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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매체미학과 예술의 정치화
20240904 / 3강
(2강 매체란 무엇인가 &) 3. 정치의 심미화와 예술의 정치화 * 일시: 2024년 8월 28일(수) 오후8시. * 형식: zoom 온라인 * 강사: 정혁현 * 참석자: 박연옥, 서선미, 정단희, 정명수, 이샛별, 유혜숙, 조세랑, 김안선, 이학승 (9명) * 주 교재: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2017), 도서출판b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2007), 길 * 영화가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었는지 검토해 보면 벤야민이 사유하는 태도, 매체를 생각하는 태도, 현대 기술 문명에 의해 변화되는 예술 개념의 내용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 벤야민의 비평을 ‘구제 비평’이라고 한다. 구제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다. 벤야민은 유대인이고 친구 숄렘에게 받은 유대교적 영향으로 유대적 사고의 한 축을 놓지 않았던 점을 비춰본다면 구제 비평이 아니라 구원 비평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
* 예술작품의 변화
(기술 복제에 의해) 예술의 생산에서 진본성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척도가 무효가 되는 그 순간 예술의 사회적 기능 전체 또한 커다란 변혁을 겪게 된다. 예술은 더 이상 ‘제의’에 근거하지 않고, 어떤 다른 실천, 즉 ‘정치’에 근거를 두게 된다. |
-> 원시시대부터 중세 시대까지는 예술 작품의 기능이 주술에 속해 있었고 그 이후 제의가 세속화되어 탈 제의되는 과정 속에서 예술 작품이 정치적인 기능을 갖게 된다. 예술 개념도 이데아와 신을 표상하는 ‘기예’에서 복제기술에 의해 예술개념이 재구성됨. 과거에 수공업적 예술 생산 시대에는 시각성 즉, 시각적이고 선형적인 시선, 한마디로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가능했다면 기술복제 시대에는 촉각적인 감각이 강화된다. 가까이 있는데도 멀리 있는 것이 것의 현존을 느끼는 상황인 아우라는 거리 속에서, 타자성 속에서 오는 것이다. 기술복제시대는 시각적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현대의 대중들은 사물이나 예술 작품을 가까이 두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시선의 역할이 줄어들고 대상과 접촉하는 감각적 능력, 촉각적인 능력이 강화된다.
* 매체 개념의 사전적 의미
-> 벤야민이 말하는 매체는 메디움medium이다. 복수 형이 미디어media. 오늘날 매체 미학에서 매체 개념과 미디어 개념은 구별해 사용한다. 미디어는 일반적으로 신문이나 tv 등 대중 매체이고 대중적인 전달 수단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 과거에는 미디어가 없었을까? 미디어는 대중 매체뿐 아니라 주어진 시대에서 우세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예를 들면 고대 세계에서는 ‘말’이었다. 공동체의 동일성을 확립하거나 국가적 제의를 할 때 건국 신화를 낭송하거나 노래하고 연극으로 상연한다. 공동체성을 전하는 가장 핵심적인 매체는 음성이다. 건축 또한 말이 잘 전달되도록 구조된다. 의미도 중요하지만 말의 음색, 고저장단, 톤, 음률 등이 중요. 미디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를 ‘낭독의 시대’라고 말한다. ex) 스님이 독경을 읽을 때 사람들은 내용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음조 속에서 종교의 아우라를 느낀다.
* 낭독의 시대
귀중품이고 신성한 물건인 문서를 읽을 때는 낭독술이 중요했지만 인쇄술의 발달로 문서 보급이 시작됐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소리 내서 읽지 않았다. 침묵의 독서 시대가 온 것. 이제 시선 이외에 오감은 필요 없게 되었다. 인간의 모든 집중력은 시각에서 들어오는 문자의 의미와 그것을 숙고하는 사고 과정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진정한 사유의 시대가 전개. 그 이후 아날로그 전자 미디어를 통해서 대중 문화 시대가 시작되었고 어떤 면에서 인간을 다시 책으로부터 떼어놓아 시각이 약화되고 촉각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는 훨씬 더 강화. 대상과 거리가 완전히 상실되어 신유물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과 사물 사이에 어떤 위계도 발견할 수 없는 극단적인 평등성의 시대, 평등적인 감각의 시대가 온 것이다. 과거의 매스미디어 텔레비전은 모니터가 아니라 공중파를 통해 국가적 차원에서 정보 등을 전달하는 미디어 기기였다. 오늘날의 진정한 대중 매체는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유튜브다.
