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4.27 11:00
- 영국에 화해의 손 내민 아일랜드
한국과 일본처럼 멀고도 가까운 이웃 아일랜드와 영국. 두 나라 사이에 최근 아주 의미 깊고 역사적인 일이 있었다. 아일랜드의 마이클 히긴스 대통령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초청으로 영국을 국빈 방문했다. 2011년 5월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일랜드 국빈 방문 이후 거의 3년 만이다. 이웃나라 사이의 국가 수반 상호 방문이 뭐 그리 역사적인 일이냐는 의문이 들 법도 하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얽히고설킨 역사의 사연을 알지 못하고는 이 상호 방문이 가지는 무게를 제대로 알기 힘들다. 이번 아일랜드 대통령의 국빈 방문으로 두 나라가 아픈 역사를 넘어서 이룬 ‘대(大)화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과함이 없다.(영국 여왕이 초청하는 영국 국빈 방문은 1년에 전·후반 각각 한 번이어서 히긴스 대통령 방문은 작년 하반기 박근혜 대통령 국빈 방문 이후 첫 국빈 방문인 셈이다.)
가까운 사이가 한번 멀어지면 애초에 먼 사이보다 더 화해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가깝고도 먼 나라가 참 많다. 아직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한국과 일본이 그런 예이다. 아일랜드와 영국도 역사적 사연으로 보면 도저히 가까워질 수가 없는 사이이다. 보통 이런 이웃 관계는 나라의 부침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 사이처럼 서로 주고받고 은원(恩怨)의 관계가 되는가 하면 애증이 엇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국력 차이가 나는 약소국과 강대국 사이는 한쪽이 당하기만 하는 일방적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사이가 아일랜드와 영국의 경우이다.
- 스콧 와이트먼(왼쪽) 주한 영국 대사와 앙엘 오도노휴 주한 아일랜드 대사가 지난 4월10일 서울 정동 영국대사관 정원에서 대화하며 걷고 있다.
아일랜드인은 1919년 1월 21일 독립 선언에 이어 1921년 12월 6일 독립 승인까지 역사상 제대로 된 독립국가 형태를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영국의 속국으로만 살아왔던 불행한 민족이었다. 헨리 8세 이후 영국 왕이 아일랜드 왕을 겸하는 모호한 형태로나마 존재하던 아일랜드 왕국마저도 1801년 대영제국의 일부로 완전히 병합돼 버렸다. 아일랜드가 웨일스나 스코틀랜드처럼 영국의 한 지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 아일랜드는 독립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다. 1998년 일명 성(聖)금요일 평화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피가 아일랜드 땅에 흘렀다. 1919년부터 벌어진 3년간의 독립전쟁으로 1400여명이 죽었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을 선두로 한 ‘더 트러블스(The Troubles)’라 불리는 30년간에 걸친 무장투쟁(1969∼1997)으로는 3524명이 사망했고 4만7541명의 부상자를 냈다. 1921년의 독립도 사실 완벽한 독립이 아니다. 아일랜드를 이루는 32개 주 중 남부 26개 주만 아일랜드로 독립했고 북부 6개 주는 주민들의 선택으로 아직 영국령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아일랜드 사태가 불거졌다. 당시 과반수를 차지하던 영국으로부터의 이주민, 즉 개신교계 주민들이 영국령으로 남기를 원해서 그렇게 결정된 것이다.
