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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12 - 발루아 왕조 영국과 백년 전쟁에 성녀(마녀?) 잔다르크!
샤를 6세는 발루아 왕조의 네번째 왕으로 초창기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1392년 갑작스럽게 광증을
보이기 시작한후 1422년 사망할때 까지 정상적으로 국정을 보살필수 없었으니 재정을 둘러싼
귀족 파벌간에 내전이 일어났고 1415년 아쟁쿠르 전투 패배로 잉글랜드왕 헨리 5세에게 왕위
계승권을 내주어야 했지만 1422년 헨리 5세가 샤를 2세 보다 2달 먼저 죽는 바람에 위기를 넘깁니다?
샤를 6세는 1차 백년전쟁(1337년 ~1360년) 이후 소강기인 1380년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니 숙부
베리 공작 장과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섭정으로 국정을 관할했으며 전임 샤를 5세와 가까웠던
앙주 공작 루이도 공동 섭정으로 직위를 이용해 국고를 전횡하는 일을 저질러 추방당했고 민중 봉기를
잠재워야 하는데, 샤를 5세는 모든 세금을 철폐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소문이 나면서 봉기가 발생합니다.
1382년 파리등 북부 도시에서는 소강기라 전쟁이 없기 때문에 세금을 납부할 이유가 없다며 과세
철폐를 요구하는 봉기가 확산되니.... 두 섭정들은 도시대표들과의 협상과 주동자 처벌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가까스로 봉기들을 잠재울수 있었는데, 같은 해에 섭정들은 또한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가 겐트(Gent)시를 중심으로 이끄는 플랑드르 반란군을 진압해야만 했습니다.
프랑스 왕에 충성하는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는 반란군에 의해 쫓겨난 상황이었고 반란군이
친잉글랜드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위험의 싹을 제거해야
했으니, 1382년 11월 27일 플랑드르 백작군과 연합한 프랑스군은 겐트 반란군에 대승
을 거두는데... 이로써 샤를 6세 정부는 초기에 일어난 반란들을 모두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섭정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는 전국에 걸쳐 반란의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는 언제든지 개입
하여 지역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절치부심했으니..... 이러한 필리프 2세
의 활약은 단순히 프랑스 왕권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아직 미성년인 샤를 6세
최측근으로서 왕권의 회복이 바로 자신의 권력 강화가 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해 나갑니다.
필리프 2세는 1385년 7월 17일 샤를 6세와 신성로마제국 비텔스바흐 가문 바이에른공 슈테판 3세
의 딸 이자보의 결혼을 주선했는데, 프랑스와 동맹을 유지해 왔던 룩셈부르크 가문이 잉글랜드왕
리차드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었으니, 두 세력의 견제를 위해 신성로마제국과 손을 잡은 것이고
또 동쪽으로 영지를 확장해 나가고자 하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의 염원이 담긴 것이었습니다.
1388년 11월, 20세가 된 샤를 6세는 친정을 선포했는데 그는 부왕 샤를 5세의 통치 말기에 활약
했던 필리프 드 메지에르나 올리비에 드 클리송, 뷔로 드라 리비에르와 같은 신하들을
다시 중용해 국정을 이끌어 나가고자 했으니.... 두 숙부들은 실각하게 되었고 국정은
모두 샤를 6세와 ‘마르무제(Marmouset)’ 라고 불리는 국왕 참사회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4년간 마르무제의 통치는 별 탈 없이 잘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1392년 8월 샤를 6세는 브르타뉴 공작
장 4세를 만나기 위해 르망 숲을 가로질러 가던 중에 갑작스럽게 광증을 일으키기 시작했는데....
그는 말 위에서 칼을 휘둘러 시종 네명을 이유 없이 죽였고 이후 이틀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국왕 샤를 6세의 광증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으니 앞으로 1422년 까지 그는 광증과 정상적인
정신상태 사이에서 오락가락했고.... 이는 곧 급격한 왕권의 실추로 이어졌으니 실제로 이후
마르무제의 정치는 끝나게 되고 다시 숙부들을 비롯 대귀족들이 국정을 마음껏 좌지우지하게 됩니다.
1393년 1월 28일에는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의 친구인 카트린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전통 축제 샤리바리가 왕실 인사들로 구성되어 벌어졌으니, 이때 샤를 6세 또한 다른
귀족들과 함께 털이 많은 짐승의 분장을 하고 축제에 참가했는데.... 그때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형의 분장을 가까이 보겠다면서 횃불을 들고 다가섭니다.
그리고 샤를 6세와 그의 동료들의 털옷에 불이 붙었으니.... 그와 함께 분장을 했던 국왕의 심복
네명은 그대로 불에 타 죽었고, 다행히 샤를 6세 국왕만이 친척 잔 드 불로뉴의 기지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샤를 6세에게 자신의 치마를 뒤집어 씌워 급한 불을 껐습니다.
