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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世. 단재공 채호(丹齋公 采浩) 할아버지 와 밀양박씨(密陽朴氏)할머니 이야기
☞ 요약
단재공(丹齋公)의 휘(諱)는 채호(采浩)로 항일독립투사요 사학자이시며 언론인이시다.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 호(號)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으로서 1880년 12월 8일 고종 17년 아버지 광식공 30세 때에 작은 아드님으로 출생하시어 1936년 2월 21일 57세를 일기로 하여 뇌출혈로 옥중에서 순국하시었다. 1905년 26세 때에 성균관 박사를 하시고, 같은 해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시었으며 1906년에는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진으로 초빙되시었다. 1908년 29세 때에는 순 한글잡지「가뎡잡지」를 편집 발간하시어 애국사상을 국민들에게 고취시키셨으며, 1910년 31세 때에 중국으로 망명하시어 도산 안창호 등과 합류하여 활약하시었고 1911년 블라디보스톡에서「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시었다. 1914년 35세 때에는 옛 고구려의 땅을 답사하신 후 대고구려주의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마침내 1915년 36세 때에는 북경에 체류하면서「조선상고사」를 집필하시었고 1916년에는「꿈하늘」을 집필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충북 의정원의원에 피선되었고,「신대한」을 창간하시어 주필로 활동하시었다. 1920년 박자혜여사와 북경에서 결혼을 하시었고 1922년 43세 때에는 유명한「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하시었으며, 1924년에는 무장독립운동단체인「다물단」의 선언문을 기초하시고, 1925년에는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시었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시었다. 1928년 49세 때에는 소설「용과 용의 대격전」을 발표하시고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폐 사건에 연루, 체포되시어 1930년 대련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 받으시어 여순감옥으로 이송되시었으며,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57세의 일기로 순국하시었다. 묘소는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있으며,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을 받아 문공부 입석 견비(堅碑)가 있고, 저서로는 단재집, 조선상고사, 최도통전, 조선사연구초, 을지문덕전외 4편이 있다. 단재공의 올 곧고 대쪽 같은 성격, 강직한 성품과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인한 정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하는 성격은 할아버지 성우(星雨)공, 증조아버지 명휴(命休)공, 그리고 고조할아버지 상구(商求)공, 큰할아버지 약우(若雨)공, 작은 증조할아버지 국휴(國休)공 등 집안의 가풍이었다 할 것이며, 조선상고사 등 역사에 심취하게된 동기는 19대 선조이신 암헌공 신장께서 1431년 세종임금 때에 우리나라 최초의 주(州)와 군(郡)의 연혁지인 “8도지리지” 완성하시고, 18대조이신 문충공께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심은 물론 1475년 5월 15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성종임금에게 상언하기를 “요동은 본래 우리나라 땅입니다. 신이 세종조(世宗朝)에 여러 번 요동을 왕래하면서 보니, 동녕위(東寧衛) 사람들은 그 말과 옷과 음식이 다 우리나라와 같으며, 중국말은 잘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곧잘 충청도·황해도의 고을 이름을 말하면서, ‘우리의 고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따라서 팔도지리지 등 무수히 많은 책을 공부하신 단재공께서는, “요동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다” 라는 내용도 파악하셨을 것이고 이에 단재공은 우리나라 역사를 집필하게 되신 동기가 되시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의 배위는 1895년 16세 때에 결혼한 풍양조씨가 계시며 1920년 41세 때에 결혼한 밀양인 박자혜여사가 계신데, 풍양조씨에게서 관일을 낳았으나 어려서 죽고, 박자혜여사에게서 수범(秀凡)을 낳으시었다. 종손은 상원(尙原:일명 희상)이다.
☞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연보
-. 고령(高靈, 대가야 수도)신씨 시조 신성용(申成用)의 26세손
-. 21대 조부 순은 신덕린, 고려가 망하자 전남 광주로 내려와 은거
(예의판서를 지낸 그는 포은 정몽주의 교우로 서예에 뛰어나고
특히 팔분체(八分體)에 능해'덕린체(德?體)'라고까지 불리었음)
-. 순은의 손자 암헌 신장(19대조),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세종 때 제학 역임
-. 18대조 보한재 신숙주 '선비사상'을 강조하는 가훈작성, 후대에 전함
-. 낭성출신 신천영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가담, 단재가 몰락
-. 대원군 집정기간동안 조부 신성우 문과 급제, 사간원 정언 역임
-. 1860년대 충남 대덕 조부 처가로 이주
-.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남 대덕군 어남리 도리미(현 대전시 중구 어남동) 출생
-. 1887년(8세) 부 신광식 38세로 사망, 충북 낭성면 추정리 가래울 안장
-. 1887년(8세)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 본향으로 이사
-. 1888년(9세) 책걸이기념으로 옛집터에 모과나무 식재
-. 1892년(13세) 형 신재호 21세 사망
-. 1895년(16세) 고향서 풍양 조씨와 결혼(아들 관일 유체로 요절)
-. 1896년(17세) 청용 진사 신승구가에서 공부
-. 1897년(18세) 조부 동문(임헌회 제자) 양원 신기선 목천집서 신서적 섭렵
-. 1898년(19세) 신기선(대한제국 관료)추천으로 성균관 입교
-. 1898년(19세) 독립협회가입, 만민공동회 활동
-. 1901년(22세) 성균관에서 한문 무용론 주장
-. 1904년(25세) 성균관에서 조소앙 등과 함께 <항일성토문> 작성
-. 1904년(25세) 고향 청원에서 신규식·신백우와 한글보급운동
-. 1905년(26세) 성균관 박사(오늘의 교수)
-. 1905년(26세) 위암 장지연요청으로 <황성신문> 논설기자
-. 1905년 12월(26세) <황성신문> 폐간으로 <대한매일신보>로 옮김
-. 1906년(27세) <대한매일신보> 주필
-. 1907년(28세) 양기탁·안창호 등과 신민회 활동, 국채보상운동 참여
-. 1907년(28세) 소설 <이태리건국 삼걸전> 번안
-. 1908년(29세) <대한매일신보>에 50회에 걸쳐 <독사신론> 연재
-. 1908년(29세) 전기소설 <을지문덕>·<이순신전> 집필
-. 1908년(29세) 비평 <근금(近今) 국문소설 저자의 주의>· <문법을 의(宜)통일>·
<국한문의 경중> 발표
-. 1908년(29세) 순한글 잡지 <가정> 속간
-. 1908년(29세) <대한협회보> 등에 논설 발표
-. 1909년(30세) 전기소설 <최도통전> 집필
-. 1909년(30세) 비평 <소설가의 추세>·<천희당시화>·<국문의 기원>
<국문연구회 위원 제씨에게 권고함> 발표
-. 1909년(30세) 친일단체 일진회 성토에 앞장
-. 1910년(31세) 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 1910∼14 <권업신문>에서 활동
-. 1913년(34세) 연의소설 <고락유수> 집필
-. 1914년(35세) 백두산·광개토대왕비 고대 유적지 탐사
-. 1914년(35세) <조선사> 집필
-. 1915년(36세) 상해서 신규식 등이 조직한 동제사에 참여, 박달학원 운영
-. 1915년(36세) 신한청년회 조직에 참가
-. 1916년(37세) 우화소설 <꿈하늘> 집필
-. 1917년(38세) 질녀(향란)의 혼사문제로 국내 잠입
-. 1917년(38세) 비평 <문예계청년에게 참고를 구함> 발표
-. 1918년(39세) 만주 길림성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9명으로 참가
-. 1919년(40세)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 의원·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
-. 1919년(40세) 임정의 <독립신문>에 맞서기 위해 <신대한> 창간
-. 1920년(41세) 두 번째 부인 박자혜와 북경서 결혼
-. 1921년(42세) 아들 신수범 출생
-. 1921년(42세)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한문체 <천고>지 발행
-. 1923년(44세) <조선혁명선언> 작성
-. 1924년(45세) 북경 관음사에 승려로 은거
-. 1924년(45세) <조선상고사> 집필
-. 1924년(45세) 비평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문제없는 논문> 발표
-. 1925년(46세) <동아일보>에 <낭객의 신년만필> 발표
-. 1927년(48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 1927년(48세) 신간회 발기인
-. 1928년(49세) 무정부주의 잡지 <탈환(奪還)> 발간
-. 1928년(49세) 혁명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 창작
-. 1928년(49세) 대만에서 일경에 체포돼 대련감옥에 투옥
-. 1929년(50세) 홍명희 주선으로 『조선사연구초』발간
-. 1930년(51세) 10년형 확정, 여순감옥으로 이감
-. 1931년(52세) <조선일보>에『조선상고사』연재, 1948년 종로서원서 단행본으로 발간
-. 1935년(56세) 건강악화로 병보석 출감 통보했으나 거절
-. 1936년 2월 21일(57세:음력 1월 28일) 오후 4시20분 57세로 여순감옥서 순국
-. 1936년 2월 24일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에 안장
-. 1941년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경부 신백우 등이 묘석 세움
-. 1944년 미망인 박자혜 사망
-. 1955년 단재유고출판회 발족, 단재의 최초 저서 <을지문덕> 발간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1963년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 단재영당 세움
-. 1962년 북 국립중앙도서관서 단재유고 발견
-. 1966년 북서 작가동맹이 단재서거 30주년 기념모임 거행
-. 1966년 서울신문회관서 단재서거 30주년 추념식 및 학술강연회 거행
-. 1966년 북서 문학유고집『용과 용의 대격전』한글로 발간
-. 1972년 묘소앞에 단재사적비 건립
-. 1972년 을유문화사와 형설출판사『단재 신채호 전집』2권 발간
-. 1975년 형설출판사『단재 신채호 전집』보유편 발간
-. 1977년 2월 21일 단재사상연구회 발족
-. 1977년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단재신채호전집』상·중·하, 별집 발간
-. 1978년 묘소 앞에 단재사당 건립
-. 1978년 청주서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발족 초대회장에 신형식 선임,
그 후 박상진(충청일보 사장) 이우성(성균관대 교수) 등이 회장 맡음
-. 1986년 2월 21일 단재사상연구회, 단재(민족)사관연구소로 개칭
-. 1986년 8월 15일 고령신씨대약회 독립기념관에 단재어록비 건립
-. 1986년 9월 17일 구국학생연합(구학련) 단재사상연구회 결성
-. 1986년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아들 수범호적에 부로 등재
-. 1986년 한길사가 단재 학술·문학상 제정
-. 1988년 조선일보 주관으로 과천 서울대공원에 단재동상 건립
-. 1988년 충북도교육위원회 청원군 가덕면에 단재교육원 건립
-. 1991년 아들 신수범 사망
-. 1991년 생거지 대전시 기념물 제26호 지정
-. 1992년 독립기념관 『을지문덕』·이순신전』·『최도통전』발간
-. 1993년 묘소와 사당 충북도 기념물 제90호 지정
-. 1996년 임중빈 『선각자 단재 신채호』발간
-. 1996년 11월 8일 대전 어남동 생거지에 단재동상 제막
-. 1996년 12월 8일 청주 예술의 전당앞에 단재동상 제막
-. 1998년 일신서적출판사『조선상고사』발간
-. 1998년 형성출판사『주석 조선상고문화사』발간
-. 1998년 12월 8일 충북 청원 가덕면 단재교육원에 단재동상 제막
-. 2000년 북토피아『꿈하늘』발간
-. 2000년 11월 사이버 단재기념관(www.danjae.or.kr) 개관
-. 2003년 작가문화『용과 용의 대격전』발간
-. 2003년 2월 21일 묘소앞에 단재기념관 개관
-. 2003년 7월 15일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법인화 발족식
-. 2004년 신충우 단재사관으로 본『바람 든 한국사회』 발간
-. 2004년 범우사『조선사연구초』발간
-. 2004년 범우사『한국문학전집』 1차 10권중 첫 권에 단재문학 수록
-. 2005년 창비『20세기 한국소설』에 단재문학 소개
-. 2005년 김원웅·임인배 등 여아의원 국적법개안 국회 제출
-. 2005년 9월 9일 단재사연 단재사상연구소로 개칭
=단재(신채호)사상연구소 작성=
☞ 단재의 삶
Ⅰ. 단재의 가계
단재 신채호선생은 고령신씨로, 시조는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고 검교와 군기감의 벼슬을 지낸 신성용이다. 그 윗사람들은 신라의 공족(公族)으로 여러 대에 걸쳐 고령에 살면서 호장(戶長)을 지내 왔기 때문에 고령신씨로 계승되어 왔다. 단재는 시조로부터는 26세손이 되고, 조선조에 영의정까지 지낸 신숙주에게는 18대 손이 된다. 고령신씨의 일부는 연산군 무렵에 낭성과 가덕 지방에 낙향하여 상당산 동쪽에 살았으므로 산동대가로서 지칭되어왔으며, 낭성서 대과급제 24명, 진사 80여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재의 직계는 높은 벼슬과는 인연이 멀었다. 그의 16대조부터 단재생가
12대조까지는 종 3품에서 종 6품에 이르는 벼슬에 있었으나 11대조부터 9대조까지는 족보상에조차 벼슬이 보이지 않으며, 8대조부터 6대조까지는 일시 벼슬이 주어지는 것 같다가 5대조부터는 다시 그 증직되는 벼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락하였다. 단지 조부 신성우가 문과에 합격하여 사간원의 정언의 벼슬을 거치고 있을 뿐이다. 단재 집안의 몰락에는 이인좌의 난과 관련되어있다. 이 난의 관계자 중 신천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단재의 직계는 아니고, 신숙주의 5대손인 신식의 5대손이라고 한다. 신식의 외손에 소현세자가 있는데 신식의 5대손인 신천영은 이인좌와 모의하여 반란을 꾀하고는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추대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신식의 가문은 거의 몰락하였다. ①그리고 이 여파는 낭성 일대에 미쳐, 단재의 5대조 신두모 등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급속하게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원군의 집정기간 동안 단재의 할아버지인 신성우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 6품 벼슬인 정언을 지냈을 뿐이다. 신성우의 벼슬길 이후에도 단재의 집안은 피지 못하여 그의 낙향과 함께 집안사정은 극심한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신성우는 처가가 있는 안동권씨 마을로 외동아들인 신광식을 보내어 외가 살이를 시키게 된다. 단재의 아버지 신광식은 가난한 시골 선비로, 본래 살던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을 떠나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 마을 외가댁 옆에 간신히 묘막을 얻어 살아야 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외가인 권씨촌 도리미에서 신광식은 부인 밀양박씨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 신재호를 낳았고, 서른 두 살이 되어서는 둘째아들 신채호(申寀浩) 낳았다. 이 이름은 나중에 채호(采浩)로 고쳐지는데 이 사람이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선생의 아호 단재는 최영 장군의 단심가에서 따온 것이다. 형인 재호는 순흥안씨와의 사이에 향란이라는 딸을 두었는데, 단재 나이 13세 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단재는 중국망명시기 향란의 결혼문제와 관련하여 국내로 들어왔다가 혈연의 정을 끊기도 한다. 단재는 16세가 되던 해에 집안에서 정해준 풍양조씨와 결혼을 하여 첫아들 관일을 낳았으나 우유에 체해 아들을 잃고 난 후 부인과 이혼을 한다. 중국망명 중이던 1920년 단재는 박자혜와 두 번째 결혼을 하여 그 사이에 수범과 두범 두 아들을 낳는다. 박자혜는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현 서울 도봉구 수유리 화계유치원자리)에서 태어나 1914년 숙명여학교 기예과(2회)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조선총독부 부속병원(현 적십자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소위 '간우회사건'을 주동한 인물이었다. 당시 박자혜는 북경 연변대학에 재학중이었는데 단재와의 결혼은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성사되었다. 박자혜는 연경대학에서 여대생 축구팀을 구성하여 주장으로 활약할 만큼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1936년 단재가 여순감옥에서 서거한 이후 둘째 아들 두범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하였고, 1944년 박자혜도 병사한다. 장남 수범은 단재의 국적취득을 위하여 노력하여 1986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케 하였으며, 단재의 업적을 정리하는 작업에 온힘을 기울이다 1991년 5월 사망하였다.
☞ 단재의 상계도(上系圖)
26세 채호(采浩:1880~1936/57) →
25세 광식(光植:1849~1886/38) →
24세 성우(星雨:1829~1898년 이후 사망 추측) →
23세 명휴(命休:1798~1873/76) →
22세 상구(商求:1781~1821/41) →
21세 두모(斗模:1759~1807/49) →
20세 석록(錫祿:1740~1803/64) →
19세 지권(持權:1721~1786/66) →
18세 재청(再淸:1684~1751/68) →
17세 염(濂:1648~1708/61) →
16세 필한(弼漢:1624~1698/75) →
15세 절(?:1596~1688/93) →
14세 생부 경문(景汶:1570~1645/70)
14세 양부 수기(守淇:1563~1648/86)이시다.
☞ 본문 내용 수정 제언
단재의 상계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5대조 21세 신두모는 1759년에 출생하였으며, 이인좌의 난은 1728년 3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31년의 시차가 나므로 “①그리고 이 여파는 낭성 일대에 미쳐, 단재의 5대조 신두모 등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급속하게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를 “그리고 이 여파는 고령신씨 30년 정거처분의 영향으로 낭성 일대에 미쳐, 단재의 7대조 신지권 등 그 후손들에게 향교 입학, 과거응시 자격 등에 영향을 주어 벼슬길이 막히게 된다.”로 수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internet에 접속되어 있는 단재 관련 많은 글들이 대부분 단재 홈페이지를 인용하고 있으므로 잘못된 정보는 즉시 수정하여 바르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경식-
Ⅱ. 탄생과 성장
당시 단재선생의 부모는 논마지기는 고사하고 밭조차 버젓한 것이 없었으니, 산간밭을 개간하여 보리와 콩, 옥수수 농사를 지어 허기를 메우는 지경이었다. 그것도 보릿고개에는 남아있는 식량이 거의 없어 산나물을 캐어 죽을 쑤어 먹어야했다. 단재의 할머니 외가가 있는 도리미 마을은 부근의 두 부락과 함께 어남리를 이루고 있는데, 계족산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사이의 삼태기 같은 깊은 골짜기에 군데군데 집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봉소골이라고도 불리웠는데 이것은 새둥지 같은 깊은 산 속에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외딴 곳에 떨어진 마을의 전체 형편은 모두 비슷하였다. 가난한 살림속에 성장한 터라 단재는 몸이 매우 허약하였으며, 병약하여 마음대로 활동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할머니의 외가가 있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난 단재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단재에게 가장 커다란 고통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신광식을 잃는 슬픔이었다. 항상 자신과 자신의 형 재호에게 큰 힘이 되어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단재에게 큰 불행이었다. 신광식은 고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추정리 가래울 대왕산 후미진 곳에 묻혔다. 그리고 남은 식구들도 일가친척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는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돌아왔다.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할아버지 신성우는 마을에서 서당을 열고 글을 가르치며 한편으로는 두 손주에게 본격적으로 한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단재선생의 재능은 이때부터 발휘하기 시작하였는데, 아홉 살에 중국역사인 '통감'을 통달하였고, 이후 삼국지와 수호지 등을 거침없이 읽어나갔다. 단재선생은 열살무렵 한시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써레와 쟁기를 지고 나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한시를 지었다.
朝出負而氏 論去地多起
'이른 아침에 써래와 쟁기를 지고 들로 나가세. 논을 갈아 나가니 흙덩이가 많이도 일어나네.'
연날리기를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한시를 지었다.
高低風强弱 遠近絲長短
'높게 혹은 낮게 날림은 바람의 세고 약함에 있고
멀리 혹은 가까이 날림은 실의 길고 짧음에 있구나.'
이렇게 점차 학문의 정도가 성숙하게 되어가던 즈음에 단재선생에게는 또 하나의 슬픔이 닥쳐왔다. 항상 아버지처럼 단재선생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던 형 재호가 단재의 나이 13세때 세상을 뜬 것이다. 16세가 되던 해에 단재는 주위의 권유에 의하여 풍양조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혼인을 한다. 17세에는 진사를 지낸 신승구의 집에서, 19세에는 목천의 신기선의 사저를 드나들면서 한학을 익힌 단재는 드디어 신기선의 추천으로 19세에 성균관에 입교하게 된다. 성균관에 입교한 단재는 이종원, 이남규 아래에서 수학을 하며 훗날 이름을 날리는 변영만, 김연성, 유인식, 조용은 등과 교유하게 된다.
Ⅲ. 국내에서의 활동
단재는 독립협회가 서울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가 절정을 이루던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당시 단재는 내무부 문서부 소속으로 일하였는데, 이 부서에는 이상재, 신흥우, 김규식 등이 함께 있었다. 독립협회의 운동이 힘차게 진행될수록 정부의 탄압도 심해져 결국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단재도 검거되어 투옥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다행히 신기선의 후원으로 석방은 되었지만 처음 경험한 독립협회의 운동은 단재에게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공부하게끔 하지 않았다. 1901년 단재는 고향 근처 인차리에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문동학교를 세워 젊은 청년들을 교육하여 나갔다. 1904년 고향에 있던 단재는 이하영 등이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 팔아먹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균관으로 다시 올라와 항일성토문을 작성하고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항일성토궐기를 한다. 1905년에는 성균관 합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박사를 받았지만, 곧 고향으로 다시 내려와 계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황성신문'의 발행에 참여하던 장지연의 권유로 황성신문 논설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황성신문에서의 단재 필치는 예리하고 강렬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한데 모았고, 이후 언론인으로서의 단재활동을 가늠케 하였다. 1905년 을사5조약을 비난하는 장지연의 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이 황성신문에 인쇄되고 난 뒤 황성신문은 무기 정간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단재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초빙한 사람은 그 신문의 총무를 맡고 있던 양기탁이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도 단재의 글들은 사회의 중요한 이야기 거리였다. 그 옛날 나라를 구했던 영웅들을 다시 살려내 현재의 나라를 구하려 하였던 단재는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 모두는 단재 신채호선생 서두에서부터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운명을 건져보려는 단재의 소망이 한껏 들어간 명문들이었다. 역사가로서, 문학가로서 다방면에 걸친 단재의 재능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단재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 '천희당시화', '소설가의 추세' 등을 발표하여 여러분야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단재는 1910년 1월 6일자 신문에 '한일 합방론자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하여 국내에서의 활동을 접고 안창호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한다.
Ⅳ. 국외에서의 활동
1910년 봄 신민회 간부들은 일제의 점점 심해지는 책동에 대하여 대응책을 논의하는 비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신민회는 어려워진 국내에서의 독립활동을 접고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구체적 사업으로는 서북간도를 비롯한 시베리아, 미주 등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나아가 이들 지역에 동포들을 이주시켜 항일의 근거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1910년 4월 8일 단재는 일단 국내를 빠져나가 중국 청도에서 만나자는 계획에 따라 안정복의 '동사강목'만을 들고 김지간과 국경을 넘어 신민회 회의가 열리는 청도로 갔다.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할 중대한 회의였던 청도회의는 독립운동에 대한 점진론과 급진론이 대두된 회의였고, 따라서 여러 대안이 치열하게 맞선 회의였다. 일주일 동안 진행된 청도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길림성 밀산현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모든 독립운동의 기지를 이곳에 두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종호의 출자금과 여러 각처의 성금을 통하여 농토도 마련하고, 무관학교도 세우려던 이들의 노력은 이종호의 포기로 결국 실패하고 망명인사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단재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이 곳 블라디보스톡에서 단재는 '해조신문', '청구신문', '권업신문', '대양보' 등의 발행에 참여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해나갔다. 단재의 몸을 돌보지 않는 활발한 활동은 단재의 쇠약을 가져왔고, 이러한 단재를 보다 못해 상해의 신규식이 단재를 불러들였다. 대충 몸의 기력을 회복한 단재는 신규식이 운영하던 동제사에서 잠시 머물면서, 신규식의 도움으로 박달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박달학원은 단군의 얼을 살려 민족의 살 길을 찾아보려는 단재의 의식으로부터 시작한 교육기관이었다. 이 학원의 강사로는 문일평, 홍명희, 조소앙, 신규식 등이 초빙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1914년 단재는 중국 망명 중 역사의식의 대전환을 맞는 기회를 갖게 된다. 윤세용·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그들이 창설한 동창학교(東昌學校) 운영에 참여하기 위하여 환인현으로 갔던 것인데, 윤세복·신백우·김사·이길룡 등과 함께 백두산을 거쳐 만주를 돌아가는 대 여행을 가졌던 것이다. 백두산과 광개토대왕릉 등의 여행은 이후 단재에게 대고구려적인 사고를 갖게하는 귀중한 경험을 준다. 단재가 구상하던 고대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고 구체화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이후 단재는 이상설·신규식·박은식·유동열·조성환·성낙형·이춘일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이 조직의 활동이 실효성이 없음을 알고 역사연구와 문학적인 창작에 몰두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1916년 봄에 단재는 북경에서 중편소설『꿈하늘』을 탈고하는데, 이 작품은 단재가 한 놈의 입과 손을 빌어 나라의 독립운동전개를 상징적 수법으로 극 청주예술의전당동상 화한 대표적 소설이다. 단재는 이 기간 동안 대종교(大倧敎)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는데, 대종교의 제1대 교주 나철이 구월산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긴 글을 남기고 자결하자 그 비통한 심사를「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지어 바치며 달랬다. 그 후 단재는 제2대 교주 김교헌과도 함께 대종교 교육에 참여하였으며, 이 일에는 유근·박은식 등이 함께 하였다. 후일 단재의 「조선상고사」는 대종교의 교본이 되기도 한다. 아끼던 제자 김기수의 죽음과 조카 향란의 혼인 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돌아 온 단재는 그후 북경의 보타암에 기거하며 역사연구에 매진하였다.
