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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의 이름은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차례 바뀌어 왔다. 신라 때에는 서다산, 고려시대에는 용출산, 속금산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는 마이산(馬耳山)으로 불렸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 머물러 시 한 수를 남기면서 마이산으로 바뀌었다. 음양을 상징하는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한 쌍이 잘 어울리는 이 산은 그래서 부부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진안의 어느 방면에서나 눈에 확 띄는 마이산은 철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봄에는 안개를 뚫고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대 같다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울창한 수목에 둘러싸인 산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고 용각봉,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의 귀 같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흰 눈이 내린 들판에 먹물을 찍는 붓끝처럼 보여 문필봉이다. 한마디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시사철이 아름다운 산이라는 의미이다.
7시 40분, 신갈 IC를 통과한 산악회 버스는 봄빛이 완연한 들판을 내려 달렸다. 호남고속도로 이인휴게소에 도착하여 아침 식사를 하였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아침 식사는 아욱국이다. 된장을 풀어 끓인 따끈한 아욱국이 구수하다.
아침식사를 마친 산악회 버스는 차량이 뜸한 호남고속도로를 내려 달렸다. 지루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배낭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대한민국환경영상협회의 이름으로 발간된「2006 수원환경영상제」사진자료집이다. 가로로 편집된 B5 크기의 이 책에는 직장 동료가 출품한 작품「청호반새의 여름나기」가 실려 있다. 그는 이 작품으로 환경부장관상을 받았다 .사진 자료집에는 동물, 식물, 버섯, 곤충, 새 등의 예술성 높은 사진도 실려 있다. 크게 구분하여 환경 영상제, 환경 영화제, 전국 환경사진 공모전이다. 작품도 작품이려니와 바쁜 일상에 틈틈이 짬을 내어 환경보호활동에 앞장서는 이들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낸다.
토요일인 어제 오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말 목장에 다녀왔다. 그리고 오늘은 마이산을 찾는다. 그런데 지금 산악회 버스의 모니터에서는 ‘말 달리자’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다. 때때로 이런 경우의 협공에 나는 시간과 공간의 블랙홀에 빠져 어리둥절하다. 마이산이 나에게 무슨 암시라도 주는 것일까?
10시 40분, 산악회 버스는 마이산 보흥사 입구에 다다랐다. 신갈 IC를 통과한지 꼭 3시간이 걸렸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당일 산행하기에 적당한 거리이다. 편도 5~6시간이 걸리는 남도 당일 산행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오늘의 마이산 산행은 덕천교나 합미산성에서 시작하는 종주코스를 기대했다. 그래야 5시간 정도의 만족한 산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따라 유소년과 여성 등산객이 많다. 그런 사정을 감안한 산악회 김대장님은 보흥사에서 마이산으로 향하는 4시간 산행코스를 선택했다.
보흥사에서 광대봉으로 오르는 암릉에는 철제 난간이 잘 설치되어 있다. 군더더기 없는 철제 난간을 잡고 오르는 길이 간편하다. 바위 암릉은 퇴적암의 주종인 역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아의 방주로 일컬어지는 천지개벽의 대홍수로 이루어진 것일까? 주먹 크기의 자갈돌에서 머리 크기의 바윗돌이 시멘 콘크리트에 혼합되어 있는 형상이다. 그 모습은 흡사 노아의 후손들이 하늘에 오르려고 시날(바빌로니아)의 땅에 쌓았다던 바벨탑이 무너져 내린 잔재인 듯도 하다.
11시 20분경, 해발 609M의 광대봉에 올랐다. 광대봉에는 수십 미터의 길게 늘인 밧줄이 걸려 있다. 덕천교와 합미산성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를 선택한 산행 팀이 먼저 올라와 있다.
11시 30분 경, 마이동천 전망대에 이르렀다. 전망대서 바라보는 마이동천의 풍경이 압권이다. 날씨는 그다지 쾌청하지 않았으나 마이동천에 쏟아져 내리는 햇볕이 가슴을 확 트이게 한다. 비 개인 5월에 이곳에 오르면 마이산 도립공원을 마이귀운, 마이동천으로 부르는 까닭을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12시 경, 마이산 금당사에 딸린 암자 고금당(古金堂)에 이르렀다. 고금당은 고려의 승려 나옹선사가 수도하던 곳으로 알려진다. 암자를 온통 금빛으로 단장을 하였다. 산 아래로 바라다 보이는 금당사 역시 금빛이다. 능선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니 마이산의 상징인 암마이봉, 수마이봉이 점차 큰 모습으로 다가온다.