-> 매체는 훨씬 더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위 표 참고) 1대중 전달 용 매체라는 뜻도 있지만 대중에게 전달하는 수단인 말, 문자, 그림, 소리, 기호, 음악, 몸짓 등 다양한 것들이 모두 매체가 될 수 있다. 4 무엇이 성장, 존재하는 배지(배양액)-> 어떤 특별한 문화가 배양되고 성숙하는 특수한 물질적 조건. 매체의 성격에 따라서 매체의 물질적 조건이나 그 매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조건, 우리에게 요구하는 표현의 한계나 가능성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어떤 성격의 문화가 성장 발전할 것인가를 예견할 수 있다. 8 배지, 배양액의 의미에서 파생되어서 주변 상황, 생활 조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이 매체라고 얘기할 때는 항상 메디움이다. 미디어나 매스미디어와 다르다.
* 매체 사회학자로서 마셜 매클루언(Herbert Marshall McLuhan)의 유명한 모토 “미디어는 메시지다” , ” 미디어는 마사지다”
-> 비디오는 주어진 시대에서 우수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미디어를 통해서 전달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성격 자체가 일정하게 그 내용의 층위에 간섭한다. 어떤 내용은 미디어로 전달되는 것이 효과적인 반면 어떤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미디어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는 것. 스타일도 마찬가지. 스타일 그 자체가 말한다. 스타일은 그 사람이 하려는 내용이면서 어떤 면에서는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스타일이야말로 그 스타일에 담으려고 하는 내용 대부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아우라의 붕괴는 현대 생활에서 대중의 의미가 점차 증대하고 있는 점과 관련 있다. 대중의 의미가 증대하는 원인은 지각 매체의 변화 즉 사진과 영화 등 복제기술에 있다. ‘상’(그림)의 일회성(유일무이성)과 지속성에서 복제물의 일시성과 반복가능성으로! 1. 현대의 대중은 대상들을 공간적으로 또는 인간적 관심을 끄는 쪽으로 더 가까이 접근시키는 (원근법적 거리, 즉 시각성을 약화시키고 촉각성을 강화)것을 매우 열렬한 관심사로 삼는 동시에 2.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의 복제를 손에 넣음으로써 주어진 것의 유일무이성(일회성)을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대상에서 그 외피를 벗겨내는 것, 아우라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세계 내에서의 평등성의 감각”을 크게 진척시키고 있는 현대 지각의 특징으로서, 이 지각은 복제라는 수단을 통해 일회적인 것으로부터도 평등성을 획득해낸다.(30~31) |
-> ‘상’, ‘이미지’는 보통 수공업적 예술 작품에서 나타난다. ‘상’은 제작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만큼의 지속성이 있다. 여기에 제의적 가치까지 주어진다면 장인들의 특별한 능력을 능가하는 어떤 신성함 혹은 아우라로 영원성을 부여받게 된다(지속성).
-> ’복제물’은 시뮬레이션 혹은 시뮬라크르. 이미지와 이미지의 시뮬라크르에서 ‘상’은 지속적이었지만 복제물은 일시성과 반복 가능성을 갖는다. 복제 기술에 의해 예술의 성격과 내용, 예술을 통해서 요구되는 목적도 달라진다.
-> 유일무이성은 제의적 성격,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껍데기, 사물에 부여된 어떤 부수적인 것으로 유일무이성이 곧 아우라다. 이것의 몰락이 세계 내에서의 평등성의 감각을 크게 진작시킨다.
* 제의 가치, 전시 가치, 편집 가치
-> 양식: 제의 가치는 양식을 제 1기술, 전시 가치는 제 2기술이라고 함. 벤야민 논의에 발맞춰서 디지털 기술은 데이터를 재단하는, 자르고 이어 붙이는 기술이란 의미로 편집 가치에서 제3기술은 제1 기술과 제 2기술이 융합되는 과정이다.
-> 주체: 편집 가치에서 주체는 '떼, 천민'이다. 천민은 주어진 사회에 몫 없이 존재하는 자들이다. 사회 안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본다면 난민들이다. 난민은 선진국으로 이주하기 위해서 목숨 건 탈출을 시도하다가 거의 몰살당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바일폰을 들고 상황을 찍고 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네트워크 상에서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젝은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프롤레타리아가 혁명 세력이었다고 한다면 오늘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근본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집단을 천민으로 본다.