여순시내전경
이때 벽초 홍명희는 남양군도에서 삼년간 방랑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였는데, 단재의 숙소를 자주들르며 평생동안의 남다른 우정을 나누게 된다. 한편, 임시정부의 수립에도 적극 참여하였던 단재는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추대되자 위임통치를 미국에 건의한 경력을 들어 이에 반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단재의 뜻과는 반대로 일이 성사되자 단재는 임정을 나와 임정을 비판하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한다. 또한, 임정이 발행하던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을 창간하고 임정의 잘못된 노선을 비판하는 소위 '신대한사건'을 주동하게 된다.
Ⅴ. 독립운동 과 순국
1918년 12월 만주 동삼성(東三省)에서 활동하던 중광단(重光團)이 중심이 되어 국외의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보통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이 독립선언에 단재도 주요 인물로 참여하였다. 이 선언서는 무력투쟁이 유일한 독립운동임을 선언하여 2·8독립선언이나 3·1독립선언과는 내용적으로 달랐다. 1919년부터는 국내에서 발생한 3·1운동의 여파로 중국에 망명해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여 통합된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단재는 임시의 정원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면서 한성정부의 법통을 주장하였다.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으로 이승만이 거론되자 단재는 그 도산 안창호선생에게 보낸 편지 가 '없는 나라마저 팔아먹어,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 나쁘다'며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단재의 뜻과는 달리 의정원회의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단재는 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사임하고 임시정부내의 준비론과 외교론에 대한 성토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단재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黨)을 재건하여 그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고, 대한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 부단주로 활발한 활동을 펴는 한편, 프랑스 조계 의영학교(義英學校) 교장이 되어 청년교육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와 맞섰던 신대한 사건을 계기로상해 임정과 결별한 단재는 북경으로 돌아와 항일운동에 매진한다. 보합단(普合團) 조직에 참여하여 내임장(內任長)으로 추대되어 활동하는가 하면 독립운동의 행동대였던 '다물단'(多勿團)의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다물단은 우당 이회영의 조카인 이규준이 몇몇 동지들과 만든 무장독립운동단체로 다물은 조국의 광복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단재는 이 다물단의 조직과 선언문을 작성에 여순감옥의 형벌기구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1922년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고문으로 가입한 단재는 의열단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다.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폭력투쟁으로 일관하는 의열단은 단재의 운동정신에도 부합하는 단체여서 단재는 흔쾌히 6천 4백여 자에 이르는 이 선언서를 작성하게 된다. 단재는 조국 독립운동의 결실을 민중혁명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24년 북경에서 처음 결성된 재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의 기관지인 '정의공보'에 논설을 실으면서 무정부주의 운동에 관심을 나타냈다. 이후 단재가 관여하였던 통일전선체 신간회 운동이 무산되자 단재는 더욱 무정부주의 운동으로 경도된다. 1927년 남경에서 수립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였으며, 무정부주의의 기관지인 '탈환', '동방' 등의 잡지에도 관여하며 적지 않은 글을 기고하였다. 1928년 4월 조 여순감옥 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베이징 동방연맹대회부터 단재는 본격적으로 이 무정부주의 혁명운동에 참여한다. 1920년 재혼한 부인 박자혜와 아들 수범을 불러 얼굴을 본 단재는 무정부주의 운동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하여 공작금 마련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결국 택한 방법은 외국위조지폐를 만들어 이를 폭탄제조소 설치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단재는 중국인 유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이 위폐를 교환하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된다. 2년 동안의 재판을 통하여 단재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죄수번호 411번을 달고 여순감옥에 수감된다. 형기를 3년 정도 앞두고 병이 악화된 단재는 결국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순국한다. 순국이전에 병보석으로 감옥문을 나설 기회가 있었지만,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단재는 거부하였던 것이다. 일제로부터 우리 민족이 압박과 설움을 받던 시기동안, 수많은 애국지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살다 갔다. 그러나, 단재선생처럼 이론과 실천면에서 투철했던 지사는 드물었으며 특히,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몸소 실천하다 끝내 감옥에서 순국한 선열은 더욱 드물다. 여순항
☞ 단재의 활동
Ⅰ. 역사 저술 활동
단재 신채호는 역사학자였지만, 언론인으로 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사관은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그의 초창기 사관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웅주의사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따라서 고대문화를 폭 넓게 이해하게 되면서 영웅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에는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혁명을 주도하여 항일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폭력적 항일운동과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단재는 한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사관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그가 국사의 연구와 교육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국사의 연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민족의 자강과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의 민족주의 사관은 민족의 자강과 독립이라는 사상적 바탕위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이와같이 그의 사학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민중을 주체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유교적인 전근대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사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ⅰ. 독사신론
단재선생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있으면서, 풍전등화와 같은 국운을 안타깝게 여기는 한편, 쇠미해진 국운을 떨쳐 일으키고자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 정신을 찾으려고 집필한 글이다. 이 글은 1908년 8월 27일부터 9월 15일까지, 10월 29일부터 12월 13일까지 총 50회에 걸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12월 13일자 연재 끝에는 '미완'이라고 되어있다. 이 글에서 단재는 우리 민족이 단군의 후예이며, 중심종족은 부여족임을 천명하고, 기자를 정통에서 몰아내었다. 단군시대로부터 삼부여(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부여족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의 성쇠를 살피고 있으며, 특히 고구려의 멸망을 부여족 쇠퇴의 결정적 원인으로 파악하고 이를 규명하였고, 발해의 역사가 민족사에서 빠진 것과 그 원인을 서술하였다.
ⅱ. 조선상고사 총론
단재선생이 중국 북경에 망명해있던 1924년, 25년경에 쓴 것으로 짐작되는 '조선사'의 총론 부분으로 1931년 6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 14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이다. 이때 '조선사'는 총 102회나 연재되었고(10월 14일까지), 이어서 '조선상고문화사'가 두 번으로 나뉘어(1931년 10월 15일 ∼ 12월 3일, 39회;1932년 5월 27일 ∼ 5월 31일, 4회) 같은 신문에 총 43회분이 연재되었다.
이 '조선상고사 총론'은 '조선사'에 붙은 총론이므로 '조선사총론'이라고 해야 하지만, 단재 선생의 이 저술이 상고시대에까지 밖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조선상고사 총론'이라 한 듯하다.
단재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정의하고, 조선민족을 아의 단위로 삼아 그 정치·사회 등 각 분야의 소장성쇠를 서술하였다.
역사의 구성요소를 시(時)·공(空)·인(人의) 세가지로 파악하고, 이에 바탕하여 조선의 기존 역사서들에 대한 철저한 문헌비판을 제기하였다. 그 방법으로 이두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각종 전적에 대한 사료비판, 언어·풍속의 연구 등을 제시하였다.
ⅲ. 전후삼한고
1925년경 동아일보에 게재된 글로 단재는 이 논문에서 삼한을 전삼한과 후삼한으로 나누어 논증하였다. 전삼한은 곧 삼조선으로 단군시대의 신·불·말 조선을 가리키며, 후삼한은 마한·진한·변한 즉 백제·신라·가야라 하였다. 단재는 이두의 해석 방법을 이용, 삼조선의 범위를 요동일대에 비정하여 고대사의 강역을 넓혔고, 마한 50여국과 진한과 변진 24개국의 위치 비정(比定)을 시도하였다.
ⅳ. 조선상고문화사
단재선생이 1910년대 후반에 저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상고사에 관한 글로 1931년 당시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 문헌은 단재의 역사연구단계로 볼 때 '독사신론'에서 '조선상고사'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의 작품으로 그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독사신론'에서는 단군·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역사인식체계와 그 역사무대로서 만주를 중요시하였지만, 이 책에서는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부여족의 식민지로서 중국대륙의 일부까지를 우리의 역사로 수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사군의 반도외존재설과 전후삼한설 등이 새롭게 주장되어지게 되었다.
둘째, 대종교적 분위기에 젖어든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고적답사를 통한 현장확인, 문헌수집, 유물발굴 및 실증적 방법의 적용 등의 노력을 엿볼 수 있으며 평이한 국한문 문체의 역사저술을 느낄 수 있다.
셋째, 한국의 상고문화에 대한 국수주의적이고 자존적인 인식이 뚜렷하다. 단군왕조를 강조한 것은 대종교의 포교와 관련이 깊겠지만, 그 밖에 우리의 상고문화가 중국을 능가하는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하는 여러 사례들이 기술되어 있는 것은 이 책이 중국에 대한 문화사대와 일제의 식민지상황을 철폐하려는 자주적인 역사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ⅴ.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글인데, 이 글에서 단재는 묘청이 일으킨 서경전역의 이면에는 낭·불·유(郎佛儒) 3가의 쟁투가 감추어져 있었으며, 이는 곧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다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낭·불 양가는 패퇴하고 유가가 집권하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이 소멸되었다고 보았으며, '삼국사기'를 그 산물이라고 보았다.
Ⅱ. 문학 저술 활동
내가 죽으면 나의 시체를 왜놈들이 밟지 못하도록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던 단재 신채호. 하지만 그의 유골 한줌은 고국 청주의 고령 신씨 고두미 마을로 돌아왔고 호적이 없던 그의 유택은 뜰 한켠에 마련되었으니, 그의 혼백은 지금도 편안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의 일생은 붕정만리(鵬程萬里)의 고단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다. 큰 뜻의 날개를 저어서 민족을 위한 역사의 바다를 떠다니시던 선생님. 죽어서도 구천의 넋으로 역사의 바다를 떠돌 것만 같은데 그의 문장을, 혹은 문학작품을 분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새로운 회의가 밀려든다.
단재는 민족문학의 맥을 잇는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는 한학에 능통하여 고전 전적(典籍)을 막힘 없이 읽고 비판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의 문학 영역은 한시, 시조, 근대시, 전(傳), 역사소설 등 다방면에 걸쳐 있는 바, 바로 이 점은 단재가 문학의 형식을 다만 문장(文章) 또는 문(文)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단재문학에 대하여 요약하여 보면, 첫째, 단재 문학의 의의는 삶과 죽음의 절대주의 즉 일원론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단재가 흔히 알려진 것과 같이 문학의 대 사회적 효용성만을 중요시했던 것은 아니고 문학으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훌륭한 문장들을 생산한 문인으로서도 중요하다.
둘째, 단재는 양반 계층 출신이면서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섰다는 데 있다. 단재는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라는 복고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 해방을 위한 진보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 점은 되짚어 강조되어 마땅하다. 하지만 단재는 전통적인 문학관 즉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일원론적 입장을 견지했다. '文은 氣이고 道는 理다'라는 조선후기 유가들이 가지고 있던 문학관을 일원론으로 이해하면서 비타협적 절대주의 문학관을 고수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사안이다.
셋째, 단재가 '조선혁명선언'에서 주창한 민중의 직접 혁명은 '용과 용의 대격전', '꿈하늘'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민중의 직접혁명을 주장한 단재는 식민지적 현실을 적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민중적 세계관 속에서 담아내고 있다. 이 당시의 민중은 식민지 조선인 모두를 상징한다. 그의 혁명적 일원론은 서구문학에 대한 민족문학의 항거였고 문예반정(文藝反正)이었던 것이다.
넷째, 단재의 작품을 소설이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루카치(Lukac's)적 관점에서가 아닌, 우리 나라 전통의 문학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논자는 ① 이광수 - 염상섭 - 이기영 - 이상 - 김승옥으로 이어지는 흐름과는 다른, ② 신채호 - 홍명희 - 황석영 - 김지하 - 이문구로 이어지는 흐름을 생각해 보았다. 잠정적으로 ① 을 이광수적 축, ② 를 신채호적 축으로 명명해 둔다. 물경스런 가설로 보일 수도 있는 두 흐름은 그러나, 크고 깊은 한국문학의 강속에 녹아 있는 하나의 물줄기로 합쳐져 있음은 당연한 것인 만큼 단재의 문학사적 의의는 크다. '이식문화론과 전통단절론은 이론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해묵은 과제의 실마리를 단재류의 역사전기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서구 소설의 영향보다도 고전소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다섯째, 단재의 민족주의 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자칫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국수주의와 영웅 사관에 대한 맹목적 찬양은 단재의 문학과 사상을 훼손할 염려가 있다. 단재는 절대주의적 관점에서 살고 썼고 죽었지만 지금 우리는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논하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ⅰ. 역사전기소설
단재는 역사전기소설을 많이 창작했다. 그것은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의 운명을 일으켜 세우고자 영웅을 기대하던 조선 민중들의 열망을 작품으로 담아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영웅대망론으로 영웅이 출현하여 나라를 구해줄 것으로 믿고 영웅의 힘으로 조선사람들을 단결하게 할 수 있다는 민족의식의 소설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당시 애국계몽주의자들은 열강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하여 국권을 수호하고 근대시민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는 과제를 문학작품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즉, 문학의 공리적 측면을 중시하여 민족의 영웅을 상상 속에서 재창조하려는 의도에서 역사전기 소설을 지은 것이다.
한편 애국계몽기에는 많은 작품들이 번안되었는데 단재 또한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번안하면서 국가를 부흥시킨 다른 나라의 위인들을 소개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역사전기소설은 국권상실에 처한 민중들의 민족애와 저항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재는 [을지문덕](1908), [이순신전](1908), [최도통전](1909) 등의 역사전기소설을 남겼다.
ⅱ. 꿈하늘
1916년경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한글체로 쓴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형식이며 단재 자신의 자전적 내용을 소설화한 근대문학 초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민족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일제에 대한 무한한 투쟁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는데 단재의 우국충정과 당대에 실현할 수 없는 민족적 열망을 환상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단재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한 놈을 내세워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찾으려는 강렬한 의지를 담아냈다. 이 작품은 환상적 기법을 사용하여 시공간을 초월하여 전개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근대소설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나라사랑의 주제를 표현하려는 단재식의 방법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단군기원 4240(1907)년 어느 날이다. 주인공 한 놈은 하늘로부터 큰 무궁화 꽃에 내려앉는다. 그때 동편으로 우리나라 군사가 나타나고 서편에는 괴물 같은 다른 군사가 나타나 일대 접전을 벌린다. 싸움을 이긴 후 동편 장수가 무궁화의 노래를 부르는데 그 장수는 바로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다. 을지문덕과 한 놈은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다가 사라지고 한 놈은 우리나라를 구한 여러 영웅들을 만난다.
한 놈은 진정 나라를 위해서 울어본 적이 있는가 라고 탄식하면서 작품은 끝난다.
ⅲ. 용과 용의 대격전
이 작품은 단재가 무정부주의 사상에 빠져 있던 1928년에 생산된 소설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무정부주의자로서의 허무와 저주 등이 복잡하게 드러나고 있다. 작품은 조선의 민중을 포함한 모든 피압박 민중의 처참한 현실을 담아내고 있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표현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작품 구성상의 특징은 [선언문]을 포함한 논설적 문체와 소설적 구성이 혼재되어 있는 특별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재는 무정부주의의 사상적 토대 위에서 민중에 대한 부당한 착취가 어떻게 가능했던가를 보여주면서 이데올로기와 국가제도에 대한 강력한 부정의 의지를 표명한다.
이것은 지배와 피지배라는 관계 자체를 부정하고자 했던 그의 사상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며 진화론과 자강론 또는 영웅주의 사관에서 벗어나서 모든 정치제도를 부정해야 했던 무정부주의자인 단재식의 표현방법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ⅳ. 이태리건국 삼걸전
이 책은 19세기 이태리 통일에 헌신한 세 영걸에 대한 역사전기소설을 단재 신채호가 번역하여 1907년 10월 서울 '광학서포'에서 출판한 것을 90년만에 다시 펴낸 영인본이다. 원저는 중국의 양계초가 저술한 것으로 1천여년 동안 소국으로 분립되어 온 이태리가 19세기에 들어와 통일을 이루는데 크게 공헌한 이들의 영웅적인 애국활동을 소설화한 것이다.
당시 단재는 28세의 청년 논객으로 일제 침략을 정면으로 폭로하고 비판할 수 있었던 국내 유일한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종사하면서 식민지나 다름없는 조국의 운명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던 시기였다. 일제는 이른바 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국권을 침탈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애국영웅의 출현이 사회적으로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다.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조국 독립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인식한 단재가 투철한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가지고 이태리 통일을 위해 희생적으로 투쟁한 세 영걸의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나라를 구할 애국자와 구국영웅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역술하였던 것이다.
이 소설은 이태리 통일에 공이 큰 마치니·가리발디·카부르를 주인공으로 하고 구성은 서론과 본문 26절과 결론으로 논문과 같은 형식의 역사전기이다. '황성신문'의 사장으로 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논설을 썼던 위암 장지연이 교열을 보았으며 그는 순한문으로 쓴 서문에 국민들이 애국정신을 갖고 우리나라가 동양의 이태리가 되도록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는 글을 싣고 있다.
이 '이태리건국삼걸전' 소설의 시작은 1830년 프랑스 제2혁명이 일어나고 이태리 반도에도 격변의 물결이 밀어 닥치자 이듬해 마치니가 청년이태리당을 창설하고 통일운동의 활동에 뛰어든 시기부터이다. 이때 마치니는 25살이었으며, 가리발디는 23살, 카부르는 20살이었다. 아래의 목차에서는 이 소설의 대체적인 내용의 구성을 살펴 볼 수 있다.
머리편 서론
제 1절 삼걸 이전의 이태리 형세와 삼걸의 어린시절
제 2절 마치니의 청년이태리당 창립과 사르디니아왕에게 편지 보낸사실(1831)
제 3절 카부르가 직접 농사를 지음
제 4절 마치니와 가리발디의 망명
제 5절 남아메리카의 가리발디
제 6절 혁명이전의 형세
제 7절 1848년의 혁명
제 8절 로마공화국의 건설과 멸망(1849)
제 9절 혁명후의 형세
제10절 사르디니아 신왕의 현명함과 카부르의 재상 임명(1850)
제11절 카부르의 내정개혁
제12절 카부르 외교정책 제1단계(크리미아전쟁)(1853∼56)
제13절 카부르 외교정책 제2단계(파리회의)
제14절 카부르 외교정책 제3단계(이태리·프랑스 밀약)(1859)
제15절 이태리·오스트리아 전쟁 준비와 카부르와 가리발디의 만남(1859)
제16절 이태리·오스트리아 전쟁과 카부르의 사직
제17절 가리발디의 사직
제18절 카부르의 재상 재취임과 남북 이태리의 통일
제19절 당시 남이태리의 형세
제20절 가리발디의 남이태리 평정
제21절 남북 이태리의 합병
제22절 제일차 국회
제23절 카부르의 서거와 그 이루지 못한 뜻(1861)
제24절 가리발디의 하옥과 영국 유람
제25절 가리발디의 로마 재입성과 또 다시 맞은 패배와 체포
제26절 이태리가 로마에 수도를 정하니 대통일의 사업이 이루어짐(1871)
마지막편 결론
목차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태리 통일운동 전개 과정을 세 영걸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체로 인물의 전기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을 일차적인 사명으로 하면서 흥미롭게 읽힐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국권상실의 위기에 처하게 된 우리나라에서도 이 무렵 1905년 '애급근세사', '이태리국아마치전'을 비롯하여 1906년 '월남망국사', '법란서신사' 등 국권을 수호하는 애국적인 영웅들의 전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들 책은 조국의 국권을 침탈하려는 일제에 맞서 투쟁적으로 항거해야 한다는 구국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태리건국삼걸전'의 서론과 결론은 신채호가 직접 소견을 밝히고 있는 부분으로 당시 그의 사상을 알아보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단재는 식민지 전야와 같은 당시 상황에서 애국심을 강조하고 영웅 출현에 관한 지론을 펴고 있으며 이 소설을 인연하여 대한제국 중흥의 영웅전을 다시 짓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단재는 이 전기소설을 번역한 후 이듬해 '을지문덕'을 저술하고 '이순신전'과 '최도통전' 등 우리나라 위인에 대한 전기소설을 집필하여 국난을 극복한 위인들의 전기를 발표하였다.
이 소설에서 사용한 문체는 한주국종체(漢主國從體)로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한문에 식견이 있는 일반인으로서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문체이다. 당시 국한문체는 대체로 한자를 위주로하고 한글은 토를 다는 형태로 쓰여졌고, 일반 백성이나 부녀자들을 위해서는 순한글로 쓰여진 소설 등으로 국한문체와 순한글체로 이분화되었다. '이태리건국삼걸전'에서는 띄여쓰기도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를 아비리가(阿非利加)로, 크리미아는 격리미아(格里米亞)로, 나폴레옹을 나파윤(拿破倫)으로 쓰는 등 지명과 인명을 한문식 표기를 함으로서 이해하기 더욱 힘든 점도 적지 않다.
어떻든 단재는 국권상실의 위기에 처한 당시 조국의 상황에서 이태리가 외국의 지배와 영향 아래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상태에서 여러 애국 영웅이 나타나 통일을 이끌어 낸다는 역사전기소설을 소개하여 궁극적으로는 우리 국민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국권회복의 정신을 함양하는 목적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 작품은 민족분단의 현실을 타개해야만 하는 오늘날의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와 교훈을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단재 신채호의 초기 사상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ⅴ. 을지문덕전
이 책은 1908년 단재 신채호가 단행본으로 낸 최초의 저서인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당시는 단재가 29세의 나이로 국내 최대의 일간지이며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주옥같은 논설과 사론(史論)을 발표하여 민족혼을 일깨우던 시기였다. 또한 여성 계몽을 위해 발행되던 '가뎡잡지'의 편집인으로 직접 잡지를 만들기도 하며 양기탁·안창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하여 기울어 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애국적인 민족운동을 하던 시기였다.
국한문판은 1908년 5월 30일에 광학서포에서 발간한 것으로 변영만·이기찬·안창호가 서문을 썼으며 이들 서문은 '을지문덕'이 어떤 목적으로 쓰여진 것인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목차에서는 ‘우리나라 4천년역사상 으뜸가는 큰 위인’이란 수식어를 을지문덕이란 말 앞에다 얹어 긴 이름의 제목을 붙였다.
한글 번역판은 그해 7월 5일 발행되었는데 번역은 김연창이 하고 변영헌이 교열을 보았으며 출판은 국한문판을 발행한 광학서포가 맡았다. 한글판 '을지문덕젼'에는 국한문판에 나오는 변영만 등의 서문과 범례 그리고 목차가 실려 있지는 않고 한글로 옮기면서 띄어쓰기를 하였으며 약간의 의역과 첨삭을 하였으나 원저의 내용을 충실히 표현하고 있다.