우연한 사고일까, 아니면 계획된 암살 음모일까? 광증을 보이는 샤를 6세가 죽으면
왕이 될 사람은 동생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였다는 점은 사고를 가장한 암살
음모를 짐작하게 하지만 어떠한 증거도 없었는데.... 어쨌든 이 사건 이후 샤를
6세는 암살 음모와 관련된 피해망상증에 시달리며 더 큰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제 정국은 급변했으니 샤를 6세와 선정을 펼쳤던 마르무제가 실각하고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다시 국정을 장악했으니.... 이에 대해 이제 성인이 된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반대 진영을 형성했는데,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살아 있던 1404년 까지는 갈등은 크게 표면화 되지는 않았습니다.
노련했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는 정국을 장악하면서도 경쟁 세력과의 타협과 조정을 통해
갈등의 소지들을 줄여나갔기 때문이었는데... 하지만 1404년 필리프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무겁공 장 1세가 공위를 물려받자 양 파벌 간의 갈등은 깊어져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됩니다.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인척이었던 아르마냑 백작이 파벌을 형성하면서 부르고뉴 공작에 맞섰고
왕국은 둘로 분열되었으니.... 1413년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왕국의 개혁을 외치면서 파리
에서 봉기한 카보쉬앙의 난을 지원하며 수도 파리와 국정을 장악하고자 했지만, 과격한 봉기
군의 행태는 민심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에는 장 1세의 파리 장악 시도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1415년에는 새 잉글랜드왕 헨리 5세 침략으로 백년전쟁 2기(1415년 ~1453년)가 재개되었는데
같은해 10월 아쟁쿠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병력이 절반 밖에 안되는 잉글랜드군
에게 대패하는데 백년전쟁의 3대 전투는 1기때 1346년 크레시전투와 1356년 푸아티에
전투 그리고 2기 때인 1415년에 아쟁쿠르 전투인데...... 3번 모두 소수인 영국군이 승리합니다!
잉글랜드왕 헨리 5세가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인정이 아니면,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장 2세의 미납된 몸값과 프랑스 내 잉글랜드령의 영구적인 인정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프랑스
발루아 왕실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로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이 친정했지만 프랑스왕 샤를 6세는 당시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으니 샤를 달브레가 지휘했습니다.
헨리 5세는 10,000여명의 병력으로 1415년 8월 프랑스를 침공해 항구도시 아르플뢰르(Harfleur)의
공성전에서 많은 병력과 시간을 들여 9월 22일 항복을 받아내었지만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영국군은 아르플뢰르를 벗어나 프랑스 북부 잉글랜드 거점인 칼레로 퇴각하려고 했습니다.
프랑스는 병력을 모집했으나 그전에 영국군이 아르플뢰르를 점령하자 칼레에 돌아가 세력을 회복하기
전에 빨리 섬멸시키고자 했으니 헨리 5세는 불리한 상황임을 알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추격군이 늘어날 것이라 판단하고 프랑스군이 더 많아지기 전에 결전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
해 샤를 달브레의 시간벌기용 수작을 무시하며 10월 24일 아쟁쿠르에서 이들을 맞아 전투를 벌입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2배에 달했으며 또한 병력의 질에 있어서도 영국군은 오랜 공성전
으로 인한 병력 및 사기저하, 퇴각경로 및 전투장소의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 창궐
등으로 상황이 나빴던 것에 비해 막 모집해 달려왔던 프랑스군은 문제가 하나도
없이 오히려 자기 부대를 적진에 선봉에 보내달라며 사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 였습니다.
전장은 주변에 숲이 빽빽한 좁은 개활지에서 벌어졌는데, 이전 영국의 궁병들에게 식겁한 적이
있었던 프랑스군은 갑옷의 두께를 늘리고 추격을 위한 선발대를 제외하고선 기사들을
포함 전군이 걸어서 진격하는 방법을 택했으니 이 전략은 제대로 효과를 봐서 말을
타고 갔던 선발대가 아닌, 본대의 기사들은 큰 피해없이 잉글랜드군의 코앞까지 도달합니다.
병력, 물자, 사기, 시간 모두 불리했던 영국군 지휘관 헨리 5세는 퇴각중에도 보다 유리한 전장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 전날의 폭우로 진창이 된 아쟁쿠르를 결전의 장소로 선택할 수
있었으니 잉글랜드군의 장궁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어왔던 프랑스군은 기사들을 포함한
장갑병의 갑옷을 두텁게 하며 말을 타지 않는 식으로 기동력을 버리고 방어력을 얻는 것을 택했습니다.
