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김 팝페라 가수
우리 부부는 언제나 함께 바라보며 노래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화음을 이루고 화음을 들어줄 상대는 바로 가까이 있는 가족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사는 게 아닐까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어디서 조사를 했는지 동네 큰 교회에서 불우이웃돕기라며 쌀과 선물박스를 보내온다. 이를 받아야 할지, 거절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긴 내가 매월 내는 건강보험료가 지금도 3만3000원밖에 안 되니 거의 준(準)빈곤층에 속해 있긴 하다. 그 덕에 시립유아원에 1순위로 아이들을 맡기고 보육료도 감면받는 처지다.
그러나 나는 명색이 10년간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온 유학파다. 뒤늦게 음악을 전공하고 아내와 둘이서 함께 노래 공연을 하는 전업 가수이다. 공연할 때마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오는 유학파가 빈곤층이라니…. 귀국한 뒤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지휘, 노래공연을 하며 8년이 지났지만 ‘비정규직’인지라 아직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가족들은 인내심을 갖고 나를 격려해 주지만 해가 지날수록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취직하거나 장사라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들 걱정한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고등학교를 4년이나 다녔을 정도였다. 다행히 서울의 한 대학 산업심리학과에 들어가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체에 입사가 확정됐지만 나는 입사를 포기했다. 통기타를 치며 노래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른 대학의 성악과로 편입했다. 평범한 회사원의 길을 거부하고 새로운 모험을 택했다.
나는 1994년 이탈리아로 훌쩍 유학을 떠나 성악·딕션·지휘를 배우기 시작했다. 여행가이드를 하며 레슨비를 대기도 벅찼던 나는 그곳에서 먼저 유학 와 있던 성악도 아내를 만나면서 운명처럼 그녀와 결혼을 생각했다. 우리는 5개월 연애 끝에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빈털터리 유학생이 가족까지 생겼으니, 걱정은 커져만 갔다. ‘이제 함께 가는 길 두려움 없어/ 너는 나의 따뜻한 목도리 되고/ 너는 나의 편안한 신발이 되어(곡·이제 함께 가는 길).’
1998년 봄, 결혼을 하자마자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학생 부부 신분으로 ‘음악 속의 사랑(Amore In Musica)’이라는 공연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우리는 이후 같은 오페라에서 함께 데뷔하고, 귀국해서는 대학 출강도 같은 날 바로 옆 강의실에서 나란히 했다. 노래도 언제나 듀오버전으로 편곡해서 부부가 함께 부른다. 우리가 추구하는 음악은 크로스오버-팝페라다. 오페라·뮤지컬·영화음악·팝·가요 등 대중성과 예술성을 함께 보여주는 종합장르다.
2년 전부터 우리 부부는 대학강사, 합창지휘, 개인레슨을 모두 접고 전업가수로 전향했다. 또다시 편안하게 살 길을 접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부모님은 “노래 불러서 먹고살 수 있겠느냐”고 걱정이 태산이셨다. 공교롭게도 신종플루부터 경제위기까지 악재가 계속 겹쳐 공연들이 잇따라 취소되는 게 아닌가. 대중가요 가수도 아닌데 노래를 전업으로 먹고살기란 애초 무리였나. 남의 귀한 딸 데려와 고생만 시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실업자’로 내몰린 불안 속에서 나를 지켜준 것은 아내였다.
뜻을 세우는 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길을 내는 데도 당연히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닐까. 길을 닦았으니 이제 가는 데도 당연히 시간이 걸린다며 아내는 되레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우리 부부는 24시간 찰떡처럼 붙어 다녀 ‘닭살부부’라는 놀림도 많이 받는다.
우리 부부의 노래 주제는 대부분 가정의 따뜻함과 사랑이다. 내 가족이 바로 다문화 가정이기 때문이다. 장모님이 일본인으로 아내는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랐다. 나는 순수 토종이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면 승무원이 영어로 물어보고 이탈리아 사람들도 내게 길을 물어볼 정도로 이국적으로 생겼다. 김수로 왕이 인도 공주 허황옥과 결혼해 그 피가 수백년을 흘러 ‘김해 김씨’인 내게 내려온 게 아닐까. 그래서 나도 다문화 가정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이라고 자처한다.
많은 사람이 우리 부부에게 24시간 함께 붙어 다니며 노래 부르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럴 때면 서로 존중해주려 노력하고, 자신을 존중해주는 사람과 같이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니냐고 말해준다.
우리 부부가 노래 부를 때는 철칙이 있다. 서로 음역과 목소리 성향이 너무 달라 함께 부르는 게 무리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부부가 함께 바라보며 노래하길 고집한다. 서로의 소리를 들어주고 살피고 배려하는 그런 미묘한 존중의 느낌이 올 때 청중들에게 전달되는 화음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매번 체험하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가 일상에서 화음을 이루고 화음을 들어줄 상대는 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부모·배우자·자녀들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이를 잊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눈을 보며 사는 게 아닐까. 부부와 가정은 ‘따로 똑같이’여야 한다.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부부는 오늘도 서로 다른 목소리로 그러나 마주 보면서 노래 부른다.
출처 : 조선일보 2010.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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