서론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각성과 영웅 대망론의 취지가 잘 묘사되어 있다. 단재는 수백년 이래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의 침략이나 위협이 있으면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내왔는데 이것은 원래 우리 겨레가 용렬하고 약한 존재라 그런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지도층인 선비들이나 대신들이 무공보다 문치가 중요하다 하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하여 백성들의 기운을 꺾고 누르는 것만 일 삼아 그렇다는 것이다.
지난 역사상, 강인하고 굳세고 굴복하지 않은 사실은 감추고 썩은 선비들이나 받들어 위대한 영웅은 한결같이 파묻어 버렸다. 이런 가운데 겨우 몇 줄 역사로 남아 있는 위대한 영웅 을지문덕이 있음은 다행이라는 것이다. ‘그 나라의 영웅을 그 민족이 모른다면 어찌 나라가 되겠는가’냐고 물으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영웅 숭배심이 박약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내를 정돈하고 백만명의 적군을 물리친 참 영웅의 업적도 말살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이제 과거의 영웅을 그려내어 미래의 영웅을 불러 보겠다’고 하여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각성과 구국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는 취지가 잘 드러나 있다.
본론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관계를 삼한시대부터 시작하여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형세를 서술하고 그 당시 중국 및 만주 열국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을지문덕이 뛰어난 영웅적 자질로 외교 군사면에서 어떻게 준비하고 대처하였으며 수나라의 침략군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과정을 소상하게 밝혀 그 의의를 그 시대의 관점에서 되새겼다.
결론에서도 ‘20세기 새 대한의 을지문덕이여, 어찌하여 내려옴이 그리 더딘가’ 라고 하여 식민지적 상황의 극복을 위한 구국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면서‘그 나라 국민의 용감과 비겁, 뛰어남과 못남은 전적으로 그 나라 한 두 선각적인 영웅의 고무 격려가 어떠한가에 따라 나타나거나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끝을 맺으며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영웅을 말하며 의기 소침한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 작품은 개화기 문학사에 있어서 전통적인 한문학의 전(傳)을 근대적인 전기(傳記)문학으로 바꾸어 놓는 방향을 적극 모색한 획기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종의 전기이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문학작품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역사논문에 가까운 체제로 쓰여졌으며 논설적이고 논증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허구적인 윤색은 하지 않았으며 역사 사실을 웅변적인 문체를 사용하여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역사와 소설 형식이 서로 결합된 특징을 보이는 ‘비역사, 비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식민지로 떨어지려는 조국을 건지기 위하여 외세에 대한 저항정신을 고취하고 영웅탄생을 하게 한다는 미래 지향적인 목적으로 집필된 역사-전기소설이라고도 말한다.
원저인 국한문판 '을지문덕'은 오늘날의 구어체 국한문 혼용체와는 다른 것으로 순한문 문체에 한글로 토를 단 형태로서 이는 한주국종체(漢主國從體) 또는 고대소설체라고도 하겠으며 언토한문체에 가까운 소설이다. 띄어쓰기도 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과 글을 일치 시킨 오늘날의 구어체 국한문 혼용체와는 거리가 먼 표기 방법이었다.
이 책의 구성은 서론과 본론 15장 및 결론으로 되어 있다. 한글판 '을지문덕젼' 에는 차례가 없으므로 여기에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서 론
제1장 을지문덕 이전의 한국과 중국의 관계
제2장 을지문덕시대의 고구려와 수나라의 형세
제3장 을지문덕시대의 열국의 형세
제4장 을지문덕의 굳센 정신
제5장 을지문덕의 웅도 대략
제6장 을지문덕의 외교
제7장 을지문덕의 무비
제8장 을지문덕 수완 밑의 적국
제9장 수나라의 형세와 을지문덕
제10장 용 같이 변화하고 범 같이 용맹한 을지문덕
제11장 살수 풍운의 을지문덕
제12장 성공후 을지문덕
제13장 옛날 역사 지은 사람이 좁게 본 을지문덕
제14장 을지문덕의 인격
제15장 무시무종의 을지문덕
결 론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론, 본론, 결론 3단 구성이 완벽하게 논문 구성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국한문판에는 본문 속에 주를 달아 논증하고 있어 문학적인 또는 소설적인 조작성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므로 역사논문이나 역사편찬(historiography)의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저술이 근대소설적 요소가 배제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하나 이 때문에 오히려 개화기 저항문학을 대표할 만한 역사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상 1900년대 간행된 대부분의 역사-전기문학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의식의 표현이 많았다. '을지문덕젼'은 우리의 역사를 발굴하고 작품화하여 일제의 압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고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단재는 '을지문덕젼'을 통하여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한 투쟁을 독려하였고 오랫동안 민족적 영웅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지 못한 점과, 동족상쟁을 하였거나, 외국에 아첨하거나 조국을 배반한 자를 영웅이라고 해온 폐습을 개탄하면서 이 책이 널리 읽혀 그릇된 영웅관을 바로 잡고 통속적인 영웅소설을 몰아 낼 수 있기를 바랬다.
국권상실의 위기를 맞은 조국의 상황에서 우리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궁극적으로는 국권회복의 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지어진 이 저술은 오늘날 민족정기가 쇠퇴한 사회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Ⅲ. 언론 활동
ⅰ. 대한매일신보에서의 활동 : 내각제씨의 크나큰 졸계, 한국교육계의 비관,
임진지를 읽고, 학계의 꽃, 시간의 귀중함을 알라,
확실한 언론, 영웅을 길러내는 기계, 큰나와 작은나,
국민의 혼,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ⅱ. 신대한에서의 활동 : 창간사, 여론을 제조할 일
ⅲ. 권업신문에서의 활동 : 청년동포에게 바라는 바, 국수주의와 해외동포,
동포사이의사랑, 일인의 간사한 수단, 이날
ⅳ. 천고 : 천고
ⅴ. 기고문 : 낭객의 신년만필, 대한의 희망, 문제없는 논문,
기호흥학회는 하유(何由)로 기(起)하였는가
단재가 신문 언론계에 처음 투신한 것은 1905년 그의 나이 26세부터이다.『황성신문』의 사장 장지연의 초빙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신문의 논설기자가 되어 언론활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당시 유학 부문의 최고 관문인 성균관 경학시험에 합격하여 명예직이기는 하지만 성균관 박사가 될 정도로 그는 20대의 청년기에 백과전서적인 박식가로 이름이 났으며, 설득력 있는 문장을 쓰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
『황성신문』에서 단재가 활동하였던 기간은 얼마되지 않았다. 그러나, 항일언론의 최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의 초빙을 받아 논설기자로 참여하게 됨으로써 그의 언론활동은 절정을 이루게 된다. 단재의 국내에서의 언론활동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참여하였고, 부녀자들의 계몽잡지인 『가뎡잡지』의 편집인으로도 활동하였다.
단재는 漢文學에 능통한 사람으로 자신의 주의나 주장을 간결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전개하는 양식인 ‘議論散文'에 능했다. 단재의 문장은 힘차고 강렬하며, 구체적이고 생동감이 있었다. 기백이 넘쳐 기가 펄펄 살아 있음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단재는 1910년까지 국내에서는 전국민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위대한 애국계몽 사상가이며 운동가로 꼽을 수 있으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할 만큼 민족주의 사관을 정립시키는데 공헌한 위대한 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단재는 언론을 통하여 그의 사상과 이론을 전파하였으며 국권회복을 위해 반외세 민족운동노선을 펼쳤다. 그러나,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세우는 국내의 활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자 동지들과 국외로 망명을 떠나게 되고 국내에서의 언론활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단재는 중국 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 갔다. 그 곳에서는 이미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라는 신문이 발행되었다가 폐간된 상태였고, 1911년 『大洋報』라는 신문이 6월 5일 창간 되었다. 신문의 체제는 『대동공보』와 같았고 전지 국문의 4쪽짜리 신문이었다. 『대양보』는 창간호부터 일본의 한국통치를 맹렬하게 공격하는 등 항일논조로 일관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이 신문의 주필로 활약하였다. 이 신문은 창간된지 한달 후인 7월 3일 청년권업회가 권업회 발기회와 합하여 권업회의 기관지로 발전하였다.
『권업신문』은 1912년 4월 22일부터 1914년 8월 30일까지 약 2년 동안 총 126호가 간행되었던 신문으로 단재는 초대 주필로 매호마다 민족혼을 불러 일으키는 논설을 게재하여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의 근무 기간은 확실치 않으나 1913년 10월 이후에는 상해 북경 등지에 체류하였으므로 약 1년 6개월 정도 근무하였다고 추정된다.
국내에서 3·1운동이 거족적으로 발발하자 단재는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적 거점이었던 상해로 와서 임시정부조직에 참여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이 창간된지 2개월 후인 1919년 10월 28일에 단재는 『신대한』을 발행하고 그 주필로 활약한다. 이 신문은 신규식의 후원아래 발행된 것으로 임시정부의 노선과 행동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기사와 함께 『독립신문』의 문약한 논조를 낱낱히 지적하고 공격하였다.
『신대한』은 주 2회(화·금요일) 발간으로 『독립신문』 보다 넓은 지면을 발행하였다. 단재가 집필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창간사에는 신문 발행의 목적을 '독립을 부르짖어 원수 적을 꾸짖으며 내외사정을 보도하여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하며, 우리도 미래의 이상세계는 빈부평균을 주장하나 2천년의 원수가 우리의 수족을 묶고 도살을 실시하고 있으니 우리가 바라는 바는 원수를 물리치고 민족을 보전할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신대한』이 언제까지 발행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제18호가 1920년 1월 23일치 인 점이 밝혀져 있고 그해 4월 단재가 다시 북경으로 가서 제2회 보합단 조직에 참여한 점으로 보아 4개월 내지 5개월 정도 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해 4월 19알 신채호는 임시 대통령 이승만의 지난날 과오 즉 위임통치청원 사실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기초하고 이를 발표하였다.
단재는 중국에서 『天鼓』라는 순한문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고 『中華報』와 같은 중국어신문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는 등 언론활동을 계속하였다. 특히 국내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에는 그의 논설이나 史論이 소개되어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그의 명성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1928년 무정부주의 활동에 연루되어 여순감옥에서 수형 생활을 하면서도 역사연구와 집필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일제하에서의 단재는 국외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이름난 학자요 저널리스트요 역사연구가이며 소설가 시인 등의 영예를 갖게 되었다.
Ⅳ. 독립운동
독립운동가로서 단재의 정신은 절대독립론, 무장투쟁론, 민족혁명론(민중직접혁명론) 등 세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단재의 절대독립론은 3·1운동 후에 대두한 자치론·내정독립론·참정권론 등 일제와의 타협주의를 분쇄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에 있어 1920년대 특징의 하나는 국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의 일부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체념하고 대일본제국 내의 조선자치구역을 추구하는 자치론자들이 대두한 것이었다. 이들은 일제와의 타협론을 제창함으로써 완전독립론과 자치론 사이에 대립·투쟁을 야기시켰다. 즉, 이러한 자치론의 대두는 독립운동 노선에 혼선을 가져오고, 일제에 대항하여 굳건히 서야 할 독립운동 노선을 비틀거리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단재의 절대독립론은 완전독립론과 자치론의 대립·투쟁에서 완전독립론·절대독립론이 압도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비틀거리던 독립운동노선을 바로 잡아주고 우리 나라 독립운동의 갈 길을 명료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을 통해서 극명하게 선언된 절대독립론은 1927년에 자치론을 철저히 분쇄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노선을 정립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치었다.
또한, 독립운동 방략으로서 단재의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한국민족의 생존의 필수조건까지 철저히 박탈하는 강도적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이를 몰아낼 수 있으며 민중직접의 폭력혁명방법이 가장 효율적으로 이를 타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단재의 이러한 독립운동론은 큰 영향을 끼치어 독립운동자들이 독립운동을 바로 민족혁명운동이라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혁명가라고 자처하고 독립운동을 혁명적으로 전개하도록 작용하였다.
단재의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강도와 같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가르쳐주어 그 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의열단뿐만 아니라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까지도 단재가 합리화하고 정당화한 폭력수단을 채용하게 된 것은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에서 천명한 독립운동 방략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ⅰ. 성토문
1921년 이승만의 미국위임통치 청원을 규탄하며
아(我) 이천만 형제자매에게 향하여 이승만·정한경 등 대미위임통치청원 및 매국·매족의 청원을 제출한 사실을 거하여 그 죄를 성토하노라.
이등의 해청원제출을 곧 4252년 3월경 아국 독립운동 발발의 동시하여 세계의 대전이 종결되자 평화회의가 개설되며, 따라서 민족자결의 성낭(聲浪)이 높았도다. 이에 각 민족이 자유대로
⑴ 고유의 독립을 잃은 민족은 다시 그 독립을 회복하며,
⑵ 갑국의 소유로 을국에 빼앗기었던 토지는 다시 갑국으로 돌리며,
⑶ 양강국간 피차 쟁탈되는 지방은 그 지방 거민의 의사에 의하여 통치의 주권을 자택하게 하며,
⑷ 오직 덕(德)·오(奧)·토(土)의 각 식민지는 그 주국이 난수(亂首)의 책벌로 이를 몰수하여 협약국에 위탁통치한 배 되었도다.
이상 1,2,3항 및 민족자결문제에 의하여 구주내 수십개 신독립국과 신변경한 기개지방이 있는 이외에 실행되지 못한 곳이 더 많거니와 당초에는 각 강국들도 다 그와 같이 떠들었으며 허다 망국민족들은 이와 같이 되기를 빌었도다.
오천년 독립의 고국으로 무리한 만국(蠻國)의 병탄을 받아, 십년 혈전을 계속하여 온, 우리 조선도 이 사조에 응하여 더욱 분발할새, 내지는 물론이요 중령의 조선인도 독립을 부르며, 아령의 조선인도 독립을 부르며, 미령의 조선인도 독립을 부르며, 일본 동경의 조선유학생도 독립을 부를새, 더욱 미령의 동포들은 국민회의 주동으로 각처 향응하여 노동소득의 혈한전(血汗錢)을 거두어 평화회의에 조선독립문제를 제출하기 위하여 대표를 뽑아 파려(巴黎)에 보낼새, 이와 정 등이 그 뽑힌 바 되어 발정하다가 여행권의 난득(難得)으로 중로에서 체유할새, 피등이 합병 십년 일인의 식민지된 통한을 잊었던가, 독립을 위하여, 검에, 총에, 악형에 죽은 선충선열이 계심을 몰랐던가, 조선을 자래 독립국이 아닌줄로 생각하였던가. 거연(遽然)히 위임통치청원서 및 조선의 미국식민지 되어지이다, 하는 요구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여 매국·매족의 행위를 감행하였도다.
독립이란 금에서 일보를 물러서면 합병 적괴(賊魁)의 이완용이 되거나, 정합방론자의 송병준이 되거나, 자치운동의 민원식이 되어, 화국(禍國)의 요얼(妖얼)이 병작하리니, 독립의 대방을 위하여, 이·정 등을 주토치 아니할 수 없으며, 방관자의 안중에는 조선이 이미 멸망하였다 할지라도 조선인의 심중에는 영원독립의 조선이 있어, 일본뿐 아니라 곧 세계 하국을 물론하고 우리 조선에 향하여 무례를 가하거든 검으로나 총으로나 아니면 적수공권으로라도 혈전함이 조선민족의 정신이니, 만일 이 정신이 없이 친일자는 일본에, 친미자는 미국에, 친영자나 친아자는 영국이나 아국에 노예됨을 원한다 하면, 조선민족은 생생세세 노예의 일도에 윤회되리니, 독립의 정신을 위하여 이·정 등을 주토아니 할 수 없으며, 우리 전도는 전국 이천만의 요구가 '독립뿐'이란 혈과 누의 규호로 내론 동포의 성력을 단합하며, 외론 열국의 동정을 박득함에 재하거늘, 이제 위임통치의 사론을 용허하면 기로를 열어 동포를 미혹케 할 뿐 아니라, 또 골계모순(滑稽矛盾)으로써 외국인에게 보이어 조선민족의 진의가 어데 있는가를 회의케 하리니 독립운동의 전도를 위하여 이·정 등을 주토 아니할 수 없도다.
위임통치청원에 대하여 재미 국민회중앙총회장 안창호는 동의든지 묵인이든지 해회의 주간자로서 이·정 등을 대표로 보내어 해청원을 올리었으니, 그 죄책도 또한 용서할 수 없으며, 상해의정원이 소위 임시정부를 조직할때에, 앞서 전파된 위임통치청원 운운의 설을 이 등과 사감있는 자의 주출(做出)이라 하여 철저히 사핵하지 않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정함도 천만의 경거어니와 제2차 소위 각원을 개조할 때에는 환하게 해청원의 제출이 사실임을 알았는데, 마침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거한 죄는 더 중대하며, 특파대사 김규식이 구주로부터 돌아와 '조선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어찌하여 위임통치청원자 이승만을 대통령에 임하였느냐.'
하는 각 국인사의 반문에 아무 회답할 말이 없었다 하여, 만방에 등소(騰笑)된 실상을 전하거늘 그래도 이는 존재하였다 하여 그 범죄의 탄핵은 없으며, 그 청원의 취소시킬 의사도 없이, 오직 옹호의 책획함에 열중하는 의정원이나 각원이란 모모들의 민원식과 같이 철저한 주장이 아니고 다만 시(時의) 미오(迷誤)인 고로 이도 지금에는 이 일을 옳은 줄로 자처함이 아니니 구태어 추죄할 것이 없다 하나, 그럴진대 피등이 즉시 미국정부에 향하여, 그 청원의 취소를 성명하고 국인에게 향하여 망작의 죄를 사하여서 만분의 일이라도 자속(自贖)의 도를 구함이 가하거늘, 이제 십수의 지점을 불원하고 엄연히 상해에 래하여 소위 대통령의 각의로 오히려 여론을 농락하려 하니 이는 화심을 포장한 역적이 아니면 구차용녹(苟且庸碌)의 비부(鄙夫)라, 역적이나 비부를 가차(假借)하여 국민의 명예를 오욕하면 또한 가통하지 아니한가.
당초에는 해청원이 제출 여부·접수 여부가 모두 모호암매에 중에 있으므로 본인 등도 의려만 포할 뿐이요, 진하여 주토의 거를 신치 못하였더니, 오늘 와서는 사실의 전부가 폭로되어 우리 국민이라고는 용인하지 못하겠도다.
자에
제일 이 등에 죄상을 선포하여 후래자를 위하여 경징의 의를 소화(昭華)하며,
제이 미국정부에 향하여 이천만을 대표하였다 운함은 이승만·정한경 등은 무자이니, 해청원은 곧 이승만·정한경 등 일, 이개인의 자작이요 우리 국민의 여지할 배 아니라 하여, 그 청원의 무효됨을 성명하기로 결의하고 우의 성토문을 발하여 원근의 동성으로 전도의 공제(共濟)를 바라노라.
기원 사천이백오십사년 사월 십구일
강경문, 고광인, 기운, 김주병, 김세준, 김재희, 김원봉, 김창숙, 김맹여, 김대호, 김갑, 김세상, 김병식, 김탁, 김창근, 김자언, 남공선, 도경, 이대근, 이성파, 이극로, 이강준, 이춘, 이기○, 임대주, 박건병, 박용옥, 박기중, 방한태, 배달무, 매환, 서백양, 서백보, 손학해, 송호, 신채호, 신달모, 안여반, 오기찬, 오성윤, 윤대제, 장원갱, 장건상, 전홍승, 정인교, 조준, 조진원, 조정, 송철, 최용덕, 최묵, 최윤명, 하학, 한흥
ⅱ.조선혁명선언
단재 여순감옥에서 마지막
의열단 선언문
1.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박탈하였다.경제의 생명인 산림, 천택(川澤), 철도, 광산, 어장 … 내지 소(小)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절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 가옥세, 인구세, 가축세, 백일(百一)세, 지방세, 주초(酒草)세, 비료세, 종자세, 영업세, 청결세, 소득세 …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을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 웬만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 집중의 원칙하에서 멸망할 뿐이오, 대다수 인민 곧 일반농민들은 피땀을 흘리어 토지를 갈아, 그 종년(終年) 소득으로 일신과 처자의 호구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 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진공하여 그 살을 찌워주는 영세의 우마(牛馬)가 될 뿐이오, 내종(乃終)에는 그 우마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輸入)이 연년(年年) 고도의 속율(速率)로 증가하여 '딸깍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아귀(餓鬼)부터 류귀(流鬼)가 될 뿐이며,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 경찰정치를 여행(勵行)하여, 우리 민족이 촌보(寸步)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 출판, 결사(結社), 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회한이 있으면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뜬 소경이 되고, 자녀를 나면 '일어를 국어라, 일문을 국문이라'하는 노예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무(誣)하여 소잔오존(素盞嗚尊)의 형제'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 영지'라고 일본놈들이 적은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하면 강도(强盜)정치를 찬미하는 반(半)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염세 절망의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의 명칭하에 감옥에 구유(拘留)되어 주리, 칼 씌우기 차꼬 채우기, 단금질, 채찍질, 전기(電氣)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수족을 달아매는, 콧구멍에 물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刑律)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서 옥문을 나온대야 종신 불구의 폐질자(廢疾者)가 될 뿐이라.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 창작의 본능은 생활의 곤란에서 단절(斷絶)하며, 진취활발의 기상은 경우의 압박에서 소멸되어 '찍도 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 편태(鞭笞), 구박, 압제를 받아 환해(環海) 삼천리가 일개 대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아주 작은 인류위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 본능까지 잃어 노예부터 기계가 되어 강도 수중의 사용품이 되고 말 뿐이며,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로 보아 을미 이후 십삼도의 의병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군대의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즉 최근 삼일 운동 이후 수원, 선천 … 등의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 서간도, 노령, 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주민을 도륙(屠戮)한다, 촌락을 소화(燒火)한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오욕(汚辱)한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인신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악형한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을 '산송장'으로 만들려 하는도다.
이상의 사실에 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異族) 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2.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평화', '한국독립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묵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 강토를 집어먹던 역사를 잊었느냐? '조선인민 생명 재산 자유 보호', '조선인민 행복증진'등을 신명(申明)한 선언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이천만의 생명이 지옥에 빠지던 실제를 못보느냐? 삼일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 민원식 등 매국노 한둘을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부름이니, 이에 부화하는 자는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적(奸賊)이 아니냐.
설혹 강도 일본이 과연 막대한 도량이 있어 개연(慨然)히 차등의 요구를 허락한다 하자, 소위 내정독립을 찾고 각종 이권을 찾지 못하면 조선민족은 일반의 아귀(餓鬼)가 될 뿐이 아니냐.
참정권은 획득한다 하자, 자국의 무산계급의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국의 식민지 인민이 되어 몇몇 노예대의사(奴隸代議士)의 선출로 어찌 아사의 화를 구하겠느냐.
자치를 얻는다 하자, 그 가종의 자치임을 물문(勿問)하고 일본이 그 강도적 침략주의의 간판인 '제국'이란 명칭이 존재한 이상에는 그 부속하에 있는 조선인민이 어찌 구구한 자치의 허명(虛名)으로써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겠느냐.
설혹 강도 일본이 돌연히 불보살이 되어 일조(一朝)에 총독부를 철폐하고 각종 이권을 다 우리에게 환부(還付)하며, 내정외교를 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고 일본의 군대와 경찰을 일시에 철환(撤還)하며, 일본의 이주민을 일시에 소환하고 다만 허명의 종주권만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일 과거의 기억이 전멸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일본을 종주국으로 봉대(奉戴)한다 함이 '치욕'이란 명사를 아는 인류로는 못하지니라.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는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전'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쇠망한 인도족, 유태족도 문화가 있다 하지만 일(一)은 금전의 힘으로 그 선조의 종교적 유업을 계속함이며, 일(一)은 그 토지의 넓음과 인구의 많음으로 상고(上古)의 자유 발달한 그 여택(餘澤)을 지키고 보존함이니, 어디 모기와 등에같이, 승냥이와 이리같이 인혈을 빨다가 골수까지 깨무는 강도 일본의 입에 물린 조선 같은데서 문화를 발전 혹 보존한 전례가 있더냐? 검열, 압수 모든 압박 중에 몇몇 신문잡지를 가지고 '문화운동'의 목탁으로 자오(自嗚)하며, 강도의 비위에 거스르지 아니할 만한 언론이나 주창하여 이것을 문화발전의 과정으로 본다 하면 그 문화발전이 도리어 조선의 불행인가 하노라.