북아일랜드 6개 주가 영국령으로 남아 영국의 골머리를 앓게 한 이유는 영국이 사실 자초한 면이 크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대영제국으로 병합한 것을 지나 아예 완전 영국화하기 위한 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벨파스트를 중심으로 한 북아일랜드에 계획적으로 영국인들을 이주시켰다. 여기서 나온 것이 식민(植民)이라는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식민이란 말은 영어 문자 그대로 사람을 심는다(planting)는 뜻이다. 영국은 점령지 아일랜드를 영원히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자국민을 이주시켜 진짜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고자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 강점한 뒤 일본 농민을 대거 이주시킨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게 해서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에서 신교도들이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의 주도권을 잡고 가톨릭계 주민들을 차별하자 골은 더욱 깊어갔다. 1950~1960년대 영국 본토 상점이나 식당 문에 ‘흑인·아일랜드인·개 사절’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북아일랜드에서도 아일랜드인에 대한 차별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가톨릭 주민은 주택, 취업, 투표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신교도들이 장악한 주정부는 주택 분배에 있어서도 가톨릭 신자들을 차별했다. 5명의 가족을 가진 가톨릭계 가구보다 19세 독신 신교도가 먼저 주택을 받았다. 또 주택을 가진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주었으니 가톨릭계 주민들의 불만이 쌓인 것은 당연했다. 1969년 8월의 폭동은 결국 가톨릭계 주민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결과이다. 거기다 신교 계열 주민 자치대와 북아일랜드 경비경찰대의 과격한 진압은 무장투쟁을 불렀다. 그래서 1969년을 무장투쟁의 원년으로 본다. 이후 1998년 평화협정을 맺기까지 30년간 양측 모두 무수한 피를 흘렸다.
마거릿 대처 총리가 들어와서는 양측의 대립은 극심해진다. 특히 1981년에 있었던 IRA 수감자들의 단식투쟁으로 인한 사망으로,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 북아일랜드의 신구교 갈등은 최악의 단계로 접어든다. 보비 샌즈라는 IRA 무장대원 출신(당시 악명 높았던 메이즈 교도소 수감자)이 자신들을 죄인 취급하지 말고 정치범 대우를 해 달라는 요구 조건을 걸고 단식을 시작했다. 당시 마거릿 대처 총리는 원칙주의자였다.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없다고 선언하고 요구 사항을 일절 들어 주지 않았다. 만일 그들을 살인범이나 살인미수범이 아닌 정치범이나 양심수 취급을 하면 그들의 무장투쟁이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단식 시작 66일 만에 보비 샌즈가 사망하면서 그해 8월 말까지 10명의 IRA 죄수가 단식으로 사망했다. 단식투쟁 사건은 영국은 물론 세계를 뒤흔들었다. 인도적인 면에서 어떤 상황에라도 죽음은 막아야 한다는 세계 인권단체와 각국 수뇌들의 호소가 이어졌다. 대처 총리는 요한 바오로 2세의 간청에도 ‘범죄는 범죄이고 또 범죄다, 정치적 행위가 아니다’라면서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1997년 총선에 승리해 집권한 토니 블레어 총리는 북아일랜드 문제 해결을 가장 우선정책으로 세웠다. 취임 한 달 뒤인 6월 2일 블레어 총리는 북아일랜드 대도시 벨파스트를 찾는다. 그리고 150년 전 대기근으로 인한 아일랜드인 200만명의 죽음에 대해 사과했다. 블레어 총리는 매년 열리는 대기근 추모음악제에 참석한 1만5000명의 청중 앞에서 성명을 통해 런던의 당시 지도자들을 비난하고 “아일랜드에서 생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오늘날까지 양국 모두에 고통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토니 블레어의 솔직한 사과는 아일랜드인의 마음을 푸는 실마리로 작용했다. 당시 아일랜드 존 브루턴 총리도 “성명이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있어 미래를 위한 치유제로 작용할 것이다”라고 환영했다.
- 영국과 아일랜드 지도.
그러나 성금요일 평화협정의 미래를 어둡게 본 견해들이 많았다. 협정 체결 2년 내에 각 정파가 보유하고 있는 각종 무기들을 모두 내려놓는다는 조항이 가장 우려를 자아냈다. 무장해제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의 전망이었다. 일단 무장해제를 하는 것처럼 하고 다른 수를 쓸 것이라고 모두들 예상했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우려로 끝났다. 아주 미미한 사고만 있었을 뿐 지난 15년간 완벽한 평화가 북아일랜드에 찾아왔다.
