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 popular song 大衆歌謠
서양음악이 도입되던 시절부터 대중 사이에서 즐겨 불려온 세속적인 노래.
I. 개관
예술가곡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유행가라고도 한다. 예술가곡이 예술성과 심미성에 가치를 두는 데 반하여 대중가요는 감각적인 대중성 ·오락성 ·통속성 ·상업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술가곡을 제외한 가요 전반을 의미하나, 민요와는 구분된다. 한국에서의 대중가요는 서양음악의 수입과 더불어 시작된다. 즉 선교사들에 의하여 찬송가를 중심으로 한 서양음악이 들어오자(1885), 서양의 노래들이 번안되어 불리기 시작하였다.
1910년 학부(學部)에서 《보통교육창가집》을 발간하였는데, 거의가 1872년 일본에서 발간된 《소학창가집》의 곡들을 전재한 것들이었다. 이 시절 창가는 서양음악을 지칭하는 것이 통례로 인식되었다. 대중가요는 산업사회의 발달과 함께 매스컴의 급진적인 발달에 힘입어 지방적인 색채가 퇴색되면서 도시에서 지방으로 확산되는 특징이 생겼다. 그리고 노래의 발성 ·창법 ·리듬 ·음계 ·멜로디가 민감하게 변하고 장식음(꾸밈음)의 구사법이 변화무쌍하게 변천해도 그 나름대로 하나의 전통을 이어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II. 연혁
한국에서는 1885년 미국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종교사업과 교육사업(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을 시작하면서 찬송가의 보급과 더불어 ‘창가(唱歌)’라는 신식 노래가 등장하였다. 창가의 어원은 운문형태의 문학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노래부르기’를 말하는데, 초창기는 시형(詩型)이 다분히 일본의 것을 모방한 듯한 5 ·7 또는 7 ·5조 등의 음절을 기본으로 하는 신시조의 유행시대였다. 한문문화권(중국 ·일본 ·한국)에서 통속적인 유행가를 대중가요라고 지칭하는 것은 한국뿐이다.
이 당시 한국에서는 예술적인 가곡도 ‘가요’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었다. 1909년 민족음악의 기치를 내세우고 국악과 양악을 가르치던 유일한 민간학원 ‘조양구락부(朝陽俱樂部)’의 후신인 ‘조선정악전습소’ 출신 이상준(李尙俊)이 《조선속요집(朝鮮俗謠集)》 《신유행창가집》을 펴냈는데, 여기에는 일본창가와 유행가가 여러 곡 실려 있었으며, 일반대중에게 ‘유행소가(流行小歌)’라는 말이 익숙해진 것은 1914년 이후이다.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전시체제에 맞지 않는다 하여 종래의 퇴폐적인 유행가를 제한 ·금지시켰다.
그러나 일제가 군가 ·애국가요 ·국민가요라는 명칭을 붙여 획일정책으로 몰고 갔을 때, 유행가는 보다 더 대중적인 노래라고 해서 ‘대중가요’라는 새로운 명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순수음악에서는 유행가와 구별하기 위해 ‘예술가’ 또는 ‘예술가요’라고 구분하기 시작하였고, 최근에는 ‘가곡’으로 통칭된다. 대중가요는 양악기로 반주하는 경음악 형식의 가곡이므로 더욱 구분을 확실하게 고집했던 것이다.
III. 발전사
1925년 11월에 발매한 ‘조선소리판’이라는 레코드에 당시 유행했던 일본 유행가를 처음으로 한국말로 부른 노래 《시들은 방초》(原題는 船頭小唄)를 취입한 사람은 도월색(都月色)이었고, 《장한몽(長恨夢)》(原題는 金色夜叉)을 김산월(金山月)이 불렀다. 당시 판소리와 민요 등을 일본에 가서 취입한 사람들은 당대의 명창 ·명기들이었다. 도월색 ·김산월도 이런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가요를 전문으로 부르는 ‘가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요를 노래하는 본격적인 가수의 등장은 1930년대 이후이다. 가요음반이 대중의 기호물이 되면서 연극배우들 중에서 ‘막간무대’에 등장했던 인기배우들이 대거 가요곡을 취입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본격적인 가수가 등장하여 활약했던 1935~1936년까지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때 배우로서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전옥(全玉) ·복혜숙(卜惠淑) ·김선초(金仙草) ·김선영(金鮮英) ·남궁 선(南宮仙) ·강홍식(姜弘植) ·나품심(羅品心) ·강석연(姜石燕) ·이애리수(李愛利秀) ·윤심덕(尹心悳) ·김연실(金蓮實) 등이다. 1932년 신인가수 발굴경연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 고복수(高福壽)가 1933년 OK레코드사에 취입한 손목인(孫牧人) 곡의 《타향살이》 《사막의 한》(이상 孫牧人 작곡)이 히트하여 레코드 가수로서 성공한 첫번째 사람이었다.
