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교와 시오니즘 그리고 기독교
기독교는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러 야만인들에게 전달되었으며, 그때까지 세 가지 요소를 구비하게 되었다. 첫째는 철학적 요소이다. 이것은 주로 플라톤과 신 플라톤 학파에서 도입하고, 부분적으로는 스토아학파에서 도입한 것이다. 둘째 요소는 유태인에게서 나온 도덕과 역사에 관한 개념이며, 세째 요소는 기독교의 고유한 몇 가지 교리로, 그 중에서도 특히 구원에 관계된 교리이다. 그러나 이것도 일부는 오르페우스 종교나 근동의 그와 유사한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독교의 유태교적인 요소(요소)를 들어보자.
1.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신성한 역사--이 역사는 신이 인간에게 행한 것 모두가 정당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2. 신이 특히 사랑하는 소수의 백성이 있다는 것--유태인들에게는 이 소수의 백성은 선민이고, 기독교인에게는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3. 의에 대한 새로운 개념--예를 들면 구원의 덕은 후기 유태교에서 기독교에 도입되었다. 세례를 중요시하게 된 것은 오르페우스주의나 또는 동방의 이교인 신비종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천면에서 박애주의가 기독교인이 숭상한 덕의 한 요소가 된 것은 유태인에 게서 비롯된 것이다.
4. 율법-기독교인은 히브리 율법의 일부를 지켜왔다. 예컨대 십계명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히브리 율법 중에서 형식적이고, 또 의식적인 부분은 버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은 사도신경에 대하여, 유태인들이 율법에 대해 지니고 있던 감정을 그대로 갖고 있 었다. 이것은 올바른 신앙을 가지는 것은 도덕적인 행위와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가진다는 사상 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상은 본질상 그리스 적이다. 유태인 고유의 사상은 이 점에 있어서는 선민의 배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5. 메시아--유태인은, 메시아는 지상에 번영을 가져오고 또한 그들의 원수에 대한 승리를 가져 다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 메시아는 보다 후일에 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 러나 기독교인들이 바라던 메시아는 바로 역사적인 예수였다. 이 예수는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와 동일하게 간주되었다. 그리고 메시아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원수를 이 지 상에서 갚게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서 갚아 승리를 거두게 하는 것이었다.
6. 천국--저 세상에 대한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태인과 기독교인이 후기 플라톤 주의자들과 공통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리스 철학자들보다 유태인이나 기독교인이 더 구체 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 사상은 기독교 철학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일반 기독교인에게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리스 사상에서는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감관계는 일종의 환각에 지나지 않으며, 지적이고, 도덕적인 훈련을 쌓아야만 인간은 비로소 영원한 세 계에 사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원한 세계만이 실재하는 것이다. 한편 유태 교와 기독교의 교리는, 저 세상과 이 세상은 형이상학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오직 덕망 이 있는 사람은 저 세상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으며, 부덕한 사람은 영원한 고초를 면치 못한다 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복수심리를 나타내며, 누구나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자들의 학설은 그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위에서와 같은 여러 가지 신앙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유태인의 몇몇 역사적인 사실들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제 그 역사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이스라엘 민족 초기의 역사는, 구약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어디까지가 전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다. 다윗이나 솔로몬을 역사상 실재한 임금으로 간주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확실하다고 인정되는 가장 오래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거기에 이미 이스라엘과 유태의 두 왕국이 있었다. 성경 외의 다른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구약이 기록되어 있는 첫 인물은 이스라엘의 아합(Ahab)왕이다. B.C. 853년 앗시리아의 문서에 아합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앗시리아인들은 마침내 B.C. 722년에 이웃에 있는 다른 왕국들을 정복하고 그 나라 주민들을 거의 다 포로로 삼아 데려갔다. 그 후에는 유태 왕국만이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와 전통을 보존하게 되었다.
유태 왕국은 앗시리아보다 얼마간 더 오래 존속되었다. 바빌론인과 메디아인들이 B.C. 606년에 니느베를 점령하자 앗시리아의 세력은 종말을 고하였다. 그러나 B.C. 586년에 느부갓레살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그리하여 정전은 파괴되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론 끌려갔다. 바빌론 왕국은 B.C. 538년에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에게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B.C. 537년에 키루스는 영을 내려 모든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돌아가는 것을 허가했다. 그리하여 많은 유태인들이 느헤미아와 에스라(Ezra)의 영도 아래 고국으로 돌아갔다. 성전은 재건되고 정통적인 유태교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포로 시대와 이 시대를 전후해서 유태 종교는 크게 발전하였다. 종교적인 견지에서 볼 때, 이스라엘 민족과 그 부근의 여러 민족 사이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여호와(Yahweh)는 본래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는 한 민족 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외의 여러 잡신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여러 잡신들에 대한 경배도 습관화되어 있었다. 첫째 계명으로 [내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한 것은 포로 직전에 이루어진 혁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이것은 초기 예언자들의 많은 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방 신들을 경배하면 죄가 된다는 것을 처음에 가르친 것은 이 시대의 예언자들이었다. 이들은 당시에 끊임없이 계속된 전쟁에,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만일 다른 신들을 섬기면 여호와는 그 은총을 거둬 간다는 것이었다. 특히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다른 종교가 다 거짓이며, 여호와는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는 관념을 발견했던 것 같다.
