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의 낙하 - 「번지점프를 하다」
◘ 폭염의 칠월에
요즘 감성이 무뎌져 매사가 시큰둥하니 역시 나이는 거역할 수 없는 순리인 모양이다. 몇 달이 지나도록 카페에 글 한 자 못 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2학기에 ‘한국인의 심성’이란 수업이 있어 해당 주제를 영화로 한 번 추적해 볼까 싶어, 근자에 괜찮다는 한국영화를 여남은 편 보았다. 하지만 크게 동하는 작품은 없었다. 목록선정을 잘못한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역시 세월 탓에 이 시대의 감성을 따라갈 수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한 자 쓸 만한 영화를 생각해 보니,「번지점프를 하다」라는 게 떠오른다. 전에도 인터넷에서 제목은 여러 차례 접했지만,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 그냥 넘어갔던 영화다. 스포츠 영화도 아닌데 무슨 번지점프는! 다 보고 난 지금도 여전히 제목 선정이 그리 잘 된 것 같지는 않지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못할 것도 없겠다. 마지막에 한 번 시도해 보겠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80년대 대학가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서사라 우리 동문들에게도 어필하는 바가 없지 않을 것 같다.
◘ 비 내리던 날에
때는 1983년 여름날, 어느 대학가 거리에 소나기가 쏟아진다. 우산을 쓰고 하교하는 인우의 우산 밑으로 한 여학생이 뛰어든다. “저기 버스 정류장까지만 씌워줄래요?” 얼떨결에 인우는 낯선 여학생과 우산을 쓰고 정류장까지 걸어간다. 어깻죽지는 젖어드는데 오가는 말이 없다. 버스가 오고 책을 안은 여학생은 버스 안으로 사라진다. 몽롱한 눈빛으로 버스의 뒷모습을 쫓는 인우는 그게 현실이었음을 깨닫는다. 도대체 그녀는 누구인가? 대학생 같은데, 이름도 학교도 물어보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려 그럴 경황도 없었다. 그렇게 인우의 백일몽이 시작된다. 그 이후 인우는 날씨가 조금만 흐려도 우산을 들고 그 정류장을 서성거린다. 하지만 발차한 버스의 꽁무니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만큼이나 허망한 일이다.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친구들에게 바보라 놀림을 받을 만큼 순정무구한 남자, 그의 가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온다.
주인공 서인우(이병헌), 1983년 현재 국문과 2학년 2학기 재학 중. 시작도 못해본 사랑인데, 인우는 무슨 큰 실연을 당한 것처럼 청춘의 생기를 잃고 도피입대를 생각한다. 바로 그때, 캠퍼스 한 모퉁이에서 운명처럼 그녀가 등장한다. 추적해 보니 같은 학교 조소과 2학년, 이름은 인태희(알고 보니 몇 년 전에 자살한 이은주).
이날 이후 인우는 수업도 빼먹고 조소과 주변을 맴돈다. 그러나 태희는 본체만체 무심 모드다. 역시 운명이 도와야 될 모양이다. 어느 날 인우는 태희가 혼자 석고상을 들고 캠퍼스를 걸어가는 것을 보고 무작정 그 앞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역시 거기까지, 숫기 없어 말 한 마디 내뱉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태희의 운동화 끈이 풀린 것을 보고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발 앞에 엎드려 끈을 맨다. 예수의 신들매를 매는 요한처럼 감읍하는 모습이 처량할 지경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까워지는데, 세속에서 일러 말하는 풋풋한 첫 사랑이 시작된다.
시간이 흐르면 드라마의 위기국면이자 제목의 근거를 추정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날 인우와 태희는 등산을 간다. 산 정상의 높은 절벽에서 두 팔을 벌린 태희가 뜬금없이 말한다. 뉴질랜드에 가면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도 거기 가서 뛰어내리고 싶다고. 그러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거라는 멘트와 함께. 여기에 번지점프라는 주제어가 암시되는데, 사실 그렇게 논리적인 복선은 아닌 것 같다.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왜 굳이 낙하인지? 그것도 왜 뉴질랜드에서? 최소한 영화 내에서는 이게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튼 두 사람의 80년대 식 순정한 사랑이 이어진다.
남자가 얼마나 순진순정한지 ‘여관 에피소드’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어느 비오는 날 두 사람은 어렵사리 여관을 가기로 결정하는데, 인우는 동네 여관을 다 지나며 차마 문을 밀고 들어가지 못한다. 보다 못한 태희가 앞장서 여관 문을 치고 들어간다. 잔뜩 겁을 먹은 인우가 강아지처럼 뒤따라 들어가고. 여관방에서도 인우는 태희에게 손가락 하나 못 대고 벽에 기대어 딸꾹질만 해대고 있다. 결국 태희가 달려들어 자빠뜨리고 나서야 거사가 이루어진다.
