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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여 :
면적 624.48㎢, 인구 9만 2667명(2001)이다. 동쪽으로 논산군, 서쪽으로 보령시와 서천군, 북쪽으로 청양군과 공주시, 남쪽으로 전라북도 익산시와 접한다. 동서간 거리 34.3km, 남북간 거리 33.6km이다. 1읍 15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725번지이다.
차령산맥이 충청남도의 북동에서 남서부로 이어져 군의 북서쪽을 지나면서 구릉지를 이루고, 성태산(631m)·만수산(432m)·월명산(544m)·옥녀봉(368m)·원진산(271m) 등이 솟아 보령시·서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군의 동부를 관류하다가 남쪽 군계(郡界)를 이루는 금강 연안에 충적평야가 펼쳐지고, 북부·서부 산지에서 발원하여 금강으로 흘러드는 은산천(恩山川)·구룡천(九龍川)·금천(金川)·사동천(寺洞川)·여사천(餘士川) 등의 하천 유역에도 크고작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내산면(內山面)에서 발원하는 구룡천은 금천과 합류하여 논산읍 대안(對岸)에서 금강으로 흘러드는데, 이 두 하천 유역의 구룡평야는 3,000ha가 넘는 옥답을 이루어 군내 제일의 곡창지대가 되고 있다.
황해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내륙적인 색채가 현저하지 않으며, 강수량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 13℃, 1월 평균기온 0.4℃, 8월 평균기온 24.6℃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388.4mm이다.
2.공주 :백제의 22대 문주왕이 동원년(서기 475년 )에 하남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하남시)에서 왕도를 「웅진」(현재 공주)으로 옮기고 5대64년간(문주왕 2년, 삼근왕 2년, 동성왕 22년, 무령왕 22년, 성왕 16년) 백제의 왕도로 내려오다가 백제의 중흥을 꾀한 성왕이 동 16년에 (서기 538년)왕도를 다시 「사비성」(현재 부여)으로 천도 하였다. 사비천도후 백제의 지방통치 조직으로 5방제(사비를 중심으로 중방, 동방, 남방, 북방)가 설립되어 구도 웅진은 사비의 북방으로서 웅진 방령을 두고 10개군을 통솔하였다
3.부여 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29년 재단법인'부여고적보존회(扶餘古蹟保存會)'가 발족되어 백제 문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부여의 여러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려고 힘썼다. 그 뒤, 이 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의 유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를 하나 둘씩 모아, 부소산 남쪽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인 관아의 객사에 전시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4.공주 박물관 :백제 문화재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연건평 2,082.3㎡. 소장유물 8356점(1995 현재).
1934년 공주고적보존회(公州古蹟保存會)가 설립되고, 1940년 옛 관아(官衙) 건물인 선화당(宣化堂)에 공주읍 박물관이 개관되어 공주 사적현창회(史蹟顯彰會)가 관리하였다.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으로 개관하고, 1972년 12월 30일 새 공주박물관이 건립되어 1973년 5월 1일 새로 발굴된 무령왕릉(武寧王陵) 출토유물 2561점을 중심으로 전시하여 개관식을 가졌다. 진열실은 1실로 되어 있으며, 1971년에 출토된 무령왕릉 출토유물이 주종을 이룬다. 마당에는 석조물이 전시되어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으로 이전할 계획인데, 2001년 현재 대지면적 6만 9865㎡에 2002년 8월 완공을 예정으로 신축중이다.
5.무녕왕릉 :1977년 12월 29일 경상북도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8,256㎡ 으로, 둔진산 남쪽 기슭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보물 117) 동북쪽에 있으며, 왕릉이라고 전하나 정사에 기록이 없어 누구의 묘인지 추정하기 어렵다. 신라 54대왕 경명왕의 다섯 번째 왕자 박언창의 묘라는 전설이 전하는데, 박언창은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되었으나 후에 사벌국이라 칭하고 자립왕으로 11년간 다스리다 견훤의 침공으로 패망하고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삼층석탑 옆에 왕릉에 속한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석탑의 서북 편에는 상산박씨 문중에서 건립한 재실이 있다. 현재 능 앞에 세워져 있는 석물들은 오래된 것이 아니며 신도비는 1954년에 세워진 것이다. 상주시가 1981년 12월 능역을 확장하고 왕릉, 영사각등 주변을 보수·정화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옛 사벌국의 성이 병성산에 있고 이 성의 곁에 있는 언덕에 우뚝하게 솟은 고분이 있어 사벌왕릉이라 전해오고 있다” 라고, 《상주군읍지》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만 위치가 “성의 북편 9리쯤 떨어진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6.공주 송산리 고분 :
사적 제13호. 해발고도 130m의 송산을 북쪽의 주산으로 한 송산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벽돌무덤과 할석 ·괴석으로 만든 돌방무덤 10여 기가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7기의 분포를 보면 계곡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 동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5호분은 궁륭으로 된 천장식 돌방무덤인데, 1~4호분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직후부터 6세기 초반에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터널형 천장의 벽돌무덤으로서 백제시대의 벽돌무덤으로는 이 두 개만이 남아 있다. 6호분은 벽 네 면의 일부에 사신도를 그려넣은 벽화고분으로서 긴 배수구가 널길을 향해 밖으로 뻗고 있으며, 벽돌의 무늬와 축조방법상 무령왕릉보다 조금 앞선 6세기 초의 무덤으로 보인다. 6호분의 배수로가 5호분의 널방[玄室] 아랫부분을 지나고, 무령왕릉의 배수로 상면에 5호분의 봉토 일부가 걸리는 점으로 보아 무령왕릉 역시 5호분보다 일찍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7.부소산성 :
예성강 서쪽 영안촌(永安村)의 부잣집 딸 구치의(具置義)에게 장가들어 부소군(扶蘇郡)의 오관산(五冠山) 마가갑(摩訶岬)에서 살았다.
