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글을 쓰려니 귀경 길에 천안 역에서 본 집회 광경이 먼저 떠오른다.
'○○농민회'라고 쓰여진 플랜카드를 붙인 트럭 앞에 확성기를 든 청년들이 일렬횡대로 서 있고, 역 앞 광장에는 젊은이 수 십여 명이 신문을 깔고 앉아 연설을 경청하고 있었다. 무슨 정치집회쯤으로 여겼는데, 알고 보니 이들은 막 10여 일의 농활(농촌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경 길에 오르는 서울의 대학생들이었다. 농활 보고대회를 역 광장에서 치르는 이색적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셈이다.
햇볕에 타 구리 빛이 된, 다소 지쳐 보이나 눈빛만은 아직 형형한 학생들의 얼굴에서 문득「상록수」의 '박동혁'을 느낀 것은 그 때 필자가 「상록수」의 무대인 당진의 부곡리 마을에서 발길을 돌려 나오는 중이었기 때문일까. 원한다면 얼마든지 개인의 유흥을 위해 탕진할 수도 있는 것이 대학가의 기나긴 여름방학인데, 그것을 마다하고 농부의 땀을 몸소 흘려 보기로 계획한 학생들의 모습은 아무래도 신선할 수밖에 없다.
"연애를 하는 데 소모되는 정력이나 결혼생활을 하느라고 또는 개인의 향락을 위해서 허비되는 시간을 온통 우리 사업(농촌계몽사업)에다 바치고 싶어요" 채영신이 청석골에서 계몽운동을 하다가 한곡리를 방문하여 박동혁에게 들려주던 대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는 순간이다.
신문사 주최 학생 계몽대 행사장에서 우연히 만난 채영신과 박동혁이 운명적으로 서로에게 이끌리면서 장편 「상록수」는 시작된다. 그러나 결혼은 각자 활동하는 마을에서 농촌운동을 정착시킨 후에 하자고 미뤄둘 만큼 계몽운동이라는 대의를 우선시 했고, 일신의 영욕은 뒷전이었다.
채영신은 당시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던 수원 반월의 최용신을 모델로 했고, 박동혁은 심훈의 장조카 심재영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1930년 경성농고를 졸업한 심재영은 농촌운동에 뜻을 품고, 부곡리에 뿌리를 내리는 데 그가 만든 '공동경작회'가 바로 상록수의 '농우회'의 모델인 셈이다. 부곡리에 가보니, 심재영은 작년에 작고했으나 그의 미망인이 아직 생존해 있었다.
당진 시내에서 아산만 쪽으로 계속 달리다 보면 아산만을 한 등성이 너머에 둔 송악면 부곡리 마을을 만날 수 있다. 국도 옆길로 난,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큼의 농로 어귀에 '필경사(筆耕舍)'라고 쓰인 안내판 하나가 쓸쓸히 서 있다. '붓으로 밭을 가는 집' 이라는 '필경사'의 숨은 내력을 모르는지, 아니면 지역 사회에 무관심해서인지, 필자를 거기까지 태워다 준 택시 기사는 얼토당토않게 필경사를 '절'로 알고 있었다. '사(舍)'를 절 '사(寺)'로 알고 있었던 모양.
부곡리는 논둑 길을 사이에 두고 약 70여 호의 농가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한 가운데 언덕에 부곡교회당-심훈이 쓴 「조선의 영웅」이라는 글을 보면 '우리 집과 등성이 하나를 격한 야학 당에서 종치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위치 상으로 보아, 그 옛 야학당이 오늘날의 부곡교회가 아닐까 싶다-의 흰 건물이 이채로운데, 언덕을 내려와 옆길로 돌면 산사에 은둔한 선비의 모습 같은 '필경사' 기와집이 그제야 숨은 얼굴을 드러낸다.
심훈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그의 말년인 1932년(32세)이다. 당시 소설가이자, 감독이자, 미남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극작가로도 인기가 높았던 심훈의 낙향은 그의 개인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학사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행보였다. "내려오셔서 작품이나 마음껏 쓰시라"는 조카 심재영의 권유도 작용했겠지만 보다 중요한 동기는 따로 있었던 듯하다.
