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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王 朝 世 家
金(금) AD, 1113/1115∼AD, 1234 위치: 만주 種族(종족): 여진 성 完顔(완안)
代數 | 在位期間 | 位 | 諱 | 關係 | 首都 | 現地名 |
제 1대 | AD, 1115∼AD, 1123 | 太祖(태조) | 阿骨打(아골타) | 會寧(회령) | 黑龍江省 | |
제 2대 | AD, 1123∼AD, 1135 | 太宗(태종) | 吳乞買(오걸매) | 태조의 동생 | 흑룡강성 | |
제 3대 | AD, 1135∼AD, 1150 | 熙宗(희종) | 合刺(합라) | 태조의 손자 | ||
제 4대 | AD, 1150∼AD, 1161 | 海陵王(해릉왕) | 迪古乃(적고내) | 태조의 손자 | ||
제 5대 | AD, 1161∼AD, 1189 | 世宗(세종) | 烏祿(오록) | 태조의 손자 | ||
제 6대 | AD, 1189∼AD, 1208 | 章宗(장종) | 麻達葛(마달갈) | 세종의 손자 | ||
제 7대 | AD, 1206∼AD, 1213 | 衛紹王(위소왕) | 果繩(과승) | 세조의 7남 | ||
제 8대 | AD, 1213∼AD, 1224 | 宣宗(선종) | 吾睹補(오도보) | 장종의 이복형 | ||
제 9대 | AD, 1224∼AD, 1234 | 哀宗(애종) | 寧甲速(영갑속) | 선종의 3남 | ||
제 10대 | AD, 1234∼AD, 1234 | 末帝(말제) | 呼敦(호돈) | 애종의 아들 |
제 1대 太祖 天命帝(태조 천명제 AD, 1068∼AD, 1123)
完顔劾里鉢(완안핵리발)의 차남으로 형인 完顔烏雅束(완안오아속)이 AD, 1113년에 죽자 완안부 수 장이 되었다. ”요사“ 에 의하면 아골타는 대를 잇기 전인 AD 1112년, 요나라 황제가 관례에 따라 여진의 추장들을 초청해 베푼 연회 석상에서 정면으로 황제의 명을 거역한 적이 있다. 자ᅟᅵᆫ이 추장 에 오른 후에는 국상을 요나라에 통보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요나라의 문책이 있자 반기를 들었다.
아골타는 AD, 1114년 요나라를 상대로 선전포고한 후 여러치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고, AD, 1114년부터 拉林河(납림하)와 出河店(출하점)에서 요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다급해진 요나라는 고려에 아골타가 이끄는 여진군에 대한 협공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완안아골타는 연속으로 요나라군을 영강주에서 격파했고, 또 뒤이어 여러 주현을 점령했으며, 급기 야는 開原(개원), 農安(농안)지방의 발해인을 회유하여 AD, 1115년 황제로 즉위하였고 국호를 大金 (대금), 연호를 수국이라 했다.
이렇게 여진족은 스스로 금나라를 세웠고, 황제가 된 아골타는 요동 지역의 黃龍府황용부)를 함락시 켰다. 이에 요나라는 다시 한번 고려에 원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고여 조정은 요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원군을 보내자는 출병론자와 김부식 등 다른 나라들의 문제에 끼어들어 분쟁에 휘말리는 것은 나라의 앞날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일이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출병 불가론자 간의 이 견이 대립했지만 결국은 출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같은 시기 아골타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금나 라가 곧 요나라를 정복할 것임을 알렸다.
이에 고려 조정은 요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있다고 판단하여 요의 연호를 쓰지 않고 60갑자를 사용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요나라의 황제인 天祖帝 耶律延禧(천조제 야율연희)는 70만의 대군으로 금 나라를 공격했지만 대패를 당했다. 한편 송나라는 신세력으로 급부상중이던 금나라를 활용해 요나 라에 빼앗긴 연안 16주의 회수를 계획했다. 송 휘종은 AD, 1116년 고려의 사신 이자량을 특별히 대우하여 협조를 부탁하였지만 이자량의 비협조로 직접 금나라에 협공을 제의하였다.