-> 경향: 제의 가치에서 천재적 장인의 자기 헌신을 통해 작품이 만들어졌다면 전시 가치에서는 기술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지고, 편집 가치에서는 주어진 데이터들을 편집해 어떻게 우리 시대의 실체를 드러낼 것인지, 어떤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열어낼 것인지가 관심사.
* 포스트 휴먼은 도나 헤러웨이 (Donna Jeanne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인간 존재의 동일성이 해체되기 시작. 마셜 매클루언부터 인간이라는 존재의 동일성은 그 자체로 어떤 생물학적 단일체가 아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하면서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이 개인적 단일체, 생물학적 단일체로 존재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 협동해 존재하고 기계와 몸이 합체되기도 하고 두뇌까지도 연장시키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 자연과의 관계: 제의 가치에서는 자연과의 거리였다면 전시 가치에서는 자연과 유희하는 관계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노동자가 상품 생산 노동에 모든 것을 투여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과 일정한 유희를 할 수 있는, 자연과의 어울림이 가능한 관계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 기술발전으로 인해 대상이 우리에게 비구속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함(네그리는 오늘날의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무직 노동을 비물질적 노동이라고 했다). 편집 가치에서는 물질 대상이 인간 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형태로, 데이터의 형태로 존재하고 그 데이터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가 핵심이다.
-> 기대: 제의 가치에서는 현상 지속. 전시 가치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요구하는 지각과 반응 양식을 훈련. 편집 가치는 주체가 투명하게 되는 것. 투명은 주체가 완전히 드러난다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다는 것이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데이터 사이의 경계가 사라짐으로써 주체라는 개념 자체도 주장할 수 없는 상태에 들어서게 된다.
* 자크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에서 세 가지 미학적 체제가 늘 존재해 왔다고 언급. 1윤리적 미학 체제. 2재현적 미학 체제. 3미학적 미학 체제다. 1은 공동체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 2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을 예술의 중점으로 삼았고 / 3은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 즉, 미적 평등성의 세계다. 랑시에르는 현대 이후의 세계를 3미학적 미학 체제라고 봄.
-> 이 사진에는 여전히 아우라가 남아 있다. 랑시에르는 복제술은 과거의 예술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를 탈각시키는 기능이 있다고 함. 그는 이 사진을 3미학적 미학 체제’가 시작되는 전조라고 했다. 왜? 사진의 대상이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1윤리적 미학 체제와 2재현적 미학 체제에서는 윤리와 재현의 가치를 따져 예술작품의 대상으로 삼았다. 평범한 사람이 재현과 예술 대상으로 등장.
* 랑시에르는 벤야민이 마르크스주의를 매체 미학에 원용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바로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아우라가 있는 예술작품들은 판매가 목적이 아니라 개인 또는 공동체를 위한 물건으로 제작되었다. 시장 가치는 전혀 없지만 꼭 필요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짐. 사용 가치는 측정 불가하다. 교환 가치는 그것이 얼마인지가 중요. 교환 가치는 측정 가능->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기 위해서 상품들의 교환 가치를 비교해 주는 척도인 화폐 발생. 과거에는 불가했던 가치 측정이 가능해짐으로써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면에서 평등성의 감각을 갖기 시작함(‘사람은 다 똑같지’, ‘왕과 노예는 다 같은 인간’ 식의 개념이 가능하게 됨). 모든 것이 화폐로 계산되고 평등 개념이 강화될수록 비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만을 가지고 존재하게 된다. 이 개념을 벤야민이 원용하고 있었다고 비판한 것.
