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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정(九龍停) 이야기
연행록을 읽다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어찌보면 이해가 될 듯도, 않될 듯도 한 그런 이야기들 말입니다. 저의 주 관심사는 17~8세기 전후로 북경(燕京)을 갔던 많은 연행사들의 정확한 루트를 찾아보는것입니다. 오늘은 그 연행록 중, 압록강변에 있었다는 구룡정(九龍亭)과 철우(鐵牛)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철우(鐵牛)는 글자 그대로 쇠(鐵)로 만든 소(牛)입니다. 아래 글은 연원직지(燕轅直指)와 계산기정(薊山紀程), 연행일기(燕行日記)의 내용입니다.
연원직지 제1권
출강록(出疆錄) ○ 임진년(1832, 순조 32) 11월 21일
맑고 추웠다. 의주에서 떠나 30리를 가 구련성(九連城)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또 38리를 가 온정평(溫井坪)에 이르러 노숙(露宿)하였다. 이날 모두 68리를 갔다.
해가 뜬 뒤에 길을 떠나 수 리쯤 가 비스듬히 구룡정(九龍亭)을 지나고 (따로 구룡정기가 있다.) 또 3리를 가 압록강에 이르니,~~~중략~~~
구룡정기(九龍亭記)
의주성(義州城) 북쪽 8, 9리에 구룡연(九龍淵)이 있으니 곧 압록강 상류로, 옛날에 사신 행차가 배를 띄우던 곳이다. 못가 조그마한 언덕에 구룡정이 있으니, 곧 홍숙(洪璛)이 부윤(府尹)으로 있을 때 세운 것이다. 정자가 화려하지는 않으나 지금 기우제(祈雨祭) 지내는 곳이 되었다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고찰하건대,
“구룡연은 고을 북쪽 8리에 있고, 못 남쪽에 토성(土城) 터가 있다. 속설에 전해 오기를, ‘흡단(哈丹)ㆍ지단(指丹) 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못 위의 토성에 살고, 한 명은 주성(州城) 안에 살았다. 정주 호장(靜州戶長) 김유간(金裕幹)이 꾀로써 쫓아내려고 거짓말로 「우리나라에서 아무 날 밤에 너희들을 섬멸하려 한다.」 하였다. 기일이 되자 산 위에 횃불을 많이 설치해 놓았더니, 흡단 등이 드디어 무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도망갔다. 그러나 강 위에 배가 없으므로, 유간이 마음에 이상스럽게 여겨 살펴보니, 강 북쪽 가까운 언덕에 철우(鐵牛)를 잠겨 놓고 또 쇠사슬을 남쪽 언덕 바윗돌 사이에 매어 철우의 등에 연결시켜 부교(浮橋)를 만들고 건너간 것이었다. 유간이 즉시 다리를 부수어 다시 건널 수 없게 하였다. 영락(永樂) 무자년(1408, 태종 8)에 주성을 쌓을 때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 쇠사슬을 거두어다가 성문의 자물쇠를 만들었으나, 그 철우는 깊은 모래에 침몰되어 다시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하였다. 여기가 곧 그 자리인데, 토성 터는 역시 알 수가 없다.
계산기정 제1권 출성(出城) ○ 계해년(1803, 순조 3) 11월[1일-22일] 16일(정미)
구룡정(九龍亭)
구룡정은 성 밖 동북쪽에 있는데, 성에서 8리 떨어진 지점이다. 조반을 먹고 성을 나섰다. 석벽이 강에 임해 있는데 그 마루터기가 돌연 우뚝 솟아 있다. 압록강의 물이 여기에 와서는 돌아서 가장 깊은 곳을 이룬다. 메마른 소나무와 떨기진 나무가 석벽 틈에 뿌리를 박고 있어, 전에 그림 병풍과 벽화 가운데서 보았던 것 같다. 가재(稼齋) 김창업(金昌業)의 기문(記文)에 이르기를, “이곳에 자그마한 정자가 있는데 부윤 홍숙(洪璛)이 지은 것이다. 옛날에 합단(哈丹)ㆍ지단(指丹) 형제가, 하나는 못가의 토성(土城)에 살고 하나는 의주성에 살았다. 정주(靜州)의 호장(戶長) 김유간(金裕幹)이 계략을 써서 그들을 쫓아 버리려고 하여 거짓으로, ‘우리나라에서 너희들을 죽여 버리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합단 등이 무리들을 다 데리고 몰래 강을 건너갔는데, 그때 강에는 배가 없어 마침내 강 북쪽 근안에 쇠를 침수시키고 또 쇠사슬을 남쪽 강 언덕 바윗돌 사이에 고착시켜 가지고 우배(牛背)에 연결하여 부교(浮橋)를 만들어 건너갔다. 김유간은 곧 그 다리를 파괴시켜 다시 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영락(永樂) 무자년(1408, 태종 8) 의주의 성을 구축할 때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서 쇠사슬을 꺼냈는데 그 쇠로 만든 소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여기가 바로 그곳인데 정자는 지금 허물어졌다.
