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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宣祖
조선의 14대 왕이다. 참으로 한심했던 王..... 그럼에도 그의 재위기간은 41년이나 되었다. 조선시대 왕(王) 가운데 고종(高宗)과 함께 무능(無能)한 왕으로 알려진 선조(宣祖),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정여립(鄭汝立) 사건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였고, 이후 조선사회는 무너져 내렸다. 최근에 와서 선조(宣祖)가 무능한 왕이 아니었다는 복권(?)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을 뒤집기에는 반론(反論)이 약하다. 과연 선조는 무능한 왕이었을까 ?
조선왕조 500여 년간 왕위에 오른 사람은 모두 27명이다. 이 가운데 왕의 적장자(嫡長子) 혹은 적장손(嫡長孫) 출신으로 정통성(正統性)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은 겨우 10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7명의 왕은 세자(世子)의 책봉 과정이나 왕위 계승에 있어서 원칙에 맞지 않는 비정상적(非正常的)인 계승자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왕(王)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傍系)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발 선조(宣祖)이다. 선조(宣祖)는 중종(中宗)의 서자(庶子)이었던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었으니 아마도 태어나는 순간에는 왕이될 운명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부(親父)인 덕흥군은 제11대 왕 중종(中宗)의 일곱 째 아들로,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소생이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받았던 봉작(封爵)은 하성군(河城君)이었다. 원래 이름은 균(鈞)이었으나, 명종(明宗)의 아들인 '순회세자'의 이름이 '부'였기 때문에 항렬자를 따라 '연'으로 고쳤다. 선조는 왕실의 방계(傍系)로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였으므로 친부(親父)인 덕흥군(德興君)은 대원군으로 추존된다. 바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다.
선조(宣祖)의 컴프렉스
적장자(嫡長子)승계가 원칙이었던 조선시대, 선조(宣祖)는 조선 최초의 방게혈통(傍系血統)이었다. 선조는 적자(嫡子)도, 장자(長子)도 아니었다. 선조는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만회하기 위하여, 이미 죽은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묘(墓)를 굳이 덕릉(德陵)이라고 주장한다. 지금도 덕릉고개라고 부른다.
조선 최초의 방계 혈통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인종(仁宗)을 독살하고, 그의 아들 명종(明宗)이 즉위한다. 명종도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명종의 부인 인순왕후 심씨는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성군(河城君)을 양자(養子)로 받아들이고 즉위시켜 수렴청정을 한다. 선조(宣祖)이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 중종(中宗)은 모두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 등 정실(正室)에게서는 인종과 명종을 낳았으며, 나머지 후궁들에게서 7명의 왕자를 얻었다. 덕흥군은 그들 서자(庶子) 중의 막내인 일곱째 아들이었다. 완전한 방계(傍系)이었다.
방계(傍系) 혈통이라는 선조(宣祖)의 약점은 열등감이 되어 뒤늦게 얻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世子)로 삼기 위하여 총명한 광해군(光海君)을 핍박하다가 갑자기 죽어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이 즉위한다. 4살에 불과하였던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선조(宣祖)의 집착은 광해군(光海君)시대 그리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하여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열등감(劣等感)에 신하들에게도 작용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공신(功臣)들인 이순신(李舜臣), 유성룡(柳成龍), 김덕령(金德齡)장군 들에 대하여 시기(猜忌), 질투(嫉妬) 끝에 죽이거나 파직(罷職)시킨다. 그들의 공(功)이 결국은 자신의 공(功)이 되는 것인데...개인적인 열등감은 피바람을 불러 왔고, 나라의 충신들을 죽였으며, 조선에서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시작되는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선조(宣祖)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명종(明宗)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後嗣)가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득세로 왕다운 노릇 한번 제대로 못했던 명종에게는 일찍이 '순회세자'가 있었지만, 1563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람에 후계자가 없었다.
명종(明宗)은 과연 선조(宣祖)를 후계자로 ?
