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인 독립운동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헐버트(Homer B. Hulbert)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가치
1895년 을미사변,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주권을 수호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인사들이 분연히 일어나 일제에 투쟁하였다. 그들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로서 국가 패망의 책임을 져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우국충정에서 일어선 민초들도 있다. 숫자로 보면 책임을 통감하여 나선 양심적 지배층 인사보다는 책임과 무관한 민초의 숫자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들은 국가의 부름을 받지도 않았지만 가속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의 자발적 희생정신은 국가의 부름을 받은 여느 애국 활동과는 구분되는 최상의 애국의 가치일 것이다.
독립운동은 우리 근세 역사에서 후손에게 남긴 가장 값진 정신적 유산이며, 더 나아가 한민족을 민족정기가 실아 있는 민족으로 세계사에 기록한 민족적 쾌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은 독립운동의 결과로 광복을 맞은 것이 아니고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여 독립이 되었다고 독립운동을 폄하한다. 이는 참으로 잘못된 주장이다.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우리는 광복을 맞지 못하였을지도 모르며, 맞았다 해도 한참 후에나 맞았을 것이다. 우리가 독립을 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을 독립시키자는 조항이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독립을 주장하지 않고 일본의 일부로 살았다면 과연 세계 어느 나라가 한국을 독립시키려 나섰겠는가?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일본인을 자처하거나 또는 그저 황국신민으로 피동적으로 살았다면 외국인들은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1895년 의병투쟁부터 시작하여 50년 동안 국내외에서 외친 독립의 함성이 세계 곳곳에 전해졌기에, 한국 독립의 당위성이 국제적으로 인식되어 우리는 광복을 맞은 것이다. 지배국이 패망하였어도 피지배국이 독립하지 못한 예는 다른 나라들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일본에게 한국 강점에 대해 떳떳하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만약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떳떳하게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할 수 있을까?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광복에 대해 지금처럼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에 감사하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독립유공자를 선정해오고 있다. 그들의 공적과 희생을 가늠하는 장치가 바로 건국공로훈장(건국훈장) 제도이다. 이 제도는 한편으로 아무리 나라를 위해 희생했어도 건국훈장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면 독립운동가라는 명예를 얻을 수 없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남기지 못해 서훈을 받지 못한 애국지사의 원혼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주권수호와 독립에 기여한 사람들이 한국인 뿐만은 아니다. 이방인 독립운동가도 있다. 2017년 말 현재 공식 독립유공자 수는 14,830(건국훈장 수훈자 – 10,795명, 건국포장 및 대통령 표창 수훈자 – 4,035명)명이다. 이중에는 한민족이 아닌 외국인 69명이 포함되어 있다.
외국인 독립유공자 현황
개화기 이래 많은 외국인이 한국의 문명 진화와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몇몇 외국인은 역사의 고비에서 우리를 위해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선교사들은 종교적 목적으로 이 땅에 왔지만 결코 잣대로 잴 수 없는 문명적 변천을 이 땅에 심었다. 오늘 강연에서 외국인 전체를 논할 수는 없다. 건국훈장으로 평가되는 독립유공자만 선별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2017년 말 현재 공식 독립유공자 수는 14,830(건국훈장 수훈자 – 10,795명, 건국포장 및 대통령 표창 수훈자 – 4,035명)명이다. 이중 외국인 독립유공자 수는 87명이다. 이들 중 18명은 한민족으로서 국적을 바꾼 동포들이다. 따라서 순수 외국인은 69명이다. 69명의 외국인 수훈자를 훈격, 국가별로 분류해봤다.
대한민국장 5 중국 33
대통령장 11 미국 21
독립장 34 캐나다 5
애국장/애족장 16 영국 4
건국포장 3 기타 6
계 69 계 69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외국인 독립유공자 수는 중국인이 거의 과반에 육박한다. 이는 우리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장 5인이 모두 중국인(孫文, 蔣介石, 宋美齡, 陳果夫, 陳其美)이고 대통령장도 1명을 제외한 10명이 중국인이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정치인이거나 관료로서 정치적 입장에서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정치적 입장을 뛰어넘어 정의의 바탕에서 도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중국인을 제외한 외국인 수훈자는 36명이다. 이들은 중국인 수훈자들과는 달리 순수하게 정의와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한국을 도운 사람들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3월 1일 외국인 최초로 미국인 10명에게 미국 워싱턴에서 일괄적으로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사람들이다. 헤이그 특사로 활약하다가 일본에 추방당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한 헐버트(Homer B. Hulbert)도 그중 한 명이다. 이 10명 중에는 독립장 훈격이 과한 사람도 있고 너무 약한 사람도 있다. 당시는 정부 수립 초기여서 공적을 제대로 심사하지 못하였다. 이들에 대해 지금이라도 공적을 다시 심사하여 경중을 가려줄 필요가 있다.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 중 가장 높은 훈격 수훈자는 대통령장을 수훈한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 裵說, 1872~1909)이다. 베델은 1904년 신문기자로 이 땅에 와 일본의 침략주의에 항거하였다.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 박은식 등과 함께 창립하였으며, 영국이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밀착하면서 조국의 보호는커녕 오히려 박해를 받았다. 베델은 미국인 헐버트와 짝을 이뤄 일본의 불법성을 규탄하며 한국을 도우기도 했다. 일본 대신이 불법 반출한 국보 86호인 경천사 석탑 반환을 위한 투쟁이 이들의 대표적인 합작품이다. 베델은 항일운동에 매진하다가 안타깝게도 1909년 37살의 나이로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독립장 수훈자인 캐나다인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石虎弼, 1889~1970)는 3.1혁명과 제암리 사건을 국제 언론에 알렸으며,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현재 외국인 중에는 유일하게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특별히 주목을 끄는 사람이 애족장을 받은 일본인 후세(布施辰治)이다. 그는 변호사로서 한국인들의 변호를 맡다가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하며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양심적인 열린 세계인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나머지 외국인 독립유공자들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중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그는 독립장 수훈자인 미국인 헐버트이다. 헐버트는 독립유공자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 한글학자, 언론인, 역사학자, 선교사로서 개화기 한국 문명 진화에 큰 획을 그은 사람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중국 뤼순감옥에서 “헐버트는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일본 경찰에 공술하였다. 헐버트의 울림이 얼마나 컸기에 안중근 의사가 그렇게 최상의 존경을 표했을까?
