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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청아카데미 73주(2011.4.6),
노자 도덕경 1장 해설
이태호(한국과정사상연구소 연구원)
Ⅰ 해석의 다양함과 어려움
노자 도덕경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렵고 다양하다. 어려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책이 완성본으로 전해져 오지 않고 여러 본으로 전해져 왔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형식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같은 本이라 해도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을 두고 많은 해설서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용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인 부분으로서 몇 가지 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B.C. 168년으로 추정되는 한묘(漢墓)에서 발견된 백서(帛書)1)의 갑본(甲本)과 을본(乙本)이 그것이다. 갑본은 소전체(小篆體)2)로 쓰여졌고, 을본은 예서체(隸書體)3)로 쓰여졌다. 이들 백서의 제목은 모두 『德道經』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B.C. 300년경으로 추정되는 죽간본이 초묘(楚墓)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은 곽점초묘죽간(郭店楚墓竹簡)으로 불린다.4) 이 간본(簡本)에는 갑, 을, 병 3본의 각각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적인 부분에서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그 중 하나는 A.D. 244년에 천재 소년이었던 왕필(王弼, 226-249)이 해설한 왕필본이다. 이 책명은 『노자도덕경주』(老子道德經注)이다. 그리고 하상공(河上公, B.C. 180-157 漢文帝의 在任期間 또는 A.D. 460년경)의 『도덕진경주(道德眞經注)』이다. 왕필본과 하상공본은 전체 8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본 모두 도덕경을 상편(앞의 37장)과 하편(뒤의 44장)으로 구분하였다. 하상공본에는 앞의 37장을 도경(道經)이라 하고, 뒤의 44장을 덕경(德經)이라 하였으며, 각 장마다 장명(章名)이 붙어 있다.
Ⅱ 도덕경의 여러 번역들
1) 진양(眞陽)의 번역 : 『도덕경』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故常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徼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오. 이름을 붙인다면 진정한 이름이 될 수 없다. 이름이 없음은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의 것이라 그렇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을 낳은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념․무상의 상태가 될 때 그 묘한 절대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유념․유상의 상태일 때 그 차별함이 생기게 된다. 절대세계와 상대세계는 영구불변한 도에서 나왔으나 그 이름을 달리 하니 이것을 한가지로 말할 때 현(玄)이라 한다. 이 현하고 현한 것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만물이 나왔다.
2) 정달현의 번역 : 『노자』
道可道, 非常道 ; 名可名, 非常名. 無, 名天地之始 ; 有, 名萬物之母. 故常無, 欲以觀其妙 ; 常有, 欲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道)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영원불변의 도는 아니다. 이름(名)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도와 불려질 수 있는 이름은 구체적인 것을 가리키므로 영원한 것이 아니다.]
무(無)는 천지의 시초를 가리키는 것이고, 유(有)는 모든 것의 어미를 가리키는 것이다. [무라는 명칭은 천지의 시초를 가리키는 것이고, 유라는 명칭은 모든 것의 기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항상 무에서 도의 오묘함을 보고자 하고, 항상 유에서 도의 단서를 보고자 한다. 이 두 가지는 다 같은 근원에서 나왔지만 명칭이 서로 다르며, 모두가 심오하다고 할 수 있다. 심오하고도 심오함의 문이며, 오묘하고도 오묘함의 문이다.
3) 도올 김용옥의 번역 : 『노자와 21세기』
道可道, 非常道 ;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고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물타고 한다. 가물고 또 가물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4) 이경숙의 번역 : 『노자를 웃긴 남자』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는 그 이름을)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름으로 (어떤 것의) 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 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도의 이전)에는 (천지지시의) 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 묘함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후(도의 이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으니라. 이 두 가지는 똑 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도 이전의 세계와 도 이후의 세계가) 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5) 김학목의 번역 :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❶ 道可道, 非常道. ❷ 名可名, 非常名. ❸ 無名天地之始. ❹ 有名萬物之母.
故
❸ 常無欲以觀其妙. ❹ 常有欲以觀其徼. ❷ 此兩者同出而異名. ❶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어떻게 표현하든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常道)가 아니고, 어떻게 명명하든지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常名)이 아니다. 이름 없음이 만물(天地)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항상 ‘어떤 것의 하고자 하는 것이 없음’[無欲]에서는 그것으로 ‘사물이 시작되는 미묘함’[妙]을 살펴서 헤아리고, 항상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음’[有欲]에서는 그것으로 ‘사물이 되돌아가서 끝나게 되는 종결점’[徼]을 살펴서 헤아린다. 위의 두 가지는 나온 곳은 같은데 (시작은 어미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이름을 다르게 붙였으니, (둘을) 하나로 합쳐서 그것을 ‘아득함’이라고 이른다. 그러니 아득하고 또 아득함은 온갖 미묘한 것들이 나오는 문이다.