다음의 몇 군데 인용은 그들의 가르침이 어떠했는가를 말해줄 것이다. 그들은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이방인의 풍속들을 책망하였다.
[너는 그들이 유다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했느냐.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비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자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황후를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술을 부음으로서 나의 노를 격동케 하느니라](예레미아, 7장 17~18).
여호와는 그것에 대해 분노했다. [힌놈(Hinnom)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니라](예레미아 7장 31).
[예레미아]서에는 매우 흥미 있는 귀절이 있다. 예레미아는 이집트에 있는 유태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책망한 것이 있다. 예레미아는 한동안 이집트의 유태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예레미아는 유태인 피난민들에게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들의 아낙네들이 다른 신에게 분향을 하여, 여호와께서는 노하신 나머지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그러나 유태인들은 예레미아의 말을 곧이듣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자기 입으로 낸 말들을 모조리 실천에 옮겨 우리와 우리의 조상들이나 임금들, 그리고 우리의 방백들이 유태나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던 대로 하늘의 여신에게 이 제주를 붓고 분향을 올리며, 제사를 드리리다. 대저 그때에는 우리가 곡식이 풍족하고 축복을 받아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예레미아는 그들에게 여호와께서는 당신들의 이와 같은 우상 숭배를 감찰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당신들은 재앙을 받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나의 큰 이름으로 맹세하였으므로, 이집트 온 땅에 거하는 유태인들의 입에서 다시는 내 이름을 일컬어서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라 하는 자가 없게 되리라. 내가 지켜 보겠노니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이집트 땅에 있는 유태 모든 사람이 칼과 기근에 망하여 절멸되리라](예레미아, 44장 11~끝).
에스겔도 마찬가지로 유태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데 충격을 받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성전 북문 곁에서 탐무스(바빌론신)를 위해 애통하고 있는 여인의 환상을 보여주었다. 그러고 주께서는 큰 가증한 것들과 성전을 등지고 태양을 경배하는 25명을 보여주었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아껴보지 아니하고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 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에스겔, 7장 2~끝).
다른 모든 종교는 나쁜 것이며, 하나님은 우?瓚? 숭배하면 징계한다는 사상은 분명히 이들 예언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예언자들은 모두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으며,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멸망시키는 날이 올 것을 예상하였다. 포로들은 예언자들의 경고의 말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만일 여호와께서 전능하시고, 유태인들이 선택된 백성이라면 그들이 받는 고통은 그들의 사악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내리는 징계와 같은 것이다. 이 징계로 말미암아 유태인들은 정화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유태 민족은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에 나라를 이루고 있을 때보다 더 철저하게 그들의 정통주의로, 민족적으로 보다 배타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바빌론으로 이주하지 않고 남아있는 유태인들은 이와 같은 발전을 하지 못하였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유태인들은 모두 잡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와 같은 잡혼을 모두 취소시켰다(에스라, 9~10장 5).
태고부터 유태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도 완강한 민족적 긍지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민족들은 외적에게 정복되면 외면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복종하였다. 그러나 유태 민족은 언제나 그들의 민족적 우월성을 보존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불행을 자기들이 신앙 상으로나 종교적인 의식에 있어서 순결성을 잃게 된 까닭에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진노의 채찍으로 믿었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역사서의 대부분은 포로사건 후에 편찬되었는데, 거기에는 잘못된 인상을 주는 대목이 한군데 있다. 말하자면 예언자들이 비난하는 우상 숭배는 이전의 엄격성에서 멀리 떨어져 타락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전에도 그와 같은 엄격성은 없었던 것이다. 예언자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혁신자들이었다.