순수한 창작가요는 1929년 김서정(金曙汀) 작곡인 《낙화유수》(이정숙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27년에 상영된 극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였다. 이 노래를 작곡한 김서정(본명 김영환)은 당시 영화 해설자(변사)로서 유명했던 사람이다. 그는 계속해서 《세 동무》 《강남 제비》 《봄노래》 등을 발표하여 인기가요로 손꼽히게 되었다. 1932년에는 전수린(全壽麟)이 《황성옛터》(이애리수 노래)를 발표하였으며, 이러한 가요의 계열이 한국적인 가요의 맥락을 이어왔다.
초창기의 창작가요는 대부분 신민요풍의 가요가 특징으로 나타났는데, 《오동나무》 《봄맞이》 《노들강변》 《능수버들》 《맹꽁이타령》 《대한팔경》 《노다지타령》 《피리소리》 《장기타령》 등은 널리 알려진 가요들이다. 1928~1936년 사이에 콜럼비아 ·빅타 ·포리돌 ·OK ·태평 ·시에론 ·리갈 등 각 레코드사들이 레코드 제작을 본격화하면서 1936년을 전후하여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축음기의 판매를 중심으로 레코드의 범주도 다양해졌다. 곧 판소리 ·민요 ·가곡 ·동요 ·극영화해설집 ·드라마 ·만담 ·경음악(주로 미국의 재즈 ·팝송 ·찬송가)과 서양 고전음악 등 다양해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대중가요가 레코드의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취입에서 제품까지는 대부분 일본에서 하였고, 서울에서의 취입과 프레스 등 일반 작업시설의 확장은 1940년 이후였다.
1931년 일본의 유행가 《술이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채규엽(蔡奎燁)이 한국말로 취입하여 히트하자, 일본가요의 인기곡은 대개 한국말로 취입되어 한국어판 일본의 엔카[演歌]가 판을 치게 되었다. 한국가요(창작가요)도 일본에서의 녹음과정에서 일본인이 편곡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 결과, 일본가요와 한국가요의 선율이 자연스럽게 접근하였으며, 더욱이 1930년대 말기에 이르러 일본말 상용이 강요된 시대의 영향으로 일본가요와 동질화되어 갔다. 한편, 각 레코드사의 문예부에서는 당시의 문필가들이 가사를 창작하였다. 이때 활약한 문필가들로는 김안서(金岸曙) ·이하윤(異河潤) ·이서구(李瑞求) ·이부풍(李扶風) ·박영호(朴英鎬) ·조명암(趙鳴岩) ·고려성 ·김능인(金陵人) ·김상화(金尙火) ·강사랑(姜史郞) ·왕평(王平) 등을 들 수 있다. 창작가사 이외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일본가요의 번안과 일본곡에 한국말 가사를 붙이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풍토에서 일본가요의 중심을 이룬 엔카풍[演歌風:독특한 일본음계 ·속요, 음계의 陰旋律과 陽旋律]의 가요곡을 작곡하면 히트하는 시대가 되었고, 1934년에는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 《연락선은 떠난다》 《망향초 사랑》 《코스모스 탄식》 《고향설》 등이 나왔다. 1933년 《봉자(峯子)의 노래》(채규엽 노래) 《어느 여급의 자살》 이후 대중가요의 가사는 사랑 ·이별 ·눈물 ·방랑 ·고향 그리고 현실도피와 같은 통속적인 감상주의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비록 가락이야 엔카풍이지만 나라 없는 민족의 슬픔을 대변해 주는 노래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1941년(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획일적인 정책하에서 일본군가만을 불러야 했던 한국가요의 암흑기로, 한국 청년의 출정을 미화한 노래 《아들의 혈서》(백년설 노래)를 매일 방송하기도 하였다. 8 ·15광복의 기쁨도 38선의 갈림으로 덮여지고 그 38선의 비보를 노래한 《가거라 38선》이라는 넋두리의 되풀이로 한국가요는 여전히 감상주의를 탈피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38선을 넘어온 실향민들은 《꿈에 본 내 고향》 《한 많은 대동강》 등을 애창하게 되었다.