안 그래도 낮아진 기동성에 둔중한 무게까지 더해지니 이들이 새벽에 비가 와서 늪지처럼
변해버린 땅에서 제대로 걸을수 없었고 프랑스 기사들은 정작 영국군을 목전에 두고도
함부로 달려들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자, 프랑스군은 견제를 위주로 한
대치로 시간을 끌려했으나 잉글랜드군의 도발을 버티다 못한 일부가 멋대로 진형을
빠져나와 날뛰면서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는 프랑스군의 결정적인 패착이 됩니다.
병력의 질로도 양으로도 우세를 점하던 데다가 영국군의 장궁에 대한 파훼법까지
마련해온 프랑스군은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궁수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무리할 정도의 돌격을 감행하고자
하니 총사령관(컨스터블)이었던 샤를 달브레는 이들의 폭주를 억제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의 공격 도발에 프랑스군이 열받으며 통제가 되지 않았으니 지나치게 밀집한 프랑스군
은 영국군에게 죽은 병력 보다 프랑스군이 서로 엉키면서 압사시킨 병력이 더 많을 것이다라는 말
까지 있을 정도로 참담한 상황이 되었는데.... 이들이 작전협의도 없이 돌격을 해버리는 탓에 본진에
있던 프랑스 궁병대는 아군을 사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나서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어버립니다.
중갑옷을 입은 수많은 기사들이 진창에 모여버리니 프랑스군은 제대로 움직일수 있을리
가 만무했고.... 이와 반대로 병력의 상태는 좋지 않아도 통제는 제대로 이루어지던
영국군은 보병과 경무장 기사들, 그리고 궁수들 조차 활이 제대로 통하지 않자
검이나 도끼에 망치까지 죄다 집어들고 달려가 일방적으로 프랑스군을 도륙합니다.
본진에 남아있던 프랑스 일부 기사들은 빠르게 지원가고자 말을 타고 달렸으나 애초에
말을 탔다는 점에서 선발대와 같은 노선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퇴각하는
기사들과 서로 엉키면서 혼란만 가중시켰으니.... 프랑스 기병 대부분은
을 집어먹고 자기네 전위대 틈으로 퇴각해서 전위대의 전투에 큰 장애를 주었습니다.
전위대의 대오에 여러 곳 틈을 벌려야 했는데, 그로 인해 밀려 움직이다가 말발굽이 다져놓은
곳을 디뎌 걸음이 흔들리는 병사들이 있었으니 말들도 화살에 상처를 많이 입어서 기수들
의 통제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았고, 이런 사정으로 해서 프랑스군 전위대는 혼란에
빠지고 많은 기병들이 쓰러지기 시작하니 영국군은 프랑스군 속으로 더욱더 파고들어
앞의 두 대대를 여러 곳에서 토막내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프랑스군을 쓰러뜨리고 살육합니다.
그나마 본진에 남아있던 또 다른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에 혼란을 주고자 후방으로
난입해 군수마차를 불태우고 경비병력을 살해하는등의 공적은 남겼지만 이에
당황하고 분노한 헨리 5세는 그대로 프랑스 포로를 몰살시키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최소 4,000명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전사자가 발생했는데
전사자의 대부분이 기사였으며 귀족도 많이 죽었으니... 알랑송 공작, 바르 공작 에두아르, 브라방
공작 앙투안 등 공작 3명에, 드뢰 백작(총사령관 샤를 달브레), 그랑프르 백작, 느베르 백작, 루시
백작, 바르 백작, 보데몽 백작, 블라몽 백작, 포켐베르 백작등 백작 8명 그리고 남작 1명이 전사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아쟁쿠르 전투 직전인 1413년 아르마냑파가 수도 파리에서 정변을 일으켜
부르고뉴파를 몰아내고 집권한 상황이었는데...... 아쟁쿠르 전투에서 이렇게
많은 귀족이 죽어버린 까닭에 그후 아르마냑파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잉글랜드군의 전사자는 100명에서 500명 남짓이었으며, 기사와 귀족의 사망자는
10여명에 불과했으니 헨리 5세는 아르플뢰르에 수비대를 남기고 잉글랜드로 귀환하여
군비를 재정비했으며 1417년 8월 노르망디 서부에 상륙해 캉을 확보하고 점령지를 늘려갑니다.
과거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잉글랜드군이 노궁을 사용했고, 이것이 판금 갑옷을 관통할 만큼
강력한 투사무기였다는 고증 오류, 혹은 왜곡된 내용이 알려져왔지만 실제 영국군의
주력은 아일랜드인들이 쓰던 장궁이었고, 서양식 쇠뇌인 노궁은 오히려 프랑스와 제노바
공화국의 용병들이 애용했기에 실제 전투양상은 프랑스/제노바 노궁병 vs 영국 장궁병이었습니다.
