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가 되자 마야와 톨텍의 문화는 차츰 혼합되었으나,
톨텍의 잔인한 경향만은 그대로 남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X자 모양으로 교차된 뼈다귀와 해골 무늬였다.
톨텍족은 신전 내부를 불길한 무늬로 장식했는데,
해골은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해 자주 사용되던 소재였다.
훗날 카리브 해에 출몰한 해적은 이 신전 장식에서 힌트를 얻어
인골 두 개가 X자 모양으로 교차된 위에 해골을 얹은 무늬를 깃발에 그려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해적선에 해골 무늬 깃발을 내거는 것이 유행했을까?
해적은 고대부터 있었다.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 사모스 섬의 왕 포로크라테스는
수십 척의 갤리선을 거느리고 해적질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기원전 81년 로마의 카이사르는 에게 해에서 해적에게 잡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후
즉시 토벌꾼을 이끌고 역습하여 이들을 일망타진했다.
8∼10세기경 바이킹은 영국 해협과 유럽 각지를 휩쓸었고,
12세기에는 슬라브족의 해적이 발트 해를 석권했다.
이처럼 무자비하기만 하던 해적이 국가의 인정을 받은 적도 있었다.
16세기 말에 영국과 스페인의 식민지 확보 경쟁에서는
교전 상대국의 배를 약탈해도 좋다는 국왕의 사략 특허장을 무기로
사선에 의한 해적 행위가 공공연히 행해졌다.
해적은 두 나라의 제해권 쟁탈전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1588년에 영국 함대의 일원으로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격퇴한 것도 사략선 출신의 지휘관들이었다.
17세기 초 유럽 국가 간에 평화가 찾아오자,
해적들은 유럽의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 아메리카 수역으로 이동했다.
이 무렵 카리브 해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해적 외에도 또 다른 해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버커니어'였다.
본래 버커니어는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훈제하여 생계를 꾸리는 인디오들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스페인에게 박해를 받던 인디오들이 해적화되자 해적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이들과 유럽계 해적들이 다투어 해적질을 함에 따라
종종 해적 간에도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카리브 해 일대에는 스페인의 영토가 많았으므로
스페인 선박들이 주된 약탈 대상이 되었다.
스페인 선박은 기동력 빠른 해적선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돛대를 눕혀 난파선으로 가장하거나 초라한 어선으로 꾸며
스페인 상선에 접근한 다음 상대의 허를 찔러 습격하는 것이 버커니어의 상투적인 전술이었다.
17∼18세기 무렵 해적들의 약탈은 극에 달했으며,
18세기 초에는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해골이 그려진 해적 깃발을 내걸기에 이르렀다.
인디오 출신으로 추정되는 해적이
톨텍족 신전 무늬에서 힌트를 얻어 불길한 느낌을 주는 깃발을 만들었던 것이다.
해골 깃발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나타냈다.
이미 해적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상황에서
불길한 해적 깃발을 본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우왕좌왕하였기 때문에
해적은 손쉽게 약탈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해적선마다 다투어 깃발을 내걸게 되었으며,
뒷날 해적을 묘사한 소설이나 영화에서 해골 깃발을 단골로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