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토요일 세상에 없는 가장 중요한 세미나
인류가 스스로 자신들을 구해낼 수 있는 절대지혜(반야)란 과연 있는가? 있다면 그 실체는 무엇인가?
인류는 모든 고통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자유, 평화, 행복을 누릴 수가 있기는 있는가? 하느님은 인류를 정말 구원할 수 있는가?
2600년 고타마 싯다르타는 해탈과 열반으로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면 절대지혜 반야를 깨달아야 한다고 조건을 붙였다.
2000년 전 예수는 구원을 받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조건은 <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착한 마음과 행동, 충성, 온유, 절제 > 등이다.
1800년 전 나가르주나는 우리 세상의 진실을 본다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며 대승불교를 일으켜세웠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인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불교는 발상지 인도에서 쫓겨나 스리랑카와 미얀마, 태국 등으로 밀려났다. 예수의 기독교는 이스라엘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그들을 탄압하던 로마에서 일어나 유럽으로 퍼져나갔지만 지금도 예수의 고국 이스라엘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또한 아랍인들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코타마 싯다르타의 불교를 소승이라고 몰아붙이며 그 자리를 차지한 대승불교 마하야나는 한때 인도,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분지의 여러 왕국, 중국, 한국, 일본 등으로 기세를 떨쳤지만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지고, 중국은 관광용 불교, 한국은 유교에서 받아들인 제사형 겸 무속형 불교, 일본은 신도(神道)형 불교, 티벳은 무속의 하나인 본교( བོན།)형 불교로 변질되어 불교의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고타마 싯다르타, 예수, 나가르주나(용수)가 거짓말했나?
아니면 인류가 이 분들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나?
이번 세미나에서는 해탈, 열반, 구원이란 말이 근거없는 미신이나 망상인지, 실체가 있는 철학이자 진짜 지혜인지 그 정체를 추적한다.
<깨달음> <구원> <해탈> <열반>이라는 말은, 망상으로 숱한 사람을 속여온 거짓말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절대지혜라는 사실을 뇌과학으로 증명한다.
또한 반야, 보리, 지혜 같은 말들이 허망한 개념이 아니라 뇌과학으로 뚜렷이 보이고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진짜 지혜라는 걸 실증으로 설명한다.
말하자면 잃어버린 고타마 싯다르타, 예수 크리스트, 나가르주나를 찾아 돌려주고자 한다.
이 분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승려, 신부, 목사들이 거짓말한 것일뿐이라는 사실을 논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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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나 시간, 날짜, 장소
8월 3일 토요일 오후 1시부터~(2시간)
(3급, 2급 과정 상담사들은 12시까지 오셔서 점심 식사를 함께 합니다
메뉴는 사전 주문해야 하니 단톡이나 댓글로 알려주세요)
장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상덕로 69 ,<카페 포물선> 2층
031 321 2269
오시는 길 / 네비게이션에 상덕낚시터.
또는 용인대까지 온 뒤 터널 지나 5백 미터 앞에서 우회전하면 저수지 나오고, 그러자마자 카페 나옴.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주차 : 아무 데나 길가에, 불편해도 상덕낚시터에 세우면 매우 안전
* 기본 회비(3만원)가 있습니다
바이오클락연구소
(참가 문의 / 총무 박소연 010 9911 3210)
* 점심과 차를 주문해야 하므로, 특히 점심 메뉴를 정해야 하므로 사전 신청은 필수입니다)
- 메뉴 3가지 중 하나(카페라 어쩔 수 없으니 서운하시면 먹을거리를 싸오십시오)
카레덮밥 + 음료
샌드위치 + 음료
로제스파게타 + 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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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지혜 반야에 대한 도전, 그리고 완성
-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해탈, 열반, 구원의 정체를 밝히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을 확실히 제시한다
1. 고타마 싯다르타의 불교를 테라와다라고 하는데, 인도 동북부에서 고만고만하게 존재하다가 700년만에 스리랑카로 밀려나고, 거기서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등으로 흩어졌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고향인 네팔과 인도에서는 전혀 다른 불교가 일어났다.
마하야나(대승)라고 하는데, 마하야나의 어떤 경전도 고타마 싯다르타가 말한 적이 없는 가짜들(마하야나들이 이렇게 말한다)이다. 나쁘게 말하면 가짜 경전이란 얘기다. 붓다란 이름만 같고 나머지는 다 새로 지어낸 경전들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구약성경을 훔쳐다가 가짜인 신약과 붙여 만든 사이비 종교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마하야나는 반야경, 화엄경, 금강경, 법화경 등 주요 경전 내용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가짜가 진짜보다 더 좋은, 그러면서 4성제 8정도라는 너무 어렵고 모호한 수행법 말고 6바라밀이라는 상대적으로 할만한 수행법을 가르치니 이래저래 크게 일어났다. 신라까지 들썩거렸다.
그런데 이 마하야나는 대략 700년만인 1193년, 이슬람군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이 마하야나의 고향인데 이슬람군이 한번 쳐들어오자 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또 마하야나를 중국으로 전해주던 위구르 지역의 여러 왕국들도 이슬람에 완전히 넘어가 불교는 동굴 속으로만 숨어버렸다.