Ⅲ 화이트헤드적 시각에서 본 노자 도덕경
1) 구체자와 보편자의 구별
화이트헤드는 그의 대표작 『과정(過程)과 실재(實在)』Process and Reality에서 <구체자(具體者)로 전도(顚倒)된 오류(誤謬)>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를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에 포착된 사물이나 사건은 사물이나 사건 자체가 아니라 개념이며 명제이다. 이 개념과 명제는 추상(抽象, abstraction)된 보편자로서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고 실재세계(實在世界, Real world)에 구체자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들뿐만 아니라 많은 철학자들조차 그 보편자가 구체적으로 실재한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화이트헤드는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런 이유가 움직이지 않는 것 즉 부동(不動)의 것을 근원적으로 보는 사고 때문이며, 사물이나 사건이 변해가고 있는 과정(過程)이 실재(實在)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과정이 실재라는 이 점을 노자는 분명히 알고 있으며, 그것을 명쾌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노자 도덕경이다. 특히 자신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출발해야한다는 점을 1장에서 밝히고 있다.
2) 화이트헤드적 시각에서 본 노자 도덕경 1장 해설
위에서 언급한 노자 도덕경 해설 중에 노자 도덕경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이후에도 계속 도덕경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김학목의 글을 기본 텍스트로 참조하면서 비판적으로 수용하겠다.
❶ 道可道, 非常道. ❷ 名可名, 非常名. ❸ 無名天地之始. ❹ 有名萬物之母.
故
❸ 常無欲以觀其妙. ❹ 常有欲以觀其徼. ❷ 此兩者同出而異名. ❶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어떻게 표현하든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항상된 도(常道)가 아니고, 어떻게 명명하든지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이름은 ’항상된 이름(常名)이 아니다. 이름 없음이 만물(天地)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항상 ‘어떤 것의 하고자 하는 것이 없음’[無欲]에서는 그것으로 ‘사물이 시작되는 미묘함’[妙]을 살펴서 헤아리고, 항상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음’[有欲]에서는 그것으로 ‘사물이 되돌아가서 끝나게 되는 종결점’[徼]을 살펴서 헤아린다. 위의 두 가지는 나온 곳은 같은데 (시작은 어미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이름을 다르게 붙였으니, (둘을) 하나로 합쳐서 그것을 ‘아득함’이라고 이른다. 그러니 아득하고 또 아득함은 온갖 미묘한 것들이 나오는 문이다.
❶ 道可道, 非常道.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道라 할 수 있는 道”는 우리 머리 속에 있는 관념인 보편자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실재(實在)의 도가 아니다. 실재의 도는 항상 변화해 가고 있다. 변화의 과정(過程)을 겪는 그 道가 머리에 포착되는 순간 정지해 버린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도 자체는 고정되면서 죽어버린다.
❷ 名可名, 非常名.
우리는 그 고정되면서 죽은 관념에 이름을 붙인다. 다르게 말해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이 지니고 있는 많은 부분을 떼어내고 본래적인 속성5)만 추출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것을 추상(抽象)작업이라고 한다. 노자는 우주의 근원인 도가 끝없이 움직여 가는 그 자체인데도 혹시 이름에 매일까하여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이름이 지칭하는 그 자체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❸ 無名天地之始.
이름 없는 것이 실재이며 이것이 세계의 시작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의식에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식에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관념으로 사물들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경 25장에 유물혼성, 선천지생(有物混成, 先天地生)이라는 구절이 있다. 천지보다 앞서 생겼는데 사물이 혼돈되게 섞여 있다는 것이다.
❹ 有名萬物之母
이름 있는 것은 의식에 선명하게 떠올랐다는 것이다. 의식에 선명하게 떠올랐다는 것은 관념으로 사물들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사물들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면서 만물의 구별이 되기 시작했으므로 만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일러 만물의 어미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❸ 常無欲以觀其妙.
항상 구별하고자 함이 없어야 혹은 이름 붙이고자 하지 않아야, 그 사물 자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물 자체는 머리에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묘(妙)함으로 남아 있겠지만 말이다.
❹ 常有欲以觀其徼.
항상 구별하고자 함이 있어야 혹은 이름 붙이고자 해야 그 사물의 본성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때 떠올린 사물이 사물자체와 거리가 있어 오해하기 쉽겠지만 말이다.
❷ 此兩者同出而異名.
이름이 있거나 없거나, 선명하게 구별되거나 구별되지 않거나 관계없이 이 둘은 동일한 것(自然 : 있는 그대로)으로 이름을 붙이고 붙이지 않고의 차이뿐이다.
❶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이름을 붙여도 오해하기 쉽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이해하기 힘든 깊고 깊은 것이 도이니 이름에 매이지 않는데서 출발해야 이 책을 읽어가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난문을 통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