사진 1. - 안중근 의사가 “헐버트는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일본 경찰에 공술한 내용이 담긴 일보 통감부 기밀문서(1909년 12월 2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역사의 양심 헐버트(Homer B. Hulbert)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헐버트의 일생을 음미해보면 수긍이 가리라고 본다. 헐버트는 1886년 23살의 나이에 조선 땅을 밟아 1949년 86살로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한민족을 위해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다. 대한민국은 그에게 ‘건국공로훈장(1950년)’, ‘금관문화훈장(2014년)’, 제1회 ‘서울아리랑 상(2015년)’을 추서하였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건국공로훈장’과 ‘금관문화훈장’ 두 훈장을 받은 사람은 헐버트뿐이다. 그가 받은 훈장의 의미는 그에게 따라다니는 ‘최초’라는 수식어에서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 교사이자, 최초의 한글 교과서 저술가이며, 최초의 아리랑 채보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는 고종의 밀사 역할을 세 번이나 맡으면서 한국의 주권수호와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일제와 맞섰다. 헐버트의 일생은 넓고 깊다. 그의 일생을 축약하여 조명하고자 한다.
1. 근대 교육의 아버지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Vermont) 주에서 기독교정신의 피가 흐르는 교육자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청교도의 후예로서 회중교회 목사이자 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이이비리그의 하나인 다트머스(Dartmouth))대학 설립자의 후손이다. 헐버트는 투철한 기독교관을 가진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 밑에서 ‘원칙이 승리보다 중요하다(Charac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라는 가훈 아래 성장했다. 헐버트는 1884년 다트머스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재학 중,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가 되기 위해 1886년 7월 5일 미지의 세계 조선 땅을 밟았다. ‘육영공원’은 조선이 1882년 미국과 수교 후 상호 협력한 최초의 개화 사업이며, 장차 나라의 동량을 기르기 위한 목적에서 고종의 근대식 교육에 대한 열정의 발로로 1886년 9월 23일 개교하였다. 당시 조선은 근대교육을 전혀 접해보지 못하였기에 근대 교육을 이끌어갈 교사 3인을 미국에서 초빙했다. 그중 1명이 헐버트이다. ‘육영공원’은 정부 관리와 양반집 자제 중에서 선발한 35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학생 중에는 역적 이완용도 있었다.
헐버트는 개교에 앞서 교과목 선정 등 학교 운영 방침을 제시하였으며, 조선 조정은 고종의 윤허를 얻어 1886년 9월 18개 항의 ‘육영공원설학절목(育英公院設學節目)’을 발표하였다. 교사는 미국인뿐이었으며, 통역을 두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과목은 개교 초기 영어 회화에 집중하였으나 3개월이 지나 영어 문법, 지리, 산수를, 시간이 지나며 정치경제학 등을 추가했다. 고종은 육영공원에 대해 기대가 컸다. 학생들을 궁궐로 불러 직접 시험을 치르는 등 육영공원의 발전을 위해 열정을 쏟았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5년 반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후 조선을 떠났으나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하여 감리교 배재학당 삼문출판사(The Trilingual Press)를 책임 맡았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주시경, 이승만 등을 사제지간으로 만났다. 그는 1897년 다시 조선 조정과 계약을 맺고 한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전신) 책임자 겸 대한제국 교육 고문이 되었다. 이어서 1900년 개교한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헐버트는 내한하자마자 조선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교육만이 조선의 살길이다.”라고 외치며 심지어 고종에게 상소까지 올리면서 근대 교육의 틀을 세우고, ‘헐버트 교과서 시리즈(Hulbert Series)’라는 프로젝트 아래 사비를 들여 교과서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등 20여년을 한국 교육을 위해 헌신하였다. 특기할 일은 헐버트는 1904년 <한국 교육은 혁명적 변화를 요구한다(The Educational Needs of Korea)>라는 교육 호소문을 발표하여 한국 교육이 나아갈 혁신적이고도 현실적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이 글 서두에서, “지금까지 한국 교육은 한국보다 중국에 관한 공부가 훨씬 많았다. 실생활에 필요한 공부는 전혀 포함하지 않았고, 자연의 이치를 알려주지도 않았으며, 미래지향적이지도 못했다.”라고 한국 교육의 현실을 질타했다. 그러면서 오늘날에도 유용할 교육 철학을 세세히 밝히고 실용적 교육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본 발표자는 이 호소문은 개화기 교육사에서 교육장전이나 다름없는 글로서 이 땅의 교육자들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2. 교육사의 금자탑,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는 헐버트에 의해, 그것도 한글로 출간되었다. 헐버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선적으로 바깥세상을 알리는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느껴 천체, 세계 지리, 각 나라의 제도 등을 망라한 세계사 책인 《사민필지》를 1891년에 출간하였다. 161쪽의 《사민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이자 한자가 하나도 없는 순 한글 교과서이다. 헐버트는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책 이름을 사민필지(士民必知)라 하였다. 그는 이 책 머리말에서,
“중국 글자인 한문으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지 못하고 널리 볼 수 없으며 조선 언문은 본국 글자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마는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라며 한글이 사용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참으로 안타까워했다. 헐버트는 또 양반과 쌍놈,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배움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남녀와 신분의 차별 없는 평등사상을 교과서에 담았다. 헐버트는 이 책에서 도량형 단위 등을 전부 조선의 방식인 리, 척, 석 등을 써 한민족이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하였다. 이 책은 조선인들에게 근대사상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한글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었으며, 한글 범용의 지평을 열었다. 일제는 1909년 국민들의 사상 교육 과정에 너무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사민필지》의 출판과 판매를 금지하였다.
《사민필지》가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1895년 학부(學部)는 《사민필지》 한자 본을 만들어 출판하였다. 책의 내용이 소중하나 양반은 한글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한글 암흑기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진 2. -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중 유럽 편
3. 한글 사랑의 표상,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헐버트는 회고록에서 “한글을 배운지 4일 만에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일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자신들이 만든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업신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라고 밝혔다. 헐버트의 한글에 대한 관심은 한글의 문자적 우수성 발견으로 이어졌으며, 지식의 전달이 용이한 한글로 교육을 확장시켜 조선의 문명 진화를 이뤄야 한다는 교육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헐버트는 1891년 《사민필지》 저술에 이어, 1892년 한글에 대한 최초의 학술 논문인 <한글(The Korean Alphabet)>을 발표하여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대왕의 위대성을 밝혔다. 헐버트는 이어서 한글에 관한 여러 논문을 국내외에서 발표하면서,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고 한글을 정의하였다. 또한, 세종의 한글 창제 목적은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함이었다면서 세종을 기원전 2000년경에 그리스에 맨 처음 페니키아(Phoenicia) 문자를 전한 카드머스(Cadmus) 왕자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인류사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헐버트는 한편으로 “조선이 한글 창제 직후부터 한글을 사용했더라면 조선에는 큰 축복이 있었을 것이다.”라면서 조선인들이 한글을 무시하는 태도에 분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1896년 “조선은 영국이 라틴어를 버린 것처럼 언젠가 한자를 버릴 것이다.”라고 한글의 미래를 예언하였다. 그는 또 1904년 <한글 맞춤법 개정(Spelling Reform)>이라는 논문을 통해 ‘아래아’ 자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등 최초로 한글 맞춤법 정비를 주창하였으며, 윤치호,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띄어쓰기 정착에 공헌하였다. 특히 위대한 한글학자 주시경에게 한글과 관련하여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주시경은 《사민필지》로 공부하였으며 헐버트가 책임 맡고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이때 주시경이 헐버트의 한글 사랑에 크게 감화되었으리라고 상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사진 3. - 헐버트는 <한글> 논문에서 한글을 만주 문자, 티베트 문자, 산스크리트 문자와 비교하였다.