왜색의 잔재를 없애고 주체성 있는 건전가요의 제작보급에 나섰던 서울중앙방송국에서는 1948년 건국 이후 《고향초》 《아내의 노래》 《목장의 노래》 등을 보급, 새로운 한국가요의 맥락을 찾아갔다. 미국의 팝송과 재즈의 기법이 한국가요에 도입되던 시절에는 현인(玄仁)의 노래 《신라의 달밤》이 공전의 히트곡이 되었다.
이 무렵에는 원시적인 레코드제작법에서도 새로운 가요가 많이 만들어졌다. 《명동야곡》 《고향만리》 《울어라 은방울》 《선죽교》 《백팔염주》 《저무는 충무로》 《비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등이 그것이다. 이때는 새 가요가 레코드보다 무대공연에서 더 많이 불리고 대중에게 애창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6 ·25전쟁으로 유명한 가요인들이 희생되었고 납북되기도 하였다.
《전우야 잘 자라》(박시춘 곡, 현인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하여 북진하는 국군과 더불어 전국에 널리 퍼졌고, 1 ·4후퇴 이후 실향민의 쓰라린 생활고의 현실은 《굳세어라 금순아》 《슈샤인 보이》 《이별의 부산정거장》 《단장의 미아리고개》 《추억의 40계단》 《물레방아 도는 내력》 《비내리는 호남선》 등에 표현되어 널리 애창되었다.
1957년 공보처에서 제정한 국민가요 중에서 널리 애창되어 건전가요로서 비교적 성공한 노래는 《소녀의 꿈》(손석우 곡) 《청춘목장》(송민영 곡) 《고향에 찾아와도》(이재호 곡) 《꽃 중의 꽃》(황문평 곡) 등이다. 또 1956년 방송드라마의 주제가 《청실홍실》이 크게 히트하자 주제가는 드라마의 정석처럼 되었고, 1955년 이후 한국영화가 성행하자 수많은 영화주제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까지 변함이 없으며, 가요가 히트해서 노래 제목대로 멜로드라마가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1960년대 전반까지 주제가로 성공한 노래로는 《오부자(五父子)의 노래》 《딸 칠형제》 《나 하나의 사랑》 《꿈은 사라지고》 《노란샤쓰의 사나이》 《빨간 마후라》 《카추샤의 노래》 《꿈이여 다시 한 번》 《호반의 벤치》 《산장의 여인》 《비극은 없다》 《맨발의 청춘》 《사랑이 메아리칠 때》 등이 있다.
주제가의 전성시대를 맞아 영화의 주인공들이 직접 주제가를 부르는 예도 많았다. 1955년경에는 세계적인 맘보리듬의 선풍이 한국에도 상륙하자 《아리랑맘보》 《도라지맘보》 《코리안맘보》 등 강렬한 리듬이 한국가요와 조화되어 갔고, 멜로디는 구태의연해도 계속해서 차차차 ·맘보 ·트위스트 등의 리듬은 날로 새로워져갔다.