아골타도 이에 응하면서 송나라와 금나라의 군대는 AD, 1121년 요나라를 협공한다. 금나라군은 요 나라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해 AD, 1120년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 임황부를 또한 1121년 말에는 중경 대정부를 함락했다. 한편 강남에서 일어난 방랍의 난으로 인해 출병하지 못했던 그해에 겨우 북방에 출병하여 요나라의 천조제가 있는 연경을 공격했다. 송나라 군대는 요나라 군대에게 연 전연패를 당하고, 승리할 수 없게 되자 지휘관 동관은 금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금나라는 출병 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이 결과 연운 16주 가운데 연경 이남의 6주는 송나라에 할양되지만, 금나라 군은 연운 이북을 약탈하고 연운 16주의 백성들도 금나라로 이주시켰다.
금나라는 출병하는 대가로 군량미 20만석, 은자 20만냥, 비단 30만 필 등을 북송에 요구했고, 북송도 조건을 수락했다. 이후 완안아골타는 요나라의 중경과 연경을 연달아 점령하고 요나라 황제 천조제는 도망가기에 이르러 요나라를 실질적으로 멸망시켰다. 그러나 완안아골타는 요나라에 최후의 일격을 가 하고 돌아오는 길에 AD,1123년 사망하고, 동생 완안오골매가 금 태종으로 즉위한다.
제 2대 태종 완안성(AD, 1075∼AD, 1135)
중국식으로는 完顔晟(완안성)이며, 형인 금 태조 완안아골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AD 1123년 11월 북요를 침공해 무너뜨렸으며, 북송과 동맹을 맺고 협공을 통해 AD, 1125년 거란의 마지막 황제인 천 조제를 사로잡고 끝내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송나라가 금에 약속한 세폐를 제공하지 않고 남경에 서 일하던 거란족 관리를 재등용하는 등 금나라와의 제반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결국 송나라를 공격했 다. 금나라의 군대가 수도 카이펑(개봉)까지 육박하자 송나라는 금 5백만 냥과 은 5천 만냥, 우마 1만 필 등을 제공하고, 하북과 태원의 요충지 3진 33주 할양, 송나라 황제는 금나라 황제를 숙부라고 부른 다는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해 일단 화해했다. 송나라는 이 굴욕적인 관계와 감당할 수 없는 세폐 제공 을 반전시키기 위해 다시 금나라 치하에 있는 거란족 장수들을 부추키는 한편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협 공을 제의했다. 하지만 고려는 송의 요청을 거부했다.
한편 금 태종은 송나라가 약속 이행을 늦추고, 반격을 개시하려는 것을 알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역으 로 카이펑을 함락시켰다. 송나라는 황하 이북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금나라에 화의를 청했으나 이번에는 금나라가 듣지 않았다. 금나라는 AD, 1127년 재물을 모두약탈하고 제위를 양위한 휘종과 이어 즉위한 흠종을 비롯한 조씨 황족들과 진회 등을 포로로 끌고 가버렸다.(정강의 변), 이로써 북송은 9대 168년 만에 멸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금나라 군대는 장강까지 진격하지만 더 이상 남진하지 못했다. 그 남쪽에는 송나라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금나라에 잡혀가지 않는 송 휘종의 아들 강왕(송 고종)이 남경 응천부에서 황제로 즉위해 남송 으로 명맥이 이어진다. 금 태종은 점령지에 초나라라는 괴뢰국을 세우려고 했지만 진회와의 협상으로 중단 한다. 한편 진회는 약속대로 내려가 악비 등의 주전론자를 죽이는 등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이로서 진회는 후일 민족 반역자(한간)로 욕을 먹게된다.
AD, 1125년 금 태종은 고려에서 온 국서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국서의 서식이 表(표)가 아니고 또 고려왕이 臣(신)을 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고려에 대해 요나라를 섬겼던 것처럼 금나라를 섬 기라고 해 칭신사대의 관계를 요구했는데, 이것을 기정 사실화하려는 것이었다. 고려는 이에 대해 한동 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 AD, 1126년 조정 회의에서 금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 를 협의했다. 대다수는 여진족이 오랑캐이므로 상대할 수 없다고 했으나 이자겸과 척준경 등이 “금나라 는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고려와 요나라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 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 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했고” 인종은 이 주장을 채택했다. 이어 4월 인종은 정용문 등을 금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이라 해 사대의 예 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자신의 장남에게 재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태종의 권력 기반은 아직 완전하지 못한 상태 였고 부자 세습은 여진족 장로들에게 맹렬한 반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의 형의 적손인 금 희 종에게 양위한다. AD 1135년, 금 태종은 병으로 명덕궁에서 6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시신은 和陵(화 릉)에 매장했으나 해릉양왕에 의해 무덤이 大房山(대방산)으로 옮겨졌다. 이를 茶陵(차릉)이라 한다. 금 태종의 자손은 매우 많았으나, 해릉양왕이 AD 1150년, 모두 몰살시킨 탓에 후계가 끊기고 말았다.