영화는 단순히 복제된 예술작품이 아니라 복제 가능성에 의거해 있는 예술작품을 복제하는 것(p36) 영화는 그 예술적 성격이 그 복제 가능성에 의해 규정되는 최초의 형식이다. 영화 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바로 영화의 기술 속에 내재한다. 그리하여 대량 보급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대량 보급을 강요한다. 원시시대의 예술 작품에서는 마법적 기능을 중시되며 기계복제 시대에는 전시적 가치로서 예술적 기능이 중시된다. 그러나 복제 기술의 발전에 따라 예술적 기능 또한 부차화 될지도 모른다. 이런 기능 변화는 영화에서 가장 진보된 형태로 나타난다. 영화는 그 역할이 생활에서 거의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어떤 도구를 다루는 일이 조건 짓는 지각과 반응 양식에 인간을 적응시키는 데 기여한다. (도구의 종속에서 도구를 통한 해방으로) 이러한 적응을 가속화하는 일이 혁명의 목표다. 혁명이란 집단의 신경 감응이다. 제2의 기술은 사회의 근원적 힘들을 제압하는 일이 자연의 근원 힘들 과의 유희를 가능하게 할 전제가 되는 체제를 가리킨다. |
-> 이것이 벤야민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다. 영화는 사진이라는 복제기술을 통해서 만들어진 예술이다. 영화는 복제 가능성에 의해서 규정되는 최초의 형식이기 때문에 영화 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영화의 기술 속에 내재하며 대량 보급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대량 보급을 강요한다. 예를 들면 최초의 은판 사진술은 은판에 사진 이미지를 전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가였고 부르주아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사진술이 발전하면서 종이 위 전사가 가능해져 일반 노동자들도 초상 사진을 갖게 되었다. 영화는 사진술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많은 제작비가 필요하므로 대량 복제되어 보급될 가능성이 없으면 제작이 불가하다. 영화는 그 자체로 상업적 예술이다.
-> 모든 영화는 상업 영화다. 상업적 영화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하지만 대중은 어떤 경향적인 요구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영화에 의해서 그 요구가 변화되기도 한다. 대중과 영화는 상호작용하면서 그 시대의 영화적 세계가 만들어진다. 오늘날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 ‘영화가 만든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서 인간과 세계, 사랑, 공동체 등을 배울 뿐 아니라 배운 것을 통해서 영화에게 특별한 종류의 이야기를 요구한다. 영화는 다시 그 사람들의 요구를 반영해 영화를 제작한다. (->영화적 사회 개념, 시네마틱 소사이어티: '영화의 사회적 가치'란 '영화를 통해 창출되는 사회, 경제, 문화, 환경적 측면에서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가치이며, 개인과 집단의 인식, 태도, 활동, 제도 및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영화를 통한 사회적 성과를 일컫는다')
-> 디지털 기술이 시작되면서 영화 이론에서도 영화의 종말이 언급된다. 영화 시청 방식은 집단 상영이 아니라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개별화되었다. 과거의 영화 개념 자체가 변화되고 있다. 영화는 기술복제가 만들어낸 예술의 개념뿐만 아니라 기능의 변화에 있어서 가장 진보된 형태다. 영화는 지각과 반응 양식에 인간을 적응시키는 데 기여한다.
* 벤야민이 제시한 진보된 형태의 영화: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 <파리의 여인>: 채플린은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산업화된 사회와 그 환경 속에 사는 인물을 희극적 시선으로 접근한다.
벤야민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서 기계화된 인간으로서 자기로부터 소외되어 기계를 닮아가는 노동자의 모습이 나타남. 영화는 바로 이런 자본주의적 기계가 요청하는 생산 체제에 인간의 감각을 적응시키는 체제다. 벤야민은 그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방될 것인가? 노동을 하지 않는 방식이 아니라 거기에 완전히 숙련됨으로써 한마디로 기계적 인간이 되고 기계의 일부가 됨으로써, 기계에 의해서 끌려다니고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장악하여 그 힘을 가지고 혹은 장악해서 만들어진 어떤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자연과 교류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벤야민이 말한 영화의 혁명성이다. 이러한 적응을 가속화하는 일이 혁명의 목표다. 혁명이란 집단의 ‘신경 감응’이다. ‘전시 가치’에서 제2의 기술은 사회의 근원 힘들을 제압하는 일 즉, 기계 문명을 해체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장악해버리는 것이다. 전시 가치는 자연의 근원 힘들과 유희를 가능하게 할 전제가 되는 체제를 가리킨다.