이어 1960년대의 특징은 비틀즈음악의 영향과 미국의 팝송, 그리고 로큰롤 등이 젊은 층에 파고든 사실이었다. 즉 주한 미군계통에 종사하던 팝송가수들이 일반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특히 학사가수들의 출현은 이를 가속화시켰다. 최희준 ·박형준 ·위키 리 ·유주용 ·김상희 ·김수연 등이 이때에 활약하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남녀 보컬팀의 등장이다. 블루벨스 ·봉봉4중창단 ·자니브러더스 ·김시스터스 ·이시스터스 ·김치캐츠 등이 그것이다. 1962년 민간방송의 개국으로 전파매체의 혜택을 가요계가 제일 많이 받았다. 신인가수의 등용에서부터 인기가수 순위가 방송출연 빈도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시대가 되었다. 한편, 전파를 타기 시작한 복고조의 가요가 많아졌고, 다시 엔카조[演歌調]의 가요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즉 방송에 힘입어 이런 노래들이 레코드의 매출을 증가시켰고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와 더불어 일본 대중문화의 한국정착이 두드러지면서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와 같은 엔카조의 노래들이 대중에게 폭넓게 접근해갔다. 한편, 이탈리아의 칸초네에서 미국의 팝송 ·컨트리송 ·하드록 등이 젊은층의 열광적인 애호물이 되어갔다. 1970년대의 특징인 통기타와 청바지는 소위 ‘청년문화’라는 낱말을 낳게 할 만큼 외국가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살롱뮤직의 전성시대에 이르러 신시사이저(synthesizer)음악과 더불어 시대적인 첨단인 듯 대중가요가 활자매체의 후원을 받아 젊은 계층의 노래하는 송라이터들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송창식 ·윤형주 ·박인희 ·이필원 ·양희은 ·김민기 ·조영남 등의 시대가 된 것이다. 베트남전쟁을 전후해서 동남아시아와 멀리 유럽이나 미국 등지로 유능한 가수들의 해외진출이 늘어나 패티 김 ·윤복희 ·이연옥 ·곽순옥 ·김성옥 ·로라 성 등이 활약하였다.
1970년에 도쿄[東京] 세계가요제 입상《안개》(이봉조 곡, 정훈희 노래) 이후, 계속해서 그리스 ·칠레 등에 한국가요의 진출을 볼 수 있었다. 작곡가로는 이봉조 ·길옥윤 ·김강섭 ·김기웅 ·정민섭 등이 활약하였고, 박경희 ·정미조 ·김상희 ·혜은이 등이 입상하였다.
1977년 이후 광복 30여 년 만에 한국가요의 일본 상륙 등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이성애 ·이미자 ·김연자 ·허영란 ·남상규 ·문주란 ·정재은 ·남진 ·나훈아 등의 레코드 출판기록은 괄목할 만하다. 1978년부터 서울에서 개최하는 국제가요제 ·세계가요제 등은 세계 각국에서 16개국 이상이 참가하는 연례행사로까지 발전해갔다.
1980년 일본의 문화방송이 주최하는 아시아 5개국(일본 ·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에서 1명씩 참가하는 아시아뮤직포럼(Asia Music Forum)에 출연하였던 조용필(趙容弼)이 최고의 인기가수로 각광을 받은 뒤 그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가히 폭발적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일본의 중견가수 15명이 경쟁하다시피 음반을 출반하여 무려 수백만 장의 음반판매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1970년대 후반 이후, MBC-TV 주최로 매년 대학가요제가 열려 통속적 가요계에 신선한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곧 대학생들의 창작가요가 가요계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몫을 한 셈이다.
1980년대에 들어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발전하면서부터 방송전파를 통해 듣는 가요에서 보고 듣는 가요로, 가요의 개념이 크게 변화해갔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위 엑스(X)세대의 등장은 한국가요 70년사에 큰 변동을 일으켰다. 또한 1990년대의 가요는 LP레코드에서 콤팩트디스크(CD)로 발전했다. 그리고 가요의 영상화(映像化)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1930년대부터 발전했던 재래적인 가요는 이제 기성세대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서정가요로 뿌리를 내렸으며, 이런 가요를 소위 전통가요라고 고집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한편 미국의 랩(rap)과 자메이카의 토속적인 음악을 빌려온 레게(reggae)는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위성방송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도 이제 케이블 TV시대를 맞이하여 ‘신토불이’의 정신으로 국악가요라는 새로운 장르가 태동하고 있어 대중가요는 내일을 예측하기 어렵게 발전되고 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2
No. 3822 이창호
홈페이지 작성일자: 2005/01/01 19:12 |
조회수: 139 |
[현대] 대중가요 (한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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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大衆歌謠
대중에게 널리 불리는 노래의 총칭.
