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산리 고분군에 들어서는 입구. 실제 고분은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면서 천장이 갈라지고 바닥이 기울어 영구폐쇄하였습니다. 그 대신 모형 전시관을 만들어서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송산리 5호 고분. 돌로 쌓았습니다. 할석을 이용하여 벽을 쌓고 바닥에는 돌을 깔지 않고 배수로를 설치하였습니다. 송산리 5호 고분은 1932년 공주고보 교사인 가루베 지온이 발굴하였습니다. 거의 약탈 수준에 가까운 발굴이었다고 학계는 말합니다.
5호분 천정은 궁륭형(돔식)으로 만들었습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터널식(아치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할석으로 이런 천장을 만들려면 고도의 건축기술이 필요합니다. 돌로 묘실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무덤을 '굴식 돌방무덤'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한자어로는 횡혈식석실분(橫血式石室墳)이라고 합니다. 국사 시험에도 종종 출제가 되지요.
6호분. 이 고분 역시 가루베 지온이 발굴하였는데 여기서 발굴된 유물은 없습니다. 가루베 지온은 발굴 당시 이미 도굴 당하여 유적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학계에서는 이런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 가루베 지온이라는 자가 발굴한 공주 부근의 고분이 수 백기에 달한다고 하니 어안이벙벙합니다.
6호분에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벽에는 등감이라는 등잔을 놓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실제로 여기에 불을 켜서 묘실 안의 산소를 소진시켜 시신의 부패를 늦추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관대는 남북으로 방향을 잡고 있고, 널길(연도)은 남쪽에서 시작됩니다. 정면에 보이는 것이 북방 현무가 그려진 자국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그림은 탈색이 되어 볼 수가 없고, 그림을 그리기 전에 벽면의 요철을 없애기 위하여 점토로 바탕 작업을 한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오수전이라는 중국의 동전에 새겨진 문양을 본떠서 만든 벽돌. 수는 무게의 단위입니다. 1수는 기장 알 100개 정도의 무게를 나타냅니다. 이 무늬는 다섯 오(五)자의 고형입니다.
벽 중간에 가창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관을 놓은 자리가 동쪽 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면 합장을 하려다 못하고 단장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동쪽에 놓인 것으로 보아 관의 주인공은 남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묘실의 주인이 무령왕의 전대 왕인 동성왕이 아니었을까 하는 학설이 있습니다. 또 한 편으로는 무령왕의 또 다른 왕비였을 것이다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 만큼 이 묘의 격이 높다는 뜻입니다.
천장은 5호분과 달리 궁륭식이 아닌 터널식으로 축조되어 있습니다.
내부에서 바라본 널길. 널길 위로 주작을 그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채색 흔적이 완전히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등감 아래에 적힌 저 글씨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설마 백제시대의 낙서는 아니겠지요. 저런 버릇이 외국에 나가 남의 나라 유물에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집에서 새는 쪽박이 밖에서도 새기 마렵입니다.
여기가 무령왕릉 발견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놓은 곳입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널길을 모방하여 만들었습니다.
처음 무령왕릉을 발견하였을 때 내부 모습입니다. 앞 널길 가운데 도자기와 그릇이 흐트러져 있고 중간에 왕과 왕비의 묘지석이 놓여 있습니다. 묘지석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중국의 동전인 오수전 꾸러미입니다. 그 뒤에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가 있습니다. 발견 당시 진묘수의 뒷다리 하나가 부러져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요. 답사 때 잘 들으면 해답이 나옵니다.
이제 묘실을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사진 위쪽이 무령왕의 관이 놓여 있던 자리이고, 아래쪽이 왕비의 관이 놓인 자리입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무령왕릉은 도굴 당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데 유물들이 왜 저렇게 흐트러져 있을까요?
좀 더 거까이서 살펴보겠습니다. 왕의 관꾸미개와, 귀걸이, 금동신발, 머리받침과 발받침 등이 눈에 먼저 들어옵니다. 왕비 자리에는 역시 관꾸미개와 귀걸이,청동거울 등이 보입니다.
공주박물관 소장 국보 13종 가운데 이곳에서 출토된 것이 12종에 이릅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국보 유물은 모두 12종 16점입니다.
초등학생인 듯한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와서 유물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때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질문한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가면 똑 같은 질문을 해 볼 작정입니다.
뒤에서 본 무령왕릉 묘실과 널길. 여기서 16점의 국보 유물이 나왔다는 것이 언뜻 믿기지 않습니다. 이 무령왕릉의 발굴은 그야말로 그 동안 낮게 평가되어 왔던 백제 문화에 대한 인식을 일거에 뒤바꾼 쾌거였습니다. 백제의 문화가 당당히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무령왕릉 입구에 왔습니다.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은 같은 양식으로 축조된 무덤입니다. 백제 왕릉급 고분 중에서도 오직 이 두 기만이 '굴식벽돌무덤'입니다. 어려운 한자어로는 '횡혈식전축분'이라 합니다. 다른 고분들은 대부분 '굴식돌방무덤'입니다.
묘실에서 본 널길. 삿자리깔음으로 바닥을 깔았습니다. 널길의 높이가 5호분보다 많이 높습니다. 6호분과 비슷한데 다만 벽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등감(등잔을 넣어 두는 감실) 등을 보면 세세한 곳까지 손이 많이 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무령왕릉 천장. 터널식으로 축조하였습니다.. 벽돌을 사용하여 이렇게 천장을 마감하려면 벽돌의 크기와 모양을 치밀하게 계산하여야 합니다. 공력이 많이 드는 건축법입니다. 백제 왕릉 가운데 이렇게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조성된 것은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밖에 없습니다.
전시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유물은 108종 4,600여 점에 이릅니다. 주요한 유물을 소개하고 무덤 축조 과정을 설명합니다.
무령왕릉 출토 청동제수대경. 위의 청동거울 세 개 모두 무령왕릉 묘실에서 발견되어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거울 주위에 띠를 두르듯이 신수(신성한 짐승)들은 새겨 넣었다고 수대경(獸帶鏡)이라고 부릅니다.
왈릉 축조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터널식 천장은 이와 같이 나무로 틀을 만들어 놓고 돌을 올린 다음 나무를 제거하는 공법을 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백제왕과 왕비의 평상복. 어떻게 고증을 하였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모형전시관을 나와서 이제 고분군으로 올라섭니다.
고분들이 아주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만나는 고분이 6호분입니다. 6호분 역시 영구패쇄 조치되었습니다.
6호분 위로 5호분이 있습니다.
5호분 위에 무령왕릉이 있습니다. 송산리 7호 고분인 셈입니다.
무령왕릉 위로 1~4호분이 있습니다. 이 고분들은 일찌감치 도굴을 당하여 묘지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
위에서 내려다 본 송산리 고분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송산리 고분군이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을 알리는 팻말이 있습니다.
주차장으로 오는 길에 웅진백제역사관이 있습니다. 잠시 들러서 웅진시대 백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더운 여름에 고분군을 한 바퀴 돌면서 생긴 열독을 식힐 수가 있어서 좋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4D 영상관도 있습니다. 12~3분 정도 상영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