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오전에는 교구의 신부님들이 주교좌성당에 모여 일 년 동안 사용할 성유를 축성하고 주교님께 순명서약을 새로 하였습니다.
주교님의 집전으로 미사를 하시며 사제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하셨어요.
첫 번째는 매 미사를 첫 미사 드리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드려라.
둘째는 고백성사를 잘 주어라.
그러면서 들려주신 예화가 좋아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요한바오로 2세 재위시절의 실화입니다.
어느 주교님이 교황님을 뵈러 많은 노숙자들이 있는 로마광장을 지나가는데, 한 사람이 눈에 띄더래요.
다시보고 또 보아도 사라진 동창신부님이더래요.
그래서 쫒아가서 인사를 하니, 이제 본인은 사제가 아니니 가라고하면서 도망치더래요.
무거운 마음으로 교황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 말씀을 드리니, 교황님께서는 어렵지만 그 자리에 다시 나가 그 신부님을 데리고 와달라고 부탁하셨대요.
주교님은 며칠을 기다려 그 신부님을 만나 설득하여 교황님께 모시고 왔대요.
그랬더니 교황님이 주교님께 자리를 비워 달라하시더니, 그 노숙자신부님께 무릎을 꿇고 고백성사를 청하셨대요.
노숙자신부님이 ‘저는 이미 사제가 아닙니다!’ 하고 손사래를 치니,
‘로마교구의 주교로서 신부님의 사제권을 복원하겠습니다.’ 하시면서 성사를 하셨대요.
그러면서 교황님은 그 사제를 그 분이 계셨던 지역의 노숙자들 전담 고해신부님으로 임명하셨대요.
지금도 그 신부님은 그 자리에서 고해성사를 주고 계신대요.
결국 그 사제가 다시 사제생활을 할 수 있었던 모티브는 교황님의 고백성사였어요.
사제로서의 자긍심을 주시기 위해 교황님이 그 노숙자사제에게 무릎을 꿇고 성사를 보신거지요.
자,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성자께서 33년간 천국 밖에서 생활하다가 돌아가시어 성부, 성자, 성령이 한자리에 모였어요.
성부께서 “아이고 얼마만의 모임입니까? 오랜만에 모였으니 각자의 재주를 보여줍시다.”
성령께서 “그럼 제가 먼저” 하시며 휘리릭 비둘기로 변하고, 또 불의 모양으로 변하셨어요.
그 모습을 본 성부와 성자께서는 신기하다면서 막 박수를 치셨죠.
성부께서 “3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신 성자께선 어떤 재주를 가지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성자께서 “전 재주종류가 메뉴별로 다양합니다.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침 천국호숫가가 앞에 보여 성부께서 물위를 걸으실 수 있는지 물으셨어요.
성자께서 “아! 그건 제 주특기입니다. 제가 물위에서 많이 걸어 다녔습니다.”
성자는 자신만만하게 물위를 첨벙 하고 들어갔는데 계속 빠지는 거예요.
한발 넣으면 또 빠지고 또 빠지고...
할 수 없이 얼굴이 빨개져서 뭍으로 나와서 원인 무엇일까 봤어요.
세상에나! 발등에 못 구멍!!
구멍위로 자꾸 물이 뽀로로 뽀로로 올라오니까 발이 자꾸 빠졌던 거죠.
세상에는 양심의 구멍이 뚫린 사람들도 있고,
또 영혼에 구멍이 뚫려 자꾸만 세속에 바다에 가라앉는 사람들이 많아요.
흔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면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유다스지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스가 늘 대표적으로 제일 악당으로 나오죠.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수난사에는 그분의 죽음에 공범했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등장했던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혹시 나는 그 사람과 비슷한 면은 없는지,
오늘도 내일도 반복되는 악습 때문에 예수님을 끊임없이 수난하고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지,
그런 나 역시 그들과 한패거리는 아닌가 하고 살펴봐야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사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첫 번째 공범자는 대사제와 바리사이들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대사제와 바리사이들이였습니다.
늘 건수만 있으면 어떤 핑계거리만 있으면 저 인간을 제거해야만 하는데 하면서 궁리했어요.
왜 원로들, 즉 대사제와 바리사이들한테 예수님은 미운털이 박혔을까요?
당시 율법을 교묘히 이용해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의노를 보이셨죠.
성전정화 사건처럼 성전세와 장사꾼들에게 받은 자릿세를 모두 없애버릴 수 있고,
돈줄을 끊어 버릴 수 있는 위험인물로 예수님이 보였던 거죠.
예수님은 기득권자들에게 가시였어요.
그래서 거기에 2번째 공모자, 유다스가 등장합니다.
어제 마태복음과 그 그제 요한복음에는 모두 유다스의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데 어제 복음의 서두는 참으로 충격적이에요. 유다스가 사제들을 찾아가요.
사제들 쪽에서 유다스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유다스가 사제들을 찾아가서,
“내가 예수를 넘기면 얼마를 주겠느냐?” 그 앞에 스승이라는 말도 붙이지도 않아요.
이런 유다스의 행동은 좀 충격적인 애기이죠.
왜냐하면 3년 동안 유다스는 수많은 기적을 눈으로 봤고 말씀을 들었기에 이분이 어떤 분인지 감을 잡았을 거예요.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 까지는 못 갔다하더라도, 돈을 받고 넘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찾아가서 그런 말을 하는가?