후세에 유태 종교의 특색이 된 것 중에는, 이 포로 기간을 통하여 발전된 것이 많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며, 근원에서부터 발달된 것도 있다.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희생을 드릴 수 없게 되자, 유태인의 종교의식의 하나인 희생을 드리는 의식도 자연히 없어졌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성경 가운데 전부터 있던 부분만을 숭상했으며, 이 시기에야 비로소 안식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유태인의 할례도 이때부터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으며,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방인과의 잡혼도 이때부터 금지되었다.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레위기, 20장 24).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느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장 2),
율법서는 이 무렵의 산물로서 민족적 통일성을 간직하기 위한 힘의 원천이었다. [이사야서]는 두 사람의 예언자의 작품이다. 즉 한 사람은 포로 이전의 작품이며, 한 사람은 포로 이후의 작품이다. 두 번째 사람은 성서학자들에게서 [제 2의 이사야]라고 불리고 있으며, 예언자들 중에서 가장 저명한 사람이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하였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까닭일 것이다. 그의 [제2 이사야서]의 메시아의 예언은, 구약에서 후일에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전조를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가 되어 있다.
이교도나 유태인들에 관한 기독교인들의 논의에서 이 [제2 이사야서]는 매우 주요한 역할을 맡아 왔으므로, 나는 여기서 [제 2 이사야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인용하려고 한다. 아마도 모든 민족들이 종국에 가서는 기독교로 귀의될 것이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 (이사야, 2장 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장 14) (이 원문에 대하여는 유태인들과 기독교도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다. 유태인들은 올바른 번역은 '한 젊은 부인이 잉태하여'라고 번역하고, 기독교들은 유태인들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암흑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이름은 경이로운 자라, 권고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10장 2~6).
이와 같은 예언의 가장 분명한 곳은 53장이다. 거기에는 흔히 알려져 있는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짤림은 우리의 허물에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에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궁극에 가서는 구원이 이방인들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숨김없는 사실이다. [이교도들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 오리라](이사야, 60 장 3).
에스라와 느헤미야 이후의 유태인들은 잠시 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 유태 나라는 신권정체로서만 지속되어 갔으며, 그 영토는 매우 작은 것이었다. 비반(E. Bevan), <<대제사장 치하의 예루살렘>> (Jerusalem under the High riests, 12쪽)에 의하면 예루살렘 주변은 불과 10내지 15마일의 좁은 지역으로 되어 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프톨레미 왕조와 셀루카스 왕조 사이에서는 이곳을 에워싼 쟁탈전이 벌어졌었다. 그러나 실제로 유태 영토 안에서는 이로 말미암은 전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유태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자유롭게 신봉할 수 있었다.
이때에 도덕적인 격률은 이클리지에스티쿠스(Ecclesiasticus)에 나와 있다. 이 책은 아마도 B.C, 200 년경에 썼을 것이다. 이 책은 오직 그리스어 판으로만 최근까지 알려져 왔다. 때문에 위경(A ocry ha)으로 전락되어 버렸다. 그런데 최근에야 히브리어 원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원문에는 그리스 원본을 영어로 번역한 위경과 다른 데가 몇 군데 있다. 거기서 언급하고 있는 도덕은 매우 세속적이어서 이웃 사람들에게 받는 평판을 높이 평가하고 정직은 최선의 정책이라고 가르친다. 여호와의 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유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자선을 권장하고 있다. 이 책이 그리스의 영향을 받고 있는 유일한 증거는 의학을 숭상하는 점이다.
노예를 너무 친절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먹이와 채찍과, 무거운 짐, 이것은 나귀의 천직이요, 빵과 징계와 노동은 종의 천직이다. ... 종에게 일을 맡기되 그에게 알맞게 맡겨라. 만일 종이 순종치 않으면 보다 무거운 고랑을 채워라](23장 24, 28). [그와 동시에 우리는 종에게 대가를 지불하였다는 것을 상기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도망쳤을 경우에는 우리의 재산을 잃은 것이 된다. 따라서 가장 유익하고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23장 30, 31). 딸들은 큰 근심의 근원이다--책의 저자가 살았던 당시에는 분명히 부도덕한 데 물들기 쉬웠던 모양이다(42장 9~11). 그는 여인을 열등하게 평가하였다.
[여인의 옷에서는 좀이 나오고, 그 마음으로부터는 사악함이 나온다](42장 13). 자식들과 함께 즐겁게 노는 것은 잘못이다. 가장 올바른 길은 [그들이 어릴 때부터 목을 구부려 복종케 하는 것]이다(7장 23, 24). 원로 카토(Cato)처럼 그는 아무 매력도 없는 고결한 직업인의 도덕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평안한 속에서의 독선적인 삶은 셀루카스 왕조(Seleucid)의 안티오쿠스 4세가 자기의 모든 영토를 헬레니즘화 하기로 결심하여 갑자기 이와 같은 평온을 깨뜨렸다.