이상의 이유에 거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내정독립, 자치, 참정권논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자(문화운동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3.강도 일본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아래와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제일은 외교론이다. 이조 오백년 문약(文弱)정치가 '외교'로써 호국의 장책(長策)을 삼아 더욱 그 말기에 더욱 심하여 갑신 이래 유신당, 수구당의 성쇠가 거의 외원(外援)의 유무에서 판결되었다. 위정자의 정책은 오직 갑국(甲國)을 끌어들여 을국(乙國)을 제함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 의존의 습성이 일반 정치 사회에 전염되었다. 즉 갑오, 갑신 양 전역에 일본이 누십만의 생명과 누억만의 재산을 희생하여 청, 노 양국을 물리고 조선에 대하여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려 하는데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한다, 민족을 건지려 한다'하는 이들은 일검(一劍) 일탄(一彈)을 우매하고 탐욕스러우며 난폭한 한 관리나 국적(國賊)에게 던지지 못하고 공함(公函)이나 열국(列國) 공관에 던지며 장서(長書)나 일본 정부에 보내어 국세의 고약(孤弱)을 애소하여 국가존망, 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이 처분·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그래서 '을사조약' '경술합병' 곧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천 년만의 처음 당하던 치욕에 조선민족의 분노적 표시가 겨우 하얼빈(哈爾賓)의 총, 종현(鐘峴)의 칼, 산림유생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과거 수십 년 역사야말로 용자(勇者)로 보면 침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인자로 보면 상심할 역사가 될 뿐이다.
그리고도 망국이후 해외로 나아가는 모모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일미(日美)전쟁, 일로(日露)전쟁 등 기회(機會)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었고, 최근 3·1운동에 일반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過信)의 선전이 도리어 이천만 민중의 분용(奮勇)전진의 의기를 타소(打消)하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제 2는 준비론이니, 을미조약의 당시에 열국공관에 빗발듣듯하던 종이쪽으로 넘어가는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정미년의 해아밀사도 독립회복의 복음을 안고 오지 못하매 이에 차차 외교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전쟁아니면 안되겠다는 판단이 생기었다.
그러나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무엇으로써 전쟁하겠느냐? 산림유생들은 춘추대의에 성패를 불계(不計)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아관대의(峨冠大衣)로 지휘의 대장이 되며, 산양포수의 화승대(火繩隊)를 몰아가지고 조·일전쟁의 전선에 나섰지만 신문쪽이나 본 이들은 - 곧 시세를 짐작한다는 이들은 그리할 용기가 아니난다.
이에 '금일 금시로 곧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은 망발이다. 총도 장만하고 돈도 장만하고 대포도 장만하고 장관이나 사졸감까지라도 다 장만한 뒤에야 일본과 전쟁한다'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준비론 곧 독립전쟁을 준비하자 함이다.
외세의 침입이 더할수록 우리의 부족한 것이 자꾸 감각(感覺)되어, 그 준비론의 범위가 전쟁이외까지 확장되어 교육도 진흥해야겠다, 상공업도 발전해야겠다, 기타 무엇 무엇 일체가 모두 준비론의 부분이 되었었다.
경술국치 이후 각 지사들이 혹 서북간도의 삼림을 더듬으며, 혹 시베리아의 찬바람에 배부르며, 혹 남북경으로 돌아다니며, 혹 미주나 하와이로 돌아가며, 혹 경향(京鄕)에 출몰하여 십여년 내외각지에서 목이 터질만치 준비! 준비!를 불렀지만 그 소득이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없는 회(會)뿐이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력(誠力)의 부족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의 착오이다. 강도 일본이 정치 경제 양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의식(衣食)의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 전투력의 백분지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 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4.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구축(驅逐)할지며, 강도 일본을 구축하자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에 종사하려면 어느 방면부터 착수하겠느뇨?
구 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곧 을의 특수세력으로 갑의 특수세력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은 혁명에 대하여 다만 갑을 양 세력, 곧 신구 양 상전 중 누가 어질고 누가 난폭한지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를 보아 그 향배를 정할 뿐이오, 직접의 관계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기군이조기민(誅其君而弔其民)'이 혁명의 유일종지(宗旨)가 되고, '단식대장이영왕사(簞食壺漿以迎王師)'가 혁명사의 유일미담이 되었었다. 그러나,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혁명'이라 칭함이며, 민중 직접의 혁명인 고로 그 비등 팽창의 열기가 숫자상 강약 비교의 관념을 타파하며, 그 결과의 성패가 매양 전쟁학상의 정궤(定軌)에 벗어나 무전무병(無錢無兵)한 민중으로 백만의 군대와 억만의 부력을 가진 제왕도 타도하며 외구(外寇)도 구축하나니, 그러므로 우리 혁명의 제일보는 민중각오(覺悟)의 요구니라.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느뇨?
민중은 신인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 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오,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규(熱叫)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 부자연, 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선각한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先驅)가 됨이 민중각오의 제1로(路)니라.
일반 민중이 기(飢), 한(寒), 곤(困), 고(苦), 처호(妻呼) 아제(兒啼), 세납(稅納)의 독봉(督棒)에, 사채(私債)의 독촉, 행동의 부자유,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하여도 죽을바를 모르는 판이다. 이에 만일 그 압박의 주인(主因)되는 강도정치의 실시자인 강도들을 격폐(擊斃)하고 강도의 일체 시설을 파괴하고 복음이 사해에 전하며 모든이가 동정의 눈물을 뿌리어 이에 사람마다 그 '아사(餓死)' 이외에 오히려 혁명이란 일로(一路)가 남아 있음을 깨달아, 용자는 그 의분에 못이기어, 약자는 그 고통에 못견디어 모두 이 길로 모여들어 계속적으로 진행하며 널리 전파하여 거국일치의 대혁명이 되면 간활잔폭(奸猾殘暴)한 강도 일본이 필경 구축되는 날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불러 일깨워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養兵) 십만이 일척(一擲)의 작탄(炸彈)만 못하며 억천장(億千張) 신문잡지가 일회 폭행만 못할지니라.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발생치 아니하면 끝이려니와, 이미 발생한 이상에는 마치 벼랑끝에서 굴리는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이전 경과로 말하면 갑신정변은 특수세력이 특수세력과 싸우던 궁중 일시의 활극이 될 뿐이며, 경술 전후의 의병들은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대의로 격기(激起)한 독서계급의 사상이며, 안중근, 이재명 등 열사의 폭력적 행동이 열렬(熱烈)하였지만 그 후면에 민중적 역량의 기초가 없었으며, 3·1운동의 만세소리에 민중적 일치의 의기가 잠시 드러났지만 또한 폭력의 중심을 가지지 못하였도다. '민중, 폭력' 양자 중 하나만 빠지면 비록 굉열장쾌(轟列壯快)한 거동이라도 또한 천둥같이 끝나는도다.
조선 안에 강도 일본의 제조한 혁명 원인이 산같이 쌓이었다. 언제든지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개시되어 '독립을 못하면 살지 않으리라', '일본을 구축(驅逐)하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구호를 가지고 계속 전진하면 목적을 관철하고야 말지니, 이는 경찰의 칼이나 군대의 총이나 간활(奸猾)한 정치가의 수단으로도 막지 못하리라.
혁명의 기록은 자연히 참절장절(慘絶壯絶)한 기록이 되리라. 그러나 물러서면 그 후면에는 흑암(黑暗)한 함정이오, 나아가면 그 전면에는 광명한 활로니, 우리 조선민족은 그 참절장절한 기록을 그리면서 나아갈 뿐이니라.
이제 폭력 - 암살, 파괴, 폭동 - 의 목적물을 대략 열거하건대,
1.조선총독 및 각 관(官) 관리
2.일본천황 및 각 관 관리
3.정탐노(偵探奴), 매국적(賣國賊)
4.적의 일체 시설물
이외에 각 지방의 신사(紳士)나 부호가 비록 현저히 혁명적 운동을 방해한 죄가 없을지라도 만일 언어 혹 행동으로 우리의 운동을 완화하고 중상(中傷)하는 자는 우리의 폭력으로서 갚을지니라. 일본인 이주민은 일본강도 정치의 기계가 되어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선봉이 되어 있은즉 또한 우리의 폭력으로 구축할지니라.
5.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건설과 파괴가 다만 형식상에서 보아 구별될 뿐이요. 정신상에는 파괴가 곧 건설이니, 이를테면 우리가 일본 폭력을 파괴하려는 것은 제1은 이족통치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이란 그 위에 '일본'이란 이족 그것이 전제(專制)하여 있으니, 이족전제 밑에 있는 조선은 고유적 조선이 아니니 고유한 조선을 발현하기 위하여 이족통치를 파괴함이니라.
제2는 특권계급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조선민중'이란 그 위에 총독이니 무엇이니 하는 강도단의 특권계급이 압박하여 있으니, 특권계급의 압박 밑에 있는 조선민중은 자유로운 조선민중이 아니니, 자유로운 조선민중을 발견하기 위하여 특권계급을 타파함이니라.
제3은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탈제도 밑에 있는 경제는 민중 자신이 생활하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가 아니오, 곧 민중을 잡아먹으려는 강도의 살을 찌우기 위하여 조직한 경제니, 민중생활이 발전하기 위하여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함이니라.
제4는 사회적 불균형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약자위에 강자가 있고 천자(賤者)위에 귀자(貴子)가 있어 모든 불균형을 가진 사회는 서로 약탈, 서로 박삭(剝削), 서로 질투 구시(仇視)하는 사회가 되어 처음에는 소수 행복을 위하여 다수의 민중을 잔해(殘害)하다가 말경에는 또 소수끼리 서로 잔해하여 민중 전체의 행복이 필경 숫자상의 영이 되고 말뿐이니, 민중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함이니라.
제5는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하자 함이다. 왜? 유래하던 문화사상의 종교, 윤리, 문학, 미술, 풍속, 습관, 그 어느 무엇이 강자가 제조하여 강자를 옹호하던 것이 아니더냐. 강자의 오락에 공급하던 도구들이 아니더냐. 일반 민중을 노예화하던 마취제가 아니더냐. 소수계급은 강자가 되고 다수 민중은 도리어 약자가 되어 불의의 압제에 반항치 못함은 전적으로 노예적 문화사상의 속박을 받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만일 민중적 문화를 제창하여 그 속박의 철쇄(鐵鎖)를 끊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은 권리사상이 박약하며 자유향상의 흥미가 결핍하여 노예의 운명 속에서 윤회할 뿐이라. 그러므로 민주문화를 제창하기 위하여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함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 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균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파타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건설의 '기(旗)'가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할 치상(癡想)만 있다하면 오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이제 파괴와 건설이 하나이오 둘이 아닌줄 알진대, 민중적 파괴 앞에는 반드시 민중적 건설이 있는줄 알진대, 현재 조선민중은 오직 민중적 폭력으로 신조선 건설의 장애인 강도 일본세력을 파괴할 것뿐인 줄을 알진대, 조선민중이 한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편이 되어, 네가 망하지 아니하면 내가 망하게 된 '외나무다리 위'에 선 줄을 알진대, 우리 이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하여
불절(不絶)하는 폭력 -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단재와 약산 김원봉 -경향신문 2005-08-12-
단재와 약산 한번만나 의기투합하다
1923년 1월,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은 중국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단재 신채호(위)를 찾아간다. 의열단의 정신과 목표를 담은 선언문을 청탁하기 위해서였다. 단재는 흔쾌히 붓을 든다. 그리고 6,400자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완성한다.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죽여 없앰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여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의열단 선언’. ‘조선혁명선언’이라고 불리는 이 문건은 일제시대 폭력투쟁의 정당성과 독립항쟁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역사적인 문서로 평가받고 있다. 앞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은 어떻게 투쟁과 혁명의 방략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었을까. 8·15를 맞아 출간된 약산과 단재의 전기가 그 해답을 제시한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지음, 실천문학사)과 ‘단재 신채호 평전’(김삼웅 지음, 시대의창).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의열투쟁이라는 독립운동의 물줄기를 만들어낸 ‘항일독립운동의 별’이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임시정부로 달려갈 때 그는 “임시정부 몇개를 세우면 뭐하나”라며 당장의 투쟁에 목말라했다. 어린 시절 안중근과 같은 항일투사를 꿈꾸었던 약산은 항일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다. 덕화학당(톈진), 금릉대학(난징), 신흥무관학교(퉁화)를 전전했지만 일본과 싸워야 한다는 조급증으로 그는 학업을 다 마치지 못했다. 졸업을 불과 석달 남겨놓고 신흥무관학교를 뛰쳐나왔던 그는 곧바로 비밀 항일조직 ‘의열단’을 창단한다. 이어지는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경찰서,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에 대한 암살과 파괴. 폭탄 투척사건만 23번이나 된다.
김상옥, 김익상, 윤세주, 이종암, 서상락 등 단원들의 활약은 세상을 뒤흔들었다. 20년대 조선 동포들 사이에서는 “임시정부가 있는지는 몰라도 의열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약산은 의열단 해체 후 조선인혁명 청년간부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한다. 약산의 군사조직은 상해임정의 광복군을 능가했다. 뒷날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된 뒤 약산이 부사령관을 맡은 것은 그의 위상을 잘 말해준다. 역사학자, 언론인으로 유명한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사실 일제와의 투쟁에 생애를 건 처절한 혁명가였다. 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으로 정의했지만, 실제 그의 삶은 일제와의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는 언론, 문학, 역사, 종교, 아나키즘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일제와 싸웠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자결하자 단재는 “동지의 희생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의열단 소속은 아니었지만, 아나키즘과 의열투쟁을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여길 만큼 ‘정신적인 의열단원’이었다. 단재는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과 관련, 일본 경찰에 체포돼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뤼순감옥에서 숨졌다.
항일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약산과 단재. 그러나 이들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예우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의 군사부장을 맡았던 약산은 월북해 노동상을 지내는 등 북한 정부에 참가했으나 숙청됐다. 우리 정부는 북에서 고위직을 지냈다는 이유로 어떠한 서훈도 하지 않고 있다. 단재도 마찬가지다. 충청도 청원에 있는 묘소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변변한 기념관, 기념사업회도 없다. 일제강점기 내내 망명지를 떠돈 관계로 아직도 호적이 없는 무국적자 신세이다.
이 책들에는 저자들의 땀과 노력이 배어있다. 약산의 투쟁과 삶에 매료됐다는 소설가 이원규씨는 10여년간 자료를 찾고 독립운동 현장을 답사해 약산의 일생을 재구성했다.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씨는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 연구가. 평전 저술은 백범 김구에 이어 두번째다.
ⅲ. 선언문
1928년 4월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북경회의 동방연맹대회 선언문
우리의 세계 무산대중! 더욱 우리 동방 각 식민지 무산민중의 혈·피·육·골을 빨고, 짜고, 씹고, 물고, 깨물어 먹어 온 자본주의의 강도제국 야수군들은 지금에 그 창자가 꿰어지려 한다. 배가 터지려 한다.
그래서 피등(彼等)이 그 최후의 발악으로 우리 무산민중이 더욱 동방 각 식민지 민중을 대가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박박 찢으며 아삭아삭 깨물어, 우리 민중은 사멸보다도 더 음참한 불생존의 생존을 가지고 있다.
아, 세계무산민중의 생존! 동방무산민중의 생존!
소수가 다수에게 지는 것이 원칙이라 하면, 왜 최대 다수의 민중이 최소수인 야수적 강도들에게 피를 빨리고 고기를 찢기느냐?
왜 우리 민중의 피와 고기가 아니면 굶어 뒈질 강도들을 박멸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놈들에게 박멸을 당하느냐?
피등의 군대 까닭일까? 경찰 까닭일까? 군함·비행기·대포·장총·장갑차·독가스 등 흉참한 무기 까닭일까?
아니다. 이는 그 결과요, 원인이 아니다.
피등은 역사적으로 발달성장하여 온 누천년이나 묵은 괴동물들이다. 이 괴조물들이 맨 처음에 교활하게 자유·평등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 민중을 속이어 지배자의 지위를 얻어 가지고, 그 약탈행위를 조직적으로 백주에 행하려는 소위 정치를 만들며, 약탈의 소득을 분배하려는 곧 '인육 분장소'인 소위 정부를 두며, 그리고 영원 무궁히 그 지위를 누리려 하여 반항하려는 민중을 제재하는 소위 법률·형법 등 부어터진 조문을 제정하며, 민중의 노예적 복종을 시키려는 소위 명분·윤리 등 먼동이 같은 도덕율을 조작하였다.
동서 역사에 전하여 온 제왕·성현이, 강도나 야수를 옹호한 강도 야수의 주구들이다. 민중이 왕왕 그 약탈에 견딜 수 없어 반항적 혁명을 행한 때도 많았지만, 마침내 기개 교활한에게 속아 다시 그 강도적 지배자의 지위를 허여하여 '이폭이폭(以暴易暴)'의 현상으로서 역사를 조반(繰返)하고 말았었다. 이것이 곧 다수의 민중으로 소수의 야수들의 유린을 당하여 온 원인이다.
피등 야수들이 중세기 이래 자유도시에서 발달하여 오는 과학과 공업적 기계 즉, 증기기계·전기기계 등을 절취하여 나날이 정치적·경제적·상공업적·군용적 모든 시설을 확대하며 증가하여 방연한 대지구가 우리 무산민중의 두뇌신골을 가루가 되도록 갈고 있는 일개의 맷돌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피등은 우리 민중의 참상에는 눈이 멀었다. 우리 민중의 비명과 애호에는 귀가 먹었다.피등은 다만 우리 민중의 고기를 먹는 입만 딱 벌리고 있다.
아, 잔학·음참·부도한 야수적 강도! 강도적 야수! 이 야수의 유린 밑에서 고통과 비참을 받아 오는 우리 민중도 참다 못하여, 견디다 못하여, 이에 저 야수들을 퇴치하려는, 박멸하려는, 재래의 정치며, 법률이며, 윤리며, 기타 일체 문구를 부인하자는 군대며, 경찰이며, 황실이며, 정부며, 은행이며, 회사며, 기타 모든 세력을 파괴하자는 분노적 절규 '혁명'이라는 소리가 대지상 일반의 이막(耳膜)을 울리었다.
이 울림이 강조됨을 따라 피등 야수들의 신경도 비상히 앙분하여 극도의 전율적 안광으로 우리 민중의 태도를 심시(審視)한다.
그래서 군인의 총과 경찰의 칼로 혁명적 민중을 위압하는 동시에 신문·서점·학교 등을 설시 혹 매수 혹 검정하여, 피등의 주구인 기자·학자·문인·교수 등을 시키어 그 야수적 약탈·강도적 착취를 공인하며 변호하며, 예찬하며, 민중적 혁명을 소멸하려 한다.
이 야수세계, 강도사회에 정의니 진리니 가 다 무슨 방귀이며, 문명이니 문화니가 무슨 똥물이냐?
우리 민중은 알았다. 깨달았다. 피등 야수들이 아무리 악을 쓴들, 아무리 요망을 피운들, 이미 모든 것을 부인한,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대계를 울리는 혁명의 북소리가 어찌 거연(遽然)히 까닭없이 멎을소냐. 벌써 구석구석 부분부분이, 우리 민중과 피등 야수가 진형을 대치하여 포화를 개시하였다.
옳다. 되었다. 우리의 대다수 민중들이 피등 소수의 야수들과 선전하면 선전하는 날이 무산민중의 생존! 이것을 어데가 찾으랴.
알 것이다. 우리의 생존은, 우리의 생존을 빼앗는 우리의 적을 없애버리는 데서 찾을 것이다. 일체의 정치는 곧 우리의 생존을 빼앗는 우리의 적이니, 제일보에 일체의 정치를 부인하는 것, 소극적 부인만으로는 곧 '동탁을 곡사(哭死)'하려는 … (중간 탈락) …
피등의 세력은 우리 대다수 민중의 용허에 의하여 존재한 것인즉, 우리 대다수 민중이 부인하며 파괴하는 날이 곧 피등이 그 존재를 잃는 날이며, 피등의 존재를 잃는 날이 곧 우리 민중이 열망하는 자유 평등의 생존을 얻어 무산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날이다. 곧 개선(凱旋)의 날이니. 우리 민중의 생존할 길이 여기 이 혁명에 있을 뿐이다.
우리 무산 민중의 최후 승리는 확정필연한 사실이지만, 다만 동방 각 '식민지'·'반식민지'의 무산민중은 자래로 석가·공자 등이 제창한 공팡내 나는 도덕의 '독'안에 빠지며, 제왕·추장 등이 건설한, 비린내 나는 정치의 '그물' 속에 걸리어 수천년 헤메다가, 일조에 영·법·일본 등 자본제국 경제적 야수들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압력이 전속력으로 전진하여 우리 민중을 맷돌의 한 돌림에 다 갈아 죽이려는 판인즉, 우리 동방민중의 혁명이 만일 급속도로 진행되지 않으면 동방민중은 그 존재를 잃어 버릴 것이다.
그래도 존재한다면 이는 분묘의 속 … (중간 탈락) …
우리가 철저히 이를 부인하고 파괴하는 날이 곧 피등이 그 존재를 잃는 날이다.
ⅳ. 대한신민회 취지서
(전략)
무릇 수백년 이래 세계는 새로이 열리어 인지(人智) 또한 새롭다. 정치는 새 정치, 법률도 새 법률, 교육도 새 교육, 공예도 새 공예, 전차량함(電車輛艦) 새롭고 뇌포량환(雷砲兩丸)의 전술도 새롭다. 양구대륙(兩球大陸)의 신기술은 날을 다투어 사면해양의 신법이 나날이 도래한다.
이 때를 당하여 우리는 아직도 몽(夢)에 감(감)하여 섬어(섬語)만 지껄이고 있으며, 우리 관신은 권세를 다투어 회뢰(賄賂)를 탐하고, 아래로 인민은 간패(간腐)하여 명리에만 쟁취(爭趨)하니 정령(政令)은 허설의 우상이요, 법문(法文)은 폐기되어 고지화(古紙化)하여 인순고식(因循姑息)의 일구는 전후상박의 심법이요, 허위부사(虛僞浮詐)의 네자는 조선에 통하는 법령이되다. 사자(士子)의 숭상은 지(只)히 공문(空文)뿐이요 실제가 무하여 공상제가(工商諸家)는 사희(詐희)에 힘써 정치·문화 범백(凡百)의 제예(諸藝)가 퇴보치 않음이 없어 신농(神農)의 뇌사(뢰사)가 금(今)에도 상(尙)히 경전(耕田)의 기(器)가 되며 고려의 자기는 절종(絶種)의 보(寶)를 작(作)하니, 차(此)가 진화의 전연공례(天演公例)에 상반되어 고대를 추상하면 도리어 이염(이艶)의 정을 난금(難禁)이라. 불행히 이조 중엽 이래로 당파의 논이 기하여 담소로 상대하는 중 백인(白刃)이 홀기(忽起)하며 일자의 하자(瑕疵)를 심색(尋索)하여 살옥(殺獄)의 누(累)를 야기하니 애이참륙(艾夷斬戮)이 무소불지라. 차 순습(馴習)이 되어 거세(擧世)가 서로 경계하여 구(口)를 외(畏)하고 문(文)을 외하여 묵묵함으로써 성(聖)이라 하고 혼혼(昏昏)함으로써 현(賢)이라 하여 담론이 시국에 급치 못하고 사(事)를 당하매 지(只)히 미봉(彌縫)에 지(止)하며 관장(官長)에 대하여 아첨(阿諂)의 풍(風)을 성(成)하며 붕우를 조(遭)하면 회해(회諧)으로 시일을 허송하니, 풍속은 부패하고 질서는 문란하여 동방예의지국 운운이나 기 가치의 타락함은 이미 오래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인심세도가 이와 같이 저하됨에 따라 기중에서 진보된 양건이 있으니 일은 압제의 허담(虛談)이요, 이는 의뢰의 열성(劣性)이 이것이라.