양측이 결국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손을 든 이유에는 1998년 5월에 실시된 평화협정 승인 주민투표 결과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 아일랜드 모두에서 압도적 비율의 주민들이 협정에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신구교 무장세력 양측은 주민 정서에 반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됨을 알았다. 아일랜드에서는 유권자 56% 투표에 94%가 찬성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81% 투표에 71%가 찬성했다. 양측 정치인 누구도 감히 무슨 말을 더 보탤 여지가 없이 압도적으로 주민들이 협정을 승인했다. 양쪽 주민은 오랜 세월 동안 벌어진 유혈 사태에 염증을 느끼고 평화를 갈구하고 있었다.
대화해는 한쪽의 양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우선 IRA 등의 무장투쟁 피해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이 모두 살아 있어 양보가 거의 불가능했다. 아일랜드인으로 봐서는 너무 오랫동안 피해를 당했다. 1171년 영국왕 헨리 2세에 의해 시작된 아일랜드 침공으로부터 보면 850년에 가깝다. 그중 크롬웰의 아일랜드 침공(1649~1650) 때 당시 인구 150만명 중 60여만명이 전사, 살해 혹은 기아로 사망했다. 인구의 40%가 죽었다. 아일랜드인에 대한 깊은 차별의식도 있었지만 청교도인 크롬웰 특유의 가톨릭에 대한 증오가 크게 작용했다. 때문에 영국인에게 올리버 크롬웰은 영웅이지만 아일랜드인에게는 악마의 현신이다.
근대에 들어서는 18, 19세기 두 번에 걸친 대기근 때 영국의 태도가 아일랜드를 울렸다.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1이 감자로만 연명했다. 대기근 전에 이미 아일랜드 상황에 대한 수많은 조사(114개의 조사단과 61개의 특별위원회)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는 대기근의 조짐을 경고했음에도 영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846년 감자병으로 인해 수확이 4분의 1로 감소했음에도 감자를 비롯한 곡식은 아일랜드에서 영국 본토로 수출되고, 술 주정 원료로 사용되었다. 1846~1851년에 인구 1100만명 중에서 100만~200만명이 아사하고, 100만~200만명이 해외로 이민을 갔다.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가 줄어든 것이다.(여기에 관한 인구 통계는 종잡을 수 없이 다르다.)
아일랜드 인구는 대기근 이후에도 계속 줄어 1911년에는 440만에 불과했다. 반세기 만에 인구가 3분의 1로 줄었다. 같은 시기에 영국은 1600만명에서 3250만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 결국 19세기 초 비슷했던 두 나라의 인구(영국 1600만명, 아일랜드 1100만명)는 50년이 지나 아일랜드가 영국의 8분의 1 수준이 됐다. 이후 더욱 격차가 벌어져 지금 아일랜드 인구는 영국 인구의 13분의 1도 안 된다. 의도했든 안 했든 제대로 인종청소가 된 것이다. 영국 정부가 인종청소를 목적으로 방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제기한 사람도 있다. 의심의 근거로 당시 영국 정부의 아일랜드 구호 담당 장관 찰스 트레블리안 경이 “이번 기근 사태는 아일랜드인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한 발언을 예로 든다.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면 영국인을 향한 아일랜드인의 반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1970년대에 작곡된 아일랜드 민요 ‘아덴리의 벌판(The Fileds of Athenry)’이라는 노래에는 그들의 정서가 그대로 담겨 있다. 아일랜드 스포츠 팬들이 응원하면서 즐겨 부르는 노래 중 하나로 영국과 시합을 할 때는 빠지지 않는다.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트레블리안 장관의 옥수수를 훔치다 잡혀 오스트레일리아로 귀양 간 죄수를 노래한 것이다. 아일랜드인의 한이 절절하게 담겨 있어 노래를 듣고 있자면 뭉클해진다. 대영제국의 일부로 만들어 놓고 죽음을 방치한 셈이다.