B.C.175년에 그는 예루살렘에 체육관 (gymnasium)을 세우고 청년들에게 그리스의 모자를 씌워서 체육을 가르쳤다. 그는 이 일에 제이슨이란 이름을 가진 헬레니즘화된 유태인의 협조를 받았다. 그는 이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만들었다. 귀족 계급의 승려들은 방종하게 되었으며, 그리스 문명에 대하여 매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들은 [하시딤](hasidim, 거룩하다는 뜻)이라고 불리는 일당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아마도 그들에게서 에세네스(Essenes)교가 발전한 깃 같다. 에세네스교와 교리는 원시 기독교에 영향을 준 듯하다. 오스텔리(Oesterley)와 로빈슨(Robinson), <<이스라엘의 민족사>>(History of Israel), 제 2권 323쪽 이하 참조. 바리새파도 이들로부터 나왔다] B.C. 170년에 안티오쿠스가 이집트와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간 사이에, 유태인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 후 즉시 안티오쿠스는 성전에서 기물들을 탈취하고, 그 대신 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는 여호와를 제우스와 동일시하였으며, 다른 곳에서도 이를 따랐다[알렉산드리아의 유태인들 중에는 여호와를 제우스와 동일시하는 데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15, 16참조].
그는 유태교를 근절시키려고 결심하고 할례를 받는 것과 그 밖의 음식물에 관련된 유태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자 예루살렘은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그대로 복종하여 왔지만, 예루살렘 밖에 있는 유태인들은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이 당시의 역사는 <<매카비 제 1서에 나타나 있다. 제 1장에 보면 안티오쿠스는 자기 왕국 안에 있는 모든 주민들이 다 동일한 백성이어야 하며, 어느 종족이거나 고유의 법률을 버려야 한다는 영을 내렸다. 그리하여 어느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두 이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들은 안식일을 범하고, 돼지를 제물로 드리며, 어린이들에게 할례(유태교에서 행하는 예식, 남자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자지 끝의 살가죽을 조금 베는 일-역주)를 주지 못하도록 하는 왕의 명령에 복종치 않았으며, 이러한 자들은 모두 사형을 당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이에 항거하였다. [아이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부인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아이들을 목매달아 죽이고 그들의 집을 약탈하였으며, 할례를 받게 한 자들은 모조리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고기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았으며, 거룩한 약속을 범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매카비서>> 제 1서, 1장 60~63]. 유태인들 사이에 영혼 불멸에 대한 신앙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이때의 일이었다. 본래는, 덕은 이 땅 위에서 보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박해를 생각할 때, 더구나 가장 덕망이 있는 사람일수록 박해가 심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러한 생각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이 정의롭다는 것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보답과 형벌은 내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교리는 유태인들 사이에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 시대에도 사두개파(기원전 2세기 바리새 파에 대항하여 일어난 유태교의 일파로 부활 및 천사와 영혼의 존재 및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였다-역주)의 교인들은 그 교리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이르러서는 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만 반대하였을 뿐이며 후에 유태인들은 거의 다 누구나 영혼 불멸을 믿게 되었다.
안티오쿠스에 대한 반란은, 유다스 맥카베우스가 영도하였다. 그는 유능한 사령관으로 먼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B.C.164), 다음에 계속하여 진격해 나갔다. 그는 때로는 모든 남자들을 죽이기도 하고, 때로는 강제로 할례하기도 하였다. 그의 형제 요나단은 대제사장이 되고, 예루살렘에 주둔하여 사마리아의 일부를 정복했으며, 욥파(Joppa)와 아크라(Akra)를 손에 넣었다. 그는 로마와 협상하여 자주권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헤롯(Herod) 왕 때까지 대대로 대제사장은 그의 가문에서 나왔고, 이른바 하스모니아 왕조라고 불렸다. 이 시기에 유태인들은 박해를 참고이기는 데 있어서 영웅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점에 이르기까지 예컨대 할례든가 돼지고기를 먹는 점에 이르기까지,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대단한 영웅심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 시대는, 유태 역사에서 가장 위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대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유태인들은 점점 더 헬레니즘화 되어갔다. 그리고 유다(Judea)에 살고 있는 유태인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또 이들 사이에서도 부유하고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화의 개혁에 복종하였다. 하시딤 (Hasidim) 일가의 영웅적인 항쟁이 없었던들, 유태교는 쉽사리 소멸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유태교가 소멸되었던들 오늘날의 기독교나 이슬람교도 존재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타운센트(Townsend)는 <<매카비 제 4서>>의 번역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유태교가 안티오쿠스의 치하에서 소멸되었던들, 기독교의 토대는 없어졌을 것이라고 한것은 적절한 말이라고 하겠다. 유태교를 구출한 매카베우스 순교자들의 피는 결국은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 그들의 일신교를 유태교의 근원에서 끌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의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신교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매카베우스 일가의 덕택이라고 하겠다][찰스(R.H. Charles), <<구약 외경 및 위서>>(The Apocry ha and pseude igra ha of the Testament in English), 제 2권 659쪽].