'이기적인 고독한 생활을 영위하려는 것도 아니요, 또한 중세기적인 농촌에 아취가 생겨서 현실을 도피하려고 필경사 속에다가 청춘을 감금시킨 것도 아니다. 다만… 무슨 계획을 꾸미다가 잡혀가서 한 10년 독방 생활을 하는 셈만 치고, 도회의 유혹과 소위 문화지대를 벗어나 다시금 일개의 문학청년으로 돌아가려 것이다.
-「필경사잡기」중에서
그러니까 심훈의 부곡리 행은 그간의 다채로웠던 이력에 한 획을 긋고, 창작에만 전념코자 하는 결연한 각오에서 실행된 것이었다. 장편「영원의 미소」,「직녀성」, 단편「황공의 최후」가 이곳에서 쓰여졌으며, 「직녀성」의 고료를 받아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 '필경사'였고, 이 필경사에서 저 유명한 「상록수」가 탄생한 것이다.
2.
부곡리는 심훈의 고향이 아니다. 심훈이 태어난 곳은 지금의 서울 노량진 수도국 자리, 흑석동(黑石: 검은돌) 중앙대 부근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것은 본적지 주소가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흑석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으킨 착오가 아닌가 한다. 부친은 3천 석 정도의 논밭을 갖고 시골 당진에서 추수를 거두어 올리던 청송 심씨 상정(相廷). 심훈은 그의 삼남일녀 중 막내아들이었다.
그래서 애명도 '삼보'였다(심훈과 고등학교 동창인 윤석중에 의하면, 일보 이보 삼보를 이루는 심씨 3형제는 서울 장안의 명물이었다고 한다. 이광수의 「무정」에 나오는 기자 신우선의 모델로 알려진 심우섭은 그의 큰형이고, 둘째형인 설송 심명섭은 목사였다). 심훈의 본명은 대섭, 훈(薰)이라는 아호는 영화소설 「탈춤」을 쓰면서 따로 지은 것인데, ‘심(沈)은 본시 <잠길 침>이니 침착(沈着)을 의미하고, <훈>은 정열과 혁명을 상징하는 듯도 하여’ 지었다는 흥미로운 내력을 갖고 있다.
여러 기록들을 참조할 때, 심훈은 감성적, 즉흥적, 정열적인 기질이 강한 낭만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던 인물이다. 당대의 혁명가들과 조우했는가 하면 한때 카프의 창립 멤버였다가 이탈하기도 했고, 최승희 등 여러 신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는가 하면, 영화에 열중하기도 했으며, 그러다가 갑자기 그 모든 도시적인 것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농촌으로 낙향하는 등의 행로가 어쩌면 그러한 기질 속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심훈의 일생에 맨 처음으로 크나큰 전기가 된 사건이 있으니, 바로 3·1운동이다. 당시 심훈은 경성제일고보(지금의 경기중고교) 3학년생이었는데 만세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여의 옥고를 치르게 되며, 이로 인해 학교에서마저 제적당한 것이다.
어머니 !
오늘 아침에 고의 적삼 차입해 주신 것을 받고서야 제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잠시도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던 막내둥이의 생사를 한달 동안이나 아득히 아실 길 없으셨으니 그 동안에 오죽이나 애를 태우셨습니까 ?