헐버트는 한글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심도 있게 연구하여 한국어의 우수성을 국제사회에 소개하였다. 그는 1895년 <한민족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People)>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역사상 최초로 한국어와 한민족의 기원의 관계성을 추적하였다. 그는 1898년 한글, 이두, 한문을 비교한 <이두(The ITU)>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오늘날의 한국어는 신라어라고 주장하였다. 1902년에는 <한국어(The Korean Language)>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한국어는 대중연설 언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라고 결론지었다. 이 글은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Smithsonian Institution) 1903년 연례보고서 학술란에 게재되기도 했다. 그는 또 <한국어 어원 연구(Korean Etymology)>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순수 한국어의 어원을 추적하고, 한국어를 대만 토착어, 태평양 상의 에파테(Efate)와 비교하며 한국어와의 유사성을 밝혔다. 1905년에는 한국어가 인도 남쪽의 드라비다 지방 언어와 공통점이 있다면서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 연구(Comparative Grammar of Korean and Dravidian)>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1895년에는 <한국어 로마자 표기(Romanization Again)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어 로마자 표기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헐버트야말로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 말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한국어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설파한 어문학자이며, 한글 전용을 최초로 주창한 한글자강 운동의 선구자였다.
사진 4. - 한자, 이두, 한글을 비교한 논문 <이두>
4. 조선 최초의 언론 외교관이자 ≪독립신문≫ 창간의 숨은 공로자
헐버트는 1886년 조선에 도착한 지 24일 만인 7월 29일 첫 글을 미국 신문에 기고한 이래 해외 언론에 조선의 풍광, 전통, 문화, 역사에 대해 수많은 기고를 한 국내 최초의 언론 외교관이었다. 그는 첫 기고문에서 “모든 나라는 조선의 근대화 노력을 지원하여야 한다. 특히 기독교 국가들이 앞장서서 조선을 도와줘야 한다.”라며 조선을 도울 것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다. 23살의 청년이 내한한 지 한 달이 안 되어 어떻게 이렇게 조선을 사랑하는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헐버트는 또 우리나라 언론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1892년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The Korean Repository)≫의 공동 편집자였으며, 1901년에는 자신이 직접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창간하여 일본의 침략주의를 필봉으로 규탄하였다.
헐버트는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의 주도로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숨은 공로자였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가 의사가 되어 1895년 12월에 조선에 돌아왔다. 당시의 물리적 환경을 보면 서재필이 미국에서 귀국한지 3개월여 만에 신문을 발행할 수 있기까지에는 누군가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헐버트 회고록에 의하면 서재필이 헐버트에게 협조를 요청해왔다고 한다. 헐버트는 “기계 및 설비, 직공, 편집과 교정을 맡을 사람을 제공했으며, 영문판은 자신이 직접 책임 맡았다.”라고 기록했다. 이때 주시경이 ≪독립신문≫에서 일하게 되는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헐버트가 편집이나 교정을 도울 사람으로 주시경을 추천한 것으로 추정된다.
5. 한국학의 개척자
헐버트는 한국의 말글 탐구를 넘어 한민족의 설화, 속담, 음악, 예술, 시, 소설, 관습, 종교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한민족의 문화적 우월성을 세계에 알렸다. 그는 한민족과 관련하여 일생을 통해 15권의 단행본과 200여 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실로 경이적인 저술 업적이다.
헐버트는 1893년 ‘시카고세계박람회’ 기간에 열린 ‘컬럼비아국제설화학술회의’에 참석 <한국의 설화(Korean Folk-Lore)>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이 발표에서 조선의 설화를 13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며, 단군 신화 등을 소개했다. 이는 한민족의 설화에 대한 최초의 국제적인 소개이다. 헐버트는 또 1895년부터 6차례에 걸쳐 <조선의 속담(Korean Proverbs)>을 발표하여 구전으로만 전해온 우리나라 속담 123개를 소개하였다. 헐버트는 이 속담들을 당시의 토속어로 소개하면서 “조선 속담에는 고차원적인 진리가 녹아 있으며, 속담이 추구하는 목표가 실용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속담이 서양 속담보다 훨씬 교육적이고 철학적이다.”라고 주장했다. 헐버트는 한국의 문학을 서구의 개념으로 분석하여 최초로 국제적으로 소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1896년 <조선의 시(Korean Poetry)>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조선의 시는 시어의 축약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조선의 시를 바르게 이해하기위해서는 의역하여 감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落花(낙화)’의 의미에 대해 30행이 넘는 시를 자신이 직접 서사시 형태로 창작하였다. 헐버트가 ‘落花’라는 두 글자를 연상하여 지은 시의 마지막 연을 소개한다.
왕비는 낭떠러지 끝으로 궁녀들을 부른다
손에 손 잡고
슬픔의 자매들은 서성이다가
허공으로 몸을 날린다
용감한 여인들이여
4월의 향기로운 내음에 부드럽게 날리는
매화 꽃잎들이 도랑 옆에 쌓이고
그렇게 백제의 꽃들은 떨어졌지만
정절의 최고봉에 높이 올랐다!
헐버트는 1902년 <한국의 소설(Korean Fiction)>을 발표하며 한국의 문학은 최치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서두를 시작했다. 그는 한국의 소설은 대부분 한자로 쓰였으며 뜻글자인 한자는 대화 그대로를 글로 옮기는데 한계가 있는 문자이고, 한국 문학이 중국을 좇아 역사적, 시적 이상을 찾는데 급급하여 소설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한글로 쓰인 소설은 많지 않다면서 어서 빨리 위대한 문호가 탄생하여 한글로 된 걸작 소설이 탄생하기를 희망했다. 헐버트는 이 글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소설은 아니지만 광대가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춰 신명나고 구수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나가는 예술이야말로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소설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한국의 ‘광대의 이야기 풀기’, 즉 ‘판소리’라는 특유의 장르는 책은 아니지만 서양의 소설을 능가하는 한국의 공연 형태의 소설이라고 주장하였다.