12시 30분 경, 나옹암 비룡대에 이르렀다. 비룡대에는 2층 정자각이 지어진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비룡대에 오르니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한 겨울에 오르면 자못 모진 바람일 것이다.
13시경, 해발 532M의 삿갓봉에 이르렀다. 우뚝우뚝 솟은 다섯 개의 바위 암봉이 삿갓의 모습이어서 삿갓봉인 모양이다. 그런데 두 개의 암봉은 부부 바위로도 보인다. 암말과 수말의 고삐를 잡고 외출하는 남편과 아내의 모습으로 보인다. 남편이라 할 수 있는 북쪽의 삿갓봉은 늘씬하니 훤칠하고 아내라고 할 수 있는 남쪽의 삿갓봉은 펑퍼짐한 모습이다. 굳이 암봉의 형상을 사람에 유감하여 비유한다면 암말과 수말의 고삐를 잡고 여행을 떠나는 부부의 모습이다.
둥근 꽃봉오리 모양의 삿갓봉에 올라 잠시 쉬었다. 삿갓봉에서 바라보는 마이산의 전망이 뛰어나다. 이곳보다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을 제대로 감상할 장소는 더 이상 없을 듯하다. 배낭을 벗어 놓고 간식으로 가져온 당근을 꺼냈다. 문득 마이산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에 간단한 예의를 표하고 싶었다. 간식으로 가져온 당근을 나 혼자 우적우적 깨물어 먹기가 미안했다. 말들이 당근을 아주 좋아하는 까닭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당근을 말의 코앞에서 나 혼자 먹는다면 저 앞의 암말과 수말도 발로 땅을 차면서 화를 낼 것이다. 당근 조각 하나를 둘로 나누어 마이산 두 봉우리로 던져 올렸다. 그것으로 마이산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에 대한 약례를 대신하였다.
마이산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쉬고 있는데 산꾼 하나가 올라온다. 서울 창동산악회에 소속된 산꾼이다. 그도 잠시 일행과 떨어져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을 감상하고자 삿갓봉을 올라 온 것이다. 그에게 당근 한 조각을 건네어 인사하고 마이산의 절경에 빠져본다.
호남의 명산 마이산은 충청과 호남의 젖줄인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건설교통부가 발간한 '2000년 한국 하천 일람'에 의하면 전북 장수 영취산에서 진안 마이산과 완주 주화산으로 이어지는 금남, 호남정맥을 경계로 남쪽은 섬진강이요, 북쪽은 금강의 영역이다. 금강의 발원지는 전북 장수군 신무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뜬봉샘이고, 섬진강의 발원지는 진안군 백운봉 천산데미 기슭에 위치한 데미샘이다.
1979년 10월, 마이산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마령 방면의 합미산성을 포함한 총면적 16.9㎢의 영역이다. 진안에서 남서쪽 4km, 전주에서 동쪽으로 40km 거리이다. 산 전체가 지방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주 옛날, 지금의 마이산 일대는 거대한 호수였을 것이다. 그 증거는 마이산에 널린 바위 암벽에서 그대로 들어난다. 굵은 자갈이 빼곡이 박혀있는 암벽에는 쏘가리 형태의 민물고기 화석과 고동, 조개화석 등도 발견된다고 한다. 지질학자들은 마이산 일대의 지질을 담수성 역암인 수성암으로 판명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마이산의 주봉인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은 마치 시멘트 콘크리트로 쌓아 놓은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가까이서 보면 군데군데 크고 작은 구멍들이 벌집처럼 뚫려 있다. 역암에 들어있던 크고 작은 돌덩이가 빠져 나간 흔적이다. 오랜 세월의 풍화에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의 여기저기에는 물구덩이 아닌 바람구덩이를 수없이 달고 있다.