그러하오나 저는 이곳까지 굴러오는 동안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고생을 겪었건만 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큰집에 와서 지냅니다. 고랑을 차고 용수를 썼을 망정 난생처음 자동차에다 보호순사를 앉히고 거들먹거리며 남산 밑에서 무학재 밑까지 내려 긁는 맛이란 바로 개선문으로 들어가는 듯 하였습니다……
이 글은 심훈이 감옥에서 쓴「어머님께 드리는 글월」로, 그 일부가 중학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심훈이 발표한 글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어린' 글인 셈이다. 그러나 18세 소년의 글치고는 상당한 솜씨여서, 이미 이때부터 작가로서의 문재를 충분히 보여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일제의 어두운 그늘 속에 자신을 묶어 두기에는 열혈청년이자 자유주의자인 그의 기백과 피는 너무나 뜨거웠다. 청춘을 짓누르는 일제라는 큰 적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새로운 출구를 찾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출옥 후 심훈이 곧바로 중국 망명길을 떠났던 것은 자유주의자의 운명적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때부터 심훈은 안경을 썼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때 썼던 안경이 미국의 유명 배우가 썼다는 로이드 안경이어서, 나중에 영화계에 뛰어든 후 '로이드'가 별명처럼 따라다녔다고 한다.
1923년 귀국할 때까지 심훈은 3년여 정도 중국 등지에 머물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이동녕, 이시영, 신채호뿐만 아니라, 여운형, 박헌영 등과도 교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여운형과는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한 후 그의 배려로 심훈은 「영원의 미소」와 「직녀성」을 이 신문에 연재할 수 있었고, 또 심훈의 장례식에 여운형이 참가하여 심훈의 절필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울면서 낭송했다고 한다.
「R씨의 초상」, 「박군의 얼굴」등에서도 당시 심훈의 교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중국의 지강 대학에 적을 두며 '극문학'을 공부했다는 것과 함께 '심훈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최원식 교수에 의하면 당시 심훈은 '중도좌파'적 사상에 기울어 있었다는 것.
이것은 귀국 후, 당시 신간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진보적 민족주의자 벽초 홍명희와의 깊은 교분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영원의 미소」,「상록수」,「직녀성」의 서문을 모두 홍명희가 써 줬다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귀국 후 동아일보에 입사한 그는 극문회, 염군사에 참여하는데 1925년 염군사와 파스큘라가 합쳐져서 '카프'가 생겨날 때에는 그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한편, 심훈은 영화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미남형으로 1925년에 일본작가 미기홍엽(尾崎紅葉)의 「금색야차(金色夜叉)」를 조일제가 「장한몽」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할 때 이수일의 대역을 맡은 경험이 있다.
그 이듬해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드는데, 「탈춤」은 그날 그날의 소설장면을 삽화 대신에 나운규, 신일선, 김정숙 같은 배우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싣는 영상소설이었다. 영화「먼동이 틀 때」는 그가 원작을 쓰고 각색·감독까지 맡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초창기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아리랑」다음 가는 명작으로 평가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작품의 원래 제목은 「어둠에서 어둠으로」였는데, 그것이 겨레의 비운을 암시한다고 검열당국이 트집을 잡자, 심훈은 심사가 뒤틀려 정반대의 제목으로 바꿨다는 후문이 있다(그가 영화공부를 하러 일본에 가 있을 때 일본 영화 「춘희」에 단역으로 출연, '일본영화에 나간 최초의 한국인' 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일화 중의 하나다).
심훈은 「상록수」를 집필한 후에 그것을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강흥식, 심영, 윤봉춘 등의 배우로 출연진까지 짰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심훈이 이렇게까지 영화에 사로잡힌 이유는 뭘까. 아마도 영화의 매력에 대해 일찍 눈을 뜬 그는 영화의 힘을 빌어 당대의 현실을 표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효과가 훨씬 직접적이다. 읽고 생각하고 상상해야 하는 소설과는 달리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바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고, 관객을 움직일 수 있다.
요즘, 소위 '정서적 장르 퓨전' 현상이라고까지 불리면서 영화와 문학이 가까워지고 영화적 글쓰기마저 유행하고 있는데, 심훈은 이 점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일까.