연행일기(燕行日記 )1권 1712 11 25일
흐리고 아침에 눈이 뿌렸다. 의주에 머물렀다.
식후에 강가로 나가니 김제겸(金濟謙)도 따랐다. ~~~중략~~~ 다음엔 기생들에게 노래 부르기와 술 따르기를 명했다. 얼마 뒤에 다시 도포를 입고 썰매를 타고 구룡정(九龍亭)으로 가는데, 유 봉산(柳鳳山)이 뒤따라 이르렀다. 구룡정은 통군정 동북쪽의 가파른 언덕에 위치했는데, 압록강이 이곳에 이르러 깊어지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위에 작은 정자가 있는데 이는 홍숙(洪璛)이 부윤으로 있을 적에 지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을 상고해 보면 용연(龍淵)은 주(州)의 북쪽 8리에 있으며, 용연의 남쪽에 토성(土城)의 터가 있는데, 전하기를, 흡단(哈丹)ㆍ지단(指丹) 형제가 하나는 용연 위 토성에 살았고 하나는 의주성 안에 살았는데, 정주 호장(靜州戶長) 김유간(金裕靬)이 그들을 축출할 계략으로
“우리나라가 아무 날 밤에 너희들을 섬멸하려고 한다.”
고 속인 뒤 그날이 되자 산 위에 횃불을 많이 올렸더니, 흡단 등은 드디어 무리를 모두 데리고 강을 건너 도망하였다. 그런데 강에 배가 없었으므로 김유간이 매우 의심쩍어 자세히 살펴보니, 강 북쪽 언덕 가까이에 철우(鐵牛)가 잠겨 있고, 남쪽 언덕 암석 사이에 쇠사슬[鐵鎖]을 붙여 그것과 철우를 연결하여 부교(浮橋)를 놓아 건넜음이 발견되었다. 김유간은 즉시 명하여 그 부교를 파괴해서 다시 건널 수 없도록 하였다. 영락 무자년(1408), 주성(州城)을 쌓을 때, 헤엄 잘 치는 자를 뽑아 그 쇠사슬을 거두어다가 성문에 쇠통을 만들었으나, 철우는 모래 속에 묻혀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그 땅이라고 하는데 토성은 알아볼 수 없었다. 정자의 경치는 통군정과 대동소이한 것이 마치 부벽루가 연광정을 닮은 것과 같았다.
[주D-001]합단(哈丹) : 몽고인으로 원 나라의 홀필렬(忽必烈) 때 세력을 부식해서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한 내안(乃顔)의 잔당 두목으로 고려 충렬왕 17년(1291), 2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 한때 강원도 원주에 주둔하기도 했다. 여기에 나온 일은 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홍숙(洪璛)];1654(효종 5)∼1714(숙종 40).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옥여(玉汝), 조선 후기의 문신.1675년(숙종 1) 진사시에 오르고, 1683년 봉사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703년 충청도관찰사, 1704년 승지, 1705년 경기도수사를 지낸 뒤 남계군(南溪君)에 녹봉되고, 한성부우윤, 호조·병조의 참판,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위의 연행록 내용은 서로 비슷합니다. 간략히 요약하면, 몽고인이었던 합단(哈丹)ㆍ지단(指丹) 형제가 철우(鐵牛)에 쇠사슬을 묶어놓고 부교(浮橋)를 만들어 도망갔다는 것과, 철우(鐵牛)가 침몰되어 사라졌고, 그리고 그 쇠사슬을 태종 8년에 의주성을 쌓을때 성문의 쇠통을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위의 글을 쓴 연행사신들은 의주성(용만관(龍灣館))에서 머물다 북경(燕京)으로 출발후 구룡정(九龍亭)을 지나다 그곳에 얽힌 고사를 쓴 것입니다. 고사의 내용이 사실이고 모래에 침몰된 철우(鐵牛)를 찾는다면 연행사들이 건넛던 강이 어딘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추정한 연행사들이 건너간 그 강은 섬서성 화산앞의 황하입니다. 황하가 내몽골에서 남쪽으로 수직으로 쭉 내려오다가 화산앞(섬서성 화음시쯤)에서 동쪽으로 크게 돌아나간 바로 그곳입니다. 이곳은 산서성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죠...<황하가 ‘L’자로 꺾여진 곳의 특별한 명칭을 모르겠습니다. 그곳에 살던 당대 사람들은 무엇이라 불렀는지 궁금합니다. 강이 꺽였으니 [절(折)강(江)]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런데 황하 건너 산서성 영제시 황하강변에 몇 년전(1988~1989년쯤인가)에 철우(鐵牛)가 발견되어 황하철우(黃河鐵牛)란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곳에 살던 노인이 황하 갈수기에 강 바닥에 튀어나온 소의 뿔에 배가 긁히었다는등의 이야기가 전해저 오던중 1988~89년쯤 대대적인 발굴작업 끝에 철우와 철인등 여러유물을 건저 올렸나봅니다. <바이두 백과>.
