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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한국인 권익에 관심…"제주서 평화의 발신음 내야" | ||||||||||||
[허영선이 만난 '사람']오사카4·3유족회장 오광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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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고향에 오면 마음이 좋아요." 그는 슬픔의 공유를 겪어낸 고향 제주에서 이제 평화의 발신음을 내야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그의 스마트폰 메모장엔 고향에서 본 영화 '도가니', '오늘' 등 빽빽했다. 배낭속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들어있었다. 여섯 번째라는 일본어판 「죄와 벌」. 10여년 오사카 위령의 4월엔 열정적인 그가 있었다. 유족들을 찾아 함께 눈물을 흘렸고, 10년 설득 끝에 동네 여인의 4·3침묵을 깨게 한 이도 그다. 아버지의 세 형제중 지금 고향집엔 작은 숙부가 산다. 4·3희생자 가족들만 모여서 4·3친목계를 했었다는 사실도 숙부를 통해 이번에야 알았다. 침묵을 강요당하던 살얼음시대, 4·19혁명 전이었다. 한 동네 억울하게 희생당한 열서넛 4·3희생자 가족이 서로 서로 위로하며 제사를 지냈단다. 그가 다시한번 눈을 붉혔다. 오광현. 그에게서 젊은 날, 시대와 뿌리에 흔들리던 재일 2세의 서늘한 풍경이 스친다. # 4·3소설 「까마귀…」 진실 묻자 때린 아버지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던 소년이었다. 책방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찾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 "아, 조선문학이야. 번역된 책이구나. 읽어볼까 샀어요. 재일동포 소설가 있는 줄 몰랐어요."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소설이니까 사실이 아닐거야.' 가슴이 요동쳤다. "아버지한테 물어봤어요. 아버지, 4·3사건 알아요?" "누구한테 배웠냐?" "이 책에 나왔어요." 사실이 아니라면 그렇게 때리지 않았으리. 4·3! 그것은 아버지의 세월 앞에 놓인 엄연한 역사였고, 분노였고, 한이었다. "이건 충격이었어요. 아버지 고향에서 이런 사건이 있는줄 전혀 몰랐어요. 부끄럽고 화가 났어요." 답답했다. "몇 달 후 형으로부터 얻은 김봉현·김민주의 책을 읽었어요. 4·3의 주인공들이 바로 그의 동네에 사는 줄도 나중에야 알았어요. 한때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맏아들이었던 아버진 1930년 식민지 조선의 제주섬을 떠났다. 남들처럼 돈벌러 군대환에 몸을 실었을때 열다섯. 당시 하원마을 사람들 40%가 일본으로 떠날 때. "오사카 제사땐 50명이 왔어요." 농삿일만 하던 스물다섯 숙부가 물애기를 남겨두고 4·3희생자가 됐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나중이었다. 자신의 짐을 아우에게 얹히고 떠난 아버진 평생 당신의 어깨를 누르던 아우의 행불을 홀로 감내하였으리. 세상 다하는 날까지. # 아버지의 도산, 폐품수집도…정체성 혼란 집에는 돈이 많았다. 적어도 유년시절까지는. 아버진 해방 후 미군 구두 공장을 경영하는 사장님. 직원들만 100명이었다. "너무너무 돈 벌었어요. 미군 주문 받고. 초등 1, 2년때는 직원들 하루 일당 5엔, 10엔 정도 받았어요. 난 50엔을 받았어요." 그것도 잠시. "난 몰랐어요. 갑자기 먹는 것도 이것밖에 없네. 이상하네." 사업 도산. 초3때였다. 중학생땐 어머니를 도와야했다. "종이 같은 것 폐품 수집하는 일. 어쩔 수 없이 먹고 살아야잖아요." 재일2세. '나의 뿌리는 어디인가?' 물음이 왔다. 60년대, 중요한 기억 하나. 한 일본교사가 그랬다. "여기 조선사람 많다. 일본 사람과 조선사람이 사이좋게 공부하고 놀고 있다. 여기서 조선사람이 일본 사람이 되면 차별 없어질 거야." 소년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어머니한테 달려갔다. "우리도 일본사람 되면 안되나요?" 순간 어머니의 슬픈 얼굴, 잊지 못한다. "안돼, 우린 조선사람이야." 그가 다닌 이카이노의 일본 초중학교는 절반이 한국인이었다. 일본이름으로 학교를 다니던 그가 절친한 일본 친구한테만은 참을 수 없이 말하고 싶었을때는 고2. 비밀처럼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 입을 뗐다. "실은 나는 한국인이야. 근데 그놈이 웃었어요. 니가 조센진이냐? 너무나 화가 나서 친구를 마구 때렸어요." 호기심이 많았던 어머니. 갓 스물에 해방되자마자 다시는 일본 갈 기회가 멀어진 것 같아 오사카로 놀러왔다가 아예 정착해버린 여인. 친족들이 많은 니시나리 이쿠노구의 공장에 다니면서 아버지를 만난 여자. 