이후 두 사람의 연애는 자타가 공인하는 안정권에 돌입한다. 문제는 한국 연애사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듯, 인우의 입대 날이 다가 온다. 입대하는 날 태희는 훈련소까지 같이 가겠다며 용산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영화답게 이 중요한 만남이 성사되지 못한다. 무슨 이유인지 태희는 밤이 깊도록 용산역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입대는 국가의 명령, 인우는 홀로 군대엘 가고 두 사람은 그 이후로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한다. 도대체 태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 이상한 재회
세월이 흘러 2000년, 화면에 등장하는 인우는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고등하교 국어교사의 신분이다. 정숙한 아내에 세 살 먹은 딸아이까지 거느린 건실한 가장이 되어 있다. 물론 아내가 태희는 아니다. 해가 바뀌어 어떤 반의 담임이 되는데, 영화의 핵심 사건은 여기서 발생한다. 호기심에 찬 학생들 앞에서 인우는 ‘인연’을 화두로 학생들에게 다가간다.
“이 지구 어느 곳에 바늘 하나를 꼽는다고 치자. 그리고 저 우주 어디에서 밀알 하나가 떨어진다. 그 밀알이 바늘 끝에 떨어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리의 만남이 그렇다. 지구상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이 시간 이 곳에서 선생과 학생으로 만난다는 게 그러한 확률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잘 지내자.”
이렇듯 인우는 자타가 인정하는 모범 교사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자기 반의 한 아이에게 대책 없이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임현빈, 고등하고 2학년이니 17살, 나이 차이도 적지 않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이 쏠리는데, 급기야 스킨십까지 들어간다. 운동회 때는 굳이 현빈이랑 2인3각 달리기를 하는가 하면 격려한다는 핑계로 수시로 그의 등을 쓰다듬고 볼을 만진다. 그것은 선생이 제자에게 하는 손짓이 아니다. 억제하기 힘든 욕망의 눈빛이 동반된다. 리비도. 그때까지 그것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현빈은 선생의 특별한 관심으로 여기며 뿌듯해 한다. 그때는 그러한 정도보다 좀 더 특별한 감정이 자신에게도 내재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곧 인우의 행동은 다른 학생들의 혐의를 산다. 얼마 안 있어 인우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학교에 쫙 퍼진다. 현빈은 미모의 여친에게 강력한 항의를 받지만 아니라고 강변한다. 문제는 그러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인우가 달라지기는커녕 더욱 내밀하게 다가온다는 데 있다. 모든 걸 각오한 모양이다. 현빈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거리를 둔다. 인우의 아내도 상황을 파악하고 정신과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게 한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이성애자란 진단이 나온다. 그러나 더 이상 정상적인 부부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침내 학생들이 인우의 수업을 보이콧하고 인우는 교장실로 불려간다. 모든 걸 예상한 듯 인우는 해임을 그 자리에서 수용한다. 짐을 싸 들고 학교를 떠나는 그를 배웅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언젠가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해준 문제아 학생 한 명이 먼발치에서 안타까운 작별 인사를 해 왔다. 그러나 거기까지.
인우가 쓸쓸히 돌아가는 곳은 집이 아니다. 용산역이다. 17년 전 입대할 때, 태희와 만나기로 한 장소이다. 그러니까 인우에게 현빈은 태희의 환생이었던 것이다. 비록 남자이지만 취미(미술), 행동, 이미지 등이 태희와 너무나 닮았었다. 갖고 있는 라이터도 똑 같다. 인우는 현빈에게서 제자를 본 것이 아니라 연인 태희를 본 것이다. 심지어 자기도 모르게 현빈을 태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지지만 태희는 17년 전 인우를 만나러 용산역으로 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한 맺힌 별리, 결국 현빈으로 다시 태어나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 끝없는 나락으로
학교에서 해임을 당한 인우는 용산역 벤치에 하염없이 앉아 있다. 의식은 17년 전 입대하던 때로 돌아가 있다. 얼마를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태희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인우: 왔구나.
태희: 미안해. 너무 늦었지.
인우: 늦게라도 와줘서 고마워.