아래 사진은 그 철우와 관련된 몇장의 사진들입니다. 이 철우(鐵牛)가 합단(哈丹)형제가 사용했던 그 철우(鐵牛)인지는 알수 없습니다만, 연행록에 나오는 철우(鐵牛)의 고사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여 올립니다.
발견된 철우는 하나가 아닌 네 마리였습니다. 각각의 철우 옆에는 철인상(鐵人像)이 또한 네명이있고 그 옆에 쇠줄은 감었음직한 구멍뚫린 쇠 기둥이 있읍니다.
위의 철우(鐵牛)들은 당나라때의 것이라 하는데, 고대 중국에서도 황하의 범람을 막기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철우에 대해 검색해 보니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황하(黃河)의 범람을 치수(治水)할 적에 쇠로 소를 만들어서 진압(鎭壓)했다고 하며, 그 소의 머리는 하남(河南)에 있고 꼬리는 하북(河北)에 있다고 하며, 성(城)밖에 철우(鐵牛)의 묘가 있다 ’는 내용이 있었습니다.(불교사전)
그리고 또 ‘회병(懷丙) 스님과 철우(鐵牛)의 이야기도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송사(宋史)-승회병전(僧懷丙傳)에 수록되어 있는 불가고사(佛家故事) 중 하나라 합니다.
하중부(河中府)에 부교(浮橋)가 하나 있다. 하중부는 현재 산서성 영제현 포주진(山西省 永濟縣 浦州鎭)이다. 영제현은 산서성의 최남단에 위치한 현으로써 황화 강변에 있으며 서안(西安)의 동쪽 140k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이 부교(浮橋)는 여덟 마리의 쇠로 주조(鑄造)한 소를 연결시켜 만든 다리이다. 옛날에 쇠로 주조한 다리를 만들면 수재(水災)를 면할 수 있다는 미신에 의하여 다리도 만들고 쇠로 주조한 소를 강물 속에 던져 넣으며 수신(水神)에게 고사도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쇠로 주조한 한 마리의 소의 무게는 몇 만근(斤)이 넘는다.
송나라 영종(英宗(趙曙)) 치평(治平) 연간(서기 1064 년 – 서기 1068 년)에 황하유역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황하의 수량이 급증함에 따라 부교가 절단되면서 여덟 마리의 쇠로 만든 소 중에서 한 마리가 강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영종은 공정사(工程師)들을 파견하여 철우(鐵牛)를 인양(引揚) 할 계획을 세우라고 영제현에 명하였다. 그러나 공정사들은 전전긍긍하며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회병(懷丙) 스님이 기발한 생각을 고안해 냈다. 회병(懷丙) 스님은 두 척의 큰 배에 흙과 모래와 돌멩이를 가득실었다. 흙을 가득 적재한 배는 흙의 무게 때문에 가라앉기 직전이었다. 회병(懷丙) 스님은 기다란 전보대를 두 배위에 가로질러 놓은 다음 전보대의 양쪽 끝을 동아줄로 꽁꽁 묶어 배가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켜 놓았다. 그리고 나서 사람이 강물 속에 들어가 동아줄로 침몰된 소를 묶어 전보대의 양쪽 끝에 꽁꽁 매달았다. 그 다음 서서히 뱃속에 가득 들어있는 흙을 강물 속으로 퍼내기 시작하였다. 뱃속에 들어있는 흙을 절반 정도 퍼내버렸을 때 부터 침몰된 소는 물위에 둥둥 뜨기 시작하였다.
결국 강물 속에 침몰되었던 소의 인양(引揚) 작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후략~~~
하중부부량(河中府浮梁), 용철우팔유지(用鐵牛八維之), 일우차수만근(一牛且數萬斤). 후수폭창절양(後水暴漲絶梁), 견우몰어하(牽牛沒於河), 모능출지자(募能出之者). 회병잉대주실토(懷丙以二大舟實土), 용대목위권형상구우(用大木爲權衡狀鉤牛), 서거기토(徐去其土), 주부우출(舟浮牛出). 전운사장도이문(轉運使張燾以聞), 사자의(賜紫衣)....<
위의 중국에서의 철우관련 고사를 보면, 황하의 치수(治水)를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쇠사슬을 철우에 묶어 강 양쪽을 연결하여 부교를 만들어 황하를 건너다닌듯 합니다. 철우, 쇠사슬, 부교, 깊은 모래에 침몰 등 연행록상의 내용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또 익재난고 제1권 ‘황하(黃河)’란 시(詩)에도 철우에 대한 구절이 있습니다.