제 3대 희종 단(AD, 1119∼AD, 1150)
금 태조의 적자였던 宗峻(종준)의 장자며, 본처는 여진 귀족 裵滿忽達(배만홀달)의 딸 裵滿氏(배만씨). 아들은 배만씨가 낳은 태자 濟安(제안). 어머니는 여진 귀족의 딸 포찰씨이다.
금 태종이 자기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시도하다 여진족 부족장들의 반발로 실패하다 AD, 1232년 에 황태자에 책봉되어 AD 1135년에 제 3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희종은 여진족 부족장들의 지원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즉위 후부터는 부족장들을 탄압하고 황제 독재의 확립을 통한 중국풍의 관제를 도입하였으며 과거 제도를 처음 시행했다. 희종 자신도 금나라 황제들 중 최초로 중국식 면류관과 곤룡 포를 착용하였다. 또 중앙집권화로 중국 북부지배를 강화시켰다. 단 금나라의 중국화는 희종 때부터 시 작이었지만 본격적인 중국화는 해릉양왕 때부터였다.
이 시기에 남송의 재상 진회와 화평을 맺었는데, 그 결과 금나라는 매년 25만 양의 은과 25만 필의 비 단을 조공으로 받았고, 남송의 황제가 금의 황제한테 “신하의 예를 취했다. 여기까지는 잘 통치하던 황 제라고 하지만 아들들이 줄줄이 요절하고 공신인 完顔宗翰(완안종한)마저 명을 달리하자 제어력을 잃은 채 나태해지면서 슬에 빠져 산채 여진족 완안씨 황족들을 숙청하는 등 공포 정치를 폈다.
끝내 AD 1149년 사촌 동생인 해릉양왕이 반란을 일으켰다. 해른왕은 호위 군관을 매수 한뒤 일부 귀족 대신들과 짜고 금 휘종의 침실에 뛰어들어 칼로 휘종을 암살해버렸는데 이때 불과 31세의 젊은 나이였 으며, 이후 東昏王(동혼왕: 동쪽의 혼미한 임금)이란 칭호를 받았다. 참고로 혼이라는 이름은 선대 황제 인 금 태종이 송 휘종에게 준 이름(혼덕공)이었다. 뒷날 해릉왕이 부장들의 반란으로 처참히 목슴을 잃 고 금 세종 완안옹이 즉위하자 다시 황제로 추증 받아 희종의 묘호를 얻었다.
제 4대 해릉양왕 량(AD, 1122∼AD, 1161)
아버지는 금 태조 완안아골타의 서장자인 遼王 完顔宗幹(요왕 완안종간)이며, 어머니는 大氏(대씨)고 황 후는 여진 귀족의 徒單斜也(도단사야)의 딸로 徒單皇后(도단황후)이다.
희종은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국정에 임하면서 꽤 준수한 통치력을 버여주었지만 재위 10년이 넘어가면서 차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며 술주정을 부리고, 대신들을 때리거나 욕을 했으며, 무고한 대신들을 함부 로 죽이는 등 폭정을 벌리기 시작했다. 이런 그에게 실망한 신하들은 해릉양왕과 함께 역모를 꾀하게 이 른다. 당시 해릉양왕은 좌승상인 당괄변과 우승상 병덕과 함께 희종을 폐위시키기로 공모했는데 누가 황 제가 될것인가를 놓고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왔지만 결국은 본인이 자청하였다.
그렇게 해릉양왕을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은 금 희종의 호위 군관을 매수한 후, 일부 귀족들 과 짜고 황제의 침실에 뛰어들어 희조을 암살하고 해릉양왕은 제위에 올랐다. 쿠데타 성공 이후, 제위에 오른 해릉양왕이 희종의 일족을 모두 죽였기에 희종은 후사가 끊겼다. 또한 취임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국가의 대사는 모두 짐이 지배한다.