하성군(河城君)이 선조(宣祖)가 되어가는 과정 및 배경은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연려실기술 등에 잘 묘사되어 있다. 명종은 여러 왕손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하루는 왕손(王孫)을 교육하다가 '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아보려 하니 익선관(翼善冠)을 써보아라 '고 하였다. 다른 왕손들과 달리 하성군(河城君)은 제일 어린 나이이었는데, 두 손으로 익선관(翼善冠)을 받들고는 쓰지 않고, 어전(御前)에 도로 갔다 놓으며, '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있는 것이겠습니까 ? '라고 말하였다.
어린 하성군(河城君 .. 후일 선조)의 말을 들은 명종은 기특하게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했다고 한다. 남달리 선조를 총애한 명종은 한유명, 정지연을 사부(師傅)로 삼게 하고 학업에 매진하도록 배려했다. 1567년(명종 22년) 6월 28일 갑자기 쓰러진 명종은 의식을 회복ㅎ지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기 직전,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을 비롯한 대신들이 의식(意識)이 희미한 명종에게 후사(後嗣) 결정을 종용하였고, 말을 하지 못하는 명종은 간신히 한 손을 들어 안쪽 병풍을 가리켰다. 이준경(李浚慶)은 명종의 마지막 손짓이 내전(內殿) 즉, 중전에게 물으라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중전은 병풍 안에서 일찍이 명종이 위독했을 때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을 후계자로 정했다고 말했다.
순회세자를 잃은 후 명종(明宗)은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나라의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자 주변의 신하들은 명종을 무던히도 괴롭혔을 것이다. 명종이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명하지 않은 것은 본인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사망하였을 경우 후계자를 지목할 권한은 대비(大妃)나 중전(中殿)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수순이었다. 당시 하성군(河城君)뿐만 아니라 여러 후보들이 있었지만, 나이 어린 '하성군'은 두 명의 친형을 비롯하여 여러 왕손(王孫)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표면적으로는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진정 그를 총애한 사람은 명종의 비(妃)인 '인순왕후(仁順王朽)'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림정치 (士林政治)의 확립
1567년 명종이 후사(後嗣)없이 죽자 선조(宣祖)가 즉위한다. 이 무렵은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士林)이 정계를 주도할 있을만큼 성장하였던 시기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조(宣祖)는 주자학(朱子學)을 장려하고 사림(士林)을 널리 등용하였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강연(講筵)에서 이퇴계, 이율곡, 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禍)를 당한 조광조(趙光祖)를 신원(愼怨)하고, 유교사상의 확립을 위하여 명유(名儒)들의 저술과 경서(經書)의 간행에 힘써 주자대전(朱子大典)의 교정본을 간행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하여 인재들을 발굴,등용한다.
한편 조선 초부터 명(明)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되고 있던 즉, 명나라의 태조실록,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高麗)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과 함께 4명의 왕을 살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수정하기 위하여 주청사(奏請使)를 거듭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증찬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수정(修正)된 조선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져옴으로써종계변무 (宗系辨誣)의 목적을 달성하였다,1589년 성절사 윤근수(尹根壽)가 " 대명회전 " 전질(全帙)을 받아 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이후 조정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물러나 있던 인물들이 정계에 속속 복직하기 시작하였다. '명종'이 불러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톼계 이황(退溪 李滉)'은 선조(宣祖)가 즉위한 다음 다인 7월에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로 임명되었고,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인 백인걸(白仁傑)이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반면에 '명종'과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비호 아래 정권을 농락하던 윤원형(尹元衡) 등 권신(權臣)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선조의 등극으로 신진사류인 사림(士林) 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선조 초반에는 명종의 고명(誥命)을 받은 이준경(李浚慶)과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로 외척(外戚)을 대표하는 심의겸(沈義謙)이 핵심 세력이었다. 결국 이들 간의 알력(軋轢)은 향후 정치적 파란을 몰고 올 수 밖에 없었다.