압제와 의뢰는 항상 상지(相支)하여 병행하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상민은 반드시 사족에게 의뢰하지 않으며 동족을 압제치 못하며, 사족은 반드시 수령에게 의뢰하지 않으면 상민을 압제치 못하며, 수령은 반드시 거실(巨室)에 의뢰하지 않으면 상족을 압제치 못하며, 거실 역시 강권에 의뢰하지 않으면 전국을 압제키 불능하게 되니, 그러므로 차편(此便)에 굴복할지라도 피방(彼方)에 가서 뽐내며, 차편에서는 굴욕을 수(受)하나 피변(彼邊)에 가서는 영예를 자과(自誇)하니, 노성(奴性)은 이미 관습이 되고 악념(惡念)은 벌써 성벽(成癖)이 되어 타국있음은 알되 아국(我國) 있음은 모르며 일신의 존재는 알되 동포 있음을 지(知)치 못하여, 동방에 일강적 있으면 아 또한 재배하며, 서방에 일강적 있으면 아 또한 삼배하여, 아를 우마와 같이 취급하여도 오로지 유유락종하여 연로하고 수단이 난숙(爛熟)하여 완패(頑悖)이 더욱 심해져 항상 그 심중에 이위(以謂)하기를, 자수퇴령(自首頹齡)에 여생(餘生)이 기하(幾何)며 황천타일(黃泉他日)에 영욕을 수(誰) 향지(向之)랴. 아의 연연한 바는 처자이며 아의 관심사는 의식뿐이라. 단 아의 총리대신, 내무대신의 의자만 확호부동이면 아에게 요구하는 사천재의 산업도 쌍수로써 봉정(捧呈)하며 단 아의 일급월봉 이급월봉의 식료만 의구(依舊)한다면 아에게 요구하는 삼천리의 전토도 일구에 응락하여 린방(燐邦)과 결탁하여 원조를 삼으니, 아 다시 무엇을 우려하며 지위가 태산같이 공고하였으니 아 다시 무엇을 염려하랴.
그러나 아국민의 뇌수(腦髓) 홀연히 열리어 동작이 홀연이 영명하여져서 오(吾) 가정(苛政)을 반대하면 오 장차 어찌하며 무도에 항거하면 오 장차 어찌하랴. 시(是) 다못 아의 외구(畏懼)하는 바이므로 언론이 조금만 격하면 차(此)를 법망에다 구박하고, 행사 초(稍)히 기발하면 차는 함정에 몰입 함입(陷入)하여 지혜를 두색(杜塞)하고 생기를 박탈하니, 아의 수십년 과거사를 회고하여 그렇지 않은 바 있는가.
(중략)
일제의 전, 포성이 아직 그치지 않고, 마관의 약(約), 묵흔(墨痕)이 아직 마르기 전에 외교권이 일조(一朝)에 동도(東渡)하고 정부석차에는 외인이 병좌하여 군경 법도 개개히 인계하고 광삼토지는 촌촌히 할양(割讓)되다.
슬프다, 동포여! 아는가 모르는가. 꿈을 깨였는가. 수평의 모옥(茅屋)도 나의 집이 아니며 수 묘(數畝)의 산전도 나의 토가 아니며 문전의 상자(桑자)도 나의 초목이 아니며 동구(洞口)의 수류(殊流)도 나의 간수(澗水)가 아니다.
내 몸이 죽어서 묻힐 땅이 없으며 나의 자손이 자라서 거할 실(室)이 없으니 눈을 들어 하늘을 앙시(仰視)함에 능히 낙루(落淚)를 금하며 검을 발(拔)하여 지(地)를 작(斫)함에 능히 약동함을 억제하랴. 언(言)이 이에 급(及)함에 아 이천만동포 기왕에 실기(失機)함과 장래의 통탄(慟嘆)함을 불금(不禁)하여 안루(眼淚)가 방타(謗타)하고 강혈(腔血)이 용약(용躍)하는도다.
(중략)
희라! 이 나라는 내 나라인데 아 욕사(欲死)면 이 나라를 어디다 버려 두며, 아 험은(險隱)코자 할진대 하인(何人)에게 위탁할 것인가. 남아의 한좌(閑坐)함은 상제(上帝)의 증지(憎之)하는 바이라, 어찌 일시적 비관으로써 분연 자결을 도(圖)하며 또한 염세(厭世)의 비관으로써 호연장귀(浩然長歸)할 바이랴. 그러므로 금일 아배(我輩)의 전략은 오직 위국(爲國)하는 것뿐임.
위국이란 어떻게 하는 거냐. 난(亂)으로 인하여 치(治)함을 알며 망(亡)을 추측하여 존(存)함을 앎이니, 전차(前車)의 복(覆)은 후철(後轍)의 경계할 바이라. 아 석일(昔日)로부터 자신(自新)치 못하여 악수악과(惡樹惡果)를 타일(他日)에 거둘지라, 오늘 위국하는 길은 역시 자신일 뿐인지라.
자신은 어떻게 하느냐. 구몽(舊夢)을 연속커든 일고(一鼓)로써 환성(喚醒)하며 구습이 전면(纏綿)커든 일도(一刀)로써 결단하여 금일 금시로부터 새로이 맹약하되 아는 일신을 불원하고 이 나라를 유신하기를 목적한다.
아는 일가(一家)를 불원하고 우리 인민을 유신하기를 책임으로 한다. 일념이 차유신에 재하며 일몽이 차 유신에 재하고 일언일동(一言一動)이 차 유신에 재하여 차 혈성(血誠)을 포(抱)하고 용약전진한다면 급기야에는 유신의 일(日)이 유(有)할진저.
(중략)
본인 등은 국민의 일분자로서 해외에 표박한 지 이에 다년 바라건대, 학문문견의 중 득(得)한 바로 새 국민의 책임을 획(劃)함으로써 국민의 천직을 행코자 한다. 반야풍설에 천지진복(天地盡覆)하여 부모고향을 찾을바이 없도다. 호(狐)가 죽을 제 머리를 구(丘)에 언고 고향을 사모한다고 하거든 부앙건곤(俯仰乾坤)에 하물며 인(人)으로서이랴.
동방으로부터 오는 악신(惡信)은 귓부리를 놀라게 하며 이역의 광음은 유수와 공(共)히 최촉(催促)하니 안좌코자 하되 참을 수 없고 도사(徒死)코자 하되 무익이라. 이에 우으로 천지신명에 질(質)하고 아래로 동포형제에게 모(謀)하여 드디어 일회(一會)를 미국 가주(加州) 하변성(河邊省)에서 발기하니 기명(其名)을 대한신민회라 하다.
신민회는 무엇을 위하여 일어남이뇨? 민습의 완부(頑腐)에 신사상이 시급하며 민습의 우미(愚迷)에 신교육이 시급하며, 열심의 냉각(冷却)에 신제창이 시급하며, 원기의 모패(耗敗)에 신수양(新袖養)이 시급하며, 도덕의 타락에 신윤리가 시급하며, 문화의 쇠퇴에 신학술이 시급하며, 실업의 조췌(凋悴)에 신규범이 시급하며, 정치의 패부(敗腐)에 신개혁이 시급이라. 천창만공(天滄萬孔)에 신(新)을 대(待)치 않은 바 없도다.
지리(支離)한 겁몽(劫夢)에 한 사람도 신을 원치 않는 이 없도다. 급급함이여, 오늘의 유신, 일일불급신(一日不急新)이면 이는 아국이 일층 지옥에 함(陷)이라. 금일 신키 불능하며 명일 신키 불능하여 필경 만겁의 지옥에 함입하여 인종은 멸절하고 국가는 구허(丘墟)가 되고 말 것이니, 차시에 지(至)하여 서고(서膏□호)의 탄(嘆)을 발(發)한들 나하(奈何)리오. 그러므로 오배는 마땅히 침(寢)을 망(忘)하고 찬(餐)을 폐(廢)하여 소구(所求)할 바는 차 유신이다. 심(心)을 구(嘔)하고 혈(血)을 갈(竭)하여 실행할 것은 차 유신이라.
(중략)
범(凡) 아(我) 한인은 내외를 막론하고 통일연합으로써 기 진로를 정하고 독립자유로써 기 목적을 세움이니 차 신민회의 발원하는 바며 신민회의 회포(懷抱)하는 소이이니, 약언(略言)하면 오직 신정신을 환성(喚醒)하여 신단체를 조직한 후 신국(新國)을 건설할 뿐이다.
오호, 천도(天道)가 신치 않으면 만물이 생(生)치 못하며 인사(人事)가 신치 않으면 만사 이루지 못하나니, 아 오매(寤寐)간에 잊지 못하는 대한이여, 아 사생간에 버릴 수 없는 대한이여, 아 민을 새롭지 않으면 수(誰) 아(我) 대한을 사랑하며 아 민을 새롭지 않으면 수 아 대한을 보호하겠는가. 래(來)하라. 아 대한신민이여, 아 대한신민이여. 형극험조(荊棘險阻)에도 유진무퇴(有進無退)할 것이요, 조차원패(造次願沛)에도 전추후계(前趨後繼)하야 본회를 위하여 헌신할지어다. 본회는 국민의 일신단체이므로써 본회에 헌신하는 자 즉 본국에 헌신함이라.
(중략)
과거 사천재(四千載) 구한국의 말년 망국혼를 작(作)하려는가. 장래 억만세 신한국이 초년 흥국민을 작하려는가. 하(何)를 버리고 하를 취(取)하며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따르려 하는가.
래(來)하라. 아 대한신민이여.
Ⅴ. 단재와 관계한 인물들
▒서왈보 ▒ ▒신기선 ▒ ▒장응진 ▒ ▒정한경 ▒
김 구 (1876 ∼ 1949) 신기선 (1851 ∼ 1909) 이승훈 (1864 ∼ 1930)
김상옥 (1890 ∼ 1923) 신백우 (1888 ∼ 1962) 이회영 (1867 ∼ 1932)
김시현 (1883 ∼ 1966) 안창호 (1878 ∼ 1938) 장응진 ( ? ∼ 1950)
김원봉 (1898 ∼ ? ) 양기탁 (1871 ∼ 1938) 장지연 (1864 ∼ 1921)
김창숙 (1879 ∼ 1962) 유인식 (1865 ∼ 1928) 전덕기 (1875 ∼ 1914)
노백린 (1875 ∼ 1926) 윤세복 (1881 ∼ 1960) 정인보 (1892 ∼ ? )
박은식 (1859 ∼ 1925) 윤치호 (1865 ∼ 1945) 정한경 (1891 ∼ ? )
박재혁 (1895 ∼ 1920) 이 갑 (1877 ∼ 1917) 조소앙 (1887 ∼ 1959)
백정기 (1896 ∼ 1936) 이남규 (1855 ∼ 1907) 최광옥 (1879 ∼ 1911)
변영만 (1889 ∼ 1954) 이동녕 (1869 ∼ 1940) 최남선 (1890 ∼ 1957)
서왈보 (1887 ∼ 1926) 이동휘 (1872 ∼ 1935) 홍명희 (1888 ∼ 1968)
신규식 (1879 ∼ 1922) 이승만 (1875 ∼ 1965)
☞ 독립기념관내에 위치한 단재 어록비
1986년 8월 15일 국민의 정성으로 건립된 천안 독립기념관내에 위치한 단재어록비는 단재신채호선생의 문중인 고령신씨 종친회에서 개관과 함께 독립기념관 앞뜰에 세운 비이다.
당시 독립기념관은 개관을 앞두고 우리나라의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위인들 중 49인을 선정하여 '시비' '어록비'를 세우기로 하였는데 이 49인중에 한사람으로 단재선생이 결정되어 개관과 함께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어록비의 건립은 독립기념관 측의 건립 부지 제공과 전국에 있는 고령신씨 종친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졌다.
어록비에 새겨진 단재선생의 어록은 다음과 같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人類社會)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시대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온 상태 의 기록이니라.”
- 단재신채호 조선사총론에서 -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政權)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 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
독립기념관어록비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强盜政治) 곧 이족통치(異族統治)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敵)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 단재신채호 조선혁명선언 중에서-
☞ 단재의 추모글
Ⅰ. 추모사
::가신님 단재의 영전에
밤도 길어 가나 봅니다. 우리 식구가 깃드린 이 적은 방은 좁고 거칠은 문창이 달빛에 밝게물들었습니다. 수범이 두범이도 다 잠이 들었소이다. 아까까지 내가 울면 따라 울드니만 인제 다 잊어버리고 평화스런 꿈 세상에서 숨소리만 쌔근쌔근 높이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남겨 놓고 가신 육체와 영혼에서 완전히 해탈된 비참한 잔뼈 몇 개를 집어 넣은 궤짝을 부둥켜 안고 마음 둘 곳 없어 하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왜 이렇게 못난 주제로 내게 오셨습니까. 바쁘신 가운데서도 어린것들을 유난스레 귀중해 하시고 소매 동량이라도 해서 이것들을 외국 유학을 시킨다고 하시던 말씀은 잊으셨습니까?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나는 불쌍한 당신의 혼이나마 부처님 품속에 평안히 쉬이도록 하고자, 이 밤이 밝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동대문 밖 지장암에 가서 마음껏 정성껏 애원하겠나이다.
당신과 만나기는 지금으로부터 17년전 일이었습니다. 그 때 당신은 39세요, 나는 스물네살이었지요. 무엇을 잡아 삼킬 듯이 검프르던 북경의 하늘빛도 나날이 엷어져 가고, 황토색 강물도 콸콸 넘치게 흐르고 만화 방초가 음산한 북국의 산과 들을 장식해 주는 봄 4월이었습니다. 나는 연경대학에 재학중이고 당신은 무슨 일로 상해에서 북경에 오셨는지 모르나 어쨌든 나와 당신은 한 평생을 같이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두 해를 겨우 함께 살다가 다시 상해로 가시고 나는 두 살 먹이와 배 속에 다섯달 되는 꿈틀거리는 생명을 품에 안고 몇 년을 떠나 있던 옛터를 찾게 되었지요.
그 뒤에는 편지로 겨우 소식이나 아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은 늘 말씀하셨지요. 나는 가정에 등한한 사람이니 미리 그렇게 알고 마음에 섭섭히 생각 말라고.
아무 철을 모르는 어린 생각에도 당신 얼굴에 나타나는 심각한 표정에 압도되어 '과연 내 남편은 한 가정보다도 더 큰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구나'하고, 당신 무릎 앞에 엎드린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 열과 성의와 용기를 다 어떻게 했습니까? 영어의 몸이 되어서도 아홉 해를 두고 하루같이 오히려 내게 힘을 북돋아 주시던 당신이 아니었습니까?
지난 2월 18일 아침이었지요. 아이들을 밥해 먹여서 학교에 보내려고 하는데 전보 한 장이 왔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무엇이라 하리까. 어쨌든 당신이 위급한 경우에 있다는 것이라 세상이 캄캄할 뿐이니 거저 앉아 있을 수가 있어야 하지요. 어떻게 되던 간에 수범이를 데리고 그 날로 당신을 만나려고 떠났습니다.
여순형무소에 닿기는 그 이튿날 2월 19일 오후 3시 10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벌써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15년이나 그리던 아내와 자식이 곁에 온 줄도 모르고 당신의 몸은 푸르팅팅하게 성낸 시멘트 방바닥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었지요. 나도 수범이도 울지를 못하고 목메인채로 곧 여관에 나와서 하루 밤을 앉아서 새우고 그 이튿날 9시 되기를 기다려 다시 형무소에 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고 면회를 거절하겠지요. 물론 비참한 광경을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관리들의 고마운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세상을 아주 떠나려는 당신의 임종을 보지 못하는 모자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정말 당신은 그날 그날은 2월 21일 오후 4시 20분에 영영 가 버리셨다구요. 당신의 괴로움과 분함과 설움과 원한을 담은 육체는 2월 22일 오전 11시 남의 나라 좁고 깨끗지 못한 화장터에서 작은 성냥 한 가지로 연기와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여! 가신 영혼이나마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박자혜
::민족의 영웅(英雄), 창천(蒼天)의 붕새이신 단재 선생님의 영전에
여기 일생을 민족에 바친 고귀한 영혼이 살아 계시다. 그의 뜻은 넓어 능히 하늘을 가릴 만했고 그의 기개는 높아 창천(蒼天)에 짝을 이룰 자가 없었다. 홍진(紅塵)을 묻히고 사는 속세의 연작(燕雀)들을 품어 주던 그는 민족의 붕새였으며 역사의 사표이셨고 민중의 불꽃이셨다. 1880년 열강 제국의 칼날이 왼쪽 가슴을 파고들고 문약(文弱)한 조야(朝野)가 공리 공론에 휩싸였을 때 이 땅에 나시고, 1936년 간악한 일제가 국토를 유린(蹂躪)하고 가련한 민중이 도탄(塗炭)에 빠졌던 때 이국 땅 수천 리 먼 곳 여순(旅順)에서 통한의 임종(臨終)을 고(告)한 분이시다. 어려서 총명하여 시문(詩文)에 막힘이 없었고 장성한 후에는 신구학문 섭렵하기를 남달리 힘쓰셨다. 국망(國亡)의 치욕을 당하여 목 놓아 통곡하셨고 나라를 구하고자 고국 고향을 떠난 후 한평생 유리걸식(流離乞食) 허위단심 방랑과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여기 충절의 고향 청주를 그리며 <어찌타 십 년이 가도 돌아가지 못하고서(如何十載不歸去) 이역 땅에 머물며 망향가만 부르는고(留滯燕南學越吟)>라고 시름에 잠기기도 했고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로 시작하는 길이 빛날 대문장 「조선혁명선언서」를 남긴 바 있으며 『을지문덕』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을 창작하는 한편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아름찬 고난의 일생을 살았던 이 민족 이 나라의 진정한 스승이시다.
하늘이 나리신 그 분은 애국계몽기와 일제강점기의 백척간두(百尺竿頭)와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우리에게 역사를 일러 주셨으며 장부(丈夫)가 갈 길과 필부필부(匹夫匹婦)가 할 일을 가르쳐 주셨다. 식민지 백성의 고통을 예견하고 반제(反帝) 항일(抗日) 민족 해방의 가시밭길을 가다가 마침내는 피투성이가 되어 삼천 리 원통한 혼백으로 이 나라 이 강산에 떠돌며 지금도 눈을 감지 못하는 분이시다. 선생의 말씀은 전(傳)하지만 선생께서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불초 후손(後孫)인 우리들은 아직도 이루지 못했다. 나라는 반 동강이 나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며 온갖 불평등과 부정(不正)이 세상을 썩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권력에 눈이 어두운 정객(政客)들과 재물(財物)을 탐하는 오리(汚吏)들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시정의 무리들이 민족과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세상은 모두 썩은 것 같고 앞날은 구름 속에 가리운 것 같다.
그러나 어찌 세상에 의인(義人)이 없다 하랴! 어찌 세상에 기개(氣槪)가 없다 하랴! 세상이 혼탁하더라도 선생의 의기로 혼탁함을 바로잡을 것이며 세상의 기개가 사라졌다 해도 선생의 서릿발 기백으로 쇠잔한 힘을 살릴 수 있으리로다.
여기 어리석은 연작들이 있어 온갖 환란과 고통과 고독과 정의와 진실을 짐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경제의 궁핍과 권세의 부족과 욕심의 불만을 하염없이 토설(吐說)하면서 역사와 조상들께 원망을 퍼붓는다. 어리석은 연작인 우리들이여, 우리의 궁핍이 심하다한들 어찌 밀개떡 하나로 세 끼를 연명하던 선생의 가난만 할 것이며 우리의 권세가 부족하다한들 어찌 제국의 신민(臣民)으로 궁성요배를 하던 시절과 비교할 것이며 우리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았다한들 선생께서 옥중의 찬 벽돌에 시난고난한 몸을 기대고 『조선사』를 쓰시던 것과 비교하랴!
우리는 피로써 그 분의 이름을 불러야 하며 눈물로써 그 분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 혼백(魂魄)으로 그 분께 올리는 향(香)을 살라야 한다. 민족의 영웅이시며 창천(蒼天)의 붕새이신 선생의 큰 뜻으로 민족통일의 비원(悲願)을 이루고 눈물의 밥을 먹는 민중의 고통을 없이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나를 이기고 아(我)와 비아(非我)의 싸움에서 또한 이겨서 펄펄펄 웅비의 기상을 삼천 리 강토에 뿌려야 하리로다. 우리들은 그 분이 못다 이룬 민족의 아름다운 <꿈하늘 님나라>를 이룩하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무인(戊寅) 정월(正月) 청주 개신골의 서생(書生) 김승환 삼가 짓고 선생을 흠모(欽慕)하는 향리(鄕里) 여러분이 삼가 바친다. Top
1998년 2월 21일
김승환
::곡(哭) 단재
단재가 죽다니, 죽고 사는 것이 어떠한 큰일인데, 기별도 미리 안하고 슬그머니 죽는 법이 있는가. 죽지 못 한다 죽지 못한다. 나만 사람이라도 단재가 지기(知己)로 허(許)하고 사랑하는 터이니 죽지 못한다. 말리면 죽을리 만무하다, 그런데 죽다니, 무슨 소린고 세상 사람이 다 죽었다고 떠들더라도 나는 죽지 않았거니 믿고 싶다. 만나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서도 보지 못하고 지냈으니 만나볼 수 없는 곳으로 가서 다시 보지 못하려니 생각하면 그만이다. 신문의 보도와 수범의 통기(通寄)가 나에게는 다 부질없는 일이다.
단재와 나 사이에 서신왕복도 그 친지가 오래지만 이제는 아주 영원히 그치게 된 것이 전과 다를 뿐이다.
나에게 온 단재 서신이 적지 않을 터이나 모두 분실되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서너장에 불과한데, 그 중의 한 장은 지금부터 7년전 내가 옥중에 있을 때 온 것을 2년후에 옥에서 나와서 본 것이다. 나에게 온 이 최후서신을 다시 펴놓고 읽어보니 이러한 구절이 있다.
'제(弟)는 불원간 아마 10년 역소로 향하여 발정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다시 면목으로 상봉하게 될는 지가 의문입니다.'
'이금(而今)에 가장 애석하는 양개의 복고(復藁) "대가야변국고" "정인홍공 약사"이 있으나 이것들은 제와 한가지 지중(地中)의 물(物)이 되고 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정녕 유서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7년이나 전에 미리 미리 기별하여 준 것을 보고도 이제와서 비로소 죽지 못한다, 죽지 않았거니 믿고 싶다, 말하는 내가 실성한 사람이 아닌가. 단재가 죽었다는데 남은 사람은 얼마든지 실성하여도 좋다. 그 서신에 또 이러한 구절도 있다.
'형에게 한마디 말을 올리라고 이 붓이 뜁니다. 그러나 억지로 참습니다. 참자니 가슴이 아픕니다마는 말 하란즉 뼈가 저립니다. 그래서 아픈 가슴을 들키어 쥐고 운명의 정한 길로 갑니다.'
영원히 가슴에 품고 간 '한마디 말'은 무슨 말일까. 이 말은 정녕코 나 개인에게 보다도 우리들에게 부치고 싶은 말일 것이다. 나의 추측이 틀려도 틀리는 대종이 멀지 아니하리라. 서신이 영원히 그치게 된 오늘날 욕상(辱常)한 왕복이 분실된 것도 아깝거든 우리들에게 공개하여 좋을 서신 여러장이 분실된 것은 아깝다 어떻다 말할 수도 없다.
지금 나의 생각나는 것 중에 나더러 모사에서 퇴사하라고 권고하는 서신에는 우리의 처신을 가르친 말이 있었고, 자기가 신간회 발기인 됨을 허락하는 서신에는 우리에게 우도(友道)를 가르친 말이 있었다.
이러한 서신을 다시 누구에게서 받아 볼까,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단재는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한 줌 재가 되다니, 신체는 재가 되더라도 심장이야 철석(鐵石)과 같거니 재가 될 리 있을까, 모두가 거짓말 같고 정말 같지 아니하다.
단재더러 말 한 마디 물어 보았으면 내 속이 시원하겠다. 간 곳이 멀지 않거든 나의 부르는 소리를 들으라.
단재!
단재!