헐버트는 1897년 <조선의 예술(Korean Art)>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조선인들은 예술적 취향에서는 세련미가 부족하지만 놀랄 만큼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이다. 어느 민족도 봄의 풋풋함을 조선인들보다 더 만끽하지 못한다. 어느 민족도 조선인들만큼 언덕 위에 앉아 아지랑이에 반쯤 가려진 환상적인 가을 풍경을 열정적으로 즐기지 못한다.”라고 조선인들의 감성을 평가했다. 그는 한국의 풍수지리에도 관심이 많았다. 헐버트는 1896년에 발표한 <조선의 풍수지리(The Geomancer)>라는 논문에서 조선인들의 묘 문화를 소개했다. 그는 조선인들은 묘를 잘 써야 불운을 막는다고 여기며, 묘를 쓸 때 네 가지 요소를 중요히 여긴다고 했다. 그는 묏자리는 ‘내룡(來龍)’ 즉 용이 오는 곳이어야 하고, ‘좌향’과 ‘방위’가 좋아야 하고, ‘청룡백호’가 들어서야 하며, 묏자리를 숨어서 훔쳐 볼 수 있는 언덕배기를 말하는 ‘규봉(窺峰)’이 없어야한다고 했다.
6. 민족의 혼 아리랑의 최초 채보자
헐버트는 오늘날 세계의 노래가 된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한 사람이다. 1896년 <조선의 성악(Korean Vocal Music)>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민족의 혼 아리랑과 군밤타령 등에 서양 음계를 붙여 채보함으로서 우리나라 음악사에 양악보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아리랑은 조선인들에게 쌀과 같은 존재다.”라고 하여 조선인들의 아리랑에 대한 정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또 “조선인들은 즉흥곡의 명수이며 조선인들이 노래하면 바이런이나 워즈워스 같은 시인이 된다.”라고 하여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케이팝(K-Pop)으로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을 120년 전에 예지하였다. 이 논문은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논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음악을 국제적으로 최초로 소개한 논문이다. 당시 외국인들이 조선에는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헐버트는 “조선에도 훌륭한 음악이 있으며 한민족은 뛰어난 음악성을 가졌다”라고 반박했다. 한편 이 논문에서 헐버트가 채보한 군밤타령이 대한제국 애국가의 원형이라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었다(서울대학교 이경분 교수).
사진 5. - 헐버트가 최초로 채보한 아리랑 악보
7. 불세출의 역사학자
헐버트는 1905년 한국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800쪽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역사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출간하였다. 헐버트는 이 책에서 단군시대 부터 고종 시대까지를 망라하여 한국 역사를 상세하고 폭넓게 기술하였다. 당시에는 동 시대에 대한 역사 기술을 할 수 없어 헐버트는 민 씨 일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종 황제로 부터 특별히 윤허를 얻어 《한국사》를 저술하였다. 헐버트는 이 책에서 한민족의 독창성과 자주성을 높이 샀다. 《한국사》는 중국 의존의 역사인식이나 식민사관과는 관계없는 객관적, 사실적 역사 기술로서 한국 역사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는 또 1906년에 한민족의 기질, 한국의 문화, 전통, 풍속, 산업, 사회제도 등을 집대성한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했다. 헐버트는 이 책을 통해 한국의 나라를 잃는 처지를 애처로워하며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발하고,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하며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 데 동의한 자신의 모국 미국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헐버트는 헌사에서 “이 책을 흔들리지 않는 충성의 맹세로서 고종황제와, 잠은 죽음의 가상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한민족에게 바친다.”라고 하여 한민족이 언젠가 나라를 꼭 되찾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또 관료사회의 부패상, 진실성과 정의감의 결핍 등을 서슴없이 지적하며 양반들의 비실용주의적 자세와 관료사회의 부패를 나라를 잃는 원인으로 꼽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헐버트는 학자이자, 사상가이자 철학자이며, 경이로운 저술가다. 그가 이룩한 저술 업적과 사상 체계, 가치관의 실천을 보면 헐버트는 개화기 한반도에서 가장 고차원적으로 지적활동을 벌인 조선 최고의 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8. 기독교 정신을 올바로 실천한 참 크리스천
헐버트는 선교사로서도 우리나라 기독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개신교 초기에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를 크게 도왔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헐버트의 재능에 탄복하여 헐버트를 감리교 선교사로 추천하였다. 헐버트는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에서 최초로 세례를 행하였으며, 한영사전 편찬과 성경번역 사업을 함께했다. 헐버트는 감리교의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지냈고, 노량진교회 창립 예배를 인도하여 그 지역에 살던 무당들을 크리스천으로 인도했다. 헐버트는 또 감리교 출판사 책임자로 일하면서 미국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와 기독교 관련 출판물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 등 일반 서적도 출판하면서 우리나라 근대식 출판문화의 초석을 놓았다. 헐버트는 또 한국YMCA 창립준비위원장, YMCA창립총회 의장으로서 1903년 10월 28일 이 땅에 YMCA를 태동시켰다. 그는 특히 YMCA의 목적을 선교로 한정하자는 여타 선교사 선교, 계몽, 교육으로 확정하자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하였다. 평소의 지론인 국민교육철학을 구현한 것이다.
9. 인종과 국경을 넘은 정의의 사도
헐버트의 한민족을 위한 공적 중에서 가장 우리를 가장 감동케 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50년 대장정의 독립운동일 것이다. 헐버트는 1895년 왕비시해사건에서부터 1945년 광복을 맺을 때까지 필봉으로, 밀사 외교로, 국제적 회견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며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헐버트는 한국에서 일본에 대항하지 않고도 외국인으로서 침묵을 지키며 인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일제의 침략주의에 분연히 맞섰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교 분리의 원칙에 따라 침묵하였으나 헐버트는 “참 선교는 고통 받는 자들을 돕는 것이며, 진실한 애국심과 참된 신앙은 떨어져 있지 않다.”라고 항변하면서 담대하게 일제에 맞섰다. 헐버트의 타고난 정의감과 뜨거운 인간애가 집약된 최상의 기독교적 가치구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고종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며 친일파로부터 보호
헐버트는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자 고종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며 일제와 친일파들로부터 고종을 보호하였다. 고종은 왕비가 시해되자 격통과 공포 속에서 식음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친일 분자들이 음식에 독을 넣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선교사들이 상자에 자물쇠를 잠가 보내준 식사만 들었다. 일제가 칼끝을 겨누는 살벌한 공포 상황이었지만 헐버트는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과 3인 1조로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1895년 11월 27일에 있었던 춘생문사건에서는 권총까지 품고 고종의 처소에 다다라 친일파 대신들과 몸싸움까지 벌이며 고종을 보호하였다. 헐버트는 명성황후시해사건에 대해 분개하며 일본의 야만행위를 고발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그는 국내외 언론에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주범이라며 일본 책임론을 폈다. 그는 또 회고록에서 왕비 시해 사건에 대해 조선과 조약을 맺은 국가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비난하며, 이는 서양 문명의 한계라고 비판하였다.