붕당정치 (朋黨政治)의 시작
16세기까지 행하여졌던 척신정치(戚臣政治)는 선조(宣祖)의 즉위로 일단 외형적인 종식(종식)이 이루어졌다. 명종(明宗) 때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집권함으로써,명종의 외척인 심의겸(沈義謙) 계열은 기대승, 윤두수 등 신진세력과 결합하고 있었는데. 명종이 세자책봉도 없이 갑자기 죽어 선조가 즉위하자, 강력한 공신집단이나, 외척집단이 형성되지 못하고 붕당(朋黨)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사림(士林)은 이 기회에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지만, 척신정치( 戚臣政治) 아래서 성장한 구신료(舊臣僚)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명종때 소윤(少尹)세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심의겸(沈義謙)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림(士林)들인 전배(前輩)들은 '심의경'의 사림(士林)을 동조자로 받아들이고, 구체제(舊體制)를 옹호하고 있었다. 반면 선조 때에 진출한 사림은 후배(後輩)가 되어 전배(前輩)들의 구체제 지향을 반대,견제하게 된다.여기서 동인, 서인(東人,西人)으로 갈라지게 되고 이는 결국 조선의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이어지게 된다.
선조 5년인 1572년 2월, 이조정랑(吏曺正郞) '오건(吳健)'이 자신의 후임으로 신진사림(新進士林)을 대표하는 김효원(金孝元)을 추천하였다.' 김효원'은 퇴계 이황과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급제한 수재이었다. 그 당시 심의겸(沈義謙)은 이조참의(吏曺參議)로 있었는데, 김효원(金孝元)이 '이조정랑"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였다.
심의겸(沈義謙)이 김효원(金孝元)을 반대한 이유는, 과거에 '김효원'이 권신(權臣)인 윤운형(尹元衡)의 집을 들락거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권신(權臣)에게 아첨이나 하는 소인배(小人輩), 문객(門客)이라 여기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김효원은 그의 장인 정승계(鄭承階)가 윤원형의 첩(妾), 정난정(鄭蘭貞)의 아버지 '정윤겸'의 조카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위해 그곳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다. 심의겸이 김효원을 반대한 속뜻은 그를 중심으로 언관권(言官權)이 강화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김효원'은 '이조정랑'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심의겸 계통의 조정기(趙廷機)가 임명되었다.
김효원(金孝元)이 낙마(落馬)하자 그를 추천한 '오건(吳健)'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落鄕)하면서 파문은 커지기 시작했다. 이조정랑(吏曺正郞)은 정5품의 관직으로 비록 품계는 낮은 자리이었지만, 인사(人事)행정을 담당한 요직(要職) 중의 요직이었다. 이조정랑(吏曺正郞)은 당하(堂下 ..정3품 통정대부 이하) 문신(文臣)의 통청권 (通淸權 ..추천권)과 자신의 후임을 지명할 수 있는 자대권 (自代權)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 재상(宰相)이 독주하던 체제를 바로 잡기 위해 사림파(士林派)들이 쟁취한 권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한은 하나의 관행일 뿐, 경국대전에 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관행(慣行)이 제도보다 우선한 예(例)이다.
말하자면, 인사권(人事權)이 이조판서(吏曺判書)에게 있지 않고 '이조정랑(吏曺正郞)'에게 있었던 것이다. 당상관(堂上官)도 이조정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했을 정도로 이조정랑의 자리는 막강하였다. 이조정랑은 자신이 후임자를 지명(指名)할 수 있는 특권(特權)이 있었고, 정랑직(正郞職)을 어디에서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움직였다.
동서분당 東西分黨
당쟁(黨爭)은 사림정치(士林政治)의 부산물(副産物)이다.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할 때에는 사림파(士林派)가 뭉쳤으나, 선조(先祖) 대에 이르러 훈구파(勳舊派)가 무너지자 사림파가 자체 분열(分裂)하여 붕당(朋黨)이 생기고, 붕당(朋黨) 간에 당쟁이 생기게 된 것이다. 동서분당(東西分黨)은 그 서곡에 불과하였다.