황하는 서쪽 곤륜산(崑崙山)에서 흘러오는데 / 黃河西流自崑崙
한 나라 사신 떼를 타고 근원을 찾았었다네 / 漢使乘槎昔窮源
곤륜산 높이 몇 천 길도 넘는 데서 / 崑崙山高幾千仞
하늘의 은하수 끊임없이 쏟아진다 / 天河倒瀉流渾渾
~~~중략~~~
또는 구슬을 물에 던지던 진 공자처럼 / 又不是投璧晉公子
그의 외삼촌과 저버리지 말자고 맹세한 것도 아니었네 / 誓與舅氏不負平生言
만약 철우가 안다면 빙긋이 웃을 텐데 / 鐵牛有知應解笑
왜 험난함을 무릅쓰고 서남으로 달리려 하나 / 胡爲涉險西南奔
<이재현(李齊賢); 1287(충렬왕 13년)~1367(공민왕 16년) 고려의 문신.학자. 시인.초명은 지공(之公)자는 중사(仲思),호는 익재(益齋) 실재(實齋),역옹. 저서에 《익재난고(益齋亂藁)》가 있는데, 《역옹패설》과 함께 《익재집》이라 한다.
황하를 보고 이 시를 쓴 이재현(李齊賢)도 철우(鐵牛)를 보았거나 철우(鐵牛)의 고사(古事)를 알았을 것입니다.
이 철우(鐵牛)가 단순히 황하의 홍수를 진압하기 위한 의식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 부교를 설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철우의 뒤쪽(엉덩이부분)에 쇠사슬을 연결했을법한 원통모양의 철기둥이 붙어있는 것으로 확인 되는 듯합니다. 즉 실제 황하를 건너기 위한 부교(浮橋)를 만들기 위해 철우가 만들어젔다고 추정됩니다.
위의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연행록에 나오는 철우(鐵牛)의 이야기와 무관하다 할 수 없을것입니다. . 연행록에 얽힌 고사의 내용과, 황하강변의 철우와 관련 고사들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우는 강을 건너기 위한 부교 설치를 위해 만들었다는것과 , 그 중 일부가 침몰 되었다는것 등이 그렇습니다. 더구나 조선사의 핵심 영역이 현 중국대륙임을 가정한다면, 황하의 철우와 압록강변의 철우고사는 동일한 이야기로 생각됩니다.
연행록상의 구룡정과 철우의 이야기는 황하강변의 철우(鐵牛)이야기와 서로 별개의 이야기일까요...?
월사집([月沙集)을 남긴 이정구 (李廷龜:1564~1635)의 시(詩)에서도 압록강과 철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십년동안 다섯 번이나 용만에 왔었다했는데, 천산 혹은 중앙아 근처가 의주(용만)이라면 대륙조선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중원에서 그곳까지의 여행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월사집 9권 동사록상((東槎錄上)
12월 16일, 제군들과 동대(東臺)에 ~~~
일찍이 듣건대 구룡연이란 못은 / 嘗聞九龍淵
빼어난 경관이 관서(關西)에 으뜸이랬지 / 奇勝冠西國
나는 지난 십여 년 동안 / 伊余十年間
다섯 번이나 용만에 오게 됐지만 / 五作龍灣客
근심과 병에다 일이 몹시 바빠서 / 憂病且倥傯
유람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더니 / 莫能憑勝矚
이번에 와서는 마침 추운 겨울이라 / 玆來値窮冬
방 안에 틀어박혀 몸을 움츠렸지 / 閉門愁凍縮
지척에 두고도 구경하지 못해 / 咫尺阻登眺
울울한 회포를 억누를 길 없었더니 / 鬱鬱難自抑
오늘은 다행히 날씨가 좀 풀려서 / 今辰候纔舒
바람 잔잔하고 햇살은 따스하기에 / 風定煦和旭
옷을 걸치고 우리 일행들 불러서 / 披衣呼我輩
말을 채찍질해서 성의 한길 지나 / 策馬度城陌
동대에 올라서 한 번 조망해 봤더니 / 試升東臺望
가늠할 수조차 없이 가파른 곳이라 / 億丈危難測
드넓은 강물을 바로 마주한 자리에 / 正當江闊處
높고 푸른 벼랑이 불쑥 솟아올랐으니 / 斗起攢蒼壁
여기 올라 조망함에 가없이 드넓어 / 瞰臨浩無邊
하늘과 땅은 한눈에 다 들어오누나 / 乾坤屬一目
되놈의 산들은 발 아래 굽어뵈고 / 胡山拱席底
지는 해는 자리 곁에서 나직하여라 / 落日低座側
큰물이 높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 大水自天來