벽초 홍명희
::하늘이 사람을 나리사
하늘이 사람을 나리사 충절과 역사의 고장 청주에 단재 선생님이 나셨습니다. 민족의 스승이신 선생께서는 애국 계몽기의 백척간두(百尺竿頭)와 같은 상황에서도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우리에게 사람의 도리를 일러 주셨고, 일제 강점기의 사면초가(四面楚歌)와 같은 곤궁에서도 우리에게 민족이 나아갈 길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선생께서는 비분강개(悲憤慷慨)의 칼을 갈고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눈물을 뿌리며 문인, 언론인, 교육자, 역사학자, 그리고 독립운동가로 파란(波瀾)과 만장(萬丈)의 일생을 사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조국 조선이 비통하게도 왜구의 총칼 아래 노예가 되었을 때 통한을 감싸 안고 해외로 망명하여 오로지 민족을 위해 헌걸찬 일생을 사신 우리의 진정한 스승이십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재물의 부족과 일신의 불편을 원망하지만 어찌 단재 선생께서 시난고난한 옥중의 몸으로 조선 역사를 집필하시던 고통과 비교할 것이며, 어찌 한 그릇의 물로써 세 끼를 연명하시던 가난과 비교할 것입니까! 머나 먼 이역(異域) 땅 감옥에서 죽음에 임박하여서도 친일매국노의 도움을 받지 않겠노라시던 선생의 뜻이 퍼런 빛으로 빛나고 있건만, 어찌 우리는 조금의 평안을 위하여 진리와 정의와 기상(氣象)을 잊어버리고 말 것입니까! 저기, 바로 저 산 너머에는 선생께서 못다 이룬 민족국가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 있건만 오늘 세상은 홍진(紅塵)의 썩은 무리와 권세를 탐하는 시정의 다툼이 높으매, 선생의 곧은 성품과 높은 기개가 더없이 찬연한 것입니다. 세계국가로 가는 제1세계의 음모가 옥죄어 들어오고 있는 금융위기의 오늘, 가량없는 국난(國難)을 이기기 위하여 우리 모두 선생의 청정(淸正)한 뜻을 깊이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여기 선생의 뜻을 이어받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분열 대신 화합을, 미움 대신 사랑을, 절망 대신 희망의 횃불을 들고 21세기 민족국가의 찬란한 꿈을 키우기 위해서 각다분한 마음을 추스르고자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생의 고귀한 영혼과 높은 기개를 기리며, 기쁨으로 선생께 올리는 향을 살라서 삼천리 강토에 뿌리고자 합니다. 함께 하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98년 12월 6일
단재문화예술제전 추진위원장 김영회
::하늘이 사람을 나리사
어느 시대이건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바친 위인이 있었습니다. 수 나라와의 전쟁 때 을지문덕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이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단재선생은 20세기 초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을 때 나라를 구하고자 자신의 몸을 던지기로 결심한 분이셨습니다. 선생의 관심은 오직 하나 민족의 자주 독립이었습니다. 선생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국사를 연구하고 또 이를 국민들에게 가르침으로써, 백척간두에 서 있는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정신적 힘을 기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또 언론인으로서 논설을 통해 국민의 무지를 깨우치고 나아가 우리 민족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국치(國恥)를 당하자 독립운동가가 되어 해외에서 피나는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선생은 역사학자였지만, 한말의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선생으로 하여금 역사 연구에만 몰두하게 하지 못하고 언론인으로 문인으로 교육자로 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선생은 일생 동안 꼿꼿한 조선의 선비로서 대의와 지조를 지켜오셨으며,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대쪽같은 분이셨습니다. 이러한 단재의 정신이 「옷 한 벌을 다 적시면서도 꼿꼿이 서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세수한」 사람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선생은 독립운동에 매진하면서도 여느 정치가와는 달리 국권을 되찾기 위한 정신적 투쟁의 방법으로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을 정립하셨습니다. 선생은 한국 근대사가 낳은 대표적 사상가로서 한국사를 깊히 연구하였으며, 특히 선생의 한국고대사 연구는 지금까지도 그 수준을 능가하는 학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오로지 나라와 민족만을 위한 생을 살다 가신 선생의 일생과 그 사상은 아직도 분단되어 있는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는데 큰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생의 청렴하고 정직한 정신을 다시한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충절의 고장 청주에서 선생의 깊은 뜻을 이어받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다가오는 새 천년을 민족의 화합과 번영의 시대로 만들기 위해 선생의 고귀하신 얼과 깊은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합니다.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99년 12월 8일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위원장 손홍렬
::단재선생의 나라 사랑을 기리며
오늘 1996년(단기 4329년) 12월 8일(음 11월 7일) 제1회 단재문화예술제전 추진위원회 위원장 저 박정규는 '신(申)'자 '채(采)'자 '호(浩)'자 선생의 탄신 116주년을 맞이하여 선생 신위 전에 삼가 고하옵니다.
선생께서는 본디 이 땅에 개화의 물결이 쳐오르던 시기인 1880년에 태어나시었고, 부친이신 '광(光)'자 '식(植)'자 어른께서 별세하심에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고향인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돌아오셨습니다. 이때부터 조부이신 '성(星)'자 '우(雨)'자 어른의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시었는데 아홉 살에 통감을 해독하고, 열 살에 행시를 지었으며, 열네살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그 문명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열아홉살에는 성균관에 입교하시었고,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피수(被囚)되기도 하였습니다. 스물두살엔 신규식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다음해엔 조소앙 등과 항일성토문을 작성하여 이하영 등의 매국 흉계를 규탄함으로써 선생의 독립적 지조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스물여섯 살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논설위원이 되어 독립 계몽적 논설을 집필하였습니다. 스물아홉에는 여성계몽을 위한 한글판 가정 잡지를 간행했고 대한협회보에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등 많은 논설을 실으셨습니다.
선생의 이같은 애국독립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세는 한일합병의 계획이 착착 진행되어감으로 선생께서는 안창호·이갑·이종호 등과 중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청도회의를 개최, 토지 개간사업, 무관학교 설립, 교관 양성 등을 결의하였으나 자금 염출에 어려움이 있어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게 되었고 그 곳에서 해조신문을 복간하고 다시 청구신문과 권업신문을 발행하였습니다. 서른 살에 단기고사(壇奇古史)를 쓰시었고 서른 네 살에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며 상해로 가서 망명 동지들과 접촉하게 되셨습니다. 이 해에 소설 '고락유감'을 시천교월보에 발표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다음 해인 서른 다섯에는 봉천성 회인현으로가 조선사 집필에 착수하셨습니다. 서른 여섯 살 되던 해에는 북경에 체류하며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았고 또 북경 도서관 생활을 하며 조선상고사의 집필을 구상하셨습니다.
서른일곱엔 중편소설 '꿈하늘'을 창작하시어 문학적 역량을 드날리기도 하였습니다. 마흔 살에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셨고 그 해 7월엔 임시정부 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되었습니다. 또 비밀결사 조직이던 대동청년단장에 추대되고 신대한의 주필이 되어 준열한 독립운동론을 펼치셨습니다. 이로써 여운형의 도일사건과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가하여 이른바 '신대한사건'을 촉발하기도 하셨습니다.
마흔세살에는 사찰에 들어가 중이 되어 불경을 독파하고 49일 동안 고행도 하며 조선사 전 5권의 대작을 쓰셨으나 안타깝게도 오늘에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 해엔 조선혁명선언을 써 의열단 선언으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마흔아홉살엔 조선사연구에 열중하다 시력이 악화되어 고국에 건너가 있던 처자를 불러들여 상면함으로써 스스로의 만년을 예감하고 계셨습니다. 이 해 4월엔 무정부주의자들의 북경회의인 동방연맹회의에 참여하여 선언문을 작성하는 등 주동적 역할을 담당하셨는데 이 회의에서 조선독립운동 선전기관을 설립할 것과 일본인 건축물을 파괴하기 위한 폭탄 제조창의 설치를 결의하고 이의 실행을 위하여 5월 8일 일본 기륭항에 상륙하다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선생은 곧 중국 대련으로 호송되어 수감되었습니다.
쉰 한 살이던 1930년 5월 선생은 대련 법정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으로 이감되어 복역하시게 됩니다. 1936년 영어의 생활이 시작된지 여덟해 만에 열악한 감옥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천추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57세였습니다.
선생이시여! 지금까지 개술한 바대로 선생께서는 뛰어난 역사학자로서, 언론인으로서, 문학인으로서, 독립운동가로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오직 '정의' 하나만으로 사시면서도 절대 비타협적 자세를 견지하셨습니다. 그 같은 높으신 식견과 고결한 절조는 저희의 확고한 사표로 자리 잡혀있습니다. 오늘날 재 혼돈의 시대에 이르러, 부지불식간에라도 불의한 세력과 영합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임에 행여 이들에 의해 선생의 이름으로 정의를 말하고, 선생의 이름으로 민족 화해와 문화의 창달을 꾀하고자 하는 모독이 자행된다면 이는 결코 포용의 범궤가 아닐 것이니 반드시 바로 잡아 주시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에 저는 뜻있는 동지들과 충청북도민을 비롯한 전 국민의 경건한 바램을 모아 감히 '제1회 단재문화예술제전'을 열어 선생의 참뜻을 만대에 기리고자하는 바입니다. 선생께서는 이 작은 뜻을 살피시어 부디 강림하셔서 흠향하시옵소서! Top
1996년 12월 8일
제1회 단재문화예술제전 추진위원회
위원장 박정규 올림
::고유제문
우리는 오늘 우리 고장이 낳은 위대한 인물 단재 신채호 선생의 탄신 1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선생께서는 풍운이 몰아치던 한말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신 분입니다. 나라가 왜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국사 교육을 통한 국민계몽에 앞장 서셨고, 국치를 당하자 외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가 되어 피나는 투쟁을 전개하셨습니다. 일생동안 선생께서 추구한 한 가지 목표는 오직 민족의 자주 독립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를 위해 평생 동안 국사를 연구하여 민족의 뿌리를 찾고자 하였으며,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국민을 계몽하셨습니다.
선생은 학자로서의 자질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분이셨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선생을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선생께서는 교육자로서 언론인으로서 또 독립운동가로서 일생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불같은 열정과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던 대쪽 같은 선생의 지조가 "왜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기 위해 옷 한 벌을 다 적시면서도 꼿꼿이 서서 세수하는" 사람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국고대사의 연구와 국난을 극복한 인물 연구에 몰두하여 민족주의 사학자로서 한국사 연구에 큰 자취를 남기셨습니다.
선생의 일생은 오로지 민족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민족을 위하는 일 앞에서는 가족도 친척도 모두 관심 밖에 있었으며, 죽음 앞에서도 친일파의 도움을 거절한 분이셨습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신 단재선생의 이러한 일생과 그 사상은 아직도 분단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는 지침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선생의 정직하고 청렴한 정신을 되새겨 보고 이를 계승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이러한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를 빌어 다가오는 21세기를 민족의 통일과 화합 그리고 번영의 시대로 만들 것을 다짐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선생의 고귀하신 얼과 깊은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00년 11월 19일
단재문화예술추진위원회 위원장 손홍열
::단재선생의 정신을 기리며
오호 선생이시여! 조선은 8·15 이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선생이 일생을 두고 단심과 벽혈(碧血)을 경주(傾注)하여 행왕좌와(行往坐臥)와 매오식식(寐寤食息)에 촌구(寸晷)와 분음(分陰)의 틈을 다투며 사랑하시던 조국조선이 해방되었습니다. 인간에 갖은 모욕을 주고 질곡(桎梏)에 채우며 국권을 앗아가고 국토를 앗아가고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박탈하고 조국의 역사를 말살하고 종족의 인멸(湮滅)을 음모하던 강도일본이 구축(驅逐)되었습니다.
오호 선생이시여! 이것이 모두 선생의 벽혈이 줄기줄기 뻗치고 방울방울 떨어지며 선생의 단심이 조각조각 흩어지고 굽이굽이 퍼어저서 소연방 육군의 장거리포도 되고, 북미주 항공대의 원자탄도 되고, 영길리수상의 장광설(長廣舌)도 되고, 중화민국 주석의 민수완(敏手婉)도 되시어서 도처에 선생의 영령이 현현(顯現)하사 그 음조(陰助)가 그의 이름 좋은 민주주의 연합군의 이름을 빌려서 조선이 해방되고 강도 일본이 구축되었습니다.
오호 선생이시여! 선생의 말씀과 같이 이 인간은 아직까지 강권뿐이올시다. 약자의 비애는 의연히 천상에 수운(愁雲)이 개이지 않고 지상에 비풍(悲風)이 불어옵니다. 선생의 음조는 타력(他力)을 빌려서 조선의 해방이란 빈이름은 얻었지만 우리의 삼천만의 형제자매는 허구한 세월에 강도일본의 식민정책에 시달려 마비되었던 정신은 자체보존의 실천적 지식이 부족할 것도 자연일 것은 물론이올시다. 이 무자각한 틈을 이용하여 강권이 발동할 것도 현 인류사회에 당연한 일일까 합니다. 이러한 제조건으로 지금 우리 조선은 혼란에 혼란으로 그칠 바를 아지 못합니다. 따라서 세계에 공약된 조선의 독립도 하일(何日) 하시(何時)에 실현될지 예측치 못합니다.
오호 선생이시여! 그의 거룩한 벽혈과 위대한 단심을 다시금 우리 삼천만의 형제자매의 혈관을 통하여 흐르게 하여 주시며, 삼천만 형제자매에 신경을 통하여 감동케 하여 주시사 새 국민이 되게 하며, 일일이라도 속히 독립국민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오호 선생이시여! 우리의 독립이 지완(遲緩)될수록 우리 동포의 행복은 고사하고 다시금 경술(庚戌)의 참화를 두려워합니다. 경술의 화는 일개의 강도이었지마는 선생의 영령이시여, 우리 수구(守舊)의 형제로는 정감록의 헛꿈을 깨뜨리게 하소서. 신진의 형제로는 사대성(事大性)과 공리주의의 미망(迷忘)을 깨뜨리게 하소서. 우리 정당과 사회단체들로는 궤변(詭辯)과 허보(虛報)와 사언(詐言)과 광혹과 비방(誹謗)과 첨유(諂諛)와 위선(僞善)과 파괴(破壞)와 사리사욕(私利私慾)의 비애국적 행동을 개선케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일신우신(日新又新)의 재 자각으로 독립정신을 넣어 주소서. 거룩한 선생이시여! 숭고와 광명은 일월을 다투고 냉엄과 견정(堅貞)은 철석(鐵石)을 업수이 하시는 선생이시여. 열화(熱火)보다 뜨거운 선생의 애국열이시여. 우리는 선생의 단심과 벽혈이 씨앗으로 우리 조국이 독립될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선생의 단심의 벽혈의 씨앗으로 우리의 국민 개개가 용장활발(勇壯活潑)한 씩씩하고 위대한 국민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선생의 단심과 벽혈의 씨앗으로 우리의 강산에 태평의 봄꽃이 만발하고 태평의 봄노래가 서로 화답할 줄 믿습니다.
거룩한 선생이시여!
단기 사천이백팔십년(1947년) 정해(丁亥) 정월(正月) 십이일
단재선생 십일주기 제1회 추도식에서
신백우
Ⅱ. 추모시
::단재선생을 여기 모시며
도종환
살아서 뜨거웠고
죽어서 더욱 꼿꼿했던 당신
살아서 한 번도 비굴하지 않았고
죽어서 더욱 형형하게 빛나던 선생이시여.
님 가신 지 예순 해에
우리 앞에 님의 모습 바로세우며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생각합니다.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해
한 생애 다 바치고도
돌아와 내 땅에서 더욱 쓸쓸하였던 세월
이제 온 겨레
님의 형상 앞에 무릎 꿇고 머리 숙여
그토록 꿈꾸시던 님나라 바로세우기 위해
선생의 뜨거운 넋 여기 세웁니다.
내 지닌 모든 것 조국에 다 바치고 나서야
영원히 사는 목숨의 의미를
당신 앞에서 다시 깨닫습니다.
살아서 뜨거웠고
죽어서 더욱 꼿꼿했던 선생이시여.
칠천만 겨레의
영원한 단재선생이시여.
*1996년 청주 단재동상제막식 헌시, 제1회 단재문화예술제전 헌시*
::귀래리에서
김시천
그래요, 조국은 관념이 아니지요.
늦은 밤 텔레비젼 방송 종료를 알리는 엄숙한 애국가와 함께
졸리운 눈으로 쏟아지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그런 그림이 아니지요
때때로 생각나는 학창 시절 추운 겨울 운동장 조회 때
언 발 동동 구르며 부르던 동해물과 백두산 같은
그런 것도 아니지요
이른 봄날 청원군 낭성면 단재 사당을 찾아 가면서
이제 막 봄빛으로 깨어나는 귀래리 낮은 산들을 끼고 돌면서
쥐불놀이에 정신없는 동네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조국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눈섞인물 촉촉이 젖어 내리는 사당 한 구석
해묵은 방명록에 적힌 크고 작은 이름들을 생각해 보고
오랜 세월을 건너와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서 있는
우리 사는 땅 어딜 가도 그만그만한 순하고 나즈막한
산들을 생각해 보고
벗이여, 그렇게 가까이 이름 불러 함께 길을 가자면 해넘이 길
조국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우리가 생각하는 조국이란
크고 거창하게 번쩍이는 관념이 아니라
이렇게 나직하고 정겨운 우리들의 이웃과 함께
숨소리 길게 내뿜으며 새로이 봄길 열어가는
오랜 세월 그렇게 흘러내리던 작은 또랑물이거나
그런 이웃 속에 함께 젖어 살던 우리들의 선한 가슴 속에
문득문득 피어 흔들리는 진달래꽃 같은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997년 제2회 단재문화예술제전 헌시*
::백년에 한번 오실 분이여
송찬호
새벽은 어떻게 여는 것입니까
나라를 잃고 돌덩어리가 된 새와 허리 묶인
강물과 차갑게 식은 국토와 백성들을
당신께선 어떻게 흔들어 깨우신 것입니까
돌아보건대, 가까운 우리의 역사는
청맹과니 역사가 아니었습니까
분단과 비민주의 가시덤불을 지금도
힘겹게 헤쳐가야 하는 조국의 슬픈 현실에
이역만리 대륙을 뒤덮던 웅혼한 사상의 날개를 접어
쉬지 못하고 아직도 당신의 혼은 창천을 떠돌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백년전 당신의 사자후가 식민으로 어두워져 가는
조국의 귀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백년,
전쟁과 혼돈의 이 이십세기가 막 문을 닫으려 하는 지금
그리 큰 정신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 런지요
오늘 이 자리, 싸리비를 들고 새벽길을 쓰는
견결한 마음으로 당신의 뜻을 맞이하려 합니다
단재 선생이여,
백년에 한 번 오실 큰 분이시여
*1999년 제4회 단재문화예술제전 헌시*
::단재 사당에서
신경득
티끌 이는 땅에서
뉘 부르나
곰가죽 즐겨 입던
조선 하느님
춤추기 좋아하던
부여 아사녀
광개토 대왕 비 앞에서
뉘 우는가
잃은 땅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니
날선 칼바람
이마를 때린다
잃어버린 만 년 역사
뉘 아는가
밝아 오는 새벽 밑에 기대어
한민족 역사
피로 씻네
황톳길 산그림자
뉘 밟는가
우리 일가 가다가
고두미 마을
뒤돌아보니
조팝나무 꽃 아래
한 님이 서 있다.
::단재선생 묘 앞에서
단재 선생의 묘소와 사당
노산 이은상
풍운 뒤덮인 속에 조국 운명 가로놓여
존망이 달렸거늘 엎디어만 있으리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고향산촌 떠나시니
청춘의 타는 정열 한 자루 붓에 맡겨
던지는 글자마다 불덩이를 뿜었건만
무디다 국정민심은 깰 줄 어이 모르던고
史統을 바로잡고 정기를 세우려고
애타게 외쳤건만 국운을 붙들길 없어
큰 집이 무너져가매 가슴 태워 우시더니
봄바람에 몸을 던져 압록강 건너실 제멀어가는 고국 강산 울며 돌아보시던 양
지금에 그려만 보아도 가슴 미어집니다.
여관 찬 등 아래 밤 새워 글을 쓸 제
언 주먹 움켜 쥐고 입김 불어 녹이시다
깊은 밤 지는 눈물에 얼굴 몇 번 젖으신고
막대에 몸을 맡겨 몇 천리를 떠돌 적에
한 번 세운 큰 소원은 꿈 속에도 푸를러라
눈 쌓인 새벽길 나서 또 어디로 가시던고
고구려 국내성에 동간비 만지시고
발해 옛 터에서 남은 柱礎 뒤적이며
때 묻은 청포소매를 웃고 내려 보옵더니
태산장강 막혀 있어 갈길이 아득할 제
피 맺힌 만세소리 고국에서 들려오네
일어나 횃불 마주 들고 길을 밝히시더니
우리들 가야할 길 오직 하나 자유독립
한 치도 굽힘 없는 날카론 님의 뜻을
하늘은 어찌 그리도 보살피지 않던고
일제의 연호 밑에 내 글랑은 싣지 마라
얼음 같은 한 마디 말 가슴을 찌르던 일
지금도 안 잊힙니다. 귀를 쩡쩡 때립니다.
여순옥 찬 마루방 쇠사슬에 묶였을 제
일생도 던졌거늘 10년이야 웃었으리
백옥이 깨어지는 날 소리 쟁강 났더니라.
찬바람 궂은 비 속에 처량한 님의 모습
가난과 병을 안고 헤매고 다니시며
소리쳐 못 울던 일이 한이라고 하시더니
여기는 제 땅이외다 죽어와 묻혀도 제 땅이외다
그날에 못 부른 노래 마음 놓고 부르시오
못 울던 울음도 마저 실컨 한 번 우시구려
우리 님 사시던 곳 이름조차 귀래리라
귀래리 옛 마을로 돌아와 묻히셨소
비바람 휘몰아 깔고 웃고 누우셨구려.
높은 학자 독립투사로 일생을 보내신 인데
초라한 무덤, 석자 비석, 이것이 웬 말인고
내 정을 내 못 이기어 한 줌 흙을 보탭니다.
부인을 찾았더니 그도 진직 가셨다네
인사동 오막살이 숨어 몰래 뵈옵던 일
그리워 말없이 서서 먼 산 바라봅니다.
님 그려 울던 이들 그들조차 가버리고
한두엇 남은 이들 그마저 흩어지고
오늘은 외로운 손이 홀로 서서 웁니다.
낭성 사람들아 이 무덤에 꽃 심고
감나무 호두나무 갖은 과일 다 심어서
외롭던 우리님 넋을 실컨 웃겨 드리세.
::단재선생 생각
박노정
무엇 땜에 산천초목 벌벌 떨고
조선사람 목소리 안으로 기어드는가
"창들고 달려나가 나라운명 못 돌리고
무디어진 붓을 들고 나라역사 끄적이니"
가슴에 못을 박고 내빼는 바람 한 쪽
건밤으로 뒤척이다
창호지에 번지는 햇귀 맞으니
내 속정 누구에게 말할꼬
냉수 한 사발 벌컥이며 정신을 추수리네
이제 다시 한 겨울 북풍과 마주서리니
내 한 뉘 밑구린 일 없나니
뉘 앞에서도 고개 숙일 일 결코 없으리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
검은 두루마기 걸치고 때묻은 조선버선에
미투리 신고 두 손 휘저으며 가는 사람
다시 태어나도 조선토종으로 당당하게 서리니
고개빳빳 하늘로 치켜들리니
::단재선생 사당에서
김종인
나무 팔아 돌아가리
문전옥토 살구꽃 마을 귀래리
나는 살아 돌아가리
미원 장터 고두미 장꾼 노래하며
해장국 한 사발로 목 축이며 돌아오던 곳
단재선생 백골로 돌아와
구들장 밑에 누워서
일편단심 큰 뜻 하나로 버틴
사당만 남아
앞산의 온통 붉은 진달래 함께 타는데
탕탕탕
단재선생 무덤 뒷산에는
총소리 메아리에
진달래 붉은 꽃잎이 지고
탕탕탕
이 땅의 까투리 장끼 토끼 등속을
사냥하는 일본인을 향해
분노에 찬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짖는 분이 있더군요.