자신을 줄기차게 반대하는 심의겸(沈義謙)에 대하여 김효원(金孝元)도 앙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김효원의 눈에 비친 '심의겸'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척신(戚臣)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사이 김효원은 그토록 소망하던 '이조정랑' 자리에 올랐다. 이조정랑에 오른 '김효원'은 '심의겸'을 가리켜 ' 미련하고 거칠어서 중용할 데가 없다 '며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았다. 그 두 사람의 악연(惡緣)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거론되자 발끈한 '김효원'이 이중호의 아들 '이발(李潑)'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했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은 결국 선배(先輩) 사림(士林)과 후배사림(後輩士林)의 분열(分裂)이라 일컬어지는 '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이어졌다.
김효원(金孝元)은 서울의 동쪽에 있는 건천방(乾川坊)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동인(東人)이라 불렀고, 심의겸(沈義謙)은 서쪽의 정릉동(貞陵洞)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서인(西人)이라고 하였다. 동인(東人)들은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이산해(李山海), 이덕형(李德馨) 등 대체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이 많았고, 서인(西人)은 송강 정철(松江 鄭澈), 송익필, 윤두수 등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성혼(成渾)의 제자들이 많았다. 영남세력과 기호(畿湖) 세력의 대결이었다.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이 가미된 것이다.
동서분당 이후 '율곡 이이'가 동인과 서인의 조정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실패하고만다. 당쟁(黨爭)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율곡(栗谷)의 입장이 딱해졌다. 그는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당쟁(黨爭)이 당사자인 김효원(金孝元)을 경흥부사에, 심의겸(沈義謙)을 개성유수로 내보냈다. 동인(東人)이 우세했기 때문에 김효원에게 더 무거운 벌을 준 것이다.
동인(東人)의 불평이 없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김효원(金孝元)'을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심의겸(沈義謙)'은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재발령했다. 그러나 동인(東人)은 율곡(栗谷)조차 서인(西人)으로 몰아세웠다. 율곡은 당쟁을 조정하지 못한 채 관직에서 물러났다. '율곡'이 죽은 뒤로는 ' 동인천하(東人天下)'의 세상이 되었다.
정여립과 기축옥사 정여립과 기축옥사
임진왜란 任辰倭亂
선조(宣祖)시절...대내적으로 붕당(朋黨) 간의 권력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때 , 대외적으로는 우선 북쪽에서 니탕개(尼蕩介)를 중심으로 회령(會寧)지방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鏡原府)를 함락시키는 등 침략이 있었으나, 결국 조선은 두만강 건너에 있는 여진족의 근거지를 소탕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하고,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대륙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을 감지한 선조(宣祖)는 1590년에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허성(許筬 .. 허균의 형) 등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일본의 동태를 파악케 하였는데....
풍신수길
서인(西人)인 황윤길(黃允吉)은 멀지않아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는 반면 동인(東人)인 김성일(金誠一)은 침략의 조짐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보고하였다. 조정은 대부분 '김성일'의 의견을 믿었다. 그러나 이들 통신사와 함께 온 일본의 사신(使臣)이 " 1년 후에 조선의 길을 빌려서 명나라를 칠 것(가도입명.假道入明) " 이라고 통고하자,
조선은 이에 크게 놀라 뒤늦게 경상도, 전라도 연안(沿岸)의 여러 성(城)을 축조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는 등 준비를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592년 4월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상해 오자 선조(宣祖)는 보름만에 서울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하였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義州)까지 후퇴하였다.