. 군사를 이끌고 남송을 공격해서 토벌하고 남송 황제를 붙잡아 죄를 묻는다.
. 천하 절색의 미녀를 손에 넣어 모두 부인으로 삼는다.
해릉양왕이 재위 당시에 벌인 일은 가희 패륜광의 소행으로 할만한 것으로, 여성편력은 호색이나 엽색 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 자신의 숙모. 처제. 조카딸을 강간했고 게다가 그것을 위해 그들의 남편을 협박하거나 살해했다.
. 거란족 출신인 한 유부녀의 전 남편 사이의 딸 둘 다 후궁으로 삼았다.
. 자신의 처제를 강간하고 신하의 아내와 그 여동생을 범했다.
AD 1150년, 금 태종의 모든 자손을 멸했으며, 또한 AD 1153년, 원래 수도인 上京會寧府(상경회령부, 금 하얼빈) 를 중국과 가까운 中都 大興府(중도 대흥부, 금 베이징)로 천도하였다. 이번에는 남송을 침 략하려고 했다. 당시 금과 남송은 화평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남송은 이전에 북방 민족들에게 당한 정강 의 변이라는 매우 아픈 역사가 있어 강남으로 후퇴한 뒤에도 늘 전선을 만들고 성곽을 고치는 등 경계 를 늦추지 않았다. 금나라의 신하들도 이것을 알았기에 여러 신하들이 남송 침공을 반대했지만 해릉왕 은 그들의 목을 베며 여론을 탄압했다.
AD 1160년, 남송 침공을 반대하는 대신들을 대거 처형했으며, 심지어 이 과정에서 태후가 전쟁을 벌리 지 말라고 간언하자 그 태후까지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게다가 죽였으면 그냥 조용히 묻어주기라 도 하면 좋을탠데 어머니의 시신을 불태운 뒤에 뼈를 물에다가 뿌려버렸다.
그리하여 해릉왕은 남송 정벌을 위해서 무려 50여 만명의 장정을 강제로 징집하거나 배를 건조하는 일 에 동원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금사에 따르면 금나라의 국고는 이미 파탄이 났고, 가족이 서로 떨어지 거나 뿔뿔이 흩어졌으며 전쟁에 나가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를 원망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진동 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AD 1161년, 어느날 양주에 있는 황제의 막사로 화살이 날아들었는데 해 릉왕이 깜짝 놀라 화살을 보니 금나라 군사가 쓰는 화살이었다. 즉 진중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게 부장이 일으킨 반란에 해릉왕이 도주하다가 붙잡혀 부장에게 목숨을 잃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 다.
제 5대 세종 완안옹(AD, 1123∼AD, 1189)
아버지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 예종 訛里朶(와리타)며, 어머니는 雛訛只(추와지)의 딸 정의 황후(중국성은 이씨)고 황후는 여진 烏林荅部(오림답부)의 수장인 石土黑(석토흑)의 딸 烏林荅氏(오림다부, 소덕황후)이 다. 전임 황제였던 해릉양왕은 금나라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폭정이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거기에 무 리하게 남송에 대한 침입을 계속하였다. 번번히 실패하였는데 또다시 남송 침입을 해릉왕이 계획하다가 남정 중에 자신의 부장에게 살해되었다. 이 시기 동경 요양부에 있었던 황족 완안옹은 해릉왕에 반항하 는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중도 대흥부에 입성하였다.
원래 해릉왕은 세조을 미워했고, 미녀였던 세종의 아내 오림답씨를 빼앗은 적이 있었다. 오림답씨는 남편 의 목슴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갔다가 결국 자결하여 자신의 의지를 보였고 세종은 자신의 보물을 해릉 왕에게 바치며 연명했다. 그러다가 반란군에 의해 옹립되어 해릉왕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 세종은 오림 답씨를 황후로 추존했지만 계속 그리워했고 평생 후궁들 중에서 황후를 따로 세우지 않았다.