가끔 기억한다. 어린시절, 다듬이질하며 부르던 어머니의 알 수 없는 제주민요를. 자주 집에 오던 심방의 이해할 수 없는 사설들을. 무서웠으나 그게 제주도였으리. 그가 대학3년때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떴다. "어머니가 너무나 고생했지요."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허나 75년 제주출신 재일한국인유학생간첩사건이 있었다. "한국에 가지마라. 어머니가 만류했어요." # 일본 초등학교 민족학급서 자원봉사 "전두환 정권 때문에 난 학교 안갔어. 오사카 한국 영사관에서 살았어요. 정보부도 우리집까지 왔어요. 광주항쟁, 김대중 구출운동, 문세광 사건 등 충격적인 역사가 많았어요. 광주항쟁은 대학 4학년때 독일방송을 통해 들었어요." 시대는 혼란 덩어리였고, 고국의 민주화에 몰입한 그에게 졸업은 의미가 없었다. "5년만에 어머니를 위해서 졸업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오사카시립대 한국인학생 동아리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주로 우리말, 역사를 공부했다. 왜 우리가 일본에서 살고 있냐? 강재언, 박경식 책을 중심으로 공부했다. 재일의 소외된 인권을 향한 그의 길. 아무래도 자신의 삶과 시대를 끌어안아야 했다. 그가 다니던 일본 초등학교엔 민족학급이 있었다. 거기에 자원봉사로 일년 정도 일을 했다. 대학졸업 즈음. 지역운동에 관심이 갔다. 이제 활동 20년. 성공회는 재일한국인 문제 해결을 위해 생긴 일본 NPO.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일한다. "봉급은 받지요. 우리도 내고, 사업도 하면서. 모금도 해요. NPO는 북해도에서 오사카까지. 일본 전역에 걸쳐 있어요." "재일 1세대? 노인문제 심해요. 노인이 되면 문화적 차이가 나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이카이노 한국사람 많은 동네여서 일주일에 한두 번 자원봉사해요. 사랑방에는 80세 넘는 대부분이 제주도의 출신자야. 그런말 나와요. 한국 할머니들은 일본 사람 다음이다고. 그렇게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어. 나이들면 어쩔 수 없어요." # 4·3위령제 재일2세의 눈으로 하고 싶다 멀리서 김석범 선생을 만난 것은 88년. 도쿄 40주년 집회에 홀로 참석했을 때. 충격이었다. "눈물 흘렸어요. 당시엔 몰랐어. 나는 그 당시 4·3사건 운동하는 사람 없었으니까 혼자서 책 읽고 운동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일년에 한두번만이라도 유족들을 위한 자리를 차려주고 싶다는 오광현. "강실 직전회장님하고 그랬어요. 저는 앞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2세처럼 일을 하고 싶다고." 올해 4·3도 그런 재일 한국인 2세 눈으로 했다. "아직도 4·3사건에 대해서 말하면 안된다 의식 있으니까 이런 의식을 바꾸고 싶어요. 여기는 4·3특별법, 노무현 대통령 사죄같은 것 다 알고 있지만, 거기선 아직도 그런 특별법 모른다는 1세도 있어요. 오사카 80대 할머니들 4월3일 봉개동에 모시고 싶어요. 재일동포 4·3은 일반 민중들의 기억에만 남아있죠." 부모들은 비극의 무게를 자식들에게 실어주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해마다 4월, 위령의 그날을 위해 그는 일년을 고민한다. 새로운 것을 유족들과 기억을 계승해야할 그의 자식들, 3·4세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가슴이 뛴다. 금년 4·3위령제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고, 반응은 뜨거웠다. # 고향에서 만난 아버지 고향사랑 기념비 부모의 산소를 모신 고향은 쓸쓸했으나 따뜻하고 안온하다. 마을회관 가로포장 기념비가 있는 하원 마을회관과 하원초등학교. 깜깜해 비석의 글씨는 안보이는데 그가 휴대폰 불빛을 비추며 이름자를 손으로 더듬는다. 그의 아버지 오구식. 1970년대 중·후반. 고향에 성금을 보낸 재일동포 이름들과 더불어 각인돼 있었다. 그 비석을 쓰다듬으며 아들은 시대의 물결을 타야했던 아버지의 가팔랐던 세월을 떠올린다. 아마 이쿠노구 히라노 강줄기에서 아버진 당신 고향의 핏물같은 것을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그런다. 아주 낮은 목소리. "우린 그때 도산을 해서 반찬도 없이 먹을 때였네요. 가정은 참 어려웠는데 아버진 고향에 돈을 보냈어요. 다들 그랬어요." 고향이란 무엇이던가. "요즘은 더 그래요. 나는 내가 태어난 오사카나 제주도가 좋아. 나의 뿌리야. 한국정부나 일본정부가 보호해준 게 없어." "아~강정! 여기로 죽 내려가면 강정마을이죠. 너무 슬퍼요. 어떻게 이런 일이…. 기가 막히죠." 갑자기 해군기지 문제로 들끓는 강정 생각에 미치자 다시 그 역시 어둠이 됐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