예수님의 수난사에 결정적으로 그들의 죽일 음모와 톱니가 맞아 들어간 거죠.
죽일 구실을 찾고 있었는데 제자가 스승을 넘긴다니, 대사제들은 ‘일이 술술 풀리네’한 거죠.
사실 유다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데 하루아침에 그렇게 못되진 것 아니에요.
우리나라말에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지요?
요한복음 12장 6절에 보면은 총무를 맡았던 유다스는 벌써 오래전부터 공금횡령을 했어요.
아마 처음 한 푼 꺼낼 땐 많이 두근거렸겠죠. 어떻게든 채워 놓을 것이라 했겠죠.
그런데 아무도 몰라!
한 냥 두 냥 훔치다가 나중엔 돈을 채워놓을 방법은 없고 그러던 참에 은전 30냥을 준다고 하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그리스도는 호락호락 그렇게 죽을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왜냐하면 자기가 눈으로 봤거든요.
손만 대면 사람들이 치유되었고 물 위를 걸었고, 죽은 라자로를 살린 것을 직접 봤기 때문에 쉽게 끌려가서 죽을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공적인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한 어둠이 점점 커지게 되어 나중에 무엇까지 가요?
돈에 대한 욕심이 예수그리스도를 팔아넘겨 죽이기까지, 돈이 가져온 최악의 사건이 됩니다.
또 유다스는 본래의 예수님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예수님이었으면 하는 바람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어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예수님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주님이 나를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인거죠.
달리 이야기하면 늘 ‘예수님의 생각보다 본인의 생각이 더 현명하다’고 늘 생각했던 거죠.
그런 사람의 비극이 뭐냐? 바로 유다스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은 인간을 눈멀게 합니다. 밀고, 배신, 청부살인.
돈이 하느님인 사람에게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일일 겁니다.
3번째로 예수님의 수난사의 공모자는 12사도입니다.
현세적인 출세를 꿈꾸며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스승이 체포되자 불이익이 날까봐 도망가기 바쁩니다.
신앙 때문에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옛날 유신독재시절에는 공직에 있던 교인 중에 교인이 아닌 듯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불이익이 와도 천주교 신자임을 밝혔던 교우들은 비록 세속적인 출세는 못했어도,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고 살았겠죠?
솔직히 4대박해만 아니라 유신 때도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는지 몰라요.
12사도들은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100% 아니 120% 출세 때문에 예수님 쫓아다닌 거예요.
단1%도 저분이 메시아라는 생각은 없었어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이야기했던 베드로사도도 혀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첫닭이 울기 전 3번이나
“나는 그 사람을 몰라”.
“난 모른다는데 왜?”
“난 저사람 모른다고”
그러니 그 앞에 했던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말은 거짓말 이였던 거죠.
성령을 받고 난 다음부터 깨이기 시작한 거죠.
3년 동안 그분이 했던 말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거죠.
무슨 말이었는지 지난번에 까먹은 말, 예수님이 했던 호령, 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던 말들이,
살아서 심장 속으로 막 들어오면서 상상도 하지 못한 능력이 막 생기면서 벌벌 떨던 제자들이 비로소 바뀝니다.
그래서 유다스와 대사제들 못지않게 12사도들도 예수님의 수난사에 분명히 공모자들이였다는 것입니다.
4번째 공모자들은 성난 군중들입니다.
성난 군중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산나하며 예수님 환영했던 사람들, 더 나아가 오병이어와 많은 기적의 수혜자!
그런데 하루아침에 폭도들로 변하죠. 돌을 던지고 “죽이시오!”
저 사람에게 받아먹을 것 다 받아먹었으니 이제 끝이라는 거죠.
5번째로 예수님의 수난사의 공모자는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양심으론 예수님을 놔주고 싶었지만 자기 정치생명에 영향을 줄까봐 예수님을 죽이라고 합니다.
빌라도의 직책은 로마 황제가 파견한 유대나라를 다스리던 총독이죠.
만일 예수님을 살려주었다가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황제에게 무능한 총독이라고 찍히게 되고,
그러면 자기 캐리어에 흠이 나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은 기득권수호, 돈 욕심, 비겁함과 정치적인 출세 때문에 사지로 내몰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 죄악들이 공모가 된 작품입니다..
특별히 성삼일동안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 사는 길을 택하여야 합니다.
내 발등에 혹시 구멍이 뚫어져 있지는 않는지, 그래서 세상의 바다에 자꾸 빠지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다고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뛰어 넘은 겁니다.
육의 인간이아니라 영의 인간이라는 거죠.
그러나 내영혼의 구멍이 뚫어 있으면 우리는 육신의 바다에 헤맬 것이고,
욕망의 바다에서 침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바로 너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라는 것을 조금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주간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사를 읽을 때 바로 나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해야지, 속 썩이는 남편 때문에, 아파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발등에 구멍이 뚫어져 있다면, 영혼에 구멍이 뚫어져 있다면, 요즘은 재료들이 좋으니까 좋은
재료사다가 물새지 않게 잘 막으세요. 그래서 2000년 전에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담했던 그 사람들의
전철을 다시 밟으면 안 될 거예요. 이미 우리들은 그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게 되었는지 알고 있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짓을 할 때가 많아요.
색깔만 다를 뿐이지, 정말 똑 같은 짓으로 그 범죄의 동참자가 될 때가 참 많아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5종류의 인간은 우리 어두움의 본성에 나타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