1시 40분 경, 암마이봉을 끼고 돌아 탑사로 내려 왔다. 탑사를 찾은 봄맞이 행락객들이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이 만든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다. 탑사에는 강한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80여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다. 마이산의 돌탑 마이탑은 천연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마이탑을 쌓은 사람은 태조 이성계와 효령대군 이보의 후손으로 알려지는 처사 이갑용이다. 항렬로 따지자면 이갑용 처사는 나의 장인어른과 같은 용(鎔)자 항렬이다. 장인어른의 형님 또한 처사와 똑 같은 이름의 함자를 쓰신다.
처사 이갑용은 오대산에서 수도하다 마이산으로 건너와 30년에 걸쳐 이 돌탑을 쌓았다고 한다. 그는 과연 그 무슨 사연으로 이곳에 돌탑을 쌓는 일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을까? 조선 건국의 초기, 왕자의 난으로 소란하였던 왕가 내부 권력 투쟁의 피바람을 씻으려 하였을까? 아니면 그 자신 또 다른 건국의 시조가 되고파 그리 하였을까?
마이탑은 내부의 와해와 마이산 외부의 풍화로 떨어져 내린 마이산의 돌을 주워 다시 올려 쌓은 탑이다. 그 모습은 원추형과 나무기둥 모양이 주종을 이룬다. 이 처사는 이곳에 돌탑 100개를 쌓고 98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무덤은 탑사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봉두봉에 자리잡고 있다.
탑사에서 300M 떨어진 곳에 은수사가 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머물며 백일기도를 드렸다는 바로 그 은수사다. 은수사는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의 사이에 놓여 있다. 암마이봉을 등에 업고 수마이봉을 바라보는 형국이다.
은수사에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몇 가지 소품이 있어 흥미롭다. 사찰에는 몽금척도(夢金尺圖)와 금척(金尺) 복제품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경내에는 태조 이성계가 먹다 뱉은 씨앗이 터서 자랐다는 청실 배나무도 있다. 왕의 나무인 청실배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8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씨 왕가를 상징하는 자두나무(李)를 심었다면 아마도 그 누군가의 손에 의해 베어버렸을 것이다. 자두나무(李)와 이름이 유사한 배나무(梨)를 심었기에 600년 동안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배꽃이 활짝 피는 5월이면 푸른 하늘을 하얗게 수놓는 풍경이 아름답다고 한다.
은수사에는 하늘을 향해 얼음 어는 '거꾸리고드름' 도 있어 유명하다. 한 겨울에 은수사의 약수로 정한수를 떠놓아두면 거꾸로 자라는 고드름이 생긴다고 한다. 고드름은 당연히 아래로 자라야 하는데 이곳의 고드름은 나무처럼 위로 자란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는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의 위 아래로 불어드는 바람이 은수사에서 만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까닭이라고 한다. 이 회오리바람이 거꾸리고드름을 형성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풍향과 풍속, 기온의 3박자가 일치해야만 거꾸리고드름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조건하에 100개를 놓아도 그 중 3개 정도 밖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하니 신기한 일이다.
은수사를 지나 천왕문을 거쳐 수마이봉으로 조금만 오르면 화엄굴이 나온다. 굴에서는 바람소리가 요상하게 흘러나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곳 바위에서 약수가 흘러나오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은 곳이다. 은수사 약수를 마시고 정성스레 기도를 드리면 수마이봉의 기운을 받은 옥동자를 얻는다고 한다. 24절기 중 춘분과 추분에만 햇빛이 약수에 비친다고 하니 이 또한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에서 북부주차장으로 하산하면 마이산의 진면목인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의 증명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산행 코스의 종점은 남부 주차장이다. 아쉬운 일이지만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2시 10분경, 탑사를 되돌아 나와 금당사를 지나 마이산 입구의 호수에 이르렀다. 호수에 어린 봉두봉과 그 너머로 비쭉이 솟아 오른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의 산그림자가 아름답다. 호숫가에 앉아 구름에 가린 햇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젊은 연인들을 태운 하얀 오리배가 한가롭다. 손짓으로 그들을 카메라 화면에 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이산 입구의 3km 진입로에는 벚꽃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매년 벚꽃이 만개하는 4월 중순 경에는 진안군 주관으로 벚꽃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주요행사로는 군민노래자랑, 좌도농악공연, 벚꽃 축제한마당, 향토특산물 전시판매장등이 개설되며, 군민 화합의 축제 한마당이 되고 있다. 이곳의 마이산 벚꽃의 개화 시기는 남한에서 가장 늦다고 한다. 마이산이 해발 400m에 위치하는 까닭에 전국에서 가장 늦게 벚꽃이 피는 곳 중의 한 곳이다. 마이산 벚꽃은 진해보다 20일 정도, 서울보다 7일 정도 늦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곳의 벚꽃은 다음 주 일요일인 4월 15일에 만개할 것으로 보인다.