- 항일 민권운동가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자 일본은 1904년 한국과 체결한 한일의정서에 명시된 약속을 내팽개치고 이성을 잃은 듯 한국에서 횡포를 부렸다. 일본의 위세에 눌려 어느 외국인도 일본에 맞서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헐버트는 한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일본은 군사 목적을 핑계로 용산의 한국인 땅을 몰수하고 보상도 없이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켰다. 일본인 장사꾼들은 악랄한 방법으로 한국 상인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헐버트는 국내외 언론에 이러한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직접 통감부를 방문하여 항의하였다. 그의 항의로 많은 일이 해결되었다. 헐버트의 선행이 알려지자 경향 각지에서 헐버트를 찾아와 자신들의 부동산을 헐버트 명의로 바꿔달라고 호소하였다. 외국인 이름으로 등기해야만 일본인들의 횡포로부터 부동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헐버트는 부동산을 1푼에 사서 차후 똑같은 가격으로 되팔겠다는 확약서를 써 주고 명의를 이전 받았다. 이러한 내용이 당시 서울을 방문한 미국 기자에 의해 미국 신문에까지 보도 되었다. 한편 헐버트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한국인들을 공정하게 재판하는 장치를 마련한다면 자신은 일본을 국제적으로 비난하는 일을 중지하겠다고 제의했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묵살하였다.
헐버트가 특별하게 지켜낸 우리나라 문화재가 있다. 지금 서울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10층 석탑이 한 중앙에 놓여 있다. 이 석탑을 일본 궁내부대신 다나까(田中光顯)라는 자가 1907년 황태자 결혼식에 축하 사절로 왔다가 불법으로 일본에 가져갔다. 헐버트는 이 소식을 듣고 개성에 달려가 현장을 목격한 주민들을 만나 자세한 실상을 파악하고 석탑의 파편, 우마차 자국 등을 사진으로 찍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영국 언론인 베델에게 알려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이 사실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이는 모함이라고 발뺌을 하자 헐버트는 일본 고베에서 발행되는 《재팬크로니클(Japan Chronicle)》 신문에 현장 사진과 함께 <한국에서의 일본의 야만행위>라는 기고문을 보내 석탑 반환을 요구했다. 신문사는 1907년 4월 4일 자에 해설기사와 함께 헐버트의 기고문을 비중 있게 실었다. 그래도 일본이 반환하지 않자 헐버트는 미국 신문 등 국제 여론에 호소했을 뿐만 아니라, 1907년 7월에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였다. 석탑 탈취 사건이 국제적으로 보도되어 비난 여론이 들끓자 일본은 1919년에 가서야 돌려주었다. 한국 사람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에 헐버트와 베델의 필사적인 투쟁으로 결국 석탑이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석탑은 경복궁에 있다가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과 함께 그곳으로 이전되었다. 헐버트가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면 경천사 10층 석탑은 아마 지금도 다나까 후손의 뒤뜰에 놓여있을지 모른다.
사진 6. – 헐버트가 찍은 현장사진으로 돌아온 국보 86호 경천사 석탑
- 고종 황제, 을사늑약을 막아보고자 헐버트를 미국에 특사로 파견
역사 교과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을 막아보고자 1905년 10월 비밀리에 헐버트를 대미특사로 파견하였다. 미국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자신의 친서를 전달하고, 미국을 설득하여 일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밀명을 내린 것이다. 1905년 8월 제2차 영일동맹이 체결되자 주권 상실의 위기를 감지한 고종 황제와 측근들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담겨 있는 소위 선위조처(善爲調處), 즉 ‘만약 제삼국이 조약 일방에게 부당하게 또는 강압적으로 간섭할 때에는 조약 상대국은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한다.’라는 구절을 떠올리며 미국 대통령에게 일제의 침략 야욕을 저지시켜달라고 호소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특사 파견은 철저하게 비밀이 유지되어 일본이 모르게 해야 했기에, 고종 황제로부터 신임이 두터웠고 한국을 잘 아는 헐버트를 특사로 선정하였다. 일신의 안녕보다는 한국의 주권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특사 역할을 기꺼이 맡았다. 헐버트는 자신이 미국에 가기 위해 일본을 통과할 때 일본이 친서를 강탈할까봐 미국 공사관 외교 행랑 편으로 친서를 워싱턴에 보냈다. 일본을 거쳐 워싱턴에 도착한 헐버트는 자신의 대학 동창인 스태포드(Wendell P. Stafford) 대법원 판사에게 루스벨트와의 면담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백악관이 친서를 받을 수 없다면서 면담을 거절하자 헐버트는 국무장관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국무장관마저 면담을 거절하였다. 헐버트는 1905년 11월 25일에야 국무장관을 만나 고종 황제의 친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바로 그날 미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보호조약이 체결되어 한국 국민은 매우 만족한다.’라는 허위 내용의 일본이 발표한 성명서를 전달받았음을 후일 알았다. 헐버트는 국무장관에게 항의하였으나 그로부터 “당신은 우리 미국이 일본과 문제가 있기를 바라오?”라고 질책을 받았다. 헐버트는 “이 문제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이행에 관한 신뢰와 정의의 문제요.”라고 항의하였으나 루트는 대답이 없었다. 분노에 찬 헐버트는 국무부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때 헐버트는 고종 황제로부터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전보에는 “나는 보호조약을 인정하지 못하오. 조약은 총칼의 위협 아래 강압으로 이루어졌소. 나는 이 조약에 서명한 일이 없으며 윤허하지도 않았소.”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면서 미국과 협의하여 조약의 무효화를 끌어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전보가 서울이 아닌 중국 지푸(지금의 옌타이)에서 왔다. 일본이 한국의 전신 업무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헐버트는 이 전문을 국무부에 가지고 갔다. 그러나 국무부 차관 베이컨(Robert Bacon)은 “모든 상황이 끝났소. 단지 파일만 해 놓겠소.”라고 잘라 말하면서 더는 대화를 거부했다. 이 전보야말로 대한제국 황제가 을사늑약이 무효라고 직접 선언한 실체적 증거이며, 일제의 한국 강점이 근본적으로 불법, 무효라는 근거를 제시하는 역사적 징표이다.
사진 7. – 헐버트가 미국 국무부에 제출한 고종 황제 전보 내용
분을 이기지 못한 헐버트는 정치인, 언론인 등 미국 조야의 중심인물들을 두루 만나 한국 문제를 호소하였다. 그는 정치인들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미국 의회의 승인을 거쳐 체결된 조약이 의회와 상의 없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는가?’라고 성토했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한국과의 조약을 무시하고 한국의 주권을 통째로 일본에 넘겨줬다. 한국을 일본에 넘긴 것은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아니고 우리 미국이다.”라며 미국 행정부의 조약 위배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한국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언론도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 승리에 압도되어 한국 문제를 다루려 하지 않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6년 포츠머스 조약의 중재자로서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을 일본에 넘긴 장본인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니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자국의 이익만을 취하는 자신의 모국에 크게 실망한 헐버트는 심한 좌절감 속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좌절감이 특히 컸던 것은 고종 황제와 한국인들이 미국을 진정한 친구로 간주하고 있었고, 금광 채굴권이나 철도 부설권을 주는 등 매사에 호의적이었음에도 오히려 미국은 한국을 낭떠러지로 밀어뜨렸다는 사실에서 오는 배신감 때문이었다. 헐버트는 이듬해 저술한 《대한제국멸망사》에서 미국 시민은 이제라도 한국 국민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면서, 한국인들이 최후로 의지할 수 있는 곳은 교육이라며 미국인들은 한국의 교육에 참여하여 빚을 갚자고 호소하였다.