도망가는 宣祖
1592년 4월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倭軍)이 계속 북상(北上)하자 조정에서는 그 대책을 논의한다. 여러 대책이 오가지만, 선조(宣祖)는 스스로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자는 파천론(播遷論)과 만주의 요동(遼東) 지역으로 망명(亡命)하자는 요동내부책(遙東內附策)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선조는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릎쓰고 행선지도 정하지 않은채 4월30일 밤, 비가 억수같이 퍼붇는 가운데 궁궐을 빠져나가는데,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왕의 어가(御駕)에 돌을 던지면서, 욕설을 퍼부었고, 궁궐에 난입하여 불을 질렀다. 이때 선조(宣祖)는 돌에 맞지는 않았지만, 유성룡(柳成龍) 등은 돌에 맞았다.
백성들의 분노(憤怒)와 봉기(蜂起)에 놀란 선조(宣祖)는 파천(파천)의 결정자가 바로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희생양을 만든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파천의 주청자(주청자)로 둔갑되었고, 유성룡(柳成龍)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면당해야 했다.
宣祖의 망명(亡命) 시도 및 실패
이윽고 평산까지 도망간 선조(宣祖)는 요동내부(遙東內附)의 의사를 비치며, 중국으로 사신을 몇차례나 파견한다. 요동내부(遼東內附)란 왕이 국가와 백성을 버리고 전란을 피하여 소수의 비빈(妃嬪)만을 데리고 요동으로 들어가 명(명)나라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망명론(亡命論)이었다. 그리고 사전 준비로 분조(分朝)를 만들어 광해군에게 그 책임을 맡긴다.
亡命 시도 실패
그러나 선조(宣祖)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주저하다가 드디어 거절한다. 처음에 명나라는 왜군(倭軍)의 신속한 파죽지세(破竹之勢)에 놀라, 왜군과 조선을 한편으로 생각하고, 선조(宣祖)의 망명(亡命) 신청을 왜군의 앞잡이 역할로 판단한 것이었다. 후에는 상황이 조금 바뀌어 명나라는 선조의 망명을 허락하되 빈 관아(官衙)에 유폐시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되고 선조(宣祖)는 망명(亡命)을 포기하는 것이다.
선조실록 25년 6월26일의 기록에 의하면 ... " 명(明)나라에 내부(內附)를 청한 자문(咨文)을 보니, 선조(宣祖)를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두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이 비로소 의주(義州)에 오래 머물 계획을 세웠다 " 즉, 유폐(유폐)시킨다는 뜻에 다름아닌 명(明)나라의 계획이었다.
宣祖의 쑈 ! 쑈 ! 쑈 !
명나라에의 망명(亡命)이 실패로 돌아가자 선조(宣祖)는 희한한 '쑈'를 벌인다, 이 와중에 왕 노릇을 그만 두겠다는 선위론(禪位論)이다. 그 것도 20여 회나... 자신이 전쟁터를 벗어나기 위한 망명에 장애(障碍)가 되었던 왕(왕)으로서의 직무를 벗어나려고 분조(分朝)를 만들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전황(戰況)이 조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이 선위론(禪位論)은 이제 실추(失墜)된 왕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의도적인 비열한 정치행위로 변질(變質)되어 간다.
명(明)나라의 원군(援軍)이 도착한 이후에는 이 것이 명(明)나라의 문책(問責)을 피하기 위한 방도로도 이용되기도 하였지만, 주로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한 완전한 쑈일 뿐이었다. 실제로 선조(宣祖)가 선위론(禪位論)을 밝힐 때마다 광해군(光海君)과 여러 신하들은 며칠씩 엎드린채 눈물을 흘리면서 명(命)을 거두어 달라고 목청을 높혀 외쳐대야 했다.
수능곽리충 誰能郭李忠
국사창황일 (國事蒼皇日) 나라 일이 다급할 때 / 수효곽리충 (誰效郭利忠) 누가 곽자의와 이광필의 충성을 바치리오 / 거빈존대계 (去빈存大計) 한양을 떠난 것은 큰 계획 이루려 함인데 / 회복장제공 (恢復仗諸公) 회복하는 일은 그대들에게 달려있네 / 통곡관산월 (痛哭關山月) 관산의 달 아래에서 통곡하고 / 상심압수풍 (傷心鴨水風)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슬퍼지네 / 조신금일후 (朝臣今日後) 신하들이여 ! 오늘 이후에 / 상가경서동 (尙可更西東) 그래도 다시 동(東)과 서(西)로 다투겠는가.