지축을 세 조각으로 갈라놓나니 / 三分割地軸
남쪽으로 모여서는 용연이 되고 / 南匯作龍淵
동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이 되는데 / 東注爲鴨綠
늙은 용이 깊은 물 밑에 숨어서 / 老龍在其下
천추에 길이 신령한 집 지키면서 / 千秋護神宅
때로 구름의 기운을 일으키면 / 有時鼓雲氣
우레와 천둥이 천지를 진동하지 / 雷霆與霹靂
맑은 물속에 괴이한 신물 숨었으니 / 泓澄閟陰怪
굽어보는 사람이 흠칫 놀라누나 / 俯視令人惕
물위에 눈이 내려서 쌓이고 / 積雪以蓋覆
두터운 얼음장이 또 꽁꽁 덮었구나 / 層氷又閉塞
철우를 빠뜨린 것은 그 언제런고 / 鐵牛沒何時
못물이 깊어서 자취 찾을 길 없고나 / 潭深問無跡
관방에는 문호가 장엄하게 벌여 섰고 / 關防壯門戶
만리라 강역이 여기서 나뉘는구나 / 萬里分疆域
정주며 인주 고을은 / 靖州與麟州
예로부터 연혁이 몇 번이나 바뀌었던가 / 從來幾沿革
들이 끝나는 곳에서 발해를 보고 / 野窮看渤海
강의 형세는 동남방으로 툭 틔었어라 / 江勢東南坼
요동이라 관문에는 보루들 늘어섰나니 / 遼關列亭障
성스런 무력이 변방 요새 제압하도다 / 聖武雄控扼
천자의 위엄 이역 땅까지 떨치었기에 / 天威振殊方
북쪽 오랑캐 변방에 봉화가 꺼졌어라 / 胡塞邊烽熄
우리나라는 재생의 은덕을 입었나니 / 吾邦荷再造
강토의 산하가 그 덕분에 회복되었지 / 山河實恢拓
머리 조아려서 황상의 은혜에 절하고 / 稽首拜皇恩
머리 돌려서 우리 대궐 쪽을 바라본다 / 回頭瞻斗極
종남산에서는 소식이 끊어졌는데 / 終南消息斷
시야엔 첩첩이 가로놓인 천 겹의 산 / 望裏千山隔
술잔을 들어서 서로들 위로하노니 / 擧酒以相慰
변방 노래에 변방의 젓대 소리 섞였어라 / 邊歌雜塞笛
흥에 겨워서 번갈아 술잔 주고받노라니 / 爛熳迭獻酬
산에 석양이 이미 진 줄도 몰랐도다 / 不知山日夕
반쯤 얼큰히 취해 썰매를 치달리니 / 半酣騁雪馬
빠르기가 흡사 바람 안은 돛단배라 / 快若風帆劃
퉁소와 북 소리 물속을 진동하니 / 簫鼓震潭心
어룡이 그만 놀라 길길이 뛰더라 / 魚龍驚踴躍
이 놀이 참으로 장관이었으니 / 玆遊信壯哉
숙원을 이제야 흔쾌히 풀었구나 / 夙願忻始得
가슴속이 시원해 속진을 떠났으니 / 泠然離世紛
정신이 단번에 씻은 듯 개운하여라 / 神魂頓滌濯
시를 적어서 이날을 기록하노니 / 題詩記此日
원컨대 바윗돌 위에 써 두기를 / 願書巖上石
위의 시를보고 관심가는 몇구절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1,‘나는 지난 십여 년 동안 / 伊余十年間
다섯 번이나 용만에 오게 됐지만 / 五作龍灣客’
10년동안 다섯 번이나 용만에 왔었다는것 ; 이 시를 쓴 월사 이정구는 정랑, 집의, 승지, 승문원 부제조, 대제학등 많은 관료생활을 했습니다. 용만(의주)이 현 천산산맥 근처나 중앙아쯤이라면, 한양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공직생활을 하면서, 게다가 근심과 병과 바쁜 업무도 있었다는데, 10년에 다섯 번의 여행이 가능하였을까요..?
2, ‘남쪽으로 모여서는 용연이 되고 / 南匯作龍淵
동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이 되는데 / 東注爲鴨綠’
에서 보듯 압록강은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또 압록강 물의 흐름이 꺽였다는 느낌입니다. 즉 추정을 해 보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동으로 꺾이어, 그 중 한 물굽이가 많은 토사로 자연제방이 만들어지고 자연제방의 남쪽이 자연 호수가 되어 구룡연이 되고 큰 물줄기는 동으로 흘러 압록강이 된다는 그런 느낌입니다. 위의 연행록 <계산기정>에서 ‘압록강의 물이 여기에 와서는 돌아서 가장 깊은 곳을 이룬다.’ 란 구절도 강이 꺾였다란 생각이 들게합니다. 현 황하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다가 동으로 꺾인 그곳<현 화산 북쪽, 영제시 남쪽>과 유사하단 생각은 저 만의 느낌일까요....?