이후 그는 AD, 1163년 남송과 평화 협정을 맺었고, 본격적으로 내치에 치중했다. 우선 AD, 1164년부터 여진 문자로 경사를 번역하는가 하면, 영토와 국방력뿐만 아니라 문화에도 힘을 쏟아서 금나라 최고의 절정기를 만들었다. 또한 옛 수도 회령부를 상경회령부로 고쳐 금의 5경을 설치하고 여진족의 성씨를 漢 譯(한역)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 요양에는 白塔(백탑)을 건설하였으며, 재정도 탄탄해져 AD 1177년에는 하북과 산동의 조세를 면제하기도 했다. 또항 AD, 1187년 한족 복장의 착용을 금지하였다.
세도가의 대토지 소유를 금지시키고, 기존 가지고 있던 토지를 여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빈부 격차가 벌어진 맹안, 모극들에게 부과되는 과세를 공평하게 조정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재위 마지막 해인 AD 1189년,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양대전선이 펼쳐지면서 나라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AD, 1189년 1월에 사망했으며, 적손 완안경이 뒤를 이어 장종이 되었다. 원래 세종의 황태자이자 장남 이었던 완안윤공은 AD, 1185년에 사망했는데 장종에 의해 현종으로 추존되었다.
제 6대 장종 경(AD, 1168∼AD, 1208)
아버지는 세종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完顔允恭(완안윤공)으로 선종은 장종의 서형에 해당된다. 아버지는 세종의 황태자였으나 요절하였기 때문에 손자였던 그가 조부의 지명을 받아 황태손이 되었가 AD 1189 년, 세종이 사망하자 뒤를 이었다.
징기즈 칸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옹 칸과 함께 장종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적이 있다. 이에 장종은 용 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금나라가 북쪽의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 습을 보고 금나라는 약체와 되었다고 본 남송의 권신 한탁주는 남송의 비원인 금나라 타도를 성공시킨다 면 권력을 확고부동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실제 금나라는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남송군의 약체화가 현전하였던 것이다. AD 1207년, 금나라는 조기 화평을 희 망하고,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하자 이것을 들은 예부시랑 사미원에 의해 한탁주는 살해 되었고 그의 머 리는 소금에 절여서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한탁주의 머리는 수도 중도 대흥부에 걸 렸고 장종은 종묘에 나가 다시 한 번 승리를 조상에게 고했다.
원래 금나라 완안씨 황실에는 황후로 맞이 할 수 잇는 가문들이 정해져 있었고, 이 가문들 이외 출신 여 성들은 황후가 될 수 없었다. 徒單(도단), 唐括(당괄), 浦察(포찰), 拏懶(나나), 僕散(복산), 紇石烈(흘석열), 烏林答(오림답), 烏古論(오고론), 裵滿(배만)씨 등 여진 귀족 가문 여성들이 황후가 되었는데 장종은 한족 인 李師兒(이사아)를 사랑했다. 이에 마침 황후가일찍 죽어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이사아를 항후로 책봉코저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 해다. 비록 이사아는 황후가 되지 못했지만 장종의 사랑 을 바탕으로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사아의 가족들 역시 그 덕에 벼락 출세를 했고 큰 권세 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사아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뇌물을 바쳤다.
장종에게는 6명의 황자가 있었지만 모두 요절하여 태자가 없었고 사후 숙부 위소왕이 뒤를 이었다.
제 7대 위소왕 영제(AD, ?∼AD, 1213)
초명은 允濟(윤제)였으나, 즉위한 뒤는 永濟(영제)로 개명했다. 금 세종의 7남으로 장종과 선종의 숙부이 다. 정종이 아들없이 사망하자 서형 完顔吾睹補(완안오도보)가 있었지만 서자 출신이라 황제가 되지 못했 고, 대신 위왕 완안윤제가 황숙의 자격으로 황제가 되었다. 사실은 장종의 후궁인 승어 가씨의 뱃속에 유 복자가 있었으나 위소왕이 장종의 원비였던 이사아를 싫어해서 가씨가 이사아의 꼬드김에 넘어가 장종의 자식이 아닌데도 장종의 자식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가씨와 이사아가 피살되어 그대로 복중에서 죽었 다.
