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밤을 목포답사로 계획했다.
한국사 이해를 공부하면서 한국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고
강준만의 한국근대사 산책으로 스터디를 하고 있다.
1년하고 한달~~지금 10권중 8권째 두 꼭지를 남기고 있다.
대전과 함께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어 대전답사를 마치고 목포로의 근대산책에 나섰다.
말그대로 목포1박2일이다. 그것도 10월의 마지막을~~
목포의 산낙지와 신선한 회 그리고 신선한 꽃게살 비빔밥(전라남도 지정 별미집 1호)
잊을 수 없는 그 맛..목포에 가시면 꼬옥 드시길~~
예약시간보다 늦게 도착해 집안을 볼 수 없었던 이훈동정원(1950년대 이후 이훈동씨가 소유)
유달산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1930년대 일본인 우찌다니 만빼이가 만든 일본식 정원이다.
정원은 입구정원, 안뜰정원, 임천장원,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꽉 드러찬 나무들로 정원은 복잡했다. 나무는 일본종이 많고 모두 117종에 이른다.
유달산을 오르다 내려다본 이훈동정원
고대 일본인들은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신이 살고 있다고 믿고
이곳을 '아마츠 이와사케'(천국으로 가는 관문),
또는 '아마츠 이와쿠라'(천국의 자리)라고 불렀다.
그래서인지 유달산 자락의 바위아래에 호남에서 가장 큰 개인정원을 만들었나~흠....
오포대 - 선입포로 현종 10년(1669)에 제작되었다.
현재 이 오포는 현충사 박물관에 천자총통을 복제한 모형이다.
포탄없이 포를 쏘아 정오를 알리는 기능을 한 것으로 전쟁도구를 생활도구로 이용한 것이 특이하다.
역시나 이전의 조선식 포는 송도신사에 보관하다 (목포시 동명동 소재)
일본이 일제말 태평양전쟁때 공출해 갔다
목포의 눈물 - 유달산을 오르다 보니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온다.
이 비는 목포의 눈물로 돈을 많이 벌게 된 레코드판매점하던 분이 개인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살아있는 보석은 눈물이랍니다.
유달산에서 바라본 삼학도
1897년 목포항이 일본이들에 의해 개항되자 많은 상인들이 몰려오고 삼학도에도 사람이 들어가 살았다.
이 섬들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6.25직후 1954년부터이다.
목포항이 좁고 대형선박의 정박이 어려웠기 때문에 10,000톤급 이상의 선박을 정박시키고자
신항공사를 착수해 3년만에 삼학도는 육지가 됐다.
유달산에서 바라본 삼학도와 목포야경^^
목포시사 - 1890년 하정 여구형 등이 건립하여 유산정이라 부르며 문인들에게 시문을 가르치고
백일장 등을 주도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 한말 대학자 정만조가 재확장한 것으로
유산사로 개명하고, 1932년에 중수하여 1937년 목포시사를 발족하였다.
시사란 문사들이 서로 시문을 독려하고 자연과 시를 노래했던 풍류의 장소로,
목포시사는 시인묵객들의 단순한 모임을 넘어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유림의 문학결사단체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팔작지붕이다. 돌 기단위에 민흘림 원형기둥을 세웠다.
3.1운동탑 --1919년 3.1일 만세운동이후
4월 8일 목포시 주민의 만세참여자들의 정신을 기리고자 1989년 건립하였다.
구 목포 청년회관 --1930년대 전후한 목포의 청년운동, 민족운동의 보금자리 역할.
1934년 청년조선의 창간호에 소설가 박화성의 [헐어진 청년회관]이란 단편소설이
실렸다가 총독부로 부터 삭제당하고 2호를 내고 총독부로 부터 발행중지 당했다.
화강암 석조단층 건물로 출입구의 상단 반원아치부분을 제외하고는 특별할게 없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현 한국근대역사관
일종의 국책회사로 1910년부터 1926년까지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국유지가 된 농토를
일본 본토인들에게 농업 이민식으로 불하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했고,
이후에는 부동산 담보대부, 30년대 이후에는 공업건설부분에 대한 투자를 주로 진행.
현재 남아 있는 동양척식주식회 건물은 부산지점, 목포지점, 대전지점뿐이다.
목포지점은 1920년경에 세운것으로 사리원 지점과 함께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였다.
해군 목포해역방어사령부 예하 헌병대 건물로 사용되다가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목포지점의 경우 17곳의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둔
제1위의 지점으로 일제식민지 지배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1층 제1전시실은 사진으로 본 목포의 옛모습 80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 제2전시실은 일제의 침략사 및 조선왕조 최후의 모습 사진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목포 도로 원표 -- 1번 국도는 목포에서 서울을 지나 신의주까지이며,
2번 국도는 부산까지인데. 이 1,2번 국도의 출발점이 바로 목포이다.
1호선 구간은 1904년 부터 3년간 전구간에서 동시에 진행-->당시 조선의 길은 좁아서
일본의 전쟁준비물자와 군대 이동이 불편해 신작로를 건설하고 1호선을 서두른 이유이다.
구 일본 영사관 오르기전 - 일본 성들은 우리와 달리 저런 곡선으로~~
일본 영사관 -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900년 1월에 짓기 시작해서 12월에 완공하고
1907년까지 일본 영사관으로 사용. 1914년 목포부청사, 1974년부터 목포 시립도서관,
1990년부터 목포 문화원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비어있는 상태.
붉은 벽돌을 이용한 2층 르네상스 양식--일본의 건물 중 튀어나온 현관은 당시 위압감을 주기위한 것이었다.
일제 방공호-- 2차 세계대전당시 미군의 공습과 상륙에 대비해 한국인을 동원해 파놓은
인공동굴로 전체길이 82m 폭 3.3m, 높이 2m 출입구는 3개이다.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현 목포문화원
목포진지 - 목포진은 조선 왕조때 각 도의 여러 진에 붙은 종 4풍의 무관인 만호가
지휘 통솔했다 하여 만호진, 만호영, 만호청이라고도 불리었다.
현재 목포진 자리에 목포진성이 처음으로 구축된 것은 연산군 8년 -
호남읍지에는 성석축의 둘레를 215보 높이를 7철, 여첩의 둘레를 140보, 높이를 2척으로 기록
목포진은 근대적 행정, 군사제도으 개편요구에 따라 목포 개항 2년 전인 1895년(고종 32년)에 폐진되었다.
현재는 목포만호비와 만호동 일대 일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 등이 만호진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 깊은 내공에
대전의 근대와 목포의 근대~~ ㅎㅎ 목포에는 일본식 건물이 많이 남아있더라구요^^ 대전은 점점 사라져서 얼마 없는데... 아직 목포에는 좁은 길목과 근대건물들이 좀 있어요^^ 더 사라지기 전에 한번쯤... 가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어데서 강준만씨 책으로 스터디를 한대유? 나는 그렇게 쨍한 사람이 좋더라. 이것도 응,저것도 응하며(대부분은 묵묵부답이지요) 사람좋은척 하지만 한 시대를 비겁하게 살며 보신한 사람보다 그렇게 명쾌하게 드려내고 바람찬 벌판에서 칼 맞는 사람보면 굽신대고 싶더라구요.그게 글배워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의 의무이지...
귀를 대 보시와요^^ 소근소근~~ 강준만의 근대사산책은 여러 의견들을 모아 놓았지만 역시 우리는 약자의 시각이 맘에 와 닿드라구요^^제대로 공부 안하고 맨날 벼락치기로 해서리~ 잘 몰라요^^ 한달에 두번 하는데... 목요일에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