당시 카프의 소장 이론가로, 문학 평론가이자 시인이며 동시에 단역 배우로 주목받았던 임화 역시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는데, 물론 영화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는 달랐지만, 모두 문학의 공리적 효용성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심훈이 평소 영화로 제작해 보리라 별렀던 소설은 최학송의 「홍염(紅焰)」이었다. 「홍염」은 프로문학적 성격이 강한 소설로 간도에서 중국인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지주를 살해하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그가 「홍염」을 영화로 구상하던 당시 그의 문학은 계속 시련을 맞고 있었는데, 1928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후 (심훈은 1926년에 철필구락부 사건으로 동아일보를 그만 둔 상태였다) 소설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했으나 검열에 의해 중단되었고, 다시「불사조」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이 역시 정지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방의 애인」은 그가 중국에 체류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쓴 소설이었고, 「불사조」는 국내 무산계급의 투쟁을 다루었기 때문에 검열당국의 눈이 곱게 보아 넘길 리가 없었다.
홍이섭 교수는, 심훈의 「홍염」에 대한 집착 속에 주목할만한 일면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당시 경제적 불안과 자기 세계를 어떻게 뚫을 것이냐를 고민했던 심훈에게 '부곡리 낙향'의 전제가 되었을, 농촌문제에 대한 인식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도시적 인물이었던 심훈은 자신의 전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브나르도의 물결과 맞부닥뜨린다.
당시 일제의 기만적 농촌진흥정책에 의해 조선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있었는데(당시의 상황은 이태준의 단편 「꽃나무는 심어놓고」에도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을 배경으로 '브나르도'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원의 미소」가 한글보급 운동과 기독교계 농촌운동이 급속도로 발전해 나가던 1933년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자유분방한 생활을 해오던 그가 농촌으로 낙향을 결심한 것은 전연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상록수」의 서두에서 박동혁이 '높직이 앉아 민중을 관찰하거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 조선 사람들이 제 힘으로써 살아나기 위한 기초공사를 해야겠습니다'라고 부르짖는 장면은, 당시 심훈의 현실 인식을 웅변한 것이다.
즉, 심훈은 브나르도 정신을 자신의 새로운 정신적 기반으로 삼으려 했고, 그 진지한 모색의 열매가 「영원의 미소」와 「상록수」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근원을 살피자면 전혀 근거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자유주의적 기질의 심훈에게 식민치하의 현실은 엄청난 질곡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자유를 위해서는 과감히 그것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경험한 바 있는 조혼(早婚)이라든가, 고리대금, 지주들의 가혹한 착취, 일제의 간섭 등은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 요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자가 계몽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된 정신적 특질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심훈이 부곡리에서 소설 집필에만 전념한 것은 그로서는 현실에 대한 과감한 저항이었던 셈이다.
심훈 문학을 대표하는 「상록수」는 흔히 계몽주의 소설로만 알려져 왔다.
물론 계몽이 작품의 주된 흐름을 이루는 것은 사실이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가 계몽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광수의 「무정」이나「흙」이 무지한 농민들을 계몽하여 한글을 깨우치게 하고 청결하지 못한 생활을 청산할 것을 요구하는 등 정치, 경제적 요소를 배제한 것이었다면, 「상록수」에서 그런 점들은 부차적으로 처리된다.
채영신에 의해서 한글운동과 생활개선운동이 강조되긴 하지만, 주인공 박동혁은 그와는 달리 경제운동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천하는 인물이다.
농우회 회장으로 고리대금업자 강기천을 앉히고 고리대 탕감을 요구하는 장면이나, 진흥회 회장을 뽑는 자리에서 작인들의 소작권 유지와 소작료의 동결을 주장하는 대목 등은 이 작품이 이광수 유의 계몽소설과는 본질을 달리한 것임을 말해준다.
작품의 주된 갈등 구조가 이광수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게 제시되는 것도 눈 여겨 볼 대목이다.
이광수의 경우 무지한 농민과 시혜적 지식인이 상호 대립하는 형국이라면, 「상록수」에서는 농민들이 채영신이나 박동혁과 같은 편이 되어 있고, 그것을 가로막는 대립 항으로는 일제가 제시된다.
