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 정공 묘갈명(縣監鄭公墓碣銘)
공의 휘는 택주(宅周), 자는 인백(仁伯)이며 진주(晉州) 사람으로 고려 문량공(文良公) 을보(乙輔)의 후손이다. 고조 휘 종필(宗弼)은 장례원 사평, 증조 휘 복일(復一)은 오위장을 지냈다. 조부 휘 민득(敏得)은 도총부 도사를 지냈는데 정유년(丁酉年,1597, 선조 30) 난리 때 남원(南原)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죽었다.
후사가 없어 종형 진사 희득(希得)의 아들 직(稷)을 후사로 삼았으니 이분이 공의 부친이다.
희득의 모친 이씨(李氏)와 며느리 이씨는 왜적을 피해 칠산도(七山島)로 가다가 적선을 만나자 의리를 지켜 욕되지 않으려고 손을 잡고 바다에 투신하여 죽어 모두 정려문을 받았다.
직은 늘 죄인으로 자처하며 생전 처자의 봉양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죽어서는 간소하게 장사 지내라고 명하였다. 월사(月沙) 이 상국(李相國 이정귀(李廷龜,1564~1635)이 조정에 천거하여 귀후서 별제에 임명된 적이 있는데, 한 번 사은하고 돌아왔다.
공은 대대로 함평(咸平)에 살았다. 6세에 부친을 잃고 어른처럼 슬퍼하였다. 자라서는 무예를 익혀 병진년(丙辰年,1676, 숙종 2)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평남진(平南鎭)을 지키고, 훈련원 주부로 옮겼다.
기사년(己巳年,1689), 중전이 사가(私家)로 물러나자 공은 민용(閔鏞), 구봉창(具鳳昌)과 상소하고자 다른 사람에게 상소의 초고를 두루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다. 글재주가 없음을 한스럽게 여기고 그날로 관직을 버렸다.
갑술년(甲戌年,1694), 정국이 바뀌자 다시 선전관이 되고 얼마 후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다. 몸가짐이 청렴하고 다스리면서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간사한 아전이 법을 어기자 곤장을 쳐서 죽였는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이를 빌미로 무고하여 대간이 계사를 올려 형리에게 내려 심문하도록 청하였다. 판서 민진후(閔鎭厚,1659~1720)와 판서 김진구(金鎭龜,1651~1704) 등 여러 공이 번갈아 공을 위해 신원하여 마침내 사면을 받았다.
공은 평소 성품이 강직하여 세속을 따라 동요하지 않았다. 남의 옳지 않은 점을 보면 현달한 관원이나 요직에 있는 사람으로 익숙한 사이라도 그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몇 칸 집을 지어 한취(寒翠)라 이름지었다.
학사 이교악(李喬岳,1653~1728)이 그곳 수령으로 와서 공을 방문하고 벽에 시를 썼는데, “추운 날씨에도 변치 않기를 기약한다.
〔歲寒襟期〕”라는 말이 있었다. 공은 유유자적하게 지내며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공은 비록 무예에 종사하였으나 지조는 선비와 같았다.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태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제사 지내는 날에는 반드시 재계하고 제사를 마쳐도 여전히 해이해지지 않았다. 친족들과 있을 적에는 지극히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손님을 접대할 때는 전혀 간격을 두지 않았다.
한번은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불행히 공부를 하지 못하여 이 지경이 되었다.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은 학문이고 그다음은 문장이다. 그렇지 않으면 말을 달리고 검을 휘두르더라도 남자의 일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둑과 장기를 두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며 구차하게 이익을 도모한다면 내 자손이 아니다.”
하였다.
공은 나이 84세 되던 병신년(丙申年,1716) 7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고을 귀미리(貴美里)에 장사 지내고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를 부장하였다.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덕요(德曜), 덕재(德載), 덕윤(德潤)이며, 자의 박광일(朴光一), 사인 나천주(羅天柱), 박광하(朴光夏), 유즙(柳楫)은 사위이다.
손자는 몽신(夢臣), 용신(龍臣), 각신(愨臣), 익신(翊臣), 영신(英臣), 요신(堯臣), 우신(遇臣), 철신(喆臣), 필신(弼臣), 하신(夏臣), 용신(龍臣), 진사 영신(英臣), 선전관 익신(翊臣)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용신이 나와 친분이 있기에 와서 명을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찬란한 정려문이 / 煌煌棹楔
바닷가 구석에 있네 / 在海一曲
공은 그 집에서 태어나 / 公生其門
기이함 간직하고 세속과 섞였네 / 蘊奇混俗
무인의 몸이었으나 / 韎韐之身
뜻은 단정한 선비였네 / 志則端士
충의로 분발하다가 / 忠義奮發
기사년을 만났네 / 乃見己巳
글재주 없다 말하지 말라 / 莫曰無文
그래도 할 말이 있네 / 其亦有辭
나는 내 집을 사랑하니 / 吾愛吾廬
추운 날씨에도 변치 않기를 기약하네 / 歲寒心期
시골에서 술 마시고 활 쏘며 / 社酒圃帿
유유자적 생애를 마쳤네 / 優游終年
해 기울자 질장구 치며 / 昃日歌缶
훌쩍 세상을 떠났네 / 乘化翛然
천 리 길 와서 글을 청하니 / 千里謁文
효자의 정성이라네 / 孝子之誠
내가 숨겨진 것 드러내어 / 我闡厥幽
무덤에 세우게 하리라 / 俾揭阡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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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현감 정공 묘갈 :
이 글은 정택주(鄭宅周)의 묘갈명이다. 정택주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인백(仁伯)이다. 1633년(인조 11) 태어나 1716년(숙종
42) 7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추운 …… 기약한다〔歲寒襟期〕 :
《논어》〈자한(子罕)〉의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에서 유
래한 말로, 변치 않는 지조를 의미한다.
[주03] 해 …… 치며 :
생사(生死)의 이치를 알아 죽음을 편안히 맞이한다는 뜻으로,《주역》〈이괘(離卦) 구삼(九三)〉에 “기운 해가 서산에 걸려 있으
니, 질장구를 두드려 노래하지 않으면 죽음을 서글퍼 하는 것이므로 흉하다.[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 凶.]”라고 한 데
서 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