또 중국으로 간 마하야나는 삽시간에 도교화되어 도인이 되고, 도를 닦는 것이 되어버렸다. 쿠마라지바는, 중국인들이 노장 사상에 물들까봐 불교 어휘를 따로 만들어가며 불경을 번역했는데, 걱정하던대로 노장 사상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려까지는 대승불교가 뿌리를 제대로 내렸는데, 조선에서는 거의 도교, 유교에 물들어 이게 도교 얘긴지 유교 얘긴지 알 수 없는 저술이 많다,.
20세기 큰스님들 법문이나 저술을 봐도 마찬가지다. 또 마하야나는 참선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참선 하는 스님은 눈 씻고 찾아보기가 힘들고(참선 안하는 이가 가사 입는 건 반칙이다), 참선법 또한 테라와다 것도 아니요, 마하야나 것도 아닌 중국 도교 참선법이다.
그래도 우리나라 불교는 공산당한테 무너진 중국이나 신도에 빨려들어간 일본과 달리 자주 의식이 워낙 커서 불교원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승려들이 막상 수행은 따라하지 못해도 붓다의 가르침이나 나가르주나(용수)의 대승 정신은 하나도 빠짐없이 잘 지키고 있다.
2. 테라와다의 수행 조건에 아나파나 사티는 거의 첫번째 수행법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테라와다 지역에서도 막상 아나파나 사티를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대승불교한다는 우리나라에 비해 꽤 있다고는 하지만 60만 비구를 보유한 미얀마의 경우 아나파나 선원에는 겨우 몇 만 명도 없는 것같다.
우리나라는 2024년 하안거에 조계종 승려 1만 5천여 명 중 2000명이 선원에 등록했다는데, 출퇴근하는 큰절 주지들, 벼슬 가진 승려들이 대부분이고 진짜 참선하는 사람은 훨씬 적다고 한다. 다른 종단은 아예 참선 자체가 없다고도 한다.
어떻게 보면 참선 안하는 사람은 정통 개념의 비구가 아니다, 즉 스님이 아니다. 어렵게 출가까지 해놓고 참선 수행조차 안하면, 그냥 직업인으로 산다는 얘기다.
그런데 나 역시 아나파나 수행을 하다 보니 함께 하자, 같이 하자던 동료들이 하나둘 없어지는 걸 보니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겨우 알았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권할 수가 없다. 열 살이 지나면서 생리를 하기 시작해 50세가 넘도록 달마다 200g에서 300g의 피를 쏟고, 아이를 임신하면 거의 9개월 동안 주요 영양소를 다 빼앗긴다. 그런 아이를 옛날 여성들은 10명에서 5명까지 낳았다. 지금은 둘이나 하나를 낳는데, 이것도 엄청난 영양 손실이다.
남성이어도 지치고 힘이 들면 아나파나 사티가 안되는데, 영양이 부족하고 잠 못자고 근심 많은 이는 결코 아나파나 사티를 할 수가 없다.
아, 그래서 출가하여 비구가 되라고 했구나,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막상 출가한 승려들조차 주지 자리 놓고 욕심 내고, 돈이라도 있어야 세간살이도 놓고, 절이든 집이든 고쳐 쓰련만 막상 돈에 시달리면 다리 틀고 앉아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아프면 병원비 드는 건 마찬가지고, 먹는 것도 마찬가지라 채소와 열매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결국 빛을 쫓아다니다 보면 그게 죽는 길이지만 보채는 신도들에게 없는 복이나마 기도를 해주든, 부적을 써주든, 재를 올리든 돈받고 파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결론은, 아나파나 사티는 정말로 힘든 수행이라는 말이다. 현실의 아픔을 깨닫게 해주는 수행이고, 우리가 사바에 살고 있다는 걸 실감시켜주는 수행법이다.
3.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출가 비구조차 깨달음을 모르는데, 신도들은 그나마 누굴 의지해 복을 구하고, 근심을 던단 말인가.
사실은 그래서 불교가 두 번이나 망한 것이다.
이번 세미나에서 발표할 건 왜 불교는 두 번이나 망했나 그 이유를 찾아보고, 우리들이 올바로 나아가야ㅑ 할 길은 무엇인지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붓다도, 나가르주나(용수)도 반야를 깨닫는 걸 불교의 이상이나 목표로 삼았는데, 왜 그들은 그 반야를 찾은 사람이 없나 그 이유도 아울러 찾아본다.
붓다 말고는 붓다가 된 사람이 없다는 이 아이러니를 파헤쳐본다.
왜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가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에서는 인기가 없는지, 거의 망한 이유가 뭔지 보자.
예수 말고는 구원 받은 사람이 없는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일어난 아랍에서 기독교는 자취도 없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슬람에 밀려 도리어 그들을 억압하던 로마로 달아난 이유는 무엇인지 보자.
이슬람 역시 불교 믿는 사람들을 모조리 데려가고, 기독교 믿던 사람들을 다 빼앗아갔지만 그들 역시 신도들에게 주는 것은 고통, 시련, 죽음, 테러, 전쟁 뿐이다.
3. 그래서 따져본다.
누가 무슨 거짓말을 하는지 깊은 곳의 깊은 곳까지 파보고, 먼 곳의 먼 곳까지 다가가 들여다보련다.
그러면 비판만 하고 끝날 것인가. 아니다. 대안을 찾았다.
붓다가 평생 강조한 그 반야의 실체를 우리는 이제 볼 수 있다.
예수만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논증할 수 있다.
우리는 종교를 뛰어넘어 지혜로써 <사람의 길>을 들여다 볼 것이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해야만 하며, 무엇으로 구할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