새로 즉위한 위소왕은 장신의 미남으로 검소한 인물이었지만 우유부단하고 어리석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즉위 후 징기키 칸에게 사신을 보내 군신의 예를 갖추기를 요구하였으나 징기즈 칸은 위소왕의 명 령을 거부했다. 투르크계 옹구트인들이 몽골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나라를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AD 1211년, 옹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나라를 정복하려는 징기즈 칸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나라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 격하였다. AD 1212년,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야율요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AD, 1213년 몽골이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다. 이 후 남으로 기수를 돌 려 수도 중도 대흥부가 한차례 위험에 빠진적도 있었다. 징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 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 분란이 일어나 위소왕이 승상 紇石烈胡沙虎(흘석열호사호)에게 암살 당했고, 호사호는 위소왕의 조카 오도보를 앉히니 그가 선종이었다. 공성전에 자신이 없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였으며 대신 선조인 몽골의 칸 암바가이의 유물과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철수 하였다.
이 후 선종이 흘석열호사호를 처형하고 자신이 직접 권력을 움켜쥐었다. 황후는 徒單氏(도단씨)였으며 자 식으로는 황태자 양왕 종각을 포함한 네 아들과 袁氏(원씨) 소생의 기국공주가 있었다. 기국공주는 징기 즈 칸의 첩이 되었으며, 그 밖에 위소왕의 형제로는 동복형 정왕 윤도, 동복 동생 윤덕 등이 있었다.
제 8대 선종 순(AD, 1163∼AD, 1224)
남금의 초대 황제이며, 宣孝太子 顯宗 允恭(선효태자 현종 윤공)의 장남으로 장종의 이복 형이자 위소왕 의 조카였다. 장종의 형이었지만 서자였기 때문에 원래는 황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의 침공으로 인해 황폐화하고, 수도인 중도 대흥부가 포위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 분란이 일어나 위소왕이 승상 흘석렬호사호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호사호는 위소왕의 조 카인 50살의 오도보를 제위에 옹립했다. 이 때 몽골은 금으로부터 암바카이 칸의 유물과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
선종은 황제에 오른 직후, 호사호를 숙청하여 그의 목숨을 빼앗은 뒤 AD, 1245년 4월 수도를 중도 대흥 부에서 원래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으로 천도했다. 이 사안을 놓고 조정에서 큰 소란이 있었지만 선종 은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옛 수도인 중흥대흥부에는 황태자 완안수서를 남겨서 그 곳을 지키도록 했다.
선종이 천도를 강행하자 칭기즈 칸은 그것을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다시 전쟁을 재개하여 중도대흥부를 함락시킨 뒤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칭기즈 칸은 중국 전선을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겼는데 금나라의 영토는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몽골에 의해 하북의 군현이 차례차례 함락되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구나 변경에 있는 여러 민족 들이 빈번하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금나라는 와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다행히 몽골이 중앙 아시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나라는 잠시나마 중도 대흥부를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할 수 있었 다.
상황이 이런데도 선종과 완안씨 황족들, 귀족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선종은 늦은 나이에 즉위하여 오랜 기간을 재위하지 못했고 간신히 금나라가 생명 연장을 하면서 망국의 군주가 되진 않았 다.
제 9대 애종 守緖(수서) AD, 1198∼AD, 1234)
금 선종의 3남으로 제위와 거리가 멀었으나 황태자와 황태손이 덩달아 요절해 버리자 셋째인 완안수서가 황태자로 책봉된 후 결국 제위에 올랐다. 둘째 황자인 완안수순이 제위를 계승하길 원했던 모친 방비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를 알아차린 선종의 황후 왕씨는 선종이 승하 한 후 방비에게 선종이 볼 일 을 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대신들을 모아놓고 수서를 후계자로 공표했다. 미리 도착해 있던 안완수 순은 그대로 연금 당해 버렸다. 완안수순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선종의 황후인 인경황후 왕씨가 애 종을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애종은 즉위직후부터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군재를 등용하는 등 개혁 정책 을 시행했다.