본래는 가요의 한 종류로서 세속적 내용과 형식을 가지며 민요·가곡과 분류되나 한정된 범주에 국한되지는 않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많은 변화를 보인다. 즉 현재 쓰이는 서양음계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민요가 대중가요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성악을 위한 가곡 역시 대중성을 획득하여 대중가요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단어가 가지는 의미로는 지역에 구애받지 않는 세속적 노래 전반을 가리키나 실제로는 국가 또는 민족의 범위와 일치하며, 따라서 영국·미국의 <팝송>과 프랑스의 <샹송>이 그 단어의 일반적 의미와는 달리 특정 국가의 특정한 노래를 가리키듯 대중가요 역시 한국의 대중적 가요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민중의 노래]
봉건적 굴레와 일제(日帝)의 압제에 이중적으로 시달리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서민 대중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는 주로 민요였다. 아리랑은 그 대표적인 곡으로 세마치의 가락을 가진 일종의 유행가인데, 오랫동안 애창되는 가운데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지방에 따라 가사와 선율에 차이가 생기고 각각 음악적·사상적·언어적 특징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서민의 애환과 피지배자의 설움을 노래한 점에 있어서는 모두 일치한다.
한편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 담겨진 민중들의 뜨거운 열의에도 불구하고 외세에 의해 동학농민운동이 무산된 19세기 말 기독교 포교와 함께 선교사들에 의해 찬송가가 보급되었다. 이로써 최초의 서양 음계(音階), 즉 평균율의 음계가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그 특징은 대중적이며, 음역(音域)이 좁고 리듬이 단순한 외에 곡조의 길이가 짧고 가락이 반복되는 것으로 학교의 교재용 노래, 신식군대의 군가와 함께 창가(唱歌)라 총칭되었다.
창가는 일본에서 쓰는 용어 그대로이긴 하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일본의 학교창가라는 개념을 초월하여 국가의 독립을 사수하고 쟁취하려는 진취적 기상에 넘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가운데 《애국가》 《학도가》 《국채보상가(國債報償歌)》 등 1910년 한일합방 이전의 노래는 다분히 애국적 계몽운동의 성격을 띠었으며, 합방 이후의 《독립군가》 《봉기가》 《압록강행진곡》 등은 그 무대를 만주로 하여 보다 전투적이고 저항적인 내용과 가락을 담았다.
만주·노령 지역의 독립군들 사이에서 불린 노래로는 창가와는 색다른 음계와 리듬을 가진 《스텐카 라진》 《출정가》 《기러기》 등의 러시아민요가 번안되어 불리기도 했다. 이와 같이 민족정신을 고무하는 창가가 늘어나자 일제는 철저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이른바 <불량창가(不良唱歌)>에 대응하기 위해 관제(官製) 창가집을 편찬케 했다. 이에 따라 애국적 창가는 표면상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교육적이거나 민속적인 노래가 만들어져 많은 수의 창가집이 출간되었다.
또한 일제의 문화정책에 의해 일본과 서양의 문물이 다량 도입되었는데, 《내 사랑 클레멘타인》이 들어온 것도 이 시기이며 1925년에는 일본축음기상회 조선레코드에 《시들은 방초》 《압록강노래》 《장한몽》 《이 풍진 세상》 등 염세적인 내용과 짙은 애상을 느끼게 하는 가락의 일본노래를 담아 발매했다.