그러나 압록강이 황하인가? 는 더 자세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3, ‘철우를 빠뜨린 것은 그 언제런고 / 鐵牛沒何時
못물이 깊어서 자취 찾을 길 없고나 / 潭深問無跡’
역시, 월사 이정구도 연행록에서와 같이 철우의 고사를 알고 있었고, 그 철우가 빠젔다는 내용까지 황하철우의 이야기와 닮아도 너무 닮았습니다.
잠곡유고 제2권<통군정(統軍亭)에 오르다.>
삼 년 사이 다섯 번 통군정을 보았어라 / 三年五見統軍亭남쪽 북쪽 여러 산들 온통 다 푸르르네 / 南北群山萬點靑내일 강을 건너가선 어느 곳서 묵으려나 / 明日渡江何處宿잔 들이켜 취한 채로 깨어나고 싶지 않네 / 啣盃寧欲醉無醒
<또 하나 언급해야 할 부분은 연행록의 흡단(哈丹)ㆍ지단(指丹)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흡단( 哈丹)(혹은 합단)형제는 고려 충렬왕때 몽고군으로 고려에 침략한 사람입니다. <계산기정의 주 001에 설명> 그런데 청나라 건륭제때 대소화탁의 란(大小和卓之乱)에 대한 바이두 백과에 합단(哈丹) 형제에 대한 내용이 나오더군요.<자세히는 잘 모르겠읍니다>
~~전략~~ 被囚禁于伊犁东北的额林哈毕尔噶,由当地准噶尔宰桑阿巴噶斯、哈丹兄弟看管~~~후략~~~
고려때의 합단형제와 건륭제때의 합단형제는 시대가 다르니 서로 다른 사람들이겠지요? ...>
아무튼 연행록에 나오는 구룡정(九龍亭) 이야기는, 현 북한의 압록강변 어디쯤에 있던 정자는 아닌듯 합니다. 철우의 제작과 사용에 관하여 섬서와 산서를 연결하는 이 황하강변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나 발견유물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재현은 황하의 철우를 시에 언급했고, 이정구는 압록강의 철우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황하의 철우와 압록강의 철우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일까요....?
제 추정이 맞다면, 연행사들은 화음시(華陰市;의주로 추정)에서 황하를 건너 산서성 깊숙이 북경(燕京)을 찾아 갔고, 산서와 섬서를 연결하는 이 황하강변에 구룡정(九龍亭)도 있고, 연행사를 포함한 고려와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이 황하를 다녀갔고 또 건너 다녔다는 생각입니다.
~~~끝~~~
참고자료
<1> 황하철우(黄河铁牛)에 대한 바이두 백과설명
黄河铁牛(10张)古代黄河上的著名渡口——蒲津渡位于山西省永济市古蒲州城西门外黄河东岸,历史上著名的蒲津桥和唐开元铁牛也位于此处。后因黄河东移,开元铁牛等没入水中,悄然消失。20世纪40年代,河水沿蒲州西城墙外流过,据当地老人回忆,枯水季节,下水还可摸到铁牛牛角,行船还有被牛角挂伤船底的情况。50年代后,三门峡库区蓄洪,河床淤积,再加上河水西移,到了六七十年代铁牛已被深埋于黄河水面下2米有余的河滩里了。
1988年,永济县博物馆在县委、县政府的大力支持下,经过一年多的查访勘探,于次年8月发现并出土了唐开元铁牛、铁人,引起各界人士关注。
蒲津渡遗址位于蒲州古城西门外,黄河东岸。保存最完整,最具观赏价值的明代地层距地表约7米。最突出的文物是开元铁牛。 四尊铁牛旁各有一铁人,如牧策牛。铁牛分南北两组。两牛一组,前后摆列,面朝西。铁牛等为唐蒲津桥遗物,排列仍如前桥头所列,可领略大唐盛世筑桥工程一斑。
铁牛每尊高约1.9米,长约3米,宽约1.3米,牛尾后有横轴,直径约0.4米,长约2.3米。轴头有纹饰,各轴不同,分别有连珠饰、菱花、卷草、莲花等。
牛造形生动,前腿作蹬状,后腿作蹲伏状,矫角、昂首,牛体矫健强壮,尾施铁轴,以系浮桥。腹下有山,其下有6根直径0.4米,长约3.6米的铁柱斜前连接,每根铁柱分别有反向出伸铁足各一,功能同地锚。在铁牛的上下部位均有铸范缝痕迹,可观察浇铸、范块痕迹,分析出铸造的工艺技术。黄河蒲津渡遗址的发现展现了我国古代桥梁交通、黄河治理、冶金铸造科学技术等方面的科技成就,为历史地理、水文地质、黄河变迁、环境考古以及黄河治理等方面提供了珍贵资料。
铁牛介绍
两岸,各四尊。铸于唐开元十三年( 725),为稳固蒲津浮桥,维系秦晋交通而铸。元末桥毁,久置不用,故习称“镇河铁牛”。因黄河变迁,逐渐为泥沙埋没。1989年 8月在蒲津渡遗址上经勘查发掘,处于黄河古道东岸的四尊铁牛全部出土。距蒲州城西墙51米,距西城门 110米。铁牛头西尾东,面河横向两排。伏卧,高1.5米,长3.3米,两眼圆睁,呈负重状,形象逼真,栩栩如生。牛尾后均有横铁轴一根,长2.33米,用于拴连桥索。牛侧均有一铁铸高鼻深目胡人作牵引状,现已露出地面部分高1.5米,肩宽0.6米。四牛四人形态各异,大小基本相同,据测算,铁牛各重约30吨左右,下有底盘和铁柱,各重约40吨,两排之间有铁山。