::단재선생 무덤에서
정대호
진달래가 온산을 덮는 봄날
단재선생님 무덤에 와서 들었어요
재 넘어 장 다니실 때에
삼베짐을 발축까지 늘려지고 다니시며
고집을 키우셨다는 그 우직함을
봄풀이 돋는 봄날
단재선생님 무덤에 와서 들었어요
임정에서 외교독립이라는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시며
무력전쟁 독립을 주장하시며 만주로 떠나셨다는
우직했던 독립운동 논리를
진달래가 온 산천에 봄볕을 가져온 그날
단재선생님 무덤에서 들었어요
이 나라 독립을 가져오는 것은
민중 직접 봉기만이라는 우직했던 그 논리를
진달래가 온산을 덮은 봄날
단재선생님 무덤에 절하면서 부끄러웠어요
이 산천에 꽁꽁 얼어붙은 휴전선을 생각하며
단재 가시고
또 해방을 이야기한지 몇십년이 지나도
살 수 있는 논리만을 이야기하는 속 얇은 세상에서
부끄러웠어요 속 얇은 우리들의 생각이
우직하게 사시며 주장해온 선생님의 독립 논리에
::고두미 마을에 내리는 눈
김창규
삼월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눈물이 얼어버려 꽃잎이 되어
얼굴을 붉으스레 달아 오르게
가슴을 두둘기며 봄눈이 내린다.
매화꽃이 하얗게 피어
그 옛날 두루마기 짚신발로 고두미를
수없이 오고 갔을 청년들이
단재 선생 사당을 찾아간다.
질퍽이는 논 두렁길을 밟으며
묘소에 이르면 앉아서 우릴 기다리는
선생님 앞에 막걸리 한 잔을 부어 올린다.
귀래리의 봄 햇살이 퍼지고
문풍지를 때리던 바람도 가슴을 치던 눈발도
양지바른 언덕에서 숨을 죽이고
조선청년 단재 신채호 큰 호흡 기침소리에
눈을 뜨고 선생의 얼굴 마주보면
빙그레 웃으시면서
봄이 오는 구나 삼천리에 민주화의 봄이
오래도 고대하던 민족 해방의 날이
고두미 마을에 수천 수만의 독립군 가족의 영혼이
춤을 추며 내려온다.
::겨울 귀래리
김하돈
나중에 가자고 좀 더 있다가
영영 아니면 그때 가자고
저녁 닭 우는 소리 먼저 잠드는 겨울 귀래리
앞 뫼 등이 시린지 삭정일 또 부러뜨리고
어느 해 매서운 겨울
재 너머 사재울 벼랑까지 쫓겨가던 눈보라
오늘은 어스름에 고두미 고개를 넘어와
북만주 벌 삭풍의 냄새를 핥고 있다.
죽어서야 그 소문으로 돌아오는 겨울 귀래리
가끔은 누구라도 헛되이 주먹을 쥐었다 펴지 않는가
추운 골짜기로 나가 오래 오래 몸 달구는
이 저녁 우리들의 늦은 북풍한설이여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빈 주머니 서걱이며 따라오는 지난 약속
나중에 가자던 좀 더 있다가
영영 아니면 그때 가자던
그 고운 약속
::신채호의 마지막 호령
이기형
1936년 2월 21일
이역 만리 여순 감옥 외로운 지옥방
일세의 천재 애국애족의 화신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의 생명의 등불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병감에서 단재는 동지 장기업(張基業)에게 당부했다.
"동지는 나이가 젊으니 밝은 세상에 나가면 부디 큰일을 계속하시오."
전옥과 친일파 모씨가 병보석을 제의해 왔다.
단재는 즉석에서 호령했다.
"님 나라에 이르는 도중 돌아섬 또한 한두 놈이 아닐진대 내 어찌 원수와 네놈들의 거짓 선심에 구차하게 이 몸을 맡길까보냐. 여기는 내가 죽을 자리로다."
순간, 파란 만장한 생애가 뇌리를 스쳐 열혈 애국투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호라! 향년 오십 칠세.
(1995년 4월)
::고두미 마을에서
도종환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뫼 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뭇군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발에 지워진다.
복숭나무 가지 끝 봄물에 탄다는
삼월이라 초하루 이 땅에 돌아와도
영당각 문풍질 찢고 드는 바람소리
발 굵은 돗자리 위를 서성이다 돌아가고
욱리하 냇가에 봄이 오면 꽃 피어
비바람 불면 상에 누워 옛이야기 같이 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 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랴 쪽발이 발에 채이기 싫어
내 자란 집 구들장 밑 오그려 누워 지냈더니
오십 년 지난 물소리 비켜 돌아갈 줄을.
눈녹이물에 뿌리 적신 진달래 창꽃들이
앞산에 붉게 돋아 이 나라 내려볼 때
이 땅에 누가 남아 내 살 네 살 썩 비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릴 줄줄줄 흘리련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은 내리는데.
::임이여 임일레라
장문석
임이여 임일레라
흰 옷자락 너울너울 억만 겁을 흘러자던
神檀樹그늘 푸른 배달의 별일레라
뜻하지 않은 저 한때 어인 광풍이 불었던가
바다를 건넌 집승들은 네 발굽을 쳐오고
간릉스런 뱀들은 굴 속에서 기어 나와
할퀴고 깨물고 찢고 바수는
미친 난장질에 핏물 튀던 그때였느니
나아가면 <칼>이 되고*
들어오면 <깃발>이 되리라
째렁째렁 임의 목소리 천지를 뒤흔들어
그 뿌리 단군 왕검에 닿으니
비로소 꽃과 나무와 새들
제 빛깔과 제 뼈대로 온전히 서고
산맥은 산맥대로 물길은 물길대로
제 숨결과 제 눈길로 올과 결을 가다듬어라
이제는 그 누구도 이길을 막지 못하리
광풍은 광풍에 연하여 간악한 짐승과 뱀들
또다시 발톱 세워 이땅을 기웃거릴지라도
임이 세우신 칼과 횃불 갈수록 빛을 발하니
우리 어찌 고개를 꺾으리, 걸음을 멈추리
임이여 임일레라
억만에 억만겁을 더해도 결코 시들지 않을
太白의 새벽빛 푸른 겨레의 꽃일레라
*「조선혁명선언」에서 인용
*2000년 제5회 단재문화예술제전 헌시*
::단재선생
윤석위
봄 하늘 산벚꽃 함박눈처럼 흩날리고
여름 장대비 눈처럼 비껴 내리네
가을 낙엽도 흩뿌려 눈발 같고
그리고 마침내 겨울 눈보라
뤼순 감옥 창 밖으로 눈 내린다
사철 빛나는 흰 바늘이다
::다시 하늘 북을 쳐야할 새벽
윤석위
그의 곁에는 언제나 바위를 깎는 칼바람 있고
그의 곁에는 언제나 만주벌 뒤덮는 눈보라 있고
그의 곁에는 언제나 산맥 같은 큰 깃발 있지.
그러나
그 바람소리 잦아들어 백성의 혼 잠들어 있고
그 눈보라 그쳤으나 아득한 길 보이지 않고
깃발 흔들어 휘날릴 바람.
어디에서도 불어오지 않는구나.
이제 칼바람 불어 다시 금강을 깎아 빛나게 하려면
만주벌판을 흰백성 눈보라로 뒤덮이게 하려면
큰깃발 준령처럼 세상을 향해 휘달리게 하려면
힘찬 팔뚝으로 하늘을 찢어 새 세기를 열게 하려면
온동포 함께 일어나 기쁨의 춤추게 하려면
그를 불러
오늘을 보게 하고
그를 불러
동강난 산하를 보게 하고
그를 불러
이산으로 상처 깊은 백성들을 보게 하고
다시금
그의 하늘 북 울려
우리를 깨워야 하는 때.
바로 지금 그 새벽.
*2001년 제6회 단재문화예술제전 헌시*
☞ 단재일화
::일나가는 모습을 보고 시를 짓다::
할아버지가 써래와 쟁기를 들고 일을 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고 단재는 어린나이에 시를 짓는다.
朝出負而氏 論去地多起
'이른 아침에 써래와 쟁기를 지고 들로 나가세. 논을 갈아 나가니 흙덩이가 많이도 일어나네.'
특별한 것 없는 이 시는 써래를 '而'자로 쟁기를 '氏'자로 농기구의 형상을 표현하였고, '論'자는 '沓', '去'나는 밭갈다(田井)의 음역으로 이러한 한자들을 빌어 작문한 소년답지 않은 기발함과 재치에 마을사람들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당나라 사람의 시를 읽다::
단재가 당나라 사람이 쓴 시를 읽다가 "4월 남풍에 보리가 누렇게 익어(四月南風大麥黃)" 하는 대목이 나오자, '거참 이상하다. 지금은 분명 4월이고 저 들판의 보리가 새파란데 어찌 누르다고 할까?'하며 머리를 갸우뚱하였다. 그리고는 얼른 붓을 들어 "4월 남풍에 보리가 더욱 푸르다(四月南風大麥靑)"로 고쳐 놓았다. 소년단재의 총명하고 고집스러운 면이 보이는 일화이다.
::가덕서숙에서::
밤늦도록 학생들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모두들 코를 쥐고 문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하며 우와좌왕하는데 유독 단재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골똘히 책만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변고람! 누가 뒷간에 가지 않고 이방 안에다 실례를 했는가 말이야?"
학생들이 코를 움켜 쥔 채 방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책장 넘기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단재가 앉은 곳이 흥건히 젖어 있지 않은가.
"아니! 자네..."
학생들은 어이가 없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이윽고 읽던 부분을 마저 다 읽은 신채호는 얼굴을 들고 흥분한 표정으로, "여보게들! 이 신묘하고 깊은 뜻을 가진 글을 좀 보게나! 참으로 뛰어난 문장 아닌가"하며 책을 들고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학생들은 저마다 "이크! 가까이 오지 말게!" 하고 도망하며, "그보다는 자네 뒤를 먼저 보는 게 옳을 것 같아" 하며 놀렸다. 그제서야 단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례를 하였다는 것을 알고 슬그머니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장작을 훔치고::
몹시도 추운 어느 겨울날 밤이었다. 잔뜩 웅크리고 누운 가족들은 추워서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낮은 신음 소리를 듣다못해 단재는 한밤중에 밖으로 나왔다. 이 시간에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곰곰히 생각하며 고샅길을 서성이다가 이웃집 헛간 옆의 장작이 수북이 쌓인 새초가리에 눈이 멎었다.
'저것만 있으면 온 식구가 따뜻하게 밤을 지낼 수 있을텐데 …. 주인 모르게 저걸 가져갈까? 결국 도적질이 되고 마는데, 어떻게 해야하나."
양심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추위에 떨고 있을 가족 생각을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장작을 한 아름 안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아궁이 앞에 앉아 군불을 지피면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한 것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을 다 태워 버리고 싶어 나뭇가지를 한꺼번에 잔뜩 집어넣고는 그 매캐한 연기 속에 눈물을 떨구면서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부자에게 구걸::
식량이 떨어져 며칠을 굶다 못해 이웃에 사는 부자집 대문을 단재는 두드렸다.
"이리 오너라."
"웬일이오?"
"다름이 아니라 이 집의 남는 식량을 조금 빌릴까 합니다. 후일 반드시 갚겠습니다."
본시 돈을 모은 사람일수록 남에게 베푸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거지 행각의 이 손님이 부자에게는 반가울 리가 없었다.
"지금 손님이 있으니 몇 시간 후에 다시 오는 게 어떻겠나?"
시큰둥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품이 거절을 못하여 적당히 미루는 것 같았다.
단재는 무안하여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래도 약속한 몇 시간 후 그는 다시 이 집을 찾았다. 오기도 난데다가 사실 당장 굶어 쓰러질 판이어서 앞 뒤 가릴 게 없었다.
이번에는 주인 아닌 다른 사람이 나왔다.
"안됐습니다. 우리 주인님께서는 조금 전에 다른 볼일이 생겨 인근 마을에 출타중이십니다. 조금만 일찍 오시지 그랬어요."
이 말에 단재는 바람같이 주인이 갔다는 동네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거기서도 방금 다른 마을로 갔다고 했다. 그는 또다시 주인의 뒤를 쫓았다.
허겁지겁 뒤쫓아간 그는 인근 마을 입구에서 비로소 그 부자와 만날 수 있었다.
"아까 저와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사람아, 그렇다고 예까지 무엇하러 찾아와."
단재는 분노에 찬데다가 쉬지 않고 뛰어오느라 아직도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
"밤이 깊었소만, 우리 집 사랑에 가서 기다리면…."
부자의 지연 전술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순간 단재는 번개같이 달려들어 부자의 갓과 상투를 움켜쥐었다. 불같은 성미인 10대 소년의 손에서 갓은 발기발기 찢겨져 땅에 내동댕이 쳐졌고, 상투는 뜯기어 풀어 헤쳐진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흘러 내렸다.
"당신 따위를 상대하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더 낫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는가? 재물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걸 이 기회에 똑똑히 알아 두라구."
단재는 큰 소리로 부자를 꾸짖었다. 갑작이 봉변을 당해 꼴이 말이 아닌 부자는 밤중이라 보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고 여기며 줄행랑을 놓았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에 단재는 이내 자신이 너무 흥분하였던 점을 후회하였다. 없는 자의 슬픔, 딱한 처지에 대한 반발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큰 일에나 작은 일에나 비위에 거슬리거나 사리에 벗어나도록 푸대접을 받는 경우 그는 불같이 날뛰었다.
::재상 신기선과의 관계::
재상을 지낸 신기선의 사저를 드나들면서 책을 읽던 때의 일이다.
단재는 채 일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속독법으로 신기선의 사저에 있는 책을 독파하였다. 이 말을 듣고 신기선은 단재의 재능을 시험하기로 하였다. 신기선은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가장 까다로운 대목을 물었다. 그러자 단재는 거침없이 술술 외며 시원스럽게 풀이까지 하였다. 다시 다른 책들을 꺼내 몇 가지를 더 물어 보았으나 여전히 청산 유수였다.
"허허,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
신기선은 단재의 비상한 재능과 학구열에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우리 집 책도 다 읽었다니, 내가 자네에게 더 큰 배움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할 차례다. 서울 성균관으로 가게나. 내가 천거해 줄테니 어서 올라가게."
단재는 이렇게 신기선에게 인정받고 성균관에 입교할 수 있었다.
신기선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단재였으나 공과 사는 분명하게 구분하여 차후 단재가 언론을 통하여 구국의 활동하던 시절 일진회원 신기선의 매국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성토하기도 하였다.
::성균관 스승들과::
성균관 관장서리인 수당 이종원은 단재의 재능과 실력이 갈수록 두드러지자, 많은 관생들 중에서 그를 가장 총애하였다. 그는 단재가 나이 어린 제자임에도 학문적인 소양은 오래지 않아 자기를 능가하고 말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자네 한 사람뿐이네." 라고 이종원은 말할 정도였다.
당시 경학을 가르치던 이남규도 단재의 재능을 누구 못지 않게 인정하였다. 그는 어디에 가던지 "나의 제1제자는 신채호, 제2제자는 변영만이다."라고 거침없이 이야기하곤 하였다.
::유인식과 상투::
안동출신 유림 동산 유인식과 성균관 동재에서 함께 공부하던 단재는 상투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단재는 유인식이 상투를 고집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보오, 동산은 앞으로 많은 일들을 해 나가겠다면서, 대체 그 상투는 언제까지 고이 보존하시겠소?"
"단재 자네가 단발을 했다고 나한테까지 그걸 강요할 수는 없네. 내게 있어서 상투는 바로 민족적 자존심이니까."
"내가 걱정하는 바는 동산 한 사람이 단발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오. 온 민족이 하루 빨리 개화하여야 할 시기에 민족을 위하는 일에 앞장서기로 뜻을 모은 우리가 그까짓 상투하나 잘라내지 못하고 있다면, 저 산적한 일들을 누가 나서서 다 합니까? 재래 유생의 보수적인 몸가짐을 고집하면서 어떻게 구국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는거요?"
"…."
"동산도 어서 그 거추장스러운 상투를 자르시오."
단재의 논리가 하도 당당하여 결국 유인식은 고집해 온 상투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상투에 민족적 자존심을 걸었던 내 소견이 좁았던 것 같네. 우리 민족의 자부심은 보다 더 큰데서 살려내야 하는 것을…."
이처럼 단재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독선적이라 할 정도로 저돌적으로 밀고 나갔다. 단재는 유인식뿐만 아니라 당시 성균관의 고루한 유생을 보기만 하면 먼저 긴 머리칼부터 깎아 버리라고 종용하였다. 말하자면 정신과 육신이 아울러 개화해야 한다는 신념의 관철이었다.
::아들 관일을 잃고::
첫 아들을 본 단재는 무척이나 기뻤다. 부인 풍양조씨가 젖이 풍족하지 않자 부족한 살림에도 독수리표 분유를 사서 관일에게 먹일 정도로 끔찍히 사랑하였다.
그러나, 풍양조씨가 분유를 잘못먹여 관일은 우유에 체해 죽고 말았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단재는 집앞 도랑에 분유를 몽땅 쏟아 부으며 부인을 한탄하였다.
이 일을 기화로 하여 단재는 이후 중국 망명시 부인에게 논 5두락을 주고 친정으로 돌려보내며 이혼을 한다.
친구들이 이를 탓하자 단재는 "서로 편하자는 것이지, 무슨 다른 뜻이 있겠나"라고 간단히 대꾸하였다.
::바지 춤에 매달린 위장약::
바지춤에 무엇인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친구 변영만이 물었다.
"자네, 이건 또 무슨 보물 쌈지인가?"
"아무것도 아니야. 보물이 아니라 그저 위장이 좀 나빠서 약을…."
"아니 위장약이라면 집에서 끼니 때마다 복용해도 될 텐데, 뭐하러 이처럼 거추장스럽게 매달고 다니나?"
"글쎄 난들 그걸 모르겠나. 집에 두면 약이 남아나질 않아서지. 먹성 사나운 우리 집 아낙이 무슨 보약이라도 되는 줄 알고 이 위장약을 나 몰래 찾아 먹고는 하니 어떻게 하겠나. 이렇게 가지고 다녀서라도 내 병부터 고치고 봐야지."
::술과 단재::
어느 날 신문사에서 월급봉투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던 단재는 길에 소나기를 만나 어느 집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얼마쯤 흘렀을까, 온 몸에 한기가 스며들어 으슬으슬 떨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며 예쁘게 차려 입은 여자가 갸웃이 내다보며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어머, 비를 맞고 서 계시는군요! 누추하지만 잠깐 들어오셨다가 비가 뜸해지거든 가시지요."
단재는 춥기도 하고 비도 쉽사리 그칠 것 같지 않아 그집 사랑채에 잠시 들었다. 장지문을 열어 놓고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비 오는 바같 풍경이 가뜩이나 정서가 여린 그의 심사를 몹시도 뒤흔들어 놓았다. 가슴 밑바닥부터 촉촉히 젖어 오는 것을 느끼며 문 밖으로 던진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여주인이 주안상을 차려왔다.
아직 20대 청년의 객기 탓인지 이날 단재는 몹시도 취했다. 본시 술에 약한 체질이면서도, 빗소리를 들으며 낯선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일에 매우 흥취가 돋구어져 연거푸 마셔 댄 까닭이었다.
그러다가는 술에 취해 깜박 잠이 들었다. 이윽고 잠이 깨었을 때 그는 꽤나 쑥스러워서 안주인을 볼 용기가 안났다.
"잘 쉬었다 갑니다."
단재는 글을 한 줄 남기고 살그머니 그 집을 빠져 나왔다.
그런데 이튿날 출근한 단재는 몹시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더니 한 친구를 붙들고서는,
"여보게, 급히 돈이 좀 필요하니 한 달만 좀 빌려 줄 수 없겠나?"
"아니, 자네 어제 월급을 타지 않았나? 그 돈을 하룻밤 사이에 다 썼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데."
이쯤 되자 단재로서는 빈털터리가 된 어제의 일을 실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집에 와서 보니 호주머니가 텅 비어 있지 뭔가? 그렇다고 어제 일을 안사람에게 내색할 수도 없고. 이봐, 내 사정을 좀 봐주게."
"하하하, 우리 단재 선생께서 정에 취하고 술에 취하여 빈털터리가 되셨구만!"
신문 논설에서는 더없이 명쾌한 논조를 제시하는 단재였지만, 인간적인 면모에서는 허술한 점도 이렇게 없지 않았다.
::담배와 단재::
단재는 술은 좋아하지만 많이는 못 마셔 두서너 잔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담배만큼은 유명한 골초였다. 글을 쓸때는 언제나 줄담배를 즐겨하였다. 장죽에 기사미라는 잘게 썬 잎담배를 담아 피우는데, 다 타면 재를 털고 또 피우고 하여 나중에는 대통이 뜨겁게 달아 손으로 쥘 수 없을 정도까지 된다. 그러면 대통만 창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내밀어 그 열이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피워 무는 식이었다.
단재가 대한매일신보에 활동하던 시절,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정부가 진 빚 1천3백만원을 갚는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국민 모두가 아끼고 아낀 돈을 신문사로 보내며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을 때 단재는 그 즐기던 담배를 끊어 국채보상금으로 일금 2원을 냈다.
모두가 단재의 금연을 실패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라를 위한 보상금 모금 운동에 단재는 금연을 통한 기금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유학의 거절::
대한매일신보의 사장 영국인 배설은 단재의 재질을 높이 사 미국으로의 유학을 단재에게 권했다. 더 많은 배움의 길을 터주기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그러나, 단재는
"뜻은 감사합니다만, 지금 이 판국에 외국 유학이란 분에 넘치는 사치스러운 일입니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저 혼자 흡족하게 공부하겠다고 여길 떠나다니요."
"그렇게 거절만 하지 마시오. 단재 선생이 공부를 더 하면 장차 이 나라를 위해 더 큰일을 해 나갈 수 있을 텐데. 내가 비용은 다 대겠소. 당신은 세계적인 대학자가 되리라고 봅니다."
"나는 이미 이 겨레 이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할 결심이 서있으므로 지금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장님 후의만은 잊지 않겠습니다. 외국 유학일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단재의 고집에 배설 사장도 더 이상 권할 수가 없었다. 단재의 역량을 보고 세계적인 석학으로 대성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싶어 했던 배설이었지만 역사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단재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새해맞이 수세(守歲)::
새해를 맞이하는 섣달 그믐날에는 뜬눈으로 지새우고 새해를 맞이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
단재가 30대로 접어들던 섣달 그믐날 변영만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뜬눈으로 새해를 맞이하기로 친구들과 약속하였다. 모두들 술잔을 돌리며 시국담을 하고 있을 때 단재가 먼저
"우리가 오늘 밤 수세하기로 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밤을 꼬박 새워야 하네." 라고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고 나서 코고는 소리가 들렸는데 다름아니라 단재가 코고는 소리였다. 친구들은 "이봐, 단재. 수세를 이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나?" 하고 말하자 단재는
"아닐세. 아직 자는 것은 아니야."
그러다 좀처럼 잠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단재는 아예
"여보게들, 우리 잠자면서 수세합시다 그려…." 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친구들이 제일 먼저 수세하자고 하였던 사람이 먼저 코를 골고 잤다며 말하자, 단재는 "상관있소? 나는 꿈나라에서 묵은 해를 장사 지내고 새해를 맞았소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슨 일에서나 자신의 일에 당당했던 단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단재와 누더기 이불::
어느 날 벽초 홍명희가 한밤중에 우연히 단재의 집을 들렀는데, 단재가 덮고 자는 이불이 더럽고 남루하여 기겁을 하고 나온 적이 있었다.
이튿날 벽초는 다른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단재처럼 지저분한 사람을 미국에 유학보내면 분명히 한국 망신만 시킬 뿐이오."
친구가 벽초의 말을 단재에 전하면서
"어찌 그런 더러운 이불을 덮고 자나? 전에 보니 이불이 그처럼 험한 것 같지는 않던데."
하고 말했다. 그러자 단재는 벌컥 화를 내면서,
"벽초는 내가 미국 가는 것을 시샘하는 모양이오. 자기도 가고 싶겠지. 하지만 나는 외국 유학이 조금도 내키지 않아 승낙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행여나 가지나 않을까하여 그런 말까지 늘어놓고 다니는 구만. 졸장부 같으니!" 라고 말했다.