그러나 매카베우스 일가는 후세의 유태인들에게는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문은 성공을 거둔 후에 대제사장들이 되어, 세속적인 또는 그때 그때의 미봉책을 써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경을 받은 것은 처음 순교자들뿐이었다. 그리스도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저술되었다고 생각되는 <<매카비 제 4서>>는 무엇보다도 이점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은 그 제목과는 달리 매카베우스 일가에 대해서는 아무 데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단지 첫째 노인의 놀라운 용감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이어서 7형제들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은 모두 안티오쿠스에게 고문을 당하고 화형을 받아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친도 현장에 끌려나와 이 광경을 보고, 확고히 서서 동요하지 않도록 그들을 격려하였다. 왕은 처음에는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며, 그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그들이 만일 돼지고기를 먹겠다고 만 하면, 그들을 총애하며 성공적인 삶을 보장해 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왕은 그들에게 고문하는 기구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여전히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왕에게 사후에 왕은 영원한 고문을 당할 터이지만, 그들은 영원한 축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들 앞에서,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씩 돼지고기를 먹을 것을 권유하고 나서 거절을 하면 고문을 하고 죽여버렸다. 왕은 나중에 자기의 군사들에게 그런 용감한 모범을 배울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설의 수식이 내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박해가 가혹하기 짝이 없었으며, 또한 그들이 영웅적으로 이것을 견디어 이겼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당시에 중요한 문제로 등장한 것은 할례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또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가 있다. 저자는 분명히 정통적인 유태인이지만, 스토아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유태인은 스토아 철학의 계율을 엄정하게 지켰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이제부터 논하려고 하는 것은 철학적인 문제이다. 즉 영감을 받은 이성은 감정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느냐의 여부를 논하려고 한다. 나는 이 철학에 대하여 진지한 태도로 유의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유태인들은 그리스인들로부터 철학을 배울 용의가 있었지만, 그들은 율법에 대하여 매우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특히 할례를 받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 돼지고기를 비롯하여 그 밖의 부정한 고기 등을 먹지 않는 일 등에 대하여 엄격하였다. 느헤미야(Nehemiah)시대부터 A.D.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율법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강조돼 왔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어떤 색다른 말들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의 방식으로 글을 썼던 사람들은 다니엘(Daniel, 주: 다니엘(Daniel)-구약성경 중의 4대 예언자로 B.C.597에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다. 바빌론에서도 경건하고 지혜로와 고위에 앉았으며 느부갓네살왕의 꿈에 혜명과 사자 굴에서 살아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이나 솔로몬(Solomon,주: 솔로몬(Solomon)-이스라엘 민족사상 제3대 왕으로 B.C.970?~930? 동안 재위함. 다윗 왕의 아들로 지혜가 뛰어나고 영화를 누린 것으로도 유명함. 성전을 건축하는 데 힘썼다.) 그밖에 당시에 숭배를 받고 있던 고대인이 쓴 오래된 책을 발견한 체했다.
이 민족의 종교적인 특성은 이들을 민족적으로 단결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율법을 강조한 나머지 통찰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매우 보수적으로 되어버렸다. 이처럼 고루하기 때문에, 율법의 결박에 대한 성 바울(St. Paul, 주: 바울(Baulos)-기독교의 대사도로서 본명은 사울이다. 처음에는 바리새교인으로서 기독교를 박해하였지만 36년 경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받고 기독교의 사도가 됨. 64~65년경 로마에서 순교함. 형식주의와 율법주의를 타파하고 기독교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리스도의 가장 충실한 사도로서 그의 편지는 신학의 기초가 되며 신약성경에 수록되어 있다.)의 항쟁은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처럼 완전히 새로운 기원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직전의 유태 문헌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것이다. 예언자적인 정열은 결코 소멸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주목을 끌기 위해 저자의 이름을 감추었을 뿐이다. 이 점에 대하여 가장 흥미 있는 것에 <<에녹 서>>(The Book of Enoch)가 있다[이 책의 영역은 찰스의 앞의 책 참조. 