헐버트의 대미특사 활동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고종 황제의 대미특사 파견과 헐버트의 특사 활동은 훌륭한 외교 활동이자 주권수호운동이었다. 헐버트의 당시 활약은 후일 한국인들이 미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수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전초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을사늑약 당시 미국이 취한 친일적 태도에 대해 미국인인 헐버트의 증언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역사자산이 되고 있다.
- 고종 황제, 헐버트를 제일 먼저 헤이그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
헐버트는 1906년 미국에서 귀국하여 곧 바로 고종 황제로부터 또 하나의 밀명을 받았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토의되도록, 당시 한국과 조약을 맺고 있던 9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벨기에, 중국) 국가원수를 방문하는 고종 황제의 특사로 임명된 것이다. 1906년 6월 22일 자 특사증에서 고종 황제는 헐버트에게 만국평화회의와 관련하여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전권을 위임했다. 고종 황제는 헐버트에 이어 1907년 4월20일 자로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했다. 두 특사증의 날짜가 차이가 나는 것은 당초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1906년 8월에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한국이 초청된 것을 알고 일본이 배후에서 조종하여 한국을 제외하기 위해 회의를 1907년으로 연기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특사파견의 중심에는 상동교회, 이회영, 전덕기, 헐버트가 있었으며, 고종은 일본의 감시가 심해 윤허만 하였다고 보인다. 특사 선정은 결코 단순한 선정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치밀한 계산 하에 나온 결정임을 알 수 있다. 헐버트, 이상설, 이준 특사는 상동교회, YMCA 등을 통해 매우 친숙한 관계였다. 외국에서 특사로 활동하려면 서로 절친한 사이여야 비밀이 유지될 수 있고, 특사 임무 수행에도 지장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적 친숙도가 특사 선정에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고 보인다. 러시아에서 합류한 또 다른 특사 이위종은 헐버트와 잘 아는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이다. 특사 선정을 주도한 사람은 고종과 교류가 용이했던 이회영으로 보인다. 이회영이 국제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헐버트를 중심에 놓고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8. - 고종 황제가 헐버트에게 내린 특사증
사진 9. - 고종 황제가 3특사에게 내린 특사증
사진 10. -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고종 황제의 친서(헐버트 휴대)
헐버트에게 내린 특사증과 우리나라 3특사에게 내린 특사증을 비교해보면 의미 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헐버트 특사증은 한문과 영문으로 되어 있으나 3특사 특사증은 한문으로만 되어 있다. 3특사가 중차대한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엄중함으로 볼 때 영문이 빠졌다는 사실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고종 황제가 헐버트를 통해 조약 상대국 원수에게 보내는 친서도 한문과 영문으로 작성되었다. 특사 호칭에서도 헐버트 특사증에는 헐버트를 ‘특별위원’으로 영어로는 특사를 뜻하는 ‘Special Envoy’로 부른 반면, 3특사 특사증에는 3특사를 ‘특파위원’이라 하였다. 또한, 헐버트 특사증은 서울을 ‘漢城(한성)’으로 표기하였으나, 3특사 특사증은 ‘漢陽京城(한양경성)’으로 표기하였다. 연호에 있어서도 헐버트 특사증은 ‘大韓開國(대한개국)’을, 3특사 특사증은 ‘光武(광무)’를 썼다. 두 특사증의 한자 글씨체나 문장 내용도 같은 사람이 준비했다고 볼 수 없는 차이를 느낀다. 어새 날인에 있어서도 헐버트 특사증은 ‘皇帝御璽(황제어새)’라는 글씨가 세로가 아닌 가로로 찍혔으나, 3특사 특사증은 세로로 바로 찍혔다. 더 나아가 헐버트 특사증의 어새는 영문 글씨 위에 덮여 찍혔다. 3특사 특사증에는 특별히 황제의 수결이 있다. 수결이 왜 필요할까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두 특사증이 확연히 다르게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발표자는 헐버트 특사증은 백지에 어새만 찍힌 채 궁 밖으로 전달되어 헐버트가 주도하여 내용을 적어 넣었다고 추정한다. 특사증이 거의 완벽하게 꾸며진 것을 보면 비교적 시간적 여유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특사 특사증은 수결, 글씨체, ‘京城’, 영문이 없다는 점 등에서 여러 의문을 낳게 한다. 누군가가 허겁지겁 만들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편, 주 네덜란드 대사가 본국에 보낸 1907년 7월 5일 자 기밀문서에 따르면 “《뉴욕헤럴드》 파리 판에 고종 황제가 특사파견 사건을 부인하고 한국 특사에게 내린 특사증은 조작된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보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헤이그만국평화회의 관련 일본정부 기밀문서 자료집》, 2007, 62~63쪽). 고종 황제가 일본의 추궁에 그렇게밖에 진술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특사증에 대해서는 사실상 내용을 잘 알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누가 3특사 특사증을 만들었을까? 아마도 고종 황제와의 친숙도나 개인적 성향으로 볼 때 이회영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 헤이그에서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
일본은, 만약 한국이 헤이그만국평화회의와 관련하여 무슨 일을 도모한다면 틀림없이 헐버트에게 그 일을 맡길 것으로 보고 일본은 한국인 특사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 사이에 이준이 1907년 4월 22일 무사히 서울을 빠져나가 부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북간도에서 온 이상설을 만나 5월 중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헤이그로 향했다. 헐버트는 이준보다 며칠 늦은 5월 8일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 일본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헐버트가 이준보다 늦게 서울에서 출발한 것은 이준이 서울을 무사히 빠져나가게 한 계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헐버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탈 때 특사증과 고종의 친서를 일본이 강탈할까봐 유럽에 가는 미국인 선교사 가족에게 맡겼다. 선교사 부인이 아기 옷가방에 특사증과 친서를 숨겼다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헐버트에게 돌려주었다. 일본은 헐버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자 1907년 5월 17일 외무대신 명의로 주 네덜란드 일본 대사에게 <우리의 대한 정책에 가지가지의 방해를 가하여 온 미국인 헐버트의 문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전문을 보내 헐버트의 동정을 꼼꼼히 살필 것을 지시했다. 러시아에 도착한 헐버트는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 황제 친서를 전달하고자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베를린으로 가, 《만국평화회의보》 편집장으로 활동하는 영국 언론인 스테드(William T. Stead)를 만나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협력을 요청했다. 스테드는 1899년 헐버트의 글 <한국의 세계적 발명품(Korean Inventions)>을 자신이 런던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소개한 적이 있었기에 헐버트와는 이미 아는 사이였다. 헐버트는 이어서 파리로 갔다. 일본 기밀문서에 의하면 헐버트는 파리에서 언론과 회견하며, “서구 열강이 현재의 한국 문제에 무관심한다면 언젠가 후회할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헐버트는 이어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로 갔다. 한편, 한국 특사들은 헤이그에 도착하여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27일 일본을 제외한 각국 대표들에게 대한제국의 호소문인 공고사(控告詞)를 배포했다. 영국 언론인 스테드는 이 공고사를 《만국평화회의보》에 실었으며, 이 보도는 고종의 특사 파견이 세계에 알려지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한국 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하자 네덜란드 주재 일본 대사는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1907년 7월 3일 자 기밀문서에서 “물증은 없지만 본인은 확신한다. 헐버트는 이상설, 이준과 함께 시베리아횡단열차로 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며칠 간 머물렀다. 한국인들은 헤이그로 향했고 헐버트는 외부 노출을 피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라고 보고하였다. 그는 “이 모든 일을 헐버트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It is Hulbert who is pulling string......)”라고 덧붙였다.
