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고 아파트 화단에 봉숭아꽃이 피었습니다. 붉은 꽃 푸른 잎을 따다가 어린 딸은 손톱에 아내는 발톱에 꽃물을 들입니다. 첫눈이 올 때까지 꽃물이 남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지요. 만약에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아내의 첫사랑은 내가 아니고, 딸은 이제 열한 살 이니 아! 걱정입니다. 올해는 두 번째 눈부터 오면 좋겠습니다. 괜찮다면 그 눈도 도넛에 묻은 설탕가루 만큼만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딸아이는 손톱이 예뻐졌다고 웃고 아내는 허공을 보고 배시시 미소를 짓네요. 아내는 틀림없이 봉숭아꽃물을 마음에까지 들이고 있을 겁니다. 첫사랑 그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겠지요. 아이 낳고 같이 살다보니 아내의 속내가 어렴풋이 짐작이갑니다. 그런데 배우자 앞에서 봉숭아물을 들이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봉숭아꽃의 치명적 부작용입니다. 아내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올해도 아내의 첫사랑이 이루어지기는 틀렸습니다. 그러니 당장 내일 함박눈이 와도 괜찮습니다. 내년까지는 마음을 놓아도 되겠습니다. 저도 아내를 많이 사랑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봉숭아 사용법을 잘못알고 있었습니다. 봉숭아 꽃물은 여자용으로만 알았습니다. 최근에 알았지만 봉숭아꽃물을 남녀공용으로 사용하면 효과가 배가된다고 합니다. 봉숭아 꽃잎을 보관했다가 겨울에 사용해도 된다고 합니다. 여름용만은 아닌 것이지요.
학창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던 여학생도 어느 해 여름 새끼손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여왔습니다. 하루하루 날이 지나갈수록 새끼손가락에 든 꽃물은 연해지고 작아졌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가을날 꽃물은 손톱에서 영영 사라졌습니다. 첫눈은 오지 않았습니다. 가을 하늘은 눈물이 나도록 푸르고 높기만 했습니다.
그 여학생의 손톱에서 꽃물이 조금씩 빠질 때마다. 세상의 봉숭아 꽃물들은 어디로 사라질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름을 지나 가을 속으로 사라진 봉숭아 꽃빛 마음은 어디로 향할까하고 궁금했습니다. 어른이 되어 어느 해 가을 문득 알았습니다. 그 꽃물에 내 가슴이 빨갛게 물들이고 있다는 것을. 세월이 갈수록 조금씩 짙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너무 늦게 알아버렸습니다.
올해는 저도 발톱에다 봉숭아물을 들여 볼까 싶습니다. 늦도록 기다리다 봉숭아가 질 때쯤 들어봐야겠습니다. 혹시나 지나가다 첫사랑을 만나는 행운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아내도 그런 마음일까요? 만난들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런데 일설에는 첫사랑은 봉숭아꽃물도 들이지도 말고 누구에게 들키지도 말고 몰래 혼자 간직해야 다음 생에서는 이루진다고 합니다. 그래도 아내 없을 때 몰래 봉숭아 꽃물을 한번 들여봐야겠습니다.
첫댓글 참 묘하게도 예쁜 마음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은근히 매력 있는 글이에요. ^^*
저도 봉숭아 물을 발톱에 들여 볼까 생각 했습니다. 손톱 보다는 발톱이 크고 오래 남아 있을테니 싶은 마음일까요? ^^*
감사합니다
봉숭아의 꽃물들이기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군요. 감칠맛 나는 재미 있는 글입니다. 아내의 첫사랑이 이루어 질까봐 첫눈은 오지말고 두 번째 눈부터 오라는 표현 재미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퇴고를 하셨군요.
봉숭아와 아내, 참 잘 어울리는 단어 입니다.
퇴고랄것도 없습니다. 글이 늘지를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