그 무렵 풍수지리에 밝은 패강진(浿江鎭)의 두상대감(頭上大監)인 김팔원(金八元)이 부소군에 와서 말하기를 “만약 부소군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일하는 자가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부소군 사람들과 함께 산의 남쪽으로 옮겨 살며 소나무를 온 산에 심고 송악군(松嶽郡)이라 하였으며, 그 자신은 송악군의 상사찰(上沙察)이 되었다.
그리고 마가갑의 집을 영업지(營業地)로 삼아 송악군을 왕래하면서 천금을 축적하였다. 이후 막내 아들 보육(寶育)을 통하여 가계는 작제건(作帝建), 융(隆)으로 이어져 왕건에 이른다.
8.낙화암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000여 명이 백마강(白馬江) 바위 위에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그 바위를 사람들이 낙화암이라고 불렀는데, 이 암석 위에 1929년 다시 그곳 군수 홍한표(洪漢杓)가 백화정(百花亭)을 지었고, 절벽 아래에는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9.계룡산 :높이는 845m이다.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해 연천봉·삼불봉·관음봉·형제봉 등 20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으며, 전체 능선의 모양이 마치 닭볏을 쓴 용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계룡산이라고 불린다.
신라 5악(五嶽) 가운데 하나로 백제 때 이미 계룡 또는 계람산, 옹산, 중악 등의 이름으로 바다 건너 당나라까지 알려졌으며, 풍수지리상으로도 한국의 4대 명산으로 꼽혀 조선시대에는 이 산 기슭에 새로이 도읍지를 건설하려 했을 정도이다. 특히 《정감록(鄭鑑錄)》에는 이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 즉 큰 변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라 했으며 이러한 도참사상으로 인해 한때 신흥종교 및 유사종교가 성행했으나 종교정화운동으로 1984년 이후 모두 정리되었다.
지질은 대체로 중생대 쥐라기·백악기에 형성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차령산맥이 금강에 의해 침식되면서 형성된 잔구성 산지로서 산세가 웅장하고 경관이 뛰어나다. 노성천·구곡천·갑천·용수천 등이 발원하여 금강으로 흘러든다. 연평균기온은 11℃ 내외, 연강우량은 1,280mm이며 6~9월에 강우량의 90%가 집중된다.
10.동학사 :계룡산 상봉 북동쪽 골짜기에 위치한 이 절은 724년(신라 성덕왕 23) 상원조사(上願祖師)가 조그만 암자를 지은 것을 후에 회의(懷義)가 창건하여 이름을 상원사(上願寺)라 하였다. 937년(고려 태조 20)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承官) 유차달(柳車達)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始祖)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낼 때, 동계사(東鷄祠)를 건축하니 참선승려들이 운집하여 사찰이 커지게 되었고 후에 동학사로 고쳤다고 한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 때 소실된 것을 1814년(순조 14)에 월인(月印)이 예조(禮曹)에 소(疏)를 올려 10여 칸을 중건하고, 1824년에는 홍희익(洪羲翼)이 별채를 짓고 인신(印信)을 봉안하였는데, 1864년(고종 원년)에 보선국사(普善國師)가 모두 헐고 절 40칸, 초혼각 2칸을 중건하였다. 6 ·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5년 개축하였다.
조선 태조 때는 길재(吉再)가 이 곳에서 고려의 왕족과 정몽주(鄭夢周)를 위하여 기도하였
11.갑사:
지방유형문화재 제105호. 앞면 5칸(15.98m), 옆면 3칸(9.89m)의 맞배지붕으로, 공포(貢包)는 안팎 3출목(三出目)이며 가운데 3칸에는 2개씩, 양 협칸에는 1개씩 배치하였다. 가구(架構)는 내고주(內高柱)를 세우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얹어 마루보를 받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