임진왜란 초기의 일방적인 열세가 어느 정도 만회되면서, '선조'는 이성계(李成桂)를 생각한다. 결국 이성계는 각종 전쟁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이루어 낸 것 아닌가...선조는 제2의 이성계가 출현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선조 .. 전쟁 영웅을 제거하다
김덕령(金德齡)의 제거
명나라에의 귀순을 재촉하던 선조 ..그도 임진왜란 초기에는 유성룡 등이 주도하던 개혁입법 (免賤法, 束伍法, 作米法 등)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개혁이나 국난 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의지(意志)는 아니었다. 본심은 따로 있고, 그저 반대만 안 했을 뿐...
망명(亡命)도 여의치 않게 되고, 明의 지원군도 도착하고, 전국의 의병(義兵)활동이나 이순신(李舜臣)에 의한 승리 등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선조(宣祖)의 생각은 달라지고, 엉뚱하게도 전쟁 영웅들의 제거 작업에 착수한다. 결국 자신의 비겁한 행동에 대한 컴플렉스가 반대로 작용한 것이었다.
그 첫번째 희생양은 육전(陸戰)의 영웅 김덕령(金德齡)이었다. 호남지방을 지켜낸 김덕령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은 대단하였다. 이 때 충청도지방에서 조선왕조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몽학 반란의 동기는 여하간에 그는 반란군을 모으면서 김덕령의 신망을 이용한다. 백성들도로 이에 호응, 이몽학은 기세를 얻어 서울로 쳐들어 오고 있었다.그러나 이몽학은 김덕령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세를 얻으려 했을 뿐 전연 관련이 없었다.
여론도 김덕령의 무혐의를 믿고 있었고, 증거도 없었지만 선조(宣祖)는 김덕령을 " 김덕령은 죽인 사람이 많은데. 그 죄로라도 죽어야 한다 "며 그를 친국(親鞫)하였고, 김덕령은 6차에 걸친 혹독한 형장(刑杖)을 당하고 죽었다.
묘를 이장할 때 나온 김덕령장군의 수의(壽衣)
"선조수정실록"은 ... "소문을 들은 남도(南道)의 군민(軍民)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이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김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勇力)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義兵)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 (선조 29년 8월1일) 고 기록하고 있다. 5,000명의 의병(義兵)을 거느렸던 김덕령(金德齡)의 죽음이 물의를 일으키자, 선조(宣祖)는 " 들으니 그의 군사는 원래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라고 폄하하였을 뿐이다.
이순신(李舜臣)의 제거
이순신(李舜臣)에 대한 선조(宣祖)의 시기(猜忌)와 제거(제거) 의도는 이미 김덕령의 체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선조실록. 29년 6월 26일 "에서 선조(宣祖)는 "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敵)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敵)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고 이순신을 비판하며, 남인(南人)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이순신이 천거된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서인(西人)세력들은 이러한 선조의 태도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이순신에 대한 제거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한반도의 남부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왜군(倭軍)은 명(明)과 강화협상(講和協商)을 진행한다. 이 때 일본의 풍신수길(풍신수길)은 강화조건으로 조선 남부 4도(南部 4道)를 떼어 달라는 것과 명나라 공주를 후비(后妃)로 달라는 납녀(納女) 등을 요구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1597년 일본은 다시 대군을 보내어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킨다. 정유재란의 승패가 이순신의 제거에 달려 있음을 파악한 왜군은 간자(間者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동원하여 조선 조정에 역정보(逆情報)를 흘린다. 그러나 유인책(誘引策)으로 판단한 이순신은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고, 이를 선조는 이순신 제거의 기회로 삼았다.
