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라쇼몽(羅生門)
1. 과거의 개봉관이었던 <헐리우드극장>은 2009년부터 극장의 성격을 변환시켰다. 서울 중심에서 개봉관들이 사라지던 시기였다. 대신 헐리우드는 종로 2가 탑골공원에 모여드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저렴하게 과거의 영화를 재방영하는 독특한 성격의 영화관으로 변모하였다. 55세 이상이면 2000원이라는 싼 가격으로 노인들에게 추억과 위안의 시간을 제공한 것이다. 과거 한국인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서구의 배우들을 다시금 만날 수 있는 소중하고 의미있는 경험이다. 두 개의 상영관에서 한 영화당 대략 3-4일 정도 상영하는데 대부분은 보통 수준의 작품들이지만 간혹 영화사에 빛나는 우수 작품을 상영하기도 한다. 다른 곳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우수 작품을 대형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너무도 쉽게 정보와 문화에 익숙해진 지금이지만, 막상 좋은 것을 좋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은 여전히 어렵기 때문이다.
2. 책이나 문헌을 통해서만 접했던 일본의 세계적인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대표작 <라쇼몽(羅生門)> 상영을 알게 되었을 때 꼭 보러가야 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작품에 대한 묘한 궁금증때문이었다. 작품에 대한 정보는 특별히 없었다. 다만 살인사건이 벌어진 상황, 살인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엇갈린 증언을 통해서 인간의 이기심과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 그리고 인간관계에 복잡한 측면을 세련되게 그려낸 좋은 영화라는 점은 듣고 있었다. 영화는 흑백의 묘한 화질 속에서 시작되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나생문에 모인 사람들 한 사람이 꺼내놓은 잔혹한 살인의 이야기가 영화의 출발이었다. 길을 가던 부부가 있었고, 여성에게 매력을 느낀 한 도적이 여성을 겁탈하고 남성을 살인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살인과 관련된 동기 및 살인의 과정에 대한 진술이 모두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도적도, 여성도, 목격자도, 심지어 무당을 통해 나타난 남편의 영혼도 모두가 다르게 살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실은 서로의 다른 진술 속에서 실종되고 없었다. 모두가 각자의 필요성과 이기심 때문에 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3. 각자가 이야기 한 사건의 내막 중 흥미로웠던 점은 살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살인의 동기를 합리화시키려는 태도였다. 도적은 자신이 남성을 죽였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여성의 사주와 남성에게 충분한 결투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였다. 여성 또한 겁탈을 당한 후 남편의 차갑고 잔인한 태도에 분노하여 자신이 죽였다고 진술한다. 무당을 통해 등장한 남편의 영혼 또한 두 사람이 아닌 결과적으로 자신의 분노에 의해 자신이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각각의 진술에는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기이한 진술이다. 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아니라 살인의 행위가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자신의 부끄럽지 않은 태도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살인 그 자체가 아니라 살인과 관련된 세간의 평가에서 떳떳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그릇된 윤리적 태도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발언은 살인을 했더라도(자살을 했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타인의 문제라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벌어지는 일종의 자신을 합리화하는 인정투쟁이 아닐 수 없다.
4. 이러한 엇갈린 진술 속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 승려는 인간들의 거짓과 이기적인 합리화 속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가 파괴되고 있는 모습에 좌절한다. 인간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에 대하여 거짓으로 상대할 때 이 세상은 말 그대로 지옥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던 한 부랑아는 그것이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항변한다. 진실은 없으며, 사람들은 각자의 필요성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라쇼몽에서 발견한 한 아이의 물건을 가져가는 악행을 벌이면서도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는 논점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결국 누군가가 훔쳐갈 것이 뻔한 일인데, 그것을 자신이 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냐는 것이다. 이렇듯 비가 억수로 내리는 라쇼몽에서 벌어진 만남과 이야기는 인간의 실존적인 비극을 잔혹한 진실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5.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도 사라지고 비극적인 면모만이 남았다고 여겨졌을 때, 희망은 시작되는지 모른다. 라쇼몽에서 내리던 비가 멈추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때 한 남자는 아기를 자신의 집에서 기르겠다고 선언한다. 비록 자신에게 다른 아이들이 있지만, 결코 차별하지 않고 잘 기르겠다는 것이다. 영화는 인간의 추한 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지만 결코 인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의 생존과 명예를 위해 추악함과 비겁함을 보여주는 것이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을 위한 사랑과 연대는 여전히 소박한 사람들에게 남아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위안같은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다. 폐허의 잔해 속에서도 인간은 생존과 회복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따뜻함을 지닌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세계에 남아있다는 점을 감독은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일본의 패망이라는 이 영화를 만든 시간(1950) 속에서 감독이 포기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일본의 세계였던 것이다.
첫댓글 - 자기 행동의 합리화, 인간의 본능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이야기. 복잡한 구성과 현란한 말솜씨에 독자들은 빠져 든다. 인간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