그 외 서론도 매우 가치가 있다]. 이 책은 여러 저자들의 작품을 모은 것으로, 가장 오랜 작품은 매카비 시대 직전의 것이며, 가장 나중의 것은 B.C.64 년경에 씌어졌다. 그 대부분이 족장에 녹이 받은 묵시적인 비젼을 기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기독교화 된 유태교의 일면으로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즉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이 <<에녹서>>를 잘 알고 있었다. 성 유다(St. Jude)는 이 책을 실제로 에녹이 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 즉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테르툴리안(Tertullian) 같은 사람들은 이 책을 성경으로 간주하였으나, 제롬(Jerome)과 어거스틴이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이 책은 망각되었으며,19?선? 초에 이디오피아어로 된 이 책의 사본이 아비시니아에서 발견되기까지 매장되어 있었다. 그 후에 <<에녹 서>>의 일부분이 그리스어 판과 라틴어 판으로 발견되었다. 이 책은 본래 일부는 히브리어로 씌어 있고, 일부는 아랍어로 씌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에녹서>>의 저자들은 하시딤(Hasidim) 가문 사람들과 그들의 후계자인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왕들과 군주들을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바로 하스모니아 왕조와 사두개 교인들을 의미하였다. 이 책은 신약성서의 교리--특히 메시아와 지옥과 마귀에 대한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주로 [비유]로 되어 있으며, 이 비유들은 신약 성서의 비유들보다 더욱 우주적이다. 거기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비젼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것은 <<실락원>> (Paradise Lost)의 첫 두 권을 연상케 하며, 또 그 문학적인 가치에 있어서, <<실락원>>에 조금 떨어지는 블레이크(Blake)의 <<예언서>>를 연상케 한다. [창세기] 6장 2절과 4절을 확장한 것 같은 부분도 눈에 뜨인다. 이 부분은 기이하고도 프로메테우스적이다. 천사들은 인간에게 야금술을 가르쳐 주고, [영원한 비밀을 폭로한 죄로 벌을 받는다. 이들은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 죄를 저지른 천사들은 이방신들이 되고, 여자들은 인어가 된다. 그러나 이들은 다 나중에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서술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상당히 문학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최후의 심판은 [의로운 인자](the Son of Man, who hath righteousness)에 의해 수행된다. 인자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 위에 앉아 있다. 이 최후의 심판 때에, 이방인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겠지만, 대부분의 이방인과 헬레니즘화 된 유태인들은 모두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대개 의인들은 원수 갚을 것을 간구 할 것이며, 그 기도는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천문학에 대한 대목이 있다. 거기 보면 태양과 달에는 전사들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바람을 타고 달리는 병거에 올라타고 있다. 거기서는 1년이 364일이며, 인간이 죄를 범하면, 천체가 그들의 궤도에서 벗어나게 한다. 오직 유덕한 사람들만이 천문학을 알 수 있다. 별이 떨어지는 것은 천사들이 낙하함을 의미하며 일곱 천사장에게 벌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산성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매카비에 이르기까지, 그 초기의 부분은 성경에서 보는 역사의 과정을 밟고, 그 후기에는 일반 역사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다음에는 장래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 이방인의 나머지 백성의 회개, 의인의 부활과, 메시아에 대한 기록이다.
죄인의 형벌과 의인의 상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의인들은 죄인들에 대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용서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죄인들아, 너희는 어떻게 하려느냐? 심판 날에 너희들의 피할 곳이 어디냐? 의로운 자들의 기도 소리를 들을 때, 너희는 어디로 몸을 피하려느냐?] [죄는 결코 (하늘에서) 지상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스스로 죄를 창조한 것이다.] [죄는 천국에 기록되어 있다. 너희 죄인들은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희는 결코 평화를 알지 못할 것이다.] 죄인들은 혹시 그들의 일생 동안은 행복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이 지옥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거기서, [어둠과 구속과 영원히 타는 불꽃의 고통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인에 대해서는, [나의 아들이 저들과 영원히 연합하게 될 것이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대목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진실한 사람들에게, 그는 성실함을 주어 바른 길에 있게 할 것이다. 저들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으로 이끌려 가는 자들을 볼 터이지만, 의인은 영광스럽게 빛나는 것을 볼 것이다. 죄인들은 저마다 소리높이 부르짖으며, 그들의 빛나는 영광을 볼 것이며, 날과 때가 그들을 위해 정해 놓은 그곳으로 갈 것이다.]