노궁도 갑옷을 쉽게 뚫는 무기가 아니고 승패 여부도 장비 때문이 아니었는데, 프랑스군의 지휘
및 명령체계를 대놓고 무시하는 군인, 특히 기사들의 기강 문제가 컸으니 사격을 명령하고
기사들이 돌격한다거나, 노궁병들이 진형을 갖추고 궁시전을 개시하기전에 보병들을 내보내서
진형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버린다거나... 파비스 같은 필수 방호장비도 없이 화살비로 내몰고,
화살에 피해가 급증하자 파비스 방패를 장비하러 후퇴하는데 이를 적전 도주라고 처형하였습니다.
이때 프랑스는 내전 중으로 부르고뉴파가 수도 파리 주변의 위성도시를 하나 둘 무력으로 점거
하며 파리를 에워싸기 시작하여 아르마냑파가 궁지에 몰려 있었고, 잉글랜드군의 진출에
대응할 수 없었으니 1418년 부르고뉴파는 파리를 점령하여 아르마냑파를 도살하면서 내전
에서 승리하였으나.... 부르고뉴파도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별 도리가 없었던 관계로 1419년
에는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였던 루앙이 함락되어 노르망디 전역이 모두 영국에 넘어가고 맙니다.
결국 부르고뉴파는 원인 아르마냑파와 화해하고 거국일치를 시도코자 도주한 왕세자(도팽) 샤를이
이끄는 잔존 아르마냑파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왕세자가 협상장에서 오히려 뒤통수를 치니
부르고뉴파의 우두머리인 부르고뉴 공작을 참살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치달았고, 이에
발루아 왕실과 철천지 원수가 된 부르고뉴파는 아예 적인 영국왕 헨리 5세와 손을 잡아 버립니다.
공작은 암살당했어도 부르고뉴파가 여전히 파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나라를 팔아먹는 것은
식은죽먹기였으니 부르고뉴파가 이끄는 프랑스 정권은 왕세자 샤를을 호적에서 파버렸
으며(어머니가 시동생과 불륜?)... 헨리 5세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공주의
결혼과 장차 탄생할 아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골자로 한 트루아
조약에 동의하고 헨리 5세는 승자가 되어 프랑스 공주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귀환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파리에서의 얘기였고, 부르주에 있던 왕세자 샤를은 스코틀랜드에서 온 부칸
백작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그 휘하 7,000명의 스코틀랜드병을 기반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펼쳤으니... 다 끝났다고 생각해 암심하고 잉글랜드로 물러갔던 헨리 5세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북프랑스를 손에 넣은뒤 남진하던 도중에 병을 얻어 아들인 헨리 6세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사망합니다.
샤를 6세는 나이도 많고 정신병에 오늘내일 하니 곧 죽을 것이고 30대 젊은 자신이 프랑스왕이 되는건
99%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헨리 5세는, 샤를 6세 보다 오히려 2달 먼저 전장에서 병으로 죽어버린
것이니.... 이제 프랑스왕은 호적에서 파버린 샤를 7세냐, 아니면 젓먹이 1살 짜리 영국왕 헨리 6세냐?
헨리 5세는 죽기 전 자신의 큰 동생인 베드포드 공작을 섭정으로 임명했는데, 베드포드 공작
은 프랑스에서 전쟁을 지휘하느라 잉글랜드에는 잘 들르지 못하고, 작은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이 잉글랜드 내의 권력을 잡으면서 권력이 양분되기에 이르렀지만 베드포드 공작
과 글로스터 공작은 형제간 우애가 깊었기 때문에 권력을 놓고 다투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글로스터 공작이 자고 일어나면 사고를 치면서 전쟁 수행에 차질이 생길 정도로 되었다는게
문제였으니 동맹인 부르고뉴 공작의 영역권이었던 에이노와 홀란트를 침공하여 부르고뉴파의
뒤통수를 치면서 동맹이 흔들렸는데.... 왕세자 샤를을 잡고 전쟁을 끝내려면 본격적으로 남침을
해야 했으나, 이렇게 수뇌부에 문제가 컸던 탓에 베드포드 공작은 대규모 파병을 할수 없었습니다.
1428년 결국 잉글랜드로 건너가서 대대적인 교통정리를 하고 돌아온 베드포드 공작은 본격적으로
프랑스 왕세자 샤를을 토벌코자 전열을 정비하고 남침했는데.... 원래는 아키텐과 북프랑스
를 연결코자 앙주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계획을 변경하여 왕세자 샤를이 있는 부르주를
노리고 오를레앙과 루아르 일대를 공략하기 시작했으니 그러던 와중에 한 농촌 처녀가 나타납니다.