조형 능력과 복제 기술 그리스인들은 (복제) 기술 수준 때문에 예술에서 영원한 가치를 생산해 내는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영화는 개선 가능성이 큰 예술 작품이다. 이는 영화가 영원한 가치를 극단적으로 포기하는 것과 연관된다. 그리스인들에게는 개선의 능력이 가장 적은 예술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 조형 작품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다. 조립이 가능한 예술 작품의 시대에 조형 예술의 몰락은 불가피하다. 상(像 Bild)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서로 밀접하게 엉켜 있는 데 반해 복제물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이 지각은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 커진 나머지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도 동질적인 것을 추출해낼 정도다.(사진의 작은 역사> p184) |
* 쇼트, 몽타주
_쇼트: 카메라가 촬영을 시작하고 멈추는 동안 찍힌 하나의 영상. 감독이 "레디, 액션"을 외치고 "컷"을 하는 동안 촬영된 영상은 모두 하나의 쇼트
_몽타주: montage는 프랑스어 montor(모으다, 조합하다). 일반적으로 몽타주는 편집과 동의어. 예이젠시테인이 몽타주 이론 정의. 단순한 쇼트프레임의 연속된 단위의 결합이 아니라, 쇼트와 쇼트가 충돌하여 제3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
어떤 사람이 집에서 나와 회사에 가는 장면을 찍는다면 집에서 문을 여는 장면과 거리를 걷는 장면, 빌딩에 들어가는 장면 등 대략 3개의 쇼트로 촬영.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완전히 분리된 3개의 세계를 연결해서 한 장면을 만든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이 세 공간을 동일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단절과 연속의 충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영상 문법에 익숙해져서 그렇게 화면이 흐르는 게 자연스러운데 영화 역사의 초기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거리가 나타나면 그 연속성이 이해 되지 않아 쇼트와 쇼트 사이에 굉장한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이때부터 할리우드 상업 영화에서는 영화의 투명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투명성이란 관객이 쇼트와 쇼트가 연결된 장면들을 경험할 때 불연속성을 경험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을 통해서 영화 기술이 발전함.
*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충격 효과 그 자체를 영화 미학으로 삼음. 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에서 쇼트와 쇼트가 충돌하는데 관객은 그들의 상상력으로 그 사이의 균열된 부분을 메꾸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공간과 시간상의 콘티뉴이티continuity (지속성)에서 연결되지 않는 쇼트와 쇼트를 연결시킴으로써 그 충돌에서 발생하는 제3의 이미지를 노림. 예이젠시테인의 영화에서 군중들이 경찰에 의해 학살되는 장면 중간중간에 제국주의적인 형상이나 권력의 이미지들을 삽입한다. 쇼트의 충돌 효과 그 자체를 겨냥한 것. 관객들의 혁명적인 상상력에 의존하거나 혹은 상상력을 개발하기도 함.
쇼트 효과와 더불어 여러 번 반복 촬영해 편집(조립식), 개봉 이후 감독판이 나오는 등 영화는 수정이 용이하다. 이제 과거의 조형 작품의 일회성 즉 ‘지금 여기’라는 아우라 자체가 영화 예술 속에서는 완전히 박살 난다. 벤야민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영화에서 요청하는 그의 미학은 예이젠시테인이 더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소외와 공간과 시간의 단절에서 오는 충격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 적응하게 만들어 신경 감응을 유발하는 것. 이것이 벤야민의 영화 예술의 목표다.
사진과 영화 초기 예술 논쟁 _사진과 영화를 “예술” 속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이 무분별하게 (사진이나) 영화의 제의적 요소를 삽입해서 해석하도록 한다. _이들은 사진(과 영화)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성격 전체가 바뀐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않았다. _예술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 시대가 예술을 제의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가상은 영구히 소멸되었다. 예술의 기능이 변한 것이다. _영화의 미장센 (쇼트 내부의 모든 연출)과 몽타주 (쇼트와 쇼트의 연속과 충돌) |
-> 사진술이 발견된 초기, 사진술에 의해 초상화 시장이 축소되었고 보다 쉽고 정확하게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초상화 화가들이 사진술을 이용했다. 사진은 자연의 재현이고 당시 ‘재현의 미학 체제’ 시대였기 때문에 예술이냐 아니냐는 논쟁이 일었다. 작가들은 사진의 예술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출 변화, 다양한 렌즈 사용, 각도 조절 등 여러 방법으로 사진을 회화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예술이라 주장함. 과거의 예술 개념을 사진에 적용하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논쟁.