유태인들은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무섭게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보는 태도는, 주로 기독교가 도입한 변혁으로, 바리새인(Pharisees, 기원전 2세기 후반에 모세의 율법 등을 면밀 복잡하게 엄수하던 유태교의 영혼 불멸, 부활 등을 믿음. 주로 형성주의에 흘렀음-역주)과 서기관(다윗왕 이후 히브리 궁전에서 중요한 사건의 기록이나 왕에의 함언 등을 담당하던 고관-역주)의 비유에 의해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그리스도의 책망을 가리켜 덕이라고까지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도들은 이 겸허를 몸소 실천하려고 힘쓰고 있다. 이것은 유태인들 사이에서도 그리스도 시대 직전에는, 중요한 예외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12지파의 서약]을 보면, 이 책은 B.C.109년에서 107년 사이에 하스모니아 왕조의 한 대제사장이던 존 힐카누스를 숭배하던 어떤 바리새인이 기록한 것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것에는 기독교인이 가필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으나, 이것은 거의가 교리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가필된 부분을 제외하고 생각해 보면 그 윤리적인 가르침은 복음서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볼 수 있다. 목사인 찰스 박사도 말한 바와 같이 [산상수훈(주: 산상수훈-[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요,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것 같이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자비함을 받을 것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화목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든 악하다 하는 거짓말로 비방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상 받을 것이 크리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를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은 몇 가지 점에서, 이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 책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대목도 있다. 복음서의 많은 글들이 같은 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이 책을 불후의 서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앞의 책, 291~292쪽). 우리는 이 책에서 아래와 같은 교훈을 찾아볼 수 있다.
[너희는 피차에 충심으로 사랑하라. 누가 너희에게 죄를 지으면, 너희는 먼저 그와 함께 화평한 가운데 이야기할지니, 그때 너희는 마음 속에 거짓을 품지 말라. 그가 회개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면 그를 용서하라. 그러나 그때에 자기 죄를 부인하여도 그와 더불어 싸우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서 악한 감화를 받아, 거짓 맹세를 함으로써 이중으로 죄를 지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 그가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악한 행실을 그치지 않더라도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원수를 갚는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도록 하라.]
찰스 박사에 의거하면 그리스도는 이 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다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주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너는 한 평생 주를 사랑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 상대방을 사랑하라.] [나는 주를 사랑하였으며, 모든 사람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였노라.]
이러한 구절들은 마태복음 22장 37~39에 있는 말씀과도 비교될 수 있다. 그리고 [l2지파의 서약]에서는 남을 미워하는 것을 일체 금하고 있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노여움은 눈을 어둡게 만들며, 어떤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남을 미워하는 것은 악이다. 그것은 언제나 거짓말과 짝이 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유태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모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라고 하겠다. 기독교인들은 복음서에서 바리새교인들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바리새인이었으며,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되는 윤리적인 계명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은 어려울 것이 없다.
첫째로 그는 당시의 바리새인 중에서 예외적인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바리새인의 일반적인 교회는 분명히 <<에녹 서>>에 씌어 있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어떤 운동이나 화석화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미국 애국 부인회(D.A.R.) 운동의 지도 원리에서 제퍼슨(Jefferson)의 근본 정신을 찾아볼 수 있을까? 세째로 특히 율법을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진리로 간주하고, 여기에 헌신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찰스 박사도 말한 것처럼, 저들의 모든 사색과 감정에 있어서 신선한 활기를 잃게 하였다.
[바리새주의가 그 본래의 이상에서 벗어나게 되자 정치적인 이해 관계와 운동에 몰두하고, 그 결과 점점 율법의 문구에만 더 치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2 지파의 서약'에 나타난 것처럼 고귀한 윤리 체계를 발전시킬 가망을 그르치게 되었다. 초기의 하시딤 가문 및 저들의 가르침을 올바로 계승한 사람들은 유태주의를 버리고 원시 기독교에서 저들의 자연적인 안식처를 발견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대제사장 통치 시대 이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k Antony)는 친구 헤롯(Herod)을 유태 왕으로 삼았다. 헤롯은 기력이 왕성한 모험가로 가끔 파멸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는 로마 사회에 익숙하였으며, 유태인들의 경건한 생활 태도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그 자신은 이두메아 사람이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는 유태인의 의심을 받을 만하였다. 그는 교묘한 기회주의자로 옥타비우스(Octavius)가 분명히 패권을 잡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재빨리 안토니우스를 배반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태인에 대하여 자기의 통치에 순종케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는 성전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그 건축은 헬레니즘 양식으로, 고린도식 기둥을 죽 세워놓은 것이었다. 또 그는 대문 출입구 위에 커다란 황금 독수리를 얹어 두었다. 이것은 곧 두 번째 계명을 어기는 일이었다. 