1419년 부르고뉴 공작 장 1세가 샤를 왕세자에게 암살을 당하니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된 선량공
필리프 3세는 발루아 왕실과 결별하고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공작령을 독립 국가로 건설하고자
했으니.... 프랑스가 아닌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아르마냑파가 장악한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1420년에 맺어진 트루아 조약은 뜻밖의 사건 속에서 표류하게 되었으니 바로 1422년
8월에 북부 프랑스를 점령해 나가는 도중에 헨리 5세가 갑자기 병들어 죽었고 그
뒤를 이어 10월에 샤를 6세도 사망했기 때문이었는데, 잉글랜드 측은 헨리 5세의
계승자인 헨리 6세가 헨리 5세를 대신해 프랑스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 측은 당사자 헨리 5세가 죽었으니 조약은 무효가 되었고 샤를 6세 막내아들 샤를
7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다고 주장했지만 전세는 샤를 7세에게 너무나 불리하게
돌아갔으니.... 잉글랜드군은 부르고뉴 공작의 협력 아래 수도 파리까지 점령하는
등 북부 프랑스를 장악했고 프랑스 왕실은 중부 지방의 부르주로 퇴각 해야만 했습니다.
샤를 7세 (1422-1461)는 1422년에 왕으로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백년전쟁 중이었으니 수도
파리를 비롯한 북부 프랑스는 잉글랜드왕 헨리 5세가 장악하고 있었고 샤를 7세가 저항
의지를 상실해 갈 무렵 1429년에 등장한 농촌 처녀 잔 다르크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여 전세를 뒤바꿔 놓았으니...... 칼레시를 제외한 전 프랑스 왕국의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고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상비군과 관료제에 기반을 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합니다.
그는 10살 때인 1413년에 앙주 공작 루이 2세의 딸 마리와 약혼을 했는데 부르고뉴파가
파리를 장악하자 장모인 욜랑드는 사위인 샤를 7세와 딸 마리를 데리고 프로방스와
앙주에 거처를 마련했으니, 이곳에서 샤를 7세는 파리의 어지러운 정치계를 떠나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풍성한 교육을 받으면서 왕자로서의 교양을 키워나갔습니다.
1417년 형이 죽자 샤를 7세는 파리로 돌아와 세자(도팽)가 되기 위한 의식을 치렀지만 프랑스
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으니... 부왕 샤를 6세의 광증이 나날이 더해가는 가운데
1407년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진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사이의 내전은 더욱 격화
되고 있었으며 또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는 잉글랜드왕 헨리 5세에게 대패하게 됩니다.
파리에서는 카보쉬앙의 난 이후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의 위세는 한풀 꺾인 상태였지만 큰 영향력
을 발휘하나 1418년 샤를 7세는 부르고뉴 공작의 위협을 피해 파리를 떠나 부르주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는데.... 부르주의 베리 공작 장은 샤를 7세의 종조부이자 아르마냑파 수장들
중의 한 명이었으니 샤를 7세는 아르마냑파로 궁정을 조직하고 푸아티에에 고등법원을 세웁니다.
그 사이 노르망디등 북부 프랑스가 잉글랜드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1419년 1월에는 파리까지
함락되니 잉글랜드군에 대항하기 위해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 사이 화해가 절실했으니,
샤를 7세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평화 조약을 제의하자 9월 10일, 평화 조약을 기대하고
최소한의 무장을 하고 온 장 1세가 샤를 7세와 함께 온 아르마냑파 급습으로 암살을 당합니다.
샤를 7세는 암살 계획을 몰랐다고 주장했으나 부르고뉴파 측에서 그대로 믿을리 없었으니 잉글랜드에
대한 공동대응을 위해 화평하려는 자리에서 암살이 이루어졌기에 샤를 7세가 이끄는 아르마냑파는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었고 장 1세를 이어 부르고뉴 공위에 오른 선량공 필리프 3세는 프랑스의
일원이기를 포기하고 독립해 북부 프랑스를 장악한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부르주 왕정을 압박합니다.
아쟁쿠르전투 패배로 인해 헨리 5세와 공주 카트린과의 결혼으로 부왕 샤를 6세에 의해 샤를 7세는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게 된 것이며, 박탈 이유로 샤를 7세가 이자보 드 바비에르가 다른 자
(시동생?) 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출생한 자식이라는 점이 이야기되었으니.... 이때부터
샤를 7세는 커다란 굴욕감을 느끼면서 자신감을 상실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1422년 8월 헨리 5세가 갑자기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10월에는 부왕인 프랑스국왕 샤를 6세가
사망했는데 파리를 장악한 잉글랜드인들은 헨리 5세와 카트린 사이에서 태어난 1살된 아들
헨리 6세(1421년 ~ 1471년)가 부왕을 대신해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지닌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은 트루아 조약을 광기에 빠진 샤를 6세가 강압에 의해 맺은
것으로 생각했고.... 이미 태고적 전통으로 둔갑한 남성남계에 의한 왕위계승 원칙을 벗어
나는 것이라고 여겼으니, 이러한 여론은 여전히 샤를 7세가 정당한 왕위계승자라는 근거
로 작용했고 이에 샤를 7세는 부왕의 부고를 들은 즉시 스스로 프랑스의 왕임을 천명합니다.