1926년에는 현해탄에 투신자살한 윤심덕(尹心悳)의 《사(死)의 찬미》가 가요사상 최초의 히트곡으로 기록되었다. 이 노래는 이바노비치 작곡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직접 가사를 붙인 것으로 사회와 생(生)에 대해 극도의 염세적 자세로 일관, 좌절된 3·1운동 이후 1920년대의 우울한 사회상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이 노래의 히트는 그 때까지 부유층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왔던 레코드의 보급률을 크게 증가시켜 노래의 대중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유행가의 등장]
저항과 좌절로 점철되는 1930년을 전후하여 광복에까지 이르는 시기는, 일제의 교묘한 문화정책 속에 한국인의 한(恨)이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며 흥행을 위주로 한 유행가가 등장하여 가요의 주류를 이루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1929년 한국 최초의 창작가요 《낙화유수 (落花流水;뒤에 강남달로 개명)》가 발표되어 크게 히트했는데, 김서정(金曙汀)이 작곡하고 이정숙(李貞淑)이 부른 <임>을 주제로 한 노래로서, <봄>을 주제로 한 《봄노래를 부르자》 《세동무》 《강남제비》와 함께 식민지배하의 상황과 서민대중들의 희망을 표현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창가 대신 등장한 유행가는 연극무대의 막간(幕間)에 불리거나 활동사진의 반주음악·주제가로 불렸다. 이를 <막간가요>라 하는데 레코드가 일반적으로 보급되기 이전 대부분의 노래가 이 형태였다. 《황성옛터》 역시 막간가요로 전수린(全壽麟)이 작곡하고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단성사(團成社)에서 불렀다. 1932년에는 레코드로 발매되어 순식간에 5만 장이 팔렸다 하며, 일제는 한민족으로서의 자각을 선동하는 노래라 하여 발매금지를 시켰다. 이 노래는 본격적인 대중가요의 효시이자 불후의 명곡으로 손꼽힌다.
1935년을 전후하여 컬럼비아·빅터·OK레코드·태평레코드 등 레코드업계가 호황을 누리고 레코드의 보급과 함께 일본의 엔카[演歌]를 비롯 미국의 재즈·팝송이 대중사회 속에 파고 들었다. 이들 레코드업계는 대개 일본의 자본과 기술에 의해 운영되어 출반레코드 역시 엔카조(서양음계의 제4음과 제7음이 없는 음계;陰旋律)의 노래나 일본가요의 번안곡이 대종을 이루었다.
레코드사 전속가수도 등장했으며, 《술이란 눈물인가 한숨인가(1932)》를 비롯한 번안가요로 인기를 얻은 채규엽(蔡奎燁)은 최초의 직업가수로 불린다. 이 시기는 일제의 문화정책이 극성을 부리던 시대였으므로 일본노래의 번안이 오히려 장려되었으며, 이에 따라 자연히 한국가요에 엔카조의 요소가 스며들었다.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조한 신민요(新民謠)에 조차 일본풍의 2/4박자가 상당수 존재했고 일본의 신민요를 가사만 바꾸어 부른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부정적 영향을 극복하여, 한국인의 정서를 한국적 선율에 담고자 노력하고 또한 결실을 맺은 시기도 바로 이 1930∼40년대이다. 김교성(金敎聲)·김용환(金龍煥)·손목인(孫牧人)·김해송(金海松)·박시춘(朴是春)·이재호(李在鎬) 등의 작곡가가 활약했는데, 특히 김교성은 3박자의 리듬을 이용하여 민요를 현대풍으로 편곡, 한국적인 정취를 담은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가수로는 이난영(李蘭影)·고복수(高福壽)·남인수(南仁樹)·김정구(金貞九)·백년설(白年雪) 등이 있으며 이들은 각각 《목포의 눈물(1935)》 《타향살이(1934)》 《애수의 소야곡(1937)》 《눈물젖은 두만강(1938)》 《나그네 설움(1940)》 등 애수에 젖은 한탄조의 노래를 불러 삶의 기반을 빼앗긴 민족의 슬픔을 대변해 주었다. 이들 작곡가·가수가 활약한 1930년대는 가요의 황금기라 불린다.