2시 30분경, 남부주차장에 이르렀다. 배낭을 버스에 벗어 두고 주필대와 이산묘에 이르렀다. 마이산 입구의 암벽에는 ‘마이동천(馬耳洞天)’ 과 ‘주필대(駐蹕臺)’라는 글자가 붉은 글씨로 각자되어 있다. 마이동천은 천험의 요새이자 천마가 하늘로 오르는 동네요, 주필대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진다.
AD 1377년, 고려 우왕 3년, 고려의 상장군 이성계는 경상도와 지리산에 들어온 왜구를 대파하였다. 이어 AD 1380년에는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의 3도 순찰사가 되어 왜구 토벌에 나섰다. 남원의 운봉(雲峰)지구에서 아기발도(阿其拔都)가 지휘하는 왜구를 크게 섬멸하였다. 이때의 전과는 역사서에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왜구 토벌에 앞서 삼도 순찰사 이성계는 기선을 제압하고자 하였다. 이에 순찰사 이성계의 오른 팔인 이지란(퉁두란)이 거들고 나섰다. 순찰사 이성계가 강궁을 쏘아 왜장 아기발도의 투구를 맞추어 벗기는 순간, 부장 이지란이 너털웃음을 웃는 아기발도의 목구멍에 화살을 쏘아 날렸다.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기고만장하던 왜장 아기발도가 활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굴렀다. 궁술과 마상 무예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던 순찰사 이성계는 이로써 백전백승의 신장으로 고려의 백성들에게 널리 각인되었던 것이다.
남원 운봉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개경으로 향하던 순찰사 이성계는 마이산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이곳이 꿈에 산신으로 부터 금자(金尺)를 받았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자(尺)는 사물의 척도이기에 금자를 받은 것은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재단 할 수 있는 권능을 얻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꿈속에서 본 마이산을 보고 감격한 이성계는 그 감흥을 다음의 시 한 수로 남겼다.
[서역의 천마가 이곳에 이르러 지쳐 죽었다/주군의 마음을 헤아린 사인이 말뼈를 샀다/ 주인이 말뼈를 보고 무릎을 쳤다/ 아깝다 명마는 어디가고 두 귀만 쫑긋 남았구나 ]
이 시는 대단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마이산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기도 하지만 고려의 멸망을 암시한 것이기도 하다.
마이산을 노래한 이성계의 시는 마이동천의 주필대에 지역주민이 세운 시비로 남았다. 이렇듯 마이산은 태조 이성계가 천하를 얻는 꿈의 배경이 되는 곳이었기에 조선개국의 성지로 보호받았다. 이즈음에 이르러 삼도 순찰사 이성계는 천하를 도모할 웅지를 품었던 모양이다.
삼도 순찰사 이성계가 머물렀던 주필대는 마이동천으로 드는 입구에 위치하였다. 마이동천으로 드는 대문으로 이곳에 빗장을 걸면 불시에 급습하는 외적을 방어하기에 아주 좋은 지점이었다. 이곳에 진을 치고 지키면 마이동천은 외적으로부터 안전하다. 마이산이 위치한 진안이 진안(鎭安)으로 불리는 것은 천험의 요새로 불리는 마이동천의 지형 때문일 것이다.
이산묘(耳山廟)는 사당이다. 국조 단군왕검을 비롯하여 4성위(聖位), 40현위(賢位), 34열사위(烈士位)를 봉안한 사당이다. 단군, 이성계, 세종대왕, 고종임금의 위패에 더하여 면암(勉菴) 최익현과 연재(淵齋) 송병선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이산묘는 면암(勉菴) 최익현선생의 제자와 고종의 왕사인 연재(淵齋) 송병선선생의 제자들이 건립한 사당이다. 연재의 제자 모임인 친친계(親親契)와 면암의 제자 모임인 현현계(賢賢契)가 힘을 모아 건립한 건물이다. 회덕전(懷德殿), 영광사(永光祠), 영모사(永慕祠)의 한옥 건물과 대한광복기념비 등이 위치하고 있다. 이산묘 옆의 암벽과 그 암벽위에는 1907년,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의 집결지인 황단(皇壇)터가 있다.
