉은 악마 응원단의 깃발에 그려진 얼굴상은 ’치우귀면화(도깨비기와)‘를 디자인한 것이다.
치우천황은 도깨비나 악마가 아니라 투구를 쓰고 철갑을 입은 무장의 모습이다. 환웅천왕들은 중국이 가장 무서워하는 강력한 환웅시대의 통치자들이다. 한고조 유방도 전쟁을 치르러 갈 때는 치우사당에 승리를 빌었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무인들은 부임지로 떠날 때나 전쟁을 치르기 전에 ’둑제(치우천왕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한다. 거북선 앞 뱃전에는 치우천왕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것도 알게 되었다.
굽이굽이 초록으로 둘러싸인 산세와 초원에 신선들이 살고 있는 별유천지가 있고 청학이 노니는 학연과 석정 뒤에는 삼신봉이 솟아 있어 마고성 우주의 창조자 대지의 여신 직녀 삼신할매 생산의 밝음과 어둠의 공간에 하늘 땅 사람이 우주를 넘나들고 홍익인간 정신이 뿌리 깊이 스며드는 모태이다.
몇 년 전에 보았던 청학동이 아니다.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신선 도장 주차장에 도착하니 청학이 날개를 펴고 일반에게 개방 할 때는 수도자를 동행 수도복을 입고 입장하였는데 최근에는 배낭을 소지하고는 입장할 수 없는 간소한 절차로 성인 입장료 7천원이면 입장 가능했다.
경내를 들어서니 선국(仙國) 수행선원 삼신궁과 생활선원 삼선궁, 교육관광선원인 배달성전(관광민속마을)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2시간여 돌다보니 마고성 마고복본 원시반본은 생명의 땅으로 신시(神市)청학동 장터와 버드내 산책로와 삼림욕에서 여름을 날려 보낸다.
삼성궁의 정확한 명칭은 지리산 청학선원 배달성전 삼성궁으로 이 고장 출신 강민주(한풀선사)가 1983년 고조선 시대의 소도(蘇塗)를 복원하여 민족의 성조인 삼성(한인 한웅 단군)를 모셨다.
안내를 받으며 돌탑을 따라 오르니 삼성궁 경내에 연못이 있는데 배가 정박되어 있고 푸른 호수 사이로 천년화로 피어났다.
정교한 무늬의 조각 작품들에는 혼이 들어 있는 듯 우리를 주시하고 있고 홍익인간의 신령스런 검달길에 국조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2013년 한국동인지문학 국제세미나가 몽골 울란바트라대학에서 열렸다. 본부장인 나는 좌장을 맡아 몽골 문인들과 15일 동안 합숙하며, 고비사막과 몽골 전역을 탐방하며 국빈대접을 받았던 기억을 되살리는 마고복본 원시반본의 생명 존중 조상의 위대함을 느끼는 숙연한 마음이다.
계곡에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에 발을 담그고 여름의 더위를 날려 보내는
길 터에 오기까지는 임인택회장님과 박철수부회장님께 감사 드리오며섬섬옥수 진솔한 강줄기 따라 전남 광양과 경남 하동 섬진강 물줄기 흐르고 천년기념물 제445호 지정한 하동송림은 도호부사(1745년 영조21년)였던 전천상이 섬진강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해 심었던 750그루의 소나무는 수많은 여행객들에게 행복을 공유하는 자연림으로 건강한 선물 송림공원에서의 친교 시간은 김영임부회장님의 맛내는 음식으로 정감을 나누며 넓을 백사장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했다.
세미나 자료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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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글은 자료집과 최영욱관장님 강의를 즉흥 받아 적은 글이라 문맥이 흐트러짐을 어여삐 ^^
멋진 작품, 고맙습니다.
늘 고운 날 누리시길
7월 7일 참 좋은날, 그날 잊지않게 만들어 주신 이명란 이사님 고맙습니다.
파란 하늘, 넓은 가슴 쫙 벌리며 반기던 진초록물 뚝 뚝 떨어지던 지리산.
그날 우리는 모두 꿈 많은 소년 소녀들 이었습니다.
회장님 덕분에 멋진기행 추억 항아리에 담았습니다
정리해서 다시 올립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