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보그다노비치의 첼로 연주때는 잠을 잤다.
무등 하산 후 구슬 땀에 절은 몸을 목욕탕에 가서 씻었다.
위 옷 두 개를 씻어 열사우나에서 말렸다.
연주회 끝나고 30분 여유시간에 충장옥에 가서 육개장을 먹었다.
농땡이 교수 월터는 공저자 명의를 빌려 준 일로
뉴욕에 출장을 와 자기 집에 들른다.
집은 문이 열려있고, 젊은 연인이 속아 2달째 살고 있다.
짐을 끌고 나가는 그들을 불러오고
피아노 교사였던 아내의 (고급스런?)피아노 앞에서 레슨을 받지만
영 진도가 없던 그가 시리아 청년의 북을 배운다.
그의 삶에 할기가 넘치던 때
청년은 불심검문에 걸려 이민국에 끌려가고
월터는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그의 어머니가 찾아온다.
그의 어머니 역을 맡은 이는 '레몬 트리'에서
이스라엘 국방장관과 맞서던 그 배우다.
기자였던 남편이 7년간의 옥살이를 마친 후 나와 죽자
미국으로 와서 아들이 다시 잡혀갈 것을 두려워했는지
출두 통보서를 없애버렸단다.
둘은 왜 결혼으로 해결하지 않았을까?
결혼했으면 쫒겨나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농땡이임을 고백하는 그에게 여인은 고맙다고 한다.
마지막 비행기를 타는 어머니의 눈물젖은 모습이 남는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이들을 갖고 노는 미국이라고 그는 흥분한다.
세네갈 여인이나 시리아 청년이나 엄마는 다 사랑하고 잘 어울리는데
나라는 그런 걸 잘 모르는 것 같다.
사람사이의 관계에 개입할 수 있는 공권력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내 속에 숨어있는 그 무엇을 모르는 채
박범신의 우화처럼 '헛된 산'을 계속 잘못 오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