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밥상을 모방한다. -가정은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모루아-
“밥 차려놨다. 밥 먹어라.” 자식 밥 먹이는 것이 삶에 대한 목적이었던 어머니의 이 부름에 대한 목소리만큼 따뜻한 것은 없었다. 아직도 그만큼 그리운 말은 없다. 어머니의 밥은 자식사랑의 근원이었으며 사람을 위한 정의 근본이었다. 자식은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은 늘 당연하게 그냥 지나치고 그냥 먹으면 되는 줄 알았던 그냥 밥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밥은 어두컴컴한 새벽에 가장 먼저 쌀 씻는 소리로 하루를 배부르게 시작하는 삶의 원천이었다. 한편 어머니의 밥이란 속을 풀어주는 무국이거나 젖국냄새 물씬 나는 겉절이와 함께 향긋하게 씹히는 계절나물까지 모두 어머니의 작품이었다. 사실 내게 특별한 추억의 밥이란 화목하고 안정적인 가정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따뜻한 밥이 있었기에 어린 시절이 꽤 따뜻하게 기억된다. 아마도 밥은 그저 밥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이고 눈물이었겠다는 기도의 힘일 것이다. 국민 엄마들의 수다 속에는 아침엔 무슨 국을 끓일까? 또는 저녁엔 뭐 해 먹을까? 아니면 그런 거 하지 않고 소소하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밥상 한 번 받아볼 수 없을까? 그러나 자식을 생각하면 금새 앞치마를 두르고 환하게 렌지에 불을 켠다.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게 자식을 키워왔고 나 역시 내 아들의 밥상을 그렇게 준비했던 만큼 며느리에게도 그런 친정어머니가 계셨다. 아들아이가 결혼하여 두 달이 되었으니 아직 새 식구의 존재는 단체 행사 마지막의 경품 추첨하는 순간처럼 설레고 귀한 기쁨이다. 감사하게도 내 자식이 된 며느리에게 정성과 기도와 사랑을 곁들여 밥상을 차려 줄 기회가 온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그 어머니의 작품을 모방해보기로 한다. 내가 어머니 되어 두 달된 며느리를 위한 특별한 밥을 준비하려는 것이다. 이번 설 연휴는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하루가 더해지니 직장인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신명나는 명절이 되겠다. 한편 직장생활에 힘겨움을 견디어 본 기억으로 하여금 충분히 이해하고 남음이 있어 되도록 아이들의 휴일은 반나절이라도 부모를 위하여 헐어 쓰지 않게 하려 애쓰는 편이다. 하여 설 전날 우리부부는 해외여행을 계획하였고 그러다보니 명절 전 일요일에 점심정도 함께 하자는 의견을 모아 만나게 된 것이다. 아이들과의 약속이 된 그 날부터 마음속으로는 식단을 구상하고 식재료를 어떻게 조리해서 보기에도 먹기에도 좋은 음식을 만들어 아이들이 특히 며느리가 잘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러한 생각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과 행복이었다. 젊었을 적 귀한 손님을 맞이할 초대상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좋아할지? 요즘 젊은이들은 건강과 다이어트를 염두하고 영리하게 챙겨먹는 그런 음식은 무엇일까? 귀찮거나 번거로움을 떠나 이것저것 준비하는 내내 기쁨이고 활력이 되었다. 그렇게 밥 한 끼를 준비하여 설 명절을 한참이나 앞두고 아들내외가 들어오는데 아직 주방에서 상차림을 준비하는 내 가슴은 하염없이 두근거렸다. 이런 것이었구나. 자식이 성장하여 옆구리에 달랑 달랑 자기 짝 달고 들어오는 풍경을 맞이하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구나. 어쩌면 유난스럽지 않았던 인생을 화려하게 보상받는 이런 행복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각자가 하나의 우주이다. 그 우주에 내가 들어가거나 다른 사람이 내 우주에 들어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불편한 일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연이 소중한 이유는 서로의 세상을 고집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없으니 서로가 더 소중하고 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삶의 모든 의미와 희망이 고스란히 담긴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이 순간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후배 며느리를 맞아 처음 대접하는 밥 한 끼는 그냥 당연하고 무심한 밥이 아니라 서로의 소중함에 대한 감사와 잘 살아주기를 바라는 깊은 염원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녀들의 완성된 가정을 바라보며 살아보니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남과 누군가의 부모로 산다는 것 중 어떠한 생에 의미를 더 크게 둘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면서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도 무한하지만 부모 역시 자식에 대한 감사가 이처럼 끝도 없다는 것을 느낀다. 이는 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한 부모님이나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 배웅의 손을 잡아 줄 자식으로 하여금 인생은 이래저래 품앗이가 틀림이 없으니 자신과 상대에게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아들내외는 며느리의 제안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세배를 하겠단다. 세배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내 가슴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들아이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되도록 세배의 기본을 가르치지 못했던 부모 입장이 많이 미안하고 며느리에게 부끄러웠다. 그리고 가지런하고 단정하게 배워와서 우리 가족의 훌륭한 자리를 메꿔 줄 며느리에게 감사했다. 누군가에게 절을 받아 본 기억조차 없는 뜻밖의 세배를 받으며 남아있는 세상의 끝자락도 점점 가까워짐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준비해 둔 복 돈을 건네며 덕담까지 보탠다. 행복하다는 것은 감정이고 감정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심하는 것이다. 아울러 벅찬 감정을 내 가슴에 품으려 노력하면서 둘이면 둘 셋이면 셋이서 표현하고 나누어야 빛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서로에게는 사랑이 단절되지 않은 수단이 되는 것이며 부모의 가슴까지 밀고 들어오는 도란도란 보기 좋은 자식 행복의 풍경이 되는 것이다. 수없이 대화를 하거라. 매듭처럼 엮인 순간이거나 헝클어진 순간이라도 자분자분 나누는 대화로 하여금 물꼬가 트일 것이야. 그렇게 오늘 하루를 잘 살아 내는 것, 그것이 모여 평화로운 인생이 되는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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