물론 태희가 아니다. 현빈이다. 현빈이 왜? 현빈도 그 사이 자신이 태희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니, 자신이 태희라고 믿고 있다. 저간에 일어났던 인우에 대한 독특한 감정이 단순히 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아니었다는 걸 안 것이다. 두 사람은 마치 유체이탈하듯 한 순간에 현실을 이탈한다. 인우는 30대 말의 가장이라는 현실을 벗어나고, 현빈은 목매는 여친이 있는 멋쟁이 ‘고딩’이라는 현실을 포기한다. 짧지만 밀도 있는 데이트가 이어지고,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로 향한다. 둘 다 가방 하나 없는 빈 몸이다.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난 것처럼 유쾌한 여행을 떠난다. 차창으로 광활한 벌판을 내다보며 번지 점프하는 장소로 간다. 까마득히 높은 다리. 예전에 인우와 산꼭대기에 올라간 태희가 뉴질랜드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다고 한 말이 실현될 모양이다. 다리 밑은 바닥이 잘 안 보일만큼 깊은 나락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아래로 몸을 던진다. 낙하 중에 두 사람이 대화한다.
현빈: 이번엔 여자로 태어나야지(태희 목소리).
인우: 근데 나도 여자로 태어나면 어쩌지?
현빈: 또 사랑해야죠. 하하하.
이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인우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결국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지녔기 때문이라죠.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해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 감성의 복고, 복고적 감성
근자에 영화나 드라마는 사랑의 순수함을 말하기 위해 혹은 순수한 사랑을 말하기 위해 20년, 내지 30년은 과거로 내려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스토리라는 게 대체로 과거동사를 쓰게 되어있으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유독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중반이 많은 이유는 뭘까? 아마도 스토리를 생산해내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당시에 청춘을 보낸 층이고 거기에 호응하는 수용자들 역시 같은 경우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 역시 그 시대의 흔적이 나오면 민감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기실 역사적으로도 소위 386세대가 겪은 일들은 파고가 좀 높았던 것이 사실이지 않는가.
인우와 태희의 러브스토리의 특징은 대부분의 한국 러브스토리가 그러하듯 우연과 운명이라는 동종이명의 문학적 기제에 있다. 만남·갈등·파국·재회 같은 중요한 사건들이 우연히 일어나지만 알고 보면 모두 운명이었다는 식이다. 이 우연을 운명적으로 만들어주는 주는 장치가 하나 있으니 바로 레인, 비다. 언급한 것처럼 영화 첫 장면부터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가 태희가 인우에게 접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젊은 여자가 우산 좀 씌워달라는데 거부할 남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그게 이상형의 여자라면 누구라도 인연이란 단어가 입가에 맴도는 것을 내치기 어려울 것이다. 이후 인우가 저 검은 우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비의 중매로 만난 두 사람의 위기도 비오는 날 발생한다. 그러니까 그해 늦가을, 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지는 어느 저녁이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나 두 사람은 길에서 심하게 다툰다. 태희는 인우가 씌워주는 우산을 앙칼지게 내치고 혼자 집에 가겠다고 한다. 덩달아 화가 난 인후는 우산을 공중전화 박스에 대고 내리친다. 찌그러진 우산을 내팽개치고 자리를 떠나간다. 그런데 태희는 몇 발자국 떼놓지 못하고 망부석처럼 멈춰 선다. 비는 더욱 거세게 쏟아지지만. 한참 뒤에 인우가 달려온다. “니가 여기 있으면 니가 하라는 대로 다 한다”고 결심하고 달려왔다. “니가 돌아오면 니가 하라는 대로 다한다”고 결심하고 기다렸다. “너랑 자고 싶어.” “나도.”
인우는 찌그러진 우산을 다시 주워 고치고, 두 사람은 여관을 찾아들어간다. 언급한대로 태희가 훨씬 적극적이다. 문지방을 넘는 게 어렵지 일단 넘은 뒤에는 이판사판 달려드는 것은 여자 쪽이다. 비온 뒤의 땅이 더 굳어지는 법, 비는 이래저래 미덕이 많다. 하지만 한 번 찌그러진 우산이 온전히 복원이 될까? 한 번 어긋난 사랑은?
◘ 그리 불편하지는 않는 동성애 코드
30대 말의 선생과 고등학교 2학년의 야릇한 관계. 그것도 男 대 男, 이게 한국 관객들에게 그리 불편하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당시 보도를 보면 「번지점프를 하다」의 관객 수가 적지 않았고(약 100만)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 괜찮은 상도 여럿 받은 걸로 되어있다. 최소한 국내에서는 동성애 주제만으로 그런 호응을 얻는 건 불가능하다. 이성애라고 해도 여고생과 30대 말 유부남과의 사랑은 한국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설정이다. 그런데 저런 파격이 왜 상쇄되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채색되었을까? 결국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한 강도 높은 이상주의로 나아갔기 때문에 동성애나 나이 차이 같은 것은 지엽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렸다.