채영신의 야학을 방해하는 것은 무지한 농민이 아니라 그것을 불온시하는 일제며, 박동혁이 사랑하는 채영신의 임종마저 지켜볼 수 없었던 것도 일제의 구금 때문이었고, 동혁의 동생 동화가 만주로 도망간 것도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상록수」의 세계는 「흙」의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상록수」에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채영신이나 박동혁이 보여주는 영웅주의적 모습이라든가 곳곳에서 드러나는 계몽적 언술은 리얼리즘 소설로서는 중요한 흠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단순한 통속적 계몽소설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은 일제하 농촌활동의 본질을 적실 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심훈 문학의 산실인 부곡리의 '필경사', 심훈이 세상을 뜬 후 한때 교회당으로 쓰여지기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썰렁하니 비워져 있었다.
심훈이 1934년 직접 심었다는 상록수 한 그루가 여전히 남아 울창한 잎을 피워 올리며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집은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있던 것을 심재영씨가 생전에 다시 사들였고, 현재는 군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었다.
집 앞 공터 한편에 산뜻하게 지어 놓은 기와 건물이 유독 시선을 끌었다. '상록수문화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지만 그 내부는 텅 비어 있고, 유리문도 밖으로 잠겨 있었다.
"문화관 지은 지는 3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은데, 계속 저 상태지요."
필경사 관리를 맡아 하고 있다는 윤영녀씨의 말이었다. 기념관으로 지어 놓고는 몇 년째 그 내용을 채우지 못한 채 저리 방치되어 있다는 것.
역시 재정과 관리 문제가 난관인가. 그러나 신축 건물을 이렇도록 몇 년째 비워두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딱하기만 하다.
심훈 문학에 대한 조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이런 홀대에 한 몫을 하는 것은 아닌지 억측을 해본다. 썰렁한 문화관의 유리창 너머로 강습소가 없어서 눈물로 학생들을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채영신의 모습이 반사되어 온다.
3.
심훈이 시인이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 유치환, 윤동주 등과 함께 일제치하에서 손꼽히는 저항 시인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 이르면 더더욱 그렇다.
이육사가 30여 편 남짓한 시를 남겼다면, 심훈은 수적으로 훨씬 많은 항일 시를 남겼는데, 다음의 글에 그 시가 어떻게 쓰여졌는가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다.
나는 쓰기 위해서 시를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시인이 되려고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닫다가 미칠 듯이 파도치는 정열에 마음이 부대끼면 죄수가 손톱 끝으로 감방의 벽을 긁어 낙서하듯 한 것이 그럭저럭 근 백여 수가되기에 한곳에 묶어 보다가 이 보잘 것 없는 시가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집「그날이 오면」의 머리말
'미칠 듯이 파도치는 정열에 마음이 부대끼면 죄수가 손톱 끝으로 감방의 벽을 긁어 낙서하듯' 쓴 것이 심훈의 시이고 보면, 당시 유행하던 기교와 감각을 중시하는 시와는 본질을 달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심훈의 유일한 시집 「그날이 오면」은 원래 1933년에 발간되려 했었다. 그런데 수록된 시의 반 이상이 검열에 걸려 붉은 줄이 그어지자 결실을 맺지 못했고, 사후 13년이 지난 시점에야 둘째형 심설송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시집에는 시가 66편, 수필 5편이 실려 있다. 저항 시로 분류할 수 있는 시로는 「봄의 서곡」, 「거리의 봄」,「필경(筆耕)」,「생명의 한 토막」,「너에게 무엇을 주랴」,「그날이 오면」,「조선의 자매여」,「태양의 임종」등 전체의 3분의 1을 상회한다. 박희진 시인의 말대로, 이 시집 한 권은 전체가 열렬하고 직정적 호소력에 충만한 시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집의 마지막 시「오오, 조선의 남아여!」는 심훈이 급작스레 병을 얻어 세상을 뜨기 수 주 전에 쓰여졌는데, 손기정의 마라톤 세계 제패를 알리는 호외를 보고 그 뒷면에 갈겨써서 신문사 편집국으로 달려갔다는 일화로 더 유명하다.