[대중의 노래]
광복과 함께 찾아온 문화활동의 자유는 좌우익의 극단적 대립과 38선 분단으로 인해 실험적인 창작을 제대로 시도해 보지 못한채 제도권내의 틀 속으로 한정되어 버렸다. 왜색가요를 추방하고 주체성있는 건전가요를 보급한다는 기치 아래 《고향초》 《아내의 노래(1949)》와 같은 노래들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대중가요가 정치노선에 의해 의도적으로 유도됨으로써 적지 않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는데, 형식상의 왜색가요 추방운동과 무분별한 미국의 대중음악 수용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한편 광복의 기쁨으로 잠시 동안 명랑한 내용과 경쾌한 리듬을 담은 노래들이 6·25라는 민족적 비극을 맞이하여 또다시 비탄적 감상주의로 빠져들었다. 현인(玄仁)이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1952)》와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1954)》, 이해연(李海燕)이 부른 《단장의 미아리고개(1954)》가 6·25 당시와 그 이후 애창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의 물질적 지원과 문화적 침투가 두드러져 가요에 새로운 리듬, 즉 트위스트·맘보 등이 도입되는 한편, 전쟁으로 파괴된 레코드산업의 재건과 대중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대중에 대한 가요의 영향력이 한층 더 증가해 갔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른바 미8군 쇼단의 역할을 들 수 있는데, 최신의 서양음악을 한국에 소개함은 물론 방송국과 더불어 가수들의 양성과 출세 장소로서의 기능을 했다. 영화 역시 이 시기의 대중가요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1961)》 《빨간 마후라(1963)》 《맨발의 청춘(1963)》 등은 각각 동명(同名)의 영화주제가로 불려 주제가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특히 《맨발의 청춘》을 부른 최희준(崔喜準)은 학사(學士)가수로서 대중의 가수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비틀즈와 롤링스톤스의 노래가 인기를 끌며 로큰롤과 중창단을 유행시킨 1960년대는 서구적 음악과 복고풍의 유행가가 공존·경합하는 시기였다.
복고풍 가요의 선두주자는 이미자(李美子)로, 왜색가요라는 물의를 빚어 최근에 해금된 백영호(白英浩) 작곡의 《동백아가씨(1965)》를 불러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그 반면 미8군 쇼단에서 활약한 패티김은 서구적으로 세련된 멜로디에 한국적 정서를 담은 《사랑하는 마리아(1969)》 등의 노래로 인기를 끌었다. 이 두 여가수는 1989년 각각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동(同) 강당으로서는 최초의 대중음악 공연이었고, 이미자의 공연시에는 각 정당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노래운동]
1970년대의 청년문화라고 명명된 통기타·청바지문화가 대중문화로 확산되고 또한 그 역방향의 작용이 중첩되면서, 노래를 단순한 가락에 의한 개인정서의 전달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적 체험의 전달이라는 운동의 방향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 경향은 주로 종교계와 몇몇 작곡가·가수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김민기(金敏基)·김지하(金芝河)·양희은(楊姬銀)·송창식(宋昌植) 등이 대표적이었다.
김민기 작곡 양희은 노래의 《아침이슬(1970)》, 송창식 작곡 김민기 노래의 《내나라 내겨레》는 서정성과 이념성을 동시에 획득하여 한국가요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곡으로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래의 이념성 측면만을 강조하여 점차 투쟁 일변도로 치우치는 경향이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서정성만을 노래의 생명으로 간주하는 경향 또한 생겨 대중가요의 양극화현상을 초래했다.
즉 대중성을 획득하여 제도권 내의 방송매체를 통해 애창되는 노래와 지나친 의식 위주의 내용과 가락을 담아 대중성 획득에 실패하고 이른바 운동권가요로 국한된 노래가 그것이다. 이 양극화는 현재 대중가요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자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다.
대중가요는 현실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화 중 하나이다. 그와 동시에 어떤 문화형식보다도 왕성하다고 할 수 있는 대중성을 통하여 현실이 나아갈 길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매체이기도 하다. 또한 봉건시대와 일제강점기,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불려진 대중가요를 분석해 볼 때 이 2가지 요소, 즉 대중성과 현실성을 갖춘 노래만이 서민대중의 가슴 속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렇지 못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친 경우 일시적인 유행이나 한정된 계층만의 노래로 그쳤다는 사실은 이후의 대중가요가 발전해가는 데 필요한 점을 시사해 준다.
[군중가요]
북한의 대중가요에 해당하는 것으로 군중가요가 있다. 주민들이 합창이나 독창의 형태로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지며, 당(黨)의 정책가요와 서정가요를 통틀어 일컫는다. 내용은 이른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대중을 공산주의적 혁명정신으로 교양개조하는 이론상 원칙하에 체제의 찬양과 노역 선동, 호전의식 고취 등을 주로 담는다. 대표적인 곡으로 《전사(戰士)의 염원》 《2백일전투의 노래》 《김정일화(金正日花)》 등이 있다. 또한 집단적 학습 형식을 취하는 가요보급으로 인해 가요의 선호도 및 향유도가 거의 평준화되어 있는 특징을 갖는다.