그가 죽어간다는 소문이 나돌자 바리새인들은 이 독수리를 끌어내렸다. 그는 이에 대한 복수로서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을 사형시켰다. 그는 B.C.4년에 죽었다. 그가 죽자 곧 로마는 왕정의 제도를 폐지하고 유태 나라에 총독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A.D.66년에 총독이 된 본디오 빌라도( ontius ilate)는 재치가 없는 사람이라 곧 물러나게 되었다. 유태인들은 A.D.66년에 젤롯당(Zealots, 유태교의 광신파)의 교시를 받아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패배를 당하고, A.D.70년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그리하여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살아 남은 유태인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수세기 전부터 유태인들은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본래 대부분이 농민으로서, 장사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은 그들이 바빌론의 포로시대의 일이었다. 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 이후에도 바빌론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상당히 부유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자, 많은 유태인들이 이곳에 이주하였다. 그들은 일정한 특수 지역을 차지하고 거기 모여 살았다. 이것은 이른바 유태인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인들과 어울려 살면 그들에게 오염 당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유태인은, 유태 지방의 유태인들보다 훨씬 더 헬레니즘에 젖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셉춰진트(Se tuagint, 70인 역 성경-역주)였다. 펜타툭( entateuch, 모세의 5경-역주)은 B.C. 3세기의 중엽에 번역되었으며, 그 밖의 것은 훨씬 더 나중에 번역되었다. [셉춰진트]에 대하여 전설이 생기게 되었다. [셉춰진트]라고 불리게 된 까닭은 이 번역에 70명이 종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70명은 각자 독자적으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곤 각자 번역을 끝마쳤을 때, 서로 비교해 본 결과 세부에 이르기까지 일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모두들 신의 영감을 받아서 번역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세의 학자들은 셉춰진트를 매우 불완전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독교가 탄생한 후로 유태인들은 이 [셉춰진트]를 별로 보지 않고 히브리어로 구약성경을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인들은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셉춰진트]에 의존하거나, 또는 라틴 번역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구약성경의 보다 더 훌륭한 번역은 3세기에 오리게네스(Origen)의 노력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라틴어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5세기에 제롬(Jerome)이 불가타(Vulgate, 라틴어 판으로 된 성경-역주)를 낼 때까지는 매우 불완전한 번역판밖에는 갖지 못하였다. 불가타는 처음에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그가 유태인의 협조로 이 성경을 만들었다고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유태인들이 교묘히 조작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차츰 성 제롬의 이 성경은 인정을 받게 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카톨릭 교회에서는 권위 있는 성경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같은 시대의 .철학자 필로( hilo)는 사상적 인 면에서, 유태인들에게 끼친 그리스의 영향을 알아보는 데 가장 좋은 표본이 되어 있다. 그는 종교에 있어서는 전통적이면서도, 그 철학은 본시 플라톤 학파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와 신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도 상당히 받고 있다. 그가 유태인에게 끼친 영향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는 퇴조해버렸으나 기독교의 교부들은, 그에게서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철학의 융합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고대의 중요 도시에는 어디나 유태인의 식민지가 여러 군데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그 밖의 동방 종교의 대표자들과 함께 회의주의나 그리스, 로마의 관제 종교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로마 제국 안에서뿐만 아니라, 남부 러시아에서도 유태교로 개종하는 자들이 많았었다. 기독교가 제일 먼저 호소한 대상도 유태인이나 반 유태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통적인 유태교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 더욱 정통적으로 되고, 또 더욱 편협하게 되었다.
1세기 후에는 기독교가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유태교와 기독교의 관계도 매우 적대적이고, 따라서, 서로 관계가 없게 되었다. 우리가 방금 보는 바와 같이, 배척주의(anti-Semitism)를 크게 자극한 것도 기독교였다. 유태인은 중세기를 통하여 기독교 국가에서는 문화적으로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문화적인 활동을 하기에는 박해가 너무 심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문명에 대하여 어떤 공헌을 하였다면, 그것은 단지 교회를 짓거나 그 밖의 기업을 위해 자금을 제공한 것뿐이었다. 이 시기에 그들은 오직 마호메드 교도들 사이에서만 사람의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유태인들은 이들에게서 철학과 새로운 사색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마호메드 교도들은 중세기 동안에 기독교도들보다 한결 개화되어 있었으며, 또 인정도 더 많았다. 기독교인들은 유태인을 핍박했는데, 특히 종교적으로 흥분하였을 때 그러하였다. 십자군은 무서운 유태인 학살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호메드 국가의 유태인들은 푸대접을 받지 않았다. 특히 무어인들이 살았던 스페인에서는 유태인들이 학문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마이모니데스 (Maimonides, 1135~1204)는 스피노자 철학의 원천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도들이 다시 스페인을 정복하였을 때, 그들에게 무어인들의 학문을 전해 준 것은 유태인들이었다. 유식한 유태인들은 히브리어, 헬라어, 아랍어 등을 알고 있었으며,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도 정통해 있었으므로, 그들보다 학식이 못한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그들의 지식을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것도 전해 주었으니, 예컨대 연금술과 점성술 같은 것이 그것이다. 중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유태인들은 크게 문명에 이바지하였지만, 모두 개인으로서의 한 것이며, 결코 민족으로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