테스트 성과 (Testleistung) _몽타주를 이루는 개별 조각들(쇼트)은 어떤 과정의 복제다. 이 과정은 마침 실험처럼 여러 동일한 과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한다. _영화의 경우 배우의 연기는 제작자, 감독, 카메라맨, 음향 담당자, 조명 담당자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 위원회 앞에서 이루어진다. 이들은 배우의 예술적 성과(결과)에 관여하며 테스트 성과 일반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_배우의 연기는 기계 장치가 제시하는 과정으로 수행되며 이는 컨베이어 벨트에 의해 규범화된 현대의 노동 과정과 같다. _영화는 성과의 전시 가능성 자체에서 일종의 테스트를 만들어냄으로써 테스트 성과를 전시 가능하게 만든다. |
(테스트 성과는 실험 결과로 번역하는 게 적당)
-> 과학 실험할 때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조건을 변화시켜 진행하는 것처럼 영화도 동일한 장면을 여러차례 찍는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찍어보고 감독은 이를 주관한다. 그리고 두 번째 전문가가 이 실험 결과에 관여한다. 이렇게 협의를 하면서 한 장면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을 거쳐 영화에 사용할 만한 적절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 배우는 연극 연기와 다르게 카메라가 어떤 각도에서 어떤 조명 조건으로 자신을 찍고 있는지 항상 의식해야 하며 기계 장치가 제시하는 과정, 기계 장치의 요구에 따라서 자신의 연기가 거기에 적응되어야 한다. 이것은 컨베이어 벨트에 의해 규범화된 현대의 노동 과정과 같다고 벤야민은 말한다. 영화 연기는 노동 과정을 상징적으로 극단화한 형태와 같다는 것. 영화는 일종의 테스트를 만들어냄으로써 테스트 성과를 전시 가능하게 만든다. 배우는 기계에 의한 소외 극복으로서의 영화 연기라는 이 과정을 통달하게 된다. 벤야민이 영화 연기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 여기 있다 ->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867년 ~1936년).
영화 연기는 배우의 인격이 아우라를 포기하는 가운데 활동해야만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영화 배우는 이런 기계 장치 앞에서 자신이 추방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무대로부터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격으로부터 추방되어 있는 듯한 그는 정체 모를 불쾌감과 더불어 형언하기 어려운 공허를 느끼는데, 그 원인은 그의 몸이 결락 증상을 겪는 점에 있다. 즉 그는 자신이 휘발되어 버리고, 또한 그의 현실, 그의 삶, 그의 음성, 그리고 그가 몸을 움직이는 데에 따른 소리 모두를 빼앗겨서 말 없는 하나의 영상이 되는 것이다. 이 영상은 한순간 스크린 위에서 요동한 뒤 정적 속으로 사라져 간다... 자그마한 기계 장치가 배우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관객 앞에서 유희를 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배우 자신은 기계 장치 앞에서 연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루이지 피란델로, <촬영개시!> |
-> 배우는 연기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소품, 한마디로 철저하게 대상화 된다. 자기 자신의 대상화. 배우는 철저하게 카메라와 혹은 감독 위원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며 카메라의 영상을 채우는 중요한 하나의 소도구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물 대상으로 느끼는 상태야말로 극단적인 소외 상태다. 배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물러나 자기 자신의 최소한의 일부라도 영화 속 인물에게 양도해야 한다. 한마디로 배우는 촬영 과정에서 완전히 비워진다.
배우가 일종의 소도구가 된다면 소도구가 일종의 배우 같은 작용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p58~9) 영화는 물질이 인간과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낼 수 있는 최초의 예술 수단인 셈이다. 따라서 영화는 유물론적인 표현에 탁월한 도구일 수 있다. 카메라 앞에서 배우의 소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 전체를 시장에 양도할 수밖에 없는 노동의 소외와 같다. 그러나 배우는 자신의 기량으로 기계적 조건에 맞춤으로써 인간성을 유지한다. 노동자는 이런 소외에 대한 극복, 즉 영화 배우의 인간성 또는 그들에게 바친 인간성이 기계 장치 앞에서 버텨낼 뿐만 아니라 그 기계 장치를 자기 자신의 승리에 복속시키는 모습을 보고자 한다. 인간이 기계 장치를 통해서 재현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기 소외가 지극히 생산적으로 활용되게 되었다. 배우는 기계 장치 앞에서 소외된 상태로 연기하지만, 이 연기는 결국 대중과 관계한다는 것을 의식한다. 대중이 배우의 연기를 컨트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컨트롤의 권위, 즉 대중의 권위가 갖는 의미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아직 이르다. 파시즘 자본은 이 혁명적 기회를 스타 숭배를 통한 대중의 부패로 대체하려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영화로부터 일반적으로 기대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기능은 전통적 예술관에 대한 혁명적 비판의 추진 뿐이다. |
-> 배우는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또 새로운 연기를 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배우는 자기 소외를 이용할 줄 안다. 기계가 요구하는 인간은 이처럼 인간성의 소외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장악해버리는 것이고 관객은 그러한 기계에 대한/기계를 통한 인간의 승리를 보려고 영화관에 온다. 벤야민의 이런 해석은 정말 놀랍고 재미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벤야민은 관객의 영화에 대한 매혹이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영화에 대한 매혹이 의식적인 것이라면 영화의 가능성의 그렇게 강력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영화가 무의식의 차원, 신경 감응, 즉 감각적 차원의 반응을 유발한다는 점을 벤야민은 주목한다.