<석광인>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No. 3823 이창호
홈페이지 작성일자: 2005/01/01 19:12 |
조회수: 102 |
[현대] 대중가요 (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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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 大衆歌謠
서양음악이 전해진 일제강점기부터 대중 사이에서 널리 불리는 노래 (→ 색인 : 한국음악).
유행가(流行歌)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민요가 그 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대중과 밀착하여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민요·잡가·가곡·판소리와는 양식적으로 전혀 다른 것으로서 일본을 통한 서양음악의 유입에서 발생된 것이다. 대중가요는 가곡류의 고급예술음악과는 구별되는 대중성과 상업성을 강하게 띠는 음악 장르이므로 대중매체의 발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대중가요가 시작된 1920년대는 일본 음악산업이 한국에 진출한 때였고, 경성방송국의 개설도 대중가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방송국이 개설되었다고는 하나 당시 한국에는 축음기와 라디오 같은 매체가 잘 보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가수들이 있는 유랑극단이나 약장수들이 축음기를 틀어놓은 장터, 또는 축음기나 라디오를 갖고 있는 부잣집 마당에서 듣는 노래의 형태로 대중가요는 보급되었다.
또 그리스도교의 보급으로 찬송가가 불리면서 대중가요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의 대중가요에서는 일본 창가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당시에 유행했던 대중가요는 신파극 〈장한몽〉에 불렸던 주제가인데 신파극 〈장한몽〉은 일본소설을 번안·각색한 것이었고, 주제가 또한 일본 창가의 영향을 직접 받은 노래이기도 하다. 그밖에 일본 창가의 영향을 받은 대중가요로는 〈희망가〉·〈카츄사〉·〈시들은 방초〉 등이 있다.
본격적인 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은 윤심덕(尹心德)이 최초의 대중가요 음반 〈사(死)의 찬미(讚美)〉 를 내면서부터이다. 이 곡은 〈다뉴브 강의 푸른 물결〉이라는 곡에 윤심덕 자신이 가사를 붙여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른 노래이다. 또한 이 곡은 윤심덕이 일본에서 음반을 취입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우진과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윤심덕의 음반 취입은 대중가요가 대중매체를 중요한 전달방식으로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 이 노래는 가사에서 보여주듯이 대중가요가 슬픔·이별·죽음·절망 등의 개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이후 대중가요 가사의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뒤 1927년 김영환(金永煥)은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 〈낙화유수〉를 발표했다.
1932년 음반으로 나온 〈황성옛터〉는 전수린(全壽麟) 작곡, 왕평(王平) 작사,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노래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중가요 역시 일본식 음 구조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일본가요는 일본의 5음음계인 요나누키 음계와 미야코 음계에 서양식 4박자 계통인 트롯으로 결합된 엔카[演歌]인데, 이것이 이른바 뽕짝의 원류이다.
일본가요는 〈장한몽〉처럼 직접 한국에 들어와 유행되기도 했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의 작곡가가 지은 노래에서도 일본가요의 음 구조를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중가요는 일본식 가요와 서양음악의 정서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중가요는 멜로디의 퇴영성과 가사의 절망적인 정서가 결합되어 대중들을 현혹하여 객관적인 현실 직시나 미래지향의 건전한 삶을 가질 수 없게 하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8·15해방과 함께 밀어닥친 미국문화의 압도적인 영향 속에서 한국의 대중가요는 일제강점기에 뿌리내린 왜색가요와 미국 대중음악을 모방한 서구색 가요의 두 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서구색 가요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을 위해 공연하던 미8군 출신의 대중음악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두 흐름은 1970년대말까지 가요계의 주도권을 번갈아 쥐며 한국 대중가요의 주된 흐름을 이루게 되다가 차츰 서구 모방의 대중가요가 주류를 이루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청소년층이 대중가요의 주된 수용층으로 등장하면서 한국 대중가요는 청소년 취향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전반적으로 발라드풍 가요와 댄스 가요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트롯 가요 역시 과거의 애상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경쾌한 댄스 리듬과 결합하는 양식을 보이게 되었고 1970년대 이후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대중가요는 노래 중심에서 가수의 용모와 율동을 중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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