문제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이 치러야 하는 프랑스 북동부에 “랭스 대성당” 에서의 축성식을 중부
지방인 부르주에 머물고 있던 샤를 7세가 거행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으니.... 랭스는 잉글랜드군이
장악하고 있었던데다가 그 바로 옆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부르고뉴 공작의 영토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422년 이후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있었던 샤를 7세는 수도 파리에 가지도 못하고 랭스에서
축성식도 받지 못한 채 1428년 중요한 거점지인 오를레앙까지 잉글랜드군에 빼앗기고
말았으니..... 즉위 후 샤를 7세는 패배주의와 무기력에 젖은 모습으로 기옌 지역을
제외한 남부 프랑스만을 차지한 상태에서 큰 반전의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획기적으로 바꾼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으니! 멀리 동쪽 국경에 위치한
로렌 지역의 동레미에서 온 한 목동 소녀의 방문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스스로의 이름을
“잔 다르크” 라고 밝힌 그 소녀는 성 미카엘 천사로 부터 “정당한 프랑스 왕은 샤를 7세
이며 그를 이끌고 랭스에서 축성식을 거행하라” 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 샤를 7세는 시동에게 왕의 의상을 입히고 왕좌에 앉힌다음 자신은 일반 궁정
인 처럼 군중 속에 숨어 있었지만.... 잔 다르크는 왕좌에 앉은 시동에게 왕이 아니라고 말하고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샤를 7세를 단번에 군종 속에서 찾아내 인사를 했으니, 이 믿지 못할
사건은 샤를 7세에게 정녕 자신이 신으로 부터 선택받은 프랑스 왕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후 3월 부터 잔 다르크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서, 5월에 오를레앙을 수복하고 6월
에는 파테 전투에서 승리한후 그 길로 잉글랜드군을 뚫고 나아가 랭스까지 진격합니다.
결국 그해 7월 17일 샤를 7세는 랭스 대성당에서 축성식을 거행하여 성자 레미가
성령에게서 받은 성유로 도유를 받은 신성한 프랑스 왕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콩피에뉴 공성전에서 부르고뉴군에 사로잡혔고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는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군에게 넘겼는데, 잉글랜드 치하 파리 프랑스의 가톨릭 성직자들은 잔 다르크
를 이단으로 몰았고 잔 다르크는 코숑주교와 70명의 저명한 신학자들로 구성된 심문단에 넘겨집니다.
그녀는 종교재판에서 “마녀(?)” 임이 드러나서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화형(火刑)” 을 당했는데
질식사한 그녀의 옷을 발가벗긴 다음 알몸을 군중들에 보인후 3번 더 불에태워 흔적을 없애버립니다.
샤를 7세는 영국군 총사령관 탈보트를 포로로 잡는등 승기를 잡은 상태라 돈이 많이 드는
전투 대신에 협상으로 국토를 회복하려고 했는데 무작정 진격만을 외치는 잔 다르크
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데다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무리한 행보를 할 이유가
없었고, 성직자들도 농촌 소녀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는게 아니꼬왔던 모양 일까요?
결국 잔 다르크는 샤를 7세로 부터 외면당한채 이단이자 마녀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것 인데...
샤를 7세는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456년에 가톨릭교회에 명예회복 재판을 지시했고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몇년 걸친 재판 끝에 무죄가 밝혀졌으며 그로부터 다시 453년이 지난 1910년에 교황
바오10세가 시복하고 1920년 베네딕트 15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으니 마녀가 성녀로 둔갑했다는?
정국은 샤를 7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으니 프랑스는 공세로 나서 노르망디 및 기옌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프랑스 왕국을 수복한후 샤를 7세는 1435년에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와 아라스 화약을
체결하여 부르고뉴 공국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해 프랑스 왕국과의 화해를 결정했으니 이로써 1407년
이래로 지속되었던 아르마냑파- 부르고뉴파 내전이 막을 내리게 되었고, 잉글랜드는 중요한 동맹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후 1437년에 샤를 7세는 잉글랜드로 부터 수도 파리를 수복할수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패색이 짙어가는 가운데 샤를 7세는 왕국 내 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 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1438년에는 교회 대분열과 공의회 운동의 상황을 이용해서‘부르주 칙령’을 반포
했으니 이에 따르면 프랑스 왕국에서 프랑스 교회의 대표자를 프랑스 왕이 맡을 수 있고
또한 프랑스 고위 성직자 임명권도 로마교황이 아니라 프랑스 왕이 갖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샤를 7세는 필리프 4세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교황에 맞선 프랑스왕의 주권 투쟁을 끝내고 ‘갈리카니즘’
이라고 하는 프랑스 교회주의를 확립했으며.... 1439년에는 오를레앙에서 랑그도일 총신분회의를
개최한후 칙령을 발표하여 상비군의 창설과 과세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으니, 지방 귀족의 사병
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막고 궁극적으로는 사병을 거느릴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를레앙 칙령의 발표는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니 1440년 세자 루이까지 포함된
지방 귀족들이 ‘프라그리의 난’ 을 일으켜 중앙집권적인 샤를 7세의 정책에 반발했는데.....