<2> 이정구(李廷龜)-1564∼1635(명종19∼인조13)
조선 중기 문신·문인.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치암(癡庵)·보만당(保晩堂)·추애(秋崖)·습정(習靜).시호는 문충(文忠).
이조, 예조, 병조의 정랑, 집의, 승지를 역임하고 병조참지가 되어 승문원 부제조를 겸했다.
1598년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한다고 자기 나라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국 변무주문을 지어 진주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임을 밝혀 파직시켰다.
귀국 후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 세자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자주관반이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명나라에 갔을 때는 그곳 문사들의 청에 의해 1백여 장의 기행문을 모은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했다.
1608년 광해군의 즉위 후 병조, 예조의 판서를 역임,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 때 모함을 받고 사직, 1615년 형조판서로 기용되고 그 후 여러 차례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왕래했다.
1623년(인조 1) 예조판서가 되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에 왕을 공주에 호종, 1627년 정묘호란 때도 병조판서로 왕을 호종, 강화에 피난하여 화의를 반대했다.
1628년 좌의정에 올랐다. 한문학의 대가로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신흠(申欽),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의 4대 한문장가로 일컬어 진다.
저서로 《월사집》이 있다.
<3>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16.. - 북직(北直) 07..|>
德勝城州東南五裏,古澶淵也。《春秋》襄二十年,晉及諸侯會於澶淵。二十六年,復會於澶淵。三十年,又會焉。杜預曰:澶淵在頓丘南。今謂之繁,近戚田,其後為德勝渡,黃河津要也。五代梁貞明四年,晉王存勖拔濮陽,軍德勝渡。尋遣李存審於德勝南北,夾河築兩城而守之。胡氏曰:時河津闊遠,兩城相距,蓋三十裏。五年,梁賀瑰攻晉德勝南城,百道俱進,以竹笮連艨艟巨艘,橫斷河流,使晉救兵不得渡,為晉將李建及所破。既而梁將王瓚據楊村,夾河築壘,造浮橋,謀攻德勝。晉將李存進亦造浮橋於德勝。或曰:浮梁須竹笮、鐵牛、石,我皆無之,何以能成?存進不聽,以葦笮維巨艦,系於土山巨木,逾月而成,人服其智。晉王尋自魏州發徒數萬,廣德勝北城。梁人來爭,晉王拒之,大小百余戰,城始就。龍德初,戴思遠復自楊村襲晉德勝北城,為晉所敗。明年,復攻北城,重塹復壘,斷其出入,晝夜急攻。晉將李存審悉力拒守,晉王自幽州馳救,思遠引卻。後唐同光初,梁王彥章自楊村徑攻德勝,力戰斷其浮橋,南城遂陷。唐主命棄北城,撤屋為筏,東助楊劉守備。彥章圍楊劉不克,退走楊村,唐軍復屯德勝。石晉天福三年,時瀛、莫諸州入於契丹,河北無藩籬之固,於是移澶州跨德勝津,並頓丘縣亦隨州移治郭下。是時作浮橋於德勝口,謂之澶州河橋。於是兩城有南澶、北澶之目,蓋以防固河津也。九年,契丹攻澶州,欲奪浮梁,不克。開運三年,契丹入汴,遣酋帥耶律郎五據澶州。賊帥王瓊帥眾襲據南城,北渡浮航,圍郎五於牙城,契丹救卻之。漢乾三年,郭威舉兵鄴都,漢主遣侯益等將兵趣澶州。威至,澶州降,遂渡河,趣滑州。宋景德初,契丹入犯,寇準勸帝親征。駕至南城,眾請駐蹕,準固請渡河,禦北城門樓,士氣百倍。既而幸浮橋,登臨河亭。蓋是時,澶州猶治德勝城也。慶歷中,嘗增修之。熙寧九年,城圮於水,因改築州城,以濮陽縣為州治,非復石晉所移之舊矣。《九域誌》:澶州距魏州百三十裏。胡氏曰:此據故澶州北城言之,自南城度河並浮梁計之,則百五十裏,故晉人每言澶州距魏百五十裏也。蓋澶州徙治不一,大約唐治故頓丘城,石晉時治德勝,宋始治濮陽。《一統誌》雲:今州南有故德勝寨。