사실 많은 아일랜드인은 강국 옆에서 식민지 신세로 있기보다는 부강한 대영제국의 정식 신민이 낫다는 생각으로 두 손을 들어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의 행동은 이런 모든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당시 영국 정부는 700만파운드(현재 5544억원)를 1845년부터 1850년 사이에 구호자금으로 썼다. 이는 당시 영국 국가총생산(GNP)의 0.5%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는 1833년 노예폐지법안에 따른 보상으로 노예상인들에게 지불한 2000만파운드에 비교해서도 3분의 1밖에 안 된다. 영국이 인종청소를 위해 의도적으로 아일랜드의 대기근을 방치했다는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의도적 대기근으로 보는 견해 중 대표적인 말이 ‘신은 감자병을 보냈지만 영국인이 대기근을 만들었다’이다.
이런 역사를 딛고 두 나라가 대화해를 만들어낸 것이다. 실제 두 나라의 화해는 1998년 4월 성금요일 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아주 조심스럽게 오랜 시간을 두고 추진되어 왔다. 히긴스 아일랜드 대통령의 영국 방문은 2011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일랜드 방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준비는 그 전부터 여왕의 가족들이 조용히 아일랜드를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듯이 준비를 해 나갔던 것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다음해인 1999년 여왕의 셋째 아들 에드워드 왕자 부부가 청소년센터 개소식 테이프를 끊기 위해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을 방문했다. 2004년에는 여왕의 외동딸 앤 공주가 더블린을 방문한 적이 있다. 조용한 방문이었다. 2006년 4월에는 여왕의 부군 필립 공이 혼자 더블린을 방문하기도 했다. 영국의 청소년 활동 프로그램으로 필립 공이 주창해 인기를 끌고 있던 에든버러공 상 수여를 위해서였다. 언론들은 필립 공의 방문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일랜드 방문의 시그널로 예측했는데 그러고도 5년이 지나 여왕의 방문이 성사되었다. 2011년의 여왕 방문은 여왕의 할아버지인 조지 5세가 1911년에 방문한 이후 딱 100년 만에 처음이었다. 반영감정과 테러위협 등 우려와는 달리 여왕의 아일랜드 방문은 따뜻한 환영과 여왕의 진솔한 사과로 이어지면서 대화의 장을 성공적으로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영국 공영방송 BBC의 기사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여왕의 아일랜드 방문으로 미래가 과거보다 먼저 왔다’.
금방 실현될 것 같았던 아일랜드 대통령의 영국 답방은 3년이 더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히긴스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서 양국의 화합과 새로운 출발을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영국 의회 연설에서 아일랜드와 영국의 미래에 대해 강조했다. ‘상호 애정과 존경’이라는 표현도 썼다. “국가적인 증오를 과거의 일로 만들자는 결의를 같이 나누겠다”고도 했다. 아일랜드 대통령 입에서 영국을 향해 ‘애정과 존경’이라는 표현이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히긴스 아일랜드 대통령은 국빈 방문을 앞두고 BBC와의 인터뷰에서 “폭력을 일으킨 사람들은 누구든 어떤 형태로든 피해자들을 포함해 모두에게 사과하고 과거에 대해 보다 겸손해야 한다”고 말했다. 히긴스 대통령은 “과거 폭력의 피해자들이 가해자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물론이지요. 당연한 일이고 모든 피해자가, 가해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거기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묵인하거나 침묵함으로써 간접 가해자 역할을 한 양국 국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지금까지 IRA를 비롯해 폭력 가해자들은 자신들도 피해자이고, 정당방위의 하나로 폭력을 행사했을 뿐이라고 변명해 왔다. 히긴스 대통령의 말은 ‘마지막 남은 일은 피해자와 가해자들 사이의 과거 청산 문제만 남았다’는 뜻이다. 가해 당사자들은 법적 책임은 비록 면했지만 도덕적·도의적 책임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러니 이제 그 책임마저 지라는 뜻이다. 시인 대통령다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