사진 11. – 주 네덜란드 일본 대사가 본국에 보낸 기밀문서. 헐버트가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다고 했다.
헤이그에 도착한 헐버트는 한국 특사들을 만나고, 스테드의 주선으로 7월 10일 밤 평화클럽(Peace Club)에서 연설하며 7월 9일 연설한 이위종 특사의 주장을 지원하였다. 이어서 헐버트는 미국 정부를 먼저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미국으로 떠나면서 《뉴욕헤럴드(New York Herald)》지와 회견하며, “만약 서구열강이 한국을 버려둔다면 일본의 엄청난 범죄행위는 한국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라면서 국제사회가 한국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좌절을 견디지 못한 이준 특사가 7월 14일 순국했다. 서울에서는 특사들이 헤이그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일본은 광기를 부리며 고종에게 책임을 물어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은 나라의 운명은 물론이고 고종 황제와 특사들 개인의 운명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일제는 고종을 퇴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준은 순국했고, 이상설, 이위종은 귀국할 수가 없어 국외에서 활동하다 서거했다. 헐버트 역시 일제의 위협으로 더 이상 한국에 살 수 없었다. 헐버트는 특사증을 발급한 고종 황제가 퇴위 되어 더 이상 특사 자격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일본이 고종 황제를 재빨리 퇴위시킨 것은 헐버트의 특사 자격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것이 하나의 이유이다. 헤이그 특사는 헐버트를 포함한 4인이다. 헐버트와 한국 특사가 맡았던 임무는 서로 별개가 아니다. 고종 황제라는 연출가 밑에서 각각 주어진 역할을 나눠서 수행한 것이다.
- 헐버트의 맹세: “나는 죽을 때까지 한국을 위해 싸울 것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시에 거처를 정한 헐버트는 미국에서도 특사 정신을 잃지 않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위한 투쟁의 횃불을 계속 태웠다. 헐버트는 1907년 7월 19일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미국 신문들과 잇따라 회견을 갖고 일본이 한국에서 자행하고 있는 만행을 고발하였다. 그는 《뉴욕타임스》 1907년 7월 22일 자 회견기사에서 “한국인들은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들을 말살시켜야만 한반도에서 평화를 얻을 것이다.”라며 한민족이 절대로 나라를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일깨웠다. 이어서 그는 “한국인들은 침묵을 지키다가도 계기만 마련되면 분연히 일어나 임진왜란 때처럼 그들에게 고통을 준 자들에게 게릴라전도 불사할 것이다.”라고도 했다. 헐버트는 언론사 접촉에 이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 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갔다. 이때 유럽에서 온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 때문에 아무것도 성사시킬 수 없었다. 이후 헐버트는 강연과 기고를 통해 미국 전역에서 일본의 부당성과 미국의 이기주의를 알렸다. 《포틀랜드(Portland)》지에 의하면 헐버트는 1909년 말 미국 포틀랜드의 한 교회에서의 강연에서, “나는 언제나 한국 국민을 지지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권리와 재산을 빼앗겼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대변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 내탕금을 찾아오라는 고종 황제의 밀명
헐버트는 가사 문제도 정리할 겸 1909년 8월 대서양을 건너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이 때 헐버트는 한국에 가면 일본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유서까지 남기며 심지어 리볼버 권총을 품속에 숨기고 남대문 역에 도착하였다. 헐버트가 미국을 떠나자 미국은 2명의 경호원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헐버트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헐버트는 후일에서야 알았다. 헐버트가 서울에 있는 동안 일제는 헐버트에게 직접적인 위해는 가하지 않았지만 첩자들을 붙여 헐버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헐버트는 이때 일본의 감시를 따돌리고 을사늑약 당시 참정대신이었던 한규설의 집 담을 넘어 그로부터 을사늑약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날 밤 한규설로부터 직접 들은 증언은 헐버트가 후일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과정에서 매우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 서울에 있던 어느 날 일본에 감금되어 있던 고종 황제가 비밀리에 헐버트에게 사람을 보냈다. 중국 상하이에 있는 한 독일은행에 예치한 자신의 내탕금을 찾아 달라며 고종 황제의 친필 위임장과 관련 서류를 보냈다. 고종 황제가 헐버트에게 내린 또 다른 밀명이었다. 흥분된 마음으로 헐버트는 상하이에 갔으나 예금이 이미 빠져나갔다는 말만 들었다. 헐버트는 하는 수없이 황당한 심정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예금의 향방을 추적하였다. 그는 미국 정계의 거물들과 접촉하여 결국 주독일 미국대사의 협조를 얻어 이 돈을 일본이 빼나간 사실을 확인하였다. 헐버트는 내탕금 환수를 위해 수십 년을 동분서주하였으나 일본의 위세에 눌려 내탕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1949년 서거 직전 이승만 대통령에게 내탕금에 대한 모든 서류를 넘기며 이 돈을 꼭 찾아 고종 황제의 한을 풀어드릴 것을 주문했다. 본 발표자는 이 내탕금 문제를 1989년부터 추적하여 왔다. 고종 황제가 헐버트에게 위임한 소명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현재 환수를 위한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 강탈당한 고종황제 내탕금을 꼭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아 한민족의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세계만방에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곧 고종 황제와 헐버트의 한을 풀어드리는 일이기도 하다.