‘프라그리’ 는 15세기초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프랑스어로 프라그 Prague) 를 중심으로
발생한 후스파 봉기에서 유래한 말로 교황이나 황제의 권위에 대해 불복종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봉기는 그해 여름 샤를 7세의 군대에 의해 신속히 진압되었으며 대부분의 반란자
들은 용서를 받았지만 세자 루이는 파리를 떠나 도피네 지역에 은거할 것을 명받았는
데.... 이후 1445년 샤를 7세는 유럽 최초의 상비군을 조직하여 노르망디와 기옌으로
진격해서는 1453년 기옌 지역 내 잉글랜드군의 마지막 거점지인 카스티용을 점령합니다.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냈으며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윌리엄)의
잉글랜드 점령후 뒤얽혔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복잡한 영토 문제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으며....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영지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영토 전쟁을 끝낸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승패와 관계없이 단일하고 통합된 근대적인 영토 주권 국가로 발전해 나갑니다.
샤를 7세의 말년은 평탄치 못했으니 강한 권력욕을 지닌 세자 루이 11세의 반항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는데.... 부왕 샤를 7세의 권력을 탐하던 루이는 샤를 7세가 화해를 하고자 불러도 응하지
않았으니, 1458년부터 온몸이 세균으로 감염된 샤를 7세는 1461년 입이 헐어 먹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그해 7월 22일 아사하니 부왕의 죽음만을 기다리던 루이 11세가 냉혹한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루이 11세 (1461-1483) 는 봉건주의적 질서에서 벗어나 왕권을 중심으로 통합된 프랑스 왕국을 구축했으니
세자 시절에는 끊임없이 부왕 샤를 7세에게 저항했지만...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
지방 귀족 및 부르고뉴공국과 끊임없이 부딪쳤으니, 왕령지 팽창과 왕권강화 외에도 인쇄술이나 우편
제도와 같은 선진기법이 도입되어 왕국 통합에 이용되었으며 권력의 화신에다가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루이 11세는 13세가 되던 1436년 6월에 동맹을 위해 스코틀랜드의 공주 마르그리트와 결혼
한 뒤 샤를 7세와 함께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1437년 잉글랜드로 부터
파리를 되찾은 샤를 7세가 파리에 입성할 당시 그의 곁을 지켰고, 또 16세가 되던
1439년 부터는 부왕으로 부터 랑그독 총사령권을 임명받아 전쟁터를 누비기 시작합니다.
1439년 샤를 7세가 오를레앙 칙령으로 지방 귀족의 군사권을 박탈하고 중앙집권적 상비군 체제
를 확립하려 하자 프라그리의 난을 일으켜 지방 귀족들과 함께 부왕의 정책에 저항했지만...
샤를 7세에 의해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루이 11세는 도피네에 머무르면서 이 지역만을
다스릴 것을 명받았으며 이후 프랑스 남부에서 잉글랜드군이나 부르고뉴군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1443년에는 샤를 7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지방 귀족들을 제압하는가 하면 비적패가 되어버린
용병 부대들을 토벌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자신에게 충성하는 피후견인을 모으기 시작했고,
또 프라그리 난으로 위축된 자신의 지위에 불만을 품으면서 1446년 다시 한번 봉기 계획
을 세웠지만 발각되어 샤를 7세로부터 제재를 받아 파리 궁정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상실합니다.
더불어 1451년에는 도피네 동쪽에 위치한 사부아 백작 루이 1세의 딸, 이제 6세인 샤를로트와 결혼을
했는데.... 당시 첫 부인이었던 스코틀랜드 공주 마르그리트는 그와 불화 속에서 1445년에 사망한
상태였으니 루이 11세는 이런 과정을 통해 도피네와 사부아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샤를 7세는 루이 11세의 독단적인 결혼계획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급기야 1456년 루이 11세를
생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는데.... 1439년 이래로 지방군을 편성할 수 없었던 루이 11세는
결국 부왕의 군대를 피해 프랑슈 콩테를 지나 부르고뉴 공국 필리프 3세의 궁정으로 도피합니다.
샤를 7세와 루이 11세 사이의 불화를 이용하고자 했던 필리프 3세는 루이 11세를 환대하면서 거처를 마련
해 주고 연금을 베풀었지만.... 1458년부터 샤를 7세는 병이 들어 점점 악화되어 갔고 루이 11세는
샤를 7세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있다가 1461년 샤를 7세가 사망했다는 부고를 받고서야 파리로 향합니다.