이시는 그의 영결식장에서 낭독되어 좌중을 숙연케 하기도 했다.
최동호 교수의 말대로 심훈은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등과 더불어 우리 문학의 정통성을 확인케 하는 시인이었다.
진정한 저항문학은 민족문학의 정도와 아울러 문학의 정도를 밝히는 지표가 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문학의 미래를 구체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조국 광복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쓴, 오늘날도 광복절이면 널리 애송되는 시「그날이 오면」에는 심훈의 압제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독립에 대한 갈망이 직정적으로 노래되어 민족문학의 한 좌표를 제시한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무슨 한이 남으로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라,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그날이 오면」전문
일제하 식민치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갈망했을 그날, 해방의 그날을 이렇듯 열렬히 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훈은 그것을 보지 못한 채 애석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렇듯 심훈은 시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가에 비해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상록수」를 지은 농촌 계몽작가 정도로, 30년대 브나르도 운동과 결부 지어 이해되고 있는 게 고작이다.
'온몸으로 당대의 현실에 진지하게 부딪쳐 갔던' 작가이며 시인일 뿐만 아니라, 배우이기까지 했던 심훈에 대한 총체적인 조망은 여타 많은 작가들이 그랬듯 미흡하기만 했던 것이다.
심훈이 그 실체보다 과소 평가된 이유는 카프계 작가들과의 불화를 들기도 한다.
심훈이 만든 영화 「먼동이 틀 때」에 대해 한설야가 비난하고 나선 것을 필두로, 임화 또한 그의 소설들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가했고 심훈 또한 KAPF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심훈이 당시 쓴 평론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를 보면 '어느 시기까지는 한 가지 주의의 선전 도구로 이용할 공상을 버리고 온전히 대중의 위로 품으로서 영화의 제작 가치를 삼자'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문예작품보다도 몇 곱이나 지독한 검열제도 밑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영화를 제작하지 않는다고, 높이 앉아 꾸지람만 늘어놓는 것은 망상자의 잠꼬대에 불과하다는 게 심훈의 생각이었다.
당시 김팔봉이 작성한 문인 계보 표에 심훈은 민족주의파, 소시민적 자유주의, 이상주의자로 분류되어 있다.
백철의 「신문학 사조사」에도 심훈을 브나르도 운동과 결부 지어 서술한 게 고작이어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심훈은 단순히 「상록수」를 쓴 통속작가 정도로만 자리 매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심훈의 사상적 편력이 실증적으로 밝혀지고, 「상록수」창작의 배경이 보다 심층적으로 연구되면서 심훈을 가리고 있던 통속의 베일도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 와서 였다.
4.
1936년, 심훈은 소설 「상록수」의 출판을 위해 서울에 와 있었는데 다른 거처를 마다하고 굳이 출판사 2층 마루방에서 기거하다가 병을 얻었다 끝내 회생을 못하고 그해 9월 16일에 눈을 감고 만다.
심훈은 16세에 조혼한 부인 이해영(「직녀성」의 모델)과 이혼하고 30세 되던 해에 무용을 하던 안정옥과 재혼했는데, 중국 망명 시절에 이해영에게 보낸 애틋한 사연의 편지와 말년에 안정옥과 번갈아 쓴 공동일기가 전집에 그대로 실려 있다.
전처와는 소생이 없고 안정옥과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둔 것으로 알고 있다.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 어귀에는 이육사, 윤동주 등의 애국시비와 함께 심훈의 시비가 첫머리에 놓여 있다. 한때 정권의 정통성 확보에 이용되었던 오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웅대한 규모의 기념관은 45년 해방의 그날을 되새기게 한다.
산책길 양옆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 수많은 우국지사, 독립운동가, 민족시인들의 어록비. 그것은 후손들에게 남긴 장렬한 웅변들이다. 또한 끝내 '그날'을 못보고 갔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리게 하는 「그날이 오면」의 싯귀가 검은 돌 위에 새겨져, 광복절을 맞는 8월의 감회를 더욱 뭉클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