. 사진 12. – 고종 황제가 내탕금을 찾아오라고 헐버트에게 내린 위임장
- 루스벨트 대통령을 굴복시키다
헐버트는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의 주권상실과 관련하여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10년을 넘게 끈질기고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일전을 벌였다. 헐버트가 루스벨트에게 이렇게 세차게 도전한 까닭은 을사늑약 당시 루스벨트 행정부가 조미수호통상조약 정신을 저버리고 친일정책을 편 것이 한국이 나라를 잃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는 생각이 항상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가 1915년 당시 현직 대통령인 윌슨(Woodrow Wilson)에게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대해 미국이 제대로 항의하지 못한다고 언론을 통해 맹비난했다. 헐버트는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 1915년 12월 8일 자에 <루스벨트와 한국(Roosevelt and Korea)>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면서 고종 황제의 호소를 외면한 루스벨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루스벨트는 정식으로 조약을 맺은 친구의 나라 한국을 배신한 사람이며, 그의 친일정책은 결국 미국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기고문은 미국 상원 ‘의회기록’에 남겨졌다. 이에 대해 루스벨트는 헐버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한국이 주권을 빼앗긴 것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헐버트는 이러한 루스벨트의 성명서에 대응하여 《뉴욕타임스》 1916년 3월 3일 자 기고를 통해 을사늑약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면서 루스벨트 행정부의 친일정책을 조목조목 추궁하였다. 글 말미에서 헐버트는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5년 자신이 가지고 간 고종 황제 친서 수령을 왜 이틀이나 시간을 끌면서 거절했는지 그 진짜 이유를 미국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9년에 사망한 루스벨트는 사망 직전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강점에 대해 1905년 9월 포츠머스회담에서 내가 일본에 동의하였다.”라는 메모를 가족에게 남김으로써 루스벨트 스스로 일본의 한국 강점에 동의했음을 시인했다. 세계에서 그 어느 누가 자기 나라 대통령을 비난하면서 남의 나라를 위해 이토록 장대한 싸움을 벌일 수 있겠는가? 숭고한 한국 사랑과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헐버트의 을사늑약에 대한 미국의 책임론 제기는 우리 역사상 최초이며, 이때의 헐버트의 논리는 후일 이승만 등 한국인들에 의해 여러 국제회의에서 활용되었다.
사진 13. – 헐버트 기고문 <루스벨트와 한국>(1915년 12월 8일 자)
- 3·1혁명 직후 미국 의회에 독립호소문을 제출하여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
헐버트는 YMCA 강의 요원으로 연합군 부대에서 강연하기 위해 1918년 프랑스로 갔다. 헐버트는 강연 활동을 마치고 파리로 가 파리강화회의 임시정부 대표로 와 있던 김규식만 만났다. 서울에서부터 친숙했던 두 사람은 강화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7월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헐버트는 3·1혁명 직후인 1919년 8월 <한국을 어찌 할 것입니까(What about Korea)?>라는 제목의 독립호소문을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제출하면서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 독립호소문은 1919년 8월 18일 자로 미국 의회기록에 남겨졌으며, 미국 상·하 양원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결의안이 채택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헐버트는 이 독립호소문을 위해 1919년 8월 15일 자신의 진술에 대해 서약을 하며 공증까지 받았다. 헐버트는 일본이 한국에서 자행한 잔학 행위 10가지의 사례를 폭로하며, 일본의 잔학상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도 담았다. 《뉴욕타임스》는 1919년 8월 17일 자 <헐버트, 일본의 한국에서의 광란을 고발>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헐버트의 독립호소문 제출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헐버트는 이승만이 1942년 미국의 저명인사들과 함께 조직한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에서 활동하며 미국 정부에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또 1942년 이승만이 3·1혁명을 기념하여 워싱턴에서 개최한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에서 <한국의 자유(Korean Liberty)>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며 “고종 황제는 휜 적은 있으나 부러진 적은 없다.”고 증언하였다.
10.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헐버트는 “한국의 해방은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한국이 38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자 헐버트는 깊은 실의와 슬픔에 빠졌다. 그러던 중 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1948년 광복절을 맞아 헐버트가 광복절 단상에 있어야 한다며 초청장을 보내왔다. 그러나 헐버트는 암으로 투병 중인 부인의 간호 때문에 한국에 갈 수가 없었다. 그해 겨울 헐버트 부인이 서거하자 이승만은 1949년 8월 15일 광복절에 헐버트를 다시 국빈으로 초청하였다. 86살의 헐버트는 몸은 노쇠했지만 한국에 간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4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는 감회를 묻는 AP통신 기자에게 헐버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Westminster Abbey).”라고 감동의 소회를 밝히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미 군용선을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1949년 7월 29일 헐버트 인천항에 도착한 헐버트는 부축을 받으며 겨우 배 밖으로 나왔다. 그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서울에 도착했으나 호텔에 여장을 풀지도 못한 채 청량리 위생병원에 몸을 위탁했다. 헐버트가 서울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옛 지인들과 제자들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이승만은 물론 이시영 부통령도 다녀갔다. 동아일보에 의하면 죽음을 눈앞에 둔 헐버트는 이준 열사의 가족을 만나기를 청하여 이준 열사의 딸이 병원을 찾았다. 헐버트가 1949년 8월 5일 서거하자 동아일보는 ‘우리는 은인을 잃었다. 아니 애국자를 잃었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헐버트의 서거를 추모하며 “삼천만이 통곡한다.”라고 썼다. 헐버트의 영결식은 사회장으로 1949년 8월 11일 부민관에서 장엄하게 치러졌다. 영결식에 이어 헐버트는 젊은 시절 즐겨 찾았던 마포나루 한강변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맺음말
외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들은 독립운동을 해야 할 의무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나라이니 당연히 조국을 되찾는 노력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굳이 한국을 도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헐버트 같은 경우는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며 한국을 도왔다. 그들은 또 어느 면에서 한국인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대신 해주었다. 당시로서는 국제무대에서 일본을 고발한다는 것은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일 뿐더러 결코 한국인이 해내기 힘든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천사 석탑 반환도 외국인이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헐버트의 독립운동은 국제적으로 일본을 곤경에 빠뜨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 일본이 한국인보다 더 두려워 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물론 한국인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을 제대로 평가해주고 그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보내고 있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 아닌가. 교과서는 물론 언론에서도 외국인들의 공적은 올바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독립운동사를 논함에 있어 외국인들의 역할을 그저 이방인의 행적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정의와 인간애의 발로로 한국을 도운 외국인들의 업적을 우리 역사에 올바로 자리매김하여 후세에 올바로 전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민족은 국제사회에서 예를 아는 선진문화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 그들을 내국인과 같은 잣대로 공적을 평가하고 똑같은 예우를 해야 한다. 헐버트는 1950년 3월 1일 태극장(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훈 기록에는 ‘헤이그밀사파견 협조’라는 한 줄만이 공적으로 적혀 있다. 심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등급이 결정된 것이다. 정부수립 초기의 혼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나 지금이라도 그에게 공정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 현재 내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서훈 훈격에 따라 보훈 연금을 받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 독립운동가 후손은 연금 수혜대상이 아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서 내국인 후손에게는 연금을 주고, 외국인 후손에게는 서훈만 하고 연금은 안 주는 것이 옳은 처사인가? 깊이 성찰해봐야 할 문제이다.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념사업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내세우면 그들의 출신 국가들과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도 될 수 있다.
김동진,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외국인 독립운동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 헐버트를 중심으로.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