AD 1232년, 몽골이 금나라를 상대로 다시금 전면전을 개시했는데 이 때 몽골군은 남송과협의해서 남송 의 영토를 통과하는 방식으로 금나라의 수도인 카이펑(개봉)의 취약 지역인 남쪽 방면으로 진군하여 북쪽 에서 황하를 건넌 군대와 함께 카이펑을 포위했다. 금군은 震天雷(진천뢰)라는 대포를 앞세워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끝내 못 버티고 AD 1233년 5월, 수도 카이펑이 함락당했다. 이 때 애종은 카이펑이 함락되 기 전 탈출하여 하남성 남부의 蔡州(채주)로 도주했다. 카이펑에 남은 관원들 사이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서면 원수 崔立(최립)이 쿠데타를 일으켜 태후와 비빈, 황족들을 포로로 잡고 몽골에 항복해버렸다. 태후 와 비빈들은 몽골로 압송되고 완난수순을 비롯한 남자 황족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애종의 피난길에서는 포찰관노가 난을 일으켜 관원 300명이 죽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몽골은 AD 1232년 12월, 양양에 주둔한 남송의 경호제치사 史嵩之(사숭지)에게 사신을 보내 금나라를 공격할 때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금나라의 채주를 남송과 연합하여 공격하자는 것, 또 남송에게 군량을 달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사숭지는 이 제의를 수도 임안에 즉시 보고하였는데 남송 조정에서는 그 수 락 여부를 둘러싸고 쟁론을 벌려, AD 1233년 6월 사자를 보내 제의의 수락을 통보하였다.
금나라의 사자는 이미 남송이 몽골의 제의를 수락 한 뒤인 AD 1233년 8월에야 뒤늦게 찾아왔다. 몽골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이미 몽골과의 약속대로 이 해 10월 명장 맹공을 파견하여 타차르가 이끈는 몽골의 금나라 공격을 지원했다. 맹공은 군대 3만 명을 이끌고 채주에 도착했다. 원래 애종은 채주를 거쳐 촉으 로 달아나려 했는데 애종을 구하기 위해 채주로 오던 군대가 남송에게 전멸당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채주 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몽골과 남송 연합군이 채주를 몇 달간 포위하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 다. 포위된 상황에서 금의 멸망을 지감한 애종의 탄식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에 애종은 절망한 나머지 마지막 수단으로 궁중 대장 완안승린에게 “짐은 몸이 둔해 말을 타고 잘 달 리지 못하네. 그대는 몸이 날래고 전략을 잘 아니 도망쳐 국운이 끓기지만 않게 하면 되네. 이것이 짐이 소원이네.” 라고 말한뒤 그에게 탈출을 지시했다. 몽골군 대장 타차르가 서성을 함낙시키고 남송군 대장 맹공이 남문을 함락시키자, 애종은 결국 스스로 유란현에서 목매달아 자살했다. 그의 시신은 신하들이 장 례를 한 다음 묻으려고 했으나, 맹공이과 타차르가 들이닥쳐 시신을 빼앗았다. 거기다 완안승린은 도망치 다 몽골에 걸려 재위 하루만에 잡혀 참수를 당하고 장대에 효수를 당했으며, 채주마저 연합군에 떨어져 금나라는 건국 120년 만에 멸망했다. 애종의 시신은 몽골군이 불태우고 분쇄했으며 두 개골은 잘라 개선 식 때 맹공을 거쳐 남송으로 보냈다. 이종은 이 두 개골을 태묘에 바쳐 송 휘종, 송 흠종에게 원수를 갚 았다고 알리는데 썼다. 이는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제 10대 말제 승린(AD, ?∼AD, 1234)
이 황제의 재위 기간은 불과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아침에 즉위해서 그날 저녘에 죽었다. 애종은 몽골 제국군의 공격을 피해서 菜州(채주, 금 하남성 주마점시 여남현)로 달아났지만 안 그래도 몸이 약한데다 피난 생활로 지치기까지 해서 더는 못 도망쳤다. AD 1234년 2월, 애종은 자신에 비해 뜀박질을 잘하는 황족이자 호위 대장인 완안승린에게 양위한다. 양위한 애종은 안심했지만 몽골군과 남송군이 밀고 들어 오자 목 매달아 자살했다.
황제에 오른 완안승린은 눈물을 머금고 채주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 날 오후 정체가 드러나 몽골군 에게 붙잡혔고 그 날 저녘 살해당했다. 애종은 사후 성을 함락한 몽골군이 탈취하여 불태우고 분쇄했으 며 머리는 잘라 남송으로 보냈다.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이종은 이 머리를 태묘에 바쳐 원 수를 갚았음을 알리고, 장대에 효수했다.
사료 출처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과 인터넷