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프러스의 정식명칭은 키프로스 공화국(Republic of Cyprus)이며, 그리스계 주민과 터키계 주민이 혼재하여 그치지 않는 민족분쟁의 씨를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키프로스는 지중해에서 세번째로 큰 섬으로, 지중해 동단부에 위치하여 유럽·아시아·아프리카 3대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랍니다. 따라서 그 지리적 위치조차도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는 셈이죠.
오스만은 그 쇠퇴기에 이르러 각종 조약 등을 통해 이미 영토를 조금씩 빼앗기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죠? 영토의 축소는 주로 자치권 인정과 유럽 열강들의 조차(租借, lease)로 이루어졌는데요. 1차대전 이전 사이프러스를 조차했던 영국이 1차 대전 종료 후 로잔조약에 의해 정식 직할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영국 지배하의 키프로스에서는 그리스 독립 이래(이전까지 그리스는 오스만 영토) 일어난 그리스 복귀운동이 제1차 대전 후 격화하여 반영민족운동으로 번졌고, 1954년부터는 영국군의 수에즈운하 철수에 따른 키프로스의 군사기지화 반대운동이 겹쳐,(원래 영국군이 사이프러스를 조차했을 당시의 이유가 수에즈 운하의 보호 감시를 위한 군사기지로서의 목적이었음) 그리스계 주민을 중심으로 한 반영운동이 섬 전체에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키프로스의 반영 운동단체는 각기 조금씩 다른 주장을 펼쳤는데요, 그리스 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귀속 주장, 그리스 귀속에는 찬성하나 테러리즘을 행사했던 우익파의 주장, 터키계가 중심이 된 완전독립/분할독립 주장이 그것이었습니다. 영국은 분할을 주장하는 터키계 주민의 지도자를 지지함으로써 그리스계의 해방운동에 대항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영국은 영국·그리스·터키 3국에 의한 주권의 인정과 그리스계·터키계 양 주민의 분할자치를 골자로 하는 7개년 계획을 들고 나왔지만 그 계획 역시 그리스 주민들과 그리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서 실현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후 키프로스의 전략상 위치, 그리스/터키의 대립으로 인한 서방국가 반공군사동맹의 분열(두국가 모드 미/영의 반공군사동맹거점)을 두려워한 영국과 미국은 그리스/터키 사이를 중재하여 비밀회담을 거쳐, 터키, 그리스, 영국, 키프로스 대표의 회의를 통해 키프로스 독립협정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키프로스는 독립협정에 의해 영국·그리스·터키에 체제적으로 종속되게 된 데다가 국내의 복잡한 민족문제가 얽혀 정치정세는 시종일관 불안정할 수 밖에요. 1963년 마카리오스 3세 대통령이 소수파인 터키계 주민에 대한 지나친 우대(?)를 시정하는 헌법개정 제안을 함으로써 그리스계 주민과 터키계 주민 간에 무력충돌이 벌어져 터키군이 출동하고, 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이 파견되는 등 사태도 있었고, 다시 1967년에도 양 주민이 무력충돌하여 그리스·터키 간에 전쟁의 위험이 조성되는 등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1974년에는 그리스계 장교에 의한 쿠데타 발생을 계기로 다시 분쟁이 일어나고, 터키군이 출동하여 키프로스 북부지역(국토의 40%)을 제압하였습니다. 이후 국제연합을 중심으로 한 분쟁해결의 노력이 계속되었으나 아직까지 분열 양상은 심각합니다.
지금은 헌법상 독립주권 공화국과 대통령제를 규정하고 있고 대통령은 그리스계, 부통령은 터키계에서 각각 선출하게 되어있답니다. 그러나 사실상 국회가 실질적으로 그리스계 주민들만의 것이 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고, 터키계 주민은 '키프로스 연방 터키계주민 공화국'을 선언한 이래 독자의 헌법을 제정하여 터키계 의회를 설치하고 대통령을 선출하고 있어서, 키프로스는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분열되어 있는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