선조(宣祖)는 " 이순신을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武臣)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을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면서 이순신을 압송하여 형문(刑問)하고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삼도수군통제사를 대신하게 하였다. 동시에 선조(宣祖)는 승지 김홍미(金弘微)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순신이무군지죄 (無君之罪 ..역적죄) .. 부국지죄(負國之罪 ..국가 반역죄) ..함인지죄 (陷人之罪 ..원균을 모함한 죄)를 저질렀다면서 " 이렇게 많은 죄가 있으면 용서할 수 없는 법이니 마땅히 율(律)에 따라 죽여야 할 것이다 " (선조실록 30년 3월 13일)
27일동안 혹독한 고문(拷問)을 받던 이순신은 유성룡 등의 구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白衣從軍)에 처해졌다. 원균(元均)은 대패(大敗)하고 그도 전사(戰死)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등용하지만 수군(水軍)을 해체하고 이순신을 육군(陸軍)으로 발령하는 것이다.
이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장계를 올린다. " 금신전선상유십이, 출사력거전, 칙가위야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 즉 신(臣)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있으니 사력을 다하여 싸우면 적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
드디어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戰死)한다. 이 날은 바로 그를 천거하고 도와준 유성룡(柳成龍)이 파직(罷職)된 날이기도 하다.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은 " 난중잡록(亂中雜錄) "에서 노량해전(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하였고, 적(敵)은 선미(船尾)에 엎드려 일제히 공(公)을 향하여 총을 쏘았다 "고 적어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으로 나아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李舜臣)은 유성룡(柳成龍)의 파직(罷職)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틀림없다. 이덕형(李德馨)이 "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고 선조(宣祖)에 보고하자 선조는 " 수병(水兵)이 대첩(大牒)을 거두었다는 설(說)은 과장(誇張)인 듯하다 "고 대꾸한다.
유성룡(柳成龍)의 제거
선조 31년 (1598),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고,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이 들어서면서 조선(朝鮮)의 출병군(出兵軍)을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이제 종전(終戰)이 기정사실화 되자, 선조(宣祖)는 다시 유성룡(柳成龍)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서인(西人)들의 유성룡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는데 ...
서인(西人)의 남이공(南以恭)은 " 유성룡(柳成龍)이 속오군(束伍軍), 작미법(作米法) 을 만들어...천민(천민)들을 발탁하였다 "고 비난하였다. 양반의 특권을 크게 제한하였던 유성룡의 ' 전시개혁입법(戰時 改革立法) ' 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선조(宣祖)는 몇번의 형식적인 반대를 표하다가 드디어 유성룡을 파직(罷職)한다. 이 날은 바로 이순신(李舜臣)이 노량해전(露梁海戰)을 승리하며 전사(戰死)한 날이다. 이로써 조선은 그나마 위기(危氣)를 기회(機會)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버리고 다시 전쟁 전(前)의 상태로 회귀하게 되는것이다.
임진왜란의 승리가 明나라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宣祖.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7년전쟁은 끝났다. 당연히 전공자 포상이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선조는 명나라 유정(劉艇)에게 "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大人 .. 유정)의 공덕입니다...선조실록32년) "라고 하면서 임진왜란의 극복이 明나라 덕분이라고 주장하면서, 논공행상 자체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재조지은 (再造之恩)..거의 망한 것을 구원하여 준 은혜
종전(終戰) 후 2년이 지난 뒤에야 우여곡절 끝에 겨우 공신(功臣)이 책봉되었는데.. 문신(文臣)들인 호성(扈聖)공신이 86명인데 비하여, 왜군과 직접 싸운 무신(武臣)들인 선무(宣武)공신은 18명에 불과하였다. 호성공신(扈聖功臣) 중에서는 내시(內侍)가 24명이었고, 선조(宣祖)의 말을 관리하던 이마(理馬)가 6명이나 되었다. 호성공신은 즉 선조(宣祖)를 따라 피난 간 신하들이다.