-> 전통적 예술관 자체를 비워버리고 쓸어버리고 지워버리는 것이 영화 매체가 가지고 있는 혁명적인 임무.
영화는 대중이 자기표현의 기회를 늘림으로써 그들을 말하고 쓰는 주체로 구성하는 능력이 있다. |
-> 영화는 기본적으로 많이 제작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을 예술적 장면의 한 인물로 포착해낼 수 있다. 오늘날의 대중들은 예술이 포착할 수 있는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 시대와 관련해서 나도 할 말이 있다고 말하는 주체. 영화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표상으로 드러낼 만한 주체 의식이 필요한데 대중에게 그러한 자기 표현의 기회를 늘려줌으로써 그들을 작가 주체로, 예술가 주체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영화라는 매체는 의식적으로 하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매체의 속성상 그렇게 된다고 벤야민은 말하고 있다.
첫댓글 ㅠㅠ 꼭 도움되시길...수정사항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수고 많으셨어요. 전체적으로 보면 큰 문제 없지만, 제가 강의 중 잘못 말한 부분도 있고, 또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도 있어 수정할 사항이 있습니다. 수정할 내용은 괄호로 표시했습니다.
-> 유일무이성은 제의적 성격,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껍데기, 사물에 부여된 어떤 부수적인 것으로 유일무이성이 곧 아우라다. 이것이(이것의 몰락이) 세계 내에서의 평등성의 감각을 크게 진작시킨다.
디지털 기술을 재단한(디지털 기술은 데이터를 재단하는, 자르고 이어 붙이는) 기술이란 의미로 편집 가치에서 제3기술은 제1 기술과 제 2기술이 융합되는 과정이다.
주체: 편집 가치에서 주체는 '떼, 천민'이다. 천민은 주어진 사회에 목(몫) 없이 존재하는 자들이다....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근본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집단을 난민(천민)으로 본다.
* 포스트 휴먼은 도나 헤러웨이 (Donna Jeanne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을 통해서 (그 개념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원래) 다른 존재와 협동해 존재하고 기계와 몸이 합체되기도 하고 두뇌까지도 연장시키는 그런 존재(였다)가 되었다.
랑시에르의 세 가지 미학적 체제는 정확한 개념을 적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윤리적 이미지 체제(régime éthique des images),
시학적-또는 재현적représentatif- 예술 체제(régime poétique des arts),
미학적 예술 체제(régime esthétique des arts).
‘신경 감흥(감응)’: 여러 군데서 감흥으로 잘못 표기되었네요.
쇼트는 영화의 가장 작은 단위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프레임은 쇼트보다 훨씬 작은 단위죠. 제가 잘못 말했나 봐요.
우리 때는 '에이젠슈타인'이라고 읽었는데, 요즘은 예이젠시타인이라고 읽나봐요. ^^
사진을 회화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그런 방식으로 예술이라 주장.)회화라 주장함.
이렇게도 저렇게도 찍어보고 배우(감독이)는 이를 주관한다 (배우는 감독이 하라는 대로)
(영화) 배우는 연극 연기와 다르게
관객은 그것을(그러한 기계에 대한/기계를 통한 인간의 승리를) 보려고 영화관에 온다....하지만 정말 그런가? (벤야민은 관객의 영화에 대한 매혹이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영화에 대한 매혹이 의식적인 것이라면 영화의 가능성의 그렇게 강력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영화가 무의식의 차원, 신경 감응, 즉 감각적 차원의 반응을 유발한다는 점을 벤야민은 주목한다.) 관객의 의식에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 혁명적 무의식이 그럴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