楊劉,見山東東阿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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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태조는 친병(親兵) 1천 6백 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이르러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강을 건너는데, 사졸(士卒)이 3일 만에야 다 건넜다.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니 요성(遼城)과의 거리가 2일 길이었다. 군대의 짐[輜重]은 그냥 남겨 두고 7일 양식만 가지고 행진하였다. 비장(裨將) 홍인계(洪仁桂)·최공철(崔公哲) 등을 시켜 빠른 기병[輕騎] 3천 명을 거느리고 요성을 습격하게 했는데,
중종 23년 무자(1528,가정 7) 10월4일 (임인)
, 9월에는 서리가 내리더라도 나뭇잎은 아직 떨어지지 않아서 초목이 매우 빽빽한데, 올해에는 또 추수(秋水)가 많거니와 내년에도 이러하면, 압록강(鴨綠江)의 부교(浮橋)도 조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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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든 연행록은 고쳐쓰여진 것입니다. 서안이 북경이고 장안입니다. 지도에서 봤습니다. 그 지도에는 서안 오른쪽에 산해관도 있습니다.
서안이 북경이고 그 옆에 산해관도 있다는 지도를 보고 싶읍니다.
압록강변의 철우의 이야기와 황하의 철우는 서로가 별개라고 생각하시는지가 궁금합니다.
근디 여러 문헌을 종합적으로 놓고 판단할때 북경에 갈려면 초원지대와 막지대를 거쳐야 되는디 현재 서안에는 없다는것이 골머리를아프게합니다. 그래서 말한 그지도도 결국 지명이 옮겨진지도라고밖에 생각되질않습니다. 혹시 일째때 조작세력들이 북경을 갈려면 사막과초원지대를 거치도록 각색한것이 아닐까요? 원래는 사막과초원지대가 아닌데 모르게하기위해서 전부 뜯어 고칠수도 있다는겁니다. 글고 마치 꼭 또같이 등장하는게 북경에 갈려면 그 거리가 만리라고 들 합니다. 전부 다그렇습니다. 어떤사서에는 세계일만여국에서 조공과폐백을갖고조선황제를뵈알하러온다는기록도 있는데 이거시바로 신화와전설처럼만들려는조작이아닐런지
연행사들이 찾아갔던 유주의 검은 모래사막은 우리가 알고있는 보통의 사막(고비, 중가리아, 타클라마칸, 키질쿰사막 등)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연행사들은 겨울철에 북경을 갔고 ,여름철과 가을의 푸른 산천을 보다가(현 서안과 낙양은 위도가 약 35도 정도로 우리나라의 전남 남해안 수준입니다.)겨울철에 더구나 황량한 북쪽의 반건조지대를 (산서성) 보니, 사적 혹은 사막이라 한것같읍니다. 바람이라도 불면 더더욱 흑먼지가 날리니 그런 표현들이 안 나올리없겠죠..
연행록에 보이는 이 사막지대는, 여름에는 물이 차 있어(물이 잘 빠지지 않는) 진흑탕길이고, 겨울철에는 모래먼지 날리는 그런 평야지대입니다. 실제로 여름철에 여행했던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조천기를 보면 사막을 여행했다는 느낌이 거의 없읍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비가 오니 창마철이 분명히 존재하는 곳이죠...
의주부터 북경까지의 거리는 대략 2천여리로 되어 있읍니다. 왜곡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보입니다. 왜곡, 조작하기 가장 쉬운것은 거리와 방향이라 생각됩니다. 노정중에 회령령과 청석령이 가장 높은 고개이고 그 나머지는 소소하다 했읍니다. 단순한 저의 추정으론 회령령과 청석령은 연행록중 후반부에 나와야 할 고개가 연행록 전반부에 나와있단 느낌입니다. 아마도 현 요동반도의 산맥(천산산맥?)을 통과하야하는 상황인지라 연행록 전반부에 몰아넣은듯한 느낌입니다.
백두산의 위도-청성잡기 5권
한양의 북주 고도 37도 15분, 위원은 40도 51분, 백두산 42도 남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