구한말, 호남의 유림들은 국권 수호를 위해서 이곳에서 창의하였다.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호남지방 유림의 태두였던 연재 송병선 선생과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이곳에 와서 분연히 민족혼을 일으켰다. 이에 주변 지역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쇠미해가는 국운을 다시 세우고자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던 이곳에 황단을 쌓고 친친계와 현현계를 조직하여 왜구 토벌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다. 무릇 호남 최초의 의병봉기가 여기서 출발하게 되었으니 이곳이 호남 의병의 효시가 된 것이다.
1907년 8월, 정재 이석용, 해산 전기홍 등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우국 동지들이 의병 창의 동맹단(義兵 倡義 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이 곳 용바위에 제단을 마련하고 소를 잡아 천지신명께 고한 뒤 거병하였다. 이에 고종황제도 이들에게어필을 내려 이들의 창의를 격려하였다.
1924년 3월, 친친계와 현현계의 유지들은 결사동맹의 의지를 더욱 굳히고자 산벽(山壁)에 이름을 각자(刻字)하고 이산 정사(精舍)와 회덕전(懷德殿)을 짓기로 결성하여 이듬해 완공하였다.
광복 후인 1946년, 이산묘의 회덕전에 단군왕검과 세종대왕을 더 봉안하였다. 1947년에는 개국 이래의 충신(忠臣)과 현유(賢儒)를 모시기 위하여 영모사(永慕祠)를 건립하였고, 을사조약 이후의 항일 운동으로 순국하신 34열사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영광사(永光祠)를 건립하였다. 이산묘에서는 봄, 가을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산묘 건너편 암벽에는 고종황제의 어필 '비례물동(非禮勿動)'과 백범 김구 선생의 대형 친필 '청구일월(靑丘日月) 대한건곤(大韓乾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산묘의 현판은 성제 이시영 선생의 휘호이며, 영모사의 현판은 해공 신익희 선생의 휘호이고, 영광사 현판은 백범 선생의 휘호이다. 그리고 광복기념비에 새겨진 글씨는 초대 이승만대통령의 친필이다. 이로보면 이산묘는 가히 이 고장 민족 광복의 성지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이귀운(馬耳歸雲)으로도 불리는 마이산은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이 구름이나 안개와 어울릴 때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산 전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보다 봉우리의 자태가 살짝 드러날 때 신비감이 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름 안개에 가린 마이귀운을 보려면 아무래도 여름과 겨울이 좋을 것이다. 검은 바윗돌과 싱싱한 청록빛이 어우러지는 여름이 좋을 것이다. 또한 검은 바윗돌과 흰 눈이 빚어내는 설경이 좋을 것이다. 그 때에 다시 오리라. 환절기인 이즈음에는 아무래도 마이산의 진면목이 제대로 들어나지 않는 것이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석가현님 감사합니다~*~ 산행글 잘읽었습니다 사진도 감사합니다~~~
석가헌님의 정성과 이쁜손의 수고로움이 많은 산님들의 영양식(마이산에 대한 양식)이 되고도 남겠습니다 산행시마다 글을 올려주시면 얼마나 고마울까요? 지난 번 쌍계사 일요산행 함께 하신듯 한데요 대웅전 사진 정말 멋있었어요 현재 사무실 제가 사용하는 컴에 배경화면으로..볼때마다 생각나요 이젠 더 자주 생각나겠어요
기대해도 될까요?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날에 님과 함께 마이산 산행할 수 있는 날을...그 때에도 자상하게 설명해주실 것만 같아서요 욕심이겠죠?? 좋은 글과 자료, 사진 스크랩해서 자주 보겠습니다 석가헌님 감사합니다
하늘공원님, 저는 다음 까페 경기문학인협회, 러쎌산악회 단골입니다. 코스 좋으면 가끔 은하수산악회 가겠습니다.
마이산 하면 무엇보다 이국적인 풍경의 탑사와 벚
과 하산길에 흑돼지 바베큐가 떠오름니다^^전문 산악인 이시군요. 생동감 넘치는 상세한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수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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