선무 1등인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栗),원균(元均) 등은 모두 사망한 장군들이었는데, 당초 2등으로 책정되었던 원균(元均)은 선조(宣祖)의 명(明)으로 1등으로 올라갔다. 선조(宣祖)는 유성룡의 정적(政敵)이었던 서인, 북인(西人, 北人)과 손을 잡고 유성룡의 전시(戰時) 개혁입법(改革立法)을 모두 무력화(無力化)시켰다.
임진왜란의 의미와 사회적 변화
임진왜란은 큰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였다. 백성들은 " 특권만 있고 의무(義務)는 없었던 사대부 지배체제에 파산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선조 26년(1593) 영의정으로 복귀한 유성룡이 노비(奴卑)들도 군공(軍功)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면천법(免賤法)과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는 작미법(作米法) 그리고 양반도 노비들과 함께 군역에 편입시킨 속오법(束伍法)제도 같은 개혁입법들을 강행하면서 회생(回生)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는 조선의 기회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 선조(宣祖)는 모든 개혁입법(改革立法)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구체제(舊體制)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후는 광해군(光海君) 이후의 시대이었다. 이리하여 임진왜란은 그저 조선에 피해만 준, 권력층과 백성들과의 갈등만 부추긴채 정조(正祖)의 개혁을 기다린다.
후궁 출신의 서자(庶子)로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 명민하면서도 학문에도 조예가 있었던 선조는 1608년에 파란만장한 치세(治世)를 마감하였다. 선조의 치세기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이 있었던 시기이었고, 정치적으로는 훈구(勳舊) 세력이 몰락하고, 사림(士林)이라는 신진세력이 등장하던 시기이었다.
국가를 제대로 재건하여다면, 선조는 위기(危機)를 기회(機會)로 극복한 위대한 군주(君主)로 남았을 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도 거란(契丹)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 현종(顯宗)은 위기를 잘 극복한 왕으로 기억되고 이다. 반면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戰亂) 뒤에도 제대로 난국(難局)을 수습하지 못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선조국문교서 (宣祖國文敎書) ..보물 제951호
이 문서는 선조(宣祖) 26년 (1593년), 임진왜란으로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피신하였을 때에 백성들에게 내리는 한글로 쓰여진 교서(敎書)이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왜군(倭軍)의 포로가 되어 그들에게 협조하는 자가 많았다. 그 때문에 '선조'는 일반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한글로 쓴 교서를 내려 백성들을 회유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그 내용은 어쩔 수 없이 왜군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罪)를 묻지 않겠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 오거나,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백성을 많이 데리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천민(賤民), 양민(良民)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릴 것을 약속한 내용들이 실려있다.
이 교서는 선조(宣祖)가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기 한달 전에 내려진 것인데, 당시 김해성(金海城)을 지키고 있던 장수 권탁 (權晫. 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敵陣)에 몰래 들어가 왜군 수 십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 10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 문서는 '권탁'의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宣祖의 죽음 그리고 선조 독살설(毒殺說)
선조(宣祖)는 41년의 재위기간을 마치고 1608년 죽는다. 이 때만 하여도 '선조'가 독살(毒殺) 당하였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끝까지 세자(世子)로 만들려는 선조(宣祖)와 인목대비(仁穆大妃) ...
건강하던 선조(宣祖)가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는데..광해군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하여 축출되며 인조(仁祖)가 즉위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아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원수를 갚는다고, 광해군(光海君)이 아버지인 선조(宣祖)를 죽였다고 말한다. 모두 반정(反正)을 정당화하기 위한 서인(西人)들의 일방적인 얘기이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기록에 의하면 ... 식탐(食貪)이 심한 선조(宣祖)는 동궁(東宮)에서 가져온 찰밥을 게걸스럽게 먹다가 목이 막혀 죽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