17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애인을 잊지 못해 그와 닮은 소년에게 빠져든다고 하니, 일탈이나 불륜의 이미지보다는 식지 않는 첫사랑의 강도에 방점이 찍혀버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생에 이루지 못한 사랑의 파트너를 만났으니, 그게 선생이든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이든 상관할 바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게 운명이고 섭리라는데 어쩌겠나. 불교의 윤회 개념이 작동하고 있지만 한국인들의 못 말리는 순정주의는 어쩔 수 없다. 역설적으로, 현대의 가볍고 인스턴트화된 사랑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도 있다. 마지막에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뿐'이라는 멘트를 노골적으로 띄우는 것으 봐도 알만하다. 순정주의의 특징은 과거 지향적이고 서정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에 대한 고전적 관념이 어느 정도 작동하던 80년대를 소급해 온 것은 이해할만하다.
◘ 번지 점프의 은유
문제는 인우와 현빈의 사랑이 꼭 동반자살이라는 파국으로 끝나야했는가 하는 점이다. 달리 출구가 없었을까? 물론 17살 소년과 30대 말의 남자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 같지는 않다. 최근에 김조광수(48)란 영화감독이 19세 연하의 젊은 남자와 동성결혼을 해 큰 뉴스가 된 바도 있다. 한국사회도 많이 바뀌어 여론도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인우와 현빈의 자살은 자살의 불가피성을 따지기보다는 자살의 방식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번지 점핑, 이게 두 사람이 자살한 방식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번지 점프는 아니다. 줄을 매고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맨몸으로 뛰어내린 것이니 일종의 투신자살이다. 투신 할 곳은 한국에도 많을 텐데 왜 하필 뉴질랜드까지 가서 투신했을까? 「번지점프를 하다」가 개봉되고 한참 뒤의 일이지만 어느 전직 대통령은 바위에서 투신하여 괴로운 인생을 간단히 마감한 바도 있지 않나. 결국 bungee jumping이란 말에서 비밀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오늘날 어느 정도 일반화되어 있는 번지 점핑은 일종의 스포츠로 몸에 고무밧줄을 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액션이다. 로제 카이의 놀이 분류법에 의하면 'Ilinx', 즉 전율을 체험케 하는 최상의 놀이라 할 수 있다. 이게 놀이로 시작된 것은 1979년 옥스퍼드 대학의 모험스포츠회원 4명이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에서 뛰어내리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그 후 뉴질랜드의 해킷이란 사람이 프랑스의 에펠탑(110)에서 뛰어내린 것이 세계 매스컴의 관심을 타면서 레저스포츠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점프 사건이 해명되지는 않는다. 인류학적인 고찰이 좀 필요하다.
원래 번지 점프는 남태평양에 있는 바누아투란 섬의 주민들이 봄에 행하는 성인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성인이 되는 젊은이들이 높은 나무에 올라가 덩굴 식물인 '번지bungee'를 엮어 다리에 묶고 뛰어내린다고 한다. 담력을 테스트하기도 하지만 성인으로 재탄생하는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이 낙하는 비행의 체험으로 새 새끼가 둥지를 떠나 비상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비상의 은유로서 낙하, 좀 더 은유화하면 부활을 위한 죽음이라 하겠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더 나은 후생을 앞당기기 위해 현생을 조기에 종결하는 살신환생의 의식이다. 물론 불도들이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불교적 개념을 문학적으로 변형해 본 것이다. 독일의 여류시인 바흐만은 「유희는 끝났다 Das Spiel ist aus.」라는 시에서 "낙하하는 자는 모두 날개가 있다 Jeder, der fällt, hat Flügel."라고 썼다. 이게 이문열로 인해 한국에서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낙하의 환희는 춤에서도 어느 정도 체험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는 것이 바로 왈츠를 추는 장면이다. 즉, 태희와 인우가 노을 지는 해변에서(태안 갈음이 해수욕장)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맞춰 왈츠를 추는데 한국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이국적인 장면이다. 번지점프의 원조가 되는 바누아투 섬은 뉴질랜드에서 가까운 곳에 있고 스포츠화된 번지점프를 가장 멋있게 할 수 있는 곳도 뉴질랜드라고 한다. 영화 초반에 태희가 뉴질랜드에 가 점프를 하고 싶다고 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마지막에 인우와 현빈의 뉴질랜드 행도 이런 배경에 연계되어 있다. 한국의 순정한 러브스토리가 비교적 익숙한 미국이나 유럽의 어느 나라가 아니라 뉴질랜드와 연계되는 데서 명실상부한 문화적 글로벌화를 실감할 수 있다.
처음의 내 관심사로 돌아가면 이런 질문이 남는다. 이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전형적인 한국인의 심성을 잡아낼 수 있을까? 있다면 그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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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 김병헌이 아니고 이병헌~~
앗, 남의 성을 갈아치우다니!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보아도 들어도 입력이 잘 안 되니,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 당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