마침 모두들 더러운 이불에 관한 이야기는 단재의 할아버지뻘인 신백우로부터 그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얼마전 신백우가 움막집에 병든 팔순 노모를 모시고 가난에 허덕이는 단재와 이웃해 사는 딱한 날품팔이꾼 이야기를 듣고 쌀을 한 되 사들고 찾아갔다. 이때 단재가 함께 갔는데, 다른 물건을 사줄 돈이 있을 리 없어서 그냥 따라갔다가 병든 노인이 덮고 있는 이불을 보자 너무 안 스러웠다.
"저 이불로 병약한 노인이 어떻게 추운 겨울을 지내겠나. 내 이불하고 바꿨으면 좋겠는데…. 내 것은 제법 두툼하거든."
"그거야 단재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 않소."
그러나 그 이불은 신백우가 단재를 위하여 사준 것이라 실제로는 신백우의 허락이 필요하였다.
"내 이불은 대부가 해다 준 것이니, 해다 준 사람과 덮는 사람이 다를 뿐 아직 이불 임자는 내가 아니잖소."
"무슨 이야기인가? 이미 내 손을 떠난 이상 그것은 단재의 이불이니 단재가 알아서 하시오."
이렇게 하여 단재는 자신의 이불과 노인의 이불을 바꿀 수가 있었다. 단재는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에는 남의 이목을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누더기 이불을 덮고서도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단재였다.
::목욕탕에서 단재::
단재와 함께 목욕탕에 간 친구는 탈의실에서 단재를 보고 깜짝 놀랬다. 단재가 진홍색 여자 내의를 입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선생, 이게 웬 변괴요? 이건 여자 내의가 아닙니까? 원 이럴 수가…."
친구가 하도 기가 막혀 말을 못하고 있는데도, 단재는 별로 창피해하는 기색도 없이
"이게 여자거요? 그걸 내가 알 길이 있나. 일전에 어느 점포를 지나다가 보니 하도 빛깔이 곱기에 무심결에 그냥 사 입었을 뿐인데…." 하고는 유유히 욕탕으로 들어갔다.
오히려 그 친구 얼굴이 빨개진 것이었다. 탈의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 보기가 민망하여 단재를 따라 얼른 욕탕으로 들어가 버렸다.
::단재의 천재성::
단재가 대한매일신보에 근무하던 때였다. 일과를 마치고 삼청동의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갑작스런 소나기를 만나 길가 추녀 밑으로 비를 피하러 들어갔다. 한참 만에 주인이 대문 밖으로 나와 들어가 비를 피할 것을 권했다.
단재는 주인을 따라 그 집 사랑채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꽤 많은 책들이 쌓여 있어 단재의 눈길을 끌었다. 그중 한 책을 집어든 단재는 염치불구하고 그 다음날까지 책을 읽어 독파하고 주인에게 잘 간직해 두라는 말을 하고 신문사로 돌아왔다.
몇 달 뒤 그 집이 화재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재는 그 집으로 찾아갔다. 주인을 만나 지난 번 그책은 어찌되었는지를 묻자 주인은 화재와 함께 불타버렸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단재는 한편으로는 아쉬워하면서 그의 기억력을 토대로 책을 복원하기 시작하였는데 며칠 후 먼저 책과 똑같은 내용의 책이 단재에 의하여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은 단재의 천재성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단재의 유명한 세수법::
단재의 세수법은 단재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이야기이다.
단재는 세수할 때 허리와 고개를 굽히는 법이 없었다. 그냥 서서 손으로 물을 찍어 얼굴에 바르고 다시 물을 찍어 얼굴에 바르는 식이었다. 그렇게 세수를 하면 바닥과 옷이 온통 물에 젖어 버리곤 하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말들을 하였지만, 단재는 오히려
"온 젖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소. 나는 다만 고개를 숙이기가 싫을 따름이오." 라고 답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던 단재의 자존과 절개의 자세가 잘 드러난 면모였다.
::단재의 영어공부법::
중국 망명시절 단재는 김규식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독학으로 영어의 기본은 닦아 놓았으나 좀더 많은 공부를 위하여 김규식에게 청하였던 것이다.
김규식은 특히 발음 공부를 무척 까다롭게 가르쳤는데 참다못해 단재는 춘원에게로 갔다.
"춘원한테 영어를 배워야겠소. 발음은 쓸데없으니 뜻만 가르쳐 달라고 해도 그 사람이 꽤 까다롭게 그러는군."
이렇게 말하는 단재를 보고 이광수는 단재적 사고라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단재가 네이버(neighbour)라는 단어를 '네이그흐바우어'라고 읽자 변영만이 그중 묵음이 있어 그냥 네이버라고 발음하면 된다고 가르쳐도 단재는
"내가 왜 그걸 모르겠소? 그러나 그건 영국인의 어법일 뿐인데 내가 그것을 꼭 지킬 필요가 있겠소?" 하고는 여전히 '네이그흐바우어'라고 읽었다.
그리고, 영어를 읽으면서 '하여슬람'이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하였는데 그 까닭을 묻자
"영문이나 한문이나 글은 다 마찬가지 아니오." 하며 태연하게 '하여슬람'을 섞어 영어를 읽었다.
이 무렵에 배운 영어실력으로 단재는 에드워드 기본의 '로마제국흥망사', 토마스 카라일의 '영웅숭배론' 같은 책을 읽고 해석하였다고 하니 단재의 재능이 무척 뛰어났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단재와 일본음식::
중국 망명시절 단재가 한 친구와 함께 푸짐한 중국음식을 함께 하고 있을 때였다.
단재는 음식을 배달하는 소년에게 음식 맛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고 나서 물었다.
"그런데 이 고기는 무슨 고기이기에 이처럼 맛이 유별나지? 어디서 온 거니?"
"그 고기는 동양어라는 것으로, 일본에서 직접 가져온 희귀한 고기죠."
"뭐라고? 왜놈 음식이라고?"
그는 노발대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길로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 버렸다. 대접한 친구가 도리어 미안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할 정도였다.
토하고 나서야 단재도 친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왜놈 고기는 내 위장이 좀처럼 받지 않으니 별 수 없지 않은가."
::조카 향란과의 절연::
중국으로의 망명을 앞두고 임치정에게 맡기고 떠난 조카 향란의 결혼 문제로 단재는 위험스럽지만 다시 조국땅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아끼던 제자 김기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연락도 왔다.
단재는 향란이 수구파의 후손인 홍어길과의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향란은 숙부인 단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심하게 화가 난 단재는 향란과 혈육의 정을 끊는다며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서울 김기수의 집을 들러 하염없이 슬퍼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단재에게는 마지막 고국에서의 밤이었다.
::단재와 우응규::
베이징 시절 황해도 출신 우응규라는 청년이 단재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가난에 끼니를 굶는 스승을 보다 못해 변영만과 짜고 스승 몰래 스승이 앉는 자리 밑에 돈을 넣어 두었다. 그러나, 단재는 청소를 전혀 하지 않고 사는 터라 돈을 깔고 앉아 있으면서도 밥을 굶었다.
단재가 쓰는 방은 외양간과도 같았다. 온갖 쓰레기가 방안을 구석구석 누비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단재는 책 읽는 것에 푹 빠져있었다.
가끔 변영만이 "이봐, 단재. 돼지가 아닌 이상 어찌 이런 꼴로 방을 둔채 생활한단 말이오?" 하고 질책을 하면 그에 못이겨 비를 들고 청소를 한다.
그러다 돈을 발견하면 "나는 돈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돈이 남아있네."하며 호주머니에 돈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중국 신문에의 기고 중단::
중국에 있던 단재의 명성은 중국인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어 중국 유력지 '베이징일보'와 '중화보' 등에 논설을 싣게 되었다.
단재의 탁월한 문장 솜씨에 신문의 발행부수도 많이 늘어났고, 중국 언론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단재는 자신의 글을 한자라도 고치게 되면 그 신문에 글쓰기하는 것을 당장 그만두었다.
단재가 '베이징일보'에 보낸 원고 중에 '의(矣)'라는 토씨를 하나 빠뜨리고 발행하자 단재는 당장 집필을 거부하였다. 그 신문의 사장이 찾아와 사죄하였지만, 단재는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여 끝내 집필을 거부하였다.
::찢어버린 3·1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일어난 전국민적인 독립만세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도 남음이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소식은 단재에게도 들어가 단재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곧이어 단재는 크게 실망하고는 탄식하다 못해 "에잉!"하는 그 특유의 말투를 내던지며 독립선언서를 찢어버리고 말았다.
"불과 몇 년짜리 운동을 선언했군! 이 판에 평화 운동이 다 뭐하자는 거요?"
단재는 현재의 상황이 준비론이나 외교론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투쟁만이 유일한 독립의 길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승만을 반대하는 단재::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에서 단재는 미국에 들어앉아 위임통치나 청원하는 이승만을 국무총리와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에 대하여 격렬히 반대하였다.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 하질 않소! 그런데도 우리의 대표로 나설 수 있단 말이오?"
단재는 계속된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펼쳐나갔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단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회의장을 빠져나가려 하였다.
이때 문을 지키던 젊은이들이 이러는 단재를 막아섰다.
"못 나가십니다. 정부 조직이 끝나기 전에는 이 방에서 아무도 나갈 수 없습니다."
눈물로 만류하는 청년들의 눈에는 어느새 살기마저 감돌았다. 그만큼 정부 수립에의 열망은 비장했다.
단재 또한 처음의 뜻을 굽힐 줄 몰랐다. 청년들의 협박과 위협에 오히려 호통을 쳤다.
"우리에게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더냐? 대의밖에 더 있는가? 민족적 대의가 용납할 수 없다."
그래도 청년들이 비켜서지 않자, "차라리 나를 죽이라."하며 그들을 밀치고 퇴장해 버렸다.
이승만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임정의 노선에 대하여 단재는 끝없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후 '신대한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해방후 이승만 정권하에서 단재의 이름이 불리워지는 것이 금기시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김창숙과의 설전::
심산 김창숙은 단재보다 한 살위로 성균관 유생시절부터 함께 공부한 학생이고, 항일운동에서는 뜻을 함께 한 동지이고, 망명객사 북경의 서단패루 한세량 목사집의 단칸방 하숙생활에서는 한솥밥 식구로 1년여를 동거한 막역한 친구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신발을 밖에 벗어 놓지 않고 방안에 두어야 도둑을 맞지 않는데 단재는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아 신발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이회영의 집에 갈 때 맨발에 헝겁을 싸서 갔는데 이것을 본 김창숙이 새 신발을 사주었다.
이 신발을 집어 든 단재가 지나가는 말로 중국인에 대한 불평을 하였다.
"한심한 공자님! 어쩌자고 후세 교육을 도적질만 가르쳤는지, 에이, 망할 것들. 중국의 공자가 한국의 좀도적만큼은 교양이 없으니 이놈의 중국도 나라가 망할 것은 정한 이치지."
이 말을 들은 김창숙이 화를 벌컥 내며,
"이봐, 단재. 어쩌구 어째?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면 모두가 말인 줄 알아. 이 고약스런 인간이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공자 성현을 무지막지한 욕설로 홀대하다니, 너와 내가 다 같이 유림을 섬기고 공자 성현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보은의 인정을 그 따위 몰상식한 언행으로 능욕을 보이는 건가?"
"그래, 좋다. 심산이 죽을 때까지 라도 숭배한다는 공자가 제 후손들에게 도덕 윤리를 가장하여 음흉하기 짝이 없는 도적질만 가르친 것이지 무엇인가?"
"어허, 이것이 그래도 뉘우치지 못하고서."
"내가 뉘우칠 것이 무엇인가?"
"어허, 저 인간 같지도 않은 것이 성현을 봉변하고서도, 에잇 금수만도 못한 인간."
"우리 민족에게 공자보다 훨씬 훌륭한 성현이 없었나? 우리에게 따로이 언어가 없었나? 우리 문자도 일찍이 있었건만, 자기 나라 전통을 무시하고 성현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남의 전통을 제것인양 아끼고 보살피면서 정작 제것은 등한시 해온 결과가 무엇이냐? 제나라까지 강도질 당해 백성은 노예가 되고, 지식층은 중국까지 쫓겨와서 망국민된 탄식만 토로했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뉘우치지 못하는 네같이 어리석은 자들이 한국에 자손으로 있어, 독립은 고사하고 유학, 성현, 공자에 매달려 도무지 제정신을 못차리니, 어이구 분해라 원통해라, 어찌하여 우리 화랑도정신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 설전에 조용히 있던 이회영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두 분 동지 이제 그만하시오. 심산이 하는 말도 일리는 있소, 그러나 단재 하는 말도 모두 옳은 말이오. 중국에 정말 도적떼가 우굴대는 천지는 사실 아니오. 또한 그들은 부끄러운 줄을 모르오. 그러나 어떻게 하겠소. 우리가 민족해방운동의 큰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 내걸고 혈맹으로 뭉친 동지들인데 이깟 사소한 일로 싸워서야 되겠소? 서로 해로운 일이니 그만 화해하시오. 그래도 오늘 단재 말중에 많은 것을 얻었소. 고맙소."
이회영의 중재로 이 싸움은 일단락되었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 길을 가는 단재와 심산의 역사관과 가치관이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죽음앞에서도 친일과 비타협::
여순감옥에 갇힌 단재는 나날이 병이 깊어가 주위의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이를 보다 못해 친지들이 단재의 일가뻘 되는 한 부호를 설득하여 그의 보증아래 단재를 가출옥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병상에 누워있던 단재는 이를 듣고 고개를 저었다. 그 보증인이 당시 친일파로 알려져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위탁하는 것은 이제까지 지켜온 정신을 꺾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죽어서 고향으로::
단재가 여순감옥에서 서거한 이후 단재의 유해는 천안, 조치원, 청주를 거쳐 신백우의 집에 도착하였다.
평소 단재는
"내 죽거든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띄워 달라."고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해를 고국 땅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해서 고향땅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단재의 유해가 돌아오긴 하였지만 묘소허가도 받을 수가 없어서 난감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 단재의 친척 중에 면장이 있어 그의 묵인아래 암장을 할 수 있었다. 만해 한용운이 돌을 깎고, 오세창이 글씨를 새겨 이를 단재의 묘소 앞에 세울 수 있었다. 후에 일제가 이를 알고 당시 면장을 파면시키기도 하였다.
☞ 단재의 스승 이남규(李南珪)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珪)는 1855년 11월 3일 출생하시어 1907년 8월 19일 아들 충구(忠求)와 함께 일본군에게 사살되니 향년 53세이시다. 한말의 항일독립운동가로 본관은 한산(韓山)이요, 호가 수당(修堂) 또는 산좌(汕佐)이시며, 본명은 원팔(元八)이시고, 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생이다. 학문과 덕망이 높았으며 187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벼슬은 안동부관찰사, 중추원의관에 이르렀다. 1894년 6월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 무도함을 상소, 비난하였다. 1895년 영흥부사(永興府使) 시절에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를 보고는 일본에 대한 복수를 눈물로 상소하였다.
1907년 의병 민종식(閔宗植)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공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일본군에게 연행되어 온양(溫陽)까지 끌려가 아들 충구(忠求)와 함께 피살되었다. 충구(忠求)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승복(昇馥)과 창복(昶馥)이며 따님이 명복(明馥)인데 사위가 고령인 청전 신영호(靑田 申?浩:1902~1947)로 역시 항일독립운동가이시다. 단재공과 청전공은 12대 선조 신경문(申景汶)의 혈손(血孫)으로 24촌간이 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이남규선생 묘갈명(墓碣銘)
출처 : 수당집 부록
가선대부로 궁내부 특진관을 지낸 수당(修堂) 이공(李公)의 묘갈명 서문을 곁들임
대한제국 광무11년(1907) 정미 8월 19일 밤에 궁내부 특진관 수당 이공이 온양(溫陽)의 평촌(坪村)에서 순국(殉國)하였으니, 왜(倭)에 대한 항거가 강경하였기 때문이다. 공이 태어난 철종 을묘년(1855, 철종6) 11월 3일로부터 계산하면 향년(享年)은 53세가 된다. 이에 조야(朝野)가 모두 놀라서 진동하였다. 그 뒤 9월의 어느 날, 예산(禮山)의 한곡(閒谷) 모좌(某坐)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선조(先兆)를 따른 것이다.
공은 휘가 남규(南珪)이고 자가 원팔(元八)이며, 수당(修堂)은 호이다.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고려 말에 가정(稼亭) 곡(穀)과 목은(牧隱) 색(穡)이 있었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아계(鵝溪) 산해(山海)와 석루(石樓) 경전(慶全)이 있었는데 모두 그 문장과 벼슬로 사책(史冊)에 올라 있다. 그리고 그 뒤 몇 차례 전하여 귀호(龜湖) 수일(秀逸)에 이르렀는데 공에게는 곧 5대조가 된다. 증조 광교(廣敎)는 성균관 진사를 하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부 종병(宗秉)은 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아버지 호직(浩稙)은 동부 도사(東部都事)를 지내고 내부 협판(內部協辦)에 추증되었다. 외조부는 청송의 심중윤(沈重潤)이다.
공이 서울의 미동(尾洞)에서 태어날 때에 공의 아버지가 용(龍)을 사는 꿈을 꾸었다. 공은 벌써 약관의 나이에 경사(經史)와 제자(諸子)를 통달하였고 글을 읽다가 옛 사람들의 충의가 격렬한 곳에 이르면 문득 책을 덮고 눈물을 흘렸다. 공은 씨족(氏族)의 원류(源流)와 국조(國朝)의 장고(掌故 고사(故事)), 학통(學統)과 당론(黨論), 관방(關防)과 풍토(風土) 등에 대하여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이를 연구하여 해괄(該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뒤 고종 을해년(1875, 고종12)에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임오년(1882, 고종19)에는 문과에 올랐다. 그리하여 계미년에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벼슬길이 트여서 그 뒤 수십 년 동안에 홍문관 교리, 겸선전관, 서학 교수, 사간원 정언, 후영 군사마(後營軍司馬), 부수찬, 수찬, 사헌부의 장령과 지평, 부응교, 장악원 정, 사간, 공조 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첨지중추부사, 형조 참의, 우부승지, 영흥 부사(永興府使), 경연 부시강, 안동부 관찰사, 중추원 의관, 비서원 승, 함경남북도 안렴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의 품계에 이르러서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그 뒤 병오년(1906, 광무10)에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에 공이 예산(禮山)의 향려(鄕廬)에 있었는데, 이 때 공이 힘을 많이 써서 도와 주고 또한 그를 숨겨 주기도 하였다. 이 때 왜인에게 빌붙은 자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말하기를, “만일 이남규란 자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이 충청도가 잠잠할 날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왜인들이 이 말을 듣고는 공을 공주(公州)의 감옥에 가두었다가 순월(旬月) 만에 풀어주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서 느닷없이 왜인들이 백여 기(騎)의 군사들을 몰고 들이닥쳐서 공을 포박하려 하였다. 그러자 공이 꾸짖기를, “사대부(士大夫)를 죽일 수는 있을지언정 욕을 보여서는 안 된다.” 하고는, 마침내 가마를 타고 집을 나서 평촌(坪村)이란 곳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왜인들이 공에게 귀순(歸順)하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공이 계속하여 호통쳐서 이들을 꾸짖자 마침내 어지러운 칼날이 일제히 퍼부어졌다. 그런데 이 때 우리측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고 다만 아들 충구(忠求)와 두 종이 같이 있었는데, 이들이 몸으로 칼을 막으려고 하다가 모두 같이 해를 입고 말았다. 마침 그 종 가운데 하나가 칼을 맞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당시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또 같은 고장에 사는 유진원(兪鎭元)이란 이가 이 곳을 지나다가 시신(屍身)을 보고는 홀로 이를 지키고 있었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검은 구름이 몰려와서 공의 시신을 가려주었다고 한다. 공의 시신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안색이 늠연(凜然)하여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아,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겠다.
배위(配位) 정부인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채동석(蔡東奭)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곧 충구(忠求)로 통덕랑이며, 그리고 여남(餘男 서자(庶子))으로 동구(同求)가 있다. 충구의 두 아들은 승복(昇馥)과 창복(昶馥)이며 사위는 신영호(申嶸浩)이다.
유고(遺藁) 약간 권이 있는데, 승복씨가 이미 나에게 시켜서 유고의 편제(編制)를 교정토록 한 바 있다. 그리고 장차 이를 공간(公刊)하려고 하면서 지금 또 묘갈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왔다.
생각건대 공은 같은 시대의 인물들인 이봉조(李鳳藻 이건창(李建昌)), 김우림(金于霖 김택영(金澤榮)), 황운경(黃雲卿 황현(黃玹)) 같은 분들과 함께 서로 도의(道義)와 문사(文辭)로써 연마하였는데, 공은 그 중에서도 소장(疏章)을 더욱 잘하였고 명예와 절조가 한층 뛰어났다.
공은 일찍이 성재(性齋) 허전(許傳)을 사사(師事)하였다. 이는 그 학문이 성호(星湖) 이익(李瀷)으로부터 연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위로는 다시 저 도산(陶山)의 퇴계 선생(退溪先生)에게로 소급되는 것이라 하겠다. 문하에 출입한 제자들로는 신채호(申采浩)·이장직(李章稙)·강기선(姜驥善)·변영만(卞榮晩) 같은 분들이있었는데, 모두 문학으로 명성이 있었다.
공이 정사에 종사한 이래로 훌륭하고 이름난 행적이 많은데 모두 내외(內外)의 사서(史書)에 실려 있으므로 자세한 것은 여기서 생략하고, 다만 중요한 것들만을 특별히 기록해서 공의 묘소 앞에 높이 세우고자 하는바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문장은 가 태부와 같고 / 文章似賈傅
강직하기는 방형과 같아라 / ?淸似邦衡
백성을 다스림은 급장유를 닮았는데 / 吏治似長孺
고향으로 돌아옴은 도연명과 같더라 / 歸田似淵明
갇히어 고생함은 문산과 같았고 / 幽拘似文山
도적을 꾸짖음은 고경과 같았다네 / 罵賊似?卿
아, 이처럼 많은 미덕을 지녔으니 / 嗚呼持此衆?
저 하늘로 돌아가서 상제를 뵙는다면 / 歸謁帝京
그대가 왔느냐고 상제가 반기시리니 / 帝曰來汝
좋은 계책으로 잘 협찬해서 / 克贊弘猷
찌든 이 백성들을 다시 살려 주소서 / 蘇厥民萌
임자년(1972) 4월 16일에 문학박사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은 삼가 짓다.
[주D-001]가 태부 : 전한(前漢) 때 장사 태부(長沙太傅)를 지낸 가의(賈誼)를 이르는데, 문제(文帝)에게 올린 상소문이 유명하다.
[주D-002]방형 : 호전(胡銓)의 자이다. 호전은 남송(南宋) 때의 사람인데, 진회(秦檜)가 금(金)과의 화의를 주장하여 금 나라 사신이 강남 지방을 조유(詔諭)한다는 명분으로 임안(臨安)에 이르자, 호전이 글을 올려 진회와 손근(孫近) 및 금 나라 사신 왕륜(王倫) 세 사람을 목벨 것을 주장하여 조야를 진동시켰다.
[주D-003]급장유 : 전한(前漢) 때의 급암(汲?)으로, 장유(長孺)는 그의 자이다. 직간(直諫)으로 유명하며 동해 태수(東海太守)와 회양 태수(淮陽太守)로 나가 치적을 남겼다.
[주D-004]문산 : 송(宋) 나라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호이다. 원(元) 나라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붙잡혀서 대도(大都)로 끌려간 뒤 3년 간 옥살이하던 끝에 피살되었다.
[주D-005]고경 : 당(唐) 나라 사람 안고경(顔?卿)을 이른다. 안녹산(安祿山)의 반란 때 반군을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으나, 나중에 안녹산에게 붙잡혀서 그를 크게 꾸짖고 죽임을 당하였다.
출처 : 한국역사와 인물(韓國歷史와 人物) | 글쓴이 : pkeunm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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