때문에 루이 11세는 너무나 미웠던 아버지 대원군의 장례식에 불참한 조선의 고종 임금처럼 부왕의 장례식
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며... 샤를 7세의 서거 후 3주가 지난 뒤에 랭스 대성당에서 축성식을 올리고 8월 30
일에 파리에 입성했지만 곧 파리를 떠나 루아르 강가에 있는 앙부아즈 성에 머무르면서 정사를 돌봤습니다.
1458년 부터 벌어진 아라곤 왕위계승 전쟁에 개입해 피레네 남단 루시용과 세르다뉴를 확보했고....
1463년에는 부르주대학을 세웠으며 또 1463년에는 1435년 당시 아라스 화약으로 샤를 7세가
필리프 3세에게 양도한 솜강 연안 도시들을 구입하고자 했지만, 샤를 7세가 장 1세 암살에 대한
참회의 뜻으로 양도한 곳이라 돈으로 사려는 루이 11세의 행위는 부르고뉴 공작의 분노를 삽니다.
1465년 부터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의 아들 샤를의 주도로 지방 귀족들이 공익동맹을 조직
해 루이 11세에게 도전하기 시작했으니.... 서쪽의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부르봉 공작
장 2세와 아르마냑 백작 장 5세, 나아가 루이 11세의 동생인 샤를 등 수많은 귀족들이
이 공익 동맹에 참여했으며 1467년 샤를은 필리프 3세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됩니다.
루이 11세는 1468년까지 부르고뉴 공작을 제외한 동맹 세력들에 대해 차례로 승리를 거두면서 왕권에
대한 복종과 부르고뉴와의 절연을 약속받았고.... 부르고뉴 공작 샤를이 잉글랜드군을 끌어들일 것을
염려해 협상을 시도했다가 페론성에서 루이 11세는 샤를의 군대에 의해 포위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샤를은 루이 11세에게 샹파뉴 지역 영토 할양과 공익 동맹에 참가했던 왕제 샤를의 사면을 강요합니다.
루이 11세는 샤를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지만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자
약속을 지키기를 거부했으니.... 이에 1471년 부터 루이 11세와 부르고뉴 공작 샤를 사이
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는데, 1472년 샤를은 프랑스 동부 경계를 약탈하였고 나아가
노르망디까지 침략하였지만 약탈 외에는 샤를은 별다른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부르고뉴 공작과의 대립이 지속되는 동안 잉글랜드에서는 1470년 ~ 1471년 동안 폐위되었던 헨리
6세가 측근들에 의해 왕위를 되찾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랭카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의
내전인 "장미전쟁" 이 벌어졌는데, 그 영향은 프랑스에 까지 미쳤으니 부르고뉴 공작 샤를은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를 지원했고 루이 11세는 랭카스터 가문의 헨리 6세를 지원 합니다.
하지만 1471년 왕위를 되찾은 에드워드 4세는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내세우며 잉글랜드
군을 칼레로 파견하여 부르고뉴군에 합류시켰으니.... 이에 루이 11세는 에드워드
4세와 1475년 8월 29일 더 이상 잉글랜드군이 프랑스로 침입해 오지 않도록
피키니 조약을 맺고 백년전쟁 종식의 확인과 함께 그에게 막대한 돈을 지급합니다.
1476년에는 루이 11세의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부르고뉴 공작 샤를이 스위스군과의 전투에서 사망
했는데.....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스위스를 이용한 바 있었기 때문에,
샤를의 입장에서는 루이 11세의 원군으로 전선을 분산시키는 스위스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샤를은 스위스와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니 공국의 계승자는 딸 마리가 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의 질긴 인연은 끝을 맺게 되었지만, 그러나 루이 11세
는 부르고뉴 공국을 장악할 수가 없었으니,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가 루이 11세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기 때문 입니다.
이후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공국의 국경을 침탈했고 끝내 막시밀리안 1세와 마르 드 부르고뉴
의 딸인 마르그리트와 세자 샤를 8세를 결혼시키기로 약속을 얻어냈으니... 결국 신부가
결혼 지참금로 과거에 프랑스 왕국에 속했던 지역들, 즉 부르고뉴 공령지와 플랑드르,
아르투아, 프랑슈 콩테 지역들을 갖고 옴으로써 왕국의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이 11세는 영토를 획득하는 방법으로는 상속자가 없는 곳을 점령하거나 돈으로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1474년 앙주 백작령지와 같이 군대를 동원해 몰수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1469년에
루이 11세는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활판 인쇄술을 도입하여 파리대학 근처에 인쇄소를 세웠으며
1477년에는 유럽에서는 최초로 우편망을 창설해서 왕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권력의 화신이었던 그는 신중하다는 평가와 음흉하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으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 에서 묘사하는 마키아벨리적인 왕이라 할수 있으니, 프랑스 왕국에서 봉건주의적
잔재를 완전히 걷어